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S KDMin 특강, Q&A
녹취자: 백지영, 이재호
(김남준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산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짧은 시간에 모두 다 마스터할 수 있는 그런 부피가 작은 신학자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런데 정해진 시간이 있으니까 아마도 제 강좌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오버뷰(overview)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더 공부를 하셔야지요.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계기가 없으면 사람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계기를 마련해 주고, 그 다음에 책을 읽는 것은 이제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제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나게 된 것을 너무 감사하고, 또 쉽지 않은데 어쨌든 에드워즈의 전집 전체를, 한 두세 권 정도는, 아마 설교집은 못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 빼놓고는 거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에드워즈와 함께 호흡하면서 긴 목회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내주신 질문지대로 질문을 하나씩 해 주시면 그 다음에 제가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귀한 강의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셀러니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우리가 미셀러니에 대해서 좀 읽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번역본이나 혹은 영어 원서, 혹은 사이트 등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사이트는 책 다 가지고 계시니까 사이트 별로 필요 없으시겠지만 사이트 혹시 원하시면 예일대학교 온라인 서비스에 들어가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셀러니는 번역된 것이 없습니다. 읽으려면 그냥 조나단 에드워즈 것을 그냥 읽어야 됩니다. 그리고 미셀러니에 대해서, 특별히 이번에 강의 끝나고 나면 여러분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를 우리 비서실에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특히 한국 책들은 여러분들이 사이트 뒤지면 쭉 나오잖습니까? 부흥과 개혁사 중심으로 나온 책들이 우리나라에도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책들이 한 70여권 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이버에 들어가서 찍으면 쭉 나옵니다. 그것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제가 보내드리는 것은 원서를 중심으로 해서 얼마나 되나 한 천 권 되려나 비블리오그라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보시면서 여러분들이 맘에 드는 것을 구입해서 읽으시면 됩니다.
미셀러니는 특별히 미셀러니에 관해서 나온 책이 없습니다. 연구를 해 놓은 게 별로 없습니다. 박사논문이나 이런 데는 있지만, 단행본으로 해서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기 좋게끔 이렇게 나온 그런 게 없습니다. 그리고 분량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 7백 페이지 정도, 8백 페이지 정도 해서 한 세 권 정도 분량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팡세 같은 그런 책인데, 팡세보다야 자세한 측면이 많지만, 특별히 저한테 설명 들은 것 이외에 특별히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읽을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들어가셔서 그래서 그 다음에 책을 사셔서, 책을 사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예일대 출판사에 주문을 하시면 책이 오니까, 그 책을 가지고 그냥 전권을 다 읽겠다고 하면 굉장히 힘들지만 쭉 넘기면서 맘에 드는 구절을 찾아서, 너무 길지 않은 것 찾아서 꼼꼼히 읽으면서 하나라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연습을 한다면 그러면 관심이 조금 더해지면 몇 개 더 읽고, 그리고 순서나 그런 것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짧게, 짧게 모아 놓은 단장(斷章)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디서부터 읽든지 문제가 안 됩니다. 꼭 첫 번째 권부터 안 읽어도 됩니다. 그래서 넘겨보시면서 관련이 있는 주제들을 찾아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음에 와 닿는 명문장들을 읽어나가면서 생각을 많이 한다면, 결국은 에드워즈의 미셀러니 세권 전체를 읽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다 읽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질문) 목사님 강의 들으면서 다른 것도 참 좋았습니다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나가서 말을 타고 다니다가 들어올 때 보면 옷 전체가 메모장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하고 아내 사라는 그것을 떼어가지고 정리하는 게 하나의 일이었다고 했는데, 그게 미셀러니가 됐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정돈된 그 사람의 신학도 중요하겠지만 거기서부터 그게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해 가지고 좀 가까이 대하면 좋겠다 마음이 생겨가지고 여쭤보았습니다.(16.11-47)
(답변) 그러니까 이제 이런 것이지요. 뭐냐 하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때는 사실 읽어도 깨닫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이 많아지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나 읽으면 그 사람은 아주 짤막하게 이야기했는데 내 속에 들어와서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막 불꽃처럼 일어나면서 사물과 사물들의 연관이 되는 것이지요. 이게 대(大) 학자들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이, 철학사에서도 보면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머리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로 철학 하는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칸트나 헤겔이나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칸트 같은 경우는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내가 이것을 왜 쓰게 됐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다룰 것이고, 내가 다룰 때 이런 용어를 쓰는데 이런 용어는 무슨 뜻이고, 그리고 이것은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야 된다는 식으로, 아주 차근차근하게 기하학적으로 설명을 해 나가는 것이지요. 데카르트도 마찬가지고. 그런가 하면 가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를 들자면 니체 같은 사람들, 논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번쩍번쩍하듯이 번뜩이는 기지(機智)를 가지고 철학적인 이론들을 펼칩니다. 파스칼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고, 칼 마르크스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고, 또 철학은 아니지만 심리학의 프로이드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계열에 속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글들은 논리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번쩍번쩍하는 어떤 섬광과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연구를 하려면 그것들을 다 빛들을 모든 다음에 자신이 그것을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재구성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에드워즈와 같은 천재들은 단순히 성경만이 아니라 성경, 물리학, 철학, 역사, 문학, 이런 지식들에 대해서 아주 해박한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지식 하나가 딱 떠오르면 이것이 파지직하고 불이 붙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어떤 새로운 결론을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학문이 악기 하나를 연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에드워즈와 같은 그런 천재들이 학문을 하는 방식은 심포니입니다. 교향악단을 연주하는 것 같은 그런 웅장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좀 힘든 면이 있지만, 그러나 이제 공부를 좀 더 하고 나면 거기서 얼마나 많은 내용들이 숨어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색입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에드워즈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철학자들 중에서 책을 많이 읽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경고하는 것 아십니까? 파스칼도 그랬고, 특히 쇼펜하우어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아주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했고, 또 니체 같은 사람도 너무 책을 많이 읽지 말라고 했습니다. 니체 같은 경우는 바젤대학교에 25살에 학위도 없이 고전학부 교수로 임명이 되어서 하루에 평균 2백 권씩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책을 읽었던 사람으로서 책을 많이 읽지 마라, 망한다,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망한다고 얘기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뭐냐 하면, 사색을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그런...
(질문) 목사님 말씀하시는 사색이라는 게 우리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묵상하고도 같은 개념일까요? 아니면 약간 다른 개념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답변) 묵상보다 좀 더 넓은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흔히 묵상하면 성경, 나, 하나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색은 성경이 중심이지만, 성경이나 만물을 통해서 나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그러니까 묵상은 성경을 앞에 놓아야지만 묵상이 되지만, 사색은 나무 한 그루를 놓고도 사색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돌멩이 하나를 놓고도 사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색이 당연히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성경적인 통제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뭐 하나가 탁 하고 떠오르게 되면, 커다란 당구대에 딱하고 당구를 때리면 다마가 여기저기 때리면서 막 돌아다니듯이, 탁 하나가 떠오르면 이게 성경으로만 갔다가 나한테 오는 게 아니라, 성경, 역사, 철학, 과학, 예술, 문학, 막 돌아다니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그런 지식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런 쓰리쿠션(three cushion)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그런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그런 쿠션작용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닙니다. 집요하게 그것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생물학이든지 물리학이든지 철학이든지 이것들을 자신과 관련시켜서 생각하고, 성경과 관련시켜서 생각해서, 결국은 이 우주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이 온 우주에 가득히 계시다는, 온 우주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그런 장엄한 어떤 신학적 사실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평소에 훈련이 많이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도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질문)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이네요. 사색이라는 표현이.
(답변) 그렇지요.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
(질문) 어제 우리 강의 들은 내용인데, 잠깐 다른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적합성을 ‘fitness’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약간 용어를 바꾸니까 ‘suitable’ 했을 때 훨씬 좀 이해가 빨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일반적인 개념 그것은 사색보다는 묵상, 매디테이션(meditation)을 많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집중해서 묵상하는 것을. 혹시 그것도 이제 약간 영어로 바꾸니까 좀 더 이해가 가까이 다가오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용어를 바꾸어버리면. 혹시 가능할까요?
(답변) 그런데 이제 교회 역사를 보면 사실은 소위 이야기하는 메디타치오(meditatio)라고 하는 그것이 원래의 기독교의 원래 전통에서는 굉장히 넓은 것이었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그러니까 들어가면 또 한이 없지만, 초대교부들의 예를 들어보자면, 초대교부들의 경우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제 여전히 신학의 체계 자체가 안 세워졌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주제를 어떻게 이 세계 전체와 연관시키고, 인류역사 전체와 연관시키고, 그 다음에 세상 모든 만물을 다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사실은 신학의 숙제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은 역사를 보면서도, 성경이 아니라 역사를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게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설교를 하면서 저기 구약의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역사부터 시작해 가지고 현재까지 구속사적 설교를 하다가 결국 다 끝내지 못하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것도 보면 그것은 무슨 성경구절을 외워가지고 나온 사람이나 아니면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하나님과 관련지어서 사색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 년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역사를 이루어 오셨는가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까지 다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사색의 힘없이는 그런 게 불가능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이게 마르틴 루터 때까지도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그러다가 그게 중세시대에 와서 그게 좀 문제가 생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색의 요소가 너무 많이 들어가고 사실은 사색의 중심에서 성경이 밀려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것들이 문제가 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소위 이야기하는 ‘렉시오 디비나’라고 하는데, 렉시오는 ‘읽는다’는 뜻이고 디비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 이런 뜻인데, 그것이 성경과 너무 멀어지는 사변적 신학으로 흐르는, 혹은 신비주의로 흐르는 것들을 경종을 울리면서 마르틴 루터가 ‘렉시오 디비나’를 다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적인 전통에 입각하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색운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런 것들이 계승이 되다가, 그러다가 이제 17세기 지나면서 지난(至難)한 신학적인 사변의 논쟁의 시기에 들어가고, 그러면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런 성경을 사색하는 전통을 다시 회복하자는 운동이 브레드런 처치나 이런 운동들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공부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고 성경묵상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거의 사색을 안 하는 시대니까, 감각적인 문화에 너무 매료되어 있는 시대니까 좀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회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새 이제 깨닫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신이 맑고 좋은 시간에 저는 책을 많이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깨닫게 되는 것은 그렇게 정신이 맑고 좋은 시간에는 책을 읽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신이 맑고 좋은 시간에는 오히려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생각을 사색하고 글을 쓰는 일에 오히려 그 시간을 써야 됩니다. 그것보다 약간 질이 떨어지는 시간에 책을 읽어야 됩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또 다른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 목사님, 답변 너무 감사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답변) 네, 그리고 열린교회 홈피에 들어오시면 ‘신학적 성경읽기’라는 렉시오 디비나인데, 그 세미나에 그게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상당한 시간에 걸쳐서 제가 논문을 발표한 게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마 일목요연하게 제가 이야기하는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 사색에 대해서 기독교가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서 문제가 됐는지 아마 한 번에 아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번 보시지요. 또 우리 서경철 목사님 질문 하신 것 있는데요?
(질문) 영적 대각성 시기에 어린 자녀들의 회심의 때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제가 자료 찾아서 피비바틀렛, ‘회심이야기’ 보고 있고요, 특별히 그래서 목사님 열린교회 다음 세대 사역 중심에 회심에 핵심가치가 있다고 들었는데, 목사님께서 이 시대 어떻게 우리 자녀들 회심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교회적으로 적용하시는지 그것을 좀 듣고 싶습니다.
(답변) 조나단 에드워즈 당시에는 미국이 아직 독립을 하지 않았고 뉴잉글랜드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에 비하면 모든 학문이나 문화나 이런 역사가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사람들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뉴잉글랜드에 있는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한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열등감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미국에 정착한지가 얼마 안 되니까 학문적인 데이터베이스나 아니면 교육 시설이나 이런 것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보아도 그런 것을 의식하는 게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스스로 학문에 대해서 반성을 한다고 할까? 결심을 한다는 내용이, “내가 대륙에서 어떤 나의 의견을 발표하기 전에는 먼저 미국 안에서 충분히 발표를 하고 또 사람들에게 비판도 받은 다음에 대륙에다가 발표를 하자”, 거기서 대륙이라는 것은 영국인데, “영국에다가 발표를 하자” 그런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제 우리가 좀 미소를 짓게 되는데, 에드워즈와 같은 천재에게도 사실 영국이라고 하는 무대는, 쉽게 이야기하면 대학로에서 노래 부르던 아이들이 뉴욕의 카네기홀로 가는 것같이 그렇게 설레고 떨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실은 신학자로서 영국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아까 말씀드린 피비바틀렛의 이야기가 나오는 '너래이티브 오브 서프라이징 컴버젼(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 ‘놀라운 회심 이야기’라는 책을 영국에서 출판하면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때의 토양 자체가 영국에는 조지 휫필드, 그 다음에 웨슬레 형제들을 비롯해서 18세기가 영국에서는 엄청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도시화가 이루어지던 때였고,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넘치는 노동력 때문에 공급과잉으로 인간이하의 삶을 강요받아야 되고,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고, 그 다음에 공장제공업들이 일어나서 자본주의가 폭발하듯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 과학 증기기관을 비롯해서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발달을 하고 이러면서 이제 뭐라고 할까 도시에 인프라들이 구축되고 있었던 이런 때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상적으로는 18세기하면 무슨 시대이지요? 계몽의 시대입니다. 계몽이라는 것은 엔라이트먼트(enlightenment), 빛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둠이었다는 것이지요. 무엇에 대해서 빛이 들어오는가? 그 빛이 들어오는 그 중심에 인간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계몽주의 시대가 있었고, 그러면서 철학자들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면서 17세기에 이성주의와 낭만주의를 함께 이끌어 가게 되는 때가 나옵니다. 데카르트도 그때 사람이고, 아주 걸출한 철학자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에드워즈가 ‘서프라이징 컴버젼(Surprising Conversion)’을 거기서 출판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제 그런 시대적인 사조에 거스르면서 어떻게 하든지 성경적인 기독교를 찾아가려고 사람들, 그리고 복음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야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는 아니었지만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후에 프리 처치(Free Church)를 형성하는 그런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때에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 ‘서프라이징 컴버젼(Surprising Conversion)’이 떨어지면서, 이것은 놀랍게도 조지 휫필드나 웨슬리 형제들이 일으키던 부흥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간파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팔로우 하는 그런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영국에 널리 읽히게 되는 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나의 목회에 적용한 것이 뭐가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시는데, 어떤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고 배운 것도 있지만, 내 생각이 나중에 보니까 에드워즈하고 일치했기 때문에 나는 이미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에드워즈도 그렇게 했더라 이런 등등의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크게 세 개인데, 첫째는 뭐냐 하면 성례입니다. 성례인데, 에드워즈는 성찬 자격 논쟁 때문에 노샘튼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했는데, 저희는 그것 보다는 세례를 줄 사람들의 회심을 정확하게 검증하고, 첫째는 정확하게 검증하고, 그래서 본인에게 간증을 하게하고,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 입증을 받게 하고 이런 절차들을 엄격하게 밟고 있고, 두 번째로는 교리문답을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세례를 안 줍니다. 그래서 최소한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그 다음에는 최소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우리 총회에서 쓰고 있는 세례문답에 대한 내용만이라도 완벽하게 외워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회심이 입증이 되었을 때 세례를 준다는 것 그것하고, 그 다음에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문제인데, 일꾼을 세우는 문제는 철저하게 항존직들 경우, 투표하는 경우에 다시 한 번 검증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진짜) 확실하게 회심을 한 사람인가?” 그리고 “그 사람의 행실과 이런 것들이 충분히 열매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엄격하게 검증을 하고, 그리고 그것이 다수에 의해서 확인된 사람에 한해서 투표에 나올 수 있게끔, 그렇게 저희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드워즈 때에는 누구를 세례를 준다고 하면, 그러면 교회에서 조사단원들이 그 세례 받을 사람의 동네에 갔습니다. 가서 그 사람에 대해서 탐문을 하는 것입니다. “서경철이라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데, 당신이 생각해 볼 때 서경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지요. 교회의 위원들이. 그러면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 교회 다닌다는 것은 사실인데 전에 빌려간 돈도 안 주고 땅도 세를 얻었으면서 돈 계산이 좀 정확하지 않다 이런 평가도 들어올 수도 있고, 아니면 또 그 사람 예수 믿고 나서 정말 달라졌다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아주 다정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도 잘 도와주는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이런 평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그 사람의 세례를 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의 아이합(IHOP)이라고 아십니까? 아이합, 아침 식사할 때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이 아이합이 돈만 있으면 누구나 되는 게 아니라, 신청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본사에서 자격을 심사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거치는 게 레퓨테이션 테스트(reputation test)입니다. 그 사람의 동네에 가서 그 아이합을 차리려고 하는 사람의 평판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판이 안 좋게 나오면, 전에 주유소를 했었는데 기름을 속이더라, 뭘 했는데 아주 상스럽고 욕도 많이 하고 하여튼 동네사람들 평판이 안 좋다 그러면 가게를 못 차리게 합니다. 허락을 안 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내도 안 내줍니다.
그런 것들이 이미 18세기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이미 교회에서 세례줄 때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 까지 찾아가서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까지 레퓨테이션 테스트(reputation test)는 못하지만, 또 할 수도 없는 게 아래 윗집에 살아도 누가 사는지 모릅니다. 아파트에서.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것, 그래서 예를 들자면, 장로나 권사나 안수집사가 되려면, 구역장이 우리가 한 3백 명 정도 되는데, 장년만, 그 3백 명이 앙케트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투표는 안하지만 앙케트를 했는데 거기서 점수가 안 나오면 장로들도 추천을 안 합니다. 그런 것들이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 좀 맞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회심집회를 합니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 그래서 미취학, 취학, 그 다음에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까지,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회심집회를 합니다. 집회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초점 자체를 예수 믿고 회심하는 것에 맞춰서 그래서 그 설교를 하고,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직면하고 거기서 예수 믿기를 결단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갖습니다. 그래서 중고등부는 제가 항상 했고, 청년들도 그렇고, 그리고 주일학교까지 제가 하는데, 몇 년 안 하다가 올해부터 다시 주일학교까지 내려가서 제가 설교하기로 그렇게 했습니다. 거기서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회심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하고, 또 그런 집회의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이 정도면 됐습니까? 네, 그 다음에 이대범 목사님, 질문하실 것 있으면 하시겠습니까?
(질문) 1강하고 관련된 것은 아니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사상이 초기와 또 말년에 계속 연결이 되었는지 조금 변화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34년 ? 운동 있었을 때부터 그때 철학, 신학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생각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 무르익어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드는데, 처음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 어떻게 좀 변화가 있었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답변) 발전은 하고, 또 일부 어떤 것들은 이제 좀 더 경험이 쌓이면서 단호하던 입장이 유보적인 입장으로 바뀌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회심에 관해서 처음에는 에드워즈가 좀 과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흥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회심한 것을 보고, 그 회심한 사람들의 유형이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에드워즈를 공부하려면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공부해야 되겠지만 그 중의 하나 공부해야 될 게 18세기의 부흥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제가 한 30년 전에 번역한 책이 있는데 ‘Historical Collections of 18th Centuries Spiritual Revival’이라는 존 길리스가 쓴 책입니다. 존 길리스가 그 책을 쓴 게 아니라 편집을 했는데, 그게 ‘18세기의 위대한 영적부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됐습니다. 꽤 두껍습니다. 지금도 출판되고 있는지 모르는데, 솔로몬에서 찍혔는데 지금 아마 인터넷에 들어가서 찍어보시면 중고 같은 것은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한번 사서 읽어보시면, 특히 그 앞에 서론으로 나오는 게 있는데 그런 것들이 18세기의 부흥에 대해서 잘 말해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좀 관심사가 뜸해졌지만, 30년 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그쪽에 관한 책들을 좀 읽으시고, ‘에드워즈의 신앙부흥’ 그 다음에 이안 머레이 목사의 ‘리발이벌 리바이벌리즘(Revival Revivalism)’이라든지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한번 18세기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한번 survey를 해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회심에 관해서 처음에는 부흥에 나타나는 아주 급격하고 뚜렷한 회심만을 강조하다가, 이제 면밀히 부흥의 시기에 일어났던 회심한 사람들을 목회하고 관찰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패턴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회심의 형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입장을 갖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에드워즈의 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연구하면 지금 질문하신 것들을 좀 세밀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에드워즈의 사상은, 마치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다메섹의 경험이 하나의 씨앗이 되면서, 눈사람으로 말하자면 그게 뭉친 눈이고 그것을 계속 굴리면서 눈사람처럼 그의 사상이 확장되어 갔듯이, 에드워즈도 역시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의 어떤 깊은 회심의 경험이 종자씨가 되고 그러면서 그 후에 자기가 계속 학문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이것들이 계속 확장되어간 그런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할 때에 이미 이야기했지만 당시의 뉴튼주의라든지, 그 다음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그런 윤리운동이라든지, 낭만주의사조라든지 그리고 특별히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대한 재해석운동이라든지, 그 앞서 더 큰 조류 속에 있었던 신플라톤주의의 재해석운동이라든지 하는 그런 학문적인 사조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과학주의적인 사고방식이나. 그러면서 에드워즈의 신학이 계속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자, 그 다음에 서동혁 목사님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 저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1강 질문은 아니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모든 사상가들, 교부들부터 해서 그 시대 당대 기독교의 큰 대척점, 적들을 향하여서 끊임없이 논쟁하고 반박했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이나, 뉴턴은 중세 때지만 또 칼빈이나, 또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씀하신 것처럼 계몽주의라는 큰 조류와 또 이신론이나 이런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변호하고 변증하고 또 성도들을 목양하는 일들을 해 온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어떻게 저작들에 영향을 주고 나타났는지 그런 부분들과 함께 21세기에 저희 목회하는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금방도 말씀하신 대단히 감각적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와 목사님이 보실 때 어떠한 저자나 학자들 또 어떤 것들을 공부할 때 이 시대에 이런 큰 적들에 대해서 변증하고 목회하시는지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답변) 자, 예를 들어봅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사람입니다. 100년만 시계를 뒤로 돌리면 17세기입니다. 여기에 이제 지금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니까 신학적으로는 존 오웬이라는 거목이 떠오릅니다. 존 오웬만 하더라도 평생 싸웠던 세 마리의 용이 있습니다. 소키누스주의, 소키누스주의는 아시지요? 루터시대 때의 신학자인데 아주 극단적 이성주의입니다. 그 다음에 카톨릭주의, 그 다음에 알미니우스주의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소키누스주의가 이성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권 안에 있고, 그 다음에 카톨릭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권 안에 있고, 알미니우스주의는 개신교권 안에 있는 파(派)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대적이 세긴 셌지만 그러나 상당히 명료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을 뒤로 시계를 돌리면 에드워즈시대에 옵니다. 에드워즈가 마주해야 됐던 그런 용들은 무엇이었는가? 제일 먼저 뉴토니즘(Newtonism)이라는 용입니다. 뉴톤이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게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자연과학에 있는 말하자면 수학적 사실들입니다. 자연현상들이 모두 수학적인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발견입니다. 결국은 세계 전체가 보이지 않는 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힘, 이런 것들 다 필요 없고, 그냥 이 세계 자체가 엄격한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신의 영역으로 돌렸던 굉장히 많은 현상들이 사실은 우리가 그 법칙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법칙에 의해서 세계가 모두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이 보이는 세계에서 축출되는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러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과학법칙의 발견에 의해서 하나님이 축출되어야 하는 것 사이에 합의를 보려고 했던 것이 이신론(理神論)이란 말입니다. 영국에서 일어났던 이신론입니다. 디즘.(deism) 그런 것이 첫 번째 용이었고, 그래서 에드워즈는 지난 강의시간에 얘기했지만 '필라소피 오브 사이언스(Philosophy of Science)'라는 책을 읽어보면 당시에 막 들어오기 시작했던 뉴톤주의를 에드워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해석해내려는 몸부림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계몽주의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두 개가 사실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같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계몽이라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빛이 들어오는 것인데, 그 빛이 인간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결국은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수동적인 요소가 아니라,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 중심에 와야 할 존재라고 하는 것이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어떤 그 이상들을 다시 복귀시키는 그런 의미에서의 엔라이트먼트(enlightenment), 이게 싸워야 했던 아주 대표적인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당시에 카톨릭은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비판은 하지만 미국에서의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싸워야 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어려운 대적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죽은 정통입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신학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부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과도 심각한 신학적인 다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던 소위 이야기하는 단위신론(單位神論), 뉴니테리안(Unitarian)이지요, 이런 사람들이 에드워즈 사후에도 결국은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에드워즈가 마주했던 하나의 커다란 대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사실은 그런 싸움을 싸워왔던 것이고, 사실 에드워드의 마음속에 있었던 가장 커다란 소명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미친 듯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서구우월주의 관점에서의 뉴톤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어떤 신적인 가치 그리고 성경의 진실성 이런 것들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던 때였고, 특히 18세기는 도덕주의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19세기의 자유주의를 준비하는 앞길을 놓게 되는데, 결국은 인간중심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는 중생과 회심의 문제라든지 성령의 내주하심이라들든지 성령의 역사라든지 이런 것들은 다 무지와 미신의 소산이 되고,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남는 것은 결국은 인간이 얼마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심자리에 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인 것들이 아주 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미국의 역사를 보시면 토마스 제퍼슨을 비롯해서 그때에 미국을 설립했던 위대한 인물들이 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심지어는 달러 안에도 ‘인 갓 위 트러스트(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 글귀가 새겨질 정도였고,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고 했지만, 그 당시의 모든 미국의 정치인들은 극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에드워즈가 경계하던 이런 사상에 모두 물들어 있는 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기독교를 이미 추종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기독교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공부할 때 역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의 유럽의 역사와 그 다음에 미국의 역사, 그리고 에드워즈가 그런 사변을 통해서 논파하려고 했던 그런 시대의 사조들이 어떠했는가 라고 하는 것들, 새로운 철학사상의 운동, 이런 것들의 맥락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해석해야지만 좋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 서동형 목사님 하셨나요? 예, 지금 막 하셨고, 임재성 목사님 마지막으로 듣겠습니다.
(질문) 예, 저는 1강에서 질문하는 내용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회심한 내용들에 대해서 몇 번 나오지 않습니까? 두 번 얘기하는데, 첫 번째 회심이 늑막염이 걸림으로 인하여서 본인이 이전에 알미니안 쪽의 생각과 사상을 갖고 있었다가 완전하게 칼빈주의 쪽으로 자신의 사상이, 조금 신학을 좀 바꿨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것 같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한번 코멘트를 좀 주시면 어떨까, 그런데 이게 맞는 이야기인지..
(답변) 예, 맞는 이야기입니다. 책마다 연대가 좀 다르기는 한데, 제 생각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학부 다닐 때는 아니고 대학원 시절이었던 같습니다. 그러니까 열아홉 살에 대학원을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 임세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열아홉 살 그때쯤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건강이 매우 안 좋아서 매일 말을 타고 운동 삼아서 숲속을 산책하게 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을 합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전서1장 17절에 나오는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그것을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개인적으로 아주 깊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그런 비슷한 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알빈 플란팅가(Alvin Carl Plantinga)의 고백에서도 나옵니다. 자기도 등산을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체험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쨌든 에드워드가 그러면서 누구의 어떤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생각이 나서 엄청나게 회개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에드워즈는 그에 대해서 깊이 자기의 죄를 자각하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당시의 지성인 하면 인간의 가능성, 그 다음에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구제되지 않으면 비참한 존재일 뿐이라고 하는 그런 것에 지성인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당시 표준적인 인간관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거기서 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칼빈주의자가 됐다고 하는데,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칼빈은 그렇게 큰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전집 전체에 칼빈이라는 이름이 열두 번 나옵니다. 그렇게 엄청난 책에 열두 번 나온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고, 에드워즈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에드워즈 자신은 칼빈을 기독교 역사의 한 성경적인 기독교를 펼쳤던 많은 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생각을 했지 그렇게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가야 할 신학자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에드워즈가 모든 사람을 향해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사상 전체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물려받은 사상이 에드워즈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고, 칼빈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꾸 에드워즈를 칼빈주의자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에드워즈는 아마 그렇게 불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한 계기가 되어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주권,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이런 칼빈주의적인 사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봅니다. 그렇지만 칼빈에 비해서는 훨씬 더 복잡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아주 역동적인 자세로 기독교의 변증에 임했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분이 질문하셨는데, 기도합주회에 관해서 누가 하셨지요? 기도합주회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예, 이렇게 해서 됐는데, 혹시 또 빠진 것 있으면 질문해 주시면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 다 이야기가 된 것 같고 그 다음에, 최윤성 목사님이 질문해 주신 것 같네요. 기도운동에 대해서. 최윤성 목사님 질문해 주시겠습니까?
(질문)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으킨 기도운동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한 그의 기도운동이 얼마나 확장되었는지 등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다면 현장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오래 전에 한양대학에서 있었던 선교한국이라든지 선교에 대한 운동에 가보면 우리 청년 대학생들이 기도합주회라는 용어를 꽤 많이 썼거든요? 여기서 시작됐는지는 이번에 글을 보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나라에서 이게 표현되는 게 시작됐는지, 그냥 우리 선교단체에서 쓰였는지 그 정도 알았는데, 기도합주회라는 것도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음 시작했더라고요. 그래서 기도에 대한 것이 어떻게 시작이 됐고, 이분이 훌륭한 사상가고 설교자라는 것은 알지만 기도운동을 또 어떻게 이분이 어떻게 확산해 왔는지 그것이 좀 굉장히 알고 싶었습니다.
(답변) 우리나라에서 기도합주회라는 말을 쓴 것은 데이비드 브라이언트라고 하는 미국목사님이 '기도합주회'라는 책을 쓰면서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콘서트 하듯이 그래서 이렇게 합주회 하듯이 전 세계에서 많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면 그러면 선교를 촉진시킬 수 있겠다 이렇게 그런 안에서 '기도합주회'라는 책이 1988년인가 한 90년 그때쯤 나옵니다. 그런데 나오는데, 그 책 자체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콘서트 오브 플레어(Concerts of Prayer)'라는 책을 그대로 따와서 현재적인 적용만 집어넣어서 만드는 바람에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도합주회'라는 책을 다시 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계기가 무엇이냐 하면, 18세기잖습니까? 그러니까 1742년에,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글래스고우라는 데가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원산 정도 되는 부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거기에,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어에 글래스고우 대학도 있잖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좀 떨어진 캠버스랭이라는 곳에서 커다란 부흥이 일어납니다. 18세기에. 그러니까 에드워즈가 생존해 있을 때입니다. 1703년생이고 1742년이니까 30대 후반이었을 때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캠버스랭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부흥이 일어날 때에 거기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 윌리엄 매클로크라고 하는 목사입니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인데, 이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기도하고 싶은 자신의 영혼의 영적인 상태에 고민하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18세기에는 영국에서 이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기라성 같은 청교도설교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산업혁명에 찌들어가지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이런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복음이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던 영국 역사에서는 가장 복음적으로 복 받은 시기였습니다. 매클로크목사가 자기 집에서 기도모임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점점 커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당시에 인기절정에 있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방문을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해 줍니다. 세 번인가 몇 번을 설교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서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한 머리가 하연 백발의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직신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하기를 내가 평생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르쳤는데 지금은 내가 속죄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있다고 하면서 감격하는 회심의 장면이 있는데, 어쨌든 신학자들을 회심시키기까지 그렇게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그 임세에 아까 이야기했던 '너래이티브 오브 서프라이징 컴버젼(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 ‘놀라운 회심이야기’라는 그 책이 영국에서 출판이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많은 목회자들, 청교도들 가운데도 유명했던 길레스피나 그리고 존 어스킨 같은 사람들 그리고 로브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널리 소개가 됩니다. 소개가 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생각의 결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굉장히 상당한 권위 있게 받아들이고 존중해 주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만 해도 뉴잉글랜드는 사실은 책을 구하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런 깊이 있는 학문적인 책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아주 사명감을 가지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최신 도서들을 보내줍니다. 책들을.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연구에 굉장히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문) 이 부흥운동이 에드워즈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고 뉴잉글랜드에서도 일어나고 지금....
(답변) 그렇습니다.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시적으로 일어났고, 그리고 조지 휫필드도 사실은 대서양을 건너가면서 그러면서 이제 부흥운동을 신대륙에서도 부흥운동을 계속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느 정도로 존경을 받았느냐 하면 스코틀랜드의 아주 굉장히 큰 교회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사실은 담임목사로 청빙을 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고민을 하다가 안갑니다. 왜냐하면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너무 달라서 뉴잉글랜드 사람인 자기가 영국의 본토에 가서 목회할 때 과연 자기의 생각을 그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확신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양을 하고 자기는 자기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서신을 굉장히 오랫동안 주고받습니다. 매클로크목사하고.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제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당신들이 기도운동을 거기만 국한시키지 말고 미국과 연계를 짓고 그리고 다른 나라와 연계를 지어서 그래서 합주회 하듯이 기도회를 하기로 하자, 이렇게 해 가지고 2월, 5월, 8월, 11월 이렇게 대개 한 석 달에 한 번씩 첫 번째 화요일 날 서로 장소는 달라도 합심해서 기도하기로 약조를 하고, 그리고 이제 합주회 하듯이, 말하자면 월드와이드 플레어 무브먼트(Worldwide Prayer Movement)를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실은 주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이미 시작이 됐고 영국 사람들 중심으로 하는 건데, 그런데 겸손하게 자기가 그들을 지지해주면서 그들 속에서 시작된 기도운동을 미국에까지 확산시키고,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마다 시간을 내어서 자기가 몸소 열렬하게 이 기도모임을 인도하면서 이제 기도운동을 펼칩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기도합주회라는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2년만 해보고 중간평가를 하고 다시 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냥 하고나서 좀 있다가 7년을 더하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7년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잠깐 쉬었다가 다시 또 7년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1758년인가까지 계속 되게 되는데, 유명한 일화입니다. 기도운동의. 그것을 놓고도 굉장히 반대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익숙해져있는데, 인터넷도 없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대에 시간과 약속을 하고 연대를 이루면서 이렇게 보이지 않는 기도모임이, 비가시적인데 이렇게 연대를 이루면서 기도하는 것이 좀 미신적이 아니냐 이런 비난도 있었고, 그런 것에 대한 상세한 변증과 그 다음에 이 기도합주회의 당위성에 대해서 쓴 책이 있습니다. 그게 기도합주회라는 책입니다. 여러분들이 한글로 보고 싶으면 부흥과 개혁사에서 작은 책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을 보시면 기도합주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비슷한 시대인 것 같은데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운동하고는 전혀 이게 매칭이 안 되고 상관이 없는가요?
(답변) 그러니까 모라비안 교파의 사람들도 18세기에 일어났던 것이고, 모라비아는 더 올라가면 종교개혁에서 갈려져 나온 재세례파하고 연결이 됩니다. 훨씬 더 엄격한 회심과 그 다음에 언약보다는 인간의 회심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엄격한 복음적인 실천 같은 것들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구원의 확신 같은 것들을 강조하던 사람들인데, 모라비안 교도에 와 가지고 약간 신비적인 요소들이 가미가 됩니다. 그런데 그 모라비안 교도들과 18세기의 웨슬레의 부흥운동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웨슬레가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탔는데 폭풍이 일어나가지고 배가 거의 뒤집힐 정도가 되어서 그때 막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런데 모라비안 교도들이 일체의 동요하지 않는 자세로 모여서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그 두려움을 이기는 것을 보면서, 저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나에게는 없다는 어떤 영적인 부족한 느낌을 절실하게 경험을 하면서 웨슬레가 회개하는 그런 하나의 중요한, 회개라기보다도 자신의 회심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구원받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그런 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계기는 올더스게이트 가(街) 에서, 제 ‘시험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도 썼는데, 자기는 진짜 가기 싫은데 억지로 이끌려서 성경공부 모임이 있다고 갑니다. 가는데 거기서 로마서 주석 서문을 누군가가 읽는데 그때 성령의 불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아주 중요한 회심에 이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모라비아하고 에드워즈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데, 모라비아도 역시 정통적인 매인스트림(main stream)에서는 약간 벗어났지만 그런 18세기의 신앙부흥운동의 커다란 줄기 속에 있었다는 것까지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 그 다음에 최윤성 목사님은 그렇게 됐고....
서경철 목사님) 000(1:25:21) 신학과 세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해서 감사하고 더 많이 읽고 이야기하려면 000(1:25:27)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따로 교수님의 어떤 철학사 강의나 신학사 강의를 특별과정에 넣어 달라고 학교측에 건의를 하고 싶습니다. 질문입니다. 교수님과 더불어서 에드워즈를 연구한 학자들이란 논문 중에서 교수님이 이 사람 글은 쫌 통찰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싶다 싶은 것이 있으면 몇 개 소개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담임목사님) 우선 여러분들이 이렇게 편한 것으로 따지자면 한글로 번역된 것이 읽기 편하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 권들의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최근에는 에드워즈를 공부하고 돌아온 교수들의 책들도 강웅산 교수나 조현진, 장경철 교수 이런 분들의 책들도 나와 있고 번역서도 나와 있으니까 읽으시면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에드워즈 시간인데 제일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한 것을 읽으려고 하지 말고 에드워즈를 직접 읽어야지 그것이 진짜 에드워즈를 읽은 것이 됩니다. 에드워즈를 놓고도 다양한 해석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제가 주장하는 바는 에드워즈에 관한 책, 개론서도 필요없고 바로 원전으로 들어가라고 말씀드리는 주의인데 그것이 어떤 사람들한테는 매우 어려울 수 있으니까 기본적인 개론서들을 읽고, 지금 저한테 들은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개론서를 몇 권 읽은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정도로 해 놓고 풍덩하고 조나단 에드워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읽는 것을 한 70%로 놓고 에드워즈에 관해서 쓴 것을 30% 정도 비율을 놓는다고 생각을 해서 10시간 에드워즈를 읽으면 3시간 정도는 다른 사람이 에드워즈에 대해서 쓴 것을 읽어나가면서 병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쓴 이야기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가 에드워즈를 직접 읽으면서 비판적으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대해서 잔뜩 강의를 듣고 그 다음에 에드워즈를 읽는다고 하는데 보면 몇 권 읽었는데 다 에드워즈에 관한 남의 이야기를 읽고 실제 에드워즈의 전집은 뚜껑도 안 열어 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에드워즈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의 책을 먼저 들어가서 이정도 설명 들었으면 충분하니까 그 중에서 신앙정독론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으니까 신앙정독론을 가지고 읽으면서 그러면 다른 느낌이 들 것입니다.
재작년인가 여러분들의 선배 한 분이 에드워즈를 꽤 많이 읽은 분이었습니다. 신앙정독론 강의를 듣고 나서 자기가 전혀 읽어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들이었다고 그러면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신앙정독론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다시 읽기 시작한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신학정독론을 이런 설명 없이 들으면 지루한 설교집입니다. 사실 그러한 배경에는 에드워즈의 그런 아카데미즘이 깔려져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독 이론을 가능하게 했던 학문적인 사조들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볼 때 훨씬 더 깊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를 완성시키면 그 다음에 다른 것을 읽을 때 두 개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해하기가 쉬워지고 그 다음에 또 하나를 읽으면 더 이해가 빨라집니다. 거의 다 읽으면 이것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누구의 말에 현혹되지 않게 되고 미국이나 한국에서 저자들이 에드워즈에 대해 써도 그것을 이렇게 바라보면서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독자적으로 비평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관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를 그렇게 뛰고 나면 다른 사람을 공부할 때는 이것이 학문적인 도움이 되어서 그래서 또 다른 학문들을 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어떤 도전을 받느냐고 하면은 학문이 성경과 신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학문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것이 자기의 역할을 해 나가는 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폭넓은 학문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눈을 뜨고 여러분들이 공부할 수 있게 된다면 에드워즈를 통해서 얻는 유익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드워즈를 그런 식으로 공부하고 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 하고도 성경의 이야기를 할 때 훨씬 더 많은 접촉면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도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대범 목사님) 목사님 강의 통해서 역사 속에 흐르는 인문학과 000(1:32:20) 신앙의 발전 과정을 저희가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리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는 조금 다른 질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마지막에 사임하면서 교회 사례비 증액으로 여러 차례 요구했던 것에 대해서 저희 정서로는 맞지 않아서 한국 교회 정서상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어떻게 좀 방향을 잡을 수 있을지 상당히 많은 대식구 많은 손님들이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런 상황 가운데 절대적인 필요가 있어서 요청을 했지만 목회자로서 이런 부분들을 어디까지 좀 교회 측에 요구할 수 있을지 이런 부분들이 고민이 되어서 목사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결론만 이야기해서 에드워즈를 따라하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남이 세워 놓은 교회에 갔을 때에는 더더욱 겸손해져야지 에드워즈처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즈는 기본적으로 귀족생활이 몸에 벤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컨텍스트에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치 조선시대에 돌아가서 양반과 상민의 개념 같은 것들을 이해하기 어렵듯이 우리가 에드워즈에 대해서 지금 2020년대를 살고 있으면서 1700년대의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 그런 귀족적인 것들이 몸에 베어 있던 사람이었고 그 시절만 해도 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사회적인 수준이 된 사람들만이 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고 사라 피에르폰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동의회 할 때 피에르폰트가 사례비를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당시에 4~5명의 노회를 두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발표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초안을 잡아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예들을 상당히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여러분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지만은 에드워즈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땅의 넓이가 우리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그 때에는 지금하고 부동산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현금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은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에드워즈가 세속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은으로 만든 그릇이 아니면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귀족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문화에 관한 것이고 세속적인 사람은 아니었다고 하고 우리는 아마 마음속으로 그릴 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같은 그런 에드워즈를 그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 문맥 속에 보면 사실 목회자가 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 목회자가 되는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만 이야기합시다.
서동혁 목사님) 여러 가지 질문이 많이 생기는데 첫째는 에드워즈 책 안에 원전을 읽어야 된다 말씀해 주셔서 어떤 순서로 에드워즈를 순차적으로 읽어 나가면 좋을 지 가이드를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강의 중에 에드워즈가 그 교회에서 쫓겨나는 상황에서 에드워즈가 14시간 연구한 상황에서는 이런 따스한 목회, 목양이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그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했는데 우리가 에드워즈를 따라서 연구도 하고 신학적으로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려면 준비를 해야 되는데 현실은 그러기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개척을 준비하면서 해야 될 게 너무 많았습니다. 이런 따스한 목회와 연구하는 신학적인 설교와 목회에 밸런스를 어떻게 찾아야 될지 그런 개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말씀하신 최근 에드워즈 연구가 강의 중에 설교자 에드워즈에 대해서 조명을 많이 한다고 할 때 설교자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우선 에드워즈의 책을 무엇부터 읽으냐 그러는데 필요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읽는 필요가 무엇이 큰가에 따라서 예를 들면 부흥과 관련시켜서 영적인 부흥과 관련시켜서 에드워즈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기록들을 중심으로 읽는 것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를 사상으로 접하고 싶다 윤리 철학적인 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되시는 분은 에드워즈의 Ethical Writings 윤리 철학적 저술부터 시작을 해서 천지창조의 목적이나 참된 미덕의 본질 이런 것 쪽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쪽은 철학적인 사색 능력이 있어야지만 이해가 될 것입니다. 1권이 의지의 자유인데 1권부터 읽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려워서 기가 꺾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권하고 싶은 방법 중의 하나는 너무 어려운 것을 읽다가 귀 죽지 말고 에드워즈의 설교부터 시작하는 것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집 중에 한 권을 골라서 26권 정도에서 한 8~9권 정도가 설교집입니다. 나머지는 대개 논쟁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원죄론 같은 것도 순수하게 원죄론을 우리 조직신학처럼 써 내려 간 것이 아니라 논쟁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라서 사실 그 논쟁을 잘 이해하면서 들어야지만 이해가 되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총체적인 윤관을 뜨기에는 조직신학쪽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 맥락을 알고 나면 에드워즈의 필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저는 설교부터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에드워즈 전공자도 안 읽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사실 설교 속에 에드워즈의 신학과 영성과 이런 모든 것들이 묻어나옵니다. 설교는 그래도 비교적 쉽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으면서 에드워즈가 어떤 신학을 강조하고 견지하고 있는지를 읽어 내려간다면 우선 설교집은 한 권을 다 읽지 않아도 설교 하나하나가 딱딱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하나만도 굉장하기 때문에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신학 공부의 유익 이런 것들은 설교 한 편을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책 한 권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집을 보면서 일주일에 설교 한 편이라도 읽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꼼꼼하게 읽으면 오히려 에드워즈에게 접근하기 쉬지 않겠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흥서부터 접근을 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였기 때문에 빨려들듯이 읽을 수 있었고 자기가 흥미가 있는 것이면 영어도 좀 잘 읽혀집니다. 흥미가 없는 것이면 영어도 굉장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차피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의 영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에드워즈를 읽으려면 18세기 영문법을 한 번쯤은 훑어 보고나서 읽기 시작하는 것이 고생을 덜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목회스타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에드워즈는 가문 자체가 사교성이 좀 없는 집안이었고 대개 고집스러운 피가 흐르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에게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따뜻한 목회에 대해서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교회에서 매달아 놓고 치는 종이 누가 건들지 않았는지 떨어졌습니다. 교인들이 저 종이 건들지도 않았는데 왜 종 줄이 끊어졌을까 이랬더니 어느 교인이 에드워즈 목사가 째려봤기 때문에 끊어졌을 것이다고 그럴 정도로 차가운 이미지로 비쳐졌는데 그것을 가지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나무라고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 시대에 자기 삶으로 살았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그런 탁월한 학문성을 못 가진 것을 섭섭해 하지 말고 에드워즈 같이 그렇게 차가운 성격은 아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교인들하고 친근하게 지내면서 목회를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투표에서 제가 숫자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제 머리 속에 입력된 숫자는 17인데 그 때 교회가 한 650명 정도 회중수가 되었던 교회였고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얼마가 되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제 기억으로는 사백 몇 명 있었는데 어쨌든 말도 안 되는 투표 숫자로 에드워즈는 축출되게 됩니다. 그런데 맥락을 보게 되면 이미 문제를 담당하는 위원들이 아르미니우스주위로 이미 다 넘어간 사람들이었고 판세는 이미 아르미니우스주의 판으로 다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목회자들도 오히려 에드워즈를 쫓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고 교인들하고 잘 지내면서 따뜻한 목회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심성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섬기고 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오히려 에드워즈가 여러분들에게서 배워야 하지 않겠냐 생각을 합니다.
다만, 우리는 에드워즈 같은 사람에게서 어떤 결점을 발견하면 그 결점 보다는 탁월했던 점을 주목하면서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에드워즈는 우리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사람이 다면체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로서의 에드워즈, 부흥 운동가로서의 에드워즈, 교육가로서의 에드워즈, 상담자로서의 에드워즈를 비롯해서 신학자로서의 에드워즈,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고 저술가로서의 에드워즈의 문체는 미국 문학사에서 반드시 공부하고 넘어가야 될 정도로 중요한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에드워즈 원서를 좀 들여다보시면 웬 문장이 이렇게 길어 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보통 5~10줄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 당시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라틴어를 매우 잘 했기 때문에 졸업식에 라틴어로 축사를 할 정도로 잘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학문적인 용어들이 하이클라스에서는 다 라틴어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에드워즈는 사실 히랍어는 잘 못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뉴저지대학이 세워지고 총장으로 불렀을 때 총장직을 고사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나는 겨우 000(1:49:34) 밖에 못하는 데 고전도 못 읽는데 내가 총장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그리스어에 대해서는 탁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라틴어에 대해서는 모든 문헌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정통적으로 어떤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사변할 때 이 사변이 라틴어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000(1:50:06) 글 같은 것을 보면 10줄쯤 안 끊고 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는 심지어 10~15줄 안 끊어집니다. 계속해서 콜론 콜론 나오면서 이어집니다. 독해자들에게는 곤욕이지만 그 당시에 기본적으로 000(1:50:29) 자체가 라틴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하듯이 영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호흡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영어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현대어에 더군다나 익숙해져 있는 영어 독자들에게는 읽기 만만하지 않은 책입니다. 존 오웬의 영어에 비하면 훨씬 더 쉽습니다. 존 오웬의 영어는 거기서 다시 100년을 거꾸로 올라가야 됩니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거의 영국 사람들은 영어하고는 또 다른 나라의 언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은 저술가로서 문학가로서의 에드워즈, 부흥 운동가로서의 에드워즈, 그리고 상담자나 교육자로서의 에드워즈는 이따금씩 발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은 매주 설교하러 올라가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를 다양한 에드워즈의 발자취들을 검토할 때 중심점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입각점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라고 할 때 그것을 설교자에다가 놓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전반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학위입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관심은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경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현재의 사조에 따라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에드워즈를 읽기 시작할 때 설교부터 읽어보라고 나는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설교 한 편 한 편이 굉장히 깁니다. 그리고 상당한 신학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설교를 읽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신학적인 통찰들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고 설교를 읽고 나면 다른 것들을 읽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임재성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즈가 부정적인 영향을 가졌던 사람들 그 부분에 있어서 감정에 너무 치우쳐 가지고 몰입되어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은혜 가운데 온전히 서지 못하고 감정에 치우쳐서 하는 그런 부분들, 예배 가운데 소리를 지른다든지 운다든지 뭐 이런 부분들로 인하여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사이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조지 휫필드가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 이루었던 부정적인 측면에 있어서 이 균형을 좀 잘 잡아야 된다. 그래서 제 생각은 느낀 것이지만 신앙감정론이 아마 그쪽에서부터 좀 이런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았는가 생각을 하면서도 빈야드 운동이 조나단 에드워즈에서 부터 나왔다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부분인가 하는 부분이 제가 두 번째 강의 때 했던 질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우선 빈야드 운동 이야기는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나왔다는 이야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빈야드 운동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제가 90년대에 빈야드를 일부러 캐나다 토론토에 갔었습니다. 에어포트 교회에 가서 두 번인가 참석을 했는데 결론은 그 건 에드워즈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존 아노트 같은 사람에게 기자들이 물어봤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회 때와 닮았다고 하는데 왜 죄에 대한 회개가 없냐고 했을 때 존 아노트가 나도 그게 진짜 궁금하다 고 이야기했는데 궁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실한 부흥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적은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현상은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빈야드 운동이 에드워즈에게서부터 왔다라고 내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빈야드 사람이 주장했는데 그것은 근거은 없는 것이다라고 오해를 풀어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조지 휫필드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비판을 합니다. 그것을 너무 크게 확대 해석을 해 가지고 마치 에드워즈가 조지 휫필드와 무슨 부흥회에 있어서 견해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침소봉대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그 당시에 명성이나 지명도, 1742년도에 캠퍼스랭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 사실은 에드워즈가 그렇게 호의적인 편지를 쓰면서 기도합주회를 제안하게 된 것이 1741년도에 그가 8월달에 엔필드에서 부흥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캠퍼스랭에서 보다도 1~2년 먼저 부흥을 먼저 경험하게 되고 그 본격적인 부흥이 있기 4년전 1736년에 이미 벌써 부흥의 조짐들이 일어나고 맥클로흐가 이미 경험했던 그런 일들을 에드워즈가 벌써 8년 정도 전에 벌써 경험해서 어떤 면에서 에드워즈가 선배의 위치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경험한 부흥이 유사한 것이 맥클로흐를 중심으로 해서 캠퍼스랭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지원해야 할 어떤 이 안의 내적인 강한 의욕을 느낀 것입니다. 맥락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1740년 그 때쯤만해도 명성에 있어서는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벌써 조지 휫필드는 거인이 되어 있었고 에드워즈는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하는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견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에드워즈가 이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조지 휫필드가 그 사경회를 인도하는 방식과 교회의 질서에 문제에 관한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방식의 문제는 조지 휫필드는 머리로 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달변이었고 문학적인 묘사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제가 수업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분은 매튜헨리의 팬이었습니다. 매튜헨리의 주석이 꽤 큰데 4번 읽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번은 무릎을 꿇고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휫필드의 설교는 어느 부분을 읽어도 설교도 별로 남지도 않았습니다. 설교를 보면 설교가 깊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휫필드는 자기가 받은 체험이기 때문에 가슴에 호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주 급격한 회심, 아주 뚜렷한 회개의 표현,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시했고 그러다 보니까 무리가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보기엔 사람의 감정에 직격적으로 불러일으키려고 하는 충동적인 시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옳지 않지 않느냐 그것이 정독이론에서 나오는 지성적인 인식의 작용과 정서의 반응, 그리고 그것이 의지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는 아주 정교하고 통합적인 그런 사고 속에서, 휫필드가 설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을 위험하다고 비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약간 조지 휫필드에게는 신비주의적인 면이 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와 신비주의를 충돌하는 것 사이에는 선을 긋고 싶었던 것이 에드워즈와 휫필드 사이에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 질서에 관한 것인데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설교자의 작용 문제였고 교회의 평화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설교자의 작용에 관한 문제는 에드워즈는 신학적인 훈련을 받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설교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드워즈는 하나님께로부터 설교자로 소명을 받으면 누구나 설교자가 될 수 있다라는 것을 폭넓게 인정을 한 것입니다. 심지어 과격한 견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회심을 했을 때에 목회자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명이 되었을 때는 목회자를 내보내야 된다 라고 할 정도로 과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에드워즈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훨씬 더 이성적이고 온건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지 휫필드는 훨씬 혁명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에드워즈와 휫필드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은 우리 생각하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협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인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한 조지 휫필드에 대한 생각은 굉장히 선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휫필드가 설교할 때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휫필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상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특강 3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윤성 목사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3번과 4번을 한 번에 질문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윤성 목사님) 3번으로 하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영역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는 사회과학이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못해서 그런지 제가 읽기로는 이 부분에는 접근이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오늘 날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점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한다면 사회과학적인 부분에는 어떠한 학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근래에는 사회과학적인 접근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서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시대를 앞서갈 수는 없잖습니까? 사회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나온 것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훨씬 이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 펼치고 있는 것 같은 사회과학적인 사유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앞당겨서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18세기에 일어났지만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19세기였습니다. 한 세기가 떨어집니다. 에드워즈 죽고 나서 그 다음 세기가 되어야지만 겨우 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게 됩니다. 1800년대 후반기나 와야 합니다. 영국하고 1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학이라고 하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에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형성이 되고 거기에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도출되기 시작하면서 사실은 사회학이라고 하는 학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고민을 에드워즈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발전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는 분야의 학문 자체가 성립을 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에 그런 점을 염두에 두시면서 이해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제 사회과학이라는 이론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후에 생겨나는 이 사회의 갈등과 많은 문제들을 정치 사회 구조와 함께 어떻게 이런 것들을 문제를 풀어가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훨씬 더 많은 사회학적인 그런 학문적인 발전들을 이루었습니다. 결국은 신학을 하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으니까 사회에서 우리에게 갈등으로 던져주는 과제들, 지금 한국이나 미국적인 상황을 통틀어서 이야기하면 빈부의 양극화 문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인권문제, 차별의 문제, 성차별의 문제, 기후문제, 생태문제 이런 것들은 사실은 우리 모든 인류가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풀어내고 소신 있는 답을 내놓고 이것을 기독교 신앙하고 연결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고 그래서 이 문제들을 풀어 가는데 도움을 줄 것인가라고 하는 쪽으로 우리는 사회학적 생각을 넓힐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책을 많이 읽으시고 삶 자체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답하는 삶과 고민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지만 육화된 설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서경철 목사님) 조나단 에즈워드가 공부를 많이 했으면서도 자녀들을 대개 모범적으로 양육했던 것처럼 굉장히 좀 마음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아이들이 사춘기로 들어가다 보니까 신앙 전공론적 입장에서 보면 얘네가 회심을 했는지, 믿는지 아닌지 잘 구별이 안 되는 상황 같은 놓일 때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얘네들이 담임목사의 자녀들로 자라기가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될까 이런 고민들도 많이 되는데 실제적으로 목사님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시는데 레슨이나 감사했던 것을 나누실 수 있으실지 ...
김남준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녀 교육에 마음을 많이 썼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청교도의 전통이었습니다. 청교도는 어떤 식으로 생각을 했냐면 가장은 목회자이고 아내는 전도사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머니 아버지 상에는 목자상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식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고 어떻게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무엇을 하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평소의 설교나 소신으로 볼 때에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굉장히 마음을 썼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러 명의 자녀들에 대해서 다 조사하지 못했지만 큰 탈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결혼할 뻔 했던 그런 뚜렷한 회심의 표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자녀들의 회심 문제에 대해서도 아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돌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엊그제 독자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자기 아이가 회심을 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 하면서 여러가지 소위 이야기하는 신정론에 관한 것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 조두순 같은 놈은 왜 태어났냐? 정인이 학대 살해 사건 같은 것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자기가 믿을 수 있냐? 이런 등등의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부모 자신이 아이들이 질문하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 자기가 먼저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녀를 모두 설득시킬 수는 없지만 안 믿으려고 하는 아이들은 설득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급한 불은 끌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이들이 질문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주 진중하게 아이를 설득할 수 있는 답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자기 주체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입니다. 자기가 주체의식이 깨어나면서 의심이 들고 기존의 가치관에 대해서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은 성숙에 이르기 위해서 꼭 겪어야 되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모두 신앙이 없는 것이다라고 보지 말고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부모는 좀 더 기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서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회심하지 않느냐고 막 닦달하는 것도 도움이 안 되고 자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고 자녀들의 마음속에 부모가 언제나 닻을 내리고 있는 배처럼 느껴지게 자기가 닻을 잃어버리고 물결에 쓸려서 이러 저리 흔들릴 때 아빠 엄마의 든든히 닻을 내리고 서있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아주 통렬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회심 집회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회심집회를 해도 모든 아이들이 회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아이들은 회심 못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회심하고,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줄 때 부모들이 간절히 자신의 아이를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두 권의 책을 추천해 드립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오는 돌이킴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중생과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장했던 그런 방식의 회심 목회가 어떤 식으로 지향되는가를 본보기를 보여준다고 보기에 꼭 읽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이야 엄마가 널 위해 기도할게 라는 책이 있는데 동화책처럼 쓰여 졌지만 어린아이의 회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두 권을 읽으시면 여러분들이 설교하실 재료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대범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학적으로 추구했던 바와 함께 부흥에 대해서 사모했고 성령에 나타나신 역사에 대해서 간절히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런 사역자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사역들을 오늘 이 시대에 구현하기 위해서 어떤 목회 방향을 추구할 수 있을지 신학적인 공부는 책을 통해서 이어갈 수 있다면 성령 사역에 대해서 너무나 개혁주의가 놓쳐 버린 것은 아닌가? 한국 교회가 합동 교단이.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목사님이 생각하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우선 설교자는 자기가 만난 하나님 이상을 설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를 보면 한 줄로 요약하라면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고는 설교자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남으로써 신령한 목회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가장 잊지 말아야 기도제목이 에드워즈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내가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이 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리저리 우려먹으면서 그러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살이 떨릴 정도의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열심 같은 책을 읽어 보면 나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을 특별히 읽어보고 부흥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나오는데 결국 그것들이 마지막에 보면 어디에서 모태가 나오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깊은 경험입니다. 부흥에 대한 경험입니다. 여러분들이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에드워즈의 일기, 묵상록, 결심문 이것들을 분량도 얼마 안 됩니다. 찬찬히 읽으면서 자신에게 적용시키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려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신학에 대해서 눈이 확 열린 것이 에드워즈의 경험이고 저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 쪽 방면으로는 백금산 목사가 쓴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시면 지금 말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용한 것은 에드워즈의 생각을 배워서 써먹으려고 하지 말고 에드워즈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라 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동혁 목사님) 에드워즈가 그 당시 성도를 목양하는데 있어서 점점 이신론과 계몽주의 가운데 비신화되는 세상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자신이 경험했기 때문에 계속 그 하나님을 전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이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시대이고 더 나아가서는 시대 가운데 어떤 접촉점이 있고 배운 지혜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가 목회하는데 어떻게 배운 것들이 도전이 되고 복음과 하나님을 소통하는데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 그 부분을 묻고 싶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1700년대 사람이니까 정확하게 320년이 지났는데 1883~4년 이 때쯤에 니체가 선언을 합니다. 모든 신은 죽었다. 그러고 선언을 하니까 유럽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신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니체가 처음 한 것이 아니라 헤겔이 했는데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니체가 그 말을 했다 이렇게 알려졌습니다. 모든 신은 죽었다고 했을 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은 죽었다 라고 하는 말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살이어도 말이 안되고 타살이어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타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이 타살될 수 있느냐? 그것은 하늘에 있는 신이 인간에 의해서 타살된 것이 아니라 있지도 않은 신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신이었는데 그것을 인간이 허물어 버림으로써 결국은 신이 타살된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진 신이 새로운 시대가 와서 사람에 의해서 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설명하면 길지만 그 정도로 이해를 하면 지금 와서는 신은 죽었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이 놀리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당시에는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합의였기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말은 충격이 됐지만 지금은 처음서부터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었다고 이야기를 할 때도 별로 실감이 안 나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시대정신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가지면 우리가 목회를 잘 하겠느냐? 제가 내리는 결론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능가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사유는 그래도 인간이 신을 밀어내고 인간의 이성을 우두머리로 삼던 시대에 그 시대와 싸웠던 에드워즈는 아예 그런 이성이 인간의 보편 이성이 우리에게 보편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라는 것조차도 믿지 않는 이 시대에는 에드워즈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당시 자기 시대에 충실했고 그 시대는 신을 몰아내고 인간의 이성을 우두머리로 삼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이성조차 축출되고 진리를 부인하고 어떤 보편 이성 자체를 거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에게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발판처럼 그 때에 에드워즈가 시도했던 것을 밟고 뛰어 넘어서 에드워즈에는 없던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진 시대에 맞설 수 있는 대안들을 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책을 하나 소개해 주겠습니다. 제 책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설교집 아닙니다. 읽다가 짜증이 나서 책을 던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그 책을 제가 100권 가까이 썼지만 당신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때 제가 주는 한 권의 책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한 420 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거기서 이제 진리의 상대성 문제를 3장에서 다룹니다. 그 책을 사서 꼭 완독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에드워즈를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이고 에드워즈를 그래도 본받는 정도를 가지고는 오늘 우리 시대를 극복할 수 없다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어 보시기를 바라고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맹신하지 말아라 에드워즈는 자기 시대에 충실했고 지금 우리 시대는 에드워즈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시대이고 훨씬 더 분란한 시대이다. 에드워즈를 반복하는 것을 가지고는 해결이 될 수 없고 그 발판을 밟고 뛰어 넘어야 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물리학만 하더라도 당시 뉴턴주의가 휩쓸었지만 이후에 아인슈타인이 나왔습니다. 양자역학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나왔습니다. 물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온 것은 뉴턴주의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양자역학 같은 것은 뉴턴의 물리학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들은 엄청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에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무형이나 음악, 건축, 도시미학에까지 그런 칸디스키나 자크 데리다나 이런 사람들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엄청난 말하자면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것은 이것만이 진리다 라고 하는 그런 고전적인 외침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에드워즈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가 어리도 올라가려고 할 때 자기 혼자 담장을 넘는 것은 힘들지만 발판 하나가 있으면 그것을 밟고 사뿐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발판의 역할을 에드워즈의 학문적인 업적들이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많이 읽는 사람이 장땡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최후의 승리는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에드워즈 강의를 하면 자꾸 사람들이 누구 책을 읽어야지 좋습니까? 에드워즈를 알고 싶습니다. 누구 책을 얽어야 되겠습니까? 질문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드워즈를 알고 싶으면 누구 책을 읽어야 되겠습니까? 김남준 책이 아니라 에드워즈를 읽어야 에드워즈를 압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안 갑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에 대해서 쓴 책들을 읽고 인터넷의 강의 몇 개를 듣고 에드워즈를 알았다고 생각을 하는데 에드워즈 근처도 안 간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작품 속에서 직접 만나야 합니다.
임재성 목사님) 이 번 강의를 통해서 제가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는데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를 가장 현실적으로 잘 풀어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 김남준 목사님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특강을 통해서도 그렇고 내용적인 부분들을 묵상하면서도 가장 현재 에드워즈가 목회를 했을 때 확실하게 잘 하시는 분은 저는 목사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가 요번에 저의 아이가 군대를 가는데 이번에 느낀 건데 김영래 목사님을 보면서 나의 아이도 저런 목사님이 됐으면 참 좋겠다. 어떻게 하면 김남준 목사님, 저런 귀한 김영래 목사님 같은 자녀들을 잘 양육할 수 있었을까? 저는 김남준 목사님에게 저희 아이도 2명인데 큰 아이가 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영래 목사님을 뵈면서 저런 자녀를 양육하는 귀한 목회자로 세운다는데 있어서 조금 조언을 어떻게 하면 가정 사역에 있어서 지금 보면 어떻게 보면 열매라고 하는 김영래 목사님을 어떻게 양육을 하셨는지 간단하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우선 첫 번째 말씀드리자면 기본적으로 자유인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된다, 자유롭게. 그래서 저는 우스갯소리나 종종 우리 아들한테도 하는데 저는 뼛속까지 자유주의자입니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유, 그것을 누구의 의해서도 속박 받지 않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후배 목사님이 오해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목사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르겠습니다. 우리 김영래 목사가 있으니까 본인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내 입으로 넌 목사의 아들이다 교인들이 보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교인들에게는 내가 반박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스러운 교육을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 아들이 여기 있지만은 우리 아들 6학년 때 제가 개인적으로 자녀 교육에 대해서 깊이 회심하고 그 다음부터 여태까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맹세코 보여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가져와서 보여준 적도 없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도 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부는 기능과 같아서 김연아처럼 차준환처럼 피켜스케이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아이가 잘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경험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뻘짓하면서 놀게끔 나둬야 합니다. 이것도 해보고 싶어요. 저것도 해보고 싶어요. 뭐든지 해봐라. 그러면 어느 것 하나가 자기한테 딱 맞는 것이 발견이 된다. 요리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업일 수도 있고 뭐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야죠. 목사님은 아들이 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우리 아들이 신학교 그 전달까지도 웬만하면 하지 마라. 태어나서 속박 받으면서 살 필요 있느냐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되지 그랬습니다. 우리 아들이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습니다. 네 마음이다. 웬만하면 하지 마라. 편안하게 해서 그래서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면서 교회 섬기면서 살면 되지 뭐 그러냐. 그런데 본인이 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목회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감사한 평가이지만 저는 거절합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가장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서 만나고 싶은 가족이 아닌 유일한 사람이 어거스틴 한 사람입니다. 그럴 정도로 어거스틴을 존경하고 고백록을 120번 읽었는데 그래서 재작년에 쓴 책이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번 사서 읽어 보세요. 이런 식으로 신학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명백히 신학책입니다. 칼빈을 너무 좋아하고 알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를 평생 본받고 싶어서 여태까지 에드워즈 전집을 읽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 서재에 요번에 비빌리오그래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대충 뽑은 것입니다. 아마 한 천권정도 갈 것입니다.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존 오웬을 제가 16권짜리 전집을 2~3개 빼고 다 읽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 20년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거스틴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제가 죽은 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김남준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캘비니스트는 더더욱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칼빈주의 아닙니까? 칼빈주의입니다. 그러나 나는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김남준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 아우구스티누스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칼빈이나 루터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김남준으로 하여금 거짓된 김남준이 아니라 참된 김남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신 도구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동화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통해서 참 나를 찾아가도록 그것을 원합니다. 동일하게 제일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의 팬이라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팬 필요 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조직하는 일에 대해서 나는 관심 없습니다. 그들이 내 책을 읽어주는 것이 고맙지 않은 것이 아니라 참 고맙고 좋은 것인데 그것은 내가 되라고 그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 삼아서 참 그 최윤성 목사님이 내 책을 많이 일고 최윤성 목사님이 되라고 하나님이 주신 도구입니다. 서경철 목사님이 제 강의를 많이 듣고 감탄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나를 못 만났더라면 결코 될 수 없는 서경철이 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성요소로서 태어났다고 믿고 거기서 자신의 삶의 가치와 보람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게 에드워즈의 종말론은 어땠을까? 읽어보면 역사의 진보적인 갭이 있었기 때문에 후천년 같기도 하고 무천년 같기도 하고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전천년 같기도 하고
김남준 목사님) 후천년설입니다. 그 점에서는 저는 동의를 안 합니다. 에드워즈의 종말에 관한 사상에 대해서는 제가 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의 글을 읽어 보시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에 개념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