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함에 있어서 성독의 중요성
우선 이제 렉치오디비나를 말하기에 앞서서 오늘 이것이 왜 새삼스럽게 다시 강조되어야 하는 가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날에 있어서 신학공부의 문제점과 관련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신학교육의 문제점을 몇 가지 집자면 우선 첫째는 신학지식이 너무 파편화 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계몽주의 이후로 신앙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면서 근대학문의 발전이 촉진되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의 발전은 학문 전체의 목적을 규정하고 그것을 통합하는 구심점을 유지하지 못한 채 전문화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문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로 통합하여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학문의 유익인데 그렇지를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학 교육도 일반 학문에서의 처철한 분과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알렌소칼이라는 사람이 책을 한권 썼는데 책을 우리나라 말로 ‘지적 사기’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책을 썼고 그 책은 말하자면 어 부즈 오브 사이언스 인가 책이 였습니다 이 사람이 책을 썼습니다 배경이 요새 나오는 철학논문도 아주 해체주의적인 성격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를 들자면 철학 논문 제목이 이 이콜 앤시 자승이에요. 그걸 가지고 썰을 푸는 거에요. 그래서 그 썰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 오늘날의 생각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 알렌 소칼이라는 사람이 아주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아주 현학적인 과학논문을 써서 유럽에 있는 유명한 저널에 발표를 했고 그것이 발표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대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하자면 논평들을 내게 되었어요 그러나 어느날 이 사람이 갑자기 기자회견에 발표를 해서 그때 그 논문 아무것도 아닌 썰이었어“ 하고 발표를 한거에요 그것이 유럽에서 굉장히 커다란 사건이 된거죠 그래서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뭘 보여 주냐하면 오늘날 학문이 얼마나 아주 나뉘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고, 나뉘어진 그 속에서 사실 소통이 얼마나 어려워 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학문의 체계는 기계를 만들고 핸드폰을 제작하고 하는 이러한 공업발전에는 이바지 할 수 있는 체제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학문의 고전적인 가치인 그 학문이 우리로 하여금 보다 가치있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하는 그런 종류의 유용성을 가져다 주는데는 이바지를 못한다는 거죠 이와 똑같은 일들이 신학의 분과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교회에 계신데 성도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성경이 아주 난해한 구조를 가지고 와서 목사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아 이거는 교수님들한테 물어봐야지 일반 목사는 모른다고 했대 그 사람이 일반 교수님한테 가서 물어봤어요 교수님 성경에 이게 뭡니까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조직신학을 전공하기 떄문에 성경은 잘 모른다고 했대 그래서 성경신학을 전공한 박사한테 가서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구약전공이라 신약은 모릅니다 그랬대요 그래서 신약을 전공한 박사를 찾아가서 물어봤더니 그사람이 하는 얘기가 제가 신약을 전공하긴 했지만 복음서가 전공이기 때문에 사도바울 서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누굴 찾아가야 하냐고 하니까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 가라고 하래 그래서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더니 저는 바울의 신학을 전공했지 바울의 편지를 구체적으로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해서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 갔더니 미안합니다 물어보신건 8장인데 저는 9장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뭔가를 물어볼 때 거기는 제 전공이 아니어서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 사람을 굉장히 돋보이게 하는 거에요. 얼마나 지식의 표준이 높으면 상당히 알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선언을 할까 그런 상황이 된 거라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은 명백하게 일반 학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들을 신학이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신학과 단절된 조직신학, 역사와 거의 대화하지 않는 성경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성경을 다룰 줄 모르는 실천 신학, 이런 것들이 각각 separate 되어서 이것들을 통합 시키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예로부터 교회를 세우려면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exegetica가 기본인데 그런 exegesis(주해)를 할 수 있도록 원어에 훈련되지 않은 조직 신학을 하고 교리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면면히 내려오는 개혁신학의 아름다운 성서중심적인 전통을 깨뜨리는 아주 잘못된 현상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삶의 지혜를 결국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마스트리에트는 자기의 페올로기오프렉티카 페올로기야라는 이론실천신학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독트리나 에스디벤디 데오 베르크리스툼.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기 위한 것이다 결국은 신학의 목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고 추구하는 목표 자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분에게 순종하면서 살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이어그램에서도 보겠습니다마는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창조된 것들에 대한 지식이고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분의 지성안에 있는 것의 생각의 발현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 발현된 사물들을 통해서 우리의 지식을 채집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모든 지식들이 다발처럼 엮어져서 그 지식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하게 정향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모든 지식들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지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신학의 중심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고대그리스에서는 이 세가지 학문에 삼각형을 제시했어요 그래서 사람이 있고 피지카 로기카 에티카. 자연적인 사실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논리로 연결하고 마지막에 그것들이 결실하는 것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것인가, 그 어떻게 살아야 될것인가가 개인적인 문제일 경우 개인 윤리학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집단적인 문제일 경우 정치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함으로서 배움 그 자체가 전체적인 통합을 이루면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참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사유와 학문 추구의 목적이었거든요 이런것들이 결국 계몽주의 이후에 들어오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가는 디컨스트럭션, 소위 얘기하는 해체주의까지 도입이 되면서 이것들이 모두 와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맨 처음 사도바울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주의자들이 철학을 강력하게 비난했죠 그러나 그들이 강력하게 비난한 것은 참된 철학을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베라소피아를 비난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철학을 비난하고 비평한 것이에요 그래서 오류에 빠지고 이교사상에 물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오용된 이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 특히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경우에는 하나의 중요한 격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참된 철학은 참된 신학과 다투지 않는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참된 철학은 이성으로부터 시작되고 참된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것이 참으로 절대적으로 올바르게 추구된다고 할 것 같으면 두 개는 하나의 포물선을 그리는 하나의 완성된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세의 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소위 이야기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중대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 것이죠 그것은 뭐냐하면 중세의 철학자들은 이 두가지가 사실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부터 출발하고 이성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들을 하나로 만들고 이것들이 믿음과 이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성의 힘으로 가능했다고 신뢰를 한 것이 말하자면 중세시대의 철학자의 견해였다면, 종교계혁자의 후예인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신학적 진료. 즉 인간에 대한 전적 타락의 상태, 그리고 부패한 인간의 타락한 영성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참된 것들을 추론해 낼 수 있는 능력자체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소위 얘기하는 노티티아 디플렉스 혹은 코브니찌아 디플렉스, 이중지식의 문제를 어떻게 두 개를 연결하는가 하는 문제를 칼빈도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결정이 되냐 하면 결국 이성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가상적으로는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참된 철학이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성경계시에 의해 끊임없이 꾸지람을 받지 않고 올바르게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참된 철학이 될 수 없다하고 하는 것을 갖게 되죠 그래서 이렇게 해서 맨 처음 이런 철학들이 고민하던 문제들이 무엇이었냐 하면 철학은 더 웨이 오브 리빙에 대한 답이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할 것이냐 라고 하는 그것이 말하자면 고민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것들이 사실은 사도들이 그런 것들로 인간이 참된 지혜로 돌아갈 수가 없고 새로운 지혜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시한 것이 바로 복음이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는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을 강력히 얘기 하는데 그 복음은 우리가 알다시피 소피아에요 필라 소피아가 바로 필라와 소피아의 합성아닌가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의 대안으로 보았다 너희 철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더 올바른 더 웨이 오브 리딩을 찾아 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식한 자들도 도달할 수 없는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더 웨이 오브 리빙 투 해피니스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요약되어 있다고 제시를 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신학이 내려온 하나의 전통이었거든요 포괄성을. 그런데 그런것들이 상실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그 다음에 등장한 문제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목회적인 적실성이 상실되는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고 했는데도 그것들이 파편처럼 찢어진 것들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것을 통합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목회지에 돌아가서는 강론속에 나오는 쪼가리쪼가리 찢어진 지식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보자 군대에 처음 가면 우리들이 각개전투를 배운다 그리고 자세를 배우지 않습니까 찔러 막어 그런것들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가 16개 동작을 배웠다 치자 그러면 전쟁이 일어날 때 적군이 나에게 딱 맞춰서 내가 찌르면 피하고 이렇게 딱 해주는가 안해주거든요 그게 무슨 놀이도 아니고 그런데도 그렇게 창검술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기본기에 충실하게 익혀 졌을 때 순간적으로 반사적으로 자기가 움직여도 규칙을 따라서 정확하게 과학적인 자세가 나와서 최선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적군을 죽이고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테크닉을 기르게 된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러면 동일하게 이러한 것들을 자신이 경험하고 와야지만 이 속에서 녹여내는 거거든요 그럼 생각해 보라 우리들이 성경신학을 배우고 문서신학을 비롯해서 오경에 저작설 그다음에 히브리어 그리고 히브리어의 뿌리가 되는 오가리 오가리더라던지 세미티 세마이티라던지 필로로이지라던지 그 다음 여러 가지 구약신학 해석의 원리라던지 구약신학역사라던지 이러한 것들을 수없이 배운다 그게 이 강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을 그냥 사람들에게 풀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엄마가 먹어야 하는 삼겹살을 갖난 아기의 입에 넣어 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먹고 다 소화해서 젖이 퉁퉁 불면 갓난아이를 데려다 젖을 풀어 먹이는 것이지 그것을 비타민씨 들었다고 아이의 입을 벌리고 상추를 집어 넣고 단백질이 많다고 돼지고기를 쑤셔 넣으면 아이가 살겠는가 죽지 자기가 그것을 소화해야 되는데 그 소화하는 그것은 학문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에요 학문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 시간에 네 시간동안 배웠던 소위 얘기하는 지식과 학문의 결합의 말할 수 없는 신비가 그 찢어진 학문 전체를 융합해서 그 학문으로부터 전혀 다른 것을 녹여내는 그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여자들은 젖이 안 나온다 그런데 삼겹살도 먹고 과일도 먹고 땅콩도 먹고 별의 별것을 다 먹는다 그래서 각종 영양소가 젖에 가득 들어서 나온다 그런데 아이에게 젖을 물렸을 때 젖을 빨을 때 젖에서는 상추도 안 나오고 땅콩도 안나오고 피자도 안나온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있는 성분은 나온다 그럼 그것을 자신 속에 녹여내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결코 학문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절대로 학문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지식과 경건이 소위 이야기하는 보에티우스의 표현에 의하면 베르지 결혼을 하고 결합을 하는 이것인데 이 결합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그노시스 자체는 학문을 통해서 전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신비속에서 우리들이 경험하게 되는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목회적인 적실성을 갖게 만들어 주는데 그런데 그런 것들이 없으니까 신학교회에서 아무리 많이 가르쳐 줘도 적실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거죠 이러면서 어떤 재밌는 현상이 벌어지냐 하면 한국에 있는 신학 교회에서 반성을 하는 것 왜냐하면 우리가 열심히 가르쳤더니 학생들이 나가서 하는 말이 신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이 다 소용이 없더라 그래서 싹 쓸어 버리고 어느 목사님 밑에 들어 가서 새로 배운다그러더라 그렇게 해서 신학교에서 무슨 반성을 하냐하면 우리가 너무 데어리티컬 했다 너무 이론적으로만 가르쳤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실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이러면서 철학과목도 빼고 이론신학 과목을 계속 무장해제 시키면서 집어 넣는게 전도학 무슨 실천학 무슨 실천학 무슨 실천학 과목을 마구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그나마도 있던 뿌리가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또하나는 뭐냐하면 신학에 있어서 성경중심성이 흔들려 버리는 것 성경의 중심성이 흔들려 버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림을 하나 보여드리겠는데 나는 이 문제를 원심력과 구심력의 문제라고 보는 거죠 그러면 원심력과 구심력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물체를 줄에 매달았다고 칩시다 그리고 돌린다 그러면 물체가 돌아간다 중심에 있는게 성경이고 그 외곽으로 도는 것이 일반 학문이어야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자 어떤 물체를 엮어서 돌린다고 치자 그러면 이쪽에서는 나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죠 이것을 구심력이라고 얘기하고 밖에 있는 것은 계속 돌면서 가속도가 붙으면서 이것들은 이 중심에서 이탈하려는 강한 힘을 갖게 되죠 그래서 이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이루어 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된다 이런 관계가 일반학문과 성경, 좁게 얘기하면 신학의 여러 과목들과 성경, 넓게는 일반 학문 많은 과목들과 신학, 이것이 이런 관계를 이루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굳이 학문을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 연을 띄운다고 생각해 보자 연을 높이 띄웠다 연은 바람불 때 띄우는 거거든요 연을 높이 띄우려면 잡아당겨서 줄을 팽팽하게 해야 된다 그런데 저쪽 연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이 나는 더 올라 갈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땡기나“ 그래서 만약 탁 끊어 주면 이것이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것이 중심에서 성경이 잡아 당겨야 되거든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어느 신학자가 자기의 신학의 중심은 성경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학자가 누가 있느냐 이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성경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가지고는 안되고 자기의 모든 내적인 신학활동의 중심속에서 확고하게 성경의 진리에 사로잡힌 어떤 정확한 테올로지컬하게, 신학적인 확신과 신학적인 테올로지컬 엔폴스먼트가 신학적인 강제력이 이 모든 학문을 공부하고 신학분과를 공부할 때 밖으로 이탈하려고 하는 것들을 강하게 붙들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이탈하기 까지 하지 말고 조금만 하면 어떻습니까 하는데 조금만 하면 그 신학이 아주 볼품이 없는 신학이 되는 것이죠 다음 그림을 보도록 하자 달팽이같은 그림이 나온다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냐하면 성경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성경 신학. 그러니까 메니 북스 마스터 컨트리 뷰트 투 원북.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한 책을 이해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많은 책들에 대한 탐구는 한 책에 대한 이해에 이바지 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자 하우드리안 교수님이 경건이 모든 학문과 지식의 영역속에 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사실은 실제적인 지적활동들에 있어서 그것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말씀드리는 이러한 원리로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 그림을 보면, 사람마다 다 탁월하게 공부를 많이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에 강하게 사로잡힌 다음에 지적인 능력 만큼 도는 거에요 능력이 워낙 없으면 성경개론하고 성경신학하고 기본적인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 문답만 돌다가 능력이 그것 밖에 안되니까 그렇게 하다가 죽어도 풍성하게는 못해도 잘못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다음 그것을 콤파스처럼 두고 이것을 더 그린다 그래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일반학문과 지적인 지식이라는 거에요 이것이 많게 되면 확 휘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성경이라고 하는 책이 그렇게 간단한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굳게 붙들었던 계시에 대한 확신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연속성 문제였어요 일반계시의 한계를 너무 무시해서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특별계시의 중요성만을 워낙 강조한 나머지 일반계시와의 단절성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둘다 개혁신학이 추구하고 있는 바가 아니에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 그것은 바로 철학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죽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도 사실은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가 없다 굉장히 어렵겠쬬 그렇지만 어쨌든 의학에서는 의학의 죽음이면 충분하고 문학에서는 문학적인 죽음이면 충분하다 또 예술에서는 예술이 생각하는 죽음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그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의 이러한 평면이 있다고 치자 이것이 하나의 학문의 디멘션이라고 치자 의학의 지평이 있다고 하자 의학의 디멘션이 있는데 여기에서 죽음이 얘기하고 지나간다 이것과 교차하면서 의학뿐 아니라 생물학 법학 사회학 생리학 미학 문학 예술. 다양한 지평들이 죽음이라는 다지평으로 교차를 한 그 중심에서 그 모든 교차되는 지점을 하나로 크로즈업에서 이 모든 학문속에서 말하는 죽음의 개념 자체를 우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 모든 것을 포괄 할 수 있는 총체적인 설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철학의 임무라고 보는 것이죠 철학은 머리 좋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는 것이지 머리 나쁜 사람들이 공부할 수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도 조금 좋아서는 남이 한 것을 계속 욹어 먹으면서 먹고 살고 나름대로 자기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거의 천재적인 능력이 있어서 종교적인 체험속에서 이러한 다지평들이 확 다가오면서 확 쏟아 낼 수 있어야 되거든요 대표적인 사람이 에드뭐드 후손이라는 사람이다 현상학자 잖아요 하이델베르크가 이 사람의 제자거든요 이사람이 막 한순간에 진리의 빛이 쏟아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신문용지만한 데다가 제자를 불러 놓고 막 불러 준 거에요 그래서 참고도서도 없고 막 썼는데 그것을 쓴 자료가 신문용지만한 것으로 4만메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중에 몇 장에서 잘 정리해서 낸 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다지평적인 사고이다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기 어렵다고 하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고백록이라고 본다 고백록이 삼위일체나 자유의지보다 훨씬 어렵다고 믿거든요 마흔 여섯 살에 쓰여진 그 책에서 원숙한 상태에서 수많은 지식의 지평들이 녹아서 그 안에 한꺼번에 삽입되서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그 지평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고백론에 대한 온전한 해석이 어려워 지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신학은 뭐냐 다음 그림이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보여준다 밑변은 많은 학문들이 다양한 종류의 학문들이 교차하면서 지나간다 그것들을 전부 수렴해서 그런 학문지평에 얽매이지 않는 총체적인 설명들을 만들어 낸 것이 철학이라면 그 철학이 삼각뿔의 밑변을 형성하고 있다면 신학은 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 밑에 철학자체가 다지평의 학문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데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철학을 아는 것도 아니고 다른걸 다 알아도 철학을 모르면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거거든요 이것을 건너 뛰어서 신학의 지평으로 통합을 할 수 없는건 아니겠지만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학문들이 말하자면 교차하는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이야기 했지만 역사 심리학 물리학 윤리학 정치학 문학 예술 법학 경영학 사회학 공학 천체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해양학 지상학 화학 건축학 천문학 의학 생물학 생화학 천체물리학 수학 광학. 이런 수많은 지식의 다지평들과 함께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시간도 없는데 언제 이런 공부를 하냐 그것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사실은 제가 30대 후반에는 신학의 다양한 분과들이 한눈에 통합되는 것을 불과 몇 달 사이에 경험을 했고 40대 후반에는 이 학문의 다양한 지평들이 어떻게 찬란하게 아름답게 엮어 지는 지를 경험했다 그것은 하나의 영적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 중에 한 경험을 예로 들려 주려 한다 뭐냐하면 우연한 기회에 천체 물리학을 일년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다시피 학교를 다닐 형편도 안 되니까 과외선생님을 불러서 매주 일년에 50주 정도 천체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전공한 사람들이 보면 그정도 수준은 대학교 교양정도의 수준밖에 안되겠죠 2~3학년 수준 밖에. 그렇지만 일년동안 공부하고 나서 온 몸에 전율할 것 같은 신학적 충격을 자연학을 통해 경험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건 뭐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생물학 심리학 등등의 것을 공부했는데 자연적인 사실에 대해 내게 가르쳐 주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미닝 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는 것이죠 최근에 김영길 총장님을 만났어요 재료공학을 하시죠 너무 궁금하고 신학적인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해결이 안되는 개념이 에너지였다 20분 동안 아주 어려운 말로 설명을 하시더니 마지막 결론이 에너지가 무언지 우리 과학자는 모릅니다 이것이 답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학문의 끝이 연결이 되는 것이죠 별들이 생성되는 과정과 그 것이 우리 몸속에 일어나는 의학적인 사실과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는 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별들이 대부분 항성이거든요 그것이 어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쾅하고 폭발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분진들로 퍼지는 것이다 퍼진 별폭풍이 영향을 미치면서 다른 스타더스트들을 모이게 만들어서 그것들이 모이면서 서로 핵반응을 보이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느 별 하나가 죽으면서 또다른 별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최근에도 불과 몇천만 광년 떨어진 그 곳에서 하나의 커다란 우주의 먼지들이 모여있는 별 구름 떼들이 발견이 되었는데 그 크기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62광년쯤 된다는 것 그런것들이 폭파를 일으키는 것이에요 똑같은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몸 안에서 생물학적으로 세포가 있어요 뇌세포를 제외하고 3개월이면 우리 몸에 전 세포가 3개월 전에 있었던 세포는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세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밝혀내지 못하는 의문점들이 있는데 세포가 죽는 것이다 괴사라 그러는데 과학적으로 안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포가 죽는데 두가지 죽음을 하는데 네크로시스의 죽음과 아포푸토시스의 죽음이다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뇌사하는 것 그런데 아포푸토시스의죽음은 아직 세포가 성성한데 스스로 자살해 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자살함으로서 그때에 발생하는 ATP라는 화학 에너지를 옆에 있는 세포에게 전달해서 세포가 분열하고 그 공장을 가동하는 에너지로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몸에 어느 부분중 서로 세포가 안 죽겠다고 몸부림치고 뭉치는 부분이 있다 그럴 경우엔 어마어마한 양분이 필요하다 양분을 빨아 들이니까 기하 급수적으로 커지는데 그것을 가리켜 생명력이 충만한 세포. 그 세포를 가르켜 암세포가 그런다 이것은 다시 신학 파트로 넘어오면 빌립보서 1장을 생각나게 만든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런 진리들이 학문.학문 학문을 타고 노마비씽킹이라고 하는데 유목적인 사고가 되면서 들어오게 될 때 석달동안 하늘을 쳐다 보며 밤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감격을 했어요 정말 얼마나 이 아름다운 우주인가 하나님이 이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몰랐고 신학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때는 그저 캄캄한 하늘이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그 하늘은 정말 엄청난 함성을 우리의 이성을 향해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이 코스모스 자체가 하나님의 거대한 통치안에 있는 질서로운 체계라고 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별을 보며 신학적 해석을 통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한 것들이 모두다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파편화되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렉치오디비나를 이야기 해보자 하는 것이다 렉치오디비나 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 두 단어 렉티오 ‘읽다’라는 것과 신적인, 거룩함을 의미하는 ‘디비나’의 합성어이다 이 말을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이 오리게네스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서 테이나 아나그노 시스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의 정확한 번역이 렉티오디비나에요 이처럼 렉티오는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후일에 와서는 렉티오의 대상이 성경뿐 아니라 신학연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읽는 것들까지 다 포함해서 신학공부 과정 속에서 렉티오 디비나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성독의 역사는 기원을 찾는 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크리소스톤 디프리암스 암부로시우스 라는 초대 교의 교부들 뿐 아니라 끌레로보이베르나르, 귀고와 같은 중세의 교부. 수도자들도 렉치오디비나를 실천했습니다 중세에 와서는 렉치오의 대상으로서 성경뿐만아니라 오리기안 어거스틴과 같은 신학자들의 저서뿐 아니라 성경주석서 신학자선, 교부들의 설교집이나 문헌을 읽는것까지 렉치오디비나라 불렀다 이 성독은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통용되는 것이 세 단계이다 렉치오, 메티타치오 묵상, 오라치오 기도, 컨텐플라치오 관상 .이렇게 네 단계로 이뤄져 있는데 모든 사람이 모든 시대에 네 단계를 획일적으로 똑같이 실천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생비토르의 휴와 같은 사람은 성독을 다섯단계로 확대해서 다음 렉치오 메디타치오 오라치오 오라치오와 컨템플라치오 사이에 오페라치오를 집어 넣었다 그래서 실천하는 자체가 렉치오디비나의 한 과정속에 있다고 본거죠 그런가하면 보나벤치아 같은 사람은 성독의 실천을 렉치오 자체가 메디타치오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세 단계 정도로 줄여 버려서 메디타치오 오라치오 컨템플라치오 이렇게 삼단계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사실 교부들 뿐 아니라 이미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있는 전통이었고 또 유대인들의 이런 전통은 이미 구약 안에서도 잘 발견되는 전통이었다 그래서 아다시피 구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낭독하여 들리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이 토라를 열심히 읽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은 그들의 경건에 있어서 거의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성독의 전통이 잘 계승되다가 12세기 13세기에 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12세기 13세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12세기 13세기는 중세의 후기로 중세에 신비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또 한편으로는 스콜라 주의와 그 이후에 중세의 신비주의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카톨릭을 개혁해 보고자 하는 자체적인 강력한 개혁운동이 일어났던 때도 바로 13세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은 대개 수도원 운동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그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신약 성경중 특별히 복음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그렇게 수도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건전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로마 교황청과 맞섰고 어떤 사람들은 교황청에 승인을 받거나 아니면 그 체계속에 움직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역사가들은 아마 13세기에 이런 카톨릭 안에서의 개혁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거나 훨씬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겠는가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서 성독의 전통이 이상하게 약화되기 시작하는데 묘한 것이 두가지 요인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한쪽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영향떄문이다 아다시피 신비주의는 기록된 계시보다는 내적인 광명과 관상속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비운가운데 그분과 신비적인 조우를 한 것이, 말하자면 신비주의의 추구점이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까 기록된 성경을 읽는 것들은 영성생활에 있어서 매우 유치한 단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렉치오디바나의 전통이 꺾이게 된다 또 한편에서는 정 반대적인 요인 때문에 꺾이게 된다 그것은 스콜라주의의 영향이다 스콜라주의는 알다시피 성경을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과 이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지식의 이성과 신앙의 통합을 이룬다는 미명하에 사실상 성경이 부교재가 되다 싶히 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나 이러한 많은 사변서들이 공부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보니까 성경중심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색중심적이고 철학중심적인 학문이 되다 보니 성경 자체를 렉치오한다라고 하는 의미가 약해졌다 오히려 렉치오의 대상이 일반 학문의 자료로까지 확장되는 상황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러면서 렉치오디비나의 전통이 현저히 감퇴하여 이런 전통이 새롭게 부활하는 중요한 계기가 일어난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자 신비주의 운동이 지성의 반함으로서 렉치오디비나를 약화시켰다면 후자인 스콜라 주의는 지성을 오히려 강조했기 때문에 렉치오디비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다시 성독의 중요성이 활발하게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중세의 렉치오디비나의 부활이 아니었다 여러분은 종교개혁가들이 카톨릭과의 논쟁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작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관 문제였다 그래서 여기 성경이 있는데 성경은 해석되어야 되는데 해석되야지만 신학의 결과물들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성경자체 안에서 성경의 해석의 원리를 끌어내서 성경을 해석하면 해석당하는 텍스트와 해석하는 툴 사이에 컨테누이츠가 일어나서 결과물들도 삼자 사이에 연속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카톨릭의 경우는 해석당하는 것은 성경인데 해석하는 원리는 익스트라비블리카 원리들이 너무 많았다 전승 트레디션 외경. 이런 많은 것들과 합쳐서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원리로 이 성경을 해석할 때 해석당하는 성경과 해석하는 원리 사이에 불일치성 때문에 여기에서 나온 해석의 결과가 이것과 맞지 않고 이 원리와도 맞지 않는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문제점 속에서 수많은 미신적인 카톨릭의 교리들이 마구 양상되고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공장부터 파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주장한 것이 66권 성경 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다 그리고 줄을 그어 버린다 그런데 그것은 카톨릭에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성경이 어디까지 라는 것을 확정하지 않았고 훨씬 후에 가서야 소위 제 2경전이라는 것을 신앙고백 속에 넣으면서 외경을 포함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신념이 종교개혁자들에게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모든 신학활동에 중심에 놓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열심히 중세의 렉치오디비나의 전통을 배워서 했다기 보다 종교개혁과 함께 일어난 성경진리의 강력한 부흥이 그들로 하여금 성경의 중요성에 눈뜨게 만들었고 그것들을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이 뭐냐하면 카톨릭의 경우에는 어떻게하든지 성경 그 자체로부터 회중들을 떼어 놓으려고 했다 심지어 강론을 할 때에도 라틴어로 강론을 해서 무식한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게 했고 둘 사이에 격차속에서 사제 계급들이 자기의 지도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자신들이 사역을 못할때에도 성경을 교회와 연결시키고 그 성경을 교회속에서 성도들과 연결시켜서 그 영적인 자양분을 성경속에서 직접 섭취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과감하게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운동들이 윌리엄 팀베일이나 마르틴루터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 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카타키스무스 같은 것들이 나오게 되었고 성경자체를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고백이 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와있다 주일날 뭐합니까 그들이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집에 와서 나누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읽고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고백을 하는 전통도 바로 그러한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설교가 청교도들과 종교개혁 이후에 있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성경과 설교 사이에 컨티뉴이츠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틴루터와 칼빈은 이 둘의 관계에 있어서 간략하게 표현을 했다 마르틴루터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빈은 법학자 답게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설교가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러나 권위에 있어서 성경은 원천적 권위이고 설교는 파생적 권위이다” 이런 신념이 강력히 있었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것 자체를 성경을 읽는것과 매우 중요하게 이 두가지의 실천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아마 로버트머리맥체인이라는 영국 청교도가 만든 매일 성경읽기표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일년 동안에 표대로 읽으면 신약을 3번읽고 구약을 1번 읽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당시에 많은 청교도들이 돌려 보면서 그 표로 체크를 하였던 것은 아주 유명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성경읽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성독의 전통은 영국 청교자들에 와서 굉장히 커다란 발전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들은 아다시피 자신들을 언약도라고 자청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퓨리탄이라 할지라도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한 퓨리탄들과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한 퓨리탄들은 약간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는 얼마든지 왕정을 두들겨 엎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래서 거기서는 교회의 정치체제와 치리, 정치제도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이 굉장히 발달을 한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왕조를 바꿀수 없는 국민적인 컨세션스가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다시피 크로멜혁명도 왕정복귀로 비극적으로 끝을 내는데 그것이 잉글랜드가 개신교로 돌아갈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결국은 역사속에서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 사람들은 뒤집어 엎을 수 없는 왕정과 정치 체제보다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를 깊히 고민하면서 그것들을 아주 농도깊은 말하자면 실천속에서 녹여내는 역할들을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나타났던 위대한 신학자들이 윌리엄펄킨스 존오웬 형이상학적 사변으로도 유명한 키도멜리안리차드벡스터 등등의 훌륭한 리즐리라던지 윌리엄엔스라는 신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신학자들은 사실 영국에서 자생한 신학자라기보다 대륙에서 형성되던 리폼더오도독스라는 전통에서 영향을 받고 흘러나오는 말하자면 퓨리탄적인 가지, 혹은 영국적인 가지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제 굉장히 역사적인 맥락속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던 주제가 있었다 그것은 임무 규칙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언약도로 칭하면서 대륙에도 두 개의 언약 전통이 있었는데 하나는 편무적 언약전통과 쌍무적 언약전통이 있었다 쌍무적 언약전통과 편무적 언약전통이 있었지만 당시에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편무적 언약의 전통이었다 칼빈에게서 이런 것들이 잘 나타난다 그래서 공로는 하나님이 오셔서 언약을 맺으시므로 당신의 주권을 우리에게 알리는 언약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영국 청교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들은 매일 매일 배교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죽어가게 되었다 몇만명씩 핍박을 받으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그 속에서 수많은 변절자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이 사람들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과연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배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수없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이 사람들이 언약의 개념을 가지고 이미 대륙에 있었던 쌍무적인 언약의 관계 즉 언약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 주권으로서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속으로 불러들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완벽하게 주권적인 행위라면 하나님이 왜 우리를 언약의 당사자로 부르셨을까 그래서 주권성이라는 일방성과 함께 의무라고 하는 쌍방성이 묶여져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저의 판단으로는 존오웬을 비롯한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고 철학적인 문제인데 복잡한 학문적으로 유능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풀어 냈다 그래서 존오웬 같은 경우 이것들을 기가 막히게 풀어내서 오히려 주권에 치우치면서 자신의 구원이나 배교의 문제에 있어서 나태해 지기 쉬운 사람들을 말하자면 신학을 온전하게 하는데 커다란 이바지를 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철학의 논리들이 동원되게 되는데 그렇게 풀어내어서 아주 아름답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과 주권적인 은혜와 상충되지 않는 쌍문성을 가진 언약 관계속에 언약도의 위치를 설정함으로서 매 순간 매 순간하나님의 언약적 의무에 충실하게 살아야 할 언약백성들의 의무를 일깨워서 그들로 하여금 엄청난 용기와 확신을 주는 도구로 이 구도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자신들을 하나님의 언약 관계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두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한 진리를 나누는 외적인 요소와 두 번째는 성령에 의해서 끊임없이 붙들려 사는 실제적인 내적 삶 이 두가지에 의해 언약 백성들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들이 잘 아는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이 어몽더자이언츠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영국청교도들을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두가지를 이야기했다
성숙된 경건과 연단된 꿋꿋함으로 나갔던 것이다 성숙한 경건이란 무엇일까 온갖 연단을 다 견딘, 그러한 신앙의 측면이라면 굽히지 않는 꿋꿋함이란 무엇이냐면 사상의 장중함이다 왠만한 것에 굴복될 수 없는 사상적 철저함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경험 그 코아가 바로 성경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영국의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들이 소위 이야기 하는 큐티, 콰이어트 타임의 전통이 있었다 침묵의 시간이라고 하는. 그런데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을 중심으로한 묵상이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한 묵상이 무엇이냐 하면 영국청교도들 속에서 아주 발달된 신학의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신론이다 그래서 아다시피 스테판차노의 디바인에트로뷰트라고하는 책은 800페이지 되는 책인데 전부다 하나님의 속성만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책이다 그러니까 신론이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러면 어떻냐 하면 자신들이 언약도로 살아가고자 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어떤 식으로 공급받냐 하면 성경을 묵상하면서 성경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깊히 묵상하면서 그 성품의 빛 아래서 그 분과 언약을 맺은 자신의 상태 위치 의무 미래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 거기에서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우리들이 하나님이 안 보이면 삶과 죽음이 너무나 투파 너무 멀다 삶과 죽음은 인접점도 없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묵상속에 들어간다라고 하면 사실 하나님안에서 삶이건 죽음이건 양상의 변화일 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지는 그것이 내게는 더욱 좋으나 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었잖나 이런 식으로 그들이 핍박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 수 있는 놀라운 용기를 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그 중심에 성경이 있었다 실제로 청교도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10여년 정도 심취했는데 놀라운 특징이 뭐냐하면 우리가 평소에는 어디있는지 생각할 수도 없는 성경 구절들을 자기가 전개하는 이론에 마구 끼워 넣는 것이다 그때는 컴퓨터도 없었을 시대였다 이 속에서 뇌리 컹커넌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탁탁탁 찾아내는 것이다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 예증적 채집이란 것이 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것은 성경 그대로 하는 예증적 채집도 한다 그것 때문에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많이 욕을 먹으셨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막은 장면이 나온다 그걸 놓고 부흥을 가로막는 게 뭐냐고 설명을 하신 것 그래서 들고일어나 세상에 그런 알레고리가 어딨냐고 하는데 로이드존스목사님은 처음부터 그것을 풀어 설교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를 성경에서 들은 것이다 그런 것이 오히려 청교도 전통이다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로 채용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탁월한 귀재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뭐냐하면 성경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인스튜트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와 인용된 성경구절이 몇 구절인지 아는가 3천 구절이 넘는다 이것들은 결국 뭘보여주냐 하면 신학자로서 기본적인 자질 자체가 그 당시에는 경전인 성경을 거의 안에 암기된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야 됐던 것이다 특히 오리지널 텍스트로. 존 오웬같은 경우에 엄청난 수많은 인용 구절들이 수없이 나오는데 그것들이 오리지널 텍스트로 수없이 나오고 이 성경구절을 갖고 해석했던 교부들의 해석사의 텍스트들 사이를 마구 오가는 것이다 제가 영국에 가서 굉장이 힘들게 존오웬 목사님이 죽은 후에 유족들이 목사님의 서재를 털어 옵션에 붙였던 목록을 찾았다 요만한 몇페이지 안되는 것을 24만원에 복사를 해 왔는데 그것을 보니까 충격을 받았다 어마어마하게 일반학문들에 대한 자료들이 많은 것이다 특히 철학에 대한 자료들. 플라톤 전집이 두 집이나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방대한 자료들. 그 모든 것들이 전부다 하나의 체계에 이바지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아주 능숙하게 성경 어느 구절을 쓰든지 말하자면 창고에서 옛것과 새것을 내오는 서기관과 같이 그렇게 성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해석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 이야기 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예를 들면 투시야 라는 단어가 있다고 치자 영원한 실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단어인. 투시야! 그러면 그것의 콩커너스가 머릿속에 쫘악 떴다는 것이다 뭐 워낙 잘 아니까 굳이 영어 성경을 가져다 큐티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히브리 성경으로 큐티하는데 30년 40년 읽다보면 외워지지 않겠어요 우리도 한글 성경 오래 읽으면 뭐, 그러면 금방 찾았아요 그런 식으로 이것들이 쭉 습득되어 있었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의 실천이었다 그런데 이 실천 속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이 컨템플라치오는 빼버리는 것이다 컨템플라치오가 관상인데 그것이 뭐냐하면 자기비움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는가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고있다는 자기 자신도 잊어 버리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너무 유사한 거다 그런데 요즘 누구라고 얘기하지 않겠는데 광고에서 널리 알려지신 분이 나무를 묵상하십시오 당신이 나무와 하나되어 갑니다 뭐 어떡하자는 거냐 정말 걱정스럽다 그래서 용어 하나를 우리들이 허용을 하면 결국 사상은 언어를 타고 들어오기 때문에 용어는 허용하고 사상은 허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걸 타고 마구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것들은 빼버리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것들이 무엇과 만나는가 하면 소위 이야기 하는 꿈베르보의 신앙과 중요하게 연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존오웬이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성경계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이렇게 얘기한다 성령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경의 계시가 체계적이고 일관성있게 지성에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안하잖아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성령은 받았지만 성경은 여전히 졸립더라 그러면 오웬한테 물어보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기분좋을 때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기분 나쁠 때는 그런 이상한 영의 역사일지 모른다 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성령과 성경의 역사가 지돌이라고 아세요 문의 심지처럼 문이 이렇게 돌잖아요 쥐돌이가 성령이고 돌아가는게 말씀이라고 본 것이다 개혁파정통주의자들이 이런 사상은 고마로스에게서 정확히 나타난다 이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떼어놓게 되어서 성령쪽을 따라가면 아나벱티스트의 내적 광명쪽으로 흐르게 되고, 그다음 떼어 놓아서 지성적으로 치우치면 지성주의, 합리주의 쪽으로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쥐돌이의 위치를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냐 하면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투철한 확신과 성경연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학문적인 노력들이 종교개혁자들의 다음세대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18세기초반까지 흘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렉치오디비나와 신학함을 어떻게 회복해야 될것인가 결국 모든 지식에 있어서 그 중심성은 종교이다 그 좋은 예가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이다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이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엄다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의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었죠 구약에 대해서 박학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스토아 철학에 대해 아주 능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당대에 상당히 발달된 학문들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나 문체속에서 나오고 심지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설교속에서는 아라투스의 작품에 나오는 세속 작품들의 기록까지도 거기에서 인용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그런 것들에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예수를 믿은 다음 누구에게 성경공부를 했는가 유대교 지도자의 길을 가던 사람이 기독교로 전향한 다음에 누가 그를 가르쳤어요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에게 무릎꿇고 장시간 학습을 받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추측이고 성경은 근거가 없잖아요 어디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다메섹으로 가는 사건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를 핍박하러 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냐 사실 예수님은 사울과 만난 적이 없었다 교회와 예수님이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사울이 주여 뉘시니이까 하고 엎드려 지면서 거기서 완전히 깨뜨려 지는 것이다 그때 얻은 것이 뭐냐 하면 그노시스그리스투 였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하게 되는데 성경이 우리에게 없는 지식을 적극적으로 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교정하는 강력한 힘이 성경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에 유익하다고 할 때 이것은 우리의 윤리적인 생활만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인 에티큐드까지 전부다 포함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냐 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자는 저주받은 것이다 확신을 유대인들의 표준적 확신을 자신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메시아일 수가 없는 거죠 그것은 중대한 신성모독이었다 핍박하러 달려가는 것이다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았다 두 가지 팩트가 충돌을 하는 것이다 하나는 저주를 받았다라는 신학적 팩트. 그 다음에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현실적 팩트. 이 두 개 사이에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조화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둘다 부인할 수 없는 팩트였다 그때 이사람이 그 순간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 하면 성경에 보면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도 있고 살리심을 얻은 사람도 있다 아주 예외적인 사람이에요 모두다 공통점이 뭐나하면 하나님께 아주 높이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인정받은 사람이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저주받아 죽은 이 팩트와는 완전히 상충되는 거에요 여기에서 미닝 오브 데스 오브 크라이스트를 발견하게 도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저주를 받고 죽은 것도 팩트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살아나신 것도 팩트다 그러면 도대체 이 팩트가 연결이 되냐 죽긴 죽었는데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죽은 것이다 라고 확 터지면서 지성이 열리면서 한번에 빛이 확 들어오는 거에요 그러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같은 탁월한 철학적인 위대한 지평의 글들이 장엄하게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한순간에 이뤄진 것이다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그래서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아는 길이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아는 길인데 경륜적 삼위일체는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통해서 존재와 속성에 대한 인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경륜적 지평속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모든 지식의 전달 중에 최고의 매체가 뭐냐하면 인카네이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예수의 성육신이다 그를 통해서 가장 찬란한 빛이 확 펼쳐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이 사람의 눈에 확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이게 학문의 영역인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이다 그러면 그런 종교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중요한 진료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의 진리를 형태는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선포의 형태로 어떤 사람은 바라보는 형태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는 형태로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게 될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강력한 신학적인 회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지평들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에 사도바울이 그런 학문이 있었으니까 철학과 이 모든 지평들이 확 불이 들어오면서 열린 것이지 만약에 지식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냥 그것만 불이 들어오는 거지 그것에 충실하고 살면 나쁘진 않지 그러나 로마서나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와 같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그 장엄한 것들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결국은 모든 학문에 있어서 성경이 중심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칼빈이 이렇게 얘기하죠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먼저이다 그런데 그 지식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속주에 대한 지식의 빛 아래서 창조를 볼때에 아름다운 연결이 이뤄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원뿔을 보자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승구교수님이 비판하셨던 것처럼 일반은총, 일반계시, 일반학문, 일반적인 우리의 삶을 특별은총, 특별계시, 성경, 신학, 예배의 삶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는 것이다 평지가 있고 삥 둘러 우물처럼 담을 쌓은 것이다 이것이 이원론이다 그다음 이론론을 이야기 하는데 어떤 식으로 이야기 하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 다음은 하나의 영역 속에서 본다는 것이다 신학이나 일반학문이나 둘 사이에 부분성을 무시해 버려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사이를 무시해 버려 죄의와 창조사이를 무시해 예배는 삶이고 삶이 예배라는 것을 완전히 뭉개버리면서 이것이 성경적 이론론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예배드리는 시간에 가서 이웃돕기 바자회에 봉사하면서 자신도 예배를 드렸다고 감히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안 읽고 일반 잡지를 읽으면서 이 두 개가 계시의 연속성 상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목회자들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예배나 넓은 의미의 예배나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무규율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마지막 내리는 결론이 원뿔의 형태이다 보다시피 원뿔, 고깔같이 생긴 것. 이것이 성경적인 견해이다 일반 학문과 계시와 창조가 밑변이다 밑변 가장자리이다 맨 위에 탑 꼭지점이 신학특별계시 예배가 되는 것 그럼 맨 위에 올라가 평면도를 내려다 본다고 하면 동그란 원형은 일반학문 일반계시 창조의 영역이 되고 점이 딱 찍힌 부분은 신학특별계시 제2의 예배 좁은 의미의 예배가 된다 구심점은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정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똑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래서 이것이 연속되어 있는데 평면으로 연속되어 있는게 아니라 기울기로 연속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를 이루면서도 이것들이 층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복이 소중하지만 그러나 베라카의 복보다 에세르의 복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도 귀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먹여주시는 그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그것은 삶의 지평으로 확장되어 가야 하지만. 그러면서 결국 꼭지점 위에 올라가야 할 센터오브센터가 무엇이겠느냐 바이블 성경계시다 이 말이다 그러면 그것을 끊임없이 읽고 하면서 학문의 영역을 넓혀가고 해서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불붙는 마음으로 이 진리로 모든 학문을 꾸짖고 나무라고 책망하고 싸매고 고쳐주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지식을 나누어 주고 그릇된 학문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학문을 사용해서 그 학문이 얼마나 신뢰 할 수 없는지를 보여줘서 성경계시로 돌아오게 하고 그 모든 것들이 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기초로 해서 성경에 대한 불붙는 확신으로 일어나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내 영혼이 주님을 만나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는 실제적인 프렉티스 오브 파이어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지성의 사람. 지성의 사람이면서도 성경으로 무장된 사람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이 성경으로 이바지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