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Min 목회학박사과정특강
녹취자: 김세나
소크라테스가 한 마을에 있을 때, 거기에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하는 한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히피아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히피아스를 찾아가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름다움이요? 굉장히 아름다우려면 애인이 있어야 합니다. 애인이 있어서 신나게 사랑을 해야지 인생이 아름다워져요.” 소크라테스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본질을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설명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히피아스는 아주 탁월한 언변가였습니다. 수사학을 잘 하는 연설자였으며, 마을에서 굉장히 많은 인기를 끌며 상당한 돈을 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처럼 이렇게 멋있는 인생을 살고 돈도 많이 벌고 말도 잘 하고 신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게 무엇인가?”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유명한 사람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 사람 히피아스는 옷부터 시작하여 장신구까지 자기가 디자인을 해서 입는 요즘 말로 패셔니스타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긴 대화를 통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못 얻고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이제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아름다움 참 어렵구나!”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 책의 이름이「대 히피아스」아인 플라톤의 저작입니다.
‘아름다움’은 그리스어로 ‘포칼론’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적인, 미학적인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도덕적인 관념까지 포함하는 아름다움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굉장히 어려운 주제입니다. 시중에 나오는 책들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검색해 보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수없이 말하여도,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해서는 쓰여진 책이나 말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낭만주의 시대가 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된 시대입니다. 그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가서도 역시 아름다움, beauty라고 하는 것은 숭고함에서부터 그 인식이 시작됩니다. 숭고함에 대해 인식하면서도 ‘숭고한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아름다운 것들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숭고함 그 자체는 무엇인지 설명을 못 합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물 자체는 알 수 없다. 독일어로 “Ding an sich.”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철학자들은 계속 찾았던 것입니다. 왜 이야기를 서론에 말씀드리는가 하면, 에드워즈는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제가 좋아하는 유목적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것을 칸을 친다고 하면 신학, 성경, 철학, 과학, 미학, 윤리학, 예술, 천문학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한 길을 간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것을 가로지르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제가 이름하여 유목적 학문하기, 유목적 학문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에드워즈가 왜 이러한 방식의 학문을 하게 되었습니까. 알다시피 에드워즈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기는 하였지만, 게다가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가 이러한 식으로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판칼리아 사상입니다. ‘판’은 ‘모든’이고, ‘칼리아’는 ‘아름다움’입니다. ‘범미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은 아름답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모든 학문 속에 다 녹아있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학문이 다른 학문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개념은 에드워즈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계몽주의 이후에 그러한 학문의 전통들이 모두 끊어지고, 특히 신학에서는 슐라이어 마허 이후로 학문이 학제 간에 분립이 되면서 벽들이 쌓이고, 이제는 성경 신학자들과 조직 신학자들이 대화가 안 되고, 성경 신학자들 중에서도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과 요한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화의 접점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식으로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학문에 있어서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아름다움’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해 보자면, “사람들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사실은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보다도 ‘무엇이 예쁜가?’하는 문제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는 무조건 진리의 삶을 살아내야 되겠다.’ 그리고 ‘진리가 제일 예쁘다.’ 이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아주 선의 경지에 이른 소수의 사람 이야기이고, 결국 내가 아무리 머릿속으로 진라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하여도 오늘 내가 성경을 읽고 싶지 않고 게임을 하는 것이 예쁘게 느껴지면, 오늘밤 목사인데도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느 후배 목사 집에 갔더니 컴퓨터에 메모를 하였습니다. “하지 말자. 하지 말자. 게임만은 하지 말자.” 목사가 얼마나 유혹을 많이 받았으면 그렇게 써 놓았겠습니까. 결국 그렇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플라톤도 이러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상하다. 왜 사람들은 선한 것에 마음이 끌리는 대신 예쁜 것에 마음이 끌리는가?’ 이런 질문을 이미 플라톤은 제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쁘다’고 하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고, 그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에드워즈와 사랑의 신학>을 통해서 다루려고 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넘겨주십시오.
다음은 목회자의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하였듯이 예전 30년 전에는 10년 후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측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것을 예측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후기 산업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상당히 많이 버렸지만 그래도 어쨌든 진리는 있다고 믿었고 그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인간의 덕스러운 삶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것이 다 깨졌습니다. 깨진 결정적인 계기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68학생혁명에 의해서 그것이 유럽전체를 뒤덮고 그것이 미국으로 넘어와서 70년대 히피운동을 만들고, 그것이 남미로 내려가고, 그것이 다시 뉴질랜드와 호주로 넘어가고, 일본까지 가서 적군파를 만들고, 결국 마오저뚱의 소위이야기하는 금난혁명, 그 다음 호치민의 베트남 해방사건,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연결되면서 50년 어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진리가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모이겠지만,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의 임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오직 복음만을 설교하는 것은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복음만을 설교한다’고 할 때, 복음의 가치가 뭐냐 하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하는 것으로써 복음이 가장 핵심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러한 것들과 단절하여 복음만을 가르친다면 또 다른 교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이야기 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반짝이는 것들이 많은가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본받아 알게 함으로써 결국 마지막으로 성경과 학문, 삶으로 사상을 가르치며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없는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넘어가겠습니다. 에드워즈의 목회를 위한 사상적인 토대가 되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세 권의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박사과정을 했다고 하면, 이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책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에드워즈 사상 전체의 골격을 형성해 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논문입니다. 이것은 2부로 되어있는데, 하나는 성경을 중심으로 논증하는 것이고, 2부는 성경없이 순수한 이성으로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손에 들고 쭉 읽히시는 분은 철학적 훈련이 상당히 된 분들입니다. 자기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읽다가 대게 어렵다고 생각이 들면 평범하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두 번째 책은 「참된 미덕의 본질」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이 책 한권 한권을 설명을 모두 해 드리면 좋은데, 이 책 한권만 가지고도 한 학기를 강의할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이 책은 여러분들이 이해된다고 하면 여기에서 가르치셔도 될 것입니다. 그럴정도로 어렵습니다. 머리를 벽에 몇 번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골치가 아픈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성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에드워즈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논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속사」입니다. 에드워즈가 볼 때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아름다움이 세계에 다 묻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구속사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왜 구속사가 아름답습니까? 그것은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찬란하게 무지개처럼 시공간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빗줄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데, 구속사의 중심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실 때부터 수많은 인류를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셨고, 사랑의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영광이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목회의 목표는 뭐냐하면, 이것이 우리들이 오해하고 있는 장면인데 ‘목회’라고 하면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목회’라는 비즈니스, 교회를 짓고 개척을 하고, 교인을 얼마를 모으고 등등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더 한발 진전되어 목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는 그 말이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그는 목회의 목표를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제가 해석한 에드워즈의 목회의 목표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바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전도에 대해서 definition을 내리면서 “전도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식사후라 피곤하겠지만 제가 온 몸으로 강의를 하는 것이니까, 정신을 집중하여 들으면서 여러분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면 전도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이고, 그 다음에 목회는 그 하나님을 계속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성화를 위한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는 대부분 성화를 다루어야 합니다. 그 속에 ‘케리그마’의 요소와 ‘디다케’의 요소가 함께 있어서 두 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그 속에서 예수 믿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화의 길을 가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그 성화의 핵심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떻게 하나님 아닌 것들을 바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그 질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람들이 왜 사랑하는가? 분명히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그 끝은 허무이고, 마지막에는 헛된 것들이고, 심지어 악이고 마지막에는 심판에 이르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목회자들이 처음에 소명 받았을 때 그렇게 눈물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 명예를 좇고, 돈을 좇고, 심지어 나쁜 일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자유의지론」에서 이야기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선이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늘 내가 남의 집에 들어가 칼로 사람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그 사람에게 조차도 그것은 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양심의 빛을 거스르고 칼질을 해서 돈을 빼앗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의 개념은 결국 골품적이고 광범위한 선에서 자기만의 선으로 이행하는 과정 그 자체가 악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다른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직무는 무엇이겠습니까? 어쩜 그렇게 설교를 재미없게 합니까?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오락적인, entertainment적인 재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저 설교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나는 못 느끼지만,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어떤 카리스마가 설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겠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설교는 말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고, 글은 지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고, 삶은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면 여기에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사랑의 감화가 필요합니다. 아름다운 것이라 하고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18억짜리 미술작품이 걸렸어도 내 마음에 감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을 만팔 천원을 줘도 안 삽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은혜’는 사랑의 감화인 동시에 성령 자체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임무가 사랑의 감화를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포커스를 이동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자, 이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사랑’은 결국 ‘좋아함’입니다. liking입니다. ‘좋아함’은 호불호의 문제이고, 미움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좋아함이고, 두 번째로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마치 피조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과 똑같습니다. 세계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그 전에 논리적으로 하나님 안에 창조세계에 대한 관념, 아이디어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계가 창조된 다음에 ‘참 좋구나.’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책 참 예쁘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이런 책이 나왔을 때 어떤 책일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참 예쁘네! 참 갖고 싶다.” 판단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logical 하게 이야기 하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 안에 창조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관념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념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 모든 인류를 창조하실 때 존재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의 관계로 만들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쨰는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셔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사랑의 imaginative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만, 사랑을 하는 subjective는 인간 자신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에 있어서는 양립주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도권과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사랑하는 것 사이에 양립이 된다는 것입니다. compatible된다는 의미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에드워즈의 사랑의 신학은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거스틴의 제자입니다. 두 사람의 작품을 공정하게 같이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어거스틴에게로부터 받았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반복한 것은 아닙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시대와 에드워즈가 살았던 시대는 엄청난 시차가 있고 그 시차 안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였던 것입니다. 인용문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덕성의 요체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어떤 도덕적인 행동들도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칭찬받을만 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선한행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1765년에 나온, 이것은 사후에 보스턴에서 재판된 것인데 여기에 두 개가 함께 묶여져 나옵니다. 두 개가 쌍둥이입니다. 한 권 없이는 다른 한 권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공부한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 대해서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꼭 읽어보십시오.
에드워즈의 ‘덕’ 이론이라고 하는 것, 미덕을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 탁월한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에드워즈는 인간의 마음의 성향과 관련지어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덕’에는 크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과 플라톤의 전통으로 나누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로마 가톨릭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있고,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칼빈주의로 이어지는 계열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에드워즈는 이쪽 전통과는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쪽 전통 편에 서서 이쪽 전통을 차용하고 있는 그러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왜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덕을 이야기 하는가? 모든 덕의 원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이웃에게 잘해야지 할 때 하는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에드워즈가 정리한 것은 뭐냐 하면 “참된 미덕이란 존재 일반에 대한 박애여야 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Benevolence be in general. benevolence’라고 하는 박애입니다. 박애는 ‘내가 저 사람에게 잘 해줘야지. 왜냐하면 저 사람 아버지가 총회장이래. 내가 공부하고 난 다음에 총회에서 한 자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 사람에게 잘 해야지.’ 이러한 것은 목적애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사랑이 넘쳐서 불쌍한 사람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을 박애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면 ‘be in general’입니다. be는 존재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in general’이 문제인데 이것은 존재일반이라고 철학에서 번역을 합니다. 하나를 사랑합니다. 이것을 사랑하면 이것에 대해서는 이것을 사랑하는 것이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 초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5년 동안 거의 매달 내려가다시피 하였습니다. 부산의 목회자들이 저를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부산의 목회자들이 목사님을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서울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서울에 있는 목회자는 저를 잘 안 부릅니다. 부산에 있는 목회자들은 즐겨 부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한 사람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좋은 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일등을 하였다면 그가 없었다면 2등이 1등이 되었을 텐데 그 사람 때문에 2등이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될 것입니다.
결국 이 중에 어느 것만을 사랑하는 것으로서는 참된 덕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정의와 사랑이 공정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그 다음 마음대로 하십시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형제 말고 누가 이겠습니까.” 이것이 결국 존재 일반에 대한 박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러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결국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이 사람이 넘어져서 비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왜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못 봤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품고, 악의를 품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보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에드워즈는 보았습니다. 첫째는 지식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모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서 온다. 정확한 지식이 주어져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정확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정확한 지식이 주어져도 그것이 내 안에서 사랑으로 변환되기 위해서는, 즉 내가 주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것을 미각능력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저는 옷 입고 색깔 맞추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불편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이 색깔도 안 맞고, 반짝이 넥타이에, 반짝이 윗옷을 입고 이상하게 다니는데 저는 그런 사람 옆을 지나가면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당신의 옷차림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풍경이 되게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풍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패션이나 자연에 대한 미각능력의 경우는 자기 취향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미각의 대상이 하나님일 경우 저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미각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가?’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이 미각능력을 어느 한 순간에 탁 인간에게 심어주신다고 보았습니다. 원래도 있지만, 죽어 있던 것을 탁 하고 심어주시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중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중생은 ‘new sense’를 하나님께서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주어질 때 인간은 번쩍하면서 도처에 깔려 있는 ‘판칼리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느끼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충만하면 관심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집중되게 됩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어거스틴이 작사하였다고 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그 노래 가사와 같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 하얀 눈밭, 모든 것을 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게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입니다. 에드워즈의 일기 속에서 보면 그런 회상이 나옵니다. “예전에 회심하기 전에 제일 무서워하던 것이 천둥과 벼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감미롭다. 도처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충만하다.” 천둥과 번개를 보면서 생각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느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뭐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 혹은 연합으로 규정합니다. 같이 소리내어 읽어보겠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일치나 조화에 있지 않고 일치와 어울림 속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든 지성적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의 일반과 관계된다면 또 보편적인 존재의 한 부분이라면 그래서 전체와 연결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지성적 존재의 보편적이고 참된 아름다움이란 거대한 전체와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명언입니다. 이 사람의 글은 어렵습니다. 18c의 영어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있던 언어는 라틴어입니다. 그것을 쓴 것이 영어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는 라틴어의 귀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존재 일반, 하나님에 대한 나의 존재의 일치 그리고 하나님과 어울리는 것,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이해되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깥에 있는 파란 나무 아름답습니다. 저것을 뿌리 채 확 뽑았습니다. 여기에 던져버렸습니다.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럽다라고 하는 것은 위치를 잘못 잡은 것입니다. 저 나무는 저기 심겨져 있을 때 예쁜 것입니다. 이 공간의 용도는 나무를 여기에 눕혀 놓으라고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는 예쁘지만, 여기에서 새가 세 마리가 날아다니면 수업을 못 할 것입니다. 왜 입니까? 아주 불결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장소를 잘못 잡은 것입니다. 무엇이 깨졌는가 하면 일치와 어울림이 깨진 것입니다.
다음 보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만 뽑아 본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연구하였던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일치, 어울림 혹은 연합, 다시 말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에 대한 마음의 연합이나 지향성은 존재하는 사물들 가운데 발견되는 최고의, 최상의, 제일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 이것은 미셀론의 마인드에 대해서 쓴 글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존재자들의 근본인 존재는 하나님 자신 뿐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운 참된 존재이며 원천적인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과의 닮음 안에 있다.” 이것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모든 존재자들의 근본인 존재는 하나님 자신 뿐이다.” 모든 존재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죽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여러분의 몸 안에 있는 세포 중 6개월 전 있었던 세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6개월 전 몸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있다라고 의미의 규정도 철학적으로 매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항상 있는 존재인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오늘이라도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 근본적인 존재에 기대어 있는 것이고, 이것을 제가 말하기는 ‘beauty of dependence’라고 합니다. 의존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미이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존미입니다. 결국 얼마나 하나님을 닮았는가 하는 similarness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입니다. 에드워즈의 도덕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야기하면 굉장히 깁니다. 18세기 영국 옥스퍼드와 켐브리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경험주의 안에서의 소위 이야기하는 도덕심리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권으로 들어오면서 그 사람들 대부분 이신론자였지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델로나’라고 하는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오늘날의 어거스틴학 운동이라고 하는 학문적인 사상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신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간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식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때의 방대한 자료들을 에드워즈가 섭렵 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미학적 도덕신앙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홀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관계의 아름다움입니다.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 되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나무가 항상 예쁘지만, 그러나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 하얀 백사장 옆에 소나무 숲이 있으면 더 예쁘게 느껴지는 것은 관계가 어울리기 때문에 더욱 예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적용을 해 본다면 개별적인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특히 인간에게서 있어서 말입니다.
다음입니다. 아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플라톤의 작품인 히피아스를 인용하면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아름답게 하고 다닌다는 히피아스를 통해서 어떠한 언급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결국 ‘미’자체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만족스러운 설명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도들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미학의 전통은 크게 세 가지 연원을 가집니다. 그것은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보다는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미학적인 개념이 들어오게 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시메트리(symmetry)의 미학입니다. 시메트리는 뭐냐 하면 비율, 조화, 균형, 이러한 것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을 보면 똑같은 칸을 띄고 등불이 들어옵니다. 어쨌든 완벽하지 않지만 강의실을 예쁘게 만들려고 조화롭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스토아에서 이야기 하는 시메트리의 미학입니다. 그러면 ‘추하다’고 하는 것은 애시메트리(asymmetry)입니다. 시메트리가 깨졌을 때. 그게 이제 에드워즈의 미학의 한 연원입니다.
두 번째는 신플라톤주의의 미학입니다. 신플라톤주의, 특히 플래티누스에 의해서는 「엔네아데스」같은 우리로 말하면 조직신학 같은 책인데, 그 책을 보면 일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태양에 비유합니다. 태양 자는 볼 수 없습니다. 찬란하게 빛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함을 바로 아름다움이라고 보았습니다.
세 번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미학에 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 미학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성품이 이 세상의 피조물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이것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방식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modus operandi’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이 피조세계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 4장에서 이스라엘이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탄핵하였던 그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을 잘 하지 못합니다. 에드워즈가 시도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위격적 완전성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아무런 결점이나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이 성부, 성자, 성령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에드워즈에 의하면 결국 사랑은 복수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개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도 이미 사랑이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관계의 완전성을 가지고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정점으로 나타난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culmination 된 것입니다.
다음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원형적 아름다움이고,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모형적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원형적 아름다움은, 미덕의 본질에도 나온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근본이시고 원천이시다.” 원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험이라고 에드워즈는 보았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거룩함은 일종의 종교적인 표현이고, 종교적인 표현을 미학적 표현으로 바꾼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기 위해서 spiritual sense(영적인 감각)이 필요한데 이것은 중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속에서도 깃들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미약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분을 올바르게 경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spiritual sense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 센스의 직접적인 지각대상은 거룩함이라는 아름다움입니다. Holiness is wholeness, and the wholeness is beauty.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에드워즈의 관점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인식하게 되는 대상이 새롭고 단순한 관념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실체를 이 자연세계와 물질세계를 넘어서서 볼 수 있는 그 감각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본질입니다.
다음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아름다운가? 거기에서 피조물의 모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조 세계를 통해 발견되는 모든 아름다움은 반드시 밝음과 영광의 충만한 영광을 가지시니 저 존재의 주입된 광채의 반영일 뿐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게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든 창조세계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든 모든 것들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 속에는 인공적인 아름다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건축과 예술은 결국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파밀리에 성당, 아직까지도 계속 건축되고 있는 가우디의 성당을 보면 가우디가 자란 배경이 자연입니다. 아주 탁월한 자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것을 형상화하여 생태계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으로 파밀리에 성당을 만들었으니, ‘파밀리에’라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연의 모든 세계들까지 창조의 일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예술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인공적인 아름다움이지만, 자연적인 아름다움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이고,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인간의 정신의 특성입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아름다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아름다움을 함께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외모와 모든 것도 다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건물 같은 것도 예쁘게 지으려고 노력을 하고, 정치는 더더욱 아름답게 하려고 살아야지 그것이 균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입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자연적인 요소들의 조화, 균형, 비율, 절제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자연적인 아름다움만으로는 원형적인 아름다움을 유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반계시에 대한 곡해로 이어져서 일반종교들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도덕적인 아름다움은 지성적 존재인 도덕적 피조물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판단하는 능력과 사랑의 경향성의 아름다움으로 이러한 모든 도덕적 연관관계의 정점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찾아가게 되는가 할 때 지식과 미각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한대로 중생을 통해 미각능력이 부여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름다움의 종교적 성격이 드러나는 것인데 영적인 총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새로운 감각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주관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계속 넘어가고 마지막 결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배울 점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사랑의 신학입니다. 오늘날 사실 전 세계 칼빈의 학회보다도 더 많은 것이 에드워즈의 학회입니다. 이유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놀라운 점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자신은 흑인 노예 제도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입장을 가졌지만, 그러나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에드워즈의 신학은 우리에게 많은 배울 점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목회에 있어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가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모두가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지적 전통이 너무나도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통탄할 만한 일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그래도 은혜는 못 받아도 내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가 아름다움입니다. 목회자는 심미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너무 감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와서 그 음식점 어땠는지 물으면 “아~~~ 너무 맛있었어!” 이러는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낀 그것이 그 사람의 모습과 설교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다음은 정동의 신학입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마음에 파도가 치듯이 사랑의 감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조화의 신학입니다. 하늘에 왕별들만 있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별똥별, 파란별, 노란별, 큰별, 작은별들이 모여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연의 관계가 아니라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목회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