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섬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녹취자: 이은정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힘겨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 힘겨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저녁때 눈을 감으면 아침인데,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태어나는 것도 한 번이면 충분하고 목회하는 것도 한 번이면 족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힘든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우리는 그 힘든 원인이 환경과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갖다 놔도 그런 어려움이 생기면 힘들어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전부라고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모든 게 다 일반 섭리 속에서 좋게 되면 좋아하고 힘들게 되면 힘들어하고, 너무 괴로우면 죽을 생각을 하고, 너무 좋으면 (그저 좋아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죠.) antiaging 기술이라도 받아서 안 늙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는건 너무 당연합니다.
최근에 한국 카이스트에서 아모레하고 조인해서 역 노화 메커니즘을 발견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5년 내에 상용화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발표를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늙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쉽게 얘기하면은 세포가 분열되는 것을 저해한다고 그러는 건데 그게 발암인자 같은 거를 작동 시켜서 암에 걸릴 위험이 매우 높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것 없이 게이 단백질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그게 노화에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가지고 움직이면은 늙는 게 아니라 마치 - 옛날에 영화에서 어린아이가 80세에서 시작해서 점점 젊어지는 이야기처럼 - 그렇게 거꾸로 역노화가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을 발견했다고 그러죠.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신앙이라는 것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 세상에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몸부림치는 것도 결국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그것과 예수님을 믿으면서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오늘 그 비밀을 오늘 성경에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매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나채현 집사 장례식에 가서 장례식 설교를 꽤 길게 했는데 뭐 할 얘기가 많겠죠. 차 타고 가면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열린교회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도 가장 잊혀지지 않는 교인 스무 명안에 들어갈 사람이더라고요.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드라마틱하게 예수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26년 동안 멸치도 안 먹던 사람이고 불교 잘 믿으려고 온가족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불교도 정통 불교도 아닙니다. 약간 곁가지로 나간 불교였습니다. 자식들이 예수님 믿는다고 아버지가 불태운 성경만 5권입니다. 택시운전을 해서 4명을 다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그래서 바퀴 하나에 대학생 하나씩 길러낸다고 합니다. 운전기사 부부들이 만나서 하루 수입이 얼마라던지 물어보면은 자기하고 이야기하던 두 부부가 그날 밤에 집에 가서 대판거리고 싸운다고 합니다. 당신 어디에다 돈 빼돌렸냐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셨던 분입니다. 근데, 가시잖아요. 저렇게 돌아가실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습니다. 기력이 철철 넘쳐 흐르는 분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은 65세인가에 보험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신 분입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가십니다.
모두 죽음을 매우 가까이 둔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빛 아래에서 삶을 읽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우리들이 가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님과 함께 비디오를 보듯이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확실한 거 하나는 이 세상에 살 때 엄청 관심을 가졌던 대부분의 비디오는 그 날에는 부끄러운 비디오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삶 그것이 복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다 혹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에 이렇게 고난을 겪으시고 아프셨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아픔과 고난을 돌아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유익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길길이 뛰는 악연이라도 세월이 흘러가면 모두 검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요. 나쁨 놈들에 대한 최대의 복수는 그놈보다 오래 사는거라고 합니다. 그 말을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 사라져 갑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죠. 예수가 나를 위해 이 큰 고난을 당하셨구나. 그 고난 때문에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나님의 정말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직장 다니고, 먹고 살고, 여행가고, 등등의 모든 것들은 그 삶으로 나아가는 길에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는데, 우리의 갈 길을 걸어가는데, 여기저기 피어있는 꽃들입니다. 꽃들이구나 그럽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황량한 벌판을 - 나는 가끔 가죠 - 무지무지하게 황량한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종종 있습니다. 요새도 그럽니다. 황폐한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는 가다 보면 작은 꽃들도 있고, 새들도 있고, 쉴 나무도 있고, 그런 곳을 걸어가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서 그 사람 이 걸어가는 길 자체를 정당화시키는건 아닙니다. 가야할 길이 아닌데 가면서 수많은 꽃들을 보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엉뚱한 데 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이것들을 소화내야 됩니다.
나채현집사를 보면서 그분이 지하실교회의 –엄밀하게 말하면- 지하실교회 교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도 그분보다 오래 다니신 분들이 없습니다. 97년도에 와서 진짜, 그 대학 다니는 애들을 막 두들겨 패는 겁니다. 그렇게 기가 쎄신 분이었습니다. 성경 다 태우고, 아버지 때문에 늘 나동원집사가 “야, 아무래도 네 아버지를 내가 만나야 되겠다.” 나동원집사가 울다가 눈이 동그래져 가지고, 목사님 무슨 일을 당할려고 그러시느냐고 그럽니다. “아니 설마 목사를 패겠냐? 그러니까 용기를 내고 가서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을 오겠다고 그렇게 역공을 한번 해봐라” 그래서 얘기를 하니까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하며 무얼 집어던질까 그랬더니, 그분이 생각을 하시더니 - 담배도 많이 피셨대요 - “목사가 온다고?” “심방오는 건 싫고 목사 혼자 와서 독대한다면 내가 만나주마”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마 그 양반은 나를 만나서 자기 아들 자꾸 꼬시지 말라고 그 얘기를 할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아파트에 세워놓고 나 혼자 들어갔습니다. 나도 호락호락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들어가니깐 두 분이서 나를 이러고 맞이하는 것입니다. 습관인지 시위인지 모르겠지만 (그랬습니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일체 교회 얘기 안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나서 얘기하고 나서 잘 들어줘서 좋아했거든. 그러고 있는데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예수 믿는 다 큰 아들을 그렇게 때리고 핍박하고 그러시느냐고 (라고 물었습니다.)
그날 확실한 것은 그랬습니다. “이후로는 아들들을 핍박하지 않겠다. 나는 교회 안 나간다. 그렇지만은 더 이상 이 아이들은 내가 말하지 않겠다.” 약조를 받았습니다. 그 핍박에서 해방된 사람이 그때 두 사람이었습니다. 나동훈하고 나동환. 나동환은 사랑의 교회다니고, 둘째는 안 믿고, 셋째는 아직 교회오기 전이었고, 그래서 나동훈은 - 나동훈은 아버지에게 쫄았었습니다. - 제가 가고 나서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고 아버지가 화내실 줄 알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 다음날 부르시더니 “애야 동훈아”,“네” “사람이 말이다. 도리가 있어야지 않겠니?” “네?“, ”아니, 목사님이 이렇게 어렵게 우리집을 방문해 주셨으니까 나도 한번 그 교회를 방문하는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냐” 그 다음부터 당신 자신이 앞서가라 나를 인도해라 하고서 열린교회에 제일 일찍 들어오셨습니다. 어버이 주일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를 설교했는데, 엄청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장로님이 와계신겁니다. 문앞에서 인사를 하는데, 눈이 새빨게 졌습니다. 두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겁니다. 내 두 손을 꽉 잡고 “나 이세상에서 내가 가장 훌륭한 부모인 줄 알았는데 너무 챙피합니다.” 그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2년이 넘게 지났는데 그 사이에 셋째아들이 와가지고 회심하고, 나동환이가 -요번에 다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나동환이가 6월 달에 - 그도 회심하고, 그 자매도 회심하고, 둘이 결혼했습니다.
그러고 나동환이가 드디어 체육관에 큰 걸 개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거기 오신 겁니다. “우리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생전 교회도 안 다니던 분이 “목사님 405장 부르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고 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는데 아무도 안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만 눈믈을 비처럼 쏟는 것입니다. 놀랜 사람은 누구냐면 제가 아니라 아들들입니다. ‘우리 아버지 왜 저러지.’ 알고 보니까 이 아버지가 순복음교회 운전기사로 취직을 한겁니다. 그 테입을 아들이 쌓아 놓은 테입을 갖다가 거기다 꼽고 하루종일 운전하는 겁니다. 순복음교회 교인이 “아니, 우리 순복음교회 교인인데 왜 조용기 목사 것을 안 듣고 이상한 걸 트냐” 그러니까 “아무 소리말고 들어봐요 좋은 거니까” 그러고 그냥 운전하는 겁니다. 이게 수없이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신 겁니다. 회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그제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신앙을 가지신 것을. 아버지는 자존심 상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못 하고 자식들은 겁나서 아빠에게 말을 못 걸고. 그러고 나서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됐습니다. 그러고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마디도 목회자와 교회와 교회에 장로교들에게서 비난하고 그런 소리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격자셨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분인들 없겠습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나가지도 않은 교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쏟아지게 만들었을까요? 그게 신앙의 깊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생하게 예수를 붙들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나의 고난처럼 느껴지고 내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고백하는 게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쇠하여가고 늙어가도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내가 정말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산다 그 고백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겁니다.
열린교회에 맨 처음 왔을 때 19살이었는데 –만으로 19살- 학교 다닌다 그러고 ‘아이고 너는 어쩌면 그렇게 변함없이 예배에 빠지지 않고 수요예배도 나오고 그렇게 다니냐’ (그랬습니다.) 그런 세월이 순식간에 20년 25년 세월이 지나갑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딱 이것입니다. 이걸 믿으세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을 절대 후회(하게끔 만들지 않으십니다.) 당신과 함께 동행하며 산 날을 후회하게끔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거는 미래의 큰 꿈을 꾸는 것, 그것도 중요하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멀리 바라보고 –앞을 안 보고 걸어가는 것을 한눈판다고 그럽니다- 앞을 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꾸지 못했던 놀라운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매일매일 사랑하며 성령 안에서 그분의 인도를 받으면서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내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또 다른 계획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