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8-11)
녹취자: 조경훈
저는 27년 전에 열린교회를 개척을 해서 이제껏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이고 미국에서 2주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제도권의 교육권 총신대에서 박사과정까지 했지만 저 나름대로 스스로 공부해오면서 개혁신학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저 책을 읽으실 리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읽으신다면 여러분의 인생을 시간을 좀 절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목회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목회는 개교회에서 하고 있는 목사의 활동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복음사역 전체를 포괄적인 의미에서 목회사역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Jesus died for us.” 네 단어로 압축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알기 위해서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의미도 알아야 됩니다. 이 네 단어를 신학적으로 확장해서 의미를 전개한 것이 신학입니다. 이런 동심원과 외연의 관계를 떠나면 그것은 진정한 신학이 아닙니다.
17세기에 개혁파 전통주의자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복음에 대한 지식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복음 자체와 복음의 교리에 관한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음 전체가 지배하고 있는 신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단어와 함께 그것에 대한 의미를 밝혀주는 교리에 대한 공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이라는 형태로 오늘날 이렇게 나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고 있는 신학의 모델이 최선의 모델인가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기별로 신학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이후에 우리가 갖게 된 커리큘럼의 문제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들은 별도의 또 다른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생애의 말년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목회자로서 신학자로서 말년에 자기의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기도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기도 제목이 되었는가를 보면 그 사람 전체의 생애에서 추구하고 있는 비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완전히 응축되어있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사실 주기도문이 칼빈 시대 때 일 년 씩 이나 가르쳤던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냐하면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서 공부를 하시는데 왜 하십니까? 목사가 되기 위해서? 그것은 목표일 뿐 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입학했으면 졸업하는 게 목표일 것입니다. 졸업해도 학위를 받는 게 목표일 것입니다. 학위를 받는 이유는 그 다음에 진학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 일수도 있고 아니면 좋은 교회에 청빙을 받기 위한 자격을 위해서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마지막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까?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내가 기도하노라” 등등 꾸미는 말이 나오고 결정적인 것은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입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전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입니다. 결국 목회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은 불신자들은 설득을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신자는 이미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말론 카이 말론’(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점점 더 풍성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지적 개념이 아니라 이행적 개념입니다. 누구도 나는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하지 말고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증대되도록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목회자의 자격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다 아시고 하나도 실망하지 않으셨고 다시 그를 불러서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 물었던 질문이 세 번 똑같이 반복이 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각각 다른 단어로 나오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거의 같은 말의 반복이라고 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을 가지고 희랍철학을 들이대면서 세 개의 ‘사랑하다’라는 다른 단어라고 논의하는 것에 대해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모든 전투는 마지막에 전투 자체를 멋지게 하기 위한 것이 전투의 목적이 아닙니다. 전투의 목적은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에 이바지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에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내리는 목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부족해도 쓰십니다. 나머지가 아무리 넘쳐도 그것이 아니면 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목회의 본질입니다.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이렇게 나옵니다. ‘헤 아가페 휘몬’(ἡ ἀγάπη ὑμῶν) 사랑은 단수고 소유하는 주체는 복수입니다. ‘헤 아가페’(ἡ ἀγάπη)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랑’ 입니다. 사랑이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 모든 세계는 두 가지 cause로 창조가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 그 다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두 가지로 창조가 되어서 모든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고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각 위가 서로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것이 투영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상승하고 그 사랑에서 하강해서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통의 모형을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기독교는 이 지혜와 비밀을, 이 사랑을 전하는 가장 올바른 유일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놀라운 교통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라틴어로 말하면 ‘아마레 데움’(Amare Deum)만 포함하는 게 아닙니다. 직역을 하면 ‘하나님을 사랑함’이 되겠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아마레 데오’(Amare Deo)까지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격을 사용해서 ‘아마레 데움’과 ‘아마레 데오’는 분리가 안 됩니다. 이러면서 모든 사랑을 하나의 사랑으로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1999년도에 이 학교에 제가 와서 강의를 했습니다. 2013년에는 졸업식에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1999년도의 일이었는데 강의를 하는데 한 학생이 강의가 끝나고 복도에 와서 나를 붙들고 펑펑 우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데 너무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내가 얘기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학이 있는데 왜 개혁주의를 선택합니까? 저는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정체성이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유가 가장 하나님을 정확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이었고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비정통주의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도록 가르치지 못하는 신학입니다.
더 할 이야기가 많지만 여태까지 한 이야기를 요약하면 목회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사랑하게 하고 이미 믿은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을 말론 카이 말론, 점점 더 멈춤이 없이 그 사랑이 증대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가장 중요한 자격은 그런 사람이 목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러려고 몸부림치는 그 속에서 목회의 진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질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팩트는 불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나 후회가 없습니다.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미 그의 저작 가운데 베아따비타(De beata vita)라는 참된 행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작품이니까 꼭 읽어보십시오.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믿은 신자가 그 믿은 진리대로 살지 않을 때 그 비참함은 불신자보다 더 크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 하면 구원이 불변한다고 하는 것은 죽은 이후에 심판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릅니다. 그것도 가서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확신에 달린 것이 아니고 팩트입니다. 성경은 구원 얻었다고 믿는 사람이 사실 팩트는 아니라는 가르침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결국 이미 온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게 하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멈추지 말고 점점 더 풍성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먼 데서 묻지 말고 두 가지 영역에서 물어봅니다. 첫째는 만약에 여러분들의 부르심이 진실하다면 여러분들이 설교를 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팩트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아무리 설교하고 설득을 하고 말씀사역을 해도 하나님을 안 사랑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사람, 쪼금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는 이 길이 소명이 아니든지, 두 번째는 소명 받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신학과 삶의 길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명이 있는 사람은 결코 뻔뻔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일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소명 받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신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지만 초창기 때 한 10년 정도 교수사역을 했었는데 매 수업시간마다 신학생들을 신학교에서 내보내는 것이 내 강의의 목표였습니다. 얼추 잡을 때 나의 설득을 받고 학교를 그만 둔 사람이 한 200명 이상이 됩니다. 격려를 해서 내보냈습니다. 나갈 사람은 이미 소명이 아닙니다. 물론 남아있는 사람이 모두 소명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회의 신학공부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돼야 합니다.
반드빌트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 있는 교수 한 명을 잘 알고 있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석사과정에서는 종종 신학을 하다가 자유주의를 하면서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복음주의적인 학교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반드빌트대학에 박사로 들어왔는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버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경건(piety)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는데, ‘으로’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앤’(ἐν)입니다. 무엇 무엇 안에, 위로, 말미암아 이런 의미를 가지는데 결국 지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식과 사랑 안에서 사랑이 점점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과 총명이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중요한 질료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희랍어 성경에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고 나옵니다. ‘에피’(ἐπί)는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는 전치사입니다. 무엇 무엇에 관하여, 무엇 무엇에 대한, 무엇 무엇을 위해 등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노시스’(γνωσις)라는 이 말은 저의 판단으로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10개의 단어 안에 들어가는 단어입니다. 과장해서 얘기하면 그노시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온전하게 정리된 지식이 있으면 신학공부를 30퍼센트 이상을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노시스에 대해서 탐구하고 사색을 해 왔지만 저는 아직도 그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노시스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사실 글자는 희랍어지만 사상적인 배경은 헤브라이즘에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쓰여 진 것입니다. 이것과 맞먹는 단어가 ‘다아트’(דַּעַת)입니다. 다아트가 ‘야다’(יאדה)의 명사이고 이것이 지식입니다. 호세아서 4장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할 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동사가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곳이 창세기 4장 1절에 나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창 4:1). 영어에 know라는 단어를 특히 옥스퍼드 영영사전 같은 big dictionary에 찾아보면 to have sexual intercourse ‘성교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확신하지는 못하는데 킹제임스 버전을 번역하면서 영어가 코노테이션(connotation)을 얻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심오한 단어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지식하는 그리스적인 사유에서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철학에서 지식을 꼭 그런 식으로 썼느냐에 대해서는 나는 의문입니다. 훨씬 심오한 뜻으로 썼을 것입니다. 나는 ‘에피그노시스’를 뭐라고 해석을 하느냐 하면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 입니다.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사물 하나를 제대로 아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이것이 에피그노시스라는 말로 정리가 되는데 당연히 여기에는 경험적인 요소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보고 정보를 취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에피그노시스가 아닙니다.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사실은 체험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에서 나오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어에서의 야다의 의미를 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의 재앙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히브리 마인드에서 어떤 처녀가 “나는 저 남자를 잘 알아”라고 말하면 혼삿길이 막힌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해볼 것 못 해볼 것을 모두 해 봤다는 의미입니다. 야다라는 자체가 ‘성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마인드에서의 지식의 개념과 히브리 마인드에서의 지식의 개념이 일치하는 면도 있지만 사뭇 다른 면들도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리스어를 썼지만 담겨진 마음 자체는 기본적으로 히브리 마인드입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은 지식이 필요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켄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자신의 프로스로기온(Proslogion)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피데스 고바이렌스 인텔랙툼(Fides quaerens intellectum). “신앙은 지해를 추구한다.” 이해라고 번역하는데 사실은 지해입니다. 지혜가 아니라 지해입니다. 신앙은 지해를 추구한다. 그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믿기 위해서 알기를 원하나이다. 알기 위해서 나는 믿습니다.” 신앙과 지해, understanding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가 사실처럼 묶여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잘 믿을 때 초월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서 지해하게 되고 그것을 잘 지해할 때에 믿음이 생겨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기독교에서 지성을 약간 무시하거나 은혜의 대척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개혁주의의 전통이 아닙니다. 지식이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친밀하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저 남자를 사랑한다’라고 할 때 아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 남자를 아는 것이 사랑의 유일한 이유라면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남자를 ‘안다’고 할 때의 안다는 의미와 길 가는 남자를 ‘안다’라고 할 때의 안다는 의미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경험입니다.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희랍어 성경에서 ‘아이스떼시스’(αἰσθήσις) 라고 나오는 명사는 ‘아이스따노마’이 ‘놀라다’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총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을 이야기할 때 추론의 기능이 있고 변증의 기능이 있습니다. 추론의 기능을 ‘라티오’(ratio)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변증의 기능을 ‘인텔리겐띠아’(intelligentia)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의 인과관계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뛰어 넘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성(悟性)이라고 부릅니다. 데카르트 이후에 쓴 오성의 개념과 고전 철학에서 중세까지에 이어질 때의 오성의 개념이 다릅니다. 데카르트 이후에 쓰여 진 오성의 개념은 우리의 감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히려 더 낮추어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이해를 의미합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은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의 오성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총명을 경험 철학을 통해서 밝히는 부분입니다.
‘아이스떼시스’라는 단어를 ‘불카타’(Vulgata)역 에서는 ‘센수스’(sensus)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총명은 직관적으로 아는 것인데 아주 쉽게 얘기하면 총명은 판단력과 관련되는 지식입니다. 지식은 어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고 어떤 사물에 대해서 온전한 지식은 그 근원이라든지 관계라든지 의미 이런 것들을 아는 것입니다. 이 총명은 직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논증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일반총론에서 그 문제를 논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생각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산산이 다 찢어지는 논증입니다. 누구도 모든 사람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도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논증하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식과 이해를 초월하는 전제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 ‘아이스떼시스’를 얻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한 구절을 예로 들어서 읽어드릴 테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아우구스티누스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회심을 했습니다. 도저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니교는 이미 자기가 이성적으로 따져본 결과 말도 되지 않는 교리이고 지성인의 종교가 아니라 우매한 자의 종교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미 마니교에서 마음이 떠났을 때입니다. 어거스틴의 전집을 접해서 그 논쟁사도 공부해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의 양심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백(Confessiones) 8장 11절 27항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남자들과 이런 여자들이 한 일을 네가 못하겠느냐? 그들 중에 누가 자신의 힘으로 했더냐? 하나님의 힘으로 하지 않았느냐? 왜 너는 일어설 힘도 없는 주제에 네 자신을 기대고 있느냐?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너를 맡겨라. 그러면 그 분이 너를 받아서 낮게 하시리라“ 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회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포티치아누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회심에 이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총명은 판단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총명이 결국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이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하나 그려 드리겠습니다. 관건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깊이 계속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신학공부 할 동안? 목회 할 동안?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이 불길이라면 이 사랑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두 개의 장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식과 총명입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떼시스’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보셨습니까? 지푸라기는 옛날에 화장을 시킬 때 도저히 사람이 잘 안 타면 짚을 몇 트럭 가지고 태워서 사람을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불길이 어마어마합니다. 한 트럭을 태워도 불과 한 10분, 20분도 안 갈 정도로 금방 타버립니다. 우리의 사랑은 끊임없이 타오르는 것이어야 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 총명이 없는 사람이, 믿음을 통해서 초월적인 사실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일시적인 사랑의 경험은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쯤은 혹시 담임목사님이 설교하라고 그러면 담임목사님이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로 설교를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몇 달에 한 번 하니까 그렇습니다. 지금도 별로다 그러면 나중에 매주 열 번씩 설교해야 될 때는 더 별로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 불길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이 획득돼야 됩니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획득돼야 됩니다.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 하나만 봐서는 안 되고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 이런 모든 것들의 관계망 속에서의 앎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풍성하게하사” 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페리쉐에’(περισσεύῃ) 라는 단어입니다. ‘페리’(περι)는 둘레입니다. ‘쉐에’(σσεύῃ)라는 단어는 우물 같은 것이 밑에서 솟아나서 경계를 넘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샘 같은 것이 솟아서 테두리를 막 넘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런 고백을 생각하면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신자는 성향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중생과 함께 주어지는 사랑의 성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성향은 가변적입니다. 많이 성화되면 그 성향이 강하게 발현되고 성화가 거의 없으면 거의 없는 것처럼 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발현이 안 되면 그냥 안 되는 게 아니라 육체에 대한 사랑이 발현되어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교만과 음란과 타락과 탐욕과 거짓말 같은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든 죄는 은혜의 결핍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얘기하는 프리바치오 보니의 이름입니다. 그것을 프리바치오 그라치아, 선의 결핍이라는 플라톤의 이론을 이 사람은 은혜의 결핍이라는 말로 바꿔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가 그의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ca) 에서 아주 흥미 있게 다섯 단계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로 신자 안에 있는 성령은 지식과 진리를 주신다. 둘째로는 성령은 사랑이시다. 셋째로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신자를 데려간다. 넷째로 사랑은 올바른 경향을 형성한다. 다섯째로 올바른 사랑의 성향을 가질 때 그는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성향은 결국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결과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아퀴나스의 이 모든 이야기를 설명하면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할 때 지성은 가장 명정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기를 끊임없이 비움으로 명정한 상태로 돌아간다고 얘기하지만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가득 채움으로써 가장 명정한 상태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지혜는 가장 명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탐구하는 목적은 지혜를 갖게 하기 위해서 지식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지혜에 도달하는 모두는 아니지만 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 성향, ‘하비투스 크레덴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잘 믿을 때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잘 믿으려는 성향은 잘 사랑하는 성향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목회의 목적이 있는데 목회의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의 사랑 즉 해 아가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 불길은 지식과 총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물에 대한 지식이 제공되고 잘 믿어서 새로운 판단력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때 이 사랑의 불길은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지금쯤은 성경을 읽다가 한 한 두 주 만에 한번쯤은 펑펑 울 수 있을 정도의 깨달음이 와야 됩니다. 이것이 진리였구나. 거기서 자기 깨어짐이 경험되야 됩니다. 그렇게 신학교를 다녀도 10년, 20년 목회를 하면 변합니다. 누가 그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믿겠습니까?
세 번째로 목회의 목표는 무엇이냐입니다. 첫째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며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입니다. 첫째는 분별함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희랍어가 ‘도키마조’(δοκιμάζω)입니다. 도키마조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은 이미테이션과 실물이 너무 훌륭하게 똑같습니다. 건축자재를 좀 아는 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진짜 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갑니다. 너무 궁금하면 건물주한테는 미안하지만 자동차 열쇠를 꺼내서 살짝 긁어봅니다. 벗겨지고 뒤에 다른 게 나오면 이미테이션입니다. 아무리 파도 똑같다면 진짜 나무입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을 도키마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유의 있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분별력입니다.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서 무엇을 하자는 거냐? 하면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가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원문을 찾아가 보면 사실 이 번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오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은 적절한 해석인데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인가 어떤 것이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결정인 것인가? 신학적으로 어떤 것이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 인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인가? 어떤 것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계속해서 유지가 돼야 되는 것인가를 분별해 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9세기 주석가 뱅겔은 아주 적절하게 해석합니다. “좋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진짜 최선인 것을 선택하는 행위다.” 결국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도 그에게는 선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험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 리니지 게임을 계속 돌리고 있는 이유는 시험공부보다는 이것이 자기에게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즐거움이지만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를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도사님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예쁜 자매하고 결혼하려고 합니다. 자매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지만 능력 있는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미안하지만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혼하려는 형제자매들에게 외모의 유효기간은 6개월이라고 말합니다. 결혼하고 6개월 지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얼굴보고 살 것도 아닌데 뭐하겠습니까? 부부는 사실 얼굴을 처다 보지도 않습니다. 마주보고 쳐다보는 때가 많지도 않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키마조, 판단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에는 분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하게 하는 것이 세 가지 목표를 위해서인데 첫째는 분별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신학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 그릇된 것이 무엇인가 공부하는 이유는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것을 선택하기 위함입니다. 길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지만 짧게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진실함입니다. 사랑이 점점 풍부하게 되어서 3가지 목표에 이르는데 하나는 도키마조, 두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여기에 쓰여 진 단어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희랍어 단어로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εῖς) 라는 여러분도 아는 단어입니다. ‘크리노’(κρίνω)는 판단하다 입니다. 영어에 ‘크리틱’(critic) 같은 단어가 거기에서 옵니다.
앞에 붙어있는 ‘에일리’(εἰλι)라는 단어가 뭐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에일리’가 ‘에일레’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에일레’는 태양빛입니다. 그리스시대 때 고전 그리스 때도 같은데 뭘 받았는데 이것이 진품이야 하고 빛에 비춰봅니다. 그때 이것을 꿰뚫고 비춰오는 태양빛을 ‘에일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에일레크리노스’라는 단어는 ‘태양빛에 비춰서 본’ 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에일레’라는 다른 단어인 ‘채’에서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져서 가루 같은 것을 흔들어서 고운가루는 떨어뜨리고 굵은 가루는 남겨서 채질하는 것입니다. 크기가 서로 다른 사물들이 한 가루처럼 담겼는데 그것을 채질해서 합격된 것은 통과시키고 안 된 것은 남겨두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두 해석의 차이가 큰 차이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 두 해석 둘 다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진실함’이라고 하는 것은 검증을 통해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에 대한 사상을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굉장히 발전시킵니다. 그 사람의 관심분야 자체가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사실 기독교 심리학은 물론이거니와 심리학의 비조라고까지 불립니다. 어거스틴에 대해 연구해 볼 만한 주제는 자아(self)입니다. 거기에 대해 어거스틴의 저작만큼 풍부한 설명을 주는 작품이 없을 정도입니다.
서방 신학자들이 썼던 단어가 ‘베룸’(verum) ‘진실’입니다. ‘베로스’는 ‘참된’이라는 뜻이고 ‘베룸’이라는 단어를 써서 ‘진실’이라고 씁니다. 이 진실이라는 단어는 솔직하기만 한 거는 진실이라고 안 부릅니다. “너 여기 있는 것 훔쳐갔다며?” “그래 훔쳐갔다 어쩔래?” 이것은 솔직할지는 모르지만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결성하는 것은 단순한 솔직함이 아니라 ‘베리타스’(veritas)가 결합돼 있어야 됩니다. 객관적인 ‘베리타스’와 주관적인 참됨이 결합돼 있을 때 이것이 ‘베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래. 훔쳐갔다. 어쩔래?”하고 훔쳐갔습니다. ‘정말 내가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었어’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훔쳐간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은 솔직함은 있는데 진리라는 요소는 없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에게는 진리라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과 마음이 진리에 부합한 상태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진실해질 리도 없고 진실하기를 열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게 바로 신학생들 상에 부정직함이 유행하는 이유고 목회자들이 비윤리적인 이유입니다. 진리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 진실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선택받는 덕목이 아닙니다. 성공, 큰 교회, 대학자, 명예 모든 것을 놓고 한 열 장의 카드 중에 진실을 끼워놨을 때 진실을 고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늘날 같은 시대에 진실은 끊임없는 소외와 고난을 가져올 텐데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인생관 자체가 세속적인 행복관에서 신령한 행복관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진실이라는 덕목을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진실을 능가하는 대목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소외된다면 가진 모든 것은 그에게 기쁨이 될 수가 없고 기쁨이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푸른 꿈을 갖고 신학을 공부할 것입니다. 내가 확률로 볼 때 여러분 중에서 미국과 한국 사회가 주목하는 교회를 할 사람은 여기서 여러 명이 나올 수도 있지만 한 명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그렇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결정해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큰 교회를 하는 사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상과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양상이고 무엇이 본질인가. 양상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잃어버리면 그 물건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원을 많이 갖고 좋은 환경 속에서 이런 저런 명성을 얻고 이렇게 저렇게 쓰임을 받으며 사는 것은 양상입니다. 양상은 우리의 인생에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살다가 죽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 모두가 목회를 하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신학자가 되면 세계가 주목해서 들을 만한 신학자가 되기를 바라고 선교사가 되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실과 바꿀 수 있는 덕목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동료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30년 후에 그 인상이 변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동료에 대한 인상이 ‘왜 저렇게 게으르게 사나?’하면 30년 후에도 비슷합니다. 오늘 정치적인 자리나 계속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30년 후에도 똑같이 그런 삶을 삽니다. 지금 하나님을 찾고 진실해 지기를 몸부림치는 사람은 30년 후에도 그렇게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누가 먼저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 먼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세기 존 오웬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는 자기가 전하는 진리대로 살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며칠간을 잠을 못자고 충격이었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설교하는 진리대로 살 때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이것은 들리는 소리고 이것은 보이는 진리로서 서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칼빈의 언어를 사용하면 천사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사용하시는 이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해서 분별하는 삶을 살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 없이”라고 했습니다. “허물 없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아프로스코프스’(ἀπρόσκοπος)입니다. ‘없다’라는 뜻인 ‘아’(ἀ) 하고 과오, 허물 등의 ‘프로스코스’(πρόσκοπος)의 합성어입니다. 이 구절을 다양하게 해석했지만 저는 크리소스톰의 해석을 가장 표준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가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32) 말씀과 그 다음에 사도행전 24장 16절에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없음을 힘쓰나이다”에서 흠이 없다고 해서 아무런 흠도 절대 없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히브리어에서 ‘타민’(מין) 정도의 뜻으로 쓰여 졌다고 보면 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 6:9)라고 할 때에 상대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없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상적으로 허물이 없다는 뜻 이여야 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올바른 신학이 가르쳐주는 교리의 유용성은 올바른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면 사람들이 수없이 그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라는 게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올바르게 놓았는데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다리와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데 잘못 된 길로 놓여진 다리 둘 중에 어느 다리가 좋은 다리일까요? 사람이 안 건너가는데 둘 다 쓸모없을 것입니다. 개혁신학을 사랑하면서 개혁신학을 사람들의 마음에 너무너무 사랑하고 싶은 예쁜 걸로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불친절합니다. 그리고 논쟁적입니다. 아규먼테이티브(argumentative)합니다. 잘못하면 열매가 없습니다(fruitless). 끊임없이 논쟁만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상적으로 허물이 없어야 하고 두 번째는 윤리적으로 허물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위대한 힘의 두 기둥이 있습니다. 사상이라는 기둥과 윤리라는 기둥입니다. 많은 사람이 두 기둥 중에 한 기둥을 가지고 신학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기둥의 위에 아치가 놓임으로써 이 두 가지 기둥이 견고히 서서 하나님에 문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기둥 윤리의 기둥입니다. 아는 데로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는데 못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을 이어주는 아치가 있습니다. ‘그라티아’, 은혜입니다. 은혜가 이 기둥을 이어주면서 이 두 기둥이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힘으로 작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할 얘기가 많지만 말씀을 맺겠습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렇게 하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지식과 총명입니다. 지식이 논리를 통해 얻어진다면 총명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초월적인 진리의 순환입니다. 후자가 전자를 해석하고 후자가 전자의 해석의 질료가 될 때 이것을 통해서 사랑은 점점 더 치열하게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어디로 데려가고 싶은가 하는 것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분별함 ‘도키마조’입니다. 분별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과 결정적이지 않은 것, 항구적인 것과 항구적이지 않은 것, ‘트루스’와 ‘아디아포라’ 사이를 구분하는 것, 진실함, 마지막으로 허물없음입니다. 아무도 허물없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는 어느 컴퓨터도 결코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습니다. 지구 자체가 곡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면 위에 원을 그린다는 것은 이 땅 위에서는 완전한 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릴 수 없지만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삼각형을 그릴 때 마다 완벽한 삼각형이 존재하면서 그리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삼각형은 완전하지만 이것은 완전의 모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있는) 삶을 사려고 추구하면서, 여전히 허물이 없는 삶을 사려고 추구하면서 여전히 허물이 있지만 그 삶은 훨씬 더 주님의 부르심에 부합한 삶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신학에 있어서 지나친 관용성이나 아디아포라에 대한 지나친 논쟁은 다 소비적입니다. 항상 진리를 찾아서 정확하게 가고자 하는 몸부림이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항상 함께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이 그 뒤에 나오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제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한 두 분만 받겠습니다.
질문1) 분별하고 진실되고 흠이 없는 것이 저희의 본질상 가능합니까? 목사님은 가능하신지요?
답변1)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았다는 게 가능합니까? 누가 본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도사님이나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본받지 않으면 후레자식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다. 부모가 가르쳐주는 대로 못 살지만 무릎을 꿇는 게 친 자식입니다. “네가 뭔데 내 인생에 훈계를 해”라고 말하면 칼빈의 표현에 의하면 후레자식입니다.
우리가 분별하고 진실하고 허물없이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신자가 가지고 있는 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이외에 도덕적인 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이행적 선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날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간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갈 때 저기가 목표라는 것을 또렷하게 새기고 달려가면 가끔은 이렇게 가도 결국은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다시 방향조정을 해서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가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신앙입니다.
질문2) 목사님께서 쓰신 게으름이라는 저서에서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사명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목사님께서 하루를 사용하시는 원칙이나 기준들, 실제의 우선순위가 궁금하고 실제로 바쁘신 가운데 여러 가지 사명들을 균형 있게 감당하시는 실생활적인 지혜를 묻고 싶습니다.
답변2) 좋은 것을 이야기하면 자랑이 되고 나쁜 것을 이야기하면 창피합니다. 제가 여러분처럼 신학교 시절이었던 때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매우 매우 건강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록이 48시간 동안 무수면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22시간 동안 위에 물 한통, 빵 하나, 밑에 요강을 두고 일어나지 않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17시간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읽었는데 역시 물 한통, 빵 하나, 요강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강상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메뚜기도 한때입니다. 그런데 그 규칙은 여전히 저에게 사라지지 않는 지침입니다. 지금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지금 게으르면 나중에 나이 드셔서 부지런해야 될 텐데 그때는 부지런해지기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 올 것입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온전한 삶을 사려고 기도, 성경탐구, 학문, 심지어 전도, 목회, 영혼을 돌보는 모든 것, 교회 가서는 학교 핑계하지 말고, 학교 가서는 교회 핑계하지 말고, 집에 가서는 교회와 학교 핑계하지 말고 살 때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면 도저히 그렇게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면 항상 나오는 게 눈물입니다.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내가 살고 있는 삶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길을 가게 만들고 우리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살면 매우 불행한 노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됩니다. 열렬하게 기도하고, 열렬하게 공부하고 모두 목회를 하셔야 됩니다. 목회를 하라니까 부목사로 가라는 건가? 아닙니다. 지금 공부하는데 그렇게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사를 하십시오. 한 반이라도 맡아서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 눈물 나는 영혼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자체가 신학입니다. 그것이 신학을 형성하게 만들어 준 모루 위에 놓인 시뻘겋게 달군 쇠를 두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 영혼들을 잘못 돌보고 있구나. 이런 양심의 가책이 이것을 두드리면서 그 사람의 인간성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다행이 제가 여기 책을 두고 갑니다. 한 오 년에 걸쳐서 2,000페이지를 썼는데 그 중에 700페이지를 먼저 출간한 것입니다. 이것을 읽으신다면 여러분들의 시간의 낭비를 좀 줄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넓게 많이 공부하십시오. 그렇게 공부하다가 학교에서 응급실로 실려 나가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면 당신을 그런 적 있냐고 묻는데 저는 MDiv 시절에 두 번 실려 나갔습니다. 그 정신이면 됩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