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교역자 수련회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 1:12)
녹취자: 조경훈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세리장이라고 했고 부자라고 했으니 약간 조롱 섞인 말입니다. 당시 로마의 세제를 보면 세리가 월급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세금을 거둘 때 항상 그 지역과 주민의 실정을 잘 아는 그 지역 출신을 세금 거두는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당연히 유대인 동족 중에서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로마는 그렇게 통치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굉장히 관대한 나라였습니다. 세금만 잘 내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자기 신을 섬기든지 뭐든지 나머지는 다 봐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때 그런 적이 있었는데 세금방식이 여기 인구 얼마니까 세금 얼마 이렇게 할당을 합니다. 그러면 세리가 그것을 할당을 해서 돈 많은 사람은 더 받고 이렇게 거두고 거기서 자신의 생활비를 조달받는 방식이었으니까 가렴주구가 아주 심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보면 별의별 세금으로 수탈하는 수단들이 많았습니다. 거기도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더러운 죄인이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들과 동족의 피를 더럽히도록 이방인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죄인들 중에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방식으로 삶을 살았으니 돈을 많이 모았을 수는 있을 것이고 여기서도 부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알 수는 없지만 삭개오가 올라갔다고 하는 나무가 아직까지도 거기 있다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2천 년 전에는 작은 나무였겠지만 굉장히 큰 나무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보다도 얼마나 키가 작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키가 굉장히 작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에워 쌓여 있어서 도저히 작은 키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인파를 뚫고 앞자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첫 번째는 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이였기 때문에 한 번 호기심으로라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이유가 타당할 것이라고 보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외로움이 가져다주는 열심이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돈은 벌 수 있었지만 친구가 없었습니다. 동족들에게 다 버림을 받고 그들과 접촉하는 자체를 하나의 종교적인 불결로 여겼으니까 사실은 사람취급을 안 한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시대 백정이나 아니면 그릇 만드는 사람처럼 천하게 취급했으니까 인간으로 취급도 안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사회적인 소외감, 당연히 종교적인 소외감, 돈은 좀 모았을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는 소외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예수는 세리들을 받아준다고 하더라. 같이 밥도 먹고 진리의 말씀도 가르치시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더라. 라는 호기심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 추측일 뿐입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할 수가 없어‘ 라고 나옵니다.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앞에 나오는 것을 보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라고 나옵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었는데 여건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키라도 크면 까치발을 하면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키가 작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구경할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안들림: 5:58 백살치듯이?) 몰립니다. 사람들이 안 보이면 자전거를 세워놓고 자전거 짐 싣는 곳 위에 올라가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키가 제일 커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키가 작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인파가 꽉 차면 도저히 사람을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피해주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이 사람에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의욕이 적었다면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갈망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갈망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이 사람이 나이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중년은 넘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세리장까지 됐으니까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 일은 사회통념으로 보더라도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장 채신없는 짓인 것입니다. 나무타고 노는 것은 언제 노는 것입니까? 기껏해야 중학교 정도 때까지입니다. 초등학교 애들은 열린 공간나무를 그렇게 못 살게 굽니다. 막 올라가려고 하고 신발로 비비고 올라가려고 난리입니다. 야. 너한테 매달리면 좋겠니? 내려와라. 눈치도 없이 막 올라갑니다. 이 세리장한테도 그것은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고 사회적으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라갑니다.
제가 이 얘기를 드리느냐 하면 다들 코로나시대 이후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다 궁금해 합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같은 사람도 완전한 새로운 시대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현재 팬데믹 코로나(pandemic corona)를 검색하면 900여 권의 책이 검색이 됩니다. 매달마다 몇십 권씩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대부분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이 팬데믹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팬데믹이라고 하는데 데믹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팬하면 희랍어에서 판입니다. 팬데믹은 지역적으로 모든 곳이 말하자면 질병 저주상태라는 것입니다. 팬데믹 말고 에피데믹도 있습니다. 에피가 사물 위에 관하여 라는 뜻입니다. 아시아에서만 질병이 돌거나 아니면 남미에서만 돌 때는 에피데믹이라고 합니다. 더 무서운 건 엔데믹인데 이미 엔데믹으로 갔다고 봅니다. 희랍어에 엔 이 ‘무엇 무엇 속에’ 라는 뜻인데 이 속으로 들어가서 독감 바이러스처럼 어디엔가 멸망하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다시 퍼지고 퍼지는 것입니다. 백신이 개발이 되고 치료제가 개발이 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가 되면 이 질병은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예방의학자들의 공통된 관측은 사라지지 않고 독감이나 홍역처럼 내재하고 있다가 조건이 되면 다시 발발할 것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10년 후에는 대면수업을 못하는 아이들의 사회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대면을 하고 애들이 4차원 애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이 머리가 돌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소통하는지 소통하는 방식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아까 모영보 목사가 얘기했듯이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오는 훈련들이 안됐고 자기 질서를 잡아주는 것들에 대한 훈련이 안됐기 때문에 부적응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포스트코로나의 시대에는 코로나가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선교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우려하는 것이 코로나가 다 끝이 났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바뀐 생각이나 개념 이런 것들을 과연 교회가 따라갈 수 있을까? 모 목사님이 얘기한 것처럼 가장 늦은 집단이 학교와 교회라는데 어느 정도는 일리도 있고 안 그런 면도 있겠지만 어쨌든 교회를 잘 안 변하는 집단이라고 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평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은 자기세대에 뭐가 일어나면 굉장히 포커메이킹한 사건, 세기적인 전환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수렵채취 공동생활의 사회에서 농업이라는 것을 하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농업을 시작하고 사람들이 정착하게 된 것이 인류 역사상에 네 개의 사기 사건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농업이 되고 정착을 하면서 사람들의 삶이 풍요해지고 안정되게 됐다라고 그러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엄청난 계급 차이가 생기고 착취하는 구조가 생기고 사회적인 많은 문제가 생기고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십자군 전쟁 그리고 이후에 있었던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2차 세계대전, 컴퓨터의 발견 이런 등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다 한 번씩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일제 강점기 같은 경우입니다.
하나의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서 그것이 그 당시에 영향을 준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일반사회 사람들이 보는 것 같은 시각으로 호들갑을 떨지 말고 사회가 변혁되는 것에 차이점들만 너무 주목해서 보지 말고 복음의 보편성을 훨씬 더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미래를 예견해봅니다. 30년 뒤면 95세니까 확률적으로 볼 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나도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30년 후쯤 되면 확실한 것은 기독교 인구가 현저하게 줄 것입니다. 30년 후에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에 달렸는데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이나 미래학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2035년에 미국이 제 1위의 국가가 될 것이고 우리가 제 2위의 국가가 될 거다. 국민소득이 85,000불 이상이 되는 가장 이상적으로 발달한 과학과 사회와 군사력 모든 것을 가진 아주 강한 나라가 될 거다. 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만큼 현실에 적응이 빠른 나라가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조가 유지된다면 2050년에는 확률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기분 좋은 이야기를 따라간다면 경제학자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가 이야기하는 고도대중소비단계를 훨씬 넘어선다고 봅니다. 대개 4만 불 넘어서면 고도대중소비단계라고 봅니다. 그러면 극 고도소비단계가 될 것이고 봅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아주 풍족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때 사람들은 신앙의 관심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전 세계 지도를 놓고 국민소득이 3만 불이 넘는데 이 정도로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한 번 세어보십시오.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라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들어가 보면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 말 자체가 아주 애매모호합니다. 가톨릭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성애하고 혼전 동거합니다. 신앙의 하나의 형식일 뿐입니다. 종교 자체가 3만 불 넘어서 4만 불 넘어가면 사람들이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모든 역사발전에 전적인 예외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20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년 후에 동성애가 이렇게 사회적인 지지를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6.25의 힘으로라도 이미 그것은 있을 수 없는데 6.25는 지금 목소리도 못 냅니다.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별금지법이 통과가 안 되기를 바라고 또 노력은 하지만 법이 통과가 안 돼도 어떤 다른 방식으로라도 결국 이것은 다 통과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태까지 있었던 유럽과 세계역사의 일반적인 흐름입니다. 우리만 아주 특별하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특별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근거는 매우 미약합니다.
그러면 다음 세대는 어떻게 될 것이냐? 30년 정도 후를 바라볼 필요도 없이 여러분들이 가서 본격적으로 자립 목회를 하는 시기가 나이가 있는 목회자들은 10년 안에 그렇게 될 것이고 젊은 사람들은 15년에서 20년 정도 후에 될 것인데 20년 정도만 앞을 내다보면 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인구가 지금의 절반 정도까지 더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 인구라는 것은 기독교라고 표현하는 사람 말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충격의 여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작은 교회는 거의 없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 기대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유럽 같은 경우는 지난번에 기존예배에서 왔던 LCM(Londen City Mission)을 지휘하고 있는 총책임자인 아프리칸 잉글리시인 타이요(TAYO ARIKAWE) 목사가 있습니다. 선교본부의 직원이 120명 쯤 되고 런던에 선교사역을 아주 활발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게 영국의 집값이 얼마나 비싸냐 하면 한 사람이 들어가서 살짝 누울 수 있는 방이 약 12억에서 15억 정도 됩니다. 그런데 LCM에서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런던에만 200건입니다. 그것은 큰 거 작은 거 있겠지만 보통 작아도 10억에서 100억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굉장히 부자 단체이고 거기서 나오는 렌트비만 해도 굉장하리라고 봅니다. 거기는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개념이 없고 죽으면서 기부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문화가 있으면 교회가 살길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가 안 없어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갔던 미국에 한국인이 거기 세 들어서 목회하고 오후 시간을 쓰는데 미국인 교회가 있는데 교인이 4명입니다. 담임목사님이 있고 연봉을 주고 사택도 주고 다 운영이 됩니다. 가끔 한인교회를 도와주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더니 노인들이 죽으면서 교회에 자기 유산을 남기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 노인이 죽으면 교회가 몇 년을 운영하고 그 다음 노인이 죽으면 그것으로 또 운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네는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노인이 죽게 되는데 안 죽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문화도 없습니다. 점점 의식이 달라지니까 앞으로는 또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작은 교회는 일반적으로 없어진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형교회가 살아남을 것인가? 나는 중형교회도 굉장히 위태롭다고 봅니다. 크기가 크냐 작으냐에 의해서 생존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목사가 나쁜 짓 하고 교회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교회는 물론이고 신문에 날 정도의 사건이 안 일어나도 3,000명씩 되는 교회가 15~20년이 흘러가면서 거의 교인이 0명으로 떨어지는 교회가 꽤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최자실 목사님 아들이 세운 순복음성광교회입니다. 휘문고등학교가 있고 인터컨티넨탈호텔 뒤에 있는 교회입니다. 거기에 한때 3,000명까지 모였는데 지금은 150명 정도가 남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파는 문제를 순복음교회하고 계속 협의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렇듯이 굉장히 그런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 속도가 예전에는 천천히 됐는데 지금은 굉장히 빠르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거라고 봅니다.
서울에 오래된 전통이 있는 교회들은 다 노인네들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후예배에 설교하러 올라가 보면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세대가 가면 그 다음 사람들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점점 줄고 있고 절대적으로 출산을 안 해서 인구가 계속 마이너스로 내려갑니다. 인구가 똑같아도 기독교 인구가 줄 텐데 인구까지 마이너스가 되고 젊은이들이 사상적으로 교회를 떠나니까 앞으로는 점점 가속화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느냐 하면 두 종류의 교회가 살아남는다고 봅니다.
한 종류의 교회는 복음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완전히 버린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현실에 방해가 안 되는 범위 내에서만 복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소비자 중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동성애 하는 사람들이 많네. 아! 그러면 우리는 동성애 찬성! 사람들이 외롭네. 아! 그러면 우리는 외로움 치유사역! 병든 사람들이 많네. 그러면 아! 우리는 병 고치는 사역. 가난한 사람들이 많네. 아! 그러면 복지사역 이런 식으로 기민하게 움직이면서 교인들을 소비자로 보고 그 사람들의 니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심리학적이고 사회적인 접근을 하는 교회들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런 니즈는 어느 시대에나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인 서비스를 사람들은 필요로 합니다. 대신에 그렇게 하려면 아주 세속적으로 똑똑해야 되고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니즈를 간파하면서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면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보통 똑똑한 머리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살아남을 것인데 작은 교회가 그런 기능을 기가 막히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기대를 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작은 교회를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부목사님들을 개척을 시켜 줬습니다. 요즘 내가 변한 게 있습니다. 누가 개척하면 따라가라고 말을 잘 안 합니다. 여기 다 증인들이 있는데 내가 따라가라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좋은 결과가 안 나옵니다. 가면 처음에는 갔을 때 굉장히 어떤 만족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갑니다. 우리교회 지난해 2월 달에 정점을 찍은 게 3,300명이었습니다. 한참 기분 좋게 출발을 했는데 소속감이 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교회를 개척하는 주축세력들이 되는데 한 일 년 동안은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으로도 채워지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지속기간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청교도인들이 그런 목회를 싫어했습니다. 다 봤지만 내가 쓸데없이 누구하고 밥 먹고 돌아다니는 거 봤습니까? 교회에 15년 20년씩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 년 정도 지나고 나면 시들어져 버립니다. 일부는 열린교회로 돌아오고 일부는 다른 교회로 흩어지고 일부는 신앙을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좋은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최종기 목사가 결국은 목회는 자기가 전도해서 사람들을 세워서 하는 것이다. 라고 자기가 그 이야기를 하는데 정확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를 그런 니즈를 다 채워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채워줄 수 있는 교회들은 조직력과 자금력과 그 만큼의 경영능력과 수완을 가지는 교회들일 것이다. 그런 교회들은 20년 후에 대형교회가 다 없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해야 됩니다. 바람직한 교회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은)이 하던 크리스탈 교회가 있습니다. 많이 모일 때는 몇만 명이 모였습니다. 나중에는 교인이 줄고 줄어서 교회를 유지할 수 없어서 가톨릭에 팔았습니다. 노먼 빈센트 필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 조용기 목사님의 정신적인 대부입니다. 그 사람이 벌써 우리로 말하자면 언컨텍트 예배를 시도한 사람입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필요 없이 살림욕장 큰 거를 사서 톨케이트 같은 입구를 통과하면서 헌금을 하고 들어와서 공기 좋은 숲속에서 창문을 내리고 보이지도 않는 먼 숲속에서 누군가 설교하면 숲속을 울려 퍼지는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노먼 빈센트 필 목사의 설교를 편안한 자세로 듣는 드라이브인 처치 교회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밀려왔습니다. 한 때 그 사람의 책들이 한국을 강타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은 그 교회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한 시대에 반짝 하고 사람들에게 필요를 주고 적응하고 관심을 끄는 것은 쉬운데 시대가 계속 변하기 때문에 계속 변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를 누가 기억을 합니까?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교회가 쪼그라들어서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리고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나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진실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굉장히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벌써 5-6년 되었는데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기 사역이 어떤 점에서 얼마나 실패했는지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람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것이 자기반성이었습니다. 새들백교회를 지금 누가 기억합니까? 오히려 지금 기억하는 교회는 얼굴 예쁘게 생긴 친구인 조엘 오스틴의 교회는 기억합니다. 5만 명 모인다는 것이 몇 년 전이니까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다 멸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어마어마하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얘기는 한 교회가 시대를 거듭하면서 계속 변신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을 모을 가능성보다는 파도타기처럼 빌 하이벨스가 나타나고 가라앉으면서 새들백교회가 나타나는 식으로 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의 큰 교회는 남을 거라고 봅니다. 교회 운명이 단명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나마도 그것이 생존전략이긴 하지만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종류의 생존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그래도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여러분들이 열린교회의 역사를 잘 보면 제가 물론 창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시대에 무엇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별로 가진 적이 없습니다. 개척해서 90분 110분씩 설교를 하는데 시대에 뭐가 맞겠습니까?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가 선포되기를 고대하는 영혼은 아무데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것을 잡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것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를 진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도사님들이 다 증인들이지만 나중에 내가 철 들고 난 다음에는 그런 말을 안 했는데. (35:10-11 옆에 시가 말을 하는게?) 가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가라.’ ‘오지마라.’ 라고 얘기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무슨 얘기까지 했냐 하면 ‘십일조 낸 거 아까우면 다 계산해서 돌려 줄 테니까 가라.’ 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법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반드시 그 손을 붙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열린교회가 아무 아이디어도 없이 무식하게 계속해서 고리타분한 진리만을 선포하면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때 그때 마다 아이디어를 모으고 끊임없이 변신을 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류에 영합해서 교인을 붙잡으려고 한 적은 내 양심상 없습니다. 다음 세대에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를 짜내서 시류에 맞춰서 목회를 하려고하면 똑같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레드오션입니다.
제자훈련을 한 교회가 사랑의교회 하나입니까? 그러나 제자훈련을 해서 부흥한 교회는 전국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부흥한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만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교회는 실패했습니다. 모두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선포하는 일을 하는 것은 블루오션입니다. 경쟁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20년 후에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진리에 대한 관심사가 약화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20년 후에 목회자들이 우리 교리반에서 배우는 내용이라도 알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될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현대교회에서 목회자들에게서 이루어지는 설교를 보면 벌써 다음 세대가 보입니다. 신학이 뼈대인데 신학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은 영혼을 사랑하는 목양적인 마인드가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이 대목부터가 중요합니다.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라고 할 때 옛날 한국교회에 부흥사들같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파 논쟁이 있었던 16세기 특히 17세기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했던 방식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사도들이 했던 방식도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뭐냐 하면 통일성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게 왜 현실화 됐냐 하면 여태까지는 한국교회에 나름대로 부흥이라는 관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진 시대가 됐지만 30년 정도 뒤로 시계를 돌려놓으면 목회자들에 대한 존중심은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30년 4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많은 한국의 초대교회 목사님들이 화장실을 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로소 저 사람이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화장실 가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목회자의 탁월성에 대한 인상이 박혀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아주 우습게보고 윤리적으로도 별로 표준이 된다고 보지 않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몰아가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음 세대에는 더 그럴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옛날에는 부흥이라는 관성이라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부흥 자체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사람하고 얘기를 하는 게 내 책을 계속 보면 ‘빛나간 열심’ 이라는 얘기가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지금은 그릇돼도 좋으니까 한 번 부흥을 보고 싶은데 그릇된 부흥도 없고 빗나갔어도 좋은데 열심 있는 사람을 보고 싶은데 없습니다. 말랑말랑한 사람이 돼가는 것입니다. 세계는 그야말로 진리의 기준을 거부하고 자기가 옳은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사상은 보다시피 끊임없이 변천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점을 떠났기 때문에 어디에 묶어놓지 않는 배가 항구에 있지만 항구에서 계속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처럼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전체를 드론을 띄워서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세계관을 가져야 되는데 목회자들에게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문학하고 멀어진 것입니다. 이 전까지는 인문학을 모르고 인생관을 제시를 못해도 부흥이라는 관성이 있어서 교회가 지탱되어 왔는데 그 관성의 동력이 거의 떨어져갑니다. 사람들은 너무 너무 혼란스러운데 통일적으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보고 인생을 보고 역사를 보고 사람을 봐야 할지에 대한 통일적인 관점이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짜증날 정도로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입니다. 밖에 사람이 도저히 공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개혁신학을 열심히 잘 가르쳐 놓으면 비판의 칼을 뽑아서 복음주의의 목에 겨누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할 때가 있으니까 고쳐줘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복음주의는 우리 편입니다. 세속주의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이교회 사상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것들을 향해서는 칼을 안 빼들고 이미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의 목에다 칼을 겨누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에 사상이나 정신들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는 살아남을 거라는 의미가 그런 뜻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저 목사의 설교를 들으니까 저 목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견해를 가진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바탕이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살아야 할 가? 라는 바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견고해서 웬만큼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통해서 들어와서 복음의 문을 통과해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신학교육 방식으로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많지 않습니다. 요즘 보면 깡다구 같은 각오로 칼날같이 비판을 하면서 참된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20년 내에 거의 없어집니다. 모르겠습니다. 소수가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이너리티도 안 되고 마지널리티도 안 될 거라고 봅니다.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숫자밖에는 안 남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이 됩니다.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열어주는 게 인문학입니다. 항상 보면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인문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문주의자가 아니었으면 중세의 미몽에서 깨어날 수 없었습니다. 100퍼센트 다 인문주의자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무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식한 사람은 제도적으로 거기에 명함을 내놓을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다 고학력자들이고 학교는 리챠드 벡스트처럼 정규교육을 못 받았어도 독학으로라도 상당한 공부의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은 명함을 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우선 라틴어로 쓸 수 있어야지만 문단에 등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사상적인 대변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상을 다 글로 안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얘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동시대에 자기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바였고 불신자라는 것이 가톨릭교인과 개신교교인 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교인이라는 포션(portion)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믿는 개신교도를 비판하고 가톨릭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채웠지만 그 사람들을 여기로 내려와서 이 세계를 보면서 펼쳐내라고 했다면 놀랍게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안 했던 것은 아닙니다.
18세기 개혁주의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행복론을 썼습니다. 그 행복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만의 행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행복입니다. 인생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으로 가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는 다음 세대에 살아남는 교회가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런 증거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들이 다 decline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도 확고하게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웅장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될 가를 보여주는 메시지들이 울려 퍼지는 교회들은 지금도 몇 만 명씩 모입니다. 세속화되면 세속화될수록 인간은 더 파편화되어서 자기의 인생의 정착점을 어디에 둬야 될지 모르는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런 설교에 대한 흡인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충격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당신이 누구냐? 라고 물으면 내가 책으로 대답하라면 내가 주고 싶은 책이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몰랐을 수도 있고 옛날에는 ‘십자가를 경험하라’를 줬을지 모르지만 다음 세대에는 어떻게 되느냐 라고 하면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이라는 책 속에 ‘십자가를 경험하라’를 푸는 형태의 목회자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설교도 잘 해야 되겠지만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유능하게 설교를 한다면 몇 천 명이 되리라는 것을 내가 20년 후에 보장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3-400명 정도는 떨어지지 않고 생존이 가능한 교회가 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계속 변화되는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목회를 할 때는 지금을 그리워 할 것입니다. 27년 전에 내가 교회를 개척할 때는 마지막 끝물이긴 했지만 외치면 사람들이 오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물론 많은 변화를 가져오겠습니다. 비대면 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진리는 자신이 찍은 사람을 반드시 변화시키고야 맙니다.
내가 한 번 얘기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죽었는데 내가 이 설교를 하는 이 순간도 스펄전은 사람을 회심시키고 있다. 라는 것이 교훈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스펄전 목사가 죽고 우편배달부가 소포배달을 하러 나갔는데 그 당시에 좋은 포장지도 없고 하니까 누가 스펄전 목사 설교집을 뜯어서 소포 포장지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편지배달부가 배달을 하러 가다가 주소가 어딘지 보다가 우연히 그 표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우편배달을 하러 가면서 내용을 읽다가 회심을 한 것입니다.
무엇이 주는 힘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스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흥사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밖에 못 나왔는데도 스펄전은 엄청난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세계 전체를 보았습니다. 그 당시 19세기에 살았는데 독학으로 만이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로서는 지금의 십이만 권의 책보다도 많은 책이라고 봐야 됩니다. 그가 그렇게 외치면서 설교할 때 웅장한 스케일이 있는 것입니다. 일평생 설교했는데 같은 본문을 두 번 설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녹취록에 안 남아있습니다. 다 한 번씩만 설교하고 지나 간 것입니다. 그게 아직까지도 남아서 사람들의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사상의 눈을 뜨고 깨어나서 세상의 역사와 문화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를 분별하는 시야를 가져야 됩니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으로 설교를 해서 시대가 변하지만 자기가 누군가? 라는 것을 보여주고 성령이 그 사람에게 강하게 역사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해줄 때 사람이 변화됩니다. 그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교회를 필요로 할 것이고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최근 30년만 해도 한창 소비자중심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있는데 경영학의 그루인 피터 드러거가 그 사람의 정신적인 대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30년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의 교회가 사라졌는지 모릅니다. 30년 전에 순복음교회는 대단한 위세를 떨쳤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변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야기 한 그 진리의 요소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변화된 시대가 되면 변화된 시대에 맞는 창의성을 반드시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것이 없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면 결국은 소비자 중심의 교회가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소멸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개를 가지고 있다면 끊임없이 변신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가운데 결국은 그 시대에 살아남을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여러분들에 의해서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해 봅니다.
몇 가지로 집약을 하자면 첫 번째로 복음을 뼛속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탁월한 영적인 특성이 있어야 됩니다.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닌데 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영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어야 되고 통합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혹시 여기도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유학 가는 것 아닙니다. 그렇게 통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의 시스템이 아닙니다. 우리 아들은 갔지만 할 말이 없지만 독자적으로 공부를 해 가면서 통합적인 시각에서 이 시대를 분별하고 파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학문적인 저력을 갖춰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역한다면 포스트코로나가 앞으로 수 십 년 내에 안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일이 아니라 더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지구 온난화에 의해서 생전 보도 듣지도 못한 바이러스들이 미이라에서 부활하듯이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의학이 부지런히 쫓아 가겠지만 항상 고통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도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천연두나 페스트가 지나갔을 때를 다 겪었습니다. 이것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거라고 봅니다. 코로나를 중심으로 이 전과 이후가 많이 달라질 것은 틀림없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할 것이고 거부하면서도 한 쪽에서는 진리를 찾을 것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서 여러분 자신이 미래를 준비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반드시 자기 길을 찾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된다고 봅니다.
주어진 현실을 자꾸 투덜거려봐야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유도를 배운 사람들은 알지만 유도가 다른 운동에 비해서 매우 특이한 것은 상대방이 밀 때 당기라는 것입니다. 밀 때 대항하지 말고 상대방이 밀 때 잡아당겨서 자신의 힘에 의해서 스스로 균형을 잃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유도의 원리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끌어안고 함께 굴러가면서 마지막에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창의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현실을 극복하며 나가리라고 나는 봅니다. 너무 낙심할 필요도 없고 너무 낙관할 필요도 없이 미래를 보면서 나가면 좋을 것이라고 코로나를 겪으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굉장히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이런 시간이 더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일 것이라고 봅니다. 교인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거의 적응이 됐다고 할까? 현실을 받아들이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셔서 심방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기가 진짜 풍요롭게 누리면서도 고마운 줄을 몰랐던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일 날 예배에 오는 것을 고마워했어요? 지금은 너무 감사하잖아요. 1단계로 내려가서 1,900명이 나오니까 너무 놀랍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부지런히 심방하고 목양을 하면 오히려 더 사람들의 마음이 가난해져서 주님의 품으로 잘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