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교구교역자 수련회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4:1-2)
녹취자 : 김경애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뜻을 세우고 가는 사람에게는 그 뜻대로 안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때에 낙심하게 됩니다. 낙심이라는 것은 열정이 뚝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랍어 원어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일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듀매오’ 라고 하는데 욕망이 솟아나야 합니다. 의욕이 솟아나야 합니다. 그런데 낙심은 그 의욕이 꺾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낙심하지 말고’ 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복음사역자에게 낙심할만한 일들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므로’ 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앞에 있는 18절을 받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는 자유로우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앞에서는 소망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이 한번 구원해낸 사람들은 영으로 구원하시고 영으로 거룩하게 하셔서 결국은 주님을 뵈옵게 하시고 모든 진리를 알게 되는 날까지 이르게 하시는데 그렇게 영광스러운 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은 지난한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낙심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우리 정경아전도사님하고 오다가 오래 사는 이야기를 했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에 너무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지독한 수도사들 같은 금욕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먹고 또 즐겁게 살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게서 떠나가도 잠시 불편할지 모르지만 내 삶의 기반을 흔들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 지게차를 운전하는데 15미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순간에 이 남자는 그 지게차에 가만히 있었으면 어땠을지 모르는데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자기가 먼저 나와서 떨어지고 그 위에 지게차가 떨어졌습니다. 이부지치가 하반신만 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입니다. 배꼽이 있는데서 하반신이 다 잘렸습니다. 몸뚱이 하나에 오른손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깨어났을 때 온화한 미소로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할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듀매오’ 의욕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낙심하면 ‘아듀매오’ 하면 그럴 수 있는 의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격려를 받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할 때 어디에서 정착을 못하고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사역지를 옮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어떤 하나님이 사역지를 일 년에 한 번씩 인도하시겠습니까? 어떤 하나님이 담임목사로 가서 6개월 만에, 1년 만에 더 큰 교회를 가기 위해서 까치발을 들고 이력서를 내고 합니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목회가 편안하게 걸어갈 때 이것이 늘 있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괴로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이 정상적인 목회의 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도 오면서 이야기했지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나는 성도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그런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섭섭한 것이 없습니다. 뭐 그리 섭섭합니까? ‘나는 너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야 하겠다. 나는 그것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 너만 잘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낙심에 관한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쉽게 낙심하면 결코 목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도 만나지 못했는데 무슨 사도냐?’ 고린도교인들이 수군거릴 때 ‘나는 사도가 맞다. 증거가 있다. 참음과 기적이다. 기적이 뒤에 나옵니다. 참음이 먼저입니다. 내가 예수님께 부름을 받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참았겠느냐?’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목회자의 생활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사람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만이 간직하는 프라이버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숨겨지는 부끄러운 일은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조심하십시오. 뭐냐 하면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너무 침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시동을 켰습니다. 비서가 내려왔습니다. ‘목사님 어디 가세요?’ ‘그게 왜 궁금한데? 나는 퇴근했고 내가 어디를 가든 6시까지 비서이지 왜 내 행선지까지 보려고 하느냐?’ 내가 밝힐 수 없는 곳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지 어디를 가겠습니까? 심지어 통장이고 뭐고 다 주고 나는 그냥 ‘여기에 돈 보내줘라. 누가 받았다더라.’ 다 비밀이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 잘못도 있지만 어느 날은 서글픈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왜 궁금한데? 왜 알려고 하는데?’ 차를 타면 내 차를 만지는 사람은 정해져있지만 남의 차를 탔으면 운전만 하면 되는데 뭘 자꾸 두드려 봅니까? 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디를 갔나?’ 이런 것을 찾아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프라이버시를 아주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반복해서 짓는 죄 그리고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내 명예에 커다란 훼손이 될 그런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어야지만 맑은 사역이 됩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도덕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양심에 그리고 밝혀져도 부끄러운 일이 없는 그런 명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그런 일을 결별하고 버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속임으로 행하지 않으며’ 입니다. 한번 알아맞혀 보십시오. 왜 사람이 사람을 자꾸 속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럴 것 같습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럽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뿐만 아니라 제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렇게 요만큼 느꼈는데 이만큼 쓰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도 요만큼 이해했는데 이만큼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 한다든지 요만큼 느꼈는데 이만큼 느낀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인은 모르는데 듣는 사람은 모두 압니다. 그런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느낀 것이 없다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은 결국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속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이는 것이 무엇을 속이는 것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두 가지입니다. 윤리적으로 누군가를 속이는 것이고 교리적으로 누군가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명징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며’ 입니다. 이것은 주의 종이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이 ‘나는 이제 오늘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할 거야. 나는 어제까지는 순수한 말씀 사역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혼잡하게 하면서 살 거야.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런데 결국 지나고 보면 어떤 사람이 굉장히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전했지만 혼란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진리를 부지런히 탐구하고 진리 안에서 확고하게 사는 신앙생활을 잃어버릴 때 그때에 자기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혼란에 빠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났던 이단들 가운데 열심이 없었던 이단은 없습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에 나가 보면 정통교회들은 별로 선교를 안 합니다. 이단들은 집 팔고 땅을 팔고 모든 것을 바쳐서 그렇게 열렬하게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엄중하게 하나님이 말씀을 연구하면서 온전한 지식과 학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할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팔이 의사들이 돌팔이가 되려고 작심한 사람이 있습니까? 온전한 지식이 없고 기술이 없기 때문에 결국 돌팔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이 고민하면서 순전한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가 엄청난 능력이 있느냐? 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주님 손에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게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것이 나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양심을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그때에 추호도 거리낌이 없는 내가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큰 오류 없이 내가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고 자기 스스로 양심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강해야 합니다. 교육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양떼와 소떼에게 가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기회를 통해서든지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헤쳐 나갈 것이다.’ 라는 그런 감연한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어떤 목회적인 상황에 대해서 낙심하고 상처받고 목회의 의욕이 꺾이게 되는데 사람들은 흔히 교인들이 힘들게 해서 아니면 나를 정당하게 평가해 주지 않아서, 차별대우를 해서 등등의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자신의 마음속에 은혜가 소멸되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우리가 누구를 보고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상을 바라고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은혜에서 물러나는 일이 먼저 있고 나서 이런저런 일들이 밀려오면서 사역에 의욕이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이에 마음에 있는 많은 은혜의 세계는 파괴되고 여러 가지 많은 혼란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이 너무 많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정, 공부, 심지어 학교, 사역. 사역도 하나 둘입니까? 내가 맡은 부서, 맡은 부서와 연관된 것, 해야 될 의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즐겁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 여기서 나의 존재를 의미를 찾고 감사하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생활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생활을 많이 하면서 그런 것들을 모두 녹이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면 꼰대라고 하겠지만 지금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항구 안에서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방파제가 있고 항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정 급하면 부두로 뛰어내리면 됩니다. 그런데 담임목회를 하면 밧줄을 풀고 드넓은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야말로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배를 몰고 어떻게 큰 파도를 넘어갈까? 하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못 이기면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현실을 이겨내고 그리고 두려움을 기도로 바꾸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꾸고, 시련이 올 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을 터득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