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강해Ⅲ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11월 16일
목 차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 2001.10.7 주일오전 1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2001.10.14 주일오전 19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5) 2001.10.21 주일오전 28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6) 2001.10.28 주일오전 40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7) 2001.11.4 주일오전 51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8) 2001.11.11 주일오전 59
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9) 2001.11.25 주일오전 72
8.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10) 2001.12.2 주일오전 86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산상수훈 가운데 첫 부분에 나오는 팔복 그 중에서도 첫 번째 복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소유하기 위한 한 방편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복을 받는 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성공과 축복이며 그것은 그들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 즉 to have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to do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다르게 무엇인가를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을 갖는 것, to have나 혹은 무엇을 하는 것, to do의 삶이 아니라 어떤 어떠한 사람이 되는 것, 즉 to be의 행복이라고 못 박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똑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깊은 영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혼란은 특별히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수많은 육적인 신자들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심 같은 것들을 조장하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난은 성경이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죄악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께 형의 소유를 나누어달라고 말하던 동생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형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독차지하고 동생을 나누어주지 않으니까 예수님께 와서 호소하기를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어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릇 사람의 생명이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관심은 소유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가난한가, 부한가 하는 것 자체가 신령한 축복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이점에 대해 더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바라보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소유하고 있지 않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예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되도록 우리를 휘몰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세상일뿐이고 신자는 신자일 뿐이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이 이런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재판을 할 때에 가난한 자라고 해서 특별히 그의 편을 들지 말라.” 가난한 사람이건 부한 사람이건 함께 논쟁에 휘말리고 소송이 있을 때 ‘저 사람은 가난하니까 약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정의로온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약자의 편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의 편에도 서지 말고, 옳은 것은 옳은 것, 그릇된 것은 그릇된 것으로 정확하게 판단을 해서 가려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의문이 들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복음 6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그 말씀은 그럼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6장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하면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격동기에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고 몸을 은신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영악한 사람들은 땅을 두 번, 세 번, 네 번 이렇게 겹치기로 돌려 팔면서 자기는 요만큼 노동을 하고 많은 돈을 부정한 방법으로 벌고, 세금도 안 내고, 투기 같은 것을 해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가책을 느끼거나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생각을 안 해서 그냥 하루 벌어 직장 다니고 먹고사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속적인 시각에서 보면 못난 사람들이지만 정신적으로 보면 오히려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성결하고 거룩한 사람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세속에 덜 물든 사람입니다. 세상을 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가난한 사람은 억눌린 군중이라고 보기보다는 세속에 덜 물든 순수한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실 때 부자는 단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자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일뿐 아니라 마음 자체가 부에 대한 욕망으로 꽉 찬 세속적인 정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물질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정반대도 아닙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물질이 하나도 없어도 물질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물질의 유무가 아니라 그 물질에 대한 그의 마음입니다. 탐욕에 이글거리는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먼 사람입니다. 제물에 대한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사는 사람은 제물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마음이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가시나무 떨기 같은 것이 많이 돋아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가난함’이라고 한 그것은 결론적으로 ‘심령의 가난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묘사는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의 묘사를 좀 더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희랍어로 ‘마까리오스’라는 복이고, 이 복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에쉐르’라는 단어인데 이 에쉐르의 복은 시편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1편에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의 그 복이 바로 에쉐르의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에쉐르의 축복은, 히랍어로 마까리오스의 축복은, 축복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이나 상황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축복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세상적으로 볼 때 복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고 심지어는 이방신을 섬기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유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부유한 삶을 살아갑니다. 지위도 아주 높아서 사람들을 부릴 지라도 누구에게 쉽사리 굴복하는 짓밟힌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녀들도 장성하고 잘 되어서 사회에서 내노라 하고 잘 삽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데도 건강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축복은 여기에서 마까리오스의 복, 혹은 에쉐르의 축복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복일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주고 싶어 하시는 복은 그런 종류의 축복이 아니라 에쉐르의 축복입니다. 물론 에쉐르의 축복은 영혼의 축복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많은 은총은 그의 물질이나 건강이나 그의 생업이나 자녀들이나 여러 것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시계가 하나 있다고 칩시다. 이 시계는 하찮을 것입니다. 저도 선물을 받은 것인데 얼마를 할 것입니다. 이 시계를 누가 주었는가가 이 시계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할 수 있습니다. 시계 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는데 그 시계를 준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유명한 사람이면 시계를 보는 사람들마다 시계를 받은 나와 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부러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사람과 시계를 주고받을 정도의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할 수 있기에 이것은 일반적인 시계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외국에 가면 고서점이 있는데 고서점에 가면 책들을 싸게 파는데 거기에 저자의 친필 사인이 있으면 50%정도 비싸다고 합니다. 팔아먹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주었는지 모르고 다 낡은 책이지만 50, 100년, 혹은 200년 전에 저자가 거기에 직접 사인을 했기 때문에 그 책과 저자의 사인이 만나서 책의 가치를 더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도 축복해주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돈 벌 때 우리도 돈을 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녀가 잘 될 때 우리 자녀도 잘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했을 때 우리도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받은 축복 한가운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이 번성하고 잘 되었을 때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고 감격이 넘쳤습니다. 성도들이 저녁을 사준다고 그럴 때 사업이 잘 되는가 꼭 물어봅니다. 잘된다고 하면 저녁을 먹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고 곱빼기를 먹습니다. 그런데 잘 안 된다고 지갑에 손이 왔다갔다 합니다. ‘내가 내야 되는데, 어려운데 얼마나 부담이 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미리 알았으면 안 갑니다. 잘 되었다고 그럴 때 좋은 것은 그 성도가 돈이 많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있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단지 부자만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복인지를 압니다. 하나님의 큰사랑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받는 복,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마까리오스의 복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쉐르의 축복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고 형통한 것이 별로 없는 데도 복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런 물질적인 축복이나 세상적인 번영과 마까리오스, 혹은 에쉐르의 복이 항상 일치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곤고한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그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에쉐르의 축복은 있는데 세상적인 번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오는 선택된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성도가 받는 축복을 여기서 마까리오스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복이 있도다”가 먼저 나옵니다. “누구, 누구 복이 있도다” 시편 1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 무엇 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의 행복인지를 말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태복음 5장의 문학적인 기법이 시편 1편의 그것을 그대로 따서 온 것입니다. 언어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문학적인 구조가 그렇습니다. “복 되도다” 그러면서 그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복됨이 무엇인가? 우리도 복됨을 추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복됨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번영은 아닙니다. 너무나 번영해서 하나님을 잊고 잘 먹고 살아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이도 물질을 기대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세속적인 복은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상관이 없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대하는 복은 그 복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신 복, 모든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번영하고 잘 살 때 자신의 행복을 몰랐던 사람이, 실패하고 큰 낙심을 당하면서 그 한가운데서 성도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 번씩 다 경험해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복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 되도다” 여러분이 찾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정말 그 행복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정말 그 행복의 한복판에 주님과의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 종류의 복된 사람들이 되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령에 일어나는 참된 변화입니다. 그것이 목표입니다. 심령은 인간의 마음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심령은 인간의 마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한복판에 있는 심령입니다. ‘영혼’입니다. 심령의 변화는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마음의 파장은 지, 정, 의에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의 존재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심령은 우리의 인격과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령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게 심령에 참된 변화가 일어나면 마음에 변화와 그의 존재와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갖는 중요한 특성은 이처럼 인간의 불행의 궁극적인 근원을 그 사람의 심령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대부분 그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심령의 변화가 필수적이고, 심령의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지정의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에 가장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변화된 마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고, 변화된 사람이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죄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죄악 된 사람들입니다. 죄의 지배를 훨씬 더 많이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을 성결한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마음이 성결한 사람입니다. 성결함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처럼 마음의 질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심령의 참다운 변화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마음,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가면 심령에 있고, 그 심령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채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데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령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인 것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방법입니다.
(예화) 열린 교회 신문에 나온 어느 자매의 간증 이야기 - 불신자인 며느리가 시어머님이 라디오의 새벽설교 말씀을 사모하셔서 새벽에 일어나셔서 들으시고 심하면 밤을 새우고 잠을 이루지 않고 들으실 정도라서 열린 교회 인터넷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어머님께 알려드리고 어느 날 아이가 잠을 자지 않고 보채서 아이를 재우다가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마침 설교 말씀이 십자가 사경회에서 십자가가 설교되고 있었는데 아이를 안고 생전 처음 설교를 들으면서 자매가 자신이 진심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어머님이 믿는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보십시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밤에 영접하고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고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니까 이제껏 무관심하던 신앙의 세계에 모든 것들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심령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고 가치관과 생각과 심지어는 그의 생활 모든 것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위험한 것은 이런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 심령의 변화는 마음의 영향을 미치는데 또 심령의 변화는 마음의 영향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은 심령의 변화가 뻗어 나오는 통로이기도 하고 또한 마음은 심령의 변화로 들어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정말 변화가 있습니까? 최근 들어서 여러분의 어떤 심령의 변화가 있습니까? 심경 말고 심령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변화는 반드시 심경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여러분이 심령의 변화를 받을 때가 되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뜻도 없이 와서 덜렁 덜렁 예배에 참석하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아본들 그렇게 수없이 예배에 참석했어도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변화는 한 번도 교회에 안 나가고 인터넷을 통해서 야밤에 주님을 영접한 그 여성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영혼의 변화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러분의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마음의 주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원하면 교회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자기 마음을 거기에 실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더듬거려도 좋으니까 자신 속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를 일이 분이라도 할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예배에 참석할 때도 ‘끝나는 시간이나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배가 끝나기를 가다리는 마음이 되어서는 결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심령의 변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어도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밭에 떨어져서 그 마음을 통해서 그 영혼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약에 이제껏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심령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두 가지로 위험한데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위험할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심령의 새로운 변화가 없이는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어도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적절하게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대게 하나님 앞에 말씀을 통해서 영혼의 참다운 변화를 경험하여 심령 속에 일어난 어떠한 놀라운 변혁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교회는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내가 변화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고, 조금 큰 교회에 가면 여기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안 나서 변화 받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설교를 너무 짧게 하면 너무 짧아서 깊이가 없어서 변화가 안 된다고 하고, 좀 길게 하면 너무 길어서 변화가 안 된다고 하고, 찬양을 많이 부르면 찬양만 너무 강조해서 변화가 안 된다고 하고, 찬양을 안 부르면 너무 노래가 없어서 마음을 녹여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초라하면 시설이 너무 불편해서 마음을 뺏겨서 변화가 안 된다고 하고, 너무 좋으면 너무 화려해서 변화가 안 된다고 하고, 핑계거리는 수없이 많습니다. 지옥에 가면 핑계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모여 있습니다. 한번 가서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든 기도를 하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여러 가지의 방편에 참여할 때 정말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여러분의 심령의 영향을 미치기를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뭔가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울리면서 나오기를 원해야 합니다. 찬양을 불러도 그 찬양이 무엇인가 내 마음에 와 닿게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정말 주님의 손길을 내 마음이 느끼기를 바라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심령의 변화를 받는 지름길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심령의 깊은 변화를 받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저 가볍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추켜세울 때 거기에 놀아나는 그런 풍조가 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그러니까 사도 마태에 따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Gospel according to 동아일보 혹은 조선일보’입니다. 신문이나 혹은 매스컴에서 교회가 이런 일도 하고 있다, 이런 착한 일도 하고 있다고 막 떠버리면서 그런 것들만을 높이 추켜세우니까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일보다는 무엇인가 미담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아씨시의 프란시스 같은 삶이나 마더 테레사 같은 삶을 흠모하고 그런 사람들이 마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성된 모형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은 성경으로 볼 때 잘못된 것들입니다. 결국은 자신의 영혼이 참되게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성들을 무시한 채,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면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처럼, 다시 말하면 심령의 참다운 변화가 없이도 얼마든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복음의 빛이 가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의 진정한 변화입니다.
이것만큼 놀라운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천국백성이 되는 자격을 죽도록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나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옛날에 탁발승처럼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심령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난 사람, 심령이 진정으로 가난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가난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도대체 이 가난함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소유보다도 빚이 훨씬 많아서 그 빚을 자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는 파산하게 됩니다. 파산한 것은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당신들에게 진 빚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 목숨 빼놓고 모든 것을 다 내어놓겠으니 이것을 너희들이 다 가지고 가라.” 그러고 나면 파산한 사람이 됩니다. 파산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 그 사람의 소유가 생기면 생기는 즉시 남의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사람이 파산을 했으니까 자기의 것을 소유하며 살수가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은행에 통장 같은 것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현찰을 주고 사야 됩니다. 파산한 사람, 빚을 많이 져서 빚쟁이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난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는데도 아직까지도 빚을 졌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즉시 또 빚을 진 사람들이 와서 빼앗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난함’이란 희랍어로 ‘프토코스’인데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파산선고는 완전히 빚으로부터 해방시켜줄지 모르지만 옛날에 파산선고는 그게 아닙니다. 다 빼앗아 가버리고 아무 것도 없어서 내가 무엇을 가지면 또 와서 사람들이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쫄딱 망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쫄딱 망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망했는데 번영할 때는 친구도 많고 이웃도 많은데 망하고 나면 아무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모두 망해서 외톨이가 된 외로움이 파산선고 받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가난한 마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으로 볼 때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움을 목마르게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대개 성경에서 볼 때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아주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찾는 동기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삶이 커다란 곤궁에 처했을 때, 대적에게 에워싸이거나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 구출해주시기를 바라는 동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목말랐던 사람들이 있고, 또 하나는 대적들에게 둘러싸이거나 삶의 물리적인 상황이 고통스럽지 않아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죄악 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편을 보면 시편에서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 쌓이거나 전쟁을 만나거나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하는 시인들의 눈물 젖은 기도들을 많이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직면하고 있는 물리적인 상황,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도록 만들었고 구원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그 과정에서 예외 없이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과 어려운 시련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읽은 시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시인들은 하나님 앞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 이외에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며 구원이시며 자기의 뿌리시며 자기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곳곳에서 사람들을 의지하고 방백을 의지하는 것에 허무함을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인생을 너무나 의지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쓸데없는 일이고 모든 시련과 어려움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는 진정한 자기의 도움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과 마음의 모든 눈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정시켰고 하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위대한 구원의 놀라운 능력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도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만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을 하나님 앞에 주님의 보좌에 고정시키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어떤 때는 식음을 전폐하고 어떤 때는 먹고 자는 일들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기를 도우시기를 기대하며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전심으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사람들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아마 시인들 말고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이런 가난한 마음이 되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항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복이고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며 그리고 나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라는 신앙 속에서 못 사는 것을 주님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적절하게 다루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영혼이 다 핍절한 삶이 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러분이 이 세상의 부를 의지하고 이 세상의 번영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손 좀 보십니다. 어려움에 처하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잘못해서 어려움에 처했지만 하여튼 큰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루십니다. 그때 어려움을 많이 당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았습니까? ‘아! 정말 쓸모없구나.’
요즘 미국에는 때 아닌 은혜가 넘친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는 WTC 폭파 사건이 일어난 후에 한 달 안에 출석 교인이 50%가 불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정말 잘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기도하고 성경 가르치는 것을 죄를 짓는 것처럼 그렇게 몰아붙였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이 이번에 폭파 사건이 일어나고 전부 다 기도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정말 가난해졌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저런 일들이 한 시대의 교회를 깨우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지진 같은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시기도 합니다. 전쟁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나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나라에서 미사일을 쏘면 어떻게 할까? 몇 천억을 들여서 미사일을 만들어서 미사일을 쏘면 공중에서 다 날려버려야지.’ 그랬는데 또 비상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서 화학무기를 농약 뿌리듯이 뿌리면 몇 천만이 죽을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돈, 부, 과학 이런 힘들이 있으면 모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가난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까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하는데 계속해서 성경구절을 외우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기도하고 연설하는 광경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게 일종의 가난함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가 똑바로 못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환경을 다루십니다. 그때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던 것은 사업이 어려워서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사업 좀 도와달라고, 요점은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업에 좀 도움을 주시라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희망이 없는 사람인지 발견합니다. 정말 주님밖에는 도울 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간절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동안에 하나님 한 분을 향해 집중된 마음이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또한 위대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두 번째는 또 어떤 때 하나님을 찾는 가난한 마음이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악함과 더러움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정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은 어느 정도 우리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과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성경에서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이사야 선지자가 6장에서 소명 받은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로 소명을 받으면서 그는 성전에 들어가서 스랍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자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뵈웠으니 이제는 내가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나는 망했다. 비참하다. 나는 이제 큰일 났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악 됨을 인해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은 거룩한 분이고 그 앞에 자기는 한없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왕하고 친척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지 사역의 뒤를 도와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후원이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요? 친척들과 많은 이웃사람들이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요? 그는 누구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났고 그 영광 앞에서 자기가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와 악함으로 가득한 존재이고 거룩한 하나님이 자기를 그냥 두실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죄인이옵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 5장에 나와 있는 베드로와 예수님이 만나는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아도 없었는데 당신이 말씀하시니까 내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물을 던질 때만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던져서 고기를 잡는가 마는 가였습니다. 그런데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흔히 있는 그런 종류의 어획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끌어올리면서 평생 거기서 고기를 잡았어도 흔히 그렇게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잡아당겼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가 올라왔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고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누굴까? 저 분이 누굴까? 누구시기에 일평생 여기에서 살았지만 이 시간에 이 지점에서 고기가 잡힐 수 없는데 한번 던진 그물에 찢어질 듯이 고기가 올라오는 것일까?’ 거기에서 그는 그분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사렛에 사는 젊은이 정도라고 생각했던 베드로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움 속에 떨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거룩하신 당신 앞에 함께 있는 이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정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떠나십시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 가라는 것입니까? 사라지시라는 것입니까? 어떤 관계도 더 이상 갖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이 특별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내가 알았고 나도 내 영혼에 참 생명을 위해서 당신 같은 분과 친교 속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도저히 당신을 향해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일평생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가라고, 무엇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즉시 거꾸러지면서 그는 말하기를 “주여 뉘시니이까” 조금 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아, 너 어디에 가니?”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야. 거기서 예수 믿는 놈들 잡아 죽이려고.” “예수님이 누구시니?” 하고 물으니까 “그 이단의 괴수, 사형 당한 그 인간. 제자들이 헛소문을 퍼트려서 사람을 미혹하고 죽었으나 아직까지도 역사하고 있는 못된 죄수.”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그는 정말 그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알고 있던 주님에 대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는 순간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그는 눈도 멀었고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모든 처분은 빛으로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게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그러나 가난함 속에서 사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수 만 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조달하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원수들을 기적을 일으키셔서 단번에 죽음으로 몰아넣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폭풍이 이는 바다를 잔잔히 하셨으니 가뭄이 있는 하늘을 열어 비를 내리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능력을 주시고 죽음까지도 제압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건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놀라운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덜 구하거나 자신에게 능력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덜 의지하거나 그러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 그리고 깊은 밤, 그분은 항상 한적한 곳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게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해서 주의 뜻을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게 해달라고 피 어린 통곡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고, 일용할 양식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 만 명의 식사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과 동행을 위해서는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을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모든 능력과 권능을 주셨는데도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의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자신의 영혼도 스스로 간수할 수 없고 주님의 손에 부탁하여야 한다고 믿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탁의 마음속에서 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그 은혜에 목마른 삶을 사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싸움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눈을 떠서 보지 못해서 그렇지, 사단 마귀는 악한 영들의 세력은 우는 사자와 같이 여러분 주위를 두루 돌고 있습니다. 믿는 자라도 삼키고 넘어트리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며 굶주린 사자 떼들처럼 으르렁거리며 여러분을 도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는 힘이 없지만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이런 존재들은 우리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혹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그런 씨름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그런 악한 세력들에게 온통 둘러싸여서 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마귀도 여러분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주님을 믿고 난 후에 주의 영적인 사람이 된 후에는 마귀의 세력들이 여러분의 주위를 두루 돌며 그렇게 삼킬 듯이 여러분을 찾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적은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지난 일주일동안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많이 실망했습니까? 우리도 우리 자신이 싫을 때가 있습니다. 내 안에 한 다른 내가 있어서 나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고결한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늘 그 은혜의 눈물을 흘리고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기를 원하는 내가 있는데 그 속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짐승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악한 본성을 가진 나,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야 할 진정한 경배를 접어두고 형식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서 신앙생활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 겉모양은 신자처럼 살아가도 내심으로는 안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싶어 하는 짐승 같은 본성들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나와 우리의 마음속에서 커다란 투쟁을 일으키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 속에 있는 악한 본성과 눌러도 눌러도 억눌려지지 않는 우리의 사악한 죄성들은 우리를 절망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얼마나 커다란 대적인지 모릅니다. 마귀와 싸움에서는 종종 이겨본 적이 있는데 악한 우리의 본성과 싸워서 이겨보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칼빈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의 대적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는 살 수 있을 것처럼 믿지 않는 우리 안의 사악한 본성, 이중간첩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오가며 즐거움만을 양쪽에서 각각 취하려고 하는 기회주의 적인 불신앙의 본성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절망시키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는지 한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정말 여러분 자신의 죄성을 누를 수 있습니까? 결심과 결단으로 여러분 속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악한 본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상하고 깨트려지는 마음이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보십시오. 확실한 것 하나는 깊은 산 속이나 조용한 기도원 그런데서 혼자 조용히 명상하고 그럴 때 확실히 죄를 덜 짓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에 나와서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상당히 억눌렸던 자신의 죄성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일으킵니다. 협동작전을 펴면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의 마음이 거기를 따라갑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정욕과 안목, 세상의 자랑, 이런 것들을 좇고,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넘어트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사면초가입니다. 그렇게 에워 쌓여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많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시기는 했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신앙생활의 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이 아주 훌륭한 대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인해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간절히 목마르고 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나를 이기도록 만들어주는 참된 힘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의 그 은혜에 목마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일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듯한 종교생활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주님께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던 많은 죄인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적마다 화나는 일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만하다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도덕적인 삶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 중에 하나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기가 살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히 찾는 마음, 그 목마른 마음이 결핍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심령은 파산선고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평생 도덕적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소유할 수 없었던 나라를 한순간에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회개하며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모두 주어버렸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함께 데리고 올라가셨던 강도의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제 얼마나 역사적인 순간입니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새롭고 산 보혈의 길을 열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첫 열매가 되어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이고 그렇게 해서 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그 한 길을 통해서 이후에 주님을 믿게 될 수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올리는 통로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지나간다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심으로 닦아놓은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첫 번째로 손잡고 걸어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불행히도 죄인 중에 죄인인 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일평생 한 일이라고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고 백성들을 괴롭힌 죄밖에는 그가 한 일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니” 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거두어진 신약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자신도 얼마나 많이 죄를 지었는지 “예수님, 그런 구원 나에게도 주십시오.”라고 말을 못하고 다만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매달린 강도와 더불어 예수님을 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뭔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 특별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그는 자기는 정말 더러운 죄인이고 이분의 죽음은 죄 없는 의로운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저분이 뭔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삶을 생각하면 예수님께 어떤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습니다. 차마 예수님께 당신을 손잡고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내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서 당신 곁에 죽어가고 일평생 죄밖에 지은 적이 없는 더러운 죄인이 그 죄에도 불구하고 할 수만 있다면 당신께로부터 오는 어떤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언감생신 주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격 없는 이 죄수가 구원의 목말라하면서 당신 곁에 매달려 죽어가던 그것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애매모호하게 주님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살아온 삶을 보면 그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죄 가운데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목말라했습니다. 자기를 모든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 줄 수 있고 그리고 자기에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한 목마른 마음으로 그는 가득 찼습니다. 예전에는 죄와 악함이 가득 찼지만 이제는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가난함이 그 죄인을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죄가 주홍과 같이 붉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이 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의 악함을 깨닫고 여러분의 악함과 죄를 아버지 앞에 고백하며 주님에 용서의 은혜를 간절히 찾고 “내가 비록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살아왔으나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도 네가 왜 나를 멀리 떠났는가 하고 물으면 저는 눈물로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떠났지만 나는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깨닫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시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특별히 보면 죄 속에서, 혹은 어려운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주의 도움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의 삶의 상황은 다르고 시를 쓴 저자들은 달라도 공통점이 있으니,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해서 자신의 눈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절히 바라나 자신들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께로 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자신의 삶에 상황에서 자기를 구출해줄 수 있는 통로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어두운 인생의 길이 빛이 될 것이며 그리고 갈 바를 모르는 자기의 발걸음에 등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간절한 사모함으로 바꾸어서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화) 교회는 가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있을 때 일입니다. 50대 여자 분이 예배 시간이 되기 전에 와서 앞자리에 앉자마자 펑펑 울기에 ‘심령이 곤고한 사람인가 보다.’ 싶어 ‘은혜를 받겠다.’ 싶었는데 예배 시간 내내 다른 짓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가난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울고 싶을 때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지 않아도 울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행가에도 “울고 싶어라”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내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통곡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너무 서러워서 “아버지”, 그리고 엉엉 울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펑펑 쏟아놓습니다. 그 마음이 만약에 하나님을 만날만한 마음이었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마음이었다면 자기가 얼마나 인생을 사는 게 곤고하고 괴로우면 그렇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데 하나님이 무엇인가 나에게 반응을 보여주셔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을 보여주실 수가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가난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깨트려져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 마음은 필연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으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가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고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은 반드시 선하신 분이고 선하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나의 인생의 문제의 해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면 나는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뜻대로 살겠다는 신앙,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대로 행하겠나이다.”라는 이 신앙을 가지고 나오는 마음이 진짜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입니다. 왜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깨트려진 마음, 상한 마음을 그렇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심지어 너는 쓸모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하셔도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천국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그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한번 스스로 자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나는 듣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을 내게 명하시든지 주님의 판단과 주님의 말씀은 항상 옳고 나는 틀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나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나를 꺾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겠나이다.”라는 고백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상한 갈대와 같고 나부끼는 심지와 꺼져 가는 불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심지의 불꽃을 끄지 아니하시는 특별한 은혜와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은혜와 은총이 왜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간절한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고백이 여러분의 말씀이 생활에 구체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나의 메마른 영혼에 찾아와서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매일 오셔서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탁월한 은혜의 감동 없이는 나는 내 속에서 솟아나는 악한 죄성도 이길 수 없고, 내 주위를 돌며 으르렁거리며 우는 사자 같은 마귀의 세력도 이길 수 없고,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는 세상의 유혹과도 결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나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을 보이시고 주의 한 말씀이 나에게 한 양식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목마름, 간절한 찾음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 앞에 깊이 결단해서 돌이키는 삶을 살았던 때 우리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고정된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우리에게 어떤 소망도 없고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할 말을 잊었던 어린아이의 마음의 때가 우리에게 왜 없습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주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없는 것 없이 많은 것을 베푸셨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을 잊어버리고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넉넉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한번쯤 예배에 은혜를 못 받고 성경 한 장 안 읽어도 얼마든지 넉넉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신앙의 경력이 우리를 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들어서 한번 우리의 삶의 상황을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형통합니까? 형통하면 더 많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되지 않습니까? 우리를 왜 이렇게 형통하게 해주고 우리를 축복해주셨을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주셔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과 번영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의 타락의 기회로 삼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길로 기회로 삼도록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곤고하고 어려운 일들이 여러분을 에워싸고 여러분을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될 때가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것이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실패로 나타나고 있다면 더더욱 이것은 비상의 시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주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본을 받아서 우리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통회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떨어졌고 우리가 무엇을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새 마음을 가져야할지를 주 앞에 더더욱 간절히 찾고 목마른 사람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요하고 형통할 때만이 아니라, 곤고하고 시련에 처할 때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어떤 삶의 상황에서든 그 모든 것들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과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그 말씀이 자기를 움직여주시고 그 말씀이 불결한 자기를 정결케 하고 그 말씀이 자신도 버릴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 말씀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해주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마음, 그것이 필요합니다.
(찬양)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말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르고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자 말씀의 은혜로 자신의 영혼에 만족을 주시기를 사모하며 주의 말씀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실망시키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치료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주의 말씀을 향해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기 시작합니다. 우리 자신의 부패한 성품부터 고치기 시작하십니다.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 가책 없이 살아오던 우리의 옛 삶을 청산하도록 우리를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힘들고 아프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때 정말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치료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만이 자기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나를 가장 잘 사랑하는 분이고, 그 하나님만이 자기를 가장 잘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에게 자기를 맡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치시는 손길을 바라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싫은 사람이 병원에 가서 잘난척하는 사람입니다. 약국에 가서 잘난척하는 사람이 싫습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지을 때 약사도 이상하지 “며칠 치를 지어드릴까요?” 하고 물어봅니다. 그것을 환자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자기가 알지. “이틀 치 먹어야 됩니다.” 그럼 이틀 치를 지어주면 됩니다. “삼일 치를 먹어야 되는데 하루치만 지어주세요.” 그러면 지어줍니다. 그럼 약사가 “안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하루치를 먹으면 안 낫습니다. 그렇게는 제가 약을 지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지. 여기 약사 계십니까? 그렇게 해야지. “이 약도 주고 이 약도 주세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조제를 하지, 왜 그렇게 합니까? 누가 그랬다고 합니다. 치과에 가서 이빨을 해 넣는데 50만원인가 달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화가 나서 뭐가 50만원이냐고 이빨이 500원이고, 묶는 접착제가 5000원인이데, 그러니까 치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어이구 그렇군요.” 하면서 바가지에다가 이빨을 다 가지고 오더니 “재료비 55000원입니다. 당신이 직접 해서 끼우십시오.”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갔으면 겸손하게 “선생님, 내가 어디가 아픕니다. 저 좀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드러누우라면 눕고, 벗으라면 벗고, 배를 가르자면 칼을 받아들여야지, 그것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화) 직장에 다니실 때 모시던 상사 한 분이 협심증으로 쓰러지셨는데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을 하면 살 수 있고 어렵지 않다고 했는데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갈비뼈를 갈라내고 심장에 칼을 대는 것은 용납을 못한다고 하더니 결국 일 년 뒤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 또 있는데 교회 와서 잘난척하는 사람입니다. 상담 좀 하자고 해서 뭐냐고 그러니까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제가 잘 압니다.” 잘 아는데 무슨 상담을 하는지, 혼자 살지. “저는 이렇고 이렇게 살거든요.” 한참 30분을 이야기를 했는데 나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없고 자기 잘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제가 하도 답답해서 “그러면 나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자기도 잘 모릅니다. 바쁜 사람을 왜 만나자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나님, 나 망가졌습니다. 내가 이대로는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래 고쳐줄게.” 그리고 하나님이 고치시려고 할 때 고쳐주시는 것을 통해서 자기가 가장 온전한 사람이 될 수가 있고, 자기가 가장 온전히 고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이 고쳐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만족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짜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고치시면 “난 못해. 내가 어떻게 그것까지 양보할 수 있어?” 이러면서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 그것은 항상 유쾌하고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여러분을 찌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이전에 느낄 수 없던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접어두면서 살았던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도록 말씀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여러분을 고쳐놓고 여러분을 결단할 수 없었던 과거와 결단하게 만들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고쳐짐으로서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만이 나를 위한 가장 훌륭한 인생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만이 나를 가장 좋은 사람으로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선하신 성품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 나를 고쳐서 이제는 망가진 생애를 살지 말고 하루를 살아가 죽어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자기를 고쳐주시도록 맡기는 사람, 이 사람이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대하시며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이런 사람들에게 천국을 모두 통째로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소유하고 그 나라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그 안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하나님이 오늘도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초청에 여러분은 어찌하시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받는 두 번째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우리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법으로 복을 말씀하시는데 애통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지 모르지만 가슴아파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복되다고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요한 자는 복이 있나니,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아니면 사업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권력을 가진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아픔의 눈물, 고통과는 다른 종류의 애통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복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애통은 가슴 아픈 슬픔을 동반한 눈물이 있는 고통의 경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애통은 단지 그저 무슨 이유에서든지 눈물을 흘리는 모든 사람들의 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모든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인하여 가난해진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처럼 애통 또한 그렇습니다. 단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깊이 아파하고 고통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수 있는 그 이유를 가지고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의 이유가 어떤 것일 때 그 사람이 주님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애통하는 사람일까요?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으니 첫째는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우리 주님께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 특별히 자기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애통한다”라고 하는 이 희랍어가 “죄를 확신한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확신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는 죄에 대해서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사람들일까요?
죄를 물먹듯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세상에 가득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압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도, 자기를 그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과 함께 교제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그는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죄를 보았습니다. 그 죄를 떨쳐버리고 싶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의 능력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미 지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 앞에 죄인으로 정죄 된 자신의 상태를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개선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과 주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주셨을 때 자기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모습 사이의 격차에 놀라며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인 됨을 인해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깊이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것 이외에 하나님의 사랑에 눈뜬 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하지만 주님은 거룩하시고 자기는 더럽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심령에 모든 더러움들이 그런 고백을 가능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로 인해서 절망을 느끼지만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도 또한 그에게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아왔고 아직도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 속에 죄가 있으며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신앙의 고백 사이에 부족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하면서도 그분의 참된 사랑과 은혜 속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진실한 고백이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는 그 두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지만 마지막에 깨닫는 것은 자신이 자기의 죄를 해결함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지를 발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애통합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과 자기 안에 자기도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죄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애통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그 죄를 버리고 싶다는 고백이며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애통이며 그 죄로 인해서 누를 끼쳐드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에 실추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는 탄식의 눈물입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도 경험할 수 없는 하늘에 놀라운 위로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의 죄를 인해서 애통하고 아파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모든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가 뉘우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죄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할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죄는 용서받기에는 너무나 무겁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긴 세월동안 어두움 속에서 죄와 벗하며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고 심지어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보이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죄가 머리털보다 많고 그 죄의 무게가 태산과 같아서 그 죄에 눌려 물러설 수도 없고 그 죄를 사랑하며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오래되어서 그 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서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며 나의 죄 때문에 예수 죽인 것을 아파하고 죄 가운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깊이 뉘우치며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의 고통을 더한 것들에 대해서 후회하며 용서를 구하고 애통할 때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해주셨는지 기억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죄가 크면 클수록 넘쳤고 주님의 은혜는 죄가 있는 곳에 더해졌습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불순종과 죄악으로 주님을 거슬리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끝없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그분의 마음에 못 박으며 살아온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위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뉘우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 아픈 애통의 고통은 오랜 동안 죄 가운데 살아오면서 주님의 마음에 못 박았던 때에 주님이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 긴 세월동안을 주님의 은혜를 짓밟으며 주님의 명예에 불명예를 안겨드리고 죄악 가운데 살아와서 그 동안 주님의 마음에 자기 아들의 피로 우리를 사신 주님의 마음에 우리를 향한 한없는 고통이 넘쳤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느 날 주님의 눈앞에 드러난 우리의 죄악과 불신실함을 보고 가슴아파하며 뉘우칠 때 주님은 그 동안 우리 죄를 인해 당하신 당신의 고통은 잊어버리시고 가슴을 두드리고 아파하고 흐느껴 우는 우리들을 위로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위로를 받을 것이며”라고 한 이 말은 희랍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에서 온 수동태입니다. ‘파라칼레오’는 옆에서 누구를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부르고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위해서 말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변호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애통하고 “화로다 나여 이제는 망하게 되었도다” 눈물을 흘리며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뉘우치며 아파한 사람들 가까이 주님이 오셔서 오히려 회개하고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경험된 고통을 오히려 위로해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뉘우치며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셔서 이 죄인이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아왔고, 우리 주님의 명예를 더럽힌 죄가 크지만, 오늘 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니 이를 용납해주고 우리 아버지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파라칼레오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깊이 애통하고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손가락질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항상 그 정죄 가운데서도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이 자기의 죄를 애통하는 사람 가까이 오셔서 그를 용납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우리의 죄가 아무리 커서 우리의 양심과 율법의 송사가 우리를 노예처럼 만들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이 세상에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분께로 나아가 애통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그에게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비할 데 없이 놀라운 위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나라의 무서운 법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많은 죄인들, 양심의 강력한 송사와 율법의 무서운 정죄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많은 신자들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터치를 마음속에 느낄 때 얼었던 마음이 눈처럼 녹으며 자기의 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고백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만큼 그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참회할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랜 동안 죄 가운데 살아왔으나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뉘우치고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사람들이 받을 신령한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사랑은 한 사람의 의로운 삶에만 기초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도덕적인 행실에만 기초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고 주님의 용서를 그리워하는 애통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넘치는 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넘치는 죄는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죄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더 큰 위로의 은혜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가 받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한 사람이 자기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것은 걱정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안팎으로 싸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과 죄, 끊임없이 솟아나는 부패와 더러운 정욕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명예에 합당하게 살고자 아니하는 우리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뿌리 깊은 패역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적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대적과 싸우고 누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밖에 있는 대적과 싸워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안에 심으신 하나님의 나라의 맛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물론 죄와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지만 신자의 마음속에는 은혜의 통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유혹과 정욕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만 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기쁨들을 포기했던 사람들의 삶은 항상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끔 만들어줍니다.
오래 전에 저희가 수련회를 하는데 손양원 목사님 친딸이 와서 자기의 아버지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목회자이고 한국 교회 순교역사에 참 자랑입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그 목사님을 내쫓지 못해서 안달을 한 교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교회 속에서도 고통을 받고 어떻게 일제시대의 박해와 고문과 어려움을 이기면서 믿음을 지키고 마지막에 자기 아들 둘을 죽인 그 원수를 대통령의 특사까지 받게 만들어서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는지에 대해서 증거 할 때 많은 성도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을 저는 뒤에서 지켜봤습니다.
매일 순간 순간 불순종하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더러운 욕망에 굴복하며 죄를 짓거나 불순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 속에는 더 많이 은혜의 통치가 있구나.’ 마음의 중심의 소원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맛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성도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 은혜의 맛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지 않는 이 세상의 질서가 항상 진실한 신앙생활을 가지려고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의 죄악의 낙을 즐기는 적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보다 더 지배적으로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고통입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은혜가 있어도 죄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견디기 힘든 통증을 항상 동반합니다.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부패와 정욕과 싸우고 밖으로는 도저히 변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세상의 사악한 질서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 탄식하며, 무엇을 위해 우리들이 전도하고 무엇을 위해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영혼들을 붙들고 눈물로 씨름하며 영혼들이 주의 말씀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허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버리면 박해도 피할 수 있을 것인데 그 모진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신앙을 굽히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들이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왜 오늘날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든 질문은 한가지로 귀착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임하심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의 커다란 기대이고, 또 한편으로는 견딜 수 없는 애통의 이유가 된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너무나 잘 나타났습니다.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그분이 왜 그렇게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셨습니까? 이른 새벽에 혹은 어두운 밤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이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탄식과 고통 속에서 저미는 가슴을 안고 매일매일 부르짖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애통하게 만들었습니까? 나라가 임하는 것,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자기 밖에 있는 이 세상 나라 질서 사이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죄 많은 세상에 살아갑니다. 자신도 완전히 정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완전한 통치는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죄 없으신 몸으로 이 세상에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는 땅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나라를 세우는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이 가슴 아픔은 아주 구체적이 되고 매우 예민해져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슴에 통증을 느낍니다.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고 자기 속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직 한구석에서 항전에 항전을 거듭하고 있는 죄와 불순종과 정욕의 세력을 보며 그는 곤고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생각은 그로 하여금 이런 곤고함을 더하게 만듭니다. 특별한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요구와 자신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죄의 사역들에 그 필사적인 항전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탄식이 그를 견딜 수 없이 곤고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곤고해지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령한 이유 때문에 곤고해질 수 있는 사람, 거룩한 이유 때문에 애통할 수 있는 사람, 자신 속에 있는 죄로 인해서 아파하고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보며 탄식할 수 있는 눈물을 가진 사람들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가 사라진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서 애통하며 자기의 악함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자기 안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인해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주님을 이미 믿었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육신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이런 애통은 낯설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자신 속에 있는 사라지지 않는 죄를 인해서 애통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오게 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그것을 생각하며 애통하고 위로가 필요할 정도로 아파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시대든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와 복된 주님의 나라의 도래는 이름 없는 성도들의 애통하는 흐느낌 속에서 주님의 나라의 도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살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사는 성도들의 흐느끼는 눈물, 그 발자국을 밟고 온 나라입니다. 무엇이든지 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보내심에 있어서는 애통하는 성도들의 눈물을 통해, 복음을 통해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앞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항상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를 인해 애통하는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모여서 맛보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통치의 행복을 알면 알수록 좋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악한 이 세상에 죄인들, 그들을 보고 애통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교회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눈물이 있습니까?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인한 탄식이 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염려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너무나 긴 세월을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 변화되지 못한 수많은 지체들을 향한 통곡하는 탄식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짧은 생애를 사시는 동안, 그 기간 중 대부분의 세월을 눈물로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비관한 비관주의이기 때문에 우울하고 눈물을 흘리시는 탄식 속에서 지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낙관주의자였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임하게 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도래를 거스를 수 없다는 낙관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이 짧은 생애를 이 세상에 사신 동안 통곡과 눈물 속에서 지내셨던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더 시급히,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충만히 이런 하나님의 통치와 임하심을 경험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뉘우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의 많은 죄인들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여기저기에 있는 그 수많은 불순종과 악의 세력들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나는 것을 인해서 애통하셨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각종 악과 완악함, 뉘우치지 않는 교만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인해서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식과 고통은 주님의 생애 중에만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당신이 직접 이루어가지 않고 우리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이 육신을 입으시고 죄 많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그 일을 우리에게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나라를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그 누군가는 주님이 사셨던 삶, 주님이 가지셨던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애통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는 훨씬 어려운 방식으로 주님의 나라는 이루어져 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은 죄가 없는 완전하고 순결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무엇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유익을 구합니다. 주님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데 까지 자기를 다 허비하셨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안에 우리를 향한 사랑과 결별하지 못한 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도구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고, 주님은 오로지 영혼들만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우리도 사랑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하셨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영광도 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든지 한 사람의 성도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하고 거룩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단련되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쓰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 속에 고개를 드는 세상 나라와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애통한 가운데 경험하는 또 하나의 영적인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도 알고,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처럼 완전한 사람을 통해서 오는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와 같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의 결점 대신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보시며 자기의 나라를 일구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변론해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위해 대언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해서 받는 위로는 너무나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사소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지도 않고 그것이 주는 위로는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해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위로는 어떠합니까? 죄에 대한 정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일어설 수 없으리만치 사단에게 정죄 되고 양심에 버림받아 눌린 사람들을 새롭게 소생시켜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정죄 의식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들려주시는 사죄의 선언은 한없는 위로를 줍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신자에게는 더 큰 위로가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이런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경험과 신실한 신자의 신앙의 경험을 아우르며 결론을 내려 보면 하나님의 충만한 위로와 신령한 위로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성도들에게는 항상 찢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눈물을 흘린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로의 기쁨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은 애통하는 아픈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이 세상을 보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래를 보시면서 우리를 추수할 일꾼들로 부르십니다. 누가 가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 버리신 그 사랑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버려진 영혼을 붙들고 자신의 버려진 영혼처럼 흐느끼고 애통하며 마음 아파할 사람들을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기만 하시면 그들이 주님을 위해서 경험했던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위로를 주셔서 그들 속에 하님의 나라로 말미암는 기쁨을 얻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은 성도는 더 많이 애통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기 사랑과 더불어 싸우고 자기 안에 반역하는 악의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또 한편으로 자신의 실존을 던져서 이 세상 나라에서 주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위해서 애통하며 사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며 삶의 현장에서 흐느끼다가 주님 앞에 위로 받는 성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슴을 어루만지시고 우리를 당신과 관계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한순간의 위로는 일생의 상처를 씻어내기에 충분합니다. 애통하는 자의 눈물을 씻기시고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흐르는 피를 닦고 다시 치열한 전쟁이 있는 이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전의에 불타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지 못할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시종일관 한결같은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하나님의 독특한 위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넘치는 사람,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계셔서 파라칼레오 해주시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영혼의 비결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하는 마음의 만족을 얻는 비결에 대해서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불꽃처럼 살수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찼던 때가 언제입니까?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비할 데 없는 하늘의 신령한 위로 때문에 낙심 당할 때 주님이 더 가까이 느껴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 나는 네 편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의 독점적인 위로를 받아본 경험이 언제 입니까? 우리도 주님 때문에 만족하고 주님도 우리 때문에 만족하시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세상에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아도 박해의 아픔보다는 그 박해 속에서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위로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더 많이 박해를 받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주님처럼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분은 없다고 고백해본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기의 사람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기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세상으로 대치될 수 없는 완전한 만족과 위로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어두움 속에서 죄와 불순종 가운데 자기를 불쌍히 여기면서 흘리는 처량한 눈물,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자기를 감추고 한 맺혀 흐느끼는 울음소리 속에는 하나님의 신령한 위로가 없습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이 파라칼레오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악함을 고백하고 여전히 결점투성이고 부족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미력이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리워하며 아파하며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대소의 유무, 그들이 하고 있는 크기와는 상관없이 애통하는 마음을 보시고 다가오셔서 분에 넘치는 위로를 베푸십니다. 신실하신 분이 당신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에 인 치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는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위로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복된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온유한 사람은 오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격변하는 시대에는 적자생존의 원칙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뼈 없이 무른 사람, 법 없이 살만한 사람,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관용이 있는 사람들은 옛날 경쟁이 없는 농경시대에나 적합하지, 오늘날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며 살아가는 시대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온유한 사람과는 다른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법 없이 무르기만 하고 모든 사람을 향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순둥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 예로 구약의 인물 가운데 성경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모세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온유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비난을 받을 때에 “그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라고 기록하면서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의 한 표본이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는 그의 말년에 온유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세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습니까? 결단력이 모자라는 사람이었습니까?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었습니까? 전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결단을 내려야할 일에 있어서 미적거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고, 용기가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선이 굵은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경이 이야기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온유함이라는 것은 다른 여덟 가지의 팔복에 기록된 성품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인간의 성품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해서 마음씨 너그러운 사람이 부동산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에 적용시키면 그것은 최악입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목회를 하기까지 함께 거느리고 일하던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많은 지체들과 함께 동역하며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 것은 지도자가 아무리 좋은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어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와 잘 하모니를 이루면서 연극으로 말하자면 앙상블을 이루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 됩니다. 오케스트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면 탁월한 연주자여야 합니다. 일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데려다 일을 시켜보니까 일에 있어서는 기가 막힙니다. 제 성품이 무슨 일이든지 이렇게 대대하게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예를 들러 “이불을 개켜놓아라.” 그러면 칼로 잘라놓은 것처럼 딱 개켜야 합니다. “청소를 해라.” 그러면 핥아도 먼지가 없게 해야 합니다. “서류를 써라.” 그러면 깨끗하게, 뭐를 해도 좀 깔끔하고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데 사람들이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어떻게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정말 칼같이 무슨 일을 처리합니다. 모든지 시키면 딱 부러집니다. 그 사람을 몇 번 일을 시켜본 다음에는 그 사람에게 맡긴 일은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 자신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일을 하려고 애를 써왔습니다. 지도자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몇 번 실험을 해봐서 완벽하게 일을 했는데 뭐가 잘 안 되었으면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정도로 기가 막히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일만 네모진 것이 아니라 성품도 네모져서 모난 돌이 정 맞든다고 어디에 가든지 부딪치는 것입니다. 질려서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 누구하고도 잘 인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데리고 오면 사람이 둥글둥글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만 싫습니다. 일이 그렇게 둥글둥글하니까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시킨 것도 안 시킨 것과 마찬가지고 안 시킨 것도 시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다가 하다가 짜증이 납니다. 그래서 이제 눈을 들어서 누구를 찾는가 하면, 일은 네모지고 성품은 둥글둥글한 사람을 찾습니다. 있을까요? 없을까요? 자연적으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상대적인가 보십시오. 확신에 찬 사람은 신념 있게 자기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지만, 항상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다른 사람을 늘 잘 존중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신념도 없고 확신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막 이야기하면 “그래, 그게 일리가 있어.” 그러다가 한참 있다가 일리가 진리가 됩니다. 저기서 아니라고 그러면 또 쫓아갑니다. ‘之’(갈 지)자의 인생을 항상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원히 무엇인가 자기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향해서 팬으로만 인생을 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할 때, 항상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과격한 사람들,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이 축구를 하는데 지면 미사일이 생각나는 사람, 전부다 한방에 날려버리고 싶은 과격한 사람들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거꾸로 하면 “나 같은 사람은 복이 없나니”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천성적으로 과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얼마나 과격한지 한번 보십시오. 공중전화 박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전화를 너무 오래 걸어서 때려죽였습니다. 주차장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왜 그런가 했더니 내가 대려고 후진을 하는데 누가 와서 차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다고 죽였습니다. 이렇게 과격한 사람들이 판치는 시대입니다. 요새 ‘조폭’이 뜨고 있는데 과격함 없이 그 세계에서 명함이나 내밀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어떻게 보면 온유한 사람은 항상 낙오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격한 사람이 이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과격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 보니까 과격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직회를 하거나 회의를 할 때 골내고 성질부리면 나중에 자기가 똥바가지 다 뒤집어쓰고 집에 가서는 펑펑 후회를 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살면서 역정을 내지 말아야 할 때 역정을 확 낸 다음에는 나중에 반드시 후회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런 것을 후회합니다. 우리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천성적으로 과격한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과격하기 때문에 화끈한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인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이 우유부단해서 못할 때 그 과격함이 거기에 적용될 때 다른 사람이 부러워 할 만한 무언가를 헤치고 나아가는 힘이 있습니다. 상당히 희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온유한 사람의 복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화를 통해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가끔 보면 성품은 둥근데 하나님의 일을 아주 네모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칼같이. 그 사람은 타고난 사람이 아니라 둘 중에 하나입니다. 원래는 일을 반듯하게 할 수 있는 정확성을 타고났고 성품은 모진 사람이었는데 부지런히 깎이고 다듬어져서 박살이 난 것입니다. 노래도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더 깨어져야 하리.” 다 깨어져서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사랑할수록 변화된 사람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원래 사람이 부드러운데 일을 해도 대대하게 밖에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것도 일이라고 했는가 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향해 잘 지내던 성품은 주님의 은혜로 주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춘 영적인 사람이 되면서도 온유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정확하게 못한 것에 대해서 늘 자책감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가운데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자기를 하나님의 일에 합당하도록 맞추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정확성을 갖춘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둘 다 신통치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변화되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주님의 일에 대한 충성이 그를 정확한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변화시키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원예배를 드릴 때마다 항상 구호처럼 외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일은 야무지고 네모지게”입니다. 마음은 둥글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도록 애를 쓰는 것이 우리의 모토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다고 할 때 그 온유함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께 대하여서이고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하여서입니다. 우선 하나님께 대해서 한 사람이 온유하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어린아이같이 순종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개인적인 사담을 나눌 때나, 상담을 할 때나, 설교를 할 때나 이야기를 안 듣는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배 끝나고 저에게 불리움을 받는 사람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최근에는 없는데, 그런 사람들은 설교 시간에 땅만 쳐다보고 설교자를 안 쳐다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데 저는 설교시간 내내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저 사람이 왜 내가 이야기할 때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내 이야기를 안 들을까? 뭔가 나를 미워하는가? 뭐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가?’ 그게 몇 주일 동안 계속되면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부릅니다. 방에 가서 앉혀놓고 “당신은 왜 내가 설교할 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은 굉장히 황당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그런 것을 물어보는 목사가 개인적으로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별것이 아닌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별거인 경우도 있습니다. 적절하게 다루어져서 고쳐지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제 다시는 그런 행동을 못합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도 아마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담화를 나누다가 사람이 자꾸 다른 짓을 하면 입을 닫아버립니다. 이야기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상담을 하러 와서도 이야기를 잘 듣지를 않으려고 할 것 같으면 이야기를 주섬주섬 거두어서 알아서 잘 좀 해보라고 하고 마칩니다.
하나님이 정말 당신이 무엇인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생에 복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시는데 그가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자기의 마음속에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순합하지 않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반대가 강퍅한 사람입니다. 강퍅하고 포악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강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강포하고 포악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무엇을 행하든지 자기가 자신의 감정의 주인이고 하나님에 의해서도 어떠한 감정이라 할지라도 통제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강포한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시대일 적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향해서 강포가 강포를 잇댄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포하여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진 것은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종교생활의 한 단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고, 여러분의 마음이 정말 신자의 마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한 마음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것을 기쁨으로 잘 받아들이는 그런 마음입니다. 제가 지금은 그런 것을 잘 못하겠는데 고등학교 때만 해도 아이들에게 동화이야기를 잘해주었습니다. 아이를 뉘어서 이야기를 해줍니다. 동화를 어디서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창작하면서 동화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해주면 모든 애들이 그런 것은 아닌데 은혜 받을만한 아이들은 마음이 열려서 짝 빨려 들어옵니다. 그러면 “아저씨”, 혹은 “형” 그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 불쌍한 토끼를 사자가 잡아먹었단 말이야?” 그러면서 막 웁니다. 회심은 아니지만 막 웁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내가 동화를 이야기해줄 때 상처 입은 토끼가 도망하고 포악한 사자가 쫓아가서 그를 잡아먹으려는 하는 묘사를 할 때, 그 아이들은 모든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토기가 도망갈 때 가르고 지나가는 풀 소리, 달려오는 사자의 깃털 날리는 소리까지 애들에게는 다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토끼를 막 잡아서 확 찢어먹는 광경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애는 막 비명을 질렀습니다. “으악!” 실화입니다. 발작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그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하나도 부정하거나 “에이, 어떻게 토끼가 말을 해. 어떻게 사자가 그렇게 빠를 수가 있어.” 이런 식으로 토를 다는 애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그 모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당신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죄 가운데 살고 오랜 동안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모르고 마치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리고 살던 사람들도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주님의 말씀을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 마음으로서 이미 그 사람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가득 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제법 그래도 사람답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부심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복되다고 하시는 선언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저는 자녀들을 기르면서 제일 화가 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부모가 말을 할 때는 “네, 잘 알았습니다. 네. 네.” 그래놓고 뒤에 가서는 다른 짓을 할 때 그런 일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네. 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조롱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할 때 “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네. 그런데요. 네. 네.” 하면서 빨려들어 오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같이 않는데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가면 “딱 그렇게 자기가 약속한 대로 일을 해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뢰가 갑니다. 그런데 이야기할 때 “네,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네. 네.” 이렇게 입에 붙게 찰떡같이 합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허당입니다. 아무 것도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두 번 세 번 하다보면 그 사람의 착착 붙는 대꾸나 그런 것들이 조롱처럼 느껴집니다. 불쾌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친절과 아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아부는 말을 가지고 하는 것이고, 친절은 마음이 동반되어서 실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부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믿음을 원하십니다. 당신이 살아 계신 것과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상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은 다음에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버지가 자식 둘을 불러놓고 명령을 합니다. “이것 좀 해라.” 한 아들은 그 자리에서 찰떡같이 “네.” 하면서 갔는데 순종을 안 했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가 보기에 듣는 태도도 그렇게 썩 훌륭하지 않고 무엇인가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몰라주는 것 같습니다. 싫다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서서 아들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버지의 말씀이 싫지만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효성스러운 마음이 발동하여 아버지의 분부를 준행하도록 만들었다고 합시다. 진짜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변화된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싸울 때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을 이겨서 주님 뜻에 아버지의 뜻에 효성스러운 아들처럼 순종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이 온유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것은 인내와 용서로 나타납니다. 자, 보십시오.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 속에 일어나는 격정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변화시켜서 그 은혜가 자신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격정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확 잡아당기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것이 온유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인내입니다. 그 인내, 오래 참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해를 받는 대상이 자기일 경우에, 자기가 모욕을 받거나 자기가 해를 당할 때 그것을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불명예나 손해,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잘 참는 사람이 복 있다고 주님은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들의 부류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굉장히 둔감하지만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굉장히 예민합니다. 제가 요즘은 전혀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사역이 좀 덜 바쁘던 시절에는 시장에 가는 것이 제 취미였습니다. 시장에 가면 우리 집사람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돈을 내가 내니까. 갑니다. 그런데 시장을 보면서 몇 번 교훈을 느낀 것이 있습니다. 배가 고플 때 시장을 보지 말아야 합니다. 배가 고플 때 시장을 보면 쓸데없는 것을 많이 삽니다. 뭐가 안 먹고 싶겠습니까? 배가 고픈데. 메밀국수도 먹고 싶고, 돼지고기도 먹고 싶고, 소고기도 먹고 싶고, 만두도 튀겨먹고 싶고, 라면도 끓여먹고 싶고, 떡볶이도 먹고 싶고, 잔뜩 삽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주부가 자기 배가 고프지 않으면 조리하는 시간이 한없이 걸립니다. 천천히, 천천히 그런데 자기 배가 고프면 순식간에 식사를 해냅니다.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 가장 예민합니다. 내 동생이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지 안 받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그것보다 예민한 것은 내가 엄마 사랑을 많이 받는지, 아빠가 나만 예뻐하는지, 이것은 내가 제일 예민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기준을 뭐라고 했는가 하면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네가 네 몸을 사랑하고 아끼고 위하듯이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라.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특별히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도저히 인간이 그렇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두고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잘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고뿔이 남의 염병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염병에 걸려서 지금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데 자기의 감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심적인 사고방식이고 자기 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들은 그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뀌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를 당하거나 손해를 입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을 향해서 잘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너무 속상해서 잠 못 이룬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칼을 들고 찾아온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사람에 의해서 내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프고 견딜 수 없어서 잠을 못 이루고 복수의 칼을 간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들은 그것이 놀랍게 변화되어서 그 사람들을 향해서 오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온유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의 억울한 이야기- 은혜롭게 잘 되던 교회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일어났는데 목사님이 상처를 당하고 혼자 사시는데 어느 자매가 임신을 해서 그 목사님의 아이라고 그래서 교회에서 아이까지 딸려서 목사님을 쫓아내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 그 교회 부흥회를 통해서 양심의 가책 속에 살던 자매가 목사님께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을 고백하며 죄를 실토해서 교회에서 그 목사님의 행방을 수소문해서 다시 모셔 와서 목회를 하시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런 일을 당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 치욕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교계에 다 소문이 나고 쫓겨났는데 그때 만약에 그 중에서 몇 사람이 독을 품고 고소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DNA 검사도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목사님이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목사님은 위자료 몇 천 만원 받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온유한 인격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승리입니다. 필연적으로 사람을 향한 온유함은 용서를 내포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죄 지은 사람을 자기가 오지랖 넓게 용서해주는 것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예화) 학교에 계실 때 학교 직원과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는 차를 몰고 오셨는데 어느 학생이 차를 망가트려놓고 갔는데 수소문해서 찾으려고 하는데 직원이 용서해주기를 자꾸 권유하는데 피해를 입은 본인이 하려고 했던 생각에 자신이 나서서 하는 말에 괘씸해서 너에게 잘못한 사람이나 용서해주라고 하면서 싸움이 일어난 것이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온유한 사람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처럼 다른 사람에게 죄 지은 것은 “그럴 수 있지. 이해해주어야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지만 자기가 요만한 어려움만 당하면 복수하기 위해서 쫓아갈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온유한 인격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면서 저도 굉장히 많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그 모습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수로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헤치고 하나님을 향해 대적해도 용서해주실 분은 하나님인데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인해서 아파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커다란 도전을 받으셔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으면서 만약에 조금이라도 나를 비난하거나 부당하게 대접할 때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분노에 잠을 못 이루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인데 결국은 우리의 성품이 온유함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관용이 우리로 하여금 온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크게 세 번째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같이 모질고 강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온유해질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많이 애통함으로서 온유함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순서가 기가 막힌 것입니다. 첫 번째 축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두 번째는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 번째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것이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마음이 거칠고 강포합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포악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의 죄, 자기의 부족함을 발견하면서 또 그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더러운 세상을 보면서 깊이 애통하고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가난한 마음이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덧에 걸린 짐승과 같아서 어떻게 거기서 헤쳐 나올 수가 없고 어떻게 할 수 없고 사람을 향해 뒤를 돌아보아도 자기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무엇으로도 자기가 그 어려움 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지경이 되었을 때 오로지 자기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지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하고 깊이 아파하면서 그 사람의 포악한 본성들이 깨트려지고 부서지는 것입니다. 깨어지면서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할 때 온유함은 그렇게 자기의 모나고 강퍅하고 포악한 본성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은혜를 통한 깨달음으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인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포악한 마음을 가지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수많은 사람과 원수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인지 깨달으면서 깊이 자기가 깨트려지는 가운데 새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예화) 20년 전의 일- 하천 가에 집이 있었는데 재개발을 한다는 이유로 철거반들이 집을 부수고 그 와중에 어머님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파출소에 찾아가서 항의를 하고 철길을 따라 울면서 돌아오는 길에 앉아 찢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울었는데 그 이유는 복수하고자 하는 자아가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깨어지는 마음의 아픔 때문이었다는 이야기.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과 목회 하면서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수한 경험을 통해서 정말 포악하기 이를 때 없는 짐승과 같은 제가 이만큼이나마 변화되어서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포악한 성품이 깨트려지는 놀라운 신앙의 변화, 참다운 그의 인격의 찔림과 변화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온유한 성품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악하고 포악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거나 온유해진 사람으로 나타날 때 그는 그 안에서 수없이 자기를 죽인 사람입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자기를 비난하거나 자기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을 향해 겨누었던 수많은 복수의 칼을 자기를 향해서 오히려 돌리고 자기를 수없이 죽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통해서 온유하지 않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 같은 온유함과 관계있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본성이 악랄한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자신의 숙명처럼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유함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온유한 삶에 모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그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짐승 같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온유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의 포악한 자아, 쉽게 원수 맺기를 잘하는 우리의 강포한 자신, 티끌과 같은 손해를 보고 주먹만 한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강포한 본성들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낳은 가인과 아벨이 있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후에 가인의 후예들이 쭉 자랍니다. 그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노래를 했는데 무슨 노래를 했는지 아십니까?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나는 소년을 죽였도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소년이 실수를 해서 자기를 살짝 다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버린 이후에 죄 가운데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들의 그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런 성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품은 우리들이 일생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싸워야 할 삶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만 우리는 운명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운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자기의 성품이 개척한 삶입니다. 그 사람의 성품을 보면 미래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를 거의 알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강포함 속에서 살던 사람이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가 깨어지기 전에는 주님의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예수를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지만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구약 시대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수많은 짐승들, 그 중에서 특별히 주인을 따르던 어린양같이 예수님께서 아무 저항 없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치시려고 십자가까지 끌려가십니다.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전날 밤에 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그것을 지고 승리하기를 원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흉악한 죄인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면서도 그들을 한없이 오래 참으시고 불쌍히 여기심으로서 온유함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특별히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죄인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온유함의 모본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면서 수없이 깨트려져서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가운데 우리 자신도 온유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리적으로 볼 때 교회는 구원받고 참으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있는데 매우 악하고 하는 일마다 교회와 지도자를 대적하고 교인들을 이간질하면서 가슴 아픈 일을 서슴지 않을 때 그 속에서 어떤 신앙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를 우리와 한 지체로 여겨야 합니까? 아니면 그가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지체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까? 이것이 바로 옛날에 교부들이 많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그가 비록 거듭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그가 정말 배역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겨도 그가 일단 교회 속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언젠가 그가 변화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갈라내려고 노력을 하면 가르는 것이 정확할 수도 없고 가르는 과정이 교회 순수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포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다 끌어안고 언젠가 변화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그들을 지체로 여기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면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변화되기 위해서 예수를 봐야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온유함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해서 내려오셨고, 온유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수많은 반대자들과 대적에 둘러싸이면서도 단 한 번의 복수도 하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가운데 예수님의 온유함은 극적으로 드러났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인들이 받게 될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를 드리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죽어 가시면서 함께 죽어 가는 다른 죄수 한사람을 낙원에 이르도록 구원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며, 그런 예수님의 섬김이 온유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것입니다. 이루 다 할 수 없는 온유하신 모본으로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생애를 가득 채우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 가운데 예수님처럼 수많은 반대자들과 맞서서 살아야 했던 분도 흔치 않았으며, 예수님처럼 치열한 박해를 직면해야 하는 인생을 사신 분도 흔하지 않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면서 그분은 한 고을의 군수도 되지 못하시는 것처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애를 사셨으니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온유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는 순간까지 자기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시고 구원받아야 할 자기의 백성들, 지금은 당신을 거스르고 대적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작정된, 선택된 백성들을 위하는 연민으로 가득 찬 생애를 일생동안 사신 것입니다. 그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 못지않은 강포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온유하신 세상을 사셨습니다.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들에게 기대되는 것도 이러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보다 훨씬 강포한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온유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물리적인 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나오는 팔복의 요건 자체가 영혼 안에 일어나는 참된 변화에서 비롯된 인격, 즉 무형적인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축복도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무형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제국의 주인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온 땅은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한 평의 땅도 자기 땅을 가지신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로마의 왕이 마지막까지도 결국은 자기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만을 경배하게 하였지만 로마의 시민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경배하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를 더 원했습니다. 로마의 왕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한 평의 땅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 보이지 않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땅 한 평 없어도 그 사람의 마음에 오셔서 당신의 죄인을 용납하시는 온유함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흐느끼는 악한 사람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한없이 맛보게 하심으로서 그 긍휼과 자비를 맛본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의 자리를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점령되고 지배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 할 때 주님은 땅 한 평 가지신 분이 아니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땅보다는 주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우리의 마음의 땅을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고난이 온유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칼과 채찍으로 당신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어도 주님의 그 사랑과 그 놀라운 은혜를 맛보고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참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종이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어 하고, 노예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지만 자기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써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자기를 다스려주시는 통치가 있고 주님의 다스리심 속에서 자기를 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포에 강포를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어떻게 점령하셨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이 잡혀왔습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이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는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때 사람들은 한 사람씩 돌멩이를 내버려두고 자기의 갈 곳으로 물러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멩이를 들고 이 여인에게 다가왔지만 이 여인을 승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온유하심 앞에서 이 여인은 자기의 죄를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셨습니다. 돌멩이를 들고 왔던 사람들이 돌멩이를 버리고 돌아가면서 양심의 깊은 찔림과 가책을 입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 이 여인을 죽이기 위해서 돌멩이를 들고 왔지만 이 여인의 머리를 쳐서 돌멩이에 피가 묻어 뒹구는 상황이 벌어진 것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을 돌로 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인도 비무장이었고 예수님은 더더욱 비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찔림을 받게 만들고 돌멩이를 버리고 자기의 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품안에 품고 있는 칼이나 총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뛰어난 온유함이 강포한 사람들의 포악을 이기고 율법도 점령할 수 없었던 그들을 하나님의 참 사랑이 점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땅을 자기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땅은 자기가 죽으면 더 이상 그 땅을 누릴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어도 우리 안에 오셔서 다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땅 한 평 소유하고 계신 적이 없어도 곳곳에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설교를 듣는 이 순간도 자기의 인생의 땅을 모조리 팔아서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어 바치며 자기의 인생에 땅에 오셔서 주님이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칼이나 창과 협박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뛰어난 온유함에 굴복된 사람들이 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렇게 이 온유함으로서 이 땅을 당신이 미처 정복하시지 못한 그 땅을 우리를 통해 정복해가기를 원하십니다.
잘 보십시오. 그 사람이 진짜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는지는 자기의 가족들이 가장 정확하게 판단을 합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열심이나 그 사람의 가끔 행하는 섬김을 보며 평가하지만, 가족들은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엄마 아빠가 자녀의 성품을 제일 잘 알고 한 이불에서 몸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가 부부의 숨소리만 들어도 성품을 압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 속에 일어나는 성품의 놀라운 변화를 인지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아주 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래도록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의 성품이 정말 변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인격이 정말 변하였습니까? 강포하고 포악하던 사람들이 정말 변화되었습니까?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폭력을 휘두르던 그 손으로 가족들의 발을 씻기면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십니다. 점령되어 가는 것입니다. 회사에 나가보니까 우리 사장님의 온유한 성품, ‘처음에 내가 여기 올 때는 그렇게 사람이 거칠고 황폐하더니 교회에 나가서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많이 만나더니 정말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었구나.’ 그것을 보면서 그를 다스려주시는 하나님이 자기도 다스려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땅들을 정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의해 우리의 마음과 인격이 점령되기만 하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그 성품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넓은 땅들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서 그 땅을 소유하는 도구들이 되게 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복해 가는 놀라운 감화의 축복들을 바로 주님을 만나고 깊이 깨트려져서 정말 주님 앞에서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사람들을 향해 오래 참고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기까지 부단히 자기가 깨트려져서 주님의 마음에 알맞은 사람들로 변화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고대하고 또 고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어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네 번째 복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대치할 수 있는 욕망과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이 있습니다.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은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런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의해서 대치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취미생활을 하다가 보면 빠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취미에 깊이 빠지다 보면 그것만하고 싶습니다. 바둑에 빠져본 사람들은 알지만 사람이 모여 있으면 다 바둑알로 보입니다. 머리 없는 사람은 하얀 알, 머리가 많은 사람은 까만 알, 그래서 이렇게 해서 저것은 죽었다고 합니다. 저기 단수가 들어가면 저 사람은 빠지는데, 드러누워서 천장의 격자를 보며 ‘저기 하나만 더 집어넣으면 다 잡아먹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취미에 빠지다가 또 세월이 흘러가면 그 다음에 그것은 다 내동댕이치고 다른 취미에 빠집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욕망이 아니라 상대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욕망 가운데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이 있으니 그것은 목마름과 배고픔입니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대치될 수 없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하더라도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입니다.
(예화 1) 젊은 시절, 한참 은혜 생활을 하실 때 무슨 일로 금식 기도를 하시게 되셨는데 이틀째에 기도하시다가 갑자기 탕수육이 먹고 싶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드시고 나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는데 그 일로 하나를 깨달은 경험은 배고픔이라는 욕망은 하나님의 은혜로도 대치될 수 없다는 이야기.
(예화 2) 같은 직장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금식기도를 하는데 자기는 이틀째가 한계라고 하면서 창고에 앉아서 무엇인가 열심히 쓰기에 무엇을 쓰는가 했더니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빽빽이 쓰고 있다는 이야기.
하여튼 굶주림이라고 하는 것, 무엇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간절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목마름은 배고픔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더 절실합니다. 그런 욕망을 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의는 하루 종일 설교를 해도 안 될 정도로 굉장히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 중에서 일부를 지난 사경 회 때도 했고 그 다음 메시아 고난과 영광에서도 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료들을 여러분이 참고하고, 한 두 마디의 이야기로 다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쓰여진 ‘의’는 무엇인가? 결론을 내리자면, 여기서의 그 의는 다양한 뜻이 있는데 여기에서 쓰여진 그 의의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결과로서의 의입니다. 이해가 잘 안가니까 이렇게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한 나라를 아주 악한 임금이 다스립니다. 아무리 악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그 임금이 칼을 들고 서민인 우리 집에 와서 내 목에 겨누면서 나보고 돈을 내놓으라고 강도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악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 그 임금의 얼굴도 못 본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또 나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습니다. 무능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립니다. 무능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 그 임금이 자신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어떤 무능을 행하지 않았어도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지도력의 무능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분 좋은 예를 들자면 선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립니다. 지혜롭고 명철하며 지도력도 뛰어나고 청렴하고 백성들을 눈물겹게 사랑하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립니다. 한 사람이 나라를 그렇게 다스리면 백성들은 그 나라님의 얼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악수를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임금님이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밤중에 돈 다발을 들고 와서 우리 뒤뜰에다가 던져주고 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래 사는 많은 백성들이 누구나 선하고 능력 있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치의 결과가 백성들에게 그대로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결과로서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통치의 결과로서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의로운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 관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자기 자신에 관해서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거룩한 교제 속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때 그 사람 마음에 오셔서 주님이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로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오셔서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은 거의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면서 그가 하나님 앞에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서 살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점점 사라집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왜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가?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지고 먼 나라로 갑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고통을 주었습니까? 아니면 아버지가 탕자를 괴롭혔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십자가가 있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그저 아버지와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한 가족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랬는데도 그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멀리 떠나간 이유는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는 만족보다는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허랑 방탕하게 먼 길로 떠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주님의 다스리심 가운데 복종하면서 의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뭔가 고통을 주고 힘들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누리며 살아가는 기쁨보다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훨씬 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 떠났던 사람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됩니다. 이때 그 사람의 생각은 아주 단순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자신 속에 의에 통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하고 분명한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늘 입에 붙어 다니는 것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아이고 나도 모르겠어.”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서 다시 신앙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모르겠어.” 모두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겠다는 것이 진짜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혼돈스러우니까 모르겠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 곤고하고 힘들게 살아야 되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머리가 너무나 복잡합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간단해집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 다시 말하면 “자신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은혜가 없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이유가 많습니다. 요즘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도 많을 것입니다. 소원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것은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일입니다. 사업이 어려운 사람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그 사업에 복을 주시면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면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도가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의 죄와 악함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며 뉘우칠 때 가슴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프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아파하며 기도할 때 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축복이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갈망하는 의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 자기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에 대한 목마름과 주림을 대신 채워줄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만족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다시 나를 사랑해주셔서 주님과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서 주님이 내 마음 전체를 다스려주실 수만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많은 지위, 수많은 기회들, 인생의 많은 즐거움, 소유물들, 이런 것들이 내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 그 마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과 애통하는 마음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없이는 애통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성도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흐느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축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자신 속에 하나님이 완전히 다스려주셔서 하나님 혼자 자기의 마음속에 왕이 되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십자가의 깃발을 세우시고 내 마음 구석구석에서 유일한 통치주가 되시는 것을 입증하실 수만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아래 의를 맛보면서 사는 일 년간의 즐거움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백 년 동안의 형통함보다 복이 있다고 믿는 사람, 그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되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이 나라는 항상 가만히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항상 이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에 통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들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왕년에 한두 번 은혜 받은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제 관건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늘 다스려주시는 그런 통치가 우리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로 신자다운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이 우리를 온전히 다스려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 속에 끊임없이 반역하는 세력들이 고개를 듭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인 의가 자기의 온 마음을 지배해야 한다는 소명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서 아파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신자의 특징은 반듯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 깨어짐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깨트려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주시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의가 내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데도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의에 통치를 대항하는 불순종과 죄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것이 자기의 결심으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가 없고 자기도 너무 싫은데 자기 안에서 그런 죄가 역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거스르려고 하는 순간순간의 욕망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면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의에 대한 소명과 실제로 자신 속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거스르려고 하는 죄와 불순종 사이에서 신자는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지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에 통치에 대한 반역들을 잠재우고 ‘내 마음 전체를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목말라 할 때 그는 부단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아무리 불안정하고 남들이 보기에 다듬어지지 못하고 지금 예배드리고 밖에 나가서 술 먹고 담배를 핀다고 할지라도 자기 깨트려짐이 있으면 자기 깨트려짐이 계속 되는 한 언젠가는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의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반듯하고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서 남들이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어도 자기 깨어짐이 없으면 여러분은 말로만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마음이 제 멋대로 살아가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통치를 거절하는 불의한 마음의 세계가 되어버립니다. 참된 신자의 조건으로서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은 그는 진실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3-4년, 1-2년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자체가 죽어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잠재해있는 수많은 죄악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것들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건강진단을 받으러 갔는데 내시경 검사를 하면서 “아이고, 위 속에 주먹만 한 암 덩어리가 있네요.” 말할 때 “그 정도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밤톨만한 것 하나만 있어도 여러분은 근심하고 고통 받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암 덩어리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의의 지배가 실현되지 않는데 그래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주님을 자신 속에서 충만하게 소유하며 살아갈 수 없는데도 거의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 깨어짐이 거의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무리 부족해도 나는 용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지금 변화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성공하면 외식하는 신자이고 실패하면 배교에 가까운 생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속에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해서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주님이 오셔서 더 충만히 나를 다스리시고 주님이 나의 마음과 삶 구석구석을 다스리셔서 나의 모든 생활이 주님의 것 되게 할 수 있을까? 나의 입술의 모든 말, 나의 마음의 묵상까지도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하나님의 의가 지배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을 가지고 목말라하며 배고파하는 것처럼, 굶주린 사람이 양식을 찾듯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그것을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외부의 영역으로 이것을 확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항상 우리들이 잘 쓰는 이야기가 “야, 우리나 제대로 믿자. 너나 잘 믿어라.” 그런데 진짜 은혜를 깊이 받고 나면 그 말이 얼마나 잘 안 맞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그게 무슨 재미인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도 잘 믿어야지.” 은혜 받기 전에는 그저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실제 잘 믿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진짜 자기가 은혜를 깊이 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나만 잘 믿는 것 가지고는 만족이 안 됩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잘 믿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상이 났다고 하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은 그 양반이 우리 교회는 안 나오지만 예수를 믿고 돌아가셨나, 안 믿고 돌아가셨나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물어봅니다. 안 믿고 돌아가셨다고 하면 장례식에 가서도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믿고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래도 가면서 소망이 있습니다.
(예화) 어느 집 장례식에 가셨는데 세상 적으로 보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인 분이 주무시다가 돌아가셔서 그 자녀들이 호상이라고 기뻐하는데 그 집안에 믿는 지체가 있어도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예수를 믿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애통하지 않고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는 것은 죽은 할아버지의 마음이나 그 형제의 마음이 비슷한 마음이라는 이야기.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마음속에 실현되고 나면 우리 혼자만 이런 의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으로는 죽어도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면 네 신앙도 내 신앙이고, 내 신앙도 내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신앙생활 해야지 됩니다. 저 사람이 잘못 신앙 생활하면 내가 이렇게 분노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중보 기도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들이 아직까지도 예수를 안 믿고 있는데,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미래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속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와 상관이 없는 불신앙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흘러 들어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기쁨과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님의 의의 지배를 통해서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가족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우리 엄마가 왜 저러고 매일 고스톱이나 치고 살까? 정말 하나님 만나면 그러면 정말 그 속에 하나님이 우리 엄마의 마음을 다스려 주시겠는데.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우리 엄마 앞에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 그저 돈 버는 것에 미쳐서 가족도 모른 체 하면서 바쁘게 사는데 주님을 만나서 주님이 우리 아빠의 마음을 다스려주시기만 하면 이렇게 행복할 텐데.” 그런데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 왜 우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하나님 나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대기업의 회장이 되고, 우리 엄마가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우리 엄마의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 아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저희들이 나처럼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것 말고는 내 마음속에 진정한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소원이 성취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내가 믿지 않는 아빠, 엄마에게 노예처럼 부림을 받아서라도 내 가족을 인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믿지 않는 내 남편에게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노예처럼 되어도 그것을 통해서 내 남편이 예수를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의 절반을 잘라서 버림으로 내 아내를 구원하고 우리 아들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우리의 가정 속에 이루어져서 일 년을 사는 것이,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백년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 이 일을 연장하시렵니까?” 하면서 가슴 절이는 마음이 되는 것,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보면 교회를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렸을 때는 교회에 와서 그저 덜렁덜렁 생각도 없이 살아갑니다. 교회에 와주는 것만 해도 자기는 대단한 것처럼 목사님이 앞에 서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감사한 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그런 말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감사하다는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하면 그것은 실수입니다. 절대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의에 지배와 그리고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런 기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의의 지배를 받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교회에 와서 보면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주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난 지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하나님의 의가 내 마음속에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에 나처럼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로서 신앙생활을 대신하는 불행한 사람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교회를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나만 하나님이 다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지체의 마음을 다스려주시고 교회 모두가 하나님이 온전히 지배하셔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교회가 죄인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나쁜 교회도 아니고, 또 반듯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좋은 교회도 아닙니다. 처음 교회당에 나올 때 사람이 교회 마당에서 불 받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다음에 경건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 중에는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예수 믿은 동기를 대보라고 하면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당이 예수 믿어보라고 해서 예수 믿은 사람도 최근에 등록했습니다. 너무 살기가 힘드니까 무당에게 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엄청난 굿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싫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녔을 때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겠냐고 하니까 무당이 하는 이야기가 걸작입니다. 효과는 자기가 보증할 수 없지만 그것도 한 대안이 될 수 있겠다고 한번 잘 해보라고 했답니다. 무당도 이렇게 전도하는데 여러분은 뭐합니까? 무당만도 못합니까? 한 대안이 될 수 있겠다고 해서 우리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제 마음에 ‘아, 우리가 게으르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까지도 역사하셔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부르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은 사람도 있고, 제가 아는 자매 하나는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해마다 제사를 지낼 생각을 하니까 뒷골이 댕기더랍니다. 그래서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돌아가실 만하니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 돌아가시자 기독교장으로 해야 된다고 우겼다고 합니다. 왜? 제사 없으니까. 그게 계기가 되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도 있고 젊은 청년들 가운데는 교회에 가서 예쁜 자매나 하나 꿰찰까 하고 왔다가 주님께 발목 잡혀서 새사람이 되어서 회개하고 신자가 된 사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기 고개 숙이는데 그 사람들입니다.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댈까요? 김 아무개, 박 아무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주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새사람이 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여러분은 좀 성숙하게 사셔야 합니다. 교회올 때 꼭 양복을 입고 오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좀 단정하게 슬리퍼 끌지 말고 머리도 좀 가리고, 왜 다른 날은 잘 입다가 주일날 폭탄 맞은 머리를 해서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좀 단정하게 화장도 하고 곱게 하고 오십시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십시오. 절대 교회에 올 때 반바지 입지 마십시오. 어느 날 보니까 노랑머리가 들어옵니다. 오늘 노랑머리 하고 온 사람들을 보고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 투 쓰리 계속 들어옵니다. 그리고 교회에 오는데 슬리퍼를 끌고 여자가 반바지를 입으면 애교 있게나 보이지, 시커먼 털이 북실북실하게 난 형제가 슬리퍼를 신고, 그것 나이키도 아니고 나이스. 껌을 씹고 귀는 왜 뚫는지 귀는 뚫고 귀걸이를 걸고 덜렁덜렁 거리고 들어오는데 성경 찬송을 찾느라고 헤맵니다. 그리고 들어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그 사람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한 시간 내내 모자 쓰고 앉아서 질건 거리고 씹으면서 다리 꼬면서 예배드리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채운다고 해서 그 교회가 병든 교회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교회가 병든 교회인가 하면 그들을 위해서 울어줄 사람이 없는 교회가 병든 교회입니다. 아무나 와도 괜찮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예배드리고 가다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담배를 물고 내려가도 나는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기 때문에 교회가 병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울 사람이 없는 교회가 병든 교회입니다. 왜 그들을 위해서 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신 속에 의의 통치가 이루어진 신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모여서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 속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단정한 차림으로 나와서 침묵 가운데 단정하게 격식을 따라서 장엄하게 예배를 드린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두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신자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도 그 교회 자체는 병든 교회입니다. 나는 노랑머리 부대들이 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노랑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나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색깔로 물들이고 와도 나는 전혀 충격 받지 않습니다. 여기가 알록달록해도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설교할 수 있습니다. 왜 그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속에 오셔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나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주님을 거스르면서 살기 좋아하는 인간을 위해서 어떻게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시는지 아들을 찾으신 집나간 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 메이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정말 자신의 마음속을 주님이 다스려주시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 속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사모함과 목마른 갈망을 자신 속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들이 교회에 왔어도 여러분의 찌푸린 눈살이나, 말하자면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경건하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곳에 와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들이 그렇게 하고 다녀도 바지가 그게 뭐냐, 옷이 그게 뭐냐, 여기는 지금 고등학교 훈육부가 아닙니다. 내버려두십시오. 그냥 자유롭게 놔두십시오. 문제는 자기 속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은 주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평화 없는 마음의 상태를 압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저 형제들의 마음에, 저 자매들의 마음에 주님이 오셔서 다스려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저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이 되고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사모함을 가지면서 아파하는 사람, 주리고 목말라한다고 그랬는데 한국 사람의 심성과 맞추어서 번역을 하려면 사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번역하면 우리 가슴에 콱 꽂힙니다. 실감이 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확장을 해서 뻗어가 보면 이 세상을 우리들은 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우리는 모두 그 속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아주 가장 연약한 피조물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문밖에만 나서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인간의 절규들이 들립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그 의로운 통치 아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빨리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세상의 나라를 의에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헌신하기보다는 어떻게 이 두 나라를 오가면서 이중간첩처럼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일에 더 골몰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모인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는 신앙을 갖지 않은 자녀처럼 그렇게 자기의 정체성이 없이 수시로 자기의 상황에 유리한 대로 자기를 변신시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늘 주님의 말씀의 표현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가 됩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그 통치가 강제로 우리에게 온 나라가 아니라 우리 무릎을 꿇음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이 의로서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으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우리의 마음을 만드시고 우리 교회를 그렇게 만드시고 이 땅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로 우리를 사용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세상에 내보내신 이유는 내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과 그리고 이 세상 나라 사이에 그 질적인 차이를 세상을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극복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많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 살수록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이 자기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기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가 없으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찬양)
주 예수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니까 내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사람이 되고 나니까 좋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해결하는 길은 무엇인가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속에 내 안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변화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인해서 아파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한 것같이 목말라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며칠 굶은 사람이 손을 벌벌 떨면서 밥숟가락으로 밥을 푸는 것 같은 그런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교회가, 그리고 이 세상이, 내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그 마음에 합하도록 변화되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셔서 우리 안에 이루신 이 피의 나라,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 그래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에 나라, 이 속에서 우리들이 말할 수 없는 유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맛보고 십자가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내 안에는 물론이고 내 밖에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간절히 구하면서 살게 하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남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이 복음을 믿어지게 하시고 남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신자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부를 누리고 어떤 지위를 누리면서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섬김과 존경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인생 전체를 그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갈망으로 가득 채우면서 인생을 살았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의 질을 결정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존경을 받고 많은 부를 누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며 여러분이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가족과 이 교회와 사회 속에 이루어지기를 향한 목마름과 갈증이 여러분에게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이 나라에서는 VIP일지 모르지만 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이 골백번을 죽어도 천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은 여러분이 아무리 죽어도 거들떠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다른 사람처럼 많이 교육받지 못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누구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이렇게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에 의에 대한 갈망을 갖고 여러분의 가족, 교회, 그리고 온 세상에 그런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목말라하며 그런 굶주림을 가지고 그 의를 추구하며 산다면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아주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정말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한 몸부림으로서 인생을 마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벌떡 일어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치와 질을 좌우하는 참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희에게 하나님이 만족을 주실 것임이요” 그랬습니다.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에 은혜를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속에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의로운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내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고 내 마음 어느 한구석도 주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허기진 사람이 양식을 찾듯이 목마른 사람이 한 모금의 물을 찾듯이 그렇게 집중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 속에 이루어질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으로 자신의 영혼의 참된 변화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목마르게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만족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만족을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만족시켜주시는 방법도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만족을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와 악함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기 속에 이루어지지 못한 하나님의 의에 통치가 자기의 죄와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칠 때는 아프지만 그렇게 뉘우치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지배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회개 뒤에는 항상 하나님의 의에 승리가 있습니다. 진실한 뉘우침과 깨트려짐 뒤에는 항상 주님을 거슬리던 것들은 잠자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넘어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그런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를 한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바로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떡을 주시고 빵을 주시고 혹은 보물을 주셨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진실 되게 자기가 깨트려지는 회개가 있기 전에는 주님의 통치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함으로서 성큼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에게 다가와서 그래서 자기를 그 의로서 다스려주시고 통치하시는 놀라운 증거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왕이 온 나라를 다스리다가 죽고 순식간에 선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게 될 때 나라가 바뀐다고 하는 것은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겨우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각적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온 세상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즉각적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주님의 통치에 갈망할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주시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의와 기쁨과 그리고 행복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자기 깨어짐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깊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가 패배하고 깨트려지는 아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위로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여기서 “배부를 것임이요”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죄와 악함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그 말씀이 우리를 찌릅니다. “이것도 잘못했지, 이것도 불순종하지, 너 나쁜 사람이지.” 하고 막 찌를 때는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을 토설 할 때도 아픕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를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을 때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 끝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죄가 다스렸던 우리의 마음을 청산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스려주실 때 느끼는 그 위로와 기쁨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죄를 지적 받고 하나님 앞에 아파하고 뉘우칠 때 경험했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놀랍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참된 통치와 사랑을 맛보려고 한다면 여러분 속에 의가 아닌 것들을 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를 위해 목마른 사람들, 자기 밖에 교회와 가족과 온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의에 통치에 대해서 갈망하며 간절히 아파하는 사람들도 이런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섬기고 있는 영혼들의 변화를 위해서 가슴앓이하며 아파하면서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 기도를 듣고 그가 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그가 우리 앞에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속에 변화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어갈 때 우리가 받는 그 위로는 그를 위해 지불했던 마음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와 섬김을 통해서 지체들이 하나님의 의에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더 온전한 교회로 바뀌고 세상이 그 교회를 통해 영향을 받아서 신앙으로 귀환하는 죄인들의 돌아오는 발길을 보면서 그것이 만족이 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참된 기쁨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가정의 주부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사업하는 사람으로, 공무원으로 다양한 직업으로 다양한 삶에 일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가있든지 누룩과 같이 자기 속에 이루어진 그 의를 전파할 것이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던 곳에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잠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그 사람처럼 주님이 오셔서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주시기를 갈망하는 사람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로 살아서 이렇게 일생 사는 동안에 주님의 위로와 통치를 한없이 맛보고 그 위로 속에서 어두운 세상을 이길 새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긍휼히’라는 말은 사실은 교회 밖에서는 우리가 잘 만나보기 어려운 말입니다. 어느덧 이 ‘긍휼히’라고 번역된 우리나라 말은 종교 안에서, 특별히 기독교 신앙 안에서 통하는 그런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좀더 쉽게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긍휼히 여긴다”라고 하는 말은 똑같은 단어는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지만 그러나 불쌍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들은 모두 교회 밖에서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긍휼히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은 무조건적인 동정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덮어놓고 무조건 그 사람을 불쌍하게만 생각하는 그런 것이 긍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가르치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가르치셨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쉽게 이야기해서 판단력을 결핍한 충동적인 애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또 이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은 지식을 결핍한 사람 같은 것이 아닙니다. 중세에 유럽의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교회 안에 모았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감염된 자와 감염되지 않은 자가 모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생활하면서 오히려 그 페스트는 교회를 중심으로 아주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라는 것은 이렇게 지식을 결핍한 충동적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긍휼히 여긴다”라고 할 때 이 긍휼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긍휼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긍휼을 염두에 두면서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없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많이 사랑하시지만 여러분이 바르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바르게 살지 않고 범죄하고 불순종하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는데 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고 한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느낄 수가 있어야지 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의 기대를 따라서 내가 살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내가 그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녀가 있으면 자녀가 학교에 가서 좋은 성적 받아오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순종하고 그럴 때만 사랑합니까? 그 아이가 병들어서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서 병상에 누워있거나 아니면 공부도 못해서 학교에 가서 늘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럴 때 여러분이 자녀들을 사랑합니까? 사랑합니다. 더더군다나 완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하시고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그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의 상태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으면 내가 잘 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다 내 세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다. 내가 잘 살았으니 사랑해주시지, 지금이라도 내가 못 살면 하나님이 나를 본 척이나 하실 줄 아나?”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들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도움이 안 됩니다. 나도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될 때 우리도 비로소 다른 사람을 어떻게 긍휼히 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정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기는 은혜의 정도에 비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것을 아는 정도와 깊이는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 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자매를 만났는데 시집을 가서 애를 기르면서 애가 아프니까 매일 병원에 데리고 가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입술이 다 부르텄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네 엄마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지 알겠지?” 그러니까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하면서 “정말입니다. 목사님, 나는 아이를 낳아서 이렇게 아이를 길러보기 전까지는 엄마의 사랑이 그렇게 간절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매의 어머니가 자매가 어렸을 때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까 엄마가 아주 폭포수처럼 쏟아 붓는 사랑으로 그 시집간 딸을 사랑해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랑했는데 그것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가서 아이를 기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려보니까 그 엄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예전부터 계속 받았는데 엄마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오히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엄마 된 다음에 비로소 엄마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받았던 모든 사랑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에 그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리 부모로부터 일관된 사랑을 많이 받았어도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을 깨닫고 알지 못할 때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모의 사랑을 느낌으로서 뭔가 새롭게 살 수 있는 인생에 대해서 도움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어져버린 충동적인 연민이나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옳고 그름을 그 사람의 불쌍한 상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긍휼히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으니 들어보십시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긍휼히 여긴다”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모두 없애버리고 한 사람을 향해 퍼붓는 충동적인 사랑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반대로 가서 긍휼히 여긴다고 할 때 이것은 그 사람의 처한 불쌍한 상태보다는 옳고 그른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은 또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런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부모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길거리를 걸어가도 이렇게 평범하게 어른같이 걸어가는 예가 없습니다. 꼭 모서리 같은 곳에 올라가서 까치발을 뜨고 그렇게 서커스를 하듯이 걸어갑니다. “얘야, 다친다. 그렇게 하지 마라.” 그런데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다가 꼭 사고가 납니다. 벌써 우리 애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꽤 오래 되었습니다.
(예화) 애가 어린 시절, 밖에 저녁 외식을 하기 위해 가서 주차를 시키는 가운데 아이가차에 부딪혀서 발을 다친 사건으로 순간 화가 나셨지만 아프다고 우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는 이야기.
그런 감정입니다. 이렇게 악한 인간들도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화가 날 때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시간이 금방 지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뒤에 앉아서 아프다고 우니까 근심으로 바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긍휼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없는 것은 아니고 살아 있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가 비참하게 된 상태를 더 많이 생각하면서 불쌍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긍휼입니다. 여러분이 이것 보다 더 생생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했으니 “이 늙은이야,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것과 똑같은 것이 아닙니까?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달라는 그러는 놈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받아서 먼 나라에 가서 다 방탕하게 써버리고 이제는 굶주리고 배고프고 틀림없이 육신이 병까지도 걸려서 흉한 몰골로 동구 밖을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아버지의 아들이라고는 도저히 다시 불림을 받을 수 없겠고 그저 품꾼 중에 하나라도 써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동구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버지가 발견했습니다. 집을 나간 지 오래 되었고 그 아들을 인해서 밤마다 아침마다 눈물로 그 아들을 기다렸는데 꿈에도 그리던 그 아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떠날 때 돈 가방을 들고 위풍당당하던 말쑥한 모습은 사라지고 흉악한 몰골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판단은 사라졌습니다. 이 자식이 자기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한 것도 잘못한 것이고, 먼 나라로 간 것도 잘못한 것이고, 거기서 허랑 방탕하게 모든 것을 낭비하고 지금은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것도 잘못한 것이고 다 잘못한 것입니다. 이런 판단은 아버지에게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대로 살아있는데 흉한 몰골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결국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삶입니다. 그랬는데도 아버지는 “그렇게 된 것이 결국은 너 탓이다.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상황에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는 그 아들이 흉한 몰골로 나타났을 때 그 흉한 몰골이나 외모에는 관심이 없고 그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 죽은 줄 알았는데 이제 이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은 지금 너무나 배고프고 곤고하고 병들고 지쳐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 가슴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른 판단은 살아있지만 그것은 그 뒤편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분명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맞아들여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그렇게 자기 아들로 삼아주셨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 아들을 앉혀놓고 하나씩 가르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것은 잘못한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데 어떻게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가? 그렇게 했을 때 네가 진실하게 사업을 하든지 뭘 해서 성공을 해야지, 어떻게 악한 친구들과 함께 허랑 방탕하여 그 많은 재산을 다 털어먹고 너는 병들고 이렇게 비참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인생을 사는 도리 하나하나를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춥고 배고프고 병들고 그리고 비참한 몰골이 되었습니다. 솟구쳐 오르는 이 아들을 향한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향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웅변적인 묘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게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우리들이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과 원수 맺으면서 살다가 구원받기 몇 년 전부터 우리들이 삶을 다 청산하고 곧고 올바르게 잘 살아가니까 하나님이 그렇다면 너는 내 자식이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님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 그리고 우리가 죄인임을 깊이 알고 고백하면서 뉘우치니까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때에 일생을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서 주님의 복음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와 어두움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들이 살아온 많은 날들에 대한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집 떠난 탕자와 같이 방탕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인생의 길을 걸어오면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고쳐질 수 없을 만큼 망가지고 자신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곤고해져 버린 모습을 보며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주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은 구원받은 그 순간에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구원받은 이후에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매주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경배하고 은혜를 받지만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고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일관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을 인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일관성이 있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푼 그 크신 사랑이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종종 느껴지지 않는 적은 있지만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고 어미가 그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같이 일관된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사랑에 종종 펑펑 울며 감격하면서도 주님 앞에서 보이는 우리의 사랑은 일관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한 몸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사랑하기를 더 많이 하고 우리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매몰차고 그리고 가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지체들과 이웃들을 주님이 내게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면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런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셨는데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지만 그 사랑과 긍휼의 보답하는 반응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날마다 결심해도 우리의 결심은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사랑은 마치 아침구름과 같아서 잠시 햇살이 돋으면 사라지는 구름과 같아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사람답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선한 결심이 언제나 있어서 결단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기보다는 죄 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훨씬 쉬운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부패한 욕망들과 세상 적인 정욕들은 우리를 곤고하게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삶의 일관성을 깨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일관되지 못하고 ‘之’(갈지)자의 걸음으로 세상과 하나님의 은혜에 세계 사이를 오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오늘날 이렇게 거미줄과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오늘도 낙망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며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들을 지금도 여기에 세워두고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이야 말로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었고 그 양식을 먹으면서 오늘날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더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많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쓸모없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은 이미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실 때 이미 우리에게 예고된 바였습니다. 더 멀리는 당신의 명령을 거스르고 타락한 인류의 첫 조상들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는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해서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멀리 떠나려고 할 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당신 앞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바로 긍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 중에서 가장 욕심이 나는 은혜가 무엇이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많이 받은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긍휼입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소낙비처럼 내려지는 축복이나 아니면 수없이 퍼부어지는 물질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은혜의 축복이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은혜와 긍휼히 이 세상에 그 어떤 축복보다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베푸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들의 불행한 상태가 그들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 죄의 종류와 불순종의 정도를 미리 판단하시고 그들의 심판의 수위를 결정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것이든지 하나님의 택하신 그 자녀가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치료를 필요로 할 정도로 망가져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긍휼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긍휼과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의 인생을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물론이거니와 주님을 믿은 이후에도 우리들이 다 잘 살았습니까? 우리가 진리를 알았지만 진리대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았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방종의 기회로 삼고 주님의 은혜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실 것이라고 하는 자기 위안의 도구로 삼은 적이 많았습니다. 인격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갈 때까지 가본 적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걸어간 죄의 길로 인해서 우리 스스로 상처를 받고 우리 스스로 곤고한 자가 되어서 우리 스스로 새 사슬에 묶여서 사망의 그늘 아래 앉은바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제껏 죄 사함에 용서와 그리고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행동으로서 우리를 오늘날까지 살아오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지만 앞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 때에도 우리에게는 비할 데 없이 크신 긍휼과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또한 압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죄인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로 말미암아 입은 상처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만 우리가 이런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이렇게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서 감격하면서도 그런 긍휼을 입을만한 자격이 있는 삶을 앞으로도 살 자신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죄인들, 이 땅에 있는 모든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여기시고 우리를 한없이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히 많으신 하나님,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모든 인생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죄인을 향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크신 긍휼, 죄인 중에 괴수인 자들을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이 비할 때 없는 긍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들을 형벌하시기 위해서 골몰하신 분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아버지를 말리는 분으로 묘사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혀주신 희생을 베푸셨지만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당신을 등지고 당신에게 대적하다가 지은 그 수많은 죄와 죄로 말미암은 상처 때문에 형벌 아래 놓여 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순결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흉악한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모두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긍휼은 우리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묘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긍휼히 여기시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렇게 마음에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가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보답하는 생애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까지도 주님의 이런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긍휼이 이렇게 큰데도 이런 긍휼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랑과 긍휼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버림받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죄와 실패를 자기의 운명으로 생각하며 그렇게 목자 없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랑 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그 사랑을 받았고 주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사랑은 우리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도 예전에 우리와 같이 주님을 대적하며 사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가득 찬 이 땅 저 하늘 끝까지 계속되어야 할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압니다. 그래서 이 긍휼의 마음은 그 앞부분에서 나오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에 또한 한 발로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그 긍휼과 우리들이 받은 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 텐데 아직까지도 주님이 창조하신 이 지면 위에는 하나님의 이런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쓰러진 채로 하나님 대적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우리를 후대하시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더 많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우리는 이렇게 이 세상에 흩어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숨을 쉬면서 살아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긍휼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은 간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아무 쓸모없는 인간들을 향해 그런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어떻게 자기의 인생 속에 보이게 나타났는지를 뼈 속 깊이 그 경험을 간직한 사람,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 그 은혜와 긍휼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로서 긍휼의 증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대가없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여러분의 인생의 길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여러분을 향해 베푸신 불쌍히 여기시는 그 긍휼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산 것도 그 긍휼 때문이었고, 지금도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실패한 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시는 사랑,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아온 사울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다시 한 번 주님의 명예를 위해서 살 수 있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회복에 사랑 때문에 오늘날 여기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만약에 우리의 모든 살아온 인생의 길을 우리가 감추고 싶은 모든 것을 저와 여러분이 서로를 향해 모두 볼 수 있다면 아마 우리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다시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서로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여러분의 깊은 사연을 다 알지 못하고 여러분은 저의 그 사연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 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긍휼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생동안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섬기고 구원받은 목적을 따라서 왕국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우리들이 알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들, 우리를 향해 범죄하고 우리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을 보면 긍휼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능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눈앞에 긍휼 덩어리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모든 인생은 그 분에게 빚졌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죄의 용서도 흉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도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분의 긍휼에 빚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다 지나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이 긍휼과 용서의 사랑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신발을 삼고 우리의 등가죽을 벗겨서 주님의 옷을 기어 만들어도 도저히 우리는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는 빚진 자로 인생을 살 것이며, 그 사랑에 빚진 자로 우리는 금 면류관을 쓰고 주 앞에 우리 주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긍휼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의 이런 긍휼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은 버림받았으며 자신은 혼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이 은혜,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구하신 아버지의 용서의 은혜를 전하고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감히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받은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더더욱 긍휼의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자녀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여섯 번째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는 축복입니다. 사실 이 복은 여섯 번째 나오지만 진정한 의미로 보자면 이 복은 여덟 개의 모든 복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천국을 주셨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셨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긍휼을 받게 해주셨지만 그 모든 은혜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오는 것이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복인 하나님을 뵈옵는 복이야말로 여덟 개의 이 팔 복 가운데 면류관이라고 불러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이 여섯 번째 복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주님 앞에 이렇게 복이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제일먼저 ‘하나님을 본다’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 이 ‘본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 광범위한 의미로 쓰여 있습니다만, 큰 뜻은 ‘이렇게 본다’라는 의미입니다. 번역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의미상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본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선 여기서 ‘본다’라고 하는 말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인간이 더더욱 육의 눈을 가지고 영이신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귀신을 보았다고 하는 말과도 유사합니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귀신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매개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이 육신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신비의 체험 속에서 뭔가 하나님의 영적인 특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루 같은 것은 보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사람의 마음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배를 가르고 해부학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 것도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움의 실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그 미움은 만져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양심도 우리의 배속을 아무리 갈라도 그 양심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움, 사랑, 양심, 도덕, 의 이런 실제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팔 다리 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을 본다’라고 하는 의미는 이런 식으로 신비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인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순간적인 하나님을 쳐다봄 순간적인 하나님과의 대면을 의미하기보다는 그 대면이 가져다주는 친교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만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선고받거나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는 팔복 중에 하나의 복을 그들이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 대면하고 그분 앞에서 그 임재의 결과로 말미암아 친교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축복을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자의 모든 삶이 그럴 듯하고 신자의 삶이 아무리 헌신되었으며 신자의 삶이 확신에 가득 찬 삶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믿음 생활의 지성소 한복판에 하나님을 대면하는 친교의 축복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삶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개탄해마지 않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도 결국은 그 본질을 파헤쳐 보면 그들의 성실한 교회 생활이 탄핵을 받을만한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교회에 나오는 성실한 교회 생활을 우리는 질타하는 것이 아닙니다.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고 그저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근면함으로 은근과 끈기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든지 우리들은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있는데 그 안에 단 하나가 없기 때문에 단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 우리의 개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 만약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고 예배시간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차서 돌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성실한 교회 생활은 빛나는 것이요 그의 헌신적인 열심은 아름다운 것이며 흔들리지 않는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말씀을 전해주실 때 그 시대의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리새인을 비롯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종교 생활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서기관대로 대대로 대를 물려가며 성경을 기록하고 그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소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자신들의 법도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대로 탁월한 경건의 모본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것들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교였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친교 속에서 살면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그런 생활들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즐겁게 살도록 창조되었으며 그런 창조의 목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범죄 한 후에 아담과 하와가 제일먼저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부끄러운 곳을 나무 잎으로 가리고 그리고 숨어버렸습니다. 숨은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뵈면서 살아가는 그 삶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눈빛 앞에 숨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들의 범죄를 통해 들어온 죄는 누룩과 같이 세상에 번져서 처음 범죄하고 자기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며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던 아담과 하와 속에 있는 동일한 경향성들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었습니다. 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의 도리를 가르쳐주어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왜 명백한 믿음의 도리를 가르쳐주어도 그들이 도무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심과 그들 속에 있는 죄악 된 삶에 대한 애착, 혹은 거룩한 것들에 대한 공포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뵈면서 살아갈 결단을 하지 못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속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을 거의 뵈옵지 못하고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결핍한 신자들이 이 세상에는 부지기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과의 이런 만남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대면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생명이 없는 신앙의 삶을 계속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 전혀 행복할 수가 없고 팔복에서 약속된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라고 하는 지고의 축복을 누리지 못함으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때문에 비롯되는 참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행복은 신자가 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눈앞에 살면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뵈옵습니까?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날마다 주님을 보십니까? 그래서 그분의 거룩하신 주님의 임재를 여러분의 마음속에 흠뻑 받아들이십니까? 그리고 그 주님의 탁월하신 위엄과 사랑의 눈빛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비쳐보고 그리고 이 세상에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그런 신앙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 찬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내가 이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지존하신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집이로다 라고 하는 야곱의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있는가 하고 제가 지금 묻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갈구하고 사모하는 축복들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사모하고 갈망하는 행복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이런 본질적인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을 찾으면서 추구하는 행복이 아닙니까? 많은 제물과 높은 지위,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삶, 더 안락한 생활, 그리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려고 하는 욕망에 눈이 어두운 생활들 이런 속에서 우리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마셔도 목이 갈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신자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봄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친교를 누림으로서 받을 수 있는 참된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다른 곳에서 얻고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포함해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자기를 따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지고의 축복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정말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축복이란다. 너희들이 육신의 질병을 고치기를 원하고 허기진 배를 메우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축복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그분과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구원하신 주님의 최고의 기대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서 살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들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주님이 우리를 인해서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을 대면하는 친교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에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이 욕망을 가장 뛰어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내가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를 보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장 강렬한 소망이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와 이 세상을 향한 욕망들은 끊임없이 죽이고 그리고 여러분 속에 솟아나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하나님을 뵈옵고 그분의 눈빛 앞에서 그분의 주목을 받으면서 사는 것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이것을 축복으로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는 운동회도 하고 학예회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프로그램들이 많지만 그때는 기껏해야 그저 일 년에 한번 열리는 가을 운동회, 그리고 봄에 열리는 학예회 이런 것들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이라도 하나 맡았을 때 집에 부모님들과 식구들이 오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와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힘이 나고 행복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선생님이 칭찬이라도 해주시면 우리는 마음이 날아갈 듯처럼 기쁩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는 그 눈빛 앞에서 하나님 때문에 힘을 얻으며 주님이 자기를 지켜보신다는 것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고 주님이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자기도 주님을 보면서 살아가는 그런 행복 속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자녀인 크리스천들입니다. 이런 축복들, 죄가 들어온 후로는 이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을 어느 시대든지 안 두신 적은 없었습니다. 항상 있었습니다. 소수였습니다.
기도할 때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뵈옵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고 병든 부분들을 치료하시는 손길을 느끼는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어도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부르짖을 때 인도하시는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 번째로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큰 축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여덟 개의 축복 중에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뵈옵는 이 축복을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청결’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카탈로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뭔가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씻어내어서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카탈로이’의 그 배경이 ‘타헤르’라는 히브리 단어인데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불결하던 어떤 것들을 이렇게 정결 의식을 통해서 깨끗해진 것,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깨끗해진 그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마음에 관심을 보이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마음은 청결한 마음일 때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사실 첫 번째 복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랬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뵈옵는 복은 ‘심령’이라고 말을 안 하고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영혼은 단번에 청결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속함을 받은 영혼의 깨끗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을 뵈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속죄의 불안정 속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시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과 상태 때문에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최고의 축복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진입로와 같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마음이라는 과일 속에 영혼이라는 씨가 들어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통해서 영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또 영혼이 마음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면 그 거듭남이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영혼에 변화로 영향이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과 영혼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마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율법과 선지자의 최고의 강령도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면서 마음이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할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마음은 심각한 연구 과제가 됩니다. 마음에 대한 탐구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거하는 자리도 마음인가 하면 죄가 거하는 곳도 마음입니다. 한 사람이 은혜에서 떨어져서 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죄에서 떠나서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그 과정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마음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으니 신자들의 마음도 얼마든지 더러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말씀을 이 기록을 통해서 접하고 있는 우리들까지라도 주님이 구속해주신 우리의 영혼은 사단이 그 영혼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그들의 마음을 더럽게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청결한 정도는 항상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마음을 지키면서 은혜의 생활을 유지하는가에 따라서 수시로 그 상태가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둘러보더라도 하나님을 풍성하게 뵈옵고 주님을 만나는 때가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그렇게 뵙고 풍성하게 만나지 못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풍성하게 만나고 뵈옵는 때가 있었던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비교적 정결했던 때요. 우리의 마음이 그런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나면 마음이 더러워져서 주님을 뵈올 수 없는 흑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청결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열렬한 기도의 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기까지 그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동안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포, 그 한가운데서 주님을 볼 수 있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그 한순간에 자유를 위해서 장시간 동안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분투하는 노력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순간 자기가 하는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는 숙달되기만 하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 속에서 그리고 주님과의 친교를 보여주면서 그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자기를 지키면서 사는 마음의 지킴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보실 때 정말 청결합니까? 예전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리고 죄 가운데 무지하기 이를 때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녹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오랫동안 어두움 속에서 살았고 주님의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지만 한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비쳤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빛이 우리의 마음 구석 가득가득한 어두움들을 모두 몰아내고 우리 밑바닥 속에 흐르고 있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게 되었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와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갈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정결해졌습니다. 오히려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결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족했지만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서는 찌끼와 같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들이었지만 여전히 그 속에 정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뵈옵는 한순간에 그 행복으로 가혹하리만치 긴 시련의 때들을 이기면서 살 수 있었고 한 순간 어두움을 가르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 우리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을 향해 비추시는 그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인해서 지루할 정도로 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부단한 자기 씨름의 시간들을 오히려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인간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으면 느낄 수 없어서 그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아니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 때문에 방종해지고 교만해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에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축복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을 뵈옵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능력보다도 훨씬 중요합니다.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못 될 수는 있어도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복음의 세계를 맛보았습니다. 심령의 깨트려짐이 있었고 은혜의 부어주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무지 속에서 깨어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축복이 있었고 그 교제 속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견고해졌습니다. 교회의 출석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상당히 헌신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고 굉장히 놀랍게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들은 틀이 잡히고 교회생활도 성실해지고 정말 이제는 단정한 모습으로 교회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뵈옵는 경험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그것은 내가 처음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는 때였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들이고 지금은 내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틀이 잡히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직분을 맡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물질로 주님을 섬기고 있고 이제 내가 옛날과 같이 다른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생각합니다. 옛날에 세상 유혹에 빠져서 술 먹고 나쁜 짓하고 사기 치고 이렇게 살아가던 사람이 ‘내가 이만큼 변했구나.’ 생각하고 자기를 한없이 대견하게 생각을 하는 동안에 자기 속에서 그렇게 변화될 때에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경험이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위안을 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떻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예전에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죄악 된 세상에서 방황하던 여러분이 이나마 목회자 속 썩이지 않고 주일마다 잘 출석해서 단정하게 예배드리고 시키는 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옛날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세상에서 놀던 짐승 같은 사람들을 교회 우리 속에서 길들여진 짐승들로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뵈면서 사는 친아들, 친자녀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바로 잘못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 그렇게 하나님의 이 교회, 전통에 빛나는 신앙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 마음속에 있었던 청결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정복되어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져서 날마다 주님을 뵈옵던 참된 축복은 잃어버리고 단지 교회 안에 머물고 교회 안에서 틀이 잡혀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만족하는 그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십자가의 은혜로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해서 하나님을 뵈옵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진보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길들여진 짐승과 같이 그렇게 교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를 때는 노골적으로 주님을 대항하다가 이제는 은밀하게 주님을 대항한다는 차이 뿐이고 전에는 온 삶으로 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요새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산다는 차이 뿐이지 근본적으로 그는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하나님을 뵈옵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이 있습니까? 열려진 하늘의 창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에 비치는 은총에 햇살을 봅니다. 자기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자신 속의 은밀한 죄들을 볼 뿐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그 병든 영혼의 부분들을 천국의 햇살로 비침을 받으며 주님의 그 눈빛 앞에서 고침을 받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될까요? 그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 변화 받았을 때 회심할 때 자기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맥박이 있고 하나님의 가슴에 기대어 듣는 주님의 마음에, 심정에 고동소리가 있습니다. 그 인격에 영향을 받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눈빛 앞에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인가를 날마다 생각합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며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로지 자기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그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자기를 고치려고 드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순함이 그들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주 놀랍고 빠른 영적 생활의 진보가 나타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딱딱하기 이를 때 없는 교회 생활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나는 요즘에 부쩍 그런 것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참 많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그 성도들이 늘 하나님을 뵈옵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주님을 대면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깨달을 줄 알고 마음의 영향을 받을 줄 아는 성도는 어떤 의미에서 많이 훈련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 오늘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분의 눈빛 앞에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시인들이 흐느끼면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고 폭탄과 같이 퍼붓는 시련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여 주의 얼굴빛을 비추셔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달라고 하는 그것이 시인들의 간절하고 전 존재 적인 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을 뵈옵는 영적 생활이 단절되면 불행합니다. 기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런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믿고 당신을 따르는 그래서 팔복산까지 올라온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갖고 있으면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은 사람들도 마음이 불결하고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최초에 가졌던 하나님을 뵈옵는 그런 참된 행복, 그런 것들이 사라져 가는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마음에 정결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정결함을 잃어버려서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고장 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해서 아파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일평생 정결한 마음으로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갈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염려, 근심, 인생의 문제, 고독, 상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단어들이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더하고 있지만 그래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해결책들을 찾아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인, 부분적인 치유책일 뿐입니다. 대안은 오직 하나입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도, 고난 속에 있는 사람도, 죄의식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도, 견딜 수 없는 핍박 속에서 박해를 받으며 순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을 인해서 쓰러져 고통 하는 죄인들에게도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는 한없이 다양하지만 그 문제의 모든 뿌리는 여러분의 영혼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그 영혼에 참다운 치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여러분의 마음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면함이 없는 건조한 신앙생활이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고 하는 인식을 한번 가져보십시오. 내가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는 너무나 다양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요약하면 내가 쓸데없는 욕망 속에서 괴로워하고 죄악 된 세상에서 아파하고 범죄 하는 고통스러운 악순환의 근본적인 뿌리는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뵈면서 살았던 친교의 때에 여러분의 삶과 오늘날에 삶이 얼마나 다른지를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요즘에 제가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서 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물이 없습니다. 물론 이제 예전에는 물이 오면 다 흘려보냈지만 지금은 댐을 많이 쌓아서 그 물을 저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근본적으로 물의 양이 줄어들었습니다. 아주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 가보면 두길 세 길이 되게 물이 흘렀던 개울들인데 지금은 물이 다 말랐습니다. 그냥 걸어가서 다리가 필요 없을 정도의 하천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천의 생태계가 물이 흐를 때 생태계와 물이 없을 때 생태계가 완연하게 다릅니다. 하천에 물이 사라지고 나면 어떤 식물도 못살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물이 많이 흘러갈 때 살지 않던 식물들이 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뻗어나가는 가시나무 같은 것, 잎사귀가 거의 없는 나무들, 이파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꽃이 피는지 안 피는지 모르는 그런 것들이 쭉 자랍니다. 그리고 땅을 더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물이 잘 흘러가면 그런 나무들은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잎이 널찍널찍하게 나고 꽃이 분명하게 피고 향기도 나고 씨앗도 맺는 그런 탐스러운 나무들이 자라면서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영혼의 진정한 하나님과의 친교, 그 속에서 우리의 삶과 인격의 생태계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정말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지성소 속에서 주님을 대면하는 하나님을 보는 이 여섯 번째의 축복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의 인격은 황폐해가고 있는 중이며, 여러분의 삶은 주일에는 여기 나와서 그럴 듯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러나 월요일이 되어서 교인들이 보지 않는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갈 때는 마치 가시나무 떨기로 우거진 그런 물이 흐르지 않는 하천과 같은 그런 삶을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정직하게 자기의 영혼을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허물을 벗고 자기의 모든 소유도 버리고 심지어는 자기가 가장 애착하고 사랑하는 어떤 것들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대가로 지불하고서라도 내가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정결해져서 주님을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리하리라.” 그런 정직한 성찰과 결단이 우리로 하여금 여섯 번째의 축복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이런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뵈옵는 것에서 오는 참된 만족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탐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다한 소유,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욕심, 그리고 끝없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갈증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도 서슴지 않고 짓밟아 버리는 그런 자기 방종의 삶,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이런 삶은 또한 순환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점 더 더럽게 하여 주님을 뵈옵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 이 순간에 이런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껍질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그 허울에 둘러싸인 위선적인 삶, 이런 것들을 다 걷어버리고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고 우리는 정말 기도 속에서 주님을 뵈옵는 것, 정말 우리는 말씀 속에서 주님을 대면하는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주님과의 대면이 사라진 가운데서 영적인 자연의 공급 없이 억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한번 자성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가 주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된 것이며 내가 하나님을 뵈옵는 이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욕망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 속에 있는 무엇으로도 덮어둘 수 없는 끊임없는 간구를 한번 거기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에 둘러싸인 그 껍질을 벗겨버리십시오.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여러분의 껍질을 벗겨보십시오. 제물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잠시 위안을 얻는 껍질을 벗겨보십시오. 적절한 교회생활로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의식하는 삶에 그 욕망의 껍질을 한번 벗겨보십시오. 그러면 저 깊은 밑바닥에 여러분의 영혼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송축하리 거룩하신 하나님 주 송축하리
여러분의 영혼은 주님을 정말 뵈옵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으니 내 영혼의 만족을 달라고 여러분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주님을 갈망하고 여러분의 깊은 속사람은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누구도 이 영혼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이 거듭난 열망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로 어떻게 해야 마음의 정결함을 유지하거나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유지하는 길에 대해서, 마음에 이 정결함은 최초로는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정결함을 우리의 마음속에 갖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정결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심으로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어떤 의미에서 주님 이외 것들은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그 주님을 향한 외곬의 사랑, 그것으로 가득 찬 마음이 바로 이런 정결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훌륭한 비결입니다. 순결해진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모두 비우고 진공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순결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 사랑이 워낙 거기에 가득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그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청결함입니다.
그러므로 한 신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사는 영혼의 참된 축복을 잃어버리게 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이 불결해지는 변화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불결은 다름이 아닌 오염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순결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형식은 남아 있지만 하나님을 뵈옵는 영혼의 축복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해서 늘 하나님을 뵈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이런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마음 안에 계시고 자기는 주님의 마음 안에 있어서 주님이 자신의 전부이시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런 삶, 이것이 바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면서 마음에 정결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의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고 그래도 비교적 느껴지던 때는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정결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정결하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깨끗하다.’ 그것은 벌써 불결해진 증거입니다. 망발입니다.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가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아! 그때 내가 정말 정결했구나.’ 그런데 사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은 ‘내가 정결하다.’라고 하는 확신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만 사랑한다.’라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을 통해서 후일 자기가 정결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 정결하다고 느끼는 사람,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고백하는 사람, ‘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진짜 정결이 아닙니다. 정결한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자기가 정결하다고 확신을 하지 않습니다.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리 정결해도 하나님을 뵙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분의 눈빛 앞에 비쳐보면 정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신을 느끼는 것은, ‘내게는 하나님이 전부다. 나는 주님만을 사랑한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만함과 상관없이 그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이제 주님이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 즐거움이 내게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것은 있습니다. 그때가 정결하던 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자신 속에 가득 채우면서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을 늘 뵈옵게 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어느덧 불결해진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이고 궁극적인 요인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잃어버리는데 있다는 것도 느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주신 청결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사랑이지만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그것은 참회입니다.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마음은 청결을 회복하게 되고 죄 가운데 낙인이 찍힌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다시 주님을 뵈옵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에 보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놀라워” 그 찬송을 작사한 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노예를 데려다 파는 노예 상인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그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또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 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산에 갔는데 막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고 막 생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막 도망가다가 진짜 바위 속에 숨었습니다. 거기서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진짜 환난 풍파가 일어나고 번개가 내리치고 먼 산에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보니까 무서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를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에 반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래서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쓰려고 하니까 종이가 없었습니다. 막 뒤져보니까 화투장이 나오데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썼습니다.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구 손 못 대고 환난 풍파....” 얼마 전 까지 화투치고 그렇게 돌아다니던 그 사람이 거기서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니까 하나님 사랑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주님을 뵈올 수 없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진실 되게 참회하면 다시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회개’ 이 자체가 사랑을 회복시켜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깊이 회개하고 나면 두 가지의 감정이 항상 따라오는데 죄에 대한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를 지었는데 회개하고 나면 그 죄에 대해서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 회복됩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죄 많은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향유를 모았습니다. 삼 백 데나리온 정도 되는 향유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1,500만원에서 3,000만원 정도였고 유동성이 있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갖다가 팔면 언제든지 현찰로 바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 앞에 와서 깨트려서 예수님께 부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껏 인생을 살면서 이것을 모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 팔자를 한번 고쳐보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창녀요 기생으로 낙인이 찍혀서 친구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맞아주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사랑하고 나니까 예전에 사랑하던 것들이 이제는 자신에게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부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회가 가져다주는 특성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것을 얼마나 유지하면서 살아갑니까? 신년 사경회 하고 나면 그 약발이 몇 달이나 갑니까? 여름 수련회를 하고 나면 그 효과가 가을 사경회 하기도 전에 또 고갈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지 간에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이 연약한 사람들이 한번 받은 하나님의 사랑, 한번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정결해진 마음의 상태를 흔들림이 없이 유지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수시로 참회하면서 다시 일그러진 자신의 마음의 한 부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고 밀고 들어오는 육체의 욕망과 죄 된 그 충동들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밀어내고 다시 채우고 다시 채우고 하면서 마음에 정결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뵈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신자에게 유일한 삶의 대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 주님을 만나셨을 때 얼마나 기쁘셨습니까? 죄 가운데 있으면서 거룩한 주님을 뵈었을 때 얼마나 행복하셨습니까?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의 축복을 여러분은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었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번영을 주고도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혼의 행복을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속에서 살고 싶어 하십니다. 어린아이 적에 회심하고 주의 사랑을 안 사람이 나이가 많이 들어 머리카락이 빠지고 흰머리로 변해도 여전히 그때 그런 주님과의 주님을 대면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영혼의 행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수시로 위협을 받지만 날마다 참된 회개 가운데서 진정한 참회의 눈물로 자신의 더렵혀진 마음을 씻으며 그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불로 가시와 엉겅퀴처럼 하나님과의 대면함이 없는 여러분의 영혼의 하천에서 자라나는 잡스러운 생태계를 모두 소각시켜버리고 다시 그 은혜의 물이 대인 동산처럼 살기를 하나님은 너무나 원하고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렇게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주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반드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며 여러분이 정말 복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예수님께서 일곱 번째로 소개하신 복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화평케 하는 자의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과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얼마나 화평이 없는 세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이 세상은 화평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이미 아담과 하와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는 두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는 두 사람의 연합이 깨트려지고 그들은 갈라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 후에 자식들을 낳았을 때는 더더욱 그 죄가 어떻게 사람들 속에 화평을 깨트리고 오히려 미움과 그리고 다툼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드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형제였고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한 가족이었지만 시기심과 미움으로 인하여서 가인은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 이후로 가인은 하나님의 낯을 떠나 살게 되었고 발달한 문명 세계를 이루어가게 되었지만 그들의 이루어 가는 문명 세계의 발전과는 상관없이 화평이 별로 없는 갈등과 고통, 투쟁과 분쟁이 있는 세상을 엮어갔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화평 없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평화는 갈망하지만 역설적으로 낯선 것이 되었고, 이런 화평은 많은 사람들이 다 좋은 것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위해서 쉽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그런 시대를 이제껏 인류가 살아왔습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이 세상은 사람들이 평화가 좋은 것을 알지만 실제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의지가 없거나 혹은 그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의지도 있고 원함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어떻게 된 것인지 평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산산이 부서지고 찢어지고 망가진 관계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 낯모르던 사람과 한 가정을 이룰 때는 며칠 살다가 집어치우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어 하고 그런 소망에 불타고 있고 또 그 일을 위해서 적절하게 자기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헤어지고 이혼합니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가 되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사실상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평화를 원하고 그런 화평 속에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를 알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화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함께 사랑하고 함께 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인데 이렇게 화평하며 살아가야 할 가족들의 관계가 깨트려질 경우에는 더더욱 우리에게 큰 고통이 됩니다. 부모를 등진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자식을 안 보고 사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동기간들끼리 우애하며 살지 못해서 원수처럼 여기면서 남남처럼 살아가는 동기간들이 있는 그런 가족관계는 우리에게 참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 이제는 무엇인가 뜨거운 사랑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그런 관계를 가족들의 관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 참 어려운 그런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건드리기만 폭발할 것 같은 그런 상태에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은 아주 쉽게 미워하고 쉽게 원수를 맺습니다. 그리고 아주 사람들은 쉽게 서로를 망가트리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죄와 함께 들어온 이기심과 자기만을 위하는 욕망,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면 전쟁으로 번져갑니다. 그리고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전쟁에 대한 소문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런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큰 이유는 빗나간 자기 사랑과 자기중심적인 편견, 그리고 자기 집착 그런 것들입니다.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심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화평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용이 드는지 모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미국이 아프간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전쟁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 아마 매일매일 퍼붓는 폭탄, 그 돈으로 양식을 사서 그 땅에 퍼붓는다고 할 것 같으면 굶주림의 문제가 벌써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이 전쟁은 안 일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여전히 전쟁을 위협을 느끼고 있어서 양쪽 다 거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군대를 유지하는 일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전쟁을 위해서 막대한 돈을 들이는 동안에 이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사 상태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군비에 들일 그 돈을 가지고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면 잘 살겠건만 그러나 화평한 삶을 살지 못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잡지에서 읽으니까 6.25가 일어나서 미군들이 주고 간 미사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어떤 것들은 하도 오래 되어서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쏘면 나갈지 안 나갈지 확신이 안서는 것도 많다고 합니다. 남에게 얻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지나고 나면 우리가 돈 주고 사온 무기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써보지도 못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낸 세금을 가지고 무기를 사서 모아다가 한 번도 쓰지도 못하고, 물론 써야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써보지도 못하고 그것을 다 폐기 처분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이북은 그런 상황이 더 심각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평화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 엄청난 경비로 또 다른 희생으로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좀처럼 말로는 평화와 화평을 말하지만 그 평화와 화평 속에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갈등을 일으키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들 각자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그들은 모두 분쟁과 이런 다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싶어 하고 또 가정도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의 소원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여전히 미움과 다툼이 사랑과 화해보다 훨씬 일반화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욕망과 욕망은 충돌을 일으켜서 다툼과 미움을 낳고 급기야는 살인까지도 불러옵니다.
톨스토이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비유를 하나 들었습니다. 네모난 상자가 있는데 상자 안에 공을 집어넣고 흔들면 흔들릴 수 있을 정도로 낙낙하게 담았습니다. 뚜껑을 닫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하나가 갑자기 확 커졌습니다. 옆에 있는 공은 밀리니까 밀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있는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더 커지고 그러다가 속에 있는 공들이 전부다 터질 듯이 커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뚜껑이 들먹들먹 합니다. 이제는 그 속에 있는 공중에 어느 한 공도 자유로운 공이 없었습니다. 화평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 속에 있는 궁극적인 원인이 탐욕, 그리고 빛나간 자기 사랑, 그런 것들에 있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간절히 평화를 말하고 화평을 이루고 싶어 하는데 평화와 화평을 본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원수 맺고 작은 일에도 사람들을 미워하고 한번 품은 미움은 웬만해서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사회의 모습인 동시에 또한 우리들이 살아온 삶의 족족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비롯된다는 진리입니다. 여기 쓰여진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은 화평이라는 ‘에이레네’라는 단어와 ‘포이에오, 만들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평’ 즉 희랍어로 ‘에이레네’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샬롬’입니다. 히브리말의 샬롬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게 ‘화목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화목제도 역시 샬롬입니다. 그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기원하는 제사인데 하나님 앞에 화해를 기념하는 제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화해를 기념하는 제사를 드린 후에 그것을 가지고 거기서 드린 제사 음식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먹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신분이나 지위 귀천 이런 것 없고 심지어는 거기에 유하는 외국인과 나그네들에게도 모두 나누어주어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확증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끼리의 참된 연합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쓰여진 ‘화평’이라는 말, ‘에이레네’라는 말은 평화는 평화인데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조용하고 단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추구한 그런 종류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이룩되는 평화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평화를 만든다. 살롬을 만드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에게 그런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는 그런 진정한 평화를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원동력으로 해서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평화를 만들어 가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를 통해서 다시 그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 속에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므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인데, 이 평화도 역시 자기가 받은 평화와 동질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화평하게 살아가고 그들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는 항상 궁극적인 평화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그 평화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복이 있는 사람들이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눈곱만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소위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제도 제가 어느 교역자와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의 일군이 사명을 감당해나간다 라고 하는 것, 충성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좋은 일만 열심을 내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래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만 열심을 내는 것은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분히 자기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고 싶어 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거기에 맞게끔 내가 변화되어서 그 일을 지성으로 하는 그것이 충성이다. 그런데 그 변화가 워낙 근본적인 나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든지 하여튼 하나님이 좋은 것은 내가 다 좋고,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다 좋은 것, 그것이면 진짜 좋습니다. 그것은 진짜 최상의 충성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도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충성합니다.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진짜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뭘 하고 싶다는 것은 오히려 버리고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다고 하면 내 살을 깎고 내 뼈를 다듬어서라도 하나님의 일에 합당하게 나를 맞추어서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해나가는 것, 그것이 충성이며 그것이 헌신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해나가는 그것이 충성이오, 헌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우리 진정으로 충성하기 위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하다못해 버선을 신고 외줄을 타는 광대도 신명이 나면 돈을 안 줘도 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매순간 밧줄 타기 하면서 돈 생각만 하면서 그것을 타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무당이 칼자루에 올라가서 춤을 출 때도 열 받으면 복채를 안 나도 칼을 탑니다. 그러니까 그 기원 자체가 달라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지 한번 철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제껏 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원수 맺은 사람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미워한 것, 그것이 원수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 많을 것입니다. 원수는 무슨 소설 속에 나온 것만 원수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웬수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화해해본 적이 있습니까?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찾아와서 용서해달라고 그랬을 때 왕이 신하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그래, 내가 한번 봐주지.’ 그것 말고, 자기 발로 찾아가서 서로 묶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누가 잘못했든지 간에 “우리가 가족으로서, 혹은 우리가 한 형제로서, 혹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어머니와 딸로서, 혹은 우리가 한 교회의 한 교인으로서 우리가 이렇게 서로 묶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희생이라도 치르겠으니 우리가 다시 화목하며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가치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면서 화해를 청해본 적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먼저 빌어야 용서를 해주든지 화목을 하든지 할 텐데 그런데 그것은 세상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적게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입은 사람들이 화해의 선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고 다시 화목케 하셨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에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동안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자기의 만족이 인생을 사는 목표가 되어서 살아가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쓸모없는 죄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마음이 녹아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쓸모 있을 정도가 아니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나 쓸모없는 인간이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셨던 것이 바로 죄인인 자신과의 화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이 성경에서 화목 제물로 바쳐진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불화하고 원수 된 것은 우리인데 그 불화를 제거하고 화목을 세우시는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시고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향해 잘못한 적이 없으시고 죄인을 향해서 불의 한 적이 없으신 그분이 자기 발로 하나님 앞에 그 언약을 깨트리고 타락한 죄인들을 그들과 화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어느 날 그 복음을 듣고 그것을 깊이 깨닫고 나서 비로소 무엇을 체험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사랑의 부채 의식은 모든 거룩한 삶을 사는 아주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 사랑이 나를 다시 살게 했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에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되어서 사랑에 부채의식이 가득한 가운데 살아가다가 화해가 깨트려진 사람을 만납니다. 자기와의 화목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서 느낀 부채의식이 작용을 해서 이 사람과의 깨트려진 관계를 치료하기 위해서 ‘내가 더 많이 희생해야 되는데.’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내가 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과 불화 했던 자기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희생을 통해서 다시 화목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그 사랑의 부채의식이 그로 하여금 자존심을 버리게 하고 이기심을 포기하게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만 사랑하고 화목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불의한 세상에 많은 불신자들도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불화 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하나님과의 불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주셔서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불신앙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최초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와 불화 한 그 관계를 청산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이 바로 자기와 같이 불의 한 죄인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놓으신 하나님의 화해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집착, 이기심과 편견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마련해놓으신 하나님의 그 화해의 요청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이야 주님을 믿고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복된 백성들이 되었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주님이 얼마나 많이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과 불화 한 가운데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수없이 우리를 그 화목으로 부르시고 당신과의 화해 속으로 불렀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좀더 주님을 일찍 알았더라면 깨트려져버린 부모와의 관계가 안 깨트려졌을지도 모르고 부서진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가 부서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완고함으로 오래도록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사는 것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사랑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주님의 요청을 많이 거절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한번 내미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손을 붙잡은 사람이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날 동안 주님의 그 화해의 요청을 거절하고 더더욱 불화의 어두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런 어리석음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눈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져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이 하나님과의 화해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값없이 아무 공로 없이 주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그 피 길로 걸어오기만 하면 아버지의 보좌에 이를 수 있는 산길을 열어놓으셨는데도 사람들은 그 화해의 길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남아 있는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찬양)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나주를 믿노라 그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과의 화해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기 때문에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거나 매우 적은 열매밖에는 거두지 못하고 그 열매도 본질적인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보증이 되지 못하기가 십상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까지도 단 한 번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이 화해의 초청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그리스도를 예수를 화목 제물로 주셔서 여러분을 향해 지시하신 그 화해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두려워서 숨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그리워하며 나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어두움 속에서가 아니라 빛 가운데서 사는 삶이되기를 하나님은 너무나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사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부와 영화를 누리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찬송 속에서 주님과 함께 탁월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을 노래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백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고 자신이 주님 안에 있는 이 행복에 대해서 노래한 수많은 고백들을 여러분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의 관계도 처음 시작은 화목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마음에 어두움과 그림자가 하나도 없어서 완전한 화해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그 화목의 교제를 토대로 해서 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공로를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참된 하나님과의 화해를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공로나 아무런 대가없이 주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이루어놓으신 그 임마누엘의 샘으로 와서 주님과 불화 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쌓인 마음에 악과 죄를 모두 씻어버리고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이 되어서 이전에 두려워하던 주님이 사랑스럽고 이전에 떨리던 주님의 그 눈빛 앞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 되는 그런 화해의 관계, 그런 화목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해 가지고 계신 가장 간절하고 큰 기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아직까지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직까지도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시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난 정말 죄인이고 나는 하나님을 등진 탕자와 같은 자식이었으며 이렇게 주님의 집을 멀리 떠난 타락한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것을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부디 나를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하루라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여러분이 주님의 그 화목을 단번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이 화목,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은 불신자들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영원히 단번에 죄의 용서함을 받고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 화해를 실제적인 영적 삶 속에서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은 또한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목을 주신 것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우리들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은 있지만 오늘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원리적으로만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죄 사함을 받은 용서의 확신과 그 은혜의 기쁨들이 우리 안에 넘쳐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과의 그 평화를 지금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불신앙이라고 한다면 이미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넘쳐나는 화해 속에서 살지 못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의 죄와 그리고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하나님과의 화해의 기쁨을 누리면서 그것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소수일까요?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분명히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자신 속에는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분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있는 죄와 불순종이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느끼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간 후에 아버지는 매일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아들을 기다렸고 아들이 갖고 나간 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아들이 건강히 돌아오기를 눈물로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다른 나라 땅에서 다른 백성들과 함께 허랑 방탕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그 사랑이 아들의 인생을 개선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돼지 쥐엄 열매를 주워 먹는 처지가 되었을 때도 아버지가 그렇게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 아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지는 못했습니다. 아들이 인생이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바뀐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이후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루어졌습니다. 영원히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리신 아들의 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셨고 여러분은 용서를 받았으며 그 화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이 화해를 폐기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서 모든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다시 말하면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저들을 볼 수가 없다.” 그렇게 일컬음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여러분을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시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리들이 누리며 살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청결한 자가 되어서 늘 주님을 뵙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화되면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고갈되어 버리고 나서 점차 우리 마음속에 파고 들어오는 죄와 불순종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심지어는 점령당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경험들을 말려버리고 은혜의 풍부한 경험들은 우리 속의 죄를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를 통해서 약화된 하나님과의 화목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무감각은 더더욱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자녀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과 우리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때 많은 신자들은 세상이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이 너무나 썩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평화에 도구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에 의해서도 빛을 잃어버리지 않는 밤하늘에 찬란한 별빛은 어두움 밤하늘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훌륭한 기회입니다. 어두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인데 이것은 내면의 참다운 변화가 없이는 그런 정체성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파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을 인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를 우리들이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마치 무심코 버려둔 거울에 시간이 지나면서 때가 끼고 먼지가 앉아서 거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주님께 분명히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우리들 안에 여전히 죄와 불순종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화해를 잃어버린 생활이 계속되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기는커녕 오히려 다투고 분쟁하는 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참다운 평화를 신자들이 한번 얻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그 화목을 토대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은혜의 빛 속에서 살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화목을 받아들이는 것과 죄와 불순종을 인하여서 이미 이루어진 화목의 관계를 깨트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다르지 않고 모두 동일한 것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불신앙을 뉘우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신자들이 하나님과의 화목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신자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일 뿐임을 기억하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실제로 자신의 영혼에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그 길은 모두 동일합니다. 모두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셨지만 그 화목한 관계를 금가게 만든 것이 자기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용서를 받아들일 때 신자들도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그 화목에 경험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이 무엇이고 그분과 평화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그 화목을 깨트리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서 지옥을 맛보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삶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가 깨트려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옥을 맛보는 것과 방불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그 불붙는 사랑 속에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주님의 그 사랑을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살 때에 자신에게 도저히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주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한순간의 결단이나 용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화목, 그 화목한 관계를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과거에 대한 후회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이 후회를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대나무의 마디와 같아서 우리의 과거는 그 옛날에 기초에 있고 우리의 현재는 과거에 기초해있고 또 우리의 미래는 현재에 기초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불신앙을 청산하고 신앙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깨어지지 않았을 수많은 관계들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와 화해하지 못하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마 이렇게 불화하지 않고 화목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더 일찍 이 세상에 화목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이미 깨어져버린 그 많은 관계들, 사랑하면서 살아도 모자라는 그 깨어진 수많은 관계들을 깨트리지도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후회하지만 세월은 많이 흘렀고 그 중에 어떤 관계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 속에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화목케 하시는 예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손에는 살인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주의 자녀로 삼으셔서 사랑이 없고 화목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독이 오른 짐승처럼 살아가는 그들 가운데 우리를 두셔서 우리 안에 예수의 사랑이 넘치게 하셔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리고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게 하시려고 우리를 세워놓으셨는데 우리의 죄와 악함, 그리고 우리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분쟁의 불씨가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미움과 다툼으로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희생하기 싫어서 주님을 희생시켰고 우리가 희생하기 싫어서 용서해야 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당신을 등지고 살아가는 죄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열렬한 화목의 소원,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조차도 위해서 기도해주시던 예수님의 그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죄인과도 원수 되고 싶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화목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자기를 버리고 떠난 인간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도 결국은 우리와 더불어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희생을 한 적이 있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자기를 죽인 적이 있나요? 원수 맺은 사람과의 화해를 위해서 자존심을 버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랑 때문에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이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화목 제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시는 희생과 사랑에 빚진 부채의식을 느끼지 않고는 이런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움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사랑이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지만 미워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미움도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죄를 정당화시키는 그런 악순환을 낳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을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피로 구원하셔서 그래서 여러분을 정말 주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그 사랑과 화목을 힘입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그곳에 가서 예수처럼 죽고 예수처럼 못 박혀서 원수 맺은 것을 풀고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화해가 없는 곳에 화해를 심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이 이런 용서와 화해의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가슴에 간직하고 예수의 사랑에 빚져서 이전에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전에 원수 맺었던 사람들의 사슬을 풀어주고 그리고 자신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조차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하는 마음을 갖고 여러분이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깨트려진 관계 속에 화목을 창조하는 일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주저리, 주저리 매달려 있는 미움의 열매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미움들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리고 여러분이 깨트려진 사람들과의 그 불화 한 관계를 고치기 위해서 얼마나 태만한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의 영혼에 더 큰 죄를 날고 무거운 짐이 되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못 박히는 것만큼 힘들겠습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것만큼 힘들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없었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고 자연적으로 주님의 마음을 끌만한 좋은 행실이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많으신 그분이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맺고 살아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아무 죄 없는 그분이 오히려 우리를 향해서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미시고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 속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오늘날 주님의 사랑, 구원의 은혜를 알고 보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초청, 죄 있는 자들을 불러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하나님께 그 화목한 관계를 깨트리고 죄 가운데로 달려간 인간들을 불러 당신과의 그 화해 속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죄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갈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평화를 창조해 가시는 방법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화목케 하시는 사랑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 그들을 이 세상에 살게 하셔서 그들을 미움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보내셔서 거기서 한없는 십자가의 사랑에 부채의식 속에서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의 뒤를 본받아 따라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하나님의 딸들의 그 희생을 통해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어 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누군가가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자의 역할을 희생 속에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등진 것을 운명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사랑할 사람들을 미워하고 찌르며 피 묻은 칼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숙명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고통 하는 이 세상을 위한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우리를 향해 이 쓸모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베푸신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담아서 어떤 고통 하는 곳이든지 주님이 세워주신 그곳에서 주님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고 희생해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심고 사람들과의 화해를 심는 그런 역할을 감당해나가는 그 이외에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없어서 화목이 깨트려지고 다툽니다. 부요 하면 부요해서 사람들은 미워하고 서로 시기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본성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전폭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모두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면서 예수님은 한 번도 자기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당하셨네
이 세상에 생명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
당신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못 박혀 죽어 가시며 자기의 몸이 그렇게 찢겨지고 분해됨으로서 사람들이 자기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이룩하게 될 평화를 바라보셨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고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한 통곡 속에서 십자가를 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랑을 입어서 주님의 화목의 제물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가장 보람된 일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서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우리 자신이 화목의 도구요, 평화의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희생해야 될 때 우리는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 화목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찢으신 그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을 기억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한 어떤 희생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지불하신 그 희생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이런 철저한 순교적인 희생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이미 창조 전부터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복음에 위대한 물결이 넘쳐나고 수많은 죄인들이 그 은혜의 강물에 떠밀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된 이 일들은 계획은 있었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뚜껑을 여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있고서야 그 축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논쟁은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과 용서는 사람의 마음을 무릎 꿇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이 복음을 전하고 갈등과 불화 속에서 고통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자신이 죽기를 거부하므로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습니까? 그래서 화목한 가족들과의 관계가 깨트려졌고 우리의 손에 붙여주신 많은 영혼들을 실망시키고 그들을 다시 잃어버려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주님의 희생을 새겨서 우리들이 더 많이 희생했더라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더 많이 짊어졌더라면, 우리의 자존심과 이익을 포기하고 자기의 생명까지도 주신 예수님의 그 모범을 기억하며 “나는 내 것이 아니라.”고 고백을 했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영혼들을 우리는 순간의 이기심과 자기를 사랑하는 욕심으로 그런 많은 기회들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우리 가족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심지어는 가정이 깨트려지고 사랑하는 교회에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함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이런 화해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함성 소리를 우리에게 듣게 하셨건만 우리 속에 주님의 사랑이 마르고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제될 줄 모르는 세속적인 자존심들은 독버섯처럼 자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모두 얽어매서 우리를 자기에 대한 빗나간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명은 간 곳이 없고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보내어주셨을 때 그 빛은 잃어버린 채 우리들이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하나 제대로 한 것 없이 주님의 사랑만을 되뇌면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 화목으로 돌이키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어디에 있겠으며 그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당신이 가르쳐 주신대로 사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바로 당신 한 몸을 십자가에서 찢고 깨트리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화목케 하시는 희생 때문에 벌레와 같이 쓸모없는 우리들이 오늘 주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이루신 화목의 공로 때문에 우리들이 거저 주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 앞에 사랑하고 그분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고 막다른 인생의 범죄의 길에서도 그분 안에서 죄 사함의 소망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일평생 사나 죽으나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이 그분의 사랑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감당할 수 없는 폭포수와 같은 사랑이 모두 화목케 하시는 예수의 그 희생을 통해서 흘러 들어왔습니다. 이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유일한 대안은 바로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끊임없는 자기를 사랑하는 욕망들을 죽이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우리와의 화해가 깨트려진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질 그들의 화목한 삶이 우리의 희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많이 받았으니 내가 조금 베풀면서 사는 것이 무슨 대수이랴 하는 마음으로 화목케 하는 자의 길을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던 복음 전도자들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항상 가시밭길을 지났고 물을 건넜고 돌다리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슴에 품고 원수 맺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걸었던 수많은 화목케 하는 자들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주님이 소중했고 미워하고 불화한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자신의 희생은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그 앞에서는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용서하는 것이지, 그 사랑이 훌륭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용서해야 할 사람들, 화해해야 할 사람들을 보며 사람의 악함을 보는 대신에 그들 속에 있는 우리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보았습니다.
(찬양)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는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살다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이 너무나 귀해서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자신의 행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화해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살다가 갔습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사자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처럼 이 쓸모없는 죄인 중에 괴수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아무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던 크고 놀라운 사랑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화목의 삶을 살기 위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용서할 사람들을 찾고 그런 관계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조금도 큰 것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사람과 화해하기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지지만 주님이 저를 위해 지불하신 그 희생에 비하면 저의 이 수고와 희생은 희생이랄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이었고 더 많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화를 심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원한이 되었습니다. 형벌 받을 죄인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다시 화목케 할 수 있다면 그 관계를 깨트린 그 죄를 짊어지고 속죄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사람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화시키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것을 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하든지 난 관계없다.” 그런 말을 많이 하는데 물론 그런 신념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여러 곳에서 우리를 향한 이 세상에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여러 차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그런 빛나간 자기중심적인 확신을 여기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성품을 더 많이 닮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내 보여주면 볼수록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어두운 밤바다에 하나의 등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자신을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지만 하나님과 대면하고 나온 여러분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크리스천인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조차도 여러분이 화목케 하는 삶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입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하나님은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구나. 화목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희생을 당하면서 화목의 도구가 되려고 하는구나. 아, 저 사람이 입으로 자신이 신앙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 이외에는 저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없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을 받아내며 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크고 놀라운 말씀의 은혜,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의 놀라운 경험들, 무엇 때문입니까? 신앙의 높은 지식과 성경을 아는 탁월한 지식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셔서 정리된 사고 속에서 주님을 믿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는 무슨 고백을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의로운 길을 걸을 수 없는 그 길에 의로운 길을 걷고, 순결할 수 없는 때에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며 그대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분명하오. 왜냐하면 그 분께 속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받아내며 사는 것이 그 분의 이름을 높이고 예수의 이름을 기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이런 화목을 깨트리면서 살아왔던 죄를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입었으니 여러분이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섬길 수 없는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고 그의 아픔까지도 사랑해주면서 그렇게 살아가서 주님의 명예를 드높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예수님께서 마지막 여덟 번째 제시하신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복입니다. 공교롭게도 여덟 번째 복, 그것은 첫 번째 나온 복의 약속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나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였고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에게 주시는 복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였습니다. 그래서 여덟 번째 복은 첫 번째 복의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세 가지 진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의 삶의 방향이고, 두 번째는 신자의 고난이고, 그리고 세 번째는 신자의 축복입니다.
첫째로 신자의 삶의 방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의’가 바로 일곱 번째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일곱 번째 이어서 나타난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이 세상은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화해와 평화보다는 반목과 질투, 그리고 죄와 고통, 억압과 분노 이런 것들이 이 세상에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단순한 평화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는 참된 평화를 이 세상에 이룩하려고 애쓰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결코 간단한 삶이 아닙니다. 완고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고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편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켜서 화평한 가운데 살아가도록 자기희생과 절제를 가르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이렇게 평화를 만드는 이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흐름을 따라 살면 적어도 세상은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거슬려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받는 고통과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를 말씀하신 후에 의를 위하여 사는 자를 다시 한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의 삶의 목표가 의입니까? 여기서 말씀드리는 ‘의’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삶이라는 사실을 이미 네 번째 축복에서 여러분에게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런 다스리시는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목말라하는지 오늘 여러분에게 성경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면 몇 점쯤 나올 것 같습니까? 대학에 계실 때 어느 장소,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노래를 하실 기회가 있어 선구자란 노래를 하셔서 100점의 점수를 받았다는 이야기.
전 그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예배 시간이 아니면 내가 한번 불러볼 용의가 있는데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랑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쭉 나옵니다. 2절은 더 멋있습니다. 만주에서 살던 독립투사들을 기린 노래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제 일본군이 만주까지 쳐들어가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그 만주 쪽은 점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그곳은 중국 땅이었습니다. 거기는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진짜 말달려도 누가 뭐라고 안 그러고 활을 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해란 강이 흘러도 누가 뭐라고 투덜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만주 벌판을 누리면서 독립투사들은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조국의 산하를 보면서 내 사랑하는 동포, 내 백성들이 주권을 잃어버리고 왕은 전부다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신하들은 전부다 친일파로 둔갑하고 국권을 잃어버린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그 백성의 현실이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독립운동의 꿈을 불태웠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면 진짜 그때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반반 있어도 나라가 이 지경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스승이 있었습니다.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모든 백성들이 배우고자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일본사람들과도 잘 지내면서 사업을 잘합니다. 혼자 얼마든지 떵떵거리고 먹고 좋은 세상 살 수 있는데 생명을 걸고 돈을 벌어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보냅니다. 한번만 걸리면 총살인데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걸고 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아도 내 동포, 내 백성들이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자기 이름도 잃어버리고 빼앗긴 들판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잘사는 살림이 다 망가져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주권이 있는 나라에서 다시 왕을 나라의 아버지로 모시고 그렇게 동포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때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조선의 백성이었던 적이 있는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무슨 어떤 특별한 애국자가 선택할 삶이 아니라 한때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았던 조선의 백성이면 모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자기 안에 정말 주님을 만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그 속에 우리주님의 통치가 있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한번 맛보고 경험한 사람이면 주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면 될수록 세상 속에 살면서 내 안에 있는 세상과 내 밖에 있는 세상 사이에 현격한 질적 차이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고스란히 경건한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안에 경험된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밖에도 그대로 구현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그 삶이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존귀한 분인지를 아는 신자는 자기 혼자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그분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나만 그 하나님을 높일 뿐만 아니라 내 가족은 물론이고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피부색과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높이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주의와 참된 신앙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비주의는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에 탐닉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에 지평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평화를 넓히기 위해서 분투하고 고난 받는 삶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수도원들을 진 것 보면 어떻게 지었는지 모릅니다. 산이 다 무너지고 깎아져서 이렇게 절벽이 기둥처럼 서 있는데 몇 백 년 전에 그 곳에 줄을 매고 거기로 건축 자제를 실어가다가 수도원을 짓고 거기 올라가서 한 번도 안 내려오고 거기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어서 자기 유골을 거기 수도원에 책꽂이 같은 곳에 하나씩 넣고 죽는 것입니다. 어느 수도원에 가니까 “위에 것을 찾으라”고 써있는데 위엣 것은 그렇게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도 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삶은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의 팔복의 사람은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의 통치를 맛본 사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명 앞에 엄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여러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소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분투하고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갈 리가 없고 따라서 그 사람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들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주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과는 다르게 이 세상을 꾸려나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이 사는 가루와 같은 곳에다가 누룩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심으셔서 의를 구하고 그 의를 위해서 사는 변화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심어놓으셔서 그들의 영향력을 통해서 세상이 당신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신자는 그것으로서 이 세상을 위해서 훌륭한 섬김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며 주의 말씀과 진리를 따라서 살면 반드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한 주님의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주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핍박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온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이 핍박은 자기 자신에게서 옵니다. 즉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나면 그때 비로소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 안에 우리가 둘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아와 또 하나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거듭난 신자들에게는 항상 이렇게 두 개의 자아가 자신 안에 있지만 죄에 의해서 거의 완전히 진 채로 살아갈 때는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기에게 주님의 뜻을 좇아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워낙 압도되어서 살아갈 때에는 인간의 죄 된 욕망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쪽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완전한 것은 완전하다고 느낄 뿐이지 실제로 어떤 성결한 신자의 마음속에도 죄와 부패의 영향력이 있게 마련이고 소문난 죄인의 마음속에도 부패와 죄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은혜의 저항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많이 지고 나면 그것이 안 느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혼의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거의 느껴지지 않던 은혜의 자아,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은혜의 세계가 확 살아납니다. 그리고 아주 뚜렷한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은혜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이 점점 더 커져서 은혜가 이기게 되면 그러면 죄 가운데 살고자 하는 자기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영향력을 줄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항상 그런 경지에 도달해서도 항상 그 신자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은혜가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는 신자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자기와의 철저한 투쟁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지 않는 자기 속에 있는 핍박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박해입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세속적으로 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기 원하는 자아가 끊임없이 박해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 투쟁을 경험해본 사람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이 싸움과 핍박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핍박보다 못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지금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라고 말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자기가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이 거기에 계셔서 최상의 신자로서의 최상의 영혼의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거기가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면 이 땅에서 자기가 비록 대 사도로서 주님의 복음과 영광을 위해서 옥에 갇히면서 살아가지만 자기 속에 끊임없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서 누가 그 사람 속에 다른 사람에게 밝히 말할 수 없는 육체와의 치열한 투쟁이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도들이 배와 그물을 버렸다면, 다른 사도들은 버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가진 게 별로 없었으니까. 배와 그물정도만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자기를 다 희생했습니다. 다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하나님만 위해서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 속에서는 더 이상 스스로 핍박받는 일들이 없다고 생각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일 뿐이고 끊임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목회는 힘들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것도 안 하고 밥 먹는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 힘든 것은 목회하지 않을 때에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찬양)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내 안에 있는 싸움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교인들도 모르고 식구들도 모르고 내 친구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이 힘들어서 울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내가 힘들어서 웁니다.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 진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 소명이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서 거룩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내 안에 있는 나의 핍박,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내 안에 있는 그러면서도 나와 결별할 수 없는 나의 핍박, 그런 투쟁이 속에서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슬프고 아픈 것은 그것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일 때문에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입니다. 가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 아버님이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쟁을 치르셨는데 하도 전쟁 때 끌려 다니다가 며칠을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니까 피난을 간 어느 집에 누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 아군이 퍼붓는지 적군이 퍼붓는지 막 폭탄이 펑펑 터지면서 파편이 날라 와서 떨어지면 주어서 휙 던지고 또 잤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화롭게 살다가 한방 폭탄을 맞았으면 아마 뒤집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도 억수로 폭탄을 맞으니까 옆에 파편이 떨어져서 툭 치고 그래도 또 잡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어딘들 없겠습니까? 아픔과 고통이 어딘들 없겠습니까? 그것 하나하나 이변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다가는 다 살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죽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오려면 오고 시련이 오려면 오라. 안 오는 것이 이상하다.” 그렇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을 하면 계속 오라는 것입니까, 뭐입니까?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괴롭히는 것은 나입니다. 내 안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싸움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핍박을 안 받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기로 마음을 비우고, 나쁜 의미에서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치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라고 할까? 그런 삶을 살면 핍박받을 일이 없습니다. 내가 막 욕망이 생깁니다. 들어주는데 왜 육신적인 자아가 왜 나를 핍박하겠습니까? 들어주고 그대로 늘 섬겨주는데, 그 대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고통입니다. 영혼의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통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육적인 자아로부터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은혜의 자아로부터 고통을 받습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적으로 막 살고 나쁜 짓하고 주일날 오면 괴롭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괴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렁차게 선포되면서 말씀의 찬란한 빛, 성령의 은혜의 빛 앞에서 자기가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의를 따라 사는 성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의 사람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거룩을 추구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육체의 자아로부터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 고통은 이 세상에서 계속되는 고통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잘못했어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것은 자기를 정복하려고 하는 죄의 세력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있는 자아가 육적인 자아에게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참다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다시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핍박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마음에 결심하고 주일 오후에 예배당을 나서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환경과 내 안에 있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깨트려지지 않는 자아가 나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받습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려고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자아가 육체의 욕심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에게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이것을 능히 핍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도 신자는 때로 상한 갈대와 같이 될 때가 있고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박해, 그런 육적인 자아의 압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압박과 고통을 견디면서 주님의 뜻대로 신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삶이 의를 위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를 위한 핍박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 신자들에게는 늘 깨트려지는 자기 깨어짐이 있고 시시때때로 넘어질 때도 있지만 그 넘어질 때 아픔보다도 훨씬 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그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존재인 우리가 우리의 육적인 자아에게 완전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항거하면서 압박을 받고 핍박과 박해를 견디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의지를 하나님이 가상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결국은 그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만들어주십니다.
두 번째 이런 핍박은 자기 자신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 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같은 형제를 통해서 얼마든지 이런 박해가 올 수 있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거듭나서 주의 자녀가 되었는데 남편의 신앙이 아내의 신앙에 비해서 월등하면 일반적으로 남편은 아내의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내의 신앙이 뛰어나고 아내는 참된 영적 그리스도인에 가까이 가가 있고 남편이 아직 육적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핍박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 중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려운 삶을 살며 자수성가를 한 분인데 수전노 기질이 있어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주보에 헌금 한 사람의 명단이 나오면 마음이 상해 목사님께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항의를 하는 분인데 그 부인 은 남편과 달리 진실하게 신앙생활 하시면서 남편 몰래 헌금을 하시면 남편에게 들켜서 핍박을 받게 되셨다는 이야기.
믿는 사람들 안에 있는 핍박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핍박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여러분, 일제 시대 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일제 시대 때 교회를 향해서 가장 악랄했던 사람들은 교회였습니다. 신사숭배 문제를 두고 교회를 일본 순사가 와서 폐쇄했다고 말하지만 일본 순사들이 폐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가 교회의 폐쇄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교회가 교회의 폐쇄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아무 아무개 교회를 폐쇄한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박해가 굉장히 무섭습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 받은 다음에 그때 설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저 주체할 줄 모르는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 중고등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180분 주일설교를 했으니 핍박이 안 올 리가 없습니다. 90분씩 두 번을 했습니다. 90분을 하고 잠깐 있다가 다시 또 90분하고 공과공부는 다 집어치우라고 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공과는 해서 뭐 하느냐고 하면서, 물론 목사님 허락을 받고 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수로 좋아하는데 싫어하는 사람들은 생난리였습니다. 예배 끝나고 내려오는데 평신도가 그래도 명색이 교역자인데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 장래가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이단의 교주쯤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공공연하게 내가 알고 하나님과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현저하게 달라서 그 두 분이 한 분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 형제들로부터 받는 박해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박해보다도 더 마음이 아픕니다.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길게 한다고 핍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요새는 핍박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당에 와서 설교를 들었는데 좀 길어서 100분 설교를 했나, 110분쯤 했을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또 오세요.” 하니까 소리를 빽 지르면서 “오기는 여기를 왜 또 와. 차나 빼.” 이럽니다. 그때 저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내 생애에 핍박이라는 게 있습니까? 그럴 때나 받아보지. 믿는 사람들로부터도 얼마든지 핍박이 올 수 있습니다. 정말 핍박이 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함께 하나님을 믿는 가정인데도 저는 핍박받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형제는 부모님들 다 예수를 잘 믿습니다. 아빠 엄마가 교회의 중직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가겠다니까 죽일 놈, 살릴 놈 합니다. 자기가 목사가 없었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은 그렇게 싫은 것입니다. 너 왜 그 좋은 학교 나와서 왜 하필이면 목사가 되려 하는가? 그럼 목사는 똥통을 나와야지 목사가 됩니까? 말이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신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는데 수능시험 성적이 안 되니까 신학교를 우겨서 집어넣고, 세상에 그러고도 복 받을 줄 압니까? 그것도 무엇입니까? 핍박입니다. 막내아들 말고 큰아들이 받는 것이 핍박입니다. 신학교를 가겠다고 하는데 못 보내겠다고 하니까.
(예화)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 자기 둘째 딸이 신학생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까 자신을 죽이고 가라고 하면서 이 길이 아무나 가는 길인 줄 아는가 하면서 이 고생은 자신 혼자로 족하다면서 말렸다는 이야기.
이것도 핍박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함께 믿는 자녀이기 때문에 의지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서로 보듬어 주면서 이 세상에서 많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고도 그 믿음의 동아리 안에 들어와서는 위로와 용서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지 이 세상에서 박해받을 힘을 얻게 되는 데, 믿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박해합니다. 핍박을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핍박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는 겉으로 볼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이 신앙 있는 사람을 이기는 것 같은데 그런데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 지는 것 같아도 반드시 이깁니다.
한 녀석이 은혜를 받아서 사명감에 불탑니다. 내가 비록 좋은 대학교 나왔지만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 다 필요 없다. 내가 이제 정말 주님과 그 영혼을 위해서 살고 싶다.” 그런데 같이 손잡고 교회에 나가는 아버지가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같이 매일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주는 어머니가 “이놈의 자식, 에미 에비가 좋은 대학교 졸업시켜놓으니까 기껏 해서 목사가 되려고 내가 이렇게 생고생을 한 줄 아느냐?” 자기 아들이 목사가 되면 이제까지 생고생한 것 다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니까 진짜 감사한 것이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엄마 아빠가 다 반대하니까 못 갑니다. 학비도 안 주고 집을 나가라고 하니까 안 됩니다. 애가 지는 것 같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아들을 핍박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박해를 받는 그 아들이 엄마 아빠로부터 그렇게 박해를 받고 밤이면 교회로 도망가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내가 이 소명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아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는 자 같으나 사실은 이기는 자입니다. 그게 바로 핍박받는 자가 받는 복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통해서도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내가 더 높은 삶의 표준, 더 고상한 신앙에 원리 원칙을 따라서 주님 의지하면서 살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사역자들이 있지만 늘 이야기하는데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로 섬길까 그러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면서 몸부림치는 사역자는 널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볼 때는 유별을 떠는 것입니다. “목회를 너 혼자 하나? 유별 좀 떨지 말아라.” 그것도 하나의 일종의 박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핍박을 꿋꿋이 견디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지체들을 통해서 오는 핍박과 이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든든히 붙잡고 은혜 안에서 서서 살아가지 않으면 불신자의 박해에 의해서 꺾이기보다 신자의 박해에 의해서 꺾이기가 훨씬 쉽습니다. 왜 불신자의 박해는 적대 그 자체인데 신자의 박해는 항상 설득이 숨어 있습니다. “야, 너만 예수 믿는 것 아니잖아. 표준을 낮추어라. 사역의 기준을 낮추어라. 그렇게까지 해야지 만 꼭 교회가 되는가.” 이렇게 계속 낮춥니다. 그래서 불신자에 핍박에 의해서 지는 것보다 신자로부터 오는 핍박에 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핍박입니다. 불신 세상으로부터 오는 핍박입니다. 오늘날도 911테러 사건을 계기로 해서 많은 이슬람권에 있는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우리는 지금 다 집계가 안 되어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동과 보복 같은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집을 잃기도 하고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처지에서는 그런 것은 별로 없습니다. 누가 목에다 칼을 대고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하거나, 아니면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불교 신앙을 고백해야 된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 다 자유롭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 동의입니다. 조용한 것 같으면서도 속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신자들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예화) 가르치던 자매가 30대 1의 경쟁을 뚫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붙임성 있게 일도 잘하는데 철저하게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생활을 잘 하므로 같이 어울리지 않으니까 따돌림을 받았다는 이야기.
지금은 사실 직장 문화도 많이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술도 먹기 싫다고 하면 그냥 억지로 안 권하는 분위기로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예화) 예전에 교회 다니던 집사님이 화가 나서 와서 하는 이야기가 직장에서 회식이 있어 갔는데 술을 먹으라고 해서 교인이라고 하자 남자가 술도 못 마시는가 하면서 맥주병으로 머리를 쳤다는 이야기.
그것도 일종의 정신적인 핍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좀 많이 나아졌습니다. 옛날만 해도 그런 것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동아리 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삶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삶입니다. 아주 교묘하고 은근한 핍박이 아주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회제도 같은 것, 이런 것도 핍박입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세금을 내야 되는데 세법이 엄청나게 불합리해서 세금을 내고는 도저히 이익이 남지 않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의 핍박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데 불합리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다 넓은 의미에서 핍박입니다. 더욱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당하는 핍박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핍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적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내가 자기만 못할 것이 없는데 단지 내가 소개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를 멸시하는 이웃들로부터 받는 고통, 그것도 아주 훌륭한 핍박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인들이 작았을 때 전도를 하러 나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대문을 열고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개에 물렸습니다. 그렇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총이 있으면 가서 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큰 개를 왜 줄을 묶어놓지 않고 뛰어다니게 두는지, 법적으로 지금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는 사살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물게 하는지, 만약에 아무 일 없이 혹시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서 그 집에 갔다가 그 집 개에게 물렸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소송이 일어나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그 손에 전도지가 들렸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개에게 물리고도 아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핍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전도지를 들고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잡상인은 가시오.” 그럴 때 왜 우리가 잡상인입니까? ‘잡상인 출입금지’ 우리는 잡상인이 아니니까 막 들어가도 됩니다. 그런 취급을 받는 것, 훌륭한 박해입니다.
전 성격적으로 이렇게 어린 청소년 시절에 서너 사람만 모여도 말을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는 수줍은 청소년이었습니다. 말도 더듬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후에도 그 기질을 바꾸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다닐 때였는데 그냥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음성으로 들려주신 것은 아닌데 밤중에 전철을 타고 오는데, 밤 11시쯤 타면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 자지 않으면 일간 스포츠 남이 버린 것 주어서 읽는 사람들, 그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처음에 살짝 들었는데 계속 가슴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거기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복음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눈치가 있지 어느 사람은 시내버스를 타고 요한계시록 강해를 매일 했습니다. 그것도 45분 동안, 상계동에서 청량리 올 때까지. 그렇게 하니 아주 지긋 지긋합니다.무슨 감동도 별로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누르고 이틀을 눌렀는데 마음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갈 수 없어서, 떨려서 밤에 수업 끝나고 채플실에 들어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렇게 뜨겁게 기도를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교무실에 가서 나 전도지 좀 달라고 하니까 거기 있는 학생회 간부 전도사님이 반색을 하면서 한 박스를 주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 찍어다 놓고 달라는 사람은 당신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좀 없애야 하는데 어느 신학생도 안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박스는 다 필요 없고 내가 매일 매일 2-300장씩 가져가겠으니 놔두라고 하고 그것을 들고 전철 안으로 가서 “여러분” 그렇게 하는데 전철에 사람들이 계속 졸고 있으면 좋은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참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설교도 별로 안 할 때인데 그 다음부터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거기 있는 사람이 상당히 한 2분 동안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고, 오늘 말씀 잘 들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 하나님 봤어?”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 좀 자자.” 그런 사람부터 시작해서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서 전도지 주면 손을 탁 치며 “필요 없어.” 그런 사람, 그 정도는 낫습니다. 한참 설교를 하는데 누가 와서 팔을 잡고 끌어내렸습니다. 그때 따라갔으면 아마 골목에서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박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 전철에서 내려서 집에까지 그 밤길을 한참 기도하면서 걸어갑니다. 캄캄한 길인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좋으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왜 싫어할까? 예수님이 나도 저런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나에게 이 구원이 이르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내가 얻은 구원이 그렇게 감사하고 놀라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믿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짜 기적에 가깝다는 것,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바람이 불면 그 추운 겨울 벌판을 걸어오면서,
(찬양)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올바르게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싫다고 하고 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할 때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을 복음으로 바꾸지 않으면 상처가 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복음 안에서 태어나서 내 자식처럼 길렀는데 그 지체들이 나에 대해서 험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런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그를 사랑할 수가 없고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동안에 받는 부당한 비난이나 손찌검, 혹은 말로 인한 중상모략 그리고 오해,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게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핍박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관원들이 잡아다가 때리고 그렇게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기를 여겨주시는 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 놀라운 특권, 이 놀라운 영광을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도 허락을 해주십니까? 내가 정말 그 정도로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니 놀랍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루마니아 차우세스쿠 정권 아래서 순교의 길을 갔던 어느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지하 교회에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설교하고 글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어느 순간에 잡혔습니다. 그리고 악랄한 독재자들이 강요합니다. “이제 더 이상 선동하지 마라. 딱 하나만 하면 너를 살려주마. 이제껏 까지 네가 쓴 모든 글과 설교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연설문 하나만 써라.” 그때 당당하게 이 목사님은 맞섰습니다. “만약에 내가 여기서 구차하게 생명을 건진다면 이제껏 내가 땀과 눈물로 토해놓았던 수많은 설교와 그리고 내가 수많은 글들은 일시에 그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나를 죽이면 내가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 때문에 그대들이 나를 죽이면 지금보다도 더 놀라운 사태가 일어나서 그대들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껏 까지 내 설교는 그냥 살아있고 이제껏 까지 내 글은 그냥 살아있지만 그대들이 나를 죽이는 그 순간에 그 수많은 책과 설교들은 내 피를 머금고 일어나서 소리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뒤를 따를 것이다.”
교회 역사를 가만히 보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다는 죽은 사람을 통해서 이룬 역사가 훨씬 더 클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한 예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6장에서 겨우 안수집사로 뽑혔습니다. 그때 집사는 사실 오늘날 집사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목사 이상 가는 사람들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6장에서 선출되었는데 성령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 그리고 진짜 삶에 있어서 모본이 되는 사람들을 뽑았는데, 이제 7장에서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가 진짜 장쾌한 설교입니다. 그 설교를 보면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 같은 경험을 아주 분명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때는 성경을 들고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어마 어마하게 부피가 크니까 다 외워서 하는 것인데 구약에 관한 모든 지식들이 한 꿰미에 다 꿰어서 달려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직접 만나는 아주 분명한 다메섹의 체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남겨두셨다면 그가 생명을 아꼈겠습니까? 재산을 아꼈겠습니까? 그 놀라운 설교를 한편 하다가 끝도 못 내고 죽었습니다. 그 설교를 만약에 수 천 편을 그 시대에 쏟아놓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6장에서 집사가 되고 7장에서 설교 한편, 그것도 결론도 다 못 내고 결론 내기 전에 사람들이 귀를 막고 돌멩이를 던져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쳐서 죽이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능한 설교자 하나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 전파의 일이 닫힐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닫혔습니다. 그 사람은 그 설교가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 설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죽었으니까. 그런데 죽은 그 사람의 피가 튀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8장에 보면 스데반의 죽음의 사건을 계기로 해서 모여 있던 예수님의 사도들이 다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진 그곳에서 그 스데반의 죽음을 경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만 내버려두었자면 예루살렘에만 있었을 것을 괜히 건드려서 그 피가 튀면서 튄 피 자국에서 전부다 복음 전파의 불길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어라 고 헌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어마 어마한 금은보화를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짓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나라 전체를 송두리째 하나님 앞에 바친 왕들이 많습니다. 사실 교황 제가 그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군주가 깊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이제는 우리 왕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라 왕국을 들어서 헌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 어떤 기록도 그렇게 커다란 헌신을 했기 때문에 주님이 보좌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기록은 신비주의자의 기록에도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착각으로라도 별로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설교도 다 못 끝내고 죽은 스데반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가 자기를 증거 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저들의 강퍅함과 죄악을 인해서 그 설교조차 끝내지 못하고 돌멩이가 날아와서 피 묻은 돌멩이가 시체를 뒤덮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왕국을 바친 것보다 자기의 생명을 걸고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다가 죽은 스데반의 영혼을 소중하게 보시면서 보좌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으나 그의 피는 소리를 쳐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폭발적인 복음의 역사를 불러오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것에 선교 적인 효과도 뛰어나지만 잘 죽는 것에서 선교적인 효과는 더 뛰어납니다. 살아있을 때에 삶으로 하는 선교 효과는 대부분 자기 살았을 때 그치는데, 죽은 때에 잘 죽는 선교의 효과는 그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파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감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도들이 자기의 마음을 불붙이는 일에 잘 읽었던 책들이 무엇인가 하면 순교자의 열정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자기의 마음을 충전하고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스데반의 영혼을 받으십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주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화평케 하는 세상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많은 박해와 핍박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핍박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지금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 속이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면서 그를 위해서 아픔을 당하면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자기를 이렇게 박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끌어안고 안타깝게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지금 현재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를 통치하고 그를 의의 영향력 안에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천국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에서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지금은 이 세상에서 안락한 삶과 안일한 생활이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이요, 재산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그때에는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한 당한 고난의 흔적, 고통 받는 흔적, 핍박받은 경험,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는 금과도 바꿀 수 없고 은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그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일평생을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알리기 위해서 의를 위해서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살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 날에 받을 상급이 얼마나 클까요? 그날에 그 상급이 얼마나 귀할까요? 그때 주님께로부터 받는 그 칭찬과 상급,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는 이 세상에서의 핍박과 고난의 수고를 끝내고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 지어다 하는 주님의 칭찬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 언제든지 믿음을 양보하고 신앙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 사람들은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여러분이 그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이런 부끄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위해 박해를 받으며 살아온 여러분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보좌에서 일어나시는 예수님의 손에 의해 영접 받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팔복강해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