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1-8)
녹취자: 윤은정
오늘 우리가 이제 저녁집회로 세 번째 만나는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가지 동인이 필요하다고 그랬는데 오늘은 두 번째 동인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경을 보고 계십시오. 이 부분이 번역이 좀 잘못됐습니다. 잘못됐다기보다 조금 미흡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제가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위에 오실 때에 너희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도 또 온 유다에서도 또 사마리아에서도 또 그 땅 맨 끝에 이르기까지 에서도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조금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이게 조금 차이가 아니라 사실 알고 보면 아주 굉장한 차이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선교를 생각할 때 우리들이 먼저 예루살렘이다 그다음에 온 유다 차례대로 나가는 거다 그게 아니라 ‘보스 앤 보스 앤’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을 제가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데 이 구절을 중심으로 번역이 미흡합니다. 다시 한번 제가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위에 오실 때에 너희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도 또 온 유다에서도 그리고 땅 끝까지 에서도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6절 7절 한번 보십시오. 6절 7절을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6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이것이 6절 7절과 연결 지어서 읽을 때 우리말 성경을 읽는 것하고 헬라어 성경을 읽는 것하고 엄청난 차이를 빚어냅니다. 무슨 예기 입니까? 이 예수님이 지금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때입니다. 이게 지급 뭘로 모인 겁니까? 무슨 모임으로 모인 겁니까? 요즘에는 송별회라고 안 그러고 파티 그래요. “전도사님 저 오늘 직장에 일찍 가봐야 되겠는데요?”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쫑파티가 있어요.” 그래서 그러고 가버렸어요. 가만히 ‘좀 무슨 얘긴가? 영어로 존이라는 얘기인가? 도대체 파티긴 파티인데 무슨 소리인가?’ 나중에 물어봤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그랬더니 “마칠 종자”래요. 그래서 그것을 ‘쫑’이라고 그래서 송별회를 가지고 송별회라고 그런데요. 망년회 송별회 그런데 말하자면 이게 그런 파티로 지금 모인 겁니다. 예수님이 이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전 송별회로 지금 제자들이 쫙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무슨 기대에 사로잡혔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왕국이라고 하는 기대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 물어보니까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그래놓고 그 다음에 “그러나” 얘기 합니다. 앞의 말을 뒤집는 반대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위에 오실 때에는 너희는 능력을 받게 되고 그러면은 너희가 어디어디 어디어디에서도 증인이 될 것이다.” 그때에 이 헬라어에 “알라” ‘그러나’ 입니다. 강한 반의어입니다. 이것이 주는 단어는 대단히 주목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오직’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에 기록된 것을 보십시오. 이것도 조금 미흡합니다. 보십시오.
6절과 7절에 “그래서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 그에게 물어 가로되 이 때에 당신께서 그 왕국 [더 킹덤]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로 돌려주시려고 합니까?” 이것은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체포되어서라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간다든지 그럴 때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물음의 의도가 뭐냐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그 왕국을 뺏겼다는 거에요. 그 왕국이 뭡니까? [더 킹덤] 다윗의 왕국입니다. 다윗의 왕국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떠나갔던 것이 다시 돌아오면 이스라엘 나라의 영광이 온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런 사고 속에 사로잡혀가지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할만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힘없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증거를 제자들이 봤고 40일이나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비로소 확실하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큰 능력과 권능으로 그 찬란했던 그 왕국 곧 그 찬란했던 지상 다윗의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돌려줄 때가 바로 이 때입니까?” 하고 물어본 것입니다. 뭡니까? 권세 있는 왕권의 회복으로 주위의 수 많은 나라가 조공을 드리러 줄을 이어오고 화려한 성전이 다시서고 엄숙한 제사가 수행되서 구약 종교가 찬란하게 빛나고 백성들이 질국에 로마 식민지상태에서 해방되어지는 왕국을 기대하게 되었다 이 얘기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들이 무엇을 찾습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다 들은 다음에 하신 말씀이 그 다음에 “그러나”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 그러나”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시각 속에서 교회를 바라보는지 몰라요.
20세기에서 가장 격렬한 토론의 장에서 가장 난도질을 당했던 신학의 분과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론입니다. 교회론과 성경의 해석학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론이 특별히 무지하게 고난을 많이 당했어요. 왜그랬냐면은 양차 세계대전 후에 제국주의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문학적으로는 다다이즘이라든지 허무주의 실존주의 이런 것들이 쫙 펼쳐졌잖아요? 왜 그럽니까? 기존의 도덕의 가치대로 살아보는데 그결과는 인간들에게 안겨준 것은 양차대전의 엄청난 비극이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도덕가치를 좀 더 다 재편성해야 된다고 부인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허무주의 실존주의 다다이즘 이런 것들입니다. 물결과 같이 막 물려든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과 제국주의 그 다음에 경제적인 불평등 후진국의 독재정치 그 다음에 정치적인 핍박 인권 유린 이런 공통된 세계사적인 상황속에서 이 전통적인 교회론 종교개혁자들이 세워놓은 이 교회론 신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교회로는 엄청난 수난을 당했고 난도질을 당했다 이 얘기입니다. 그때에 이 모순과 갈등의 시대 속에서 받았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넌 도대체 뭐 때문에 이 세상에 남아 있느냐?”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글쓰기에 “신들은 이땅을 떠나라. 하나님은 이 땅을 떠나라.” 이 정도까지 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비극적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첫째시간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영광스로운 몸으로서의 교회의 신분을 버리고 사회를 개혁하는 하나의 매체로서 전락되어버리게 되었다 이 얘기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이 비참한 형편들을 보면서 이게 나라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냐면 남미증상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남미증상이 제가 몇 년 전에 남미를 다녀온 신학자로부터 상세하게 남미에서 왜 해방신학이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몇 시간 다 듣고 나서 내린 결론이 뭐냐하면 그 당시의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생겨나게 됐을때 처음부터 그런 신학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나라가 우리나라 비슷한 이런 것을 겪었습니다. 지금 맥시코나 브라질은 미국의 쓰레기통입니다. 온갖 폐차 더러운 것 다 갇다 버립니다. 경제적인 예속 이런것들 불평등 그러니까 어떤 스타일이 되냐면 이런 스타일이 되는 거에요. 경제착취라는 게... 어떻게 되냐면은 물건을 하나 파는데 제가 타자기를 하나 일제를 구입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물론 총판하는 것입니다. 실버리그를 구입을 했는데 이것을 선물로 구입을 했어요. 도저히 국민카드로 사줬어요. 월급에 한 달에 한 15000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게 뭐냐하면 소모품값이 한 달에 20000원 들어갑니다.
그런데 교묘한 것이 뭐냐하면 일본에서 우리나라에게 상품을 딱 줄때 싼값으로 시판을 하게 만든 다음에 계약을 맺을 때 어떻게 맺냐하면 ‘부속품이나 소모품은 한국에서 제작할 수 없다.’ 단서를 붙이는 것입니다. 타자기 한 대에 35만원이나 40만원주고 팔아먹고 그 타자기가 망가질 때까지 그 한 대가 쓰는 소모용품은 2백만원 내지 3백만원 됩니다. 상품이 망가지면 컴퓨터 같은 건 부품이 망가지면 뜯어보면 왕창 다 부서지게 만들어놨어요. IBM이나 Mackintosh 다 그렇습니다. 어떻하냐면 조금만 망가져도 나사하나만 빠져도 할 수 없이 건드리지 못하고 국제전화를 해가지고 그 많은 출장비를 주고 그 사람들이 와야 됩니다. 나중에는 어떻게까지 하냐하면 장난을 거는 것입니다. 부품을 안 주는 겁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그 기계를 처분하고 새 기계를 사다드리게 만들거나 부품하나에다가 따른 물건을 껴서 파는 겁니다. 이게 경제 예속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결국은 남미의 국가들이 미국이나 이 제국주의에 꽉 메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하냐하면 엄청난 빚을 지게 만듭니다. 빚을 갑자기 지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하냐하면 그 빚을 갚는 댓가로 차압같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나라의 경제에 깊숙이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경제의 관료들을 선입하는 모든 문제까지 전부 다 미국이나 이런 나라에서 간섭하는 것입니다. 제국들이...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비참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쫙 보면서 교회가 언제부터 총을 들고 뛰어나가게 되었는가? 그랬더니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회의 그런 문제가 벌어집니다. 분노합니다. 그러면서도 뭐냐하면 “안돼 우리는 기도해야 돼.” 막 기도합니다. 설교자들은 사회를 향해서 외칩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살아라.” 막 외칩니다. 그 다음에 교회가 고민도 하고 말씀선포도 하는데 변하는 게 없다 이겁니다. 똑같이 계속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부패한 정권 식민지적 경제예속 빈부의 격차 인권유린 사회의 도덕상실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해악의 만연 이런 풍조들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가 절감하는 것이 뭐냐하면 ‘아하 이제는 고전적인 방법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고전적인 방법이 뭡니까?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그러면은 그것을 딱 깨닫는 순간에 교회는 어떻게 되냐면은 본질을 떠나고 급기야는 크리스찬 테러리스트까지 조직을 해가지고 성도들이 낸 십일조를 가지고 무기를 사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십자가를 상실하고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역사적인 장면을 여러분들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대학생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분명한 시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각을 갖는데 이 설교가 도움이 되기를 정말 간절히 빕니다.
이러한 문제를 우리들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뭐냐하면은 인간이 혼도하고 있다 이것입니다.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한계냐? 인간의 한계냐?’ 이것을 혼돈하면 안 된다 이 얘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은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상당히 깊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점이냐 하면 성경을 대할 때 ‘A는 A이다.’ 라고 하는 어떤 진리가 있으면은 이 진리를 끝까지 믿는 것이 아니라 자꾸 살아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봅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과연 A는 A라는 진리가 경험되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경험이 안 됩니다. 경험이 안 될때 그 때에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다 나옵니다. ‘저거는 진리이기는 진리이지만 경험할 수 없는 고로 그것은 한계가 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 가죠? 마태복음 18장에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뭐든지 다 들어 준다고 그랬는데 요한복음 14장에 ‘뭐든지 다 들어 준다’고 그랬는데 기도해보면 뭐든지 다 들어주셔요? 안 들어주셔요? 안 들어 주시죠?
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 이루어져요. 그때에 지금 여러분처럼 딱 그런 결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든지 다 들어주신다더니 아니다.’ 마음속에 치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신앙의 화석처럼 딱딱하게 가슴속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왜 말씀 드리냐면 이렇게 되어 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 올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진리가 경험되어지지 않으면 ‘왜 경험되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생각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100%의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미흡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어요? 인간의 존재 그 말씀을 간구하는 교회의 존재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걸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아주 더 말씀드릴 좋은 얘기들이 있는데 말은 못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니까 역사적으로 교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지성과 판단을 따라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택하는 대신에 사람의 방법에 의해서 교회와 사회를 변혁 시킬려고 한다 이 얘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십자가를 상실해버린 이데올로기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이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성을 상실하고 성령에 대한 체험을 상실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분명한 시각을 갖지 않는 한 왜 우리나라에서 화염병이 그토록 많이 날라 가야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변하지 않는가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식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 왕국 [더 데이비드 킹덤] 다윗의 찬란한 왕국을 이스라엘에게로 지금 돌려주시려고 합니까?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주님은 하나님나라의 건설이 지상적인 왕국을 다윗의 왕국을 돌려주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방법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8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8절이 뭐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신다.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너희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뭐냐?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 외워보세요. 시작.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은 여러분이 아시는 이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 그것 못 외우는 대학부 학생이 어디 있겠어요. 그죠? 실수였죠. 갑자기 외워보라면 모르는 거에요. 우리 친척 중에 한 분이 있는데 동사무소로 주민등록 등본을 떼러 막 뛰어 갔어요. “주민등록 한부 떼어 주세요.” “아주머니 성함이 뭐에요?” 그러니까 한참동안 5분 동안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냥 집으로 왔데요. 집에 와 보니까 생각나서 다시 갔데요. 실화에요. 모르는 거에요.
이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통해서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말씀이 전파되는 데도 왜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안 섰습니까? 그렇게 묻지 마세요.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약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전파한 것이 잘못됐든지 전파를 받은 사람이 잘못 됐든지 전파하는 도구들이 잘못됐든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마태복음 28장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전파를 말하면서 항상 언급되고 쫒아 다니는 것이 있는데 권능 권세 능력 이겁니다. 권능 권세 능력... 맞죠? 항상 복음전파와 함께 쫒아 다니는 개념이죠. 복음 전파를 말하면서 동반되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권능과 권세이죠. 맞죠? 교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권능을 회복하지 않고는 결단코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도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령은 이 말씀으로 하여금 능력 있게 만들고 변화를 주는 그 권세다. 이 얘기입니다.
왜?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주시면서 왜 이 먼저 이 일을 끄내는 겁니까? 그게 뭡니까? 그것은 복음의 전파가 단순히 아무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알려줌으로 말미암아서 피알함으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게 뭡니까? 이것은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이 단순한 사무적인 준비가 아니라 영적인 무장이 필요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를 뒤흔들어 놓았던 교회의 역사는 곧 성령이 역사하신 히스토리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훌터보면 시대에 따라서 설교가 아주 중시되던 종교개혁 시대 같은 때가 있고 그렇게 중시되지 않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설교가 행해지지 않던 시대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분과 중에서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만 외국의 신학의 분과 중에서 ‘히스토리 오브 프리칭’이라는 분과가 있습니다. ‘설교의 역사’라는 분과가 있습니다. 그 역사는 주후 430년의 세상을 떠난 히퍼의 감독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죽음을 끝으로 해서 800년을 뛰어넘어서 주후 1182년에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집니다. 800년 동안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설교의 역사라고 쓸만한 재료거리가 하나도 없다. 이 얘기입니다.
설교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중세교회가... 번세한 스콜라 신학이 찬란한 금자탑을 쌓던 시대입니다. 교회에 환영을 받았고 수사학을 모르면 설교자 명함을 내 놓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논리학이 학생들의 필수과목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설교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던 시대라면은 당시의 신학자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전해졌을지 모르지만 그 말씀이 세상을 변화시켜놓는 역사의 흔적은 없어져버린 800년간이었다. 이 얘기입니다. 왜 이 800년을 설교의 역사는 사회의 변화시키는 설교의 역사에 있어서 이 시대를 괄호의 시대로 처리해 버리고 그냥 넘어가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본문이 대답을 해줍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지만 그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가 권능을 성령의 권능을 그 아버지의 거룩한 영의 권세를 받음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복음전파와 함께 성령의 권능 성령의 능력 이런 것들을 자꾸 이 얘기를 하는 것이냐? 이 얘기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 중에서 그것도 마태복음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일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산상수훈입니다. 좋은 얘기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죽 이것이 훌륭하면 ‘복음 중에 복음이다.’ ‘더 가스풀 오브 더 가스풀’ 뿐만아니라 산상보훈이다. 산에서 선포하신 보배로운 말씀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자랑스럽게 역사하는 인류문화의 한 유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오늘 알고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나타난 산상보훈 산상수훈 심지어는 팔복 이런 많은 얘기들이 마태복음 4장을 전제로 하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얘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전제로 하지 힘없고 무기력한 비폭력 평화주의자들의 행동강령이 되고 말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뭐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그 다음에 어디로 들어가요? 마귀의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이끌려 가십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메시야 취임식입니다. 취임식 끝난 다음에는 그의 복음을 환영하는 환영의 인파들이 박수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처절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싸움 속에서는 체질도 문제가 안 되고 얼마나 인격적으로 고상 하느냐도 문제가 안되고 지성도 문제가 안되고 오직 문제가 되는 것은 ‘파워’ ‘힘’ 이것만이 생사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이 얘기입니다. 철저한 영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에 오직 권능만이 이 싸움에서 승리를 안겨다 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탄생 때부터 이 피비릿 나는 이 영적인 싸움에 직면해야 됐던것을 여러분은 기억합니까?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 사탄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그의 생명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헤롯을 도구로 택했습니다. 이 헤롯은 사탄의 손에 사로잡혀서 그 마을과 그 지경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자기의 입술로 자기의 이름조차도 아직 댈 수 없는 이 어린 생명들을 처참하게 칼로 살육하는 것이 메시야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 그 마을은 두 살 터울에 걸쳐서 연령을 가진 그 남자들이 없는 채로 수 십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때 그 헤롯에 의한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기억하면서 아픔을 되씹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강단에서 사라지고 있는 설교의 제목들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사탄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인 언제입니까? 회상해 보십시오. 심각하게 불꽃 튀는 열정으로 귀신에 대해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 사탄 악령 마귀 귀신 귀신들과의 싸움 이것은 점차 희미하게 잊혀져가는 한국교회의 설교제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데 사탄은 이 한국교회의 현상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언제 부터인지 한국교회도 사탄 귀신 악령 마귀 이런 낱말들을 거침없이 쓰기에는 왠지 쑥쓰러운 그리스도인들이 머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강단도 그러한 용어를 이제는 현대적인 합리주의의 지성에 거슬리는 원색적인 발언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18세기에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영국에서부터 그 물결이 번져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게 대한 싸움이라’고 에베소서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그 현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한 귀신들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가 그들의 영혼에 비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기독교는 ‘믿으면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들은 그런 그리스도의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간 불못에 던져저 심판받아야 할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눈물을 씻겨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는 대신에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오히려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낳은 위대한 전도자 찰스 핀은 그리스도인의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혀있는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사로잡고 있는 그 영혼을 쳐부수고 사로잡혔던 그 한 영혼을 탈취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주는 것이 곧 전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위대한 부흥이 있을 때마다 그 도구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시대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고 있는 영적인 싸움에게서 눈을 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교회와 이 그리스도인을 이처럼 가난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의 승리의 샘을 가로막았던 블레셋의 더러운 그 자갈과 모래들을 막게끔 만들어 놓은 그 장본인이 사탄이었던 사실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비굴하게 만들고 있고 여러분들의 한때는 아름다운 곡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 땅을 누가 그렇게 단단한 땅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앞에서도 왜 그렇게 완악해진 땅이 되어버렸습니까? 여러분들이 잘못한 어떤 도덕적인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던 것을 이 시간 분명히 목격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도바울의 이름이 지옥의 마귀들에게까지 알려졌다고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탄과 마귀들로 하여금 그 지옥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이름을 기억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이 지옥의 악마들을 위협하는 영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요한은 재미있는 진수를 주고 있는데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한량없이 영어성경에 보면은 성령을 무제한으로 하나님께서부터 받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 성령으로 임한 권능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지옥의 문을 부수고 악한 영의 세력의 파멸의 도전장을 내 놓으셨습니다. 아담의 타락의 이유로 견고하던 사탄의 왕국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한 구석이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망의 음침함의 기운이 지배하던 이 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사로잡힌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주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한구석이 무너지면서 하늘의 속한 놀라운 축복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사심으로 사망의 권세가 부셔져나가고 생명의 역사가 온 이세상의 큰 물줄기가 되어서 팔레스타인 땅에 강물과 같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원리적으로만 사탄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제적으로 그의 영적인 왕국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사탄에게 종노릇을 하던 많은 그의 소유물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왕 되심에 복종하고 성령으로 무장되어서 참모군의 모습으로 자기의 왕국에 도전장을 내옵니다. 창과 칼로 무장하고 자기의 영적인 왕국에 도전해옵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마귀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바울의 이름을 기억해야만했던 이유였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직 단 하가지 일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 속에서 찰스핀이도 이와같은 문제에 대해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전해야할 아메리카 대륙의 복음의 그 땅이 다만 복음의 불모지가 아니라 불신앙의 압력의 세력들이 점령하고 있는 악령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이러한 영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 1821년이었습니다. 1821년 10월 10일 저녁 7시 뉴욕에 있는 자신의 법률사무실 뒷방에서 난로 곁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온 육체를 사로잡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1875년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의 품에 안기는 그날까지 확성기도 없고 메스미디어도 없던 그 어둠의 시대에 50만 명이라고 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기는 위대한 선교의 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시대의 교회가 그 시대의 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싸움에 눈뜨게 함으로부터 부름은 시작됩니다. 아직까지도 영적인 것들에 진압하지 못하고 있는 이 우매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안목을 열어서 자기가 싸워야할 본질이 사탄의 세력인 것을 목격하게 만듭니다. 그때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흥이 가까운 증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로소 싸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없이는 한 치의 땅도 사탄으로부터 뺏어낼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놀라운 권능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느끼도록 만드십니다. 묵은 땅이 기경되는 교회의 역사가 한결같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능력을 하나님 앞에 갈망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놀라운 능력을 부워 주십니다. 능력을 부워 주십니다. 갑자기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말할 수 없는 큰 권능의 사람들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선포가 권능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은 늘 들어오던 복음 전파인데도 오늘 그것을 들으면서 이제는 자기의 죄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물먹듯 마시던 영혼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고백합니다. 생각도 없이 주일날 11시에 모였다가 12시에 흩어지는 숱한 영혼들이 예배가운데서 자기의 영혼들을 압도해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그리스도인들은 둘 중에 하나를 결단하게 됩니다. 교회를 떠나서 사탄의 품으로 돌아가던가 회개하고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던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여 있다라고 하는 이 사실은 이 시대의 교회 속에 얼마나 사탄의 세력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더 이상 이 땅에서 묵은땅이 아닙니다. 비약하고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죄악의 사로잡혀있는 영혼의 때를 부시는 경지의 기지가 됩니다.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어서 영적인 군사가 되어서 싸움터로 파송해 보내는 천국의 전투사령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이 심각한 문제가 뭐냐하면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지 목매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대학부를 위해서 기도 많이 하는데 ‘나는 지금 대학부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지지리도 못하셨어요. 다른 교회 보니까 막 50명 100명 5000명 막 부흥하는데 자기 교회는 맨날 한 3-40명 모여 있는 거에요. 모이고 맨날 싸워요. 예배시간에 앉으라고 그러면 한사람은 여기 와서 앉고 한사람은 저 끝으로 가고 그래가지고 설교에 문제가 있나? 그래가지고 그 부흥하는 교회의 설교를 빌려가지고 왔어요. 뭐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은 그 설교를 가지고와서 한번 그대로 설교를 해봤어요. 그럴리는 없는데 하여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그 못하는 설교가 갑자기 원고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앞에 있는 사람부터 한사람도 빠짐없이 막 가슴을 찢으면서 설교 도중에 눈물을 흘리는 건데 울음소리 때문에 설교를 못하게 했어요.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설교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답답한 양반이 뭐라고 그러시냐 면은 갑자기 설교를 중단하더니 ‘여러분 여러분 어떻하죠?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오늘 밤에 여러분의 기분을 이렇게 상하게 할 맘은 하나도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다. 구원받을 뻔했던 30-40명의 영혼들이 그날 저녁 그 교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영영 그 교회를 못 찾고 지옥으로 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화를 통해서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이 뭐냐하면 이 영적인 분별력이 그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없다 이 얘기입니다. 정신을 차리세요. 요즘 청년부나 대학부는 제자훈련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알고 난리들입니다. 제자훈련 욕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제자훈련에 어느 정도 미쳤냐하면 주위에서 돌았다 할 정도 5년 동안 미쳤습니다. 어느 정도로 제자훈련을 했냐하면 여기 청년이 있으면은 지난주에 24시간 * 7 시간단위로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상담하고... 좋아요. 제자훈련이 공헌한 것도 많습니다. 하십시오. 열심히 하세요. 숫자가 아니라 개인의 한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게 이 제자훈련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좋은데 여러분들 제자훈련 해봤죠? 그러면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제자훈련에서 피훈련자에게 제시하는 목표가 뭡니까? 힌트를 드리면 괄호문제에요. 그리스도의 ( )와 ( )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익숙하게 들었죠? 제가 오늘 저녁에 기분 나쁘게 도전적인 반문을 하겠습니다. 만약에 한국교회 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전부다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고 예수님의 인격처럼 그렇게 고상하게 살면 이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농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처럼 착하게 살고 그분의 인격처럼 고상하게 사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이 세상의 교회는 비단 평화주의자들의 집단이 될 것이고 회개치 않은 채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그 평화주의자들의 등을 쳐먹고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 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던 그 시각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라 이 얘기입니다. 교회의 역사 어느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착하게 산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도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둠의 세력들이 무너지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던 때는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평화가 임하기 전에는 반듯이 흑암의 악령의 세력들이 무너져나가는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결단코 평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전에 어떠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새겨지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여러분 자아와의 싸움이 있었습니까? 말로 여러분의 자아와의 싸움이지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불신앙의 악령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닙니까? 먼저 치열한 영적인 투쟁 속에서 흑암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악령의 세력들이 꺾여지고 죄인들의 심령이 성령에 의해서 지배되고 변화될 때 그 다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샬롬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 되어 살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소금이 되라. 이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부산에 어떤 전도사님이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이양반이 평소에 뭘 도전을 많이 받았냐 하면은 ‘한국교회는 사랑이 너무 없다. 어쩜 이렇게 사랑이 없을 수 있느냐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를 만들겠다.’ 갔습니다. 개척을 했어요. 어느 정도 헌신적으로 그 동네를 위해서 일했냐하면 화염병을 던지는 혁명의 방법 가지고는 안됩니다. 이것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도주의적인 감상에 빠지는 것은 더 나쁩니다. 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성경처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경전이 또 있겠습니까?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서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은 이처럼 악하나 너희는 착하게 빛으로 살라.’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코 이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착하게 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합니다. ‘근신하라 너희는 깨어라.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너희를 삼키려고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싸우라.’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위해서는 그냥 피알을 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치열한 영적인 싸움 끝에 그 복음이 전해진다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의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철두철미한 불신의 시대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영원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죠?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나셨을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죠? 그것을 부인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나사렛 동네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그 유년시절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죠? 목수로 장성해서 이제는 30세 가까이 되었을 때 그 때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죠? 그것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그를 내보내시지 않으시고 제일먼저 그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지 아십니까? 요한복음은 말하기를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은 특별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에서부터 비둘기와 같이 성령이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신지 아십니까? 그때에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한 그때에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사역에를 내보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인파가 아니라 악한 마귀의 준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에 어느 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그때에 왜 하필이면 그때 입니까? 마귀는 비무장한 표나 군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관심 갖을 필요가 없습니다.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어도 비무장표나 평화군인에 대해서는 사탄은 경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관심의 대상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된 전투요원입니다. 이것이 요주인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젠가 자기왕국에 결정적인 해를 입히면서 치고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17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때부터’ 이때부터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마4:13을 바라보십시오.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마귀를 결정적인 패배로 몰아 넣은 그때입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눅 4:13을 보십시오. 같이 읽습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왜 성령께서는 그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서 그를 마귀와의 싸움에 몰아 넣으셨습니까?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생애 사역의 초기에 사탄의 세력을 박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도들에게도 이와같은 승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이 일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마귀가 떠나니라. 예수께서 권능으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이와같은 시련을 허락하신 것은 다시 한번 마귀와의 전쟁을 치른 후에 엄청난 영적인 권능으로 다시 한번 무장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마귀와의 엄청난 회기를 치른 후에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노라’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저는 이 장면 속에서 평화를 사랑하지만은 나약한 평화주의자가 아니고 자비를 가르치지만은 그러나 비굴한 종이 아닌 진리를 가르치나 단지 연약한 선생이 아닌 위대한 영적인 전쟁의 전투사령관의 모습을 읽습니다.
세례요한의 복음선포를 회상해 보십시오. 무엇이 그 불신앙의 어두운 시대 속에 ‘회개하라’는 단순한 메시지앞에 당시의 종교계를 회피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그처럼 두렵게 떨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단순한 선포 앞에 그처럼 엄청난 심령의 압박을 느끼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 선포를 그토록 권세 있게 합니까? 왜 이 시대는 그 유사한 말씀의 선포와 복음의 전도 앞에도 그 세례요한 때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처럼 고민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복음의 선포 앞에 뻔뻔스럽습니까? 왜 교회 안에서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지 않은 채로 그토록 별일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그 성령의 거룩한 능력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부어지는 능력이 없이는 미안하지만 묵은땅을 기경할 쟁기는 중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끌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28장에 끝났다면 우리들은 29장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은 구속사적인 의미로서는 반복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일한 능력과 권능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시대에 반복해서 부어져왔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대변해줍니다.
저는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성령론에 대해서 강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령론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뭡니까? 오순절 교파에서는 저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미치고 뜁니다. 한편 보수교단이라고 하는 이런 쪽에서는 임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고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충만하다. 19세기 내재주의적인 신학의 산물입니다. 순복음 계통에서는 오순절 교파 계통에서는 신비체험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대해서는 생각도 안합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매일같이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받고 없어지면 또 내일 받고 내일 받으면 또 없어지면 다음 주에 또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께서 신자들이 믿을 때에 그 안에 계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주시고 내려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신비입니다.
오순절 교파에서는 저마다 자기가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야단들입니다. 성령세례 받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개만도 못하게 취급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지금 수십 명의 찰스 핀이가 있어 될 것 아닙니까? 수천 명의 요한 웨슬레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수 만명의 조지 휘필드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한 두 사람의 휘필드와 요한 웨슬레를 통해서 역사를 뒤바꿨던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저마다 엄청나게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이 나라의 교회가 수 백번도 더 뒤집어 졌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 그 모양입니까? 다 웃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일어났던 교회의 부흥의 놀라운 역사의 모습을 볼 적마다 확실하게 우리로 하여금 부인하게 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은혜를 많이 받았다’ 는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힘과 권능이 위로부터 쏟아 부어지던 시대라고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쭉 읽어봤습니다.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몇 사람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슬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수백미리가 온 호우를 만나는 것입니다. 우산조차도 필요 없는 비를 만나는 것입니다.
1908년에 평양을 휩쓸었던 성령의 운동 그 놀라운 운동을 지켜보던 미국 선교사들이 자기네 나라에 선교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그대로 인용하지 못하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교회성도 여러분 지금 코리아는 엄청난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커다랗고 엄청난 힘이 교회를 뒤덮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묵은땅이 기경되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방법이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남아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능력으로 무장시키는 것임을 어떤 변명과 이름으로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이와같은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에 교회는 생명을 회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회복합니다. 핍박과 시련 앞에서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처럼 핍박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함이 불의한 사회로 하여금 오히려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죄의 문제로 고민하게 만듭니다. 형식적인 예배로 모이고 흩어지던 11시 예배가 갑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만듭니다.
이 임재 앞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죄악을 회개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터집니다. 아무도 볼 수 없던 죄악들이 들어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가고 이 복음 속에는 형언할 수없는 엄청난 능력이 깃듭니다. 수 많은 불신자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 허무 맹란한 얘기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믿기 시작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눈빛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교회여 그리스도인들이여 나를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이럼으로서 사회는 정직하고 성결된 삶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내리고 공법이 물과 같이 흐르는 변화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734년에서 1735년 여름까지 요나단 에드워드에 의해서 주도된 미국의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우리는 이와같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저술이 1737년에 영국 런던에서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파문을 던졌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죠지 휘필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감화를 크게 받았습니다. 이 죠지 휘필드를 비롯한 수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1740-1741년동안 있었던 제 1차 뉴 잉글랜드의 대각성운동의 물결 속에서 이 영광이 다시 한번 재연되었습니다.
1741년 7월 어느 날 저녁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앤필드 마을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은 그 설교 원문을 제가 다 읽어봤는데 원문이 저희집에 있습니다. 이 요나단 에드워즈가 앤필드라는 마을의 목사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는데 너무나 사람들이 완악해서 도대체 사람들이 믿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요즘 부흥회는 뭐 맨.... 최병남 목사님 부흥회 하시는 것 포스타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뭐였냐면은 ‘너희도 온전하라’ 그런 제목 가지고 부흥회하는 사람 이제 없습니다. 사람이 안보여요. 언제 한번 우리집 앞을 지나가는데 연초인데 빨간 플랜카드가 걸려있는데 부흥회 포스터였어요. 그것을 보는데 내가 막 희열에 가득찼습니다. 부흥회의 주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장사가 안되는 시대를 당했습니다. ‘축복의 길 축복 대상’ 그래야 모인다 이 얘기입니다. 얼마나 웃기는 노름입니까? 이렇게 완악한 죄인들이 모여있는 앤필드 마을에서 부흥회를 요청했습니다. 주제는 ‘회개하라. 이걸로 해주십시오. 목사님’
요나단 웨드워즈는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받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설교의 요지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들을 이 손에 붙들고 계시다. 이 손에 담고 계시다. 그런데 축복 주시려고 담는 것이 아니라 하도 그지 같으니까 담아다가 지옥에 불에다가 지금 이렇게 놓고 계시다’ 이 얘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 들어간다 이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지금 못하게 한다 이 얘기입니다. 이 설교 신명기 32장에 나오는 한절을 가지고 외칠 때에 청중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운 선고를 듣고 몸부림 쳤습니다. 뒤에서 사회보던 목사님이 엉금엄금 기어와서 에드워드 목사님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매달립니다. 데굴데굴 구릅니다. ‘좀 조용히 좀 하십시오. 설교 좀 하게...’ 소용없습니다. 온통 눈물 천지였습니다. 뒤에 있던 목사님이 바지자락을 붙들며 매달립니다. ‘목사님 목사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은 그래도 자비하신 데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죽겠습니다. 이 사건은 뉴 잉글랜드 전체를 뒤집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613년-1626년 13년 동안 1859년-60년 2년 동안 북 아일랜드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길이 다시 1857년-1858년 미국의 어마어마한 대기도운동의 불길의 불을 붙였습니다. 1908년에 한국교회가 이것의 목격자가 되었고 1930년에 아프리카 콩구교회에서 이 세계부흥의 역사에 남을만한 위대한 묵은땅이 기경되는 역사를 경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한국교회에 그리고 대학부에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에 필요한 것은 제도의 개혁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학사상의 발굴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교육이 아닙니다. 설교가 아닙니다. 대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위엄있는 역사가 펼쳐지는 이것입니다. 이 전세계적인 부흥을 항상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관계 속에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부흥을 가져다주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이와같은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여러분의 대학부에서 이것을 행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이것을 행할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근대 영국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케리의 말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여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길을 게획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불모의 땅에 복음을 심기위해서 그의 교회를 능력있는 공동체로 만드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절은 말합니다.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그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으로 쏟아 부어지는 세례를 받으리라. 그리고 너희들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성령이 임했을때 그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불붙는 구원의 열정을 가진 작은 예수들이 되었습니다. 이 다락방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성령을 받은 이 무리들이 이제는 권능이 그들에게 임할 때 외소한 종파의 가난한 집단이 아니라 완전무장한 전투군의 모습으로 흑암의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거리에 담대하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십시오.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성경책 갈피를 넘길 적마다 우리는 거대한 격정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 전쟁터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얼마 안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한 모습으로 서있는지 모릅니다. 완전히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위해서 외치며 지나갈 때마다 흑암의 세력들이 거꾸로 집니다. 죄악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영혼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치유됩니다. 고민하는 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는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어떻게 얻어집니까? 이 구원의 감격이 있기 전에는 반듯이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어야 됐다 이 얘기입니다. 단지 이 전쟁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대한 소유권을 마귀가 포기하든지 하나님이 포기하든지 어느 한쪽이 포기하기 전까지는 조금의 양보도 없고 화해의 가능성도 없고 휴전의 가능성도 없는 싸움의 가능성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와 여러분들을 십자가의 중심으로 원리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꺽고 그 세력은 궤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패잔병이 되어지는 악령의 세력들이 패잔병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영적인 세계속에 도전해오고 있습니다. 영혼들의 영성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으로 가버린 그 영혼을 지옥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력들은 여러분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어서 여러분의 마음밭을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까지 묵은땅으로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대학부를 지금보다 더 처참한 땅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패배할 수 없지만은 얼마든지 교회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고 이 시대 속에서 비굴하고 타락하고 비참한 존재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저열하고 더러운 집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이 자리 이 시간도 자기의 왕국을 지키고 확장하기위해서 더욱 더 뜨거운 강력한 세력으로 복음의 증인을 부름 받은 여러분들의 세력에 도전해 옵니다. 어떻합니까?
제가 중등부에서 전도사노릇을 2년 동안 했습니다. 고등부로 올라가라고 그래서 올라갔습니다. 건물이 틀려요. 저는 항상 토요일이면 설교를 준비해가지고 교회에 가서 강단 앞에서 엎드려서 철야합니다. 다른 제목 없습니다. 그 설교만을 위해서 합니다. 첫날 저녁에 갔습니다. 저는 여러분 제 기도하는 것 아시지만 소리내고 별로 기도 안합니다. 한 5년전 서부터 눈을 감으면 깊은 기도속으로 들어갑니다. 묵상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래도 충만합니다. 눈물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그날도 갔는데 강단앞에 딱 엎드려 기도하는데 교회 청소를 다하고 11시 반쯤 됐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는데 기도가 안돼요. 찬송도 안돼요. 목이 아파요.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다시 기도합니다. 그때 강력한 세력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악령의 세력입니다. 한 5년 정도 그렇게 기도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막 몸부림치며 기도하게 만드셨습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소리 지른다고 마귀가 도망갑니까? 기도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밀려오는 세력이 강력하면 거기에 대한 영의 반응이 강력한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문제가 해결이 안됐습니다.
두 번 올라갔어요. 다음 주에 또 갈 겁니다. 결판을 낼 것입니다. 그것이 거꾸로지고 무너지고 머리가 부서져서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지 않는 한 저는 확신하건데 그 건물 안에서 부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많은 시험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슴에 세겨두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로 토요일 밤마다 올라갑니다. '결판을 내자.' 이러한 마귀의 세력들이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이 땅을 묵은 땅으로 두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정적으로 여러분들의 구원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는 없지만은 언제든지 여러분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지식이 문제입니까? 성경을 많이 알면 됩니까? 인격이 고상하면 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자기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된 악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헌신된 악마의 도구들이 그들을 위해서 쓰임받고 있습니다. 확장시키기 위해서 더욱더 강력한 세력으로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여러분들의 대학부에 영성을 도전해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커다란 영적인 세력들을 느낍니까? 이 전쟁을 여러분들은 의식을 합니까? 이 피할 수 없는 전쟁앞에서 충분합니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