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2부
녹취자 : 오희열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관점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나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인간이 무엇인지 물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생각 의외로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주 친한 친구를 돈 몇 푼 때문에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배신한 것이 아니라 이미 머리의 구조 자체가 돈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정도 친구는 버려도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 철학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고 나는 내가 맘에 안 들지만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신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은 엉망으로 살아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엉망으로 살지만 앞으로 잘 살게 될 모든 가능성을 포함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은 아무리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주어도 악인의 가슴 속에는 그 사랑이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사랑을 받은 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내적으로 느껴야만 진정한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안 드는 남학생이 일찍이 인류 역사에 없는 순정으로 사랑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는 젊은 여성은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하겠습니까?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다 쏟아 부어서 사랑하는데 안 행복합니다. 왜? 그 사랑을 본인이 느껴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해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게 되면 그런 사랑은 하나님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곳을 향한 사랑이라면 결코 내 인생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sexholic, 성중독에 걸렸던 사람의 진술입니다. 거기에 걸리고 나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먹잇감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돈에 그렇게 중독되어 세뇌되었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을 볼 때, “저 놈을 만나면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꼭짓점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꼭짓점으로 올라가면 그 욕망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이 희생될 것입니다. 가족도 돈 벌이에 도움이 안 되면 버리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일시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일이 없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언제나 이 꼭대기에서 이렇게 해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우리의 충분한 사랑이 될 만한, 변함이 없으면서도 아무리 사랑해도 후회하지 않을 그것이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결국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아주 존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행합니다. 젊은 두 부부가 있었는데 너무너무 서로 사랑합니다. 남자는 행정고시를 패스한 공무원으로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사내축구대회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둘이 서로 사랑한 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죽은 후 일주일 뒤에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과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별로 아름다운 스토리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회자 :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 그런데 이 남자가 떠난 지가 6개월, 1년이 지났는데도 못 잊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그녀의 선택은 늘 만나서 데이트 하던 호텔의 그 층, 그 호실에서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냉정하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사이의 사랑을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인간에 대한 사랑이 돈이나 명예나 오락이나 쾌락 같은 것들에 대한 사랑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주와 자신의 인생의 전체를 주관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도 또 하나의 비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자 : 그렇습니다.
목사님 : 그게 상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다” 라는 부정사인데 “아마레 데움”, 이것은 라틴어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데오”라고 쓰면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가 됩니다. 이 두 가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봅니다. 진정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 사랑에 눈이 뜨여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에 대한 질서가 생겨나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입니까?
사회자 : 아이패드...
목사님 : 아이패드?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아이패드를 아무데나 던져놓습니까?
사회자 : 아닙니다.
목사님 : 왜 그렇습니까? 소중해서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그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정신에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그 사랑의 의해서 질서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가지런해지게 됩니다.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가지런해지게 된다면 죄가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랑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빈틈이 생기면서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 그림을 보면 행복과 자유는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않다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에 보면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황제나 왕의 궁녀나 후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수양제 같은 사람은 후궁이 1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1만 명이나 되니까 말입니다. 만약 그런 곳에 간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녀가 높은 지위에 올라서 하녀들을 몇 명씩 거느리고 왕궁에 사는 후궁일지 모르지만 본인은 밤마다 눈물을 짓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은,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죄의 사슬에 묶이면서 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참 이상합니다. 내 마음이 손더러 이걸 집어라 명하면 말을 잘 듣습니다. 발더러 명하여 저리 가라 하면 갑니다. 그런데 마음은 발보다 가까이 있건만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하면 마음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조화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내 마음의 불구이옵나이다.”
내가 불구라서 걷지를 못한다고 합시다. 내 마음이 “걷자” 고 해도 걷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병 들어서 불구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선한 명령을 선한 마음이 하면 그 마음이 말을 안 듣는데, 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데 그 하나가 병이 들어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속에서 자아의 분열현상처럼 속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혼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핵심은 이 사랑이 없이 이 아래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런 데에서 오는 공허함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은 쾌락과 오락, 우리가 파스칼에서 배운 “디베르띠몽”, 끊임없는 회피의 기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닥불이 타고 있습니다.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이만한 장작 일곱, 여덟 개를 쌓아놓고 불을 지핍니다.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한 시간 뒤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자 : 꺼질 것입니다.
목사님 : 꺼지기 전에,
사회자 : 불씨가 작아질 것 같습니다.
목사님 : 장작 이만큼을 쌓아두고 한두 시간을 태웠습니다. 그 장작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자 : 장작이 까매지고 조금씩 줄어들 것입니다.
목사님 : 마지막에 장작이 실컷 타고 나면 재만 남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 장작은 어디로 갔습니까?
사회자 : 음, 공기 중으로 재가 되어 연기가 되어 날아갔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 : 그러면 재를 모아서 뭉치면 원래의 장작만큼 되겠습니까?
사회자 : 아닙니다.
목사님 : 어디로 갔습니까?
사회자 : 연소되었을 것입니다.
목사님 : 불에 타서 열로 변환되어서 다 사라지고 재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그 장작이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회자 : 음.. 사라졌기 때문에..
목사님 : 아침에 산책하러 나가보면 풀잎 끝이 이슬이 달려있습니다. 햇살이 퍼지면 싹 없어집니다. 그러면 그 이슬이 원래 있었다고까지 말할 정도입니까?
사회자 : 그건 사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없었던 것과 다름없긴 합니다.
목사님 :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영원불멸론”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있는 것은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있는 것은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없는 것이다.”
사회자 :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또 다른 의미”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목사님 : 아까 장작을 예로 들면, 장작이 타고 있습니다. 장작 덩어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에 타서 없어진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그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종교” 35장 65절에서 유명한 문장이 나옵니다. 제 심금을 울린 명문입니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가 버린다.”
어느 산골마을에 예쁘게 생긴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저렇게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녀가 이 시골 동네를 왜 찾아왔을까? 아, 잠깐 누굴 만나러 왔나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을에 그녀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 그러면 관광하러 왔나보다.” 그런데 거기는 관광할만한 경치가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갈 줄 알았는데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살게 되었는데 벙어리여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녀가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서 개울가로 나가서 해지고 밤이 될 때까지 거기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꽃다운 얼굴에 주름이 패이기 시작하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르자 노파로 변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 좀 와보세요!” 해서 가보니까 그 노파가 등산복을 입은 어느 젊은 남성을 물속에서 끌어안고 통곡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애인이 등반가였습니다. 거기 어디선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구조에 실패했고 시신은 실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확신이 있었습니다. 아래부터 계속 눈이 녹으면서 언젠가는 자기 남자친구의 떠내려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하여 붙잡고 통곡한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끌어낸 시신의 얼굴은 어떠했겠습니까?
사회자 : 다 굳어있고 형체를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목회자 : 얼음 속에 있으면 놀랍게도 원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사회자 : 네.
목회자 : 덮여있는 눈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성을 끌어안고 있는 여성은 젊은이의 할머니 쯤 되는 사람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고 이것을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확 끄는데 그것은 공간 안에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 안에서 소멸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나도 함께 소멸되어 갑니다. 그래서 없어질 것이 사라질 것을 붙들고 함께 먼지가 되어 흩어지듯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라는 강물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이 개나 소나 모두 다 사랑이라고 해버리면 사랑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오늘 내가 술을 먹고 나가서 주정부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한 대 줘 패는 것도 사랑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의 충돌이 문제가 됩니다. 존재의 질서는 제일 위가 가장 중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고 가치있는 것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존재를 가치로 여겨서 많이 중요한 것은 많이 사랑하고 덜 중요한 것은 조금 사랑하면서 그 가치를 매겨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소중한 것을 밑으로 집어던져버리고 조금만 사랑하면 될 것을 이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사회자 : 그것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것이군요.
목사님 : 네, 그럼 이것이 뒤집히게 됩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끌어내려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공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내면은 아까 오프닝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갈갈이 찢어진 마음이 되어서 “내가 어디 있나이까?” 하며 절규하게 됩니다.
그 다음 명문이 나오는데 이것은 곱씹어 읽어봐야 하는 책입니다. “삼위일체”입니다. 어거스틴이 쓴 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어거스틴이 이 책의 서문에서 “하나님, 제가 이 책을 젊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야 출판하게 되었나이다.” 30여년이 넘는 세월이 걸려서 쓴 책입니다. 어느 대학원에서 이 “삼위일체”를 읽혔다고 합니다. 명색이 대학원인데 거기 학생들이 그 책을 읽고, “교수님, 이게 기호 모음집이지 책입니까?”했답니다.
사회자 : 아, 이해가 안 돼서 그런 이야기를 했나봅니다.
목사님 : 네, 이것은 그래도 쉬운 문장인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실로 사랑이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떤 대상을 사랑해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사랑이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자, 우리 형제님, 무슨 뜻인지 소신껏 해석해보십시오.
형제님 : 사랑에는 그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어떤 사라의 대상이 있어야만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봤습니다.
목사님 : 비슷합니다. 조금 더 상세히 하면 좋겠는데 저 뒤에 자매님 말씀해주십시오.
자매님 : 모르겠습니다.
사회자 : 정말 어렵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 쉽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영상 : 인적 없는 산골, 드넓은 들판엔 수많은 들꽃들, 그림처럼 피어있다. 초록색 도화지 속 수많은 색깔의 점들, 비취빛 하늘은 푸른 벌판에 맞닿아 있고 깃털 같은 구름은 동양화 먹물이 남겨둔 여백이다. 풀꽃 내려앉은 들판, 그래서 그토록 아름다운 걸까? 이름 모를 꽃들이라고 퉁쳐서 부르는 동안에는 어떤 꽃도 없다. 나를 불러줘. 자기 손을 잡아 달란다. 절 안아 달란다. 내가 그중 하나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 꽃 풀밭에서 뛰어 올라와 내 품에 안긴다. 그 꽃을 끌어안은 건 나의 좋아함이고 그 품에 안긴 건 그 꽃의 기억이다. 그래서 그 꽃 시들어 사라져도 그의 이름을 들을 때 내 마음 속에선 살아있는 꽃이 된다. 나 어렸을 때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렇고 죽을 때까지 그러하리라.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가장 높으신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안단다. 큰 감격과 희열로 가슴이 뛴다. 날 이름으로 불러줄 때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랑을 받음으로 내 인생은 의미있게 됐다. 그 사랑 때문에, 가장 높으신 그분이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난 그저 인류였다. 헤겔에겐 세계의 일부였고 세계는 절대자의 자기전개란다. 유물론자에게 물질이었고 내 정신과 의식은 그것의 반영이란다. 그럼 난 어디 있었나? 사람으로 태어난 게 사랑을 받은 게 감격스럽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숲 속을 지나 호숫가를 걷는다. 하늘 끝으로 이어진 길이 있다면 한없이 걷고 싶다. 나를 있는 나로 사랑해준 유일하신 그분께 다다르기까지. 내가 떠난 지구가 깜빡이는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밤바람이 풀잎을 스칠 때 호수에는 달그림자 길다.
목사님 : 사회자님은 오늘 이 꽃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회자 : 존재는 하고 있으나 그것을 사랑해주고 대상화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그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그 존재의 이유를 모르고 있다가 누군가 나를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는 그런 내용을 담은 영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 상당히 정확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청혼을 할 때 프러포즈라는 거창한 행사를 합니다. 몇 천만 원짜리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마당에 촛불을 켜 놓고 등등 하는데 그 심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런 행사를 치러야만 프러포즈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자 : 뭔가 특별한 존재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목회자 : 며칠 지나면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될 텐데.. 그걸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사람의 인생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 착각이라고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꽃이 있습니다. 그냥 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불러줄 때 그 곷은 내 기억 속에 남습니다. 내가 그 꽃을 끌어안고 내가 그 이름을 부르면 그 꽃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나에게 그 향기까지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마음과 언어의 마술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인류입니다. 인류는 사실 없는 것입니다. 나라,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이 있는 것이지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라.” 그런데 뭐가 나라입니까? 그런데 죽으라고 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이지, 뭔가 어딘가를 위해 써 먹어야 할 존재이지 나 자체로 존귀하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으니까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비로소 사랑하게 되는데 그렇게 사랑자체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랑은 대상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대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랑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 넘치면 그 사랑은 물처럼 변화되어서 누군가 대상을 찾아서 흘러가게 됩니다. 사랑을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가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무거운 추를 올려놓으면 아래로 기울 듯이, 이것이 만약 욕정의 무게가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순수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경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는 대적을 해야 하고 이 사랑 안에서는 세상을 끌어안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의 정욕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그 질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거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유명한 명문입니다. “내가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이처럼 오래된, 그러나 또한 이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이제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지금부터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로 나를 데려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매일매일이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안 해본 분처럼 객관적으로 대답하십니까?
사회자 : 사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랑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목사님 : 그게 인간으로서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아침에 태양을 보는데 어제의 태양이 아닙니다. 아침에 펼쳐지는 골목이 어제의 골목이 아닙니다. 공감을 못 하십니까?
사회자 : 저희가 사랑을 좀 더 해봐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목사님 :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와 풀도 어제 그 돌멩이와 풀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회자 :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 (노래)“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more?” 예전에 Skeeter Davis 라는 가수가 부른 The end of the world 라는 노래입니다.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이상하다? 왜 태양이 어제처럼 빛날까? 왜 파도는 어제처럼 해변으로 밀려올까? 쟤네들은 모르나봐 당신이 나에게 안녕이라고 했을 때 이 세상이 끝난 것을...” 슬픈 노래입니다. 사랑은 그처럼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매일 매일이 새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매일 매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권태가 없습니다. 부부의 권태는 언제 시작됩니까?
사회자 : 글쎄요? 그래도 몇 년? 십 년?
목사님 : 아니, 년 수가 문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시작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태라는 감정은 사랑의 기쁨이 사라질 때, 빈 공간으로 남지 않고 권태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하나님과 열애에 빠진 지성, 열렬한 사랑에 빠진 지정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것은 지성만으로는 안 되고 감성으로 그 행복을 누려야 하는데 지성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때 감성으로 그 하나님을 누리면서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복한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맨날 기도할 때 첫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가는데 이쪽은 쾌락이고 이쪽은 허무의 낭떠러지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데 중심을 잡으면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는 마음 푹 놓고 아무렇게나 살아야 할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고단함을 어떻게 이길 것이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환원하면서 우리가 허무에도 빠지지 않고 쾌락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매일매일 알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맺을 때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에게로 돌아간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이 행복의 근원이시다. 인간의 불행은 그분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데에서 온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불행해지려고 노력해서 불행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행복하려다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하나님 뱌깥에 있는 행복이었기 때문에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자기의 기대와는 반대로 불행의 길로 떨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지성으로 발견하고 감성으로 느끼면서 살아라. 우리의 정신 전체를 하나님으로 채우면서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그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정말 내가 유명한 배우의 팬인데 그 배우와 가림막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펼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사상 전체를 요약할 때, 우리 인간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위대하다, 그러나 비참하다.” 반대로, “비참하다, 그러나 위대한 존재이다. 엄숙하도록 존귀하다.” 그것을 내가 누리면서 사는 데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자 : 김남준 목사님께 우리가 박수 한 번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나갈 때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었나 할 정도로 저는 굉장히 위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 또 이렇게 어거스틴의 이야기와 함께 멋지게 이 내용을 풀어나가 주셨는데,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을 보면 시도 산문도 아닌 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장르를 하나에 국한해서 설명할 수 없는 책이기도 한데 이렇게 글을 쓰신 이유가 있습니까?
목사님 : 왜 이렇게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지를 생각하다가 두 개의 답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매스 미디어가 너무 발달해서 사람이 영상에 빠지게 되면 책을 손에서 놓게 됩니다. 감각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크기 때문에,
사회자 : 자극적이기 때문에
목사님 : 3D에 매혹된 사람들은 2D영화를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내 책을 옛날처럼 많이 읽지 않을까, 제가 글을 쓰며 데뷔한 것이 1995년도였습니다. 벌써 26주년이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200만권 정도를 팔았습니다. 팔았다기 보다는 보급을 했습니다. 그 부피가 8톤 트럭으로 200대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주었는데 요즘은 왜 읽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저는 SNS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카톡도 없습니다. 저를 그런 것에 노출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했습니다. 현대 소설과 SNS의 문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말입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글을 쓸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수식어가 많은 복잡한 문장이 아니라 짧은 문장을 원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저는 법학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를 2004년도, 데뷔한 지 한 10년 된 때부터 시작해서 15년, 16년간을 써왔고 또 그것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생기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제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 감성적인 글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제 의도는, “내가 공기를 흡입해야지.” 하면서 호흡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이산화탄소를 내뱉자.” 하면서 “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글을 보면 그렇게 “흡~” 빨려 들어가고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이 “후~”하며 토해져 나오게끔 장르에 매이지 않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이 “아사밤”입니다. 저는 제2의 데뷔를 하는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이 책이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자 : 사실 지금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들을 가지고 목사님께서 이 책을 풀어주셨지만 목사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이 결국은 살고 싶지 않던 밤이라는 뜻도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목사님 : 그런데 그것을 뒤집어보면, 너무나너무나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은 밤입니다.
사회자 :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목사님께도 그런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들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목사님 : 제가 19세 때 자살을 했었습니다. 결국은 며칠 만에 깨어나고 살게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다가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하고 열네 살 2개월 되던 때, 주일날 교회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 펑펑 울었습니다. 너무 너무 무서웠습니다.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데 사는 것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펑펑 쏟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나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무신론자로 산다. 기독교는 나에게 답이 될 수 없다.” 그때 질문이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결국은 무신론자의 삶은 선택했습니다. 교회 잘 나가는 동생을 순전히 말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전도하느라 기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저는 2년 뒤에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을 때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죽고 싶다는 단호한 결심도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2년 후에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누가 전도하는 사람이 있어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책을 읽다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과 “인생론”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두운 밤을 지내는 사람의 심정을 너무나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읽어주는지도 모릅니다.
사회자 : 이 책의 서문에도 보면, “어디선가 나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인생의 무게 때문에 슬픔 속에 잠들고 고독 속에 눈 뜨는 이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라고 써있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쓴 글들을 이분들이 읽으시면 그 안에서 위로를 받으시겠지만 이분들에게 목사님께서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위로의 메시지는 어떤 것입니까?
목사님 : 당신은 너무 비참한 사람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엄숙하도록 존귀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렇게 존귀한 사람답게 살아가라. 그리고 인생은 살기 싫다고 안 살 수 없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읽은 작품이 성냥팔이 소녀였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고모가 가르쳐서 글을 깨우쳐서 초등학교 들어가서 읽었는지 들어가기 직전에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일곱 살이나 여덟 살 때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성냥팔이 소녀가 너무 추워서 성냥으로 계속 불을 켜다가 거기서 얼어 죽는 내용 아닙니까? 제가 한참 어두운 때를 지나던 것을 생각하면서 다르게 해석합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추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 불빛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성냥을 다 켜고 죽는데 그 불빛은 희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붙들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회자 : 김남준 목사님을 모시고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는 좌절 속에, 슬픔 속에,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있는 분들이 계실 텐데 이 시간을 통해서, 이 책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한 줄기의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라면서 오늘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수고해주신 김남준 목사님께 큰 박수 한 번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김남준 목사님의 저서,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을 함께 해 봤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내가 쓸모 있고 잘나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사실인데, 나를 부른 그분의 말 한 마디,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이 말이 우리 평생의 문장으로 남기를 소망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