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리더 수련회
녹취자 : 허혜숙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8)
I. 본문해설
신앙생활이 재미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사람들이고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힘들기만 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을 안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회사를 성장시킨다고 하면 소득을 높이는 것이고, 정보를 많이 습득해서 지식을 성장시킨다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할 때에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더 영적으로 성장해서 그 사람과 겨루어서 내가 이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옆집에 세를 들어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버스 기사이고 부인은 버스 안내양이었다가 둘이 결혼을 해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그림처럼 예뻤습니다. 정말 예뻤는데 문제는 성장을 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 아이들은 11개월이 되면 일어서고 걷고 하는데 이 아이는 발달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였습니다. 집안 자체가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고 하니까 너무 어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저도 한참 무신론에 빠져있었으니까 전도 같은 것을 꿈꿀 이유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길러보면 재미가 아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아이를 낳고 이 아이가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모빌에 눈을 맞추고 까꿍을 하고 이런 것을 상상하면서 부모들은 거의 아주 정신이 없을 정도로 아이에게 빠집니다. 사실 그런 것이 없으면 특히 엄마가 그런 기쁨이 없으면 아이들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고생스러워도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물론 그 아이가 더 성장하면 굉장히 말썽을 부리고 더 성장하면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부모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죄 때문에 생긴 일이고 어쨌든 성장하는 것이 아이를 기르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할 때에 우리를 아이를 낳듯이 처음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열두 달이 되면 걷기도 하고 조금 더 크면 심부름도 하고 용변도 스스로 가릴 줄 알고 자기 앞가림도 하고 강아지도 돌볼 줄 알면서 아이가 성장합니다. 그런데 성장이 전혀 없는 상태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얼굴은 할아버지가 다 되었는데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어린 양이겠습니까? 어려야 어린 양인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연적으로 ‘어리다’는 것과 영적으로 ‘어리다’는 것은 개념이 많이 다른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얼마큼 자기가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영적인 성장이 없으면 그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게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을 참 많이 낭비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들은 유튜브나 SNS에서 말하는 그런 행복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게 영적으로 성장할 때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 성장하면서 가진 바 재능과 자기 자신의 원하는 바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성장해서 올바르게 되어있으면 그다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을 수 없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길로 가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가끔은 어쩔 줄 모르지만 전체적인 방향에 있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면 어떤 길로 가든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는 자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또 그렇게 된다면 그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보람을 느끼면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영적 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베드로 사도가 뒤에 있는 영광에 대한 기도를 제외하고 나면 사실 그 상반 절이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두 개입니다. 결국은 은혜의 성장과 지식의 성장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성장이 먼저 나오는 순서를 눈여겨 봐주십시오. 은혜의 성장과 지식의 성장인데 은혜의 성장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 은혜의 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은혜’라는 의미를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 자체를 은혜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범주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시는 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너희가 너희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이야기할 때 바로 그렇게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보다 자주 사용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의 감동을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 영화 한 편 보고 맥주 한 잔 할까?” 할 때 “너 어떻게 술을 마시자고 그러냐? 은혜가 떨어졌구나” 할 때 그 의미가 세 번째 의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용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저도 어렸을 때는 몰랐습니다. 용어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용어가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생각이 뒤죽박죽됩니다. 그런데 훈련을 잘 받으면 용어를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집에 성경과 공과 책 말고 항상 옆에 있어야 할 두 권의 책이 더 있는데 하나는 교리책하고 또 하나는 성경 사전입니다. 사전은 몇 개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중에 성경 사전, 신학 사전, 성경 지리사전 정도를 한 권씩만 사다 놓으면 거의 평생 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싸지 않습니다. 은혜가 여기에서 바로 그런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설마 예수님 보고 갈수록 은혜를 많이 베풀어라고 명령하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 사랑의 감동, 감화입니다. 설교시간에도 제가 설명을 하지만 잔잔하던 마음에 물결이 확 일어납니다. 그것이 사랑의 물결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그것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일과 생각을 하는데,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정체가 사랑의 감화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힘이고 은혜의 힘인데 사랑의 힘입니다. 은혜는 사랑의 등식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은혜의 경험의 결과물이 사랑입니다. 은혜를 많이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열린 신문이 나왔는데 7면에 어떤 자매가 간증을 썼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살아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도저히 꿈꾸지 못했던 어떤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껴지는 것입니다.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힘입니다. 그런 의외성이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인생에 이미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 인생에서 모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도 청년부에서 외국에서 유학하던 사람인데 암에 걸렸습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다 겪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다행히 잘 치료를 받고 다시 공부하러 돌아갔습니다. 계속 관리를 해야겠지만 이것이 신앙의 의외성입니다.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하는데 은혜를 받으면 놀랍게 그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우리의 지성, 감정, 우리의 의지를 관여 안 하는 데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조건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하나님에 대해 배우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뭔가를 배울 때 그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조금만 복잡해져도 배우기가 싫어지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배우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복잡할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그것을 안다는 것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커피를 내리는 것을 배운다고 칩시다. 모두 다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커피가 다 내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온도, 습도 거름종이, 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고 그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복잡한 것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심오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은혜는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한 은혜에서 자라간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받는 사랑의 감화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점점 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순수하고 진실하게 사랑할 때 그에게는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진짜 용감하게 나는 저럴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아름답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을 아주 많이 만났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한 자매가) 어느 형제를 만나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 어디 안 가고 거기에 있으면 나머지는 다 괜찮습니다. 어렵지 않아서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나머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진짜 생명이 아니라 유사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서 유사 생명을 받을 때도 힘이 난다면 참 생명을 받을 때는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성장의 첫 번째 요소는 이런 은혜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넓은 호수에 앉아서 ‘훅~’하고 한번 불어보십시오. 그런데 바람이 붑니다. 물결이 출렁거리고 작은 배가 뒤뚱거릴 정도로 물결이 일어납니다. 굉장한 힘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의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훅’하고 흔들리는 물결 같은 것들이 큰 바람을 맞아서 배가 좌우로 흔들릴 정도로 크게 파도가 치는 것으로 변해가는 것이 은혜의 성장입니다. 그 은혜의 성장에 붙들리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아주 보다 깊은 정도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설교할 때는 꼭 연애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기가 그나마 가깝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귀기로 했습니다. 싫지도 않고 아주 환승하기 적합한 상대입니다. 그냥 혼자 시간을 때우기 보다 어차피 (상대가) 영화표도 끊어주니까 갑니다. 마음에 (작은)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만나지 않아도 물결이 출렁거립니다. 그것이 상상입니다. 어떤 때는 상상하는 이 작용이 실제로 만나는 것보다도 더 엄청난 우리의 정신의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 빠지면 집에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차를 내가 마시고 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가슴이 출렁출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혜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도 ‘재수가 참 좋다’고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기에는 저것이 과연 감사할 조건이 될까 하는데 그것을 그렇게 감동을 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부 엄마들이 우리 아이를 장애가 있게 태어나게 해 주신 것이 내 인생에 정말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어렸을 때는 거의 잘 안 일어납니다. 처음 회심했을 때는 일어나지만 그것이 미친 듯이 출렁였다가 아무것도 없어지고 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레코드 가게에 가서 인기가수의 브로마이드를 선물로 받고 집에 와 쫙 펼쳐서 벽에 붙이면서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긴 저도 고등학교 때 러브스토리나 초원의 빛을 보고 여주인공을 생각하며 가슴앓이를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별로인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우리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에 감정적으로 출렁거리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영적인 성장하는 과정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영적으로 성장한 위치에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의 특징은 마음에 은혜로 말미암는 마음이 출렁거리는 제가 쓰는 용어로 정동이라고 하는데 그런 정동이 아주 빈번하게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교정하는 능력과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 자신을 대비해 보십시오. 나는 일 년 전에 비해서, 5년 전에 비해서, 열린 교회에 처음 왔던 7년 전에 비해서 나는 은혜의 성장이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성장이 있는가? 마음속에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가?
솔직히 남녀가 둘이 사귀는데 그 사랑의 관계를 계속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이 사랑하는 그 감정이 안 식고 계속 가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감동에 있습니다. 둘이 서로 좋은 것을 느껴서 계속 사귀자고 했어도 감동 없는 날들이 계속 지나갑니다. 그러면 타인처럼 느껴집니다. ‘감동’ 모든 데이트하는 과정은 그런 감동을 서로 주고받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교제입니다. 그래서 길을 걸어가면서도 자기가 차도에 서고 안쪽으로 걸어가라고 잘 챙겨주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 마음이 나에게 전해집니다. 뭘 시켰는데 자기는 싼 것을 시키고 비싼 것을 시켜주는 것을 보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벌고 자기는 잘 못 버는데도 돈을 내는 데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을 선물해주는 것에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감동을 받으면서 사랑이 계속 유지됩니다.
똑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런 감동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져서 우리의 마음이 사랑으로 출렁거리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계속 지속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를 때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진짜 변화는 내가 그 사랑을 알 때에 내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신론자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죽음에서도 건지시고 나를 목회자가 되게 하셔서 여기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가끔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홀로 이 어두운 우주 공간에 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을 어려서부터 느꼈습니다. 그리고 항상 궁금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의미를 갖는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혼자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천주의자들의 철학자들에 대해 어려서부터 심취했던 이유가 그 사람들이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현 존재를 보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 때에 내 인생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 성장해가야 합니다. 처음 연애할 때는 불같이 뜨거워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볼꼴 못 볼 꼴 다 보면서 긴 세월이 흐릅니다. 정나미가 떨어져서 몇 번씩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고 편지도 쓰고 전화도 차단하고 전화번호까지 지워버리고 던져버려도 그것을 모두 극복하고 결국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못 헤어지는 것입니다. 고운 정이 든 사람은 헤어져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둘 다) 든 사람은 못 헤어집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사랑의 성장입니다. 사랑이 상황에 간신히 의지하고 있는 것, 걸쳐있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돈이 많기 때문에, 아니면 심지어 내가 기댈 수 있기 때문에 기대기는 뭘 기댑니까?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지 자기도 지탱하지 못한 사람 혼자서 걷지도 못한 사람을 (다른 사람) 다리 (까지) 두 개를 묶어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홀로 서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동반자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어떻게 동반을 합니까? 그것은 문학적 표현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무게를 짊어질 사람은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꾸 받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자기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십시오. 누구를 향해서도 자꾸 분량 이상의 기대를 가지면 상처가 너무 많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서 점점 더 성장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아주 탄탄하게 됩니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연합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마음이 다 빼앗겼다면 그 사람만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런 사랑이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 자체가 사랑의 감화인데 그 사랑의 감화가 반복되면서 우리 안에 사랑의 성향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랑 그 자체는 경향성입니다. 그런 것이 은혜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사랑의 감동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식보다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은혜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의 요소는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평화, 그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 진짜 평안하다.’ 모든 것과의 관계가 안정되어 있다. 평화, 그다음에 안식, 그리고 기쁨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많이 느끼는 것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장성한 자가 되면, 은혜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 되면 이 세 가지를 자주, 많이,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때로는 격렬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마음이 평화로운 것입니다. 왜 힘든 일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런 것을 다 만나고 신경 쓰이게 해도
(찬송)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이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그런 것들이 나에게 행복을 침해할 수 없게끔 놀라운 평안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것입니다. 육체가 피곤해도 항상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체력이 준비되어서 힘을 내야지 하고 관악산 끝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내려왔습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피곤합니다. 달콤한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한낮에 보았던 관악산이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듣고 있는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평안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육체가 피곤해도 항상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피곤하면, 영혼이 안식이 없으면 항상 불행합니다. 그리고 영혼에 기쁨이 없습니다. 육체의 기쁨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격렬한 기쁨이 지나가고 나면 (기쁨이 사라집니다.) 저는 젊었을 때 그렇게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술을 먹을 때 제일 싫은 것이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저녁에 캠핑을 가서 술을 먹고 난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여기저기 나뒹굴어 있는 술병들이 있고 여기저기서 나뒹굴어 자는 풍경 그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숙취 이런 것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객실로 들어오니까 그런 것들이 싫은 것입니다. 그 안에 잠시 스쳐가는 육체의 기쁨이 우리의 행복을 구성하는 자격에는 모자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주 진즉에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어도 비교적 건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주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람이 불면 파도가 잘 일어나듯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은혜에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람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과 도토리묵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도토리묵을 엄청난 대야에 쏟아놓고 부채로 부쳐봐야 물결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영적으로 아직 어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웅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입니다.
두 번째가 지식의 성장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읽은 이야기인데 영어 선생님들이 다들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겠다는 아이들이 영어 지문을 못 읽는다는 것입니다. 가만 보니까 영어 실력이 없어서 못 읽는 것만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 옆에 국어 선생님이 말하기를 (아이들이) 국어지문도 못 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선생님들이 내린 결론은 물론 영어도 못하지만 그 영어를 완벽하게 한글로 번역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못 하는 아이들의 비중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페이스북에 나오는 여섯 줄 일곱 줄짜리만 읽다가 이것은 죽 논리를 따라 나오니까 숨이 가빠서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설 같은 것들을 아무리 잘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책을 잘 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의 성장’이라는 것은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지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신앙으로 얻는 지식과 이성으로 얻는 지식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는 각기 얻는 방식과 그것이 알려주는 대상이 다릅니다. 믿음으로 얻는 지식은 우리의 눈에 들어오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지식은 믿음에 의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은 경험적인 지식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예를 들어 “너 그 친구 알아?” “응, 알아” “어떻게 알아?” “입사면접 할 때 우리가 면접 같이 봐서 알지” 할 때의 안다는 것과 “너 그 친구 잘 알아?” “그럼, 잘 알지 내가 그 친구랑 같은 방에서 3년을 함께 살았는데” 할 때 안다는 것과는 아는 차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어봤고 그 속에서 밑바닥이 어떤 것도 다 봤습니다. 그런데 “나 걔 싫어” 하는 것은 제대로 안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3년 동안 같이 살았어도 마음을 닫고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이 방에, 걔는 저 방에, 살면서 서로 터치하지 않으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에서 지식이란 것은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사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믿는 사람이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이 아름다우시다’ 그러면 그것은 꽃이 아름답다든지 예쁜 옷이 아름답다든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것들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편지도 써주고 물질도 보내주고 마음을 많이 써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잘 믿을 때 그 믿음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속성과 연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자신이 경험하면 그것이 지식입니다. 그래서 잘 믿으면 몰랐던 사실들을 수없이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맨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한 사랑은 진짜 변덕스럽습니다. 사실은 그것 때문이라도 인간이 인간의 사랑에 목숨을 걸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때 자기도 변할 수 있지만 자기는 안 변해도 사랑받는 사람이 변덕이 심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진실함이 그 속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 덕을 칭송받아도 삶에 입각점, 발판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이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이 지식은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식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구체적인 사실은 잘 모르겠는데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신실하고 믿을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개별적인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현실은 너무 염려스럽습니다. 염려스럽지 않으면 염려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염려한다고 염려가 해결되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도 모순이고 저래도 모순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상황은 염려스럽고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저렇게 되면 그 다음 순간에는 어떤 불행이 나에게 찾아올 것을 아는데,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신실하게 의지할 때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 얻는 지식입니다. 자연적으로 본다면 모든 학문이 사실은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미 모든 사물 속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 사이에 법칙이 없다면 학문이라는 것은 설명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그것을 터득하면 기가 막히게 미래에 대해서 예측할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사실 우리 모든 사역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전문가마다 예측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전문가는 3-4월이 피크가 될 것이고 1년이 넘어도 안 끝날 수가 있다. 심지어는 몇 년이 갈 수도 있다. 1918년에 스페인 독감이 유행해서 9500명이 죽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2월이면 정리되기 시작할 것이고 4월이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9월이면 상황은 종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의견이 옳은지 절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생물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학에 관한 정보, 거래에 대해 다루어 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문가의 이야기만 믿을 뿐입니다. 누구를 믿느냐는 것의 문제이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설득당할 뿐입니다. 그런 법칙들이 모두 깔려있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 살림도 잘하고 공부도 잘 합니다. 일을 시켜도 답답하지 않고 정확하게 해내고 어디를 가든지 환영을 받습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신앙의 세계에서 지식이라는 것도 결국은 공부를 통해서 습득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한글로 된 지문 하나를 읽고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고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나 되겠습니까? 신앙의 세계는 결국은 이 세상 속에서 내가 한 인간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데 결국은 내가 하나님도 그렇게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도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알려고 하지 않을 때 그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볼 때 매우 낮은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은 아주 뜨거운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 속에서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은 그 사이사이를 성경과 이성으로 추론해가면서 그 간격을 메꿀 때 우리에게 신앙의 감격이 일어나고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어서 결국은 지식과 은혜는 두 개가 따로 있지 않고 축을 중심으로 두 개의 바퀴처럼 위에 얹힌 수레를 굴러가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요즘 BTS가 한참 노래를 불러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지만 불리워지는 모든 노래가 명곡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작품이 항상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불시착이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라도 고전이 될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후예가 아무리 멋있었지만 과연 그 작품이 100년 후에 한국문학전집에 목록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차이가 무엇입니까? 고전은 고전만의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의 공통적 (특징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항상 그런 작품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시간을 초월해서 인생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밝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제공해 주는 조건을 갖추어야만 고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갖췄으나 재미가 없을 때, 그리고 아무도 안 읽을 때는 고전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이 조건도 갖추고 사람들에게도)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 고전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힘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많이 너그러워졌습니다. 예전에는 스마트폰을 발로 밟아버리라고 했는데 이제는 조금씩 양보를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용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 생활이 안 될 정도로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쯤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 책을 읽는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볼 때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의 공통점은 알려고 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는 교인들, 이런 사람들이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누군가에게 우월감을 갖기 위해서 지식으로만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임목사한테도 수없이 메일을 줄줄이 보내서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물어보고 예정론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진정한 지식에 대한 갈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계속 (공부)할 때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과 못 하는 애들 차이는 공부를 잘 하는 애들은 자기가 수업을 못 알아들을 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사람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나는 왜 못 알아들을까?’ 모두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약 10% 정도 못 알아듣는데도 그렇습니다. 탐구를 합니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도 자존심이 안 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모르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어쩌다 안 것에 나 자신이 대견하지 모른다는(대견하다는) 사실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다는 사실이 기이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큰 행복은 지식을 얻고 그 지식으로 나 자신을 드론을 띄우듯이 객관적으로 나를 보고 나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술다운 예술이 나오고 문학이 나오고 그림다운 그림이 나오고 글이 나오고 나의 노래가 나옵니다. 비록 수준이 높지 않아도 나의 인생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꼭 당부하는데 책을 읽으십시오. 마지막에 손가락한테 물어보십시오. ‘네가 마지막으로 종이를 만진 때가 언제냐?’ 유리 말고 종이를 말합니다. 휴지 말고 책 종이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을 시키면 이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행복으로 내가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모여 앉아서 수없이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어봐야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깨달음은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입이 아프다든지 이야기를 많이 하면 무언인가를 먹어야 된다든지 하는 깨달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뭔가 꽉 채우는 그래서 나의 삶을 비옥하게 하는 힘들은 그런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부부로 살아가는 것 같은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아가면서 속속들이 알아 가는데 그 아는 방식이 회사에 있는 사람이 사원으로서 그 사람을 안다든지 하는 그런 앎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어떤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보다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앎의 영역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워낙 좋은 사람을 소개할 때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알면 결국은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단점이 있어서 한편으로 실망을 하게 되지만 예수님은 알면 반드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배워가면서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할 때 무엇과 같냐면 바다에 배를 타고 갑니다. 배는 떠 있기만 하면 배는 갑니다. 속력이 조금 느려서 그렇지 바람이라도 타면 태풍만 안 일어나면 태평양 바다에라도 안 떠 있겠습니까? 그런데 작은 배는 끊임없이 요동칠 것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항공모함이 되어서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성장이 그런 차이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 때 항상 이 세상에 치여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항해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런 평화와 안식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때로는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모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무엇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달콤한 행복만을 느끼면서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럴 수 있다면 그는 마취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하나는 은혜의 성장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져다주고, 또 하나는 지식의 성장인데 그 지식은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주고, 이 두 가지가 함께 우리 안에서 자라가면서 결국 우리는 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큰 사람, 권력을 갖고 돈을 많이 가진 큰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의 날개 그늘 아래 쉬어가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현자가 되고 애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그런 현자가 되고 지혜 자가 될 때 스치듯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목회자로 사는 이 일은 사실 절대 쉽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쉬운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하면 딱히 할 일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도 소명입니다. 예전에는 건축가도 되고 싶었고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고 작가도 되고 싶었고 모두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없습니다. 목회 하나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의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과 만나는데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의지하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신앙을 따라 사느냐 안 사느냐, 은혜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느냐 아니면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느냐 이런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여러분들도 인정할 것입니다. 여기에 서기까지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누군가의 많은 희생으로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중의 대부분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기억도 안 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수고해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됐을까? 사뭇 다른 인생이 우리들 앞에 전개됐을 것입니다. 잘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잘 나갔다는 것이 인생을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마지막에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고 별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젊음의 아름다움이나 보여주는 그런 것들은 그것을 죽 연장해서 그 뒤에 있는 것들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 같이 예쁜 사람을 보고 돈도 많고 건강하고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그렇게 자기 행복을 구가하지만 얼마 뒤에는 거지가 되고 가난해지고 늙고 병들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변해도 그 삶을 꿋꿋이 지탱해 나가면서 평화와 안식과 기쁨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젊은이들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쾌락이나 소비의 즐거움에 탐닉해서 사는 것은 이런 눈을 멀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복해 하는 사람도 결국은 불행과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젊은 사람도 늙는 것과 연결되어 있고 싱싱하게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도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온갖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한쪽만을 떼어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것을 보면서 그 뒤를 못 보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바른 인생의 길을 살아가도록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결국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자신의 영혼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은혜에서 성장해가서 사랑의 감동이 많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지식이 성장해 있을 때 무지한 사람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생활을 잘 하십시오. 말씀 생활 잘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매 예배 시간마다, 매 기도 시간마다, 저녁 때 교회에 기도하러 오면 캄캄하고 추운 밤인데 항상 사람들이 와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은데 와서 흐느끼면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해 가고, 성장하는 상태에서 (다른) 영혼을 섬기면서 지나갔을 뿐인데 수많은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도록 만들면서 (인생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민폐나 끼치면서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로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이 삶으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