용사 같으신 하나님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시78:65-66)
녹취자: 김유진
여기서 ‘그때에’ 라는 것은 바로 앞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칼과 애굽 때문에 혼인의 노래들조차 사라진 바로 그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버리고 하나님이 진노하여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신 때, 바로 그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던 바로 그 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용사처럼 일어나신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군사, 용사, 전쟁의 능하신 이’로 자주 비유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늘 전쟁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용사, 싸우는 이’ 전쟁에 능하신 이라는 표현은 아주 가슴에 다가오는 실감나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얼마나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전략으로 얼마나 훌륭한 무기로 싸우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됩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이스라엘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와 병기 모든 전력은 대적들을 이기기에는 터무니없는 전력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원인과 관련됩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기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징벌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고통 받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강권적인 힘으로 그들의 의지에 반해서 그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나라의 의지를 사용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섭리 속에서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표현에 따르면 ‘어떤 사태를 멀리서 볼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가까이서 볼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든 선인이든 각기 자기 의지를 가지고 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과 사람의 자유, 영원속에서의 하나님의 결정과 시간 속에서의 인간의 자율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악한 나라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악한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치고 징계하는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실 때, 먼 관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사태를 지정하신 것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악한 나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를 약탈한 그래서 ‘제사장들을 칼에 엎드러트리고 과부들이 애곡도 못하도록 청년을 불사르고 처녀들은 혼인 노래를 들을 수 없도록 만든’ 이 모든 도덕적 책임들은 하나님 앞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환언하면, 우리가 자식을 기르며 부모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게 행했을 때, 아이를 향해 상한 마음이 생기지만 다른 이들일 아이를 때리고 고통을 줄 때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습니다. 자기가 때리더라도 남이 내 아이에게 손대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이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깨소서, 여호와여 이제는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표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깨라, 일어나라’고 말하며 마치 하나님이 깊이 주무시는 분처럼 묘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시적 은총이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이 잠자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여호와여 깨소서’라고 고함치는 것은 주님을 향해 ‘잠자고 있는 우리의 신앙을 깨우사 우리의 믿음을 떨쳐 일어나게 하소서’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용사’로 표현합니다.
그 용사는 잠에서 깨어난 용사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라고 부르는데, 무슨 뜻일까요? 대부분의 나라가 전쟁 때 술을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상관은 전쟁 중에 음주하는 것을 즉결 처벌해서 사형에 처할 정도로 무서운 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전쟁행위 자체는 비이성적일 수도 있으나, 전쟁에서 살아남아 남의 생명에 위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극도로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술을 이성을 마비시키거나, 이성에 의한 통제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술을 마시고 미사일을 잘못 발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술을 마신 자가 지휘관이면 어떻겠습니까?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전투중의 술은 엄금합니다. 물론 안 그런 나라도 있었습니다. 술은 사람으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게 합니다. 술을 먹고는 양심과 정신을 통제하는 것을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6.25때 중공군들이 술을 가지고 전쟁했다는 것은 유명합니다. 술로 인해 담대함을 북돋으며 전쟁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여기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술을 마시고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용기를 내어서 전쟁에 참여하거나, 어떤 일들을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 성경구절을 읽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며 고함치는 용사’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치는 자들을 향해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커다란 용맹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의 대적들을 물리쳐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악을 행했지만, 그들을 공격해서 ‘백성들을 죽이고 청년들을 불태우고 처녀들에게 혼인노래를 부를 수 없도록 겁탈하거나 처녀의 짝이 될 수 있는 모든 남정네를 죽여 버린 죄악들, 제사장들을 칼에 엎드러트리고 과부들도 두려움 속에 애곡할 수 없게 만든 그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대적,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대적이 이스라엘의 대적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그 대적들을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치욕과 수치를 안기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한 나라의 위대한 명예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한 나라의 왕이 포로처럼 끌려가 적의 왕도 아니고 장수 안에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살려주기를 간청해야했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수치와 욕입니다. 이것은 왕국의 멸망을 의미하고, 한 나라가 또 다른 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국의 운명 중, 왕국이 패망하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가 어디 있겠으며, 임금이 적군의 장수 앞에 무릎 꿇는 것보다 더 치욕스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을 쳐서 물리쳐 그들을 이렇게 욕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음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왜 시인이 하나님이 분을 내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악한 나라에게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시고, 여기에서는 그들을 향하여 쳐서 물리쳐 그들을 욕되게 하셨다는 이 상반된 행동은 우리에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 사이에서 어떻게 하든지 연결점을 찾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였더니 선지자들을 보내어 거듭된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무시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악을 행했더니 이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간절히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이민족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했다는 공식이 가능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런 공식이 성립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하나에만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불순종할 때조차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오래 기다리고 참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뉘우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이들을 건지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언약적 태도 하나만으로 이 모든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위기에 처하고 이민족에게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는 것은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에 토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에 대한 용서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을 섬기고 조상처럼 배반하고 속이는 활같이 빗나가고 했을 때, 하나님은 저들을 심판해서 영원히 멸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저들을 용서하사 하나님 앞에 다시금 살 기회를 주신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 일방적인 헤세드를 보여줍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파멸하여 사라지게 하면 관계가 없어집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도리어 약한 자가 됩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이를 가진 두 여인이 한 아이를 죽이고 살아있는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겼습니다. 지혜로운 임금은 두 아이를 잘라서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한 어미는 그렇게 하라고 다른 어미는 그렇게 하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가 다른 집에 가더라고 아이가 멸절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분히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믿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욱 약한 자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돌이키는 자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사처럼 일어나 대적들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일방적인 은총을 붙들고 사는 것이 언약백성들의 축복이요, 또 의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