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을 만날 때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여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욘 1:11-12)
녹취자: 송미옥
I. 본문해설
아마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요나와 고래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요나가) 거의 물고기에게 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나서를 보여주실 때 사용했던 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이 요나를 통해서 더 큰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요나서는 4장으로 이루어졌는데, 1장에서는 도망가는 요나를 2장에서는 회개하는 요나를 3장에서는 순종하는 요나를 4장에서는 배우는 요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선지자로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 여로보함 2세 때는 아마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세웠던 때였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나라들이 매우 약해졌고, 이 틈을 타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마밧어귀로부터 아라밧 바다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영명한 군좌를 만나서 세상적으로는 번영했지만 신앙적으로는 병들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를 A, B, C급으로 나눈다면 미안하지만 C급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순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대해서도 비교적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사람을 쓰시면서 깨뜨려서 성숙시키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한편으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하나님에게 듣는 말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신자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요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이 임하게 하신 말씀에 나타났습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쳐라 그 악독이 네 앞에 상달되었음이라” 쉽게 말하면 ‘너희들의 죄가 매우 커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기에 이르렀으니 회개하라’ 이것을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자기의 마음에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으니 망하게 하시려면 그냥 망하게 하시지 그것을 경고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살 길을 주실 수도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니느웨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로서의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첫 번째로 기뻐해야 하는 사람이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자아가 믿음보다 강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믿었고 그래서 이 사명을 회피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니느웨로 가야하는데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욥바 항구에 도착한 것도 이 배를 타기 위해서였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욥바에서 약 800km내지 850km정도를 북동쪽으로 올라가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니느웨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시스는 배를 타고 지중해로 가야하는 노선이었습니다. 그러니 욥바에서 배를 탄 것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니느웨를 안가고 반대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배를 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라고 하지만 선지자들도 이렇게 불순종하는 경우가 있으니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야 얼마나 불순종을 잘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를 타고 이 사람은 다시스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다시스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성경에 의하면 다시스에 볼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니느웨로 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로 간 것입니다.
항구를 출발하자마자 폭풍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요? 처음에는 득의한 것처럼 잔잔한 바다를 항해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출발하려는데 폭풍이 밀어닥쳤더라면 그 바다를 잘 아는 사람들이 배를 띄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자기 뜻대로 되는 것처럼 편안하게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큰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니” 히브리 성경에는 ‘발사하다’는 단어입니다. 마치 대포 같은 것에 바람을 잔뜩 저장하셨다가 그 큰 바람을 이 바다 위에 내리신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확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이 폭풍은 지중해 기후 특성 상 예측할 수 없는 국지적인 폭풍이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렇다면 진짜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이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발사하시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그 바람으로 이 요나가 탄 배를 흔들어 놓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니까 사공들은 다급한 나머지 두려움에 가득한 얼굴로 각기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 배를 탔을테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배가 침몰할 위협을 느끼게 되자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당연히 이 배에는 짐을 가지고 탄 승객들도 있었을 것이고, 이쪽에서 짐을 싣고 저쪽으로 옮겨 내려서 운송요금을 받기 위해서 실은 화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위협받자 이 모든 가치를 집어 던져버렸던 것입니다.
이 때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배 밑층에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과연 잠이 오겠습니까? 온 파도가 난리를 치고 배가 요동치고 흔들리는데, 이 배 밑층에 내려가 누워 잠자고 있는 평화로운 요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느끼는 평화는 두 종류입니다. 죄 가운데 있어서 신앙의 양심이 죽었기 때문에 느끼는 평안이 있고, 하나님이 주셔서 신앙 안에서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는 언제나 그 뒤에 사랑과 은혜의 열매가 매달리지만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느끼는 죄악 된 평안은 그 후에 더 큰 불행과 고통을 열매로 몰고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배 밑창에 누워 자고 있었으니 이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선장이 사람을 찾다 찾다 매 밑창까지 내려가서 자는 자를 깨웠습니다. 누군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 배를 구하고자 짐을 버리고 각기 자기 할 일을 하는데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자고 있는 이 사람을 보면서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자는 자여 어찜이냐? 어떻게 이 시간에 잠을 잘 수 있느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정확하게는 “네 신에게 구하라”라고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네 신에게 구하라” 뒤의 질문을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 없이 사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네 신에게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하자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깨워야 할 선지자가 이방인에게 깨움을 받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당당하게 인생을 사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더라도 순종하고 살면 자신은 당당한 주체가 되어 사람들 속에서 주인공으로 인생을 삽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로 내 가족들이 변화되고, 내가 기도하는 대로 이웃이 예수를 믿게 되고, 내가 기도하는 대로 내가 돌보는 지체들이 변화합니다. 결국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빠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집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어’, ‘우리 엄마는 언제쯤 죽을까?’, ‘언제 나는 가족들 없이 혼자 단촐하게 살 수 있을까?’ 자녀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부모가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잠깐 사는 동안에 어떻게 하든지 내 인생의 주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워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고 때로는 아주 구차하게 무엇을 얻을 때가 즐겁습니까? 여유가 있어서 누군가에게 나누어 줄 때가 행복합니까? 비교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선지자에게 주신 명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를 하나님 다음 사람인 줄로 알고 존중하게 됩니다. 비록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거절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거절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간 것에 대해서 선지자의 말씀이 응하게 하시니 선지자는 주인공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방인에 꾸지람을 당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면 주인공이 되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사명을 잃어버리고 나면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그러면 이렇게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지적질을 당하고 책망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방사람들 조차도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던 한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제비를 뽑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일어났는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서 이 뱃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폭풍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바다를 누빈 선원들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그 시점에서 그러한 폭풍이 일어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어났습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명을 잃어버리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머리로 모든 것을 계산해 봅니다. 어떻게 일이 잘 되어야 할지? 어떻게 잘 될 수 있을지? 여건도 조성하고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예상하지 못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폭풍입니다.
결국 그 제비는 요나가 뽑았고, 모든 사람들은 요나 한사람에게 주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너는 누군데?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느 민족인데? 무엇을 하는 사람인데? 너 때문에 이 풍랑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요나 선지자가 비로소 자기의 정체에 대해서 고백을 합니다. “난 히브리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그 다음절에서는 무엇이라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이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방금 자기가 고백하기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바다 육지 하늘이라는 표현은 아무데도 하나님 없는 곳이 없으시다는 의미인데,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 사람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겠다고 이 배에 탔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통일성’이라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믿음이 주는 생각들이 있고, 그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아서 결국은 이것은 한 마음 안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그것대로 살고 싶지는 않고, 알기는 알지만 오랫동안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의 실제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는 것은 아는 것대로 있고, 사는 것은 사는 것대로 되니, 이것이 바로 ‘자기의 분열’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이 자기가 일체성을 가진 비결입니다. 여기서도 자기 자아 안에 끊임없는 자기 죄가 있고 욕망들이 있고, 또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은 감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며,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들이 때로는 강하고 커져서 우리의 편견이 확대되고 확대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눌러보려고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겨보려고도 하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성인이라도 이런 정신 작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나는 이미 완전한 신자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많은 것만큼 우리는 온전한 자아를 못 갖게 되고, 결국은 한 사람이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다음에 그 사명을 집어치우고 불순종의 길을 가는 것은 그 자아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급기야 이 사람은 아는 것과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들이 따로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자기 자신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사명을 떠나고 나면 이런 정신의 상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는 내가 하나님 앞에 왜 인간으로 지음을 받고, 또 어떻게 신자가 되었고, 신자인 나로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을 주셨고, 나를 어느 자리에 세우셨는지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꿈꾸어서도 안 됩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평안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냥 평안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주 한사람이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갈 때 그의 인생에 폭풍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은 불순종을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요나는 다시스로 가기위해 욥바에서 배를 탔고, 그리고 편안하게 바다를 항해하면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사명에 관한 문제는 끝이 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않고 그 불순종을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큰 사람은 책임도 큽니다. 요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불순종은 더 큰 책임을 져야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결국 그러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고, 그 사람 때문에 사실은 풍랑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화물들을 다 잃어버리고,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애매하게 죽음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과 같은 배를 탄 사람입니다. 사업을 해도 불신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과 동업을 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께 죄 짓고 불순종하는 경우 그는 굉장히 불행한 동업자를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은 혼자 했더라면 성공할 사업을 그 예수 믿는 사람과 동업했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둘이 같은 배에 탔으니까 하나님이 폭풍을 발사하셔서 배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라도 도움을 줍니다. 물질이 없으면 그를 위해 열렬히 기도라도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면 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나쁜 짓을 했는데 함께한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가 뚝 떨어지고 마음에 악만 남았다면 그냥 두겠습니까? 고소를 하든지해서 피를 말려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명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면 인간인데 무슨 생각은 안 나겠습니까?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어라, 용서해라, 네가 베풀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물을 머금고 선의로 대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복을 받은 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보디발과 상관이 없으셨지만 요셉을 기억하셔서 그 집에 넘치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신자는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 ‘너는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정확하게 말하면 ‘복의 통로가 될지라’는 뜻입니다.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그런 존재로 하나님이 우리 신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가면 하나님이 그 불순종을 고치기 위해서 그를 다루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 혼자만 풍랑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배를 탄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 함께 사업을 하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그 풍랑을 만나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평화롭고 걱정이 없고 화목하던 가정이 아빠 한사람의 신앙이 미끄러져서 죄를 짓고 때로는 재판을 받고, 형무소에 들어가고, 끔찍한 사고를 저지르고 했을 때에 가족의 행복은 간곳없어집니다. 누구 한사람만 그렇게 해도 한배를 탄 모든 사람들은 함께 고생을 합니다. 결국 복의 통로로 살기는커녕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복된 삶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좋은 것은 곳간에서 나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누릴 수 있고, 내게 있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지만 없는 것은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도 마찬가지이고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보십시오. 어느 연예인이 결혼을 했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이혼을 하고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올린 다음에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 하루 종일 심통을 부리고 뾰로통하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끝까지 못 지켜줄까 봐 걱정이 돼” 이제 30대 중반밖에 안된 자매입니다. 그러나 그 글속에서 씁쓸한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모든 힘이 사라지고 나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아는데, 내가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나 하나를 지탱하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어서 때로는 이렇게 지탱하며 있느니 목숨을 끊는 것이 편하겠다 생각할 정도인데,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물질이 없는데 아무리 주고 싶어도 없는데 어떻게 주겠습니까? 있어도 안 줄 수는 있지만 없는데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으로 태어나서 복된 삶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 두 가지를 내가 많이 가지고 있어서 능히 정신적으로 나를 지탱하고, 그렇게 지탱하고 살 때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육신의 건강이 충만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육체가 든든히 받쳐주면, 쉽게 이야기해서 육체의 건강한 상태가 멘탈에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건강하면 조금 신경쓰이는 일이 있어도 어느 정도는 이겨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밥을 잔뜩 먹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2시간 정도만 몰입해서 연구를 하던지 글을 쓰고 나면 허기가 확 느껴집니다. 책상 앞에 매달려서 정신적으로 무엇을 애쓰는 것은 길거리를 빠른 속도로 걸어다니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고, 두 시간이 넘었는데 아무것도 안 먹고 네 시간이 지나면 온 몸의 당이 떨어지면서 저려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육체의 힘을 소비하는 것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이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뇌가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지탱하기에도 너무너무 힘들고 아무도 나를 안 건드려도 내가 나를 지탱하기 힘이 드는 정도로 에너지가 없는데 누가 와서 나를 건드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해석의 문제이지 건드린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에너지가 있는 엄마에게 기어와 무릎을 더듬어 오르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것은 얼마나 행복입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옷장 서랍을 열고 거기다가 토마토 케첩을 붓고 계란을 집어 던져서 밟고 다니고 온갖 난리를 치는 것도 엄마가 에너지가 있을 때에는 아이들 키우며 사는 한 즐거움일 수 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면 사고 칠 일이 있겠습니까? 물론 그 자체가 사고이지만 말입니다. 육체의 에너지, 정신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은 결국은 나에게 이 2가지의 에너지가 충분히 넘쳐서 나를 지탱해 가고 그리고 나와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서 나와 스치며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이 세상에 있어서 고마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온 인류를 향해서 그 느낌을 줄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또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스치듯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고마운 사람, 덕을 입은 사람, 어려울 때 나를 붙들어 주었던 사람, 궁핍할 때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 마음이 아플 때 위로해 주었던 사람, 누가 그렇게 합니까? 자기도 지탱하기 힘들어서 죽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 슬픔처럼 여겨 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를 짓는 사람들은 폭풍을 만나기 전에 안에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에너지도 없었다면 어떻게 다시스로 가는 배는 탔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가는 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극단적인 이기심만 남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과 정반대의 삶인 것입니다.
살다보면 ‘내가 왜 저 사람에게 이것을 해줘야 하나?’하는 적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부당하게 요구하는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드럽게 잘 대해주고 요구를 들어주다보면 마치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웨이터 정도로 생각을 하고 끊임없이 지시성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나지 않습니까?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살되 생각을 너그럽게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 중 종종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쁘게만 이용당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은 이용하려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입장에 서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이용했으나 나는 하나님을 누림으로 이 기회를 사용하겠다’라고 생각해서 이용을 당해주는 것입니다. 작은 이익에 연연한다고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이익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누리며 사람들에게 베풀며 산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궁핍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에게 꾸어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그것을 갚아준다는 것입니다. 빚을 떼어먹고 안 갚는 것을 예사로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하는 것이 꾸어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이 부채의식을 느끼시며 우리에게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남에게 이용당할 때 그 사람을 보고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 줄 수 없을 때는 ‘NO’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은 아주 부드럽고 마음상하지 않는 언어로 포장을 해서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저 사람은 나를 이용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누리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베풀어 준 것을 너무 오래 마음에 간직하지 마십시오. 간직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으로 안 하기 때문에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의 아름다운 삶은 남들에게 지적당하고 남들에게 지시받고 남들에게 꾸이고 남들에게 굴복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내가 비록 가진 것이 많지 않고 높은 지위가 없고, 자식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한 사람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 아닙니까? 언제든지 사람들이 혼자 잘 살다가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연락이 오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무소식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연락을 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일절 소식이 없다가 가끔 연락이 오면 “우리 딸 시집가”, “누가 죽었어”라는 연락을 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나빠하지 마십시오. 어려울 때에 내가 생각이 났다는 것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못되게 굴었으면 그 사람이 ‘내가 굶으면 굶었지 너한테는 연락 안 한다’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가 10년 동안 연락을 안했지만 내가 불쑥 전화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도와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행복해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에게 내가 그 정도로 기억이 되었구나’ 그렇게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필요를 헤아리면서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순종하면서 살면 그럴 수 없습니다. 순종을 하면 순종을 하기 위해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인생이라는 기차에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연료를 때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순종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는 기차 화차칸에서 무엇인가를 캐오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을 태워서 에너지를 내는데 없어질수록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습니까? 순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렇게 애를 써서 힘들게 힘을 쓸 때 없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안 한다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도해 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 자존심을 태워야하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고, 번복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자존심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만심 이런 것들은 태워서 버릴수록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에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순종하는 것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가 이렇게 많이 망가진 사람이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순종하는 것이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무엇을 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합니다. 사랑이 조금 식으면 야단맞을 까봐 혹시 나 버려두고 이사를 갈까봐 겁나서 하지만 사랑하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해줄 때에 기쁩니다. 그 사람이 기쁘니까 나도 기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주는 에너지입니다. 이런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살 때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아이들이 방황할 때 아이들하고 싸우면서 “어째 성질이 그 모양이냐?” 그러고 싸워봐야 남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꼭 안아 주면서 “우리 딸 힘들지?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할게” 이러한 에너지들이 우리로 하여금 덕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영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어렵지 않지만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 떠나게 되면 그 자체가 에너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종하며 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찌하던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다루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잘못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잘못에 대해서 똑같은 때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제가 아직은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었는데 교수가 되고 나니까 제일 힘든 것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저는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신학교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 때에는 비교적 그랬는데, 교수가 되어서 들어가 보니, 대학 들어가기가 힘드니까 학생들이 담배를 물고 와서 담배를 마당에서 복도에게 피우다가 신학과 면접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이 별로 없거나 아주 없는 학생들이 일단 대학에다 이름을 걸어놓기 위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또 누구입니까? 지켜볼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교들을 시켜서 조용히 다니면서 수험표 붙었으니까 신학과 지원자 중에 담배피고 욕하는 사람을 다 적어오도록 하여 다 떨어뜨렸습니다. 그랬더니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성을 D로 주어서 학과 점수와 상관없이 불합격을 시켰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이 침이나 뱉고 담배나 피고 욕지거리나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신학과에서 받아주어서 목사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아직까지 법적으로 문제된 것이 없습니다. 한 명에게 왜 왔냐고 물었더니 사명감으로 왔다고 합니다. 모두 선배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을 믿게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담배를 왜 아직 피우냐?”라고 물으니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 학생은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걸러냈다고 해도 그런 학생들이 들어옵니다.
학교 교수 때에 있을 때 가장 싫어했던 것은 컨닝하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보고 쓰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남의 노트를 빌리고 축소 복사를 해서 붙여놓고 베껴서 쓰고 책상 위에다 새까맣게 볼펜으로 써가지고 옮겨 쓰는 것입니다. 제가 시험감독 들어가면 (학생들이) ‘우린 망했다’라고 했습니다. 책상 위에 무언가 써있으면 복도에 다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글씨 안 써진 책상위에서만 시험을 보고 컨닝을 못하게 했습니다. 컨닝보다 덜 하긴 하지만 나쁜 것은 레포트를 복사해서 쓰는 것입니다. 3명의 학생이 레포트를 제출했는데 왠지 내용이 비슷합니다. 하나를 작성을 해서 하나는 샘물체, 하나는 필기체, 하나는 명조체, 나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학생들은 레포트를 봤는데 비슷한 것입니다. 교수실에다가 시험지를 수 십장 수백 장을 펴 놓고 조교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베껴 쓴 것이 어떤 것인지 집요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3명의 레포트를 편집을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찾아서 학교에 방을 부쳤습니다. “아무개 레포트는 아무개 레포트와 똑같고 몇 번 레포트는 몇 번 몇 번과 비슷하고 누구 것은 몇 번 몇 번과 비슷한데 해당자들은 내일 방과 후에 교수실에 와서 왜 레포트가 그런지 해명해야 함, 그렇지 않으면 F처리”라고 합니다. 난리가 납니다. 그중에는 레포트를 냈는데 어떤 학생이 슬쩍 훔쳐가지고 베껴 써서 낸 것도 있고, 별일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루어야 합니다. ‘어떻게 다루는가’하면 평소에 이 학생이 어떤 학생이었는지를 보고 다룹니다. 어떤 학생은 변죽이 좋아 싱글 웃으며 교수실로 들어와서 “교수님 죄송합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지만 교수실에 들어올 때 기선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런 학생들은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시험지를 얼굴에 집어 던지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인가? 너와 이야기 할 가치가 없어. 너를 여기 신학교 가도 좋다고 도장 찍어준 목사님 전화번호를 대라. 통화를 하고 싶다. 무엇을 보고 네가 이 학교에 와도 된다고 했는지 내가 알아보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야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돌아갑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다룹니다. 한 학생은 교수실에 들어왔는데 학교를 다닐까 말까 하면서 고민을 하는 친구였습니다. 앞에 왔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험지를 집어던졌다고 하고, 책을 던졌다고 하고, 심지어 교수님이 발로 책상을 찼다고 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겁을 먹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학생에게 “이 따위로 할 거면 집어치워”라고 말하면 교무과에서 사퇴원서 쓰고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학생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앉으라고 하고 커피, 주스, 녹차, 물 어느 것을 마실래?”라고 물으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머니 권사님은 잘 지내시니? 요즘도 행상하며 잘 계시니? 아내도 야근하니?”라고 묻습니다. “너 하나 신학교 보내려고 두 여자가 너무 고생을 하지 않나?”라고 물으면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그런 적 없지만 내 친구들도 많이 그랬는데 좋은 목사 된 사람도 많다 다음에는 베껴 쓰지 말고 특별히 1주일 시간을 줄 테니까 해가지고 와라”라고 하면 감격을 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나를 열심히 따라 다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람을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사람을 보면서 다루는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뼈속까지 아시고 성질, 타고난 천성, 기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못된 DNA부터 시작을 해서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서로서로 다르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확실한 한 가지는 불순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풍랑이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모든 사람은 사고가 나서 남편이 죽는다든지 집안이 경매에 넘어간다든지 몇 달 새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불순종한 사람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폭풍이든지 폭풍 속을 지나고 있는 중입니다. 편안함이 없지 않습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악독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쉼을 누리지 못하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요동치고 급기야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그것이 풍랑이 아닙니까? 풍랑이 걸어가다가 공사장에서 빔이 떨어져서 눌러 넘어져야 그것이 풍랑입니까? 반드시 어디가 부러지고 암 선고를 받아서 불치의 병이라고 하고, 입원을 해서 호흡기를 달아야지 풍랑입니까? 그러한 것을 견딜만 하면 그냥 사십시오. 나와 지체들은 가지 않습니다. 혼자 그렇게 사십시오. 사람은 겨우겨우 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려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비참하고 살아있는 것을 지옥같이 느끼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들어와서 행복과 쉼을 누리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때가 되면 늙고 육신은 죽음의 기운에 삼켜지게 되고,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가 피한다고 피해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 감사하고 기쁘게 힘 있는 대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가지고 사는 그것이 인생의 맛이지 않습니까? 건강할 때 건강해서 그냥 육십이 넘은 사람들이 20대의 생각을 하면서 좌절을 느끼면 생이 얼마나 우울합니까? 그러니까 요양원에서 휠체어를 집고 간신히 앉아있는 90대 할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은 오늘 우리 유럽여행 가자고 설령 아들이 돈을 준다고 해도 못 갑니다. 공중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보내주면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안 가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있는 이 상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면서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잠시 기쁨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사람에게 폭풍을 내리신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첫 번째 하나님께로부터 빛나는 사명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 먼 길을 걸어 하나님이 주신 니느웨로 가는 중이다. 두 번째 그게 너무 싫어서 다시스가는 배를 타려고 욥바에 왔다. 표를 끊었다. 배를 탔다. 매점에서 시원한 거 한잔을 사서 기분 좋게 마시고 배 난간에 기대어 서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아니면 세 번째 드디어 폭풍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난리다. 그리고 내가 제비를 뽑혔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중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순종한 사람들은 반드시 다루십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자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불순종의 길을 가면 하나님이 폭풍을 보내어서라도 우리의 잠자고 있는 마음을 일깨워줘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하늘과 육지와 바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더 이상 피할 때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막다른 골목까지 왔고 그 때에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라. 그리하면 잔잔하리라.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고 나니까 바다는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고 했습니다. 한 번에 그쳐버렸습니다. 요나를 버리고 나니까 사람들은 살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다른 사람을 살게 사는 사람이여야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그 사람과 만난 것이 복이다’라고 해야지 ‘그 사람이 없어져버려서 이제 평화가 왔구나’하는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하는데 학자들을 이것을 물고기 뱃속으로 보지 않고, 물고기 속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그 물고기는) 향유고래라고 추측들을 합니다. 혹은 상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강’, 우리가 밥을 먹다가 밥풀이 들어가는 그 자리라고 공통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호흡이 가능했고 뱃속으로 들어갔으면 그 고래 뱃속에서 나오는 위액에 녹아서 질식사 했을 것이고 위액에 녹아서 남아나지 않습니다. 위액이 얼마나 강하느냐하면 여러분들이 오백 원 동전을 삼키고 이틀 만에 변을 보면 한 쪽 면이 지워질 정도라고 합니다. 그럴게 어마어마하게 강합니다. 거기에 요나가 들어갔더라면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암시하는 것은 “물들이 나를 둘렀고”라고 나오고, 2장 5절에 보면 “풀이 내 머리를 감았나이다”라고 합니다. 후두부를 통해서 돌아다니는 해초찌꺼기가 온 것이고 그게 휘감긴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토해낸 것은 재채기를 하든 방식이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바깥으로 나온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런 공간이 나오는 물고기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 그 속에서 2장에서 그는 철저히 회개합니다. 그리고 3장에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로서 요동치고 고통 받던 요나의 삶은 일단락되고 드디어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대로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동안 다니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임금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위에서 회개를 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보람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할 때에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을 받을 때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이가 점점 들고 노년이 되면 필요로 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돈이라도 많아서 지갑을 열면 필요로 하지만 원하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최고의 봉사는 그들끼리 놀게 해주는 것입니다. 점점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데 행복한 사람들은 그래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어디엔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있어서 거기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 거기서 하나님의 앞에 붙들려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사명의 자리에 돌아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앞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는 사람을 반드시 다루십니다. 그리고 그를 회개하게 하셔서 다시 당신이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여러분 삶에 일어난 폭풍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 풍랑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지를 제가 아나이다. 내가 회개하고 주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나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내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진노를 거두시고 다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며 비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풍랑 속에서 불안했던 삶은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고 아무 쓸모없어서 이방인에게도 지적을 당하고 욕을 먹던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귀한 선지자로 쓰임을 받았던 것처럼 쓸모없던 여러분들의 삶은 다시 존귀해 질 것이고 기쁨과 평화가 다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때문에 가정이 폭풍을 만났고, 회사가 폭풍을 만났고, 그리고 교회가 폭풍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불순종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쓸모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여러분 때문에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면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면, 가족들이 모두 평안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직장이 평안해 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신발을 거꾸로 신고 불순종의 길을 가면서 폭풍이 일어나기 직전에 잠시 형통한 것을 보며 만족을 느끼고 기뻐하는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폭풍 속에서 깊이 회개하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