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 이대중, 백지영, 이새봄
저는 오늘과 내일에 걸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강의를 하고자 합니다. 7시간 동안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어떻게 강의를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제가 어떻게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나게 되었는지 강의를 하고, 마지막 시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내일은 세 시간에 걸쳐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랑, 아름다움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려고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테크니컬 스칼라(technical scholar)는 아닙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저 혼자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20년에 걸쳐서 아마 두세 권 설교집을 빼놓고는 모두 읽었으며 노트로 정리를 했습니다. 지금은 관심사가 에드워즈보다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만, 오늘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테크니컬 스칼라가 아니라 목회자로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서 오히려 목회적인 적용점이 있는 해석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교회, 에드워즈와 나의 학문, 에드워즈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갈등 다른 학문들의 도움,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배울 점을 강의하려고 합니다. 역사에 대해서 필슨 교수님이 어제 강의를 하셨다고 하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에드워즈의 사진을 보시면 이것은 에드워즈의 생가, 에드워즈의 부인, 에드워즈가 시무했던 노댐턴 교회인데 당시 동부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생애는 이미 배우셨다고 하니 이 정도로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학이외 교육학과 철학 쪽에서는 이미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들이 부분적으로 있었는데 신학 쪽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 교회에 소개된 것은 전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덕분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이 로마서 강해부터 번역이 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신학교 다닐 때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한국에 오신 적은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에 오셔서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 분이 자기 책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거의 극찬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강의안에서 보시면 11페이지에서 퓨리탄 오리진 앤 석세스(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라는 책에서 웨스트 민스터 세미나에서 한 것인데 “두렵고도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나는 에드워즈를 다니엘 로랜드보다 조지 휘트필드보다 앞에 두어야겠습니다. 정말이지 어리석을지 모르지만 저는 청교도가 알프스 산맥, 그리고 루터와 칼빈이 히말라야 산맥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보다 더 이상의 극찬의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마틴 로이드 존스가 에드워즈의 전집 전체를 읽었을 지에 대해서는 약간 주저합니다. 영국의 엘티에스 학교에 갔을 때 거기 윌리엄스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분도 역시 동일하게 에드워즈와 마틴 로이드 존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저의 의견에 동의를 표명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마틴 로이드 존스가 극찬한 사람이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조지 마스튼 교수님은 이분을 어떻게 평했냐면 “미국이 배출한 모든 학자들 중 더 그레이티스트(the greatest)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에 저는 이분의 사상을 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에서 접했습니다. 에드워즈가 한국에 알려질 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의해서 알려졌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의 줄거리는 청교도였습니다. “청교도 신앙이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관심은 사실은 에드워즈의 철학이라기보다는 그의 하나님의 거룩하심, 영광, 그런 우주적인 비전 이런 것들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이분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영국에 있는 청교도 책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회사인 파나로브 투르스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웍스(works)를 소개하는 두 권의 두꺼운 책 때문이었습니다. 돋보기로 봐야할 정도로 아주 작은 글씨이며 각주는 더더욱 작은 글씨입니다. 이 책은 지금도 아마존에서 판매를 하고 있는데 저는 이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마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고서방에서 이 책을 얻은 것처럼 저도 이 책을 어디서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관심사는 영적 부흥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가 1930-1940년에 시작되는 소위 위대한 영국의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을 받는데 부흥에 관한 에드워즈의 많은 저작들이 이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때에 저는 청교도와 부흥에 깊이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 글들이 생수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이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 큰 관심사가 없었고 회심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부흥이라든지 이런 역사 기록들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까 보여드린 것은 일체의 비평 없이 그냥 모아 놓은 것이어서 오류와 오자가 많습니다. 에드워즈의 전집을 예일 대학에서 만들었는데 온라인상으로 칠십삼 권인데 실제 출판된 것은 이십육 권입니다. 연락해 보니 더 이상의 출판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약 오십 권 정도는 저작으로서 가치가 없을 정도로 그냥 메모하는 정도의 더미였습니다.
에드워즈가 많은 책들을 저작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읽기에는 뛰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백년 전의 영어라는 것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 영어는 매우 어려운 영어입니다. 물론 존 오웬보다는 쉽습니다. 존 오웬은 과장하면 영국 사람도 읽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17세기 청교도를 공부하면 2개 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어와 17세기어, 이것을 다른 언어로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존 오웬의 언어보다는 쉽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는 라틴어가 바탕이었기 때문에 문장이 라틴어처럼 매우 길고 책을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열심을 가지고 집요하게 파지 않으면 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에드워즈와 저는 그렇게 에드워즈의 영적인 부흥을 다루는 글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집 중 몇 권을 빼고 20년을 걸쳐서 대부분 읽었고 집중적으로 읽은 시기는 한 7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 논문 쓸 때만 해도 에드워즈를 열심히 읽었는데 요즘은 다른 책들을 보느라고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공부 방법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의 책을 왔다갔다 읽는 것보다 훨씬 통일된 견해를 갔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그렇게 공부를 한 사람이 네 사람인데 존 오웬,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어거스틴입니다.
제가 여기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주요 저서를 모두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 중 제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고 싶은 책은 미셀러니(The Miscellanies)입니다. 미셀러니는 사실 완성된 책이 아닙니다. 에드워즈는 아침에 산책하다가 메모를 하고 옷에 핀으로 꽂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옷에 붙은 그 메모를 떼어 줄 정도로 메모광이었습니다. 미셀러니는 세 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우 두껍고 에드워즈 저작 전체가 약 일만 팔천 페이지 정도의 분량입니다.
미셀러니는 성경만 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지나가다가 ‘하늘이 아름답다’라고 하면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 역사, 철학, 문학, 자연과학 심지어 중국 고전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쓰였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막 적는 것입니다. 이것은 파스칼이 팡세를 기록했던 것처럼 나중에 그 사람이 더 오래 살았으면 그것을 꺼내서 책을 쓸 수 있는 지적인 탱크였습니다. 이것의 좋은 점은 자기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하나만을 이야기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추려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미셀러니는 그것이 모두 통째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유가 얼마나 복합적이고 우주적이었는지 특히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다른 학문들의 대해서 얼마나 많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을 때 가장 인기 없는 책이 미셀러니입니다. 그 이유는 어렵고 내용이 토막 토막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것은 한 두 줄짜리도 있으며 긴 것은 몇 페이지씩 이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메모 자체가 마치 한 편의 작은 논문처럼 보이는 것까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으려면 에드워즈가 학문을 했던 그 배경, 에드워즈가 친숙했던 자연과학, 철학, 역사 등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보면 이것들이 너무 아름답고 컬러풀하게 보이는데 그런 지식 없이 보면 너무 지루하고 성경 밖의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16페이지의 세 번째 단락을 보시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에드워즈의 미셀러니는 미학, 철학, 성경, 윤리, 과학, 역사 등의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성경에 대한 자신의 단상을 모은 것이다. 구성의 통일성은 결핍되어 있으나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통해 어느 하나의 주제에 대한 에드워즈의 깊이 있는 사유방식과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에드워즈 독자들이 즐겨 읽지 않는 책이 미셀러니이다. 그러나 사실 에드워즈 사상의 진수는 미셀러니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셀러니는 그의 사상 전체가 뻗어나가는 뿌리와 같다. 나는 미셀러니를 읽으며 그의 사상이 참으로 질서정연하고 폭넓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미셀러니는 나에게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들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었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모든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통합적인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미셀러니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다음 유명한 책이 구속사라는 책입니다. 이것은 제 구 권입니다. 어 히스토리 오브 더 웍 오브 리뎀션(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입니다. 이것은 연속 설교를 모은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역사 서술이 전 집에 두 편이 있는데 구속사와 구속사의 저술을 위한 노트입니다. 구속사는 설교로 이루어진 책이며 노트는 그야말로 메모해놓은 노트입니다. 구속사는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는 책인데 한 마디로 얘기해서 구속사는 성경 신학입니다. 어떻게 천지창조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족장들의 역사,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 신약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전개되어 왔는가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이한 점이 뭐냐면 대개 우리들이 history of redemption이라고 할 때에는 대부분 신약에서 끝나는데 이 분은 자기 직전의 시대까지 끌고 와서 해석을 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신약성경이 쓰여진 이후에 변증가들의 시대, 박해의 시대,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시대, 공인되고 국교가 된 시대, 그 이후 중세의 시대 이런 식으로 종교개혁 시대 이후까지 끌고 옵니다. 저자가 18세기에 살고 있었는데 거의 17세기까지 해석을 합니다. 이것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 해석이 너무 독단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망하고 기독교가 번창했던 지역이 이슬람에 의해서 점령당한 것들을 모두 구속사로 해석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와 이성주의 시대로 넘어 온 것을 전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자의적이라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해석을 우리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지금 역사가 흘러간 다음에 보면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과감하게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성경에만 멈추지 않고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고 좌절되는 것 같지만 이어지는가 하는 것을 아주 웅장하게 설명했다고 하는 점은 감히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했던 그런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어거스틴의 신국론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신국론에서도 자기 시대까지 다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라는 구도를 가지고 “당시의 로마제국이 멸망에 접어들게 된 것이 결국 기독교인들 때문이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면서 자기 시대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 시대까지 히스토리 오브 리뎀션으로 해석한 것이 전혀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 오웬을 보면서 “천재적이다, 독창적이다”라고 하는데 어거스틴을 보고 나면 사실은 그 천재성들이 또 다른 천재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원천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17페이지를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 서술을 할 때에 염두에 둔 대적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마니교(Manichaeism),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 도나투스 주의(Donatism) 등 이단 또는 이교의 종파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직면해야 했던 적수였고 기독교를 모함하는 로마주의와 맞섰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시대가 바뀌어서 크게 네 가지 사상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소키누스 주의(Socinianism, 극단적 이성주의), 아리우스주의(Arianism, 삼위일체에 관한 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그리고 이신론이었습니다. 이신론은 소외 말하는 하나님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세계와 초월해 계시고 세계를 오직 법칙으로 움직이신다는 사상이 이성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존에 있었던 신론과의 화해의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구속사를 써내려갑니다. 사실은 구속사가 정밀한 역사 서술은 아니고 연속해서 한 설교를 모은 것인데 설교 속에서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면서 성경 전체를 어떤 구속사의 관점에서 봐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들은 사실 이 방면에 대한 책을 모두 남겼습니다. 존 오웬도 소위 말하는 전 집 열여섯 권 이외에 또 한 권의 책이 있는데 비블리칼 테올로지(Biblical Theology)입니다. 원래 존 오웬은 이를 라틴어로 기록했고 나중에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은 탁월한 책입니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펼쳤는지에 대해 쓰여진 책입니다. 존 오웬의 성경적 신학, 어거스틴의 신국론, 에드워즈의 구속사 이 책들은 모두 같은 구도로 쓰여졌다고 보면 됩니다.
17페이지 맨 하단을 보시면 칼 트루먼 교수가 지적했듯이 오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8페이지에는 첫 번째 문단에 “에드워즈는 구속사에서 오웬과는 대조적으로 성경 자체의 진술에 따라 언약을 근거로 하나님의 경륜을 해석했는데 그의 관심사는 경륜의 시대적 다양성 보다는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완성으로서의 구속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행위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계시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해석은 성경시대를 넘어 당대에까지 해당되었다. 이 역사해석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묵시적인 해석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내가 성경을 넘어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해석하는 철학적 안목을 지지하게 된 것은 그의 창조 타락 구속과 완성을 바라보는 신학의 우주적인 성격 때문이었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사실 존 오웬보다는 내용이 쉽습니다. 존 오웬의 책은 꽤 두꺼운데 750페이지 정도 되는 책에서 그리스 시대의 문헌과 라틴 시대의 문헌 약 500권 정도가 동원됩니다. 그것을 보면 오웬 전집을 보면서 느끼는 오웬과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나 인문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웬의 성경적 신학은 구속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흐르는 강 위를 경비행기를 타고 날면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면 에드워즈의 구속사 작품은 강 위에 배를 띄우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사상의 친밀함은 에드워즈의 작품이 더 많이 보여준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존 오웬의 작품은 그 전체를 역사, 철학, 사상, 문학 이 모든 것을 통합하여 하나님 구속의 아름다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사상들이 어떻게 잘못 흘러갔는지를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했던 수많은 고전들을 동원해서 설명하면서 성경의 구속사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들에게 좀 낯설 수도 있는데 과학철학입니다. 이 과학철학은 에드워즈 전집의 6권입니다. 제목이 사이언티픽 앤 필로소피컬 라이팅즈(Scienc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입니다. 직역을 하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저술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오늘날 영어로 번역한다면 필로소피 오브 사이언스(Philosophy of Science)입니다. 즉, 과학철학입니다. 과학의 현상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책은 잘 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과학을 알아야 하며 수많은 도표들이 나옵니다. 신학공부하면서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지겨울 수 있습니다. 수학공식도 나옵니다. 저는 인내심을 가지고 모두 읽었습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학자인데 왜 이런 글을 썼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미국은 문화 후진국이었고 당연히 유럽이 주무대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 사대사상이나 반감을 가지고 있듯이, 미국, 당시의 뉴잉글랜드도 그런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을 했고 에드워즈는 1703년생입니다. 53세까지 살았으니까 독립하기 전에 에드워즈의 생애는 끝납니다. 즉 뉴잉글랜드 시절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조들이 이 미국 땅을 강타하면서 기독교신앙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뉴토니즘(Newtonism)이었습니다. 에드워즈가 과학철학을 쓰게 된 것이 뉴토니즘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즈가 그 당시에 뉴토니즘을 왜 문제시했냐하면 뉴턴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서 공부만 하고 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뉴턴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데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졌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사람이죠. 이 사진이 바로 뉴턴의 사과나무라고 하는데 진짜 그 사과나무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전에 배경이 있습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출현합니다. 데카르트는 17세기의 사람인데 데카르트가 새로운 사상을 내놓습니다. 데카르트가 사실은 철학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입니다. 에르고는 라틴어로 therefore ‘즉, 그러므로’라는 말입니다. ‘코기토’는 ‘내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숨(sum)은 라틴어로 ‘I am’ ‘존재한다’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기타레(Cogitare)라는 라틴어 원형은 그냥 생각한다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에게 어떤 정보로 들어오는데 우리가 과연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아주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해서 예쁜 단풍을 본다고 했을 때 색맹인 사람의 눈에는 이것들이 쓰레기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략 거무죽죽한 빨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철학에서 묻는 질문이지만 원래 그 나무는 무슨 색이었을까 과연 그것을 조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유명한 방법서설이라는 책을 쓰는데 이 책은 어떻게 우리들이 학문을 할 때 진리를 탐구할 때 어떤 자세로 그것을 받아드려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학문 방법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에 영향을 주는 아주 중요한 책이 됩니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리해서 요약을 한다면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의심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하다.” 이것이 이 명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중에 학자들이 데카르트의 독창적인 명제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약 천 이백년 전에 이미 벌써 이런 말을 합니다. “시 팔로르 에르고숨(Si fallor ergo sum)” “내가 오류에 빠진다면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똑같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집요하게 데카르트에게 연관성을 물었으나 명확하게 답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내가 비록 오류에 빠지더라도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나는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데카르트주의와 어거스틴주의는 상당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면 예전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저 위에 높은 진리가 인간 바깥에 있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끊임없이 나의 생각과 모든 것들은 비평을 받는 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도 많은 해석이 필요한데 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그 정도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으로 사상적으로 길을 열고 중요한 철학적인 관점이 인식의 대상에서 인식의 주체인 자기로 옮겨가게 됩니다.
자기가 어떻게 그것이 진리인지 아느냐 하는 것은 데카르트가 소위 얘기하는 영혼진리창조설로 얘기합니다. 진리가 저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진리 때문에 인간 안에 진리가 들어오고 그것에 의해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알 수 있는 존재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게 이 뉴터니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면 데카르트 이전까지는 뭔가를 발견해도 항상 그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그것은 발견된 것이고 확실한 것이 아니었는데 데카르트부터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파악한 그것이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장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어마어마한 물질문명은 데카르트의 기여 덕분이라고 믿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믿을 만 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법칙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에도 똑같은 조건에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과학자로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확신을 가지고 법칙으로 설명한 사람이 뉴턴입니다. 뉴턴은 사실 미적분을 최초로 만든 사람입니다. 수학에서 미분과 적분의 발견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미상수학이라든지 아주 복잡한 많은 수학들이 기본적으로 미분과 적분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미분과 적분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여러분도 미분 적분을 배웠지만 적분은 곡선으로 생긴 물체의 부피를 알기 위해서는 물을 부어서 아르키데메우스의 원리를 적용해서 측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그 모양에 대해 수치를 도입해서 적분으로 돌리면 좌표상에서 체적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헤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공식적인 발표에서 뉴턴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 사람이 자기 것을 빼앗겼다고 논쟁도 벌였는데 결국 알고 보니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따로 따로 미적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 발표가 늦었고 뉴턴의 발표가 빨랐다고 보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이 인류 역사 전체에서 영향을 끼친 열권의 책 중 한권을 저술합니다. 프린키피아(The Principia) 라는 유명한 책인데 원리라고 번역이 되는 책입니다. 여기 도서관에 아마 이 책이 있을 테니 나중에 한번 만져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전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열 권의 책 중에 하나입니다. 프린키피아의 부제가 무엇이냐면 자연현상의 수학적인 원리입니다. 자연 속에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 즉 예전에는 천둥과 번개 등을 신이 노하셨다고 생각했고 갑자기 햇빛이 들면 신이 기분이 풀어졌나보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인간은 끊임없이 미신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뉴턴은 이것을 모두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것을 실제로 실행을 해서 수많은 자연 현상들을 수학으로 해석을 했고 그것을 모은 것이 프린키피아입니다.
뉴턴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책이 지성인들 사이에서 읽히기 되면서 기독교 신앙에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게 됩니다. 먼저 교회의 권위가 실추하게 됩니다. 교회가 무지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전권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항상 하나님과 관련을 시켜서 해석을 해석해왔었습니다. 뉴턴이 구라파를 설득하고 그 물결이 당시 시골이었던 뉴잉글랜드까지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곳 사람들은 지성적으로 말하자면 약간의 사대사상이 있었습니다. 저 본토에서도 다 각광을 받고 모든 학자들을 설득시킨 이 사상인데 우리가 이제 그것을 받아들임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뉴잉글랜드가 어떠했는가 하면 우리가 흔히 미국이 기독교사상으로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을 비롯한 건국을 이루었던 위대한 사람들이 전부다 한결 같이 이런 사상을 받아들인 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연방대법원에 가보면 하얀 건물에 많은 성인들의 상이 서있는데 중앙 왼쪽에 점잖게 들어와 있는 낯선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공자입니다. 저는 그 당시 컨퓨셔니즘(Confucianism) 공맹사상이 중국에서 바로 들어온 것이 아니고 구라파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시대에 이미 중국의 사서삼경이 모두 영어로 번역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실제로 논어, 주역을 읽었습니다. 그 책들은 미국에서 발간한 책들이 아니라 그 당시 유럽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책들이라고 봅니다. 그런 사상을 물려받으면서 소위 얘기하는 대동사상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성하고 완성된 사람에 의해서 완성된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는 대동의 원리를 국가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을 기초로 헌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아무튼 그런 사상이 들어오니까 ‘여태까지 알고 지내왔던 하나님의 섭리라는게 모두 법칙이었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세계 전체에는 하나님은 없고 법칙만 있다는 광범위한 호소력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지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1722년에 말을 타고 산책을 하다가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어마어마한 회개를 하게 되고 하나님의 탁월하신 위엄과 영광을 보면서 이 사람이 칼빈주의자로 돌아서는데 그도 표준적으로는 경건하였지만 그 시대의 물을 먹은 사람이었고 아르미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과학의 엄청난 물결이 계몽주의라는 것을 몰고 들어오면서 미국을 강타하게 됩니다. 이것이 해일처럼 밀려와서 지성인들을 확 떠밀려가게 만드는 것을 에드워즈가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뉴터니즘이 나왔지만 여러분들도 이게 뭔지 잘 모르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지금처럼 교육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 이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우리 중에 프린키피아를 한 권 다 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 과학철학을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에드워즈 전공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예일 대학에서 교수들과 얘기했는데 그 교수들도 이 책을 읽지 않았었습니다.
그 당시에 새로 나온 사상인 뉴터니즘이 엄청난 영향을 준 것입니다. 진화론과 뉴터니즘 이 두 개가 계몽주의의 두 기둥이 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사실 신학까지 들어오게 되어 결국은 이스라엘 종교의 해석과 문헌 비평에도 사용되게 됩니다. 그것이 심지어 복식사, 요리에까지 모두 사용이 되고 테제(These)들을 만들어내서 기본적으로 복잡한 여럿으로부터 단순하고 논리적인 하나로 발전하는 것 자체가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진화론적인 전제를 가지고 보면 모세오경시대의 유일신론이 나오는 것은 분명히 나중에 만들어진 것을 거꾸로 나중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마치 용비어천가를 쓴 것처럼 미미한 가문에서 이성계가 나와 나라를 건국하니까 조상들을 전부 신적인 존재를 만들어 거꾸로 집어넣은 것처럼 말입니다.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입니다.
뉴턴주의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에드워즈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든 올바르게 해석을 해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독려하게 되는 쪽으로 해석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당시에 뉴터니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열여섯 살 나이에 자연과학에 대한 논문을 영국에서 아주 수준 높은 학술지에 발표한 그 기록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과학자로서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란 없다. 결국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물과 사물사이의 법칙이다. 결국은 그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법칙 속에서 움직이면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러한 것은 결국 어떤 사물의 전권과 후권 사이에 있는 관계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정체는 결국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 전체를 움직이는 게 결국 에너지 즉 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과학이 결국 못 밝혀내는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을 못 밝혀내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사고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힘이라고 하는 것이 작용하면서 어떤 사물의 전권과 후권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변화입니다. 여기 있는 이 물건이 이쪽으로 간다면 이것과 이것 사이에는 힘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결국은 세계 전체에 힘 밖에 없고 그 힘이 움직이면서 모든 것들이 순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그리스시대에 있었던 고민이었습니다. 1417년에 고서상인 폼포나치(Pomponazzi)라는 사람에 의해서 한 권의 책이 발견됩니다. 그것을 많은 학자들이 르네상스시대의 기점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주전 2세기 쯤 되었을 때 나온 책인데 그 책 이름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유럽이 기독교화되면서 로마시대에 금서가 되어 매우 위험한 즉 우리나라라고 보면 박정희 시대에 자본론 같이 가지고만 있어서 파문을 당할 정도의 되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어느 수도원에서 곱게 숨겨져 오다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게 이천 이백 년 전의 책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 책 내용의 핵심은 기계론적 세계관입니다. 마치 사물의 본성이라는 책을 보면서 15세기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그 후에 뉴턴의 책을 보면서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데 한 마디로 신앙을 다 쓸어버리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버리게 된 것이 다른 요인도 있었지만 한 장의 도표 때문이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하면서 나온 포유동물의 배의 발생에 초기에 관한 도표였습니다. 돼지, 원숭이, 사람, 모두 배의 발생 초기에는 똑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게 밝혀지게 됩니다만 그 도표 한 장을 보면서 ‘기독교가 우리를 속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깊이 회심하고 경건의 뿌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 속에는 빗자루로 쏴악 쓸리듯이 무너져 가는 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도 그런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에 의해서 점점 신앙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에드워즈가 다소 뜬금없이 보이지만 신학을 하는 사람이 뉴턴의 과학서적을 놓고 하나하나 비평과 설명을 하면서 그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 문제가 사실 에드워즈의 신론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신론 문제가 뭐냐면 들어보셨겠지만 범신론, 내재신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판엔디이즘(Panentheism)인데 ‘판’은 ‘모든’, ‘엔’은 ‘그 안에’, ‘디이즘’은 ‘신론’입니다. 즉 ‘모든 만물 속에 신이 있다’라고 보는 사상입니다. 에드워즈는 판엔디스트로 몰려서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에드워즈의 시대를 고려하면 왜 에드워즈가 그렇게 위험할 정도의 표현을 썼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명확히 얘기하는 바는 결국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관계가 있는데 그게 힘의 관계이다. 그럼 결국 법칙 밖에 없지 않느냐, 결국 그 법칙은 힘이 작용하는 원칙인데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그 사물 속에 작용하는 힘 자체가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사물 속에 있을 수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고전적인 하나님과 세계 물질사이의 관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 속에 있다’라고 말하면 안 되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라는 것은 허용됩니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술입니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하나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니 말이 안 됩니다. 성경에서도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화이트 헤드 같은 사람은 과정철학자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 자연이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를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설명을 합니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든 만물 속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당시에 과학이 들어오면서 결국은 극단적인 초절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없고 저 하늘에 계시고 이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분이라는 방어막을 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결론이 내려오게 됩니까? 사람들의 삶이 사뭇 전통적인 경건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멀리 계신 타자이고 세계는 법칙 속에 움직이니까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굳이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미신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관계보다) 법칙에 순응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인 사랑 이론은 인도주의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던 사회이니까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에드워즈가 보통 강도 있는 표현을 쓰지 않고는 이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어려운 그런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에드워즈가 과학철학에서, “모든 만물 속에 법칙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역으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용도에서 과학철학을 써야 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이러한 것들을 터득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8페이지를 보십시오.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입니다. 여기서 철학이라는 말이 지금은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이게 우리로 말하자면 학(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자연학의 수학적 원리,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데카르트의 관심사는 인식의 주체인 인간입니다. 설명방식을 인과관계로 설명을 합니다. 이게 계몽주의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뉴턴은 인식의 대상인 자연이 관심사입니다. 그 다음에 수학적 법칙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주의로 이어지면서 이 두 개가 함께 결합을 하면서 무신론과 이신론(理神論)으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신론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주 복음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신론입니다. 그래서 타드 빌링스(J. Todd Billings) 같은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치유적 심리적 이신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고 법칙 속에 살아가지만, 법칙 속에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치료를 받고 그 다음에 다시 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이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성애나 이런 것에 대해서 훨씬 엄청난 포용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까지 한번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칸트하고 데카르트는 사물의 인과관계고,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회귀를 하게 됩니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칸트는 수학적인 법칙을 이야기하고 법칙 중심적이고 그 다음에 만물간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에드워즈는 이 둘을 모두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사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면서 무엇을 중심으로 하느냐 하면, 인식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법칙 속에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까 설명한 것과 똑같습니다. 결국 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폐쇄적인 세계관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이게 다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아주 그 그물이 촘촘해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실은 자연과학에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선두주자를 가고 있지만 그 어마어마한 우주과학의 발전이라든지 무기의 발전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저런 폐쇄적 세계관에 덕 입은 결과입니다.
그런데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미안합니다만- 이 폐쇄적인 세계관이 사실은 아인슈타인 때를 기점으로 해서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철학사는 수학하고 관측하는 자연, 그 다음에 자연관측, 그 다음에 수학,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이전에도 이미 그런 고민을 했지만, 그때 대두가 된 것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개념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가설에 의해서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밝히지 못했는데 그 후의 사람들에 의해서 아예 그 우주를 관측하면서 그게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빛의 개념과 관계가 있고 그 빛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질량의 개념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결국 모든 빛이 모든 조건에서 동일한 속도로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만들어 냅니다. 나중에 슈뢰딩거의 말하자면 고양이에 대한 비유같이 이렇게 복잡한 양자역학적인 사고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광선일 뿐만 아니라 입자일 뿐만 아니라 파동이기도 한데, 그러면 도대체 입자인 동시에 어떻게 파동일 수 있느냐, 그 다음에 파동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는 것, 입자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나오면서 사실은 복잡한 과학이론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학적인 발견들이 사회에 철학과 인간의 삶의 사고의 방식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오늘날의 다원주의를 이야기할 때에는 결국은 과학으로 넘어가서 뉴턴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 와서 설명이 되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닐스 보어(Niels Bohr) 같은 사람에 의해서 깨지면서, 양자 역학 같은 것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 전체가 어떤 고정된 진리 같은 것, 뉴턴주의가 있을 때만 해도 사실 법칙이라도 있었습니다. 법칙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까지 부인하는 사태에 오게 된 것이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이후의 과학까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앞에 나오는 뉴턴에 의해서 들어왔던 이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고 실제적인 신앙의 심각한 위협들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재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해석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물의 인과관계, 수학법칙, 이것 인정한다. 그런데 이 법칙은 결국은 하나님 속에 있는 법칙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법칙이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드는 법칙일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에서 논증을 하는 것입니다. 정밀하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을 다 읽는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저는 어떻게 읽었지만 여러분까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세계 다니면서 에드워즈 연구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최근에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도 만났는데 이 책을 읽었다는 사람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쓴 논문도 별로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다 보기는 짜증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과학자는 아니지만 그 과학해석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는 그 과학적 진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을 이미 뒤덮었고 미국을 뒤덮고 있는 그런 인식론의 토대가 되는 사상에 타협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맞서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서있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려고 몸부림쳤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읽었으면 아마 우리가 지금 읽는 것처럼 황당하다는 생각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하는 것은 이 6권을 다 읽지 말고, 시간낭비입니다. 그러니까 한 꼭지만 딱 찾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도표하고 설명을 수학공식하고 들으면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어떤 식으로 이 사람이 접근했는가? 이 책이 나에게 준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과학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과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설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의해서 설득되면서 사람들이 결국은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것을 읽으면서 엄청 도전을 받았던 것이 과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과외선생을 불러놓고 천문학에 대해서 한 1년 동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하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 정도로 정리를 하고, 그리고 다음번에 나오는 게 아마도 에드워즈의 작품 중 가장 영향을 현실적으로 많이 끼친 책입니다. 윤리학이라는, 정확하게 말하면 윤리적 저술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0분만 쉬고 계속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에드워즈의 책 중에서 아마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 8권일 것입니다. 그 8권이 윤리학적 저술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Ethical Writings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세 논문이 합쳐져서 한 권의 책을 이룹니다. 첫 번째가 천지창조의 목적, The end of the world in which God created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고, 두 번째 논문이 The Nature of True Virtue라는 책이고, 세 번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장 많은 부분이 The Fruits of Charity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은 제가 2013년도인가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석사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에서 초청을 받아서 강의를 했던 것입니다. 원래 영어로 쓰여 졌었는데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서도 제가 쓴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모든 책을 거의 읽었는데 그 13장만 안 읽었습니다. The Fruits of Charity, 사랑의 열매라는 책만 안 읽었습니다. 안 읽은 이유는 저 나름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쓰고 싶다는 뜻에서 안 읽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저는 33회에 걸쳐서 설교를 했고, 그 책을 기본적인 원고는 가지고 있습니다. 에드워즈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나 나름대로 13장울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의도적으로 안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13장이 정말 대단한 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한 800페이지 정도라고 봅니다. 그렇게 제가 쓰는 과정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이야기 보다 더 사실은 더 훨씬 중요한 게 앞에 나오는 두 논문입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두 번째에 실었습니다. 두 번째 논문이 바로 그 천지창조의 목적을 실은 것이고, 천지창조의 목적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성경을 가지고 천지창조의 목적을 논한 게 1부이고 성경 없이 순수한 이성으로 논한 것이 2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논문이 매우 중요한 논문인데 The Nature of True Virtue라고 하는 논문입니다. 이 논문은 직역을 하자면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입니다.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책 내용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담론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매우 매우 중요하고, 에드워즈 책에서 딱 두 권만 읽으라고 하면 무엇을 읽겠느냐 하면 저는 논문 두 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천지창조의 목적, 두 번째 참된 미덕의 본질, 모두 이 8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그게 중요하냐? 결국은 우리들이 흔히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웨스트민스터 catechism에서, 소요리 문답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지만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고 있을까? 특히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에 대해서. 그것을 아주 철학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탁월한 작품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탁월한 작품이고, 혹시 그것을 읽다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영어로 읽을 때는 영어에서 한번 꼬이고, 그 다음에 사상에서 한번 꼬이면서 고통을 주는 논문인데, 그것은 아주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은 결론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냐 하면 로마서 11장 36절 말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하는 것을 주제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이 왜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그리고 이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참된 미덕의 본질은 무엇이 정말 덕스러운 것인가, 그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조국 아메리카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고, 또 훨씬 소시민적인 사람은 “나는 가정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욕먹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정욕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욕을 먹지만, “나는 조국을 위해서 내 신명을 바치겠다.” 그러면 별로 욕 안 먹습니다. 이런 것들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얼마나 허구성을 많이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필요 없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차적인 아름다움, 이차적인 아름다움, 일차적인 선, 이차적인 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움과 덕에 대한 논의도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천재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어거스틴이 다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바다와 같습니다. 어거스틴 아닌 것들이 모두 결국 알고 보면 어거스틴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 바다에서 물이 증발해서 올라감으로서 산에 떨어지고 그것들이 개울을 형성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바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런 식으로 “덕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밝힙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덕의 본질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만고불변의 유일한 기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육욕과 탐욕이고, 거기서 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인도주의적인 덕목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덕목들도 결국 마지막으로는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커다란 질서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에드워즈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무신론, 유신론, 범신론, 그 다음에 만유내재신론, 초월신론, 이렇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같은 것들이 범신론이고, 그 다음에 만유내재신론, 과정철학 같은 것들이 초월신론에 속하는 것입니다. 과정신학도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책을 씁니다. 만유내재신론, 철학자들의 또 다른 하나님, 그래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데 잘 썼습니다. 대체적으로. 그런데 에드워즈에 대해서 좀 인색한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책입니다.
어쨌든 19페이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19페이지를 보시면 윤리학이 나옵니다. 이게 천지창조목적의 표지입니다.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관하여 라는 논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첫 번째 실은 것인데 1부, 2부로 나뉘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게 첫 번째 표지입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인데, 니코마코스가 누구였느냐에 대해서 학설들이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였을 것,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었을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니코마코스에게서 받았거나 니코마코스를 위해서 가르친 Ethics라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게 아닙니다. 원래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은 글을 안 쓰고 아랫사람들이 (그들의) 강의를 들은 것을 풀어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그런 것입니다.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굿(Good)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윤리학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7세기 때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이후에 다음 세대에 16세기 말 17세기로 넘어가게 되면 신학자로서의 자기 역량을 발휘하는 데,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commentary하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롬바로두스라는 사람이 소위 이야기하는 셑뗀띠아(sententiae), 명제집이라는 것을 저술합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기독교 최초의, 최초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중세기독교의 조직신학 책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명제집을 해설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데뷔작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체급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사람들, 롬바로두스가 10세기 때 사람이니까 그 이후의 사람들이 롬바로두스의 명제집을 가지고 비평집을 쓰고 그것에 의해서 신학적 체급을 인정받았듯이, 똑같은 일들이 개혁파정통주의 17세기에 있게 되는데 니코마쿠스의 윤리학을 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개혁가인 피터 마터 버미글리도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이라는 책을 씁니다.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이것을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이 일을 했다는 것은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이 뭔가 불변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만 듣지 말고 일단 한번 읽어보셔야 됩니다. 우선 대충 목차라도 읽어보면 ‘아. 이런 이야기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다루는 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에드워즈의 참된 미덕에 관해서는 덕스럽게 살도록 가르치는데 그 덕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헷갈린다고 보는 것입니다. 특히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뉴턴이 들어오고 이성주의 그 다음에 인도주의 같은 것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대신하면서부터 결국은 인간의 어떤 행동의 절대적인 규범이 되는 덕스러운 것과 덕스럽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제는 매우 말하자면 인간주의적인 이론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충성해서 테러리스트를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테러리스트들은 또 조국을 위해서 충성하는 게 테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은, 선과 악, 선과 악 하는 것들이 어떤 기준으로 정해질 수 있을까? 이것은 철학적으로도 정의라는 문제와도 관련이 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조국인 미국을 위해서 열렬히 싸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그 사람이 있는 이슬람의 어느 국가에는 반역죄를 형성하게 되고 그 사람이 결국은 쫓겨서 도망을 다닙니다. 그 이슬람 국가에 있는 어떤 사람이 그의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덕이었는데, 그 나라의 실정법에서는 중대한 반역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행동들이 어떤 규범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선과 악 사이를 막 오고갈 때, 그때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판단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국가라고 하는 것들이 윤리의 기준을 만들고 자기에게 충성하게 합니다. 그것은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난 정권에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이 되고, 역적인줄 알았는데 그 다음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세상에 다시없을 위대한 일을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렇게 하면서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런 참된 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결국은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가치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논문을 이해하면서 저는 설교의 어떤 새로운 지평들이 열렸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에는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는 것의 모든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무조건 많이 알아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큰 사과 작은 사과 빨간 파란 사과 수많은 사과가 있지만 사과가 나무에 매달려야 되듯이, 이러한 일관성 있는 어느 사상적인 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모든 설교들이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삶까지도. 그래서 통일성 있는 그 무엇이 나오는 것입니다.
강의안을 좀 보겠습니다. 19페이지로 들어가겠습니다. 밑에서 두 번째를 보겠습니다. 두 번째 단락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이 우주에 나타난 자연미를 보여준다면 윤리학은 도덕미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야말로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하나님 중심적인 에드워즈의 사고체계를 보여준다.”
두 논문을 아주 여러 번을 읽었습니다. 가르치기도 했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여러 번 읽으면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참으로 이성적이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판단에 있어서 철학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일판 8권의 윤리학에 실린 가장 중요한 저술인 사랑과 그 열매는 아직까지 읽지 않았는데, 이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21권인 삼위일체론입니다. 원래 이 제목은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가 나오는데 사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는 분량자체가 짧습니다. 그런데 그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를 놓고 해석에 대한 수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서 핵심은 그가 여태까지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삼위일체를 해석하지 않고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을 따랐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도 논쟁들이 벌어지는데, 일반적으로는 크게 이론이 없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동방교회의 설명을 따랐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에 있어서 서방교회의 설명과 동방교회의 설명은 어떻게 다를까요. 여기 보시면 서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 중에서 삼위보다는 일체에서 먼저 시작을 합니다.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신적인 본질인데 어떻게 그분이 세 위격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체로부터 삼위에 대한 설명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동방교회는 시작이 셋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세 위격인데 어떻게 그 세 위격을 가지신 분이 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설명이 더 좋다, 잘못됐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개 철학과 법학이 우세한 학문이었던 서방교회에서는 논리적으로 일체에서 출발해서 삼위로 가는 설명이 존재론적으로 훨씬 맞다고 본 것이고, 또 성경의 진술에도 부합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의 세 위격이라는 개념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그 명제에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이실 수 있는가 이것이 서방교회 방식이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경륜 속에서 역사하실 때 확실하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이 나타나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 우리에게 경험되는 위격적인 하나님을 시작점으로 삼아서 그런 서로 다른 세 위격이 어떻게 하나이신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일체가 될 수 있느냐를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다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방식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은 서방교회의 방식입니다. 각자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일체가 너무 강조되다보니까 사실은 셋이라는 것을 설명할 때 일체라고 모순처럼 느껴지는 방식이기 때문에 보통 설명의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반대로 셋인 하나님, 삼위 세 위격이신 하나님을 설명하니까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굉장히 좋은데 굉장히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미 다 셋이라고 설명을 했는데 어떻게 이분이 하나가 되는지를 설명할 때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을 일체,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고 세 위격이 있다고 보고, 세 위격이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세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1인격 1개체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인격이 되려면 셋이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인격은 그렇지가 않고, 이 인격 자체가 일개 개체를 구성하는 인격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는 인격입니다. 그러니까 relative person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세 개체가 아닌 하나 안에서의 위격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인격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여기서는 셋이신 세 위격이 어떻게 하나일 수가 있느냐를 설명할 때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원래 희랍어로 ‘서로 교통한다’라는 뜻입니다. 세 위격이지만 세 위격 전체가 하나의 신적 본질로 교통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삼위일체론을 내놓는데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이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보는 게 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입니다. 다만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 전체를 어거스틴처럼 서술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여태까지 전통적으로 있었던 삼위일체론에다가 자기 이야기를 좀 보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획일적으로 내려오던 것을 동방교회의 전통을 살리면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오늘날 에드워즈의 신학이 광범위하게 글로벌한 환영을 받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됩니다. 제가 남미는 별로 안 가보았습니다만 유럽하고 두루두루 다녀보면 어느 나라에든지 에드워즈 학회가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칼빈 학회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지침을 주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에드워즈의 연구 같은 것들은 지금 사회의 다양성 문제라든지 인종간의 갈등이라든지 이런 등등의 것들을 해결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을 실제적으로 주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서 지금 긴 설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에드워즈는 삼위일체에서 하나님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는데 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교통의 본질 자체를 성령이라고 본 것입니다. 본질 자체를. 사실은 이러한 사상은 이미 어거스틴에서 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상한 생각 안 드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31절에서도 나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사랑하라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안 나옵니다. 그런 것이 어거스틴이나 에드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 그 자체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을 사랑하라는 말처럼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히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에 대해서 가장 풍부한 설명을 줍니다. 이것들은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체험적인 신학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분의 면모를 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에드워즈의 작품들 가운데 특히 부흥에 관한 작품들, 그 다음에 에드워즈의 전기, 그 다음에 당시 부흥의 기록들을 읽으면 에드워즈가 엄청난 부흥에 대한 경험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당대의 아주 표준적인 정통주의자들보다는 훨씬 더 폭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쪽에서 보면 그의 신학의 약점도 될 수 있지만 또 어떤 쪽에서 보면 그의 신학의 아주 대단한 강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실은 에드워즈를 기점으로 해서 복음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뿌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조지 마스턴 같은 분은 오늘날의 복음주의의 뿌리를 딱 하나로 봅니다. 개혁주의에서 봅니다. 그런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복음주의의 뿌리를 두 가지 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가 개혁주의 전통이고 또 하나가 18세기에 일어났던, 에드워즈 이후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뿌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드워즈 시대에는 이런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에드워즈가 어마어마한 신학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학문적으로 이런 것들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흥이 일어나는 현상들을 개혁주의적으로, 성경적으로 해석을 해서 자신의 신학을 이탈하지 않았는데 이후의 사람들은 이탈을 합니다. 그래서 단일신론에 빠지고 이신론에 빠지고 이러면서 계승자들이 사실 계승을 제대로 잘 못합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 그런 모든 가라지들의 씨앗을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뿌린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까 이야기한 덕(德) 이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에게 모두 완벽한 학문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에드워즈의 그런 평가는 너무 과도하게 인색한 평가가 아닌가, 그리고 덕을 설명함에 있어서 1차적, 2차적 덕으로 나누고, 그렇게 하면서 논의를 바로 잡으면서 성경적으로 결국 모든 덕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덕이 온다는 것들을 설명하는 것은 어거스틴도 설명하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너무 인색하게 비판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미국에서 두 번의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가 1차대각성운동입니다. 1746년부터 한 사년, 오년 동안 있었던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부흥운동인데 사실은 그 이전에 1736년에 이미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1740년에 엠필드에서의 그 유명한 설교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는 그 제목의 설교로 부흥의 물결이 터지게 됩니다. 에드워드 자신도 부흥에는 항상 순수한 것과 순수하지 못한 것이 섞여있고 순수한 부흥이라는 것은 없다고 아주 단정해서 이야기 합니다. 역사적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그냥 물 더럽다고 목욕시킨 아이를 같이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순수한 부흥에는 언제나 그런 것들이 섞여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차대각성운동이 챨스 피니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때에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피니 자신도 그 부흥운동 마지막에 자신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표명합니다. 그렇게 달랐습니다. 피니는 사실은 오늘날 등장했으면 이단으로 정죄 받았을 사람입니다. 원죄, 이런 것을 다 부정했고 심지어 회심하는 사람들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까지 다 부인했습니다. 오류가 굉장히 많은 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부흥들이 2차대각성운동에서 일어나면서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이것이 나중에 미국에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을 흐려놓는 역할들을 많이 합니다. 또 이것이 전 세계에 수출되면서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신사도운동 같은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실제로 1994년도쯤에 토론토 블레싱(Toronto Blessing) 있을 때 내가 직접 갔습니다. 사실 거기 볼 일도 없었는데 내가 직접 가서 한번 현장을 보리라 하고 갔습니다. 매일 가려고 했었는데 가서 첫 시간 하루 참석하고는 이틀째 날은 갈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나중에는 사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라 아주 더러운 영이 역사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막 기어 다니면서 짐승 소리를 내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막 쓰러지고, Holy laughter라고 해가지고 설교시간에 설교도 안 합니다. 간증입니다. 그리고 깔깔깔깔 웃고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 시대 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이라고 봤기에, 죄에 대한 회개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니까 그게 사실 자신들도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이 나중에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사실 너무 짧아서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에드워즈가 생각했던 삼위일체가 무엇이었나를 전체를 구성하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기존에 있었던 삼위일체론을 에드워즈가 받아들였고 특별히 단, 삼위일체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서방교회의 모델보다는 동방교회의 모델을 따랐다고 대개 학적인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내일 설명을 드리겠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에드워즈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성령과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기존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다면 자기가 덧붙일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덧붙였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모자랐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성령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어거스틴 입장에서 보면 에드워즈의 이야기가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령에서. 그것도 이제 너무 지나치게 성령중심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니냐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 20페이지에 나옵니다. 20페이지의 밑에서 두 번째를 보시면 스튜드 바커 같은 학자들은 해석을 달리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에드워즈가 사실은 이렇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설명했다고 예외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논증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스튜드 바커의 논문이 모든 사람에 의해서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스튜드 바커의 이론은 이것입니다. 이것을 서방교회 방식으로 설명한 것인데 사람들이 자꾸 잘못 읽어서 동방교회의 모델을 따랐다라고 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이렇게 설명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서방교회 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문제가 되는 게 하나가 나옵니다. 20페이지에 보면, "확실한 사실이 있다. 에드워즈가 세 위격과의 관계들과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상호사랑의 삼위일체론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아주 오해받을 만한 단어를 씁니다. 그게 triplicity라는 단어입니다. 이게 결국은 삼중성 혹은 셋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어를 가지고 비평가들은 에드워즈가 삼신론자라고 까지 비평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밑에 "사랑, 질서, 관계를 중시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니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 모든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복수성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복수의 위격을 가지신 분이었기 때문에 아름다우셨다고 하는 것이 에드워즈의 미학입니다. 미학적 신학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에드워즈가 또 그것 하나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래서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동방교회의 접근에 훨씬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하지만 접근방식은 달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위격들과의 관계에서 보고 그 안에서 신적 본질의 통일성뿐만 아니라 신적 사랑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동방교회들만의 전통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방식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에드워즈의 삼위일체와 사랑이 어떤 식으로 논리가 이렇게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신자들이 각자 자기가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에드워즈는 그것은 각자의 느낌이고, 원래 원리적으로는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이 중의 하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한 것인데,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고 가르치십니다. 무엇이라고 시작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누구일까요? 1번 삼위일체의 하나님, 2번 성부 하나님.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왜 이렇게 response가 없습니까? 누구입니까? 틀렸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대상도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시는데 그런데 이 아들은 인성으로는 한 장소에 국한해 계시지만 신성으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것은 자기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게 유명한 역사신학에서 나오는 엑스트라칼비니스티쿰의 논의와도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왜? 루터 자신은 그 용어를 안 썼는데 그 이후의 후계자들이 생각하기에, 그 루터가 공재설(共在說)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이 편재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성이 편재한다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속성교리 문제와 관련이 되는데, 그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것을 결국은 엑스트라칼비니스티쿰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의 엑스트라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의 바깥이다, 혹은 칼빈주의적인 그 이외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성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공간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성으로는 모두 교통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성을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어디에나 있는 공유의 방식으로 존재하니까 물질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그래서 결국은 육신으로는 한 장소에 계신데 그런데 영으로는 그러니까 신적 본질로서는 사실은 여기에 계신 분도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그 기도가 당신을 포함한 삼위일체에게 비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케노시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그때에 그것은 케노시스주의자들은 신성자체를 비워버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봅니다. 우리는. 그래서 신성을 비워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런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고, 인격으로 따지면 그것은 인성의 인격과 신성의 인격을 두 개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신의 인격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엔 휘포스타시스와 그 다음에 안 휘포스타시스 두 삼위일체 논쟁에서 나오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엔 휘포스타시스는 문자 그대로 휘포스타시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인격 있게끔 사람의 몸을 입는 것이 엔 휘포스타시스, 인격 없이 사람의 몸을 입는 것이 안 휘포스타시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엔 휘포스타시스를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안 휘포스타시스로서 인성을 입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빌으셨지만 그러나 인간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있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지금 내가 설명한 것까지 그렇게 상세하게 에드워즈는 설명을 안 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교통하시는데 그 교통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게 아니라 그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아들에게 부어지는 이유는 아들이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에게 부어지고, 모든 신자들은 이 아들에게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사랑이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그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설명입니다. 여기서 눈치 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가 삼위일체 하나님, 두 번째는 그리스도, 세 번째는 교회, 네 번째는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 그림이 딱 나옵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에드워즈가 이런 식으로 사랑을 설명했을 때 그것은 로마 가톨릭에서 신의 대비자로서의 교회의 위치 같은 것을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유기체로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가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개인주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처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건 교회건 다 필요 없이 내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함으로써 사랑을 받는다는 이런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겨우 이제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즉,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된 사람들이 갖는 의미가 인간적인 단체의 수준으로 격하되는 것입니다. 겨우 해 보아야 우리보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정도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논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그 아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지고, 그리고 우리는 그 신부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의 교회론은 오늘날의 이런 개인주의적인 사회에 있어서 엄청난 처방전이 됩니다. 그것은 또, 에드워즈의 교회론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저는, 비유를 하자면 에드워즈의 신학이 하나의 성이라면 그중에서 박사를 하신 분들은 그 도시에 있는 한 건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건축학적으로 모든 것을 밝혀낸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도시를 두루두루 여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그 테크니컬한 스칼라들이 그냥 평가하는 것 이상으로 저의 어떤 신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납니다.
저는 사실은 에드워즈 못지않게 존 오웬의 스페셜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방금 회심한 사람이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랬더니 그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성경은 빼놓고 에드워즈와 존 오웬을 다 읽기까지 아무 책도 안 읽겠다고 결심해라, 그러면 너는 반드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렇게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두 개를 다 읽으려면 제가 보기에는 한국 사람으로서 10년 읽어도 못 읽을 것 같은 분량입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합니다. 사람들이 에드워즈에 대해서 듣기만 합니다. 아무리 강의를 듣는다 해도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디즈니랜드 이야기를 실컷 들으면 뭐합니까? 직접 한 번 가서 봐야지. 허나 전 아직 못 가봤습니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한 번 가봤는데 진짜 애들은 거기서 못 나올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니까 대충 보고 가자 그랬는데 말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 이야기만 듣지 말고 그 “김태희가 이쁘다더라” 하지만 말고 가서 한 번 봐야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예쁩니다. 아주 예쁩니다.
그다음에 이제 중요한 책이 또 한 권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신앙정동론』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이것을 『신앙감정론』이라고 번역했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에 쓰인 게 affection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이 affection을 사용할 때도 한 가지 뜻으로 사용을 안 합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를 연구하면서 느끼는 게 뭐냐 하면 그로써리 스터디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많이 읽는 사람이 장땡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understanding이라는 의미를 오늘날 미국 사람을 기준으로, 여기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understanding의 의미와 칸트가 생각하는 understanding의 의미, 로크가 생각하는 understanding의 의미, 그리고 어거스틴이 생각하는 understanding의 의미가 다 다릅니다. 그러면 affection이라는 이 단어가 무슨 의미입니까? 일반적으로 미국 사람들은 affection을 무슨 뜻으로 이야기합니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affection으로도 얘기합니까? 아니죠? affection은 ‘느낌’이긴 한데 ‘애정’이잖습니까.
그런데 에드워즈가 affe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지금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똑같은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심리적인 정동이론을 펼칠 때에는 아주 독특한 의미로 사용을 합니다. 라틴어로 아펙투스(afféctus)인데, 제가 이것을 ‘정동’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제가 15년 전 정도에 이 단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단어는 지금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뭇 다른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고마운 것은 이 단어를 많이 씁니다. 교수들이 논문에서도 쓰고 글에서도 쓰고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이 ‘정동’이라는 것은 그냥 감정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情)이 동(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이 움직인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 이 설명을 들으면 평생 안 잊어버릴 것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비유입니다. 여기 전체가 엄청난 호수입니다. 호수 위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가 물결에 영향을 안 줄 정도로 높이 떠 있습니다. 호수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아주 고요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물결 제로의 상태입니다. 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엄청나게 큰 돌멩이를 떨어뜨렸습니다. 한 봉고 하나 정도 되는 크기의 돌멩이를 정중앙에 떨어뜨렸습니다. ‘슉’하고 내려갑니다. ‘풍덩’ 하고 빠질 것입니다.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연히 파문이 일어납니다. 이 비유에서 (엄청난 호수를) 인간의 감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감정, 정확하게 말하면 감정의 능력입니다. 감정의 능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떨어진 것이 파문이 일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게 ‘동’입니다. 이 바탕이 감정이기 때문에 이게 ‘정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주 독창적인 설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종교적인 경험을 보면서 이것이 진실한 경험인가 거짓된 경험인가에 대해 에드워즈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의 시대에는 가짜들이 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뚜렷하게 회심을 했는데도 1년 동안 세례를 안 줍니다. 그게 진실한 감정인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아주 냉철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설명하는 게 바로 ‘정동이론’입니다.
정동이론은 영어로 religious라고 했잖습니까. religious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종교적인 감정론’이 됩니다. 이게 18세기 맥락에서는 religion이라는 말이 ‘경건’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이야기할 때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religion, 종교의 기독교적인 대강의 책이다,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종교개혁 때를 기준으로 보면 사실은 경건한 것은 유럽 전체 종교 하나와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종교는 하나밖에 없고 경건도 하나입니다. 이교도들이 경건의 모습을 갖고 있어도 그것을 religion이라고 안 본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18세기까지 내려와서 저렇게 이상한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religionis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솔직히 말해서 ‘신앙’이라고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종교’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신앙’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맞습니다. 이래서 이런 제목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 설명한 정동이론에서의 비유를 밝히겠습니다. 각각 뭐에 대한 것인가를 말입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돌멩이는 knowledge, 지식입니다. 지식이고 이것은 cognition입니다. 인식입니다. 이것은 감정, feeling입니다. 결국은 이 객관적인 지식이 주관적으로 인식될 때 그 인식하는 게 무어냐에 따라서 그에 합당하도록 감정이 출렁거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감정이 안 출렁거릴 수도 있습니다. 명백한 객관적인 사실인데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것이면 출렁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 휴지가 있네?” 그것으로 출렁거리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물이 한 통 있네?”라는 것으로 출렁거리겠냐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목이 마른 상태라고 하면? 그럼 출렁거리겠습니까? 안 거리겠습니까?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이 물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보냈어”라고 한다면 더 출렁거릴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뭘 설명하려고 했냐 하면, 그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게 어떻게 이 안에서 경건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해서는 missing link였습니다. 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라”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하는 이야기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어떻게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라고 하는 것을 이 구도를 가지고 에드워즈가 풀어냈던 것입니다. 그 원리가 바로 지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식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영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영적인 것에 대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지식이어야 하잖습니까? 짜장면 얘기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서 사람이 어느 날 회개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지식이 딱 떨어질 때 내 마음에서 그 지식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인식하는 그 작용 자체가 미학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딱 보면서 이 지식을 받아들일 때 정말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많은 여성이 젊은 총각 옆을 스쳐 지나갑니다. 누구에게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아름다운 여성에게 설렐 것입니다. 그것을 설사 본인은 착각했다고 하더라도 예쁘다고 느낀 사람에게 마음이 떨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에드워즈에게 설명하라고 하면 “첫째는 저 여자에 대한 지식, 두 번째는 그것을 네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인식, 이 두 개가 너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감정의 정체를 에드워즈는 ‘영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정, 감정, feeling을 뭐라 규정하느냐면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거문고 줄 같은 게 ‘촥’ 있는데 그때 ‘탕’ 하고 치면 막 떨리잖습니까? 그게 결국은 감정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 줄이 영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냐면 영혼이 뭔지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에드워즈의 천재성을 이야기하는데, 에드워즈가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에서 빌려옵니다. 그게 18세기의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moral aestheticism 운동’, 소위 이야기하는 ‘도덕 심미주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 당시에 접촉했던 위대한 지적 사조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그 당시 17세기를 지나고 18세기에 로컬을 중심으로 하는 영국에서 ‘empiricism’이라고 하는 ‘경험주의 사조’가 출현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 경험주의 사조가 나오기 직전에 romanticism, 낭만주의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낭만주의는 데카르트가 앞길을 다 깔아놓은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해 객관적 존재론에서 주관적 인식론으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관심이 과감하게 자신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리에 대한 연구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게 르네상스와도 연결을 이루고 그리스 시대의 작품과도 연결이 됩니다.
너무 재미있는 것이 석고상이나 아니면 조각 같은 것을 보면 동양에서는 전부 다 동물이나 신을 그립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는 사람에 대한 것이 너무 만연합니다. 그 유명한 다윗상 같은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감탄하고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왜 그렇게 감탄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감탄하니까 감탄하는 것입니다. 조각상이 비율도 안 맞습니다. 손의 비율, 다리의 비율도 안 맞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왜 조각상마다 사람을 다 발가벗겨놓습니까? 그것은 르네상스 이전에서는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다 가보면 다 성인들의 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천사들과 성인들의 상. 그런데 이게 시대가 넘어오면서 과감한 전환에 이르게 되는데 다 벗겨놓고 사람들의 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이 관측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은 관심사가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게 되면 지암 바티스타 바코(Jiambattista Vico)라든지 뒤에 나오는 바흐라든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기서 ‘낭만’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로망’입니다. ‘로망’의 가차(假借) 표기입니다. ‘로망’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정동’입니다. 그래서 이 낭만주의에서 미학이 생겨나게 되는데, 쉽게 얘기하면 그 전에까지는 ‘무엇이 진리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무엇이 예쁘냐’, ‘무엇이 나에게 감동을 불러 일으키냐’입니다. 이것을 보면 관점이 굉장히 이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 미술이나 낭만주의 음악을 보면 중요한 초점이 바흐같이 뭔가 객관적인 질서를 보여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아를 벗어나서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음악의 수학적 원리 같은 것들을 중요시 했다면, 여기서는 내게 아름다운 것, 멋있는 것이 무엇인가,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이행하는 관심사의 한 전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낭만주의와 경험주의에서, 특히 로크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로크가 신학자였습니다. 여러 권의 주석과 여러 권의 신학 책을 저술합니다. 특히 복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신론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존 로크라는 사람이 경험주의라는 것을 일으키고 그 경험주의 사조 속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네오플라토니즘 운동’, ‘신플라톤주의 운동’이라는 것이 다시 18세기에 전개됩니다.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이 한 것이고, 플라톤이 가고 이제 2세기경쯤 되었을 무렵 오리겐과 같은 시대에 플로티누스(Plotinus)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이 플로티누스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것들을 더 심오하게 발전시키는데 초월적인 요소들을 많이 도입합니다. 그때 쓰인 유명한 책이 『엔네아데스(Enneades)』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이 ‘이방인에게서 기독교 조직신학 책이 나왔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주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유명한 제자들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가 오리겐(Origen)이었고 하나는 포르피리오스(Porpyrio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르피리오스는 회의론자가 되고 이 오리겐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두 요소가 다 그 스승인 플로티누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런 플로티누스에 대한 반영이 『원리강론(principium)』이라는 책에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가치가 없는 책이지만 그 당시로 볼 때에는 기독교 신앙을 종합하는 매우 중요한 조직신학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플라톤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왜 일어나게 됐냐면 경험주의적인 학풍이 생겨나면서부터 플라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재밌는 것이 플라톤주의는 사실 기독교는 아닙니다만 이 신플라톤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기독교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거스틴 주의에 부합하도록 가져옵니다. 그게 바로 ‘스콜라 아우구스티니 모데르나(Schola Augustiniana Moderna)’라는 운동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어거스틴 학의 현대’, ‘현대 어거스틴 학’이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거스틴의 심리학과 심리철학에 관한 것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사조 자체로 볼 때 어거스틴 같은 순수한 참된 덕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자들이었고, 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고민을 하게 되는데, 바로 도덕 사회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이 18세기의 모든 지성인들의 이상은 도덕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재밌는 사실은 18세기 때에 중국의 고전들이 유럽에 엄청나게 퍼집니다. 유럽에 있는 많은 사람, 심지어 칸트 같은 사람들, 괴테 같은 사람들에게도 이 중국은 인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났던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온 국민이 철학자인 나라, 그리고 온 국민이 자기 바깥에 있는 도를 찾아가는 나라, 그리고 신이 인간과 일치하는 사상을 구현해서 그 도를 자신의 사회 속에 도덕 사회로 만드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게 이제 소강사회에서 대동사회로 넘어가는, 말하자면 세계적인 비전이라고 본 것입니다.
설명이 좀 길어졌지만 조금 더 드리자면,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도덕심미주의가 일어났다습니다. 이 심미라는 이 주제가 사실은 새로운 어거스틴 운동과 더 큰 사조이던 경험주의, 새로운 어거스틴 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만들고 싶었던 사회는 도덕사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도덕심미주의, moral aestheticism이라고 하는 사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일찍이 플라톤이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왜 사람들은 선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릴까?’ 예를 들어 내일 시험이라고 한다면 학생은 지금 뭘 해야 합니까? 공부를 해야 하고 그게 바로 ‘선’입니다. 그런데 게임에 몰두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공부보다 게임이 예쁘기 때문에 거기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생각에는 가장 성공적으로 moral society를 만드는 비결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예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호소해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공부하는 게 제일 예쁘다고 한다면 데이트도 안 하고 당연히 공부에 올인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구조는 알지 모르지만 인간의 본바탕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tabular rasa’의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직역을 하자면 ‘백색서판’입니다. 유명한 말입니다. 『Human Understanding』에서 존 로크가 ‘tabular rasa’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백지상태로 태어나고 경험에 의해서 지식을 획득하면서 어떤 사람이 형성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적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묻고 싶은 게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될까 말까 입니다. 그게 잘 되면 목회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정직하게 살아” 한마디만 했는데 일생이 딱 그대로 맞춰진다면 한 번씩만 설교하면 되잖습니까. 이게 안 됩니다. 그런데 악하게 사는 것은 학습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악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놔두면 악하게 삽니다. 그런데 선하게 살려면 어마어마한 교육을 퍼부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이 ‘백색서판’의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인데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 로크와 그 친숙했던 사람이 샤푸츠베리(Shaftesbury)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귀족집 안의 사람인데 엄청난 저작들을 남깁니다. 내가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진짜 힘들게 200권 가까이를 수집을 했습니다. 모두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그중에 여러 권 읽었는데 완전히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제와 이론은 우리가 동의할 수 없지만, 그것을 전개했던 방식은 ‘우리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설교를 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람들은 이미 최신 장비를 가지고 인간을 탐사해갑니다. 우리는 그냥 맨주먹으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대단합니다. 제가 아직도 그것을 그대로 복사본으로 제본해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끝난 기간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안 됩니다. 지금도 에코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접속됩니다. 검색하면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그것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영국의 책들을 읽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아마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놀랍게도 에드워즈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영국에 있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노스햄턴(Northampton) 교회를 사임해서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목회자로 청빙을 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안 갑니다. 사실 에드워즈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노스햄턴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그가 거지같이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노예가 6명이었습니다. 5명이라는 주장도 있고 6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환산이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토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에드워즈는 그것을 배워 가지고 와서 ‘사람의 머리로 들어온 지식이 어떻게 이 가슴에서 경건으로 불붙게 되는지’에 적용하여 설명을 합니다. 그 설명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이 『신앙감정론』이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져놓고 보면 재미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신학생 중에서 자기는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프리텐디즘(pretendism), 즉 폼을 잡는 것입니다. ‘자기란 사람은 적어도 이런 것을 읽고 감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이 아닙니다. 혼자서 있을 때에는 굉장히 지루해하다가 남들한테 얘기할 때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강의를 하니까 공감을 격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안 읽었습니다.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20대 때 읽었는데 재미가 더럽게 없어서 덮었는데 20년 후에 읽으니까 감동이 되더라. 그게 『신앙감정론』입니다.
그런데 『신앙감정론』에서 이런 정동이론을 모두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한 miscellany, 아직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거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에드워즈를 읽을 때 권하는 방법은 ‘에드워즈가 구속사를 썼다’고 한다면 그게 구속사에 대한 전부일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miscellany 중에서 구속의 역사에 관한 것들을 찾아서 보충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주고받은 개인적인 편지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들을 모두 찾아서, 최소한 그 세 가지 자료를 종합할 때 그 주제에 관한 에드워즈의 평균적인 견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료 중 하나만 읽거나 아니면 하나에도 절반만 읽거나 두 개만 읽고서 이 이외에 에드워즈는 견해가 없는 것처럼 날을 세우면서 이론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독서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대표적인 Panendeism에 관한 이론도 이 경우에 속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드워즈에게 그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 그러면 결국 내재론자가 아니냐?” 에드워즈가 “그럴 리가 있냐” 하고 설명을 쭉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읽고 에드워즈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가 ‘신앙정동론’의 이야기입니다.
Q) 약간 헷갈려서 질문드립니다. ‘신앙정동론’에 에드워즈가 고민할 때쯤 사조가 신플라톤주의나 도 사상들이 조금 일어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동론이 그 유출론이나 이런 부분들에 영향을 받았다는 겁니까. 아니면 그거와는 별도의 신앙의 방법론인지 궁금합니다.
A) 솔직히 이야기해서 세상에 독창적인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제 친한 교수 중에 한 사람이 칼빈 신학교의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 교수로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입니다. 어디서 들었는데 하버드에서 두 번 콜링을 받았다고 하는데 안 가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강의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네버 세이 네버, 네버 세이 퍼스트(never say never never say first)”, “‘예전에는 결코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도 하지 말고 ‘최초로’라는 말도 하지 말라.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다 이미 나온 얘기이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여기까지는 확인해줄 수 있습니다. ‘신앙정동론’을 세우는데 있어서 소위 이야기하는 파워 이론, 도 이론이 들어갔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확실한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중국 고전에서 중요한 책을 거의 다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확인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에드워즈는 소위 이야기하는 18세기 도덕심미론자들의 틀을 사용하긴 했지만, 결코 그것을 그대로 쓰지는 않고 그것을 도구로 해서 독창적인 설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결론과 목적에 있어서는 도덕심미론자들이 하고 싶은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에드워즈의 목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식의 에센스가 ‘beauty’,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에드워즈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를 설교자가 보여주고 그가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인지를 보여줄 때 사랑은 이동하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가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이야기는 내일 합시다.
그다음 ‘원죄론’이 나옵니다. 이 ‘원죄론’에 대해서는 한마디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사실 원죄에 대한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저술은 아닙니다. 존 테일러(John Taylor)라는 사람이 영국에 등장해서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사실은 페나기우스(Pelagianism)의 재판(再版)처럼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갖게 했고 그게 미국 교회까지 위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이에 대해 한바탕 맞장을 뜬 것입니다. 존 테일러의 주장을 하나씩 논박하면서 밝힙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 부분이 칼빈주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원죄론’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들의 아주 단골 메뉴가 이 ‘원죄론’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이 소망이 없다는 것, 원죄에 완전히 갇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다음, ‘설교집’입니다. 설교집이 굉장히 여러 권입니다. 아마 제 생각에 정확한 권수가 기억이 안 나는데 여덟 권 이상 될 정도로 권수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이 설교집은 정말 안 읽습니다. 더군다나 전공하는 사람들이 잘 안 읽습니다. 설교에 대해서 쓰는 사람은 있는데 그 이외 사람들은 잘 안 읽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론이 어디에 나와?” 그러면 “에드워즈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나 아니면 ‘윤리학 저술’에 나와”라고 하면 뭔가 아우라가 있어 보이지만 “설교에서 들었어”라고 하면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설교에서 들었다고 하는데 ‘그 설교가 과연 신학적인 진술일까’ 이런 의문도 갖는 것이고, ‘자기가 은혜 받고 멋대로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그럴 수 있습니다. 솔직히 『기독교강요』를 읽었다고 하면 나름대로 경력이 될지 모르겠지만, 칼빈의 설교를 읽었다고 한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적으로 absurd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 오웬이나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대가였습니다. 이 대가들이 어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제를 이야기할 때에는 그것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설교에서 이 모든 것들이 만나면서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설교가 장난이 아닙니다. 한 세 시간을 설교해야 할 정도의 분량도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엄격한 원고설교주의자였습니다. 실제로 설교하는 데에 두 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라 그렇게 봅니다. 그때 어느 설교를 읽었는데 거기서는 “첫째로”라고 시작해서 “마흔 한 번째로” 끝납니다. 요즘 다 도망가지,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설교집에 대해서는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는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특히 이 17세기의 사람들, 정확하게 말하면 칼빈 이후의 사람들, 데오도르베자부터 시작하고 저쪽은 멜란히톤부터 시작하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전문적인 방식이고 두 번째는 평범한 방식입니다. 논쟁적인 방식과 대중적인 방식이었습니다.
논쟁적인 방식은 그야말로 신앙논쟁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천지창조의 목적’에 대해 에드워즈가 (안 믿는) 사람들과 한판 붙으면서 다 깨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어록은 아니고 에드워즈의 사상을 요약한 것인데, “설득되어도 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설득되지 않고 믿는 법은 없다”입니다. 그게 결국은 여러분들이 아는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이나 ‘모놀로기온(Monologion)’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이해를 요구하고 이해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 순환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할 때도 설득하면서 이 복음을 전할 때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 설득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그 속에서 나타나는 진리의 빛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 전통을 따라서 두 가지 방법을 똑같이 썼는데, 하나는 논증의 방식으로 전문적인 신학자들만 끼어들 수 있는 논쟁의 방식이고, 설교는 논리의 날이 뭉툭합니다. 뭉툭하면서 훨씬 웅변적이고 교화적입니다. 이것은 칼빈도 마찬가지이고 다 그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설교집이 신학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유의지론’은 한 마디로 얘기해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이 책을 읽고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집어던졌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저도 두 번 읽었는데, “아, 나는 이제 의지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은 10페이지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난삽합니다. 물론 철학을 전문적으로 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쉽겠습니다. 우리는 철학을 했지만 전공자들은 아니니까 매우 어려웠습니다.
에드워즈가 여기 ‘자유의지론’에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그러나 죄성을 갖게 된 다음부터는 결국 인간이 실질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논증의 과정에서 에드워즈에 대해서 쏟아지는 비난 중 하나가 “결정론자가 아니냐”, 결정론은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숙명론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학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각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더글라스 스위니 교수 같은 경우는 전혀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전 솔직히 이야기해서 아직까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거스틴이 던졌던 화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나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나 자유로운 존재다”에 대해서 깊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의지의 자유』라는 책이 있잖습니까? 그것은 잘못 번역한 제목이고 원제가 ‘의지선택의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의지는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절대 자유롭지 않은데,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3대 블랙홀 중의 하나입니다. 또 하나의 블랙홀이 ‘예정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라든지 ‘시간과 영원의 문제’라든지 이것과 함께 3대 블랙홀입니다. 나는 죽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했다’는 사실과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특히 마지막까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예정과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였습니다. 칼빈은 “그게 왜 어렵냐?”라고 반문했지만, 물론 나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설명방법까지는 못 하겠어서 한 3년 동안을 진짜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해결은 했습니다. 그 과정은 또 다른 강좌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없지만, 결론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노예 상태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선택은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악을 선택하면 할 능력이 있는데 선을 선택하면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의지의 문제’는 마지막에 ‘은혜의 문제’로 연결이 됩니다. 은혜가 그 불가능한 것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쓰는 단어일수록 그 근원을 거의 모르고 씁니다. 거기에서 기독교의 힘이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에게 코멘트를 주자면 설교의 파워는 단어의 파워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자주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은혜, 칭의, 회개, 사랑, 질서, 죽음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를 잘 하는 것입니다. 그게 1차적으로는 어떤 이해를 가졌냐면, word meaning, 표준적인 언어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뜻이 아니라 성경에 쓰이던 때에 무슨 의미였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theological meaning, 신학적인 의미가 무슨 뜻인가. 세 번째는 philosophical meaning, 철학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이 세 개를 가지고 있을 때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세워놓고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라 그럴 때, 적어도 아우라가 있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설득될 수 있을 정도로 5시간 이상 정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창세기에서 은혜가 어쩌고” 이런 게 아니라, 은혜의 definition이 무엇이고 본질이 무엇이고 그 은혜가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를 여기에서 쭉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분명히 작게 이야기하는데도 쉽게 거역할 수 없을 정도의 백그라운드의 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가 탁월하게 했던 것입니다.
죄에 관한 이론은 어거스틴보다 더 어거스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Total Depravity를 믿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 책 속에 내가 기록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뭐냐 하면, 에드워즈가 소위 이야기하는 disposition 이론, 성향이론을 이야기합니다. 그 성향이론이 에드워즈 안에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그게 맞았냐 틀렸냐에 따라서 학계에 논쟁이 분분합니다. 그런데 성향이론을 밝히면서 굉장히 많은 설득력을 한 시대에 줬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상현 박사라고 한국 사람입니다. 프린스턴에 오래 교수로 계셨고 아주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미국 에드워즈 학계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의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에 에드워즈 해석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상현 박사의 의견에 동의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 disposition 이론에 따르면 그 자신론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존재가 있고 존재가 경향성을 갖는다’라고 봤는데 에드워즈는 ‘존재 자체의 본질이 경향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경향성’과 ‘힘’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에드워즈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굉장히 깁니다. 저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올라갑니다. 죄와 관련해서 설명하자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실재론적으로 이 안에 들어오는데, 죄가 물질이 아니잖습니까? 뭐 시커먼 먹물 같은 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죄를 딱 짓고 나서 이 속에 sinful inclination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inclination의 정체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다 초콜릿을 올려놨습니다. 아마 백 년 동안 이게 있다 해도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초콜릿은 다 부패하겠지만 있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경사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굴러떨어집니다. A라는 초콜릿만 굴러떨어진 게 아니라 B를 올려놔도 굴러떨어집니다. C를 올려놔도 굴러떨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물질이 와도 떨어집니다. 이렇게 기울기가 되어 있는 상태를 inclin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까 정동이론에 있어서 정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두 분이 서로 너무 좋아합니다. 이 사람이 기침하는 것도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어도 좋습니다. 그러다 둘이 대판 싸웠습니다. “넌 인간도 아니다” 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집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 사람의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준 선물이 자꾸 생각나게 만듭니다. “저 나쁜 놈” 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선물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어제도 가만히 있었는데 이 안에 inclination이 생긴 것입니다. 일어나는 지식과 정동과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작용하는 틀 자체가 미움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했잖습니까? 그 ‘대적한다’라는 것을 쓸 때에 그 ‘에이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속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inclination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비평을 가하는 게 뭐냐 하면,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왜 죄를 짓는지가 너무 설명이 잘되는데, 이것이 그 앞부분을 설명할 때에는 오히려 족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성이 명정하고 감정이 올바른 상태였는데 왜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죄를 짓게 되느냐?” 이게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inclination이 없이 죄를 지었다는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비평합니다. 에드워즈의 이 ‘전적타락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나 법칙적이기 때문에, 왜 인간이 순수한 상태에서 타락했는가를 설명할 때에는 오히려 독이 되어 이 설명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 결국 “에드워즈는 그것을 성공하지 못했다”라고까지 보는 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사실 그런 어려움은 어거스틴과 똑같이 느낀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설명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죄의 인이 죄를 받아들였을 때에 inclination에 의해서 죄를 짓는다’라는 설명과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얼마든지 악한 것을 보면서 정동이 일어나고 오류에 빠져서 죄를 지을 수 있는 불안정성이 있었다’라는 것, 두 개를 같이 균형을 갖고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상태, state를 네 개로 구분합니다. 맨 처음, ‘posse peccare’, 라틴어입니다. posse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peccare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non posse non peccare’,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는 상태,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posse non peccare’,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 그리고 영화된 다음에는 ‘non posse peccare’,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이렇게 구분을 하고 설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경우는 posse peccare의 상태를 ‘인간이 얼마나 엄청난 지위와 능력을 부여받았는가’를 설명하는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의 말로 바꾸면,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 이하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동물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이 개만도 못한 개새끼”,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개는 아무리 좋은 개나 나쁜 개나 그냥 개새끼일 뿐입니다. 모든 사물 중에 그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놀랍게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게 위대하냐면, 인간이 인간 이하가 되는 게 하나님에게 이익이겠습니까? 단기적으로 본다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그 인간에게 준 자유로운 선택의 state가 얼마나 높은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단기적으로는 모욕이 되는데도 인간이 선택하면 그 일이 일어나게끔 놔둘 정도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유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거꾸로 뒤집으면 뭐가 되냐면 인간이 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함이고 하나님 당신도 원하지 않는데 개 같은 인간이 되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존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으로 나타내실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기본적으로 에드워즈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구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뒤편은 오늘 저녁에 가셔서 몇 페이지 안 되니까 뒤에는 쉽습니다. 그냥 천천히 읽으시면 되고 뒤에 나오는 내용도 내재성, 초월성 등등 앞에서 거의 다 설명한 내용입니다. 읽으시고 다음에 ‘천지창조의 목적’이 유용할 것 같은데 여러분들이 읽으시면 될 것 같고, 저는 세 번째 논문을 강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아마 평소에 듣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해서 한국의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데 사실은 미학에 관한 논문은 썩 많지 않습니다. 한번 세 번째 것을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일 시간을 드릴 테니까 오늘 강의 들은 것, 그리고 집에서 읽으실 2장 중에서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시간을 꽉 채웠습니다. 5분 정도 남았는데 혹시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Q) 요즘 목사님의 관심이 에드워즈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A)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에드워즈를 소화하고, 나는 나 나름대로 에드워즈를 해석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아까 관심이 다른 데에 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A) 요즘 그때그때 마다 이동하기는 합니다. 제가 에드워즈에 한창 심취했을 때에 비하면 열기가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에드워즈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개혁파 정통주의에 또 깊이 심취해서 한 10년을 보냈고 지금은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갖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에게는 책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을 주지 않나 보죠? (“지금 네 권 있습니다.”) 네 권밖에 없습니까? 이상하네, 그러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요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에드워즈를 제가 좀 오프되어 있지만 삼권은 지금 따끈따끈합니다. 이것을 누굴 주고 누굴 안주나. (“아니면 제일 연세 있으신”) 그러면 연장자 순으로 가는 것으로 합시다. 이 책은 제가 어거스틴을 쓴 것은 아니고 어거스틴의 사상에 심취하던 사람으로서 여러 신학을 횡단하면서 풀어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 10년 이상의 사유가 여기에 녹아있는 것이고 많은 독서량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제 삼권은 제 마음에 따끈따끈하게 불붙어있는 이슈입니다. 내일 강의 속에서 여러분들과 교류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질문 없으시면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