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리반
녹취자 : 양일구
I. 본문해설
조직신학에서 논재들이 나올 때, 본질이 무엇인가와 작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시는가, 교회는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는가, 똑같이 그리스도는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14과에서는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을 다루고, 여기서 본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기 때문에 양성론, 즉 인성과 신성에 대해서 나오고, 15과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서 나옵니다. 신분은 낮아지신 신분과 높아지신 신분인 상태에 대해서 나오고, 16과에서는 그리스도의 직무,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나오고, 마지막 17과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나오며 기독론이 구성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1부는 그리스도의 인격, 2부는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1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존함과 본질, 신분 상태가 나오고, 2부는 그리스도의 직무, 속죄가 나옵니다.
A. 그리스도의 명칭
1) 예수 (Jesus)
예수라는 이름은 희랍어이지만 히브리어를 음독한 것입니다. ‘야샤“((Yasha) 구원하다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는 여호수아(Joshua), 호산나(hosanna) 입니다.
2) 그리스도 (Christ)
그리스도는 희랍어입니다. 이 희랍어의 히브리어 형태가 ’메시야‘(Messiah)입니다. 메시야는 ’마사‘(massa)라는 단어에서 왔고, 피동명사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이것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 ’크리스토스‘(kristos)입니다. ’크리오(Xrio)‘는 ’기름붓다‘ 의 수동분사입니다. 크리스토스는 영어로 크라이스트(Christ)가 됩니다.
3) 인자 (Son of Man)
“그리스도에 적용된 이 명칭은 다니엘에 근거한 것으로 가장 통상적인 명칭이며,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인간성의 표시이지만 역사적 기원을 보면 이것은 초인간적 특성을 지적해주며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으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지적해 주시는 것이다“ - 117p
이 부분은 ‘구원과 하나님에 계획’에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물어볼 때 대답하지 않으셨는가, 거기에는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대답하시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신자사상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신자사상은 구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강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상 왕권을 받을 자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 속에 팽배하던 정치적 메시야와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전파하려고 하시던 하나님 나라는 사라지고, 예수를 임금 삼아 로마를 때려잡자는 사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신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용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속에 있는 것은 지상왕국이었습니다. 그 왕국은 깨어져야 할 왕국이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질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셨으면, 유대인들은 지상왕국을 거꾸로 세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기대가 마지막까지 계속되면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되어서도 ”그 나라를 회복하실...“이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메시야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The Son of Man”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중요한 초점은 'The'라는 관사입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의 아들이다‘ 이것이 구약으로 넘어가면 초자연적인 메시야로 통합니다. 신자에 호소하지 않고 인자사상 ( )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러주신 것입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참조)
4)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삼위 중 제 2위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이며, 그의 탄생이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 117p
5) 주 (Lord)
‘주’라는 말은 희랍어 퀴리오스(Krios), 이것의 동치어가 구약의 야웨([Yahweh)입니다. 아도나이(Adonai)라는 단어입니다.
B. 그리스도의 본성
1) 두 가지 본질(성품)
a. 신성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안다." - 118p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은 굉장히 신비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셨다” 이것을 신성과 인성을 가졌다고 해서 양성이라고 부릅니다. 양성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서 여러 학설로 나뉩니다. 두 개가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두 개는 구별될 수 없도록 섞여있다는 것도 이단입니다. 인성과 신성 중 하나밖에 없다 역시 이단입니다.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며, 두 개가 연합되어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것이 신인양성론입니다.
b. 인성
"예수님은 문제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주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유일한 신성은 완전한 인간성의 표현이다. 예수의 인성에 관한 증거도 많이 있다. 사람이라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불리셨다." - 118p
인성의 본질적 요소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다. 그 뿐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성장 과정을 따르셨고, 인간적 욕망과 고통에도 영향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지을실수도 없으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 되셔야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가 우리 대신에 고난 받아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 했고, 그가 인간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가 또 무한한 가치의 희생을 제공하고 진노로부터 인간을 건지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교리가 하나하나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다 하나로 엮여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번 사경회 때, 레카피타라치오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교리를 배우셨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필연이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간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이루어진 전체의 몸 속에 ( )으로 오셨어여지만 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담 - “그리스도인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가장 큰 고통은 무지입니다.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무엇을 공부합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과 나를 공부하기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공부라고 하는 것은 대입이나 입사시험에 대한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서만 공부한다고 칩시다.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 어디로 가면서 살아야 될지는 모릅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는 개별자 진단에 대한 지식은 인간 보편에 대한 지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했습니다만,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고 한다면 보편적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 개별적 아내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마지막 죽는 순간 까지 공부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리반에서 다 잊어버려도 이 명제가 뼈 속에 배어야합니다. “나는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은 세계 그중에서 아주 조금과 인간 중에서 아주 조금 가르켜주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인간이 성공과 실패가 갈리고 지위가 결정되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대학이나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대입시켜보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해서 배운 것에 비해 아주 작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학 4년동안 학사 과정까지 공부를 해서 아주 작은 지식 하나를 배웁니다.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 조금 배웁니다. 머리가 터져라 고민을 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에 대해서 조금 배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총체적인 지식을 공부하면 물음표의 인생이 느낌표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판단력들이 생기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전반적인 성경적 세계관으로 인해 판단력이 생기게 됩니다.
교리를 잘 배우면 질문이 없어집니다. 지금은 많이들 안하지만 옛날에는 상담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을 언제든 만납니다. 그러면 만나는 성도마다 목사가 맘에 안든다던지, 교회의 문제를 말한다던지, 하는 문제들을 저에게 상담합니다. 그러면 저는 가만히 듣고 있으며 속으로 기도합니다. 다 듣고 난 후 “굉장히 힘드시겠네요”라고 말하며 목자와 양 테잎 전체를 주면서 “이것을 다 듣고 난 후에도 상담하길 원하시면 만나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연락이 안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답을 찾았다고들 말합니다. 그렇게 찾은 답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단답으로 툭하고 알려주면 바로 옆에만 나가도 답이 뭐였는지 또 몰라서 다시 물어보게 됩니다. 그것은 삶이 불안정하게 됩니다.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또 어떤 성도가 “자꾸 마음 속에서 죄된 욕망이 떠오르는데 어떻하죠?“라고 물어보면 죄와 은혜의 지배 22개 테잎을 줍니다. 이것을 듣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질문은 그냥 뜬금없이 떠오른 질문이지 진짜 삶의 문제가 걸린 질문은 아닙니다.
2) 한 인격 속에 결합된 두 성품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인격은 아니다.” - 119p
성품은 두 개인데, 인격은 두 개가 아닙니다. 기독론에서 가장 최고의 신비 둘이 있는데, 속죄의 신비와 양성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인성을 가졌으니까 인격을 갖습니다. 그러다면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셨으니까 인격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으십니다. 그러면 두 인격이어야 합니다.(두 인격이라함은 인간의 인격과 신성의 인격) 그렇게 되면 다중인격이 됩니다. 인격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인격은 신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의 실체를 취하시되 ( )
(그림 설명)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취하십니다. 그런데 신성을 통해서는 인격을 취하십니다. 여기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가지고 있는 자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아니시지만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은 몇 개입니까, “삼위”라고 할 때, ‘위’는 펄스(Persons)입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은 세 인격을 가지신 한 본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신성에서 인격을 취하신 것입니다. 양성이 될려면 신성과 인성이 만나야 되는데 인성을 취할 때, 인성을 인격과 함께 취하시면 그 속에서 인격이 두 개가 되게 됩니다. 그래서 인성을 취하실 때, 인성은 취하셨는데 인격이 없이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안 휘포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안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휘포스타시스는 헬 : hupostasis) - 하나님의 본질, 'hupo'는 하부를 뜻하고 ‘stasis'는 ’지지하는 실체‘를 뜻함)
ps : “안 휘포스타시스”의 ‘안’이 영어 un을 말하는 것인지 잘모르겠습니다. 책이나 검색을 해보아도 휘포스타시스에 대해서는 나오는데 ‘안’이 붙은 설명은 찾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인성으로부터는 인격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일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인성을 취할 때, 인격을 취하게 되시면 죄도 있으시는 분이 되고 죄를 지으실수도 있으신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 없이 인성을 취하신 것이고, 이것을 전문 용어로 “안휘포스타시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하늘 보좌에는 예수님이 계신 겁니까 안계신 겁니까? 라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하늘 보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인성은 장소의 제약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는 예루살렘에는 안계신 것입니다. 유다 땅에 계실 때에는 갈릴리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한 장소에 두 군데 예수님의 인성이 동시에 계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은 편재합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에 입고 내려오셨는데도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안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 인격은 아니십니다. 중보자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인간되심으로 인간 인격으로 변한 것이 아니요, 하나의 인간 인격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덫 붙여 인성을 취하셨는데 인성은 독립적 인격으로 발전할 수 없으나 하나님 아들의 인격 속에서는 인격적이 된 인성이다. 이런 인성을 취하신 후 중보자의 인격은 신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신인적인 것이 되었다.” - 119p
“신적의지와 인적의지를 소유하셨듯이 동시에 신적의식과 인적의식을 소유하고 계시다. 이 진리는 인간으로서는 청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인격의 단일성을 지적해 준다. 말할 수 있는 의식이 인적이든 신적이든 관계없이 말하는 분은 언제나 동일한 인격이시다. 인간의 속성과 행동은 가끔 신적 ( )으로 표현된 인격으로 묘사되고, 신적 속성과 행동도 가끔 인간적 ( ) 인격으로 묘사된다.” - 119p, 120p
의지는 신적의지도 가지고 계시고, 인적의지도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자면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는 인적 의지입니다.
이 교리에 대한 오류
“알로기파(Alogi)와 에비온파(Ebionits)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소시니안파(Socinians) 혹은 소피누스주의(Socinianism)와 유니테리안파(Unitarians), 현대주의자들도 이런 부인설을 따른다. 아리우스는 신성을 부당한 것으로 보았으며 반신으로 간주했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형 대신해서 취한 것이라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한 인격 속에 두 본질의 결합을 부인했으며, 유티크스파는 두 본질이 완전히 섞였다고 본다” - 120p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신은 아니지만 아주 탁월하게 신의 존재로 가까이 간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은 성부 한 분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C. 그리스도의 신분
1) 낮아진 신분
낮아진 신분은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지내심, 지역에 내려가심을 말합니다. 낮아진 신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이신데 아주 비천하게 취급을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적 순서대로 보면,
1)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한 사람이 되셨다.” - 124p
그래서 제세례파의 주장 같이 하늘에서 인간성을 부여하셨다면 그는 참 사람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고, 반대로 땅에서 사람의 몸만 받으시고 하늘로부터 신의 성품을 부여받지 못하셨다면 죄된 인간이 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로 부터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 땅으로부터는 인간의 성품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성경은 동정녀 탄생을 가르쳐준다. 이 이상한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신 것) 시초부터 죄의 오염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호해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다. 만약에 남자로 말미암아 인성이 생겼다면 죄를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
좁은 의미에서는 십자가 고난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성육신 이후에 생활하신 그의 지상 생애 전체의 생활이 고난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만주의 주가 종 되신 생활이었으며, 저주 받은 세상에서 무지한 자의 생활이었다. 사단의 공격, 백성의 배반, 대적의 괴로움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셨다. 영혼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보다 격렬한 것이다. 악마의 유혹, 불의한 세상의 억압, 죄짐에 의해 눌림을 받으셨으므로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를 아는 분이셨다. ” - 124p
3) 그리스도의 죽으심
“육체적 죽음을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불의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법적 판결에 의하여 죄인으로 간주되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 위해 저주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다.”
- 125p
4) 그리스도의 장사지냄
“그리스도의 죽음이 고난의 최후 단계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능동적 고난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장사지내심은 하나님의 아들된 자로서 인식했던 바 낮아지심의 한 형태이다. 인생이 흙으로 돌아감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다음 성구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구원자가 무덤에 머무심은 낮아진 신분이었다“ - 125p
죽으신 다음에 장사지낸 바 되시는데, 그것은 사실 신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5) 지옥에 내려가심
우리 사도신경에는 “음도에 내려가시고”가 빠져있는데, 근데 여러말로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크게 3가지 설로 나뉘어집니다. 첫 째 가톨릭은 이것을 그리스도가 구약 성도를 해방하기 위해서 선조 림보(limbus patrrum)로 내려가셨다고 말합니다. 림보는 구약 성도들이 임시적으로 갖혀있는 곳인데, 스올, 즉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음부로 내려가셨다고 봅니다.
루터파에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을 승리의 선언이라고 봅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것을 그리스도께서 부활 기간에 흑암에 권세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며 기념하기 위해 음부로 내려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혁파의 견해는 동산에서와 십자가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고, 사망 상태에서 있어서 낮아진 상태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심, 다시 오심을 연결하면 예수님의 오심에서 재림까지 연결이 됩니다.
2) 높아지신 신분
1)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이 아니다. 자기 안의 인간성 육체와 영혼의 본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이름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전의 부활한 자들과는 달리,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먼저 낮은자라 불리어질 수 있게 되었다.” - 126p
단순하게 살아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영광스러우신 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에 부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실 때 무덤이 터지면서 죽은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자들은 다시 죽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완전한 부활체, 즉 우리가 마지막 날에 영화 상태에 도달하게 될 그런 정도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아니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로 보여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갖는 3가지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의 요구에 응하셨다는 선포였다. 부활은 성도의 칭의와 중생 최종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126p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서 우리가 그렇게 부활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126p
정리하면 첫 째 율법의 요구에 응함, 성도의 최종 부활의 상징, 칭의와 중생 부활의 원인이 됩니다.
2) 승천
“승천은 부활의 필연적 완성이었지만 승천도 독자적으로 높아진 신분이다.” - 127p
“이것은 인성의 현저한 영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루터파는 승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는데 승천을 조건의 변화라고 보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성이 어떤 신적 속성의 완전한 기쁨 속에 들어가시어 영구히 편재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 127p
루터파에서는 인성도 편재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혁파 견해는 다릅니다. 인성도 편재한다고 보면 성찬론과 연결이 되어서 공재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공재설 모든 성찬에 주님이 계신다고 보는 견해)
“우리의 대재상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 희생을 성부께 나타나시기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하신다. 그는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승천하셨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하늘 처소에 거하게 되었고,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 127p
3) 우편에 계심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은 문자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말하는 상징적 지식이다. 그리스도는 우편에 계시는 동안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하시고 우리를 통치하고 그의 완전한 희생에 근거하여 백성을 위해 중보하신다.” - 127p
4) 재림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오실 때에 높아지심은 최절정에 달한다. 재림은 육체적이고 유형적이 될 것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심판하러 오실 목적과 심판하시고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여 오실 것이다. 재림은 구속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 128p
D. 그리스도의 직무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 이렇게 세 직분이 있습니다. 이 세 직분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고, 말씀을 해석해주는 사람이었고, 제사장은 범죄하고 불결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이었고,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분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할 권세를 가지고 실제로 통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었다가 신약 시대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그림 설명)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여자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은 개인, 가정, 국가라는 기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정 통치를 실현하십니다. 그리고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전통보다는 계시의 편에 서 있습니다. 제사장은 거꾸로 수평적이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계시보다는 전통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왕은 하나님께로부터 바은 뜻을 백성들에게 펼치는 통치를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직분들이 (속발?)처럼 구성되면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위에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신정 통치 안에서 이어져오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들을 그대로 구현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가르치시고, 제사장으로서 속죄하시고, 왕으로서 통치하십니다. 이 통치가 결국 영적 통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인격안에서 통합된 것들이 수 많은 교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1) 선지자직
“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예약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로부터 메시지를 가져오셨다고 말씀하셨다...그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그의 중요한 일중의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율법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 132p
선지자라고 하면 예언자라고 부르는데, 그런데 예언하는 기능은 선지자의 주된 임무가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선지자에서 중요한 직무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세가 살아있더라면 어떻게 살라고 했을까 해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모세의 율법을 그 시대에 해석해서 오경의 정신을 따라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은 예수님이 이 상황에 계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구약에서도 똑같이 모세가 살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삶의 문제, 생명 윤리 문제, 컴퓨터와 중독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을 다룰 때,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 ) 예수님 시대에 가르치신 것을 종합해보면서 지금 우리의 상황에 대입해보면 가장 올바른 해석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 견주어 해야만 했습니다.
지상에 계신 동안 선지자직을 계속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이 사명은 계속되는데, 성도와 목회자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그 사명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보면서 선지자가 외치는 가르침을 받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주실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2) 제사장직
“구약은 오실 제사장이시라는 것을 예언하고 예시했다. 신약에서는 그를 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이다. 거기에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 133p
(그림 설명)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창조하실 세계가 (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이 동산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어 놓으셔서 인간이 노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족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은 이러한 곳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복은 여성성을 상징하고, 다스리는 것은 남성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했는데, 이 완전이라는 말 속에서는 현실적으로 완전한 것과 더불어 가능성으로 완전한 것 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가능성에 대한 여성의 화정에 대한 예회 안적음)
인간의 노동으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완전성을 가능태적으로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동을 하더라도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아름답게 만들면 인간의 노동이 영광을 받는게 아니라, 아름다워질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창조 속에 넣어주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퍼져나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것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문화명령이 수행되기 위해서는, 삼위 하나님이 또 다른 명령을 주시는데 그것을 제의적 관계라고 합니다. 종교 명령 혹은 제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문화명령이고 두 번째는 제의적 명령입니다.
(여기에서 - 여기라는 것이 문화적인지 제의적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불명확함) 하나님에 대한특별한 지식과 사랑이 혹은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셔서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서 주님에 대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대상이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나의 모든 지식은 결국 한 하나님을 위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제의적 관계에 대해서 오는 지식과 사랑을 세계 속에서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한 다음에는 오염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원형?)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사람들이 경건에 대해서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뉴스, 과학, 가끔가다가 가족간의 일치를 위해 드라마도 봅니다. 거기에 푹 빠져서 보지 않고 한 두편 정도만 보아도 우리는 그 문화 속에서 무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지를 이해합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문화적인 접촉점을 활용해서 죄에 대한 요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제의적 관계 속에서 펼칠 때 우리에게 무엇을 고치고 바로 잡으라고 하시는가를 이해해야합니다. 아이들에게 문화를 단절시켜버린다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를 올바로 해석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떤 나쁜 경험을 하거나 이야기하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야합니다.
1:12부터 1:1530초까지 소리 안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오늘도 사람들을 당신을 통해 예수님께 ( ) 제사장 직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은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상징이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펄쳐 나가게 됩니다. 세상의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세상 문화는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에 접촉하면 부패해진다고 생각하면서 현대의 문화를 냉소적이거나 반감을 품고 원수대하듯이 대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인을 깊이 이해하려고 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이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믿을려면 믿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가졌으며,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다.” - 134p
a.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사죄를 위한 희생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구약으 희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예시해 주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유월절 양이라 불리워진다.“ - 134p
b. 그리스도의 중재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위한 큰 희생을 드릴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시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함축적으로 우리의 보례사라고 불리워졌다.” - 134p (기독교 교리 요약 참조)
(1:19:13 부분 -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강의가 책으로 만들어진 것을 잠깐 소개하시는 것 같음)
보혜사는 기독교에서 만든 단어입니다. ‘보’는 중재자라는 뜻이고, ‘보’는 에드버킷(advocate), ‘혜’는 헬퍼(helper)입니다. ‘사’는 카운슬러(counselor), 혹은 티처(teacher)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대표적인 중재자, 헬퍼, 카운슬러, 성령이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 기능을 하나로 묶어서 보혜사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보혜사 즉, Parakletos인데, "para"는 ‘곁에서’, "kletos"는 칼레오 ‘부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간청하는 자’ 라는 의도를 갖고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은 그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가끔 잘못 생각되는 것 처럼 중보적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희생을 드림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신령한 축복을 요구하며, 사탄과 율법과 양심의 고소로부터 이런 신령한 축복을 보호하며, 이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용서해 줄 것을 확증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예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바친다.” - 135p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내려오고, 인간이 하나님께 올리는 모든 기도와 선한일 같은 것들은 아무리 선해도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모든 관계 속에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유일한 통로가 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론의 압도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에베소서를 읽으면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시고 왜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다. 설교가 그런 기독론적인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존 오웬(John Owen)의 죄 전집 1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기독론 안에서 창조론까지 말합니다.
3) 왕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함께 참여하신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재인으로서 그리스도가 부여 받으신 왕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향한 영적 왕권과 우주를 향한 왕권의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 135p
a. 영적 왕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기 백성을 향한 그의 통치인 것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의 왕권이 영적 영역에 속한 것이며,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며, 죄인을 구원하려는 영적 목적을 가지며, 영적 수단인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시되기 때문이다.” - 135p
b. 우주적 왕권
이것은 레카피타라치오의 교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모두 통합하여 머리가 되신 후에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그 나라가 완성 될 때,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의 원래의 왕권과는 그 미치는 영역이 동일하지만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왕권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 맡겨진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인 것이다...이 왕권은 하나님나라의 대적들을 물리칠 때까자 지속될 것이며, 그 목적이 성취되면 우주적 왕권은 성부에게로 반환될 것이다.” - 136p
예수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고, 성부께 반환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형식이고 그리스도의 분신은 영원히 또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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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0 이후
교리 공부의 필요성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사실 오늘 날 우리들이 가고 있는 신앙의 길, 아니 신앙의 길이라기 보다는 열린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방식의 신앙 교육들, (즉 체계적인 교리공부나 신학에 대한 강의, 또는 오늘 날 시대 사상에 대한 강의같은) 이것이 현대적입니까? 이러한 방식의 신앙 교육들은 사실 오늘 날 현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지난 번에 우리가 (강릉) 기도원에서 “진리의 전달자”에 대해서 강론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이해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 설교로 보충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설교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강의나 책을 통해서 현대 사상의 주류들을 이해해야지만 우리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 주위에 어떤 목사님은 굉장히 진실하신데, 교회는 세속적인 교회가 있다는 말씀을 드린 적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사는 진실한데 교회가 세속적일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영혼에 대해서 너무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역의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런 마음은 순수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제일 많이 교회에 데려오는 사람에게 쏘나타 승용차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세속화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왜 일어나는가하면 시대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교리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사나 전도 담당하는 평신도 지도자는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금식하는 중에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를 접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전도를 담당하는 사람이 엎드려 기도하는 것까지는 모릅니다. 다만 많이 전도하면 쏘나타를 준다는 것, 그 방법만을 보며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처음에 그렇게 구원해내는 열정의 의도는 안전해지고, 방법만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법만 전해지면 사람들에게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게 됩니다. 교회가 그런 것들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이유는 성경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 신앙의 체계적인 훈련의 부족, 현대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들이 이런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올바로 교리나 사상을 배워 나가는 것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지금 현대 이후 시대는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굉장히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주 세속적으로 살수 있는 가능성들을 우리들은 갖고 있습니다.
현대 사상의 특징은 뿌리 자체를 싫어합니다. “매타담론”이라고 하는데, 뿌리가 되는 담론, “인간이란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를 위해서 사는가” 이런 것들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궁극적인 가치의 기준, 존재의 근거를 말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은 인간의 이 세상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저 건너편 신적인 세계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어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플라톤의 작품을 보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등장시켜서 논쟁을 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돼”라는 명제로 시작해서 “그러면 올바른 것은 무엇이냐, 참된 선은 무엇이냐,”라며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논쟁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나도 잘 모르는데, 일설에 의하면 죽은 뒤에 저 세상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속이고 욕망을 따라서 살면 죽은 뒤에 고생한다더라” 그러면서 그것을 밑에서는 논리로 이성으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초월로 도약해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올라가다보면 마지막에 결국에는 하나님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사회의 문제는 문제에 문제를 더할 뿐이지, 답은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봅시다. 오늘 날 마케팅 교회도 지나가고, 이머징 처치가 떠오르고, 또 신비주의도 오고, 수 없이 변화되어 가지만 어떤 것도 건전한 지식에 기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총체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나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통해서 우리가 왜 믿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 자체가 지겨운 것입니다. 자기 나라 역사도 안배우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은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성경 공부한다고 그러는데, 사실 성경도 성경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위로받고, 오늘 내가 사는데 좀 편하려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감각적인 시대가 되어갈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 3만불 정도 넘어가면, 완전히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해 질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종교에 대한 변형된 갈망들이 일어나는데, 즉 건강, 요가등 심신의 편안을 찾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요즘 시대에는 ‘심리’라는 간판만 달면 백년 이상을 먹고 살수 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은 심신의 편안을 갈망합니다. 이것은 매우 허망한 일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교육을 시키면 따라오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잘 따라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요새 아주 재미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부인했던 사람들이 아주 가볍게 교회를 다니면서, 당신은 상처 받은 사람, 심리학적인 치유, 신비운동, 다 참여해봅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 없이, 단순히 그럴듯해 보이는 방법들로 대체하다보니 그런 현상 속에서 인간은 더 나아지지 않고 한 없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요새 미국에서는 개혁주의의 부흥이 부분적이지만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패션” 세미나에는 4-5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장중한 설교를 듣는 상황도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날 말도 안되는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보여주냐하면, 다음 세대에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매마른 시대에 살면서 인간들이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미친듯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년 이상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가 힘든 교리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렵게 배워가며 확신을 갖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나 자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어렵게 교리를 공부하고 신학적으로 이해를 해서, 넓게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나 개인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이 힘든 탐구에 과정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방황하는 시대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수 없이 가벼움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거기서 만족을 못느낀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고 교회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는 그런 갈망들이 더욱 강해질거라고 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교리반을 6학년때쯤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더 내려가서 유아부, 유치부용까지 “어린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쓰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의심이 없이 순수할 때, 하나님과 세계와 우주와 모든 것에 대해서 통합된 교육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예화
어떤 공산주의적 무신론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반대편의 딸 아이가 무엇을 떨어트렸습니다. 그것을 주으려고 딸 아이가 허리를 굽히는 순간 옆 모습을 딸 아이의 귀를 보게 되었는데, 그 귀가 너무나 이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공산주의적 무신론자는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귀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도대체 저 아름다움의 근원이 뭘까” 생각을 하면서 창조주가 계시지 않다면, 우리 딸 귀는 저렇게 이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풀잎 하나하나도 놀라운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세계 속에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온 천하 만물이 그림 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 )” 아이들이 거듭난 후, 신학과 연관 시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 ( )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우주와 하나님과 모든 지식들을 총체적으로 연결할 때, 학교 가서 공부할 때 눈이 번쩍 뜨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수학 속에, 역사 속에, 국어 속에 있구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배우는 교리반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수준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 수준 더 올라가 공부해야 합니다. 창조부터 종말론까지 총체적으로 꾸준히 근원적으로 배워가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를 모두 공부하며, 하나님의 제의적 사명이 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어가는가를 깊이 고민하면서 어떠한 이유에서도 이 세상을 버리면 안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