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3-19).
우리가 무엇을 ‘안다’라고 할 때, 그냥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과 경험을 동반해서 아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곧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경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지식을 통해서 아는 것이고 그 지식이 체험과 화합하지 못하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에 대한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질 수도 없고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의심 없이 체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되면 최소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 깨닫지 않게 됩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 존재들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앎을 갖게 됩니다. 두 번째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갖게 됩니다. 내가 사람이고 또 내가 그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게 된 근거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이고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세 번째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질서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우리들이 믿게 될 때에 깨닫게 되는 사실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곧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게 해 주시는 방법이 둘 있는데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지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지식을 우리들이 접할 때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실재로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의 깊이는 곧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삶의 변화도 없고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도 들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지방은 세 지방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맨 위에는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갈릴리 지방이었고 그 중간으로는 사마리아 지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아래쪽으로는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방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는 매우 특별한 땅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유대로 오거나 유대 사람들이 갈릴리로 올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지름길인데 그렇게 오질 않고 요단강을 건너가서 동편으로 돌아서 사마리아 땅을 돌아서 갈릴리나 혹은 유대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왕국 나라가 주전 722년에 앗수르라는 나라에게 망합니다. 역사에서 나오는 앗시리아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자 앗시리아는 사마리아 지방에 두 가지 중요한 정책을 폈습니다. 삼인 정책과 혼혈 정책이었습니다. 삼인 정책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거기에 이사 오게 해서 사마리아로서의 독특성을 상실하게 합니다. 사마리아는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쪽의 수도였습니다. 이런 정책들을 계속 펴면서 피 섞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행했던 것처럼 민족의 동질성을 말살해 버리려고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정책에 순응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이 혼혈 자손들이 사는 지역이 됩니다. 이것이 갈릴리와 유대에 사는 정통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더럽혀진 땅이고 율법을 어긴 백성들의 후예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손가락질을 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따로 자신들 나름대로 사마리아 오경이라는 모세의 성경을 약간 변형되고 해석된 것을 가지고 자기들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를 안 해 주기 때문에, 이런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갈릴리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물 길러 나온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II.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은 이 여자를 만나자 물 좀 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물 이야기로 실마리를 푸신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여기서 물을 길러 가는데 이 물은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기 때문에 다시 물 길러 와야 하지만 내가 너에게 주는 물이 무엇인지를 네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그것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네가 길어가는 이 물은 먹고 다시 목마른 물이지만 내가 너에게 주려고 하는 이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않도록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란다.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이 물은 항상 길러 와도 또 길러 오고 또 길으러 와야 하는 물인데 예수님이 주는 물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영생하도록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니까 나에게 그 물 좀 주십시오.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더 이상 물 길러 오기 싫어했던 것은 이 여자 나름대로의 독특한 도덕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물이 있다. 샘물이 솟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이라면 어린 아이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성경에 아주 흔하게 나오는 비유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42편에서는 시인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또 시편 1편에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면서 또 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 와서 마셔라’고 하나님의 초청을 전해줍니다. 이 모든 구약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 우물에서 퍼 올리는 그 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해 주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과의 만남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영혼의 만족, 이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 물, 샘물이라는 말씀을 사용한 것이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평이하고도 명백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전혀 성경의 평범한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물을 말씀하실 때 계속해서 속에서 듣는 생각은 육신의 물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계속해서 예수님과 엇나가는 질문과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모든 관심이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하는데 있었습니다. 어떤 주석가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의 물 긷는 시간은 한 낮이 아니고 아침과 저녁에 물을 긷는데 이 여자가 한 낮에 나온 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물가에서 많은 여자들과 마주치기 싫었던 것입니다.
옛날에 시골에서 동네의 소식통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물가에서 나옵니다. 여자들이 모두 모여서 두레박을 던지고 길어 올리고 옆에서 빨래를 하면서 뉴스를 서로 전해줍니다. 쉬임없이 전파되는 뉴스가 우물가에서 흩어져서 각 집안으로 돌아간 후에 UB(유언비어)통신으로 전파됩니다. 그래서 온 동네가 우물가에서 들려오는 UB통신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쪽 여자나 이쪽 여자나 비슷했겠죠? 물 길러 온 사람들이 거기에서 이 소식을 전하고 자기에 대해서 평가하고 하는 모든 입초사에 오르내리기 싫었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한적한 낮에 뜨거운 뙤약볕을 무릎 쓰고 물 길러 이 여자가 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관심을 계속해서 육신의 물입니다. 지력이 많이 모자랍니다. 이 세상 어디에 먹어도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겠습니까? 돈을 아무 많이 주고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이 그 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만 믿었는데도 너무나 간절히 그런 종류의 물을 원했습니다. 그러면 수치스럽게 내가 이 낮에 물 길러 오지도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문제가 육신과 관련된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곤고한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고, 자식들이 속을 썩이기 때문이고,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아내가 가정에 관심을 안 가져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만 제자리로 돌아가면 나도 매우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해가 들어설 때마다 여러분들이 복 받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이상하게 금년에는 더 간절합니다. 나는 금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복 받는 한해가 되길 원합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고통 받던 사람들은 셈이 피기를 바라고 여러분이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해서 갈등하고 있다면 좋은 직장을 얻고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업을 하다가 위기를 만나거나 어려운 사람들은 금년에는 잘 되어서 먹고는 살지요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도 넉넉히 먹여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빠짐없이 거액의 십일조를 내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은 아멘을 어쩜 그렇게 잘합니까? 난 교회 사택에 살지만 여러분들이 큰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참 좋습니다. 누가 어렵다고 하면 편하지가 않고 식당을 갈 때도 그 사람 생각이 꼭 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정말 금년 한해에 복 받고 육신적으로도 수치스러웠던 일들은 2006년에 함께 다 굴려 버리고 새해에는 여러분들이 새롭게 복 받은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 간절한 소망과 함께 여러분들이 눈을 떠야 할 것은 사실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고통과 괴로움에 더 깊은 뿌리는 육신의 목마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에 더 많은 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런던 시내에 오래 전에 아주 심한 가뭄이 들었다고 합니다. 가로수가 모두 타 죽어가서 소방차들이 일부러 물을 퍼다가 가로수에 물을 주어야 할 정도로 가물었는데 유독 한 그루에 가로수가 잎이 청청하더랍니다. 식물학자들이 신기해서 왜 그럴까? 하고 조사를 했더니 턱도 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오랜 세월을 두고 그 나무가 자라면서 템즈강까지 그 긴 거리를 뿌리를 뻗쳐서 그 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튼튼하고 그 배에서 은혜의 생수가 솟아나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련도 이깁니다. 고난과 큰 시련이 와도 극복합니다. 결국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풍성한 삶이고 승리하는 생활입니다.
이 여자는 육신의 목을 축이기 위해서 물을 길러 왔는데 예수님도 목말라서 한잔 물을 청하면서 이 여자를 보는 그 순간 이 여자의 영혼에 있는 깊은 목마름, 육체도 그렇게 뛰어나게 아름답거나 영광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이 여자의 영혼은 특별히 곤고하고 목마름 속에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행로에 곤하여 길거리, 우물가에 털썩 앉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피곤한 육신을 가지고 이 여자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 가르치고 그것을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우물가의 여인만 못하고 우리가 죄인이고 이 세상에서 찢기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핍절하고 목마른 영혼에게 지금도 찾아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핍절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의 영혼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은혜의 샘물을 터치고 싶어 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여자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을 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전혀 물과는 상관이 없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는 급격한 긴장이 형성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물 길러 왔는데 물 긷는 일은 여자의 일이었는데 왜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일까? 이 여자는 대답했습니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그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그 말이 옳도다.” 여자는 수치스러움과 함께 놀라움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비밀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사람들이 모두 물을 긷는 그 시간에 나와서 함께 물을 긷지 않고 사람들이 물 길러 오지 않는 한 낮에 물동이를 이고 온 것도 바로 그 남편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만난 적도 없는 예수님이 같은 동네에 살아서 소문을 들은 분도 아닌 예수님이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인생의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셨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매튜 헨리 같은 주석가는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 여자가 창녀였음에 틀림없다고 단언을 내립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는데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 죽고 다시 재가를 한 그런 경우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그 중의 대부분은 내연의 관계였을 것이고 지금 남편과 살고 있지만 이 사람도 사실은 법적으로 자기의 남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남편인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한 관계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수치스런 과거였지만 이 여자에게는 한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한줄 한줄의 이력서가 슬픔과 고통, 자기 비하의 인생살이였습니다. 그 아픈 부분을 예수님께서 건드리면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여자에게 그렇게 주고 싶어 했던 하나님과의 만남, 영생하도록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그 은혜를 이 여자에게 주시고 싶어 하셨는데 이것을 이 여자가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은밀하게 감추어진 자신만이 아는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보면 생생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과 세리들, 창녀와 기생, 세상에서 버림받은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의롭다고 믿는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로부터 떠나서 그렇게 죄인이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친구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죄인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바로 이런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온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이들이 더러운 죄인들이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영혼의 목마름 그것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의 것들은 거기서 모두 풀리고 해결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인간들을 복 주시는 법칙입니다. 문제는 이런 배고픔, 목마름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니까 모든 관심이 육신의 먹는 것과 육신의 마시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고 병들고 고통스러운 궁극적인 원인이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여인과 같은 처지에서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씩씩하게만 사는 것이 다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운전하는데 뒤에서 보니까 경찰 사이드 차가 따라와서 막 달렸답니다. 그런데 계속 따라와서 더 밟았는데 속도계가 시속 180km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경찰이 뛰어오더랍니다. 이상하게 경찰이 멀어지지 않고 점점 가까이 오더랍니다. 시속 180km로 달리는 자기 차로 와서 창문을 두드리며 창문을 열라고 해서 열었더니 면허증을 보자고 하는데도 여전히 시속 180km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도망가다 진흙탕에 빠져서 시속 180km로 밟았는데 바퀴는 계속 돌아가는데 차는 가지 않으니까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체포했습니다.
우리들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은 인생의 액셀레이터를 밟는 것입니다. 진흙에 빠지면 엔진의 좋은 힘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의 관심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인 영혼의 문제로 우리의 관심을 옮기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말 내 영혼이 굶주렸구나 내 영혼이 목마르구나 나는 다 필요없다 내 인생의 가장 문제의 핵심은 배부른 영혼이 되는 것이고 이 목마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만이 줄 수 있는 거야 하고 매달리는 그 배고프고 목마른 마음이 없다는데 모든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용서에 대한 목마름, 잘못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데 일주일을 금식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이틀 쯤 했나? 금식한다고 큰소리 치고 갔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신령한 이상이 보인다든지 이래야지만 기도원에 간 보람이 있는데 탕수육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노랗게 튀긴 탕수육 위에 설탕 소스를 뿌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식초 간장에 찍어서 먹을 때 입에서 씹히면서 혀끝으로 번지는 육즙과 소스의 맛! 그 다음부터는 성경을 읽어도 탕수육, 기도를 해도 탕수육, 심지어는 밖에 널어놓은 옥수수를 봐도 탕수육이 생각납니다. 결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뛰쳐나와서 탕수육을 사 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는지... 먹고 나서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살다가 한 주간을 금식기도를 해야겠다고 기도원에 들어갈 때는 좋은 일만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데도 한 번 배고프다는 생각에 꽂히기 시작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고 기도제목도 사라지고 하나님도 사라지고 기도원 올라온 그 당시에 결심, 이렇게 금식기도 한다고 올라왔다가 탕수육 먹고 내려가면 사람들에게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도 다 사라지고 오직 내 평생소원 이것뿐 탕수육 1인분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 흑백필름처럼 끊어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사실에 대한 기억인지 상상이 섞인 것인지 잘 모르겠고 제 생각에는 초등학교 1,2학년 쯤 될 때 저희 시골집에서 어느 친척집을 간 기억이 나는데 지명도 기억을 합니다. 가운데로 신작로가 있어서 먼지를 풀풀 날리며 시내버스가 하루에 한 번 정도 그 큰길을 지나갑니다. 그때에는 왜 그렇게 혼자 된 부인네들이 많았는지 아마 전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기 위해서 뭐라도 이고 다니면서 파는데 시골사람들이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바구니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녀자들이 광주리장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물건이 많아도 가볍습니다. 머리에 이고 가끔은 손을 써야 하니까 실을 입에다 물고 균형을 잡으면서 다니면서 광주리를 팔았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30대 정도의 부인이 애를 업고 밥을 먹고 있는 집에 들어오는데 온 얼굴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시커멓게 탄 얼굴이 태양빛에 달아서 시뻘겋게 되어서 바구니를 파는데 안 산다고 하니까 물이나 한 바가지 먹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물을 길어서 한 바가지를 퍼서 애도 목이 마를 텐데 애 먼저 주지 않고 자기가 먼저 먹습니다. 이것이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물 이외에 다른 것으로 대치가 안 됩니다. 목이 터져 찢어서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금강산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면 가라앉겠습니까? 목마른 사람에게 내가 이밥을 고추장에 비벼 줄테니 한번 먹어 보겠냐고 해도 목마름이 해갈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아주 간절한 목마름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자의 모든 불행의 문제가 영혼에서 솟아나는 영혼의 샘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 여자가 그렇게 상처받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인생을 계속 반복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께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고 싶어 하셨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이 여자가 해결해야 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어 수치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죄인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셔서 그 목마른 영혼의 샘을 터트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후에라도 만약에 좋은 교회를 찾고 싶거든 여러분들에게 회개를 친절히 가르쳐주는 교회를 택하십시오. 그러면 그 교회는 올바른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신 것을 보면 얼마나 예수님이 여자의 버림받은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이 여자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인생의 그 문제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것이었습니다.
Ⅳ. 100년 전의 평양 대 부흥
2007년도 1월 14일은 주일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꼭 백 년 전에는 14일이 월요일이었습니다. 1월2일부터 1월 15일까지 무려 두 주간에 걸쳐서 정확하게 백 년 전에 평양에서 사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경회는 원래 평안남도의 신도들을 위한 연합 사경회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이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이 집회를 위해서 선교사들이 모여서 매일 두 시간씩 4개월 동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처음에는 매일 모이지 않았는데 선교사들이 너무나 바쁘다고 누가 이야기를 하자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기도해야 된다고 하면서 매일 기도하는 모임으로 바꿔서 4개월 동안 매일 정오에 모여서 하나님이 이 평안남도 사경회에 은혜를 주시도록 특별히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때에 존스턴이라는 선교사가 이들에게 와서 1904년과 1906년에 일어났던 영국 웨일즈 지방의 부흥과 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일어났던 인도 카하시 지방의 큰 부흥에 대해서 보고 와서 그 도전 받은 것을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불붙은 선교사들이 이런 동일한 강한 부흥이 이 조선 땅에도 일어나는 것 이외에는 선교의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일본에 의해서 점령되었고 백성들은 깊은 좌절에 빠져있고 교회는 미국의 정책을 따르려고 하는 선교사들과 항일 독립 운동을 하려고 하는 평신도들 간에 갈등이 정치적인 양상으로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경회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하나님의 부흥이 있길 바랐는데 2일부터 시작된 사경회에 전국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그때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지 불과 얼마 안 되었는데 1500명이 모였다고 하니 이것은 엄청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집회를 했지만 2일, 3일, 4일, 5일, 6일, 7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마지막 주간인 6일부터는 평양에 있는 모든 교인들도 함께 모여서 이 집회에 참석해도 좋다는 광고가 나갔습니다. 모두 모여서 1500명의 사람들이 사경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며 사경회가 진행되었지만 냉랭하고 아무 성과도 없이 부흥회는 날자만 가고 있었습니다.
사경회가 끝나기 이틀을 남겨놓은 12일 토요일이었습니다. 블래어라는 선교사가 고린도전서 12장을 가지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고 교회의 각 지체들의 아픔이 곧 교회의 아픔이고 예수님의 아픔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선교사가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한가한 시간에 사냥을 나갔다가 오발 사고가 나면서 손가락 마디 하나가 총에 맞았는데 그때에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아팠다고 간증을 하면서 비로소 여기저기서 흐느껴 우는 회개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었고 13일이 주일이었는데 오전 예배는 각 교회에서 드리고 평양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오후에 사람들을 전도해서 장대현 교회에 모두 모여서 저녁 집회를 갖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13일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4일 마지막 저녁 집회를 남겨놓고 있고 15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는 모두 각자 전국으로 흩어질 작정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너무나 비통한 마음으로 월요일 정오에 모여서 마지막 남은 저녁 집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시고 드디어 마지막 저녁집회가 열렸습니다. 설교가 거의 끝났는데도 아무런 커다란 감동이 없었습니다. 윌리암 고퍼스라고 하는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교회의 지붕에 솥뚜껑을 엎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부어지지 않았고 교회는 냉랭하였습니다. 그때에 당시의 유력한 장로이던 길선주 장로가 울면서 일어나서 깜짝 놀랄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바로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 내가 바로 아간과 같은 사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오래 동안 기도해서 준비한 사경회에 부흥을 주시기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친구 한사람이 일 년 전에 죽으면서 나를 불러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아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니 내가 남기고 가는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나의 절친한 친구인 그대가 나의 이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고 우리 가족들을 보살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 집 재산을 관리하는 가운데 미화 100불을 내가 사취하였고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경회에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그 미망인을 찾아가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즉시 그 돈을 돌려주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집회가 끝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집회가 끝났기 때문에 당시 이길함 선교사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광고했습니다. 저녁 집회가 끝났으니까 돌아가고 내일 새벽에 모이겠다고 광고를 할 때 1500명의 사람 중 900명이 돌아갔습니다. 600명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 나의 이 죄를 토설하고 하나님께 더 은혜를 받아야지 나는 돌아갈 수 없다라는 마음으로 600명의 사람이 남아서 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1907년의 성령 강림과 같은 평양의 대 부흥은 그 900명이 가고 난 다음에 남은 600명 위에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간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모하는 사람,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부어지고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는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여자가 울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족과 함께 도망을 가는데 등에 업힌 아기가 너무 괴로워서 이 가족들이 죽게 되어서 나무에 부딪혀서 죽게 만든 엄마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쌀집에서 쌀을 팔던 싸전의 주인은 되박 밑에 얇은 판자를 깔아서 되박을 속이던 것을 고백하며 누구든지 자기 쌀가게에 오면 이전에 자기가 부당으로 취한 이익들을 돌려주겠노라고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빌려서 갚은 능력이 있는데도 갚지 않아서 자기에게 빚 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심지어는 남편 몰래 부정을 행했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고백했고 보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은 그 여자를 용서해주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한 회개와 함께 일찍이 이 지상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았던 강력한 성령의 부으심을 물 붓듯이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폭제가 되어서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100만 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자는 100만 인 구령 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국에 흩어져서 온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걸고 그 핍박을 이기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오늘 한국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초등학교 아이들이라도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라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누구에게도 밝히기 싫었던 자신의 허물과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예외 없이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뜻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 내가 더 이상 꼬이는 인생을 살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리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님 나를 불러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