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회예배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
녹취자: 이재호
오늘 아침에 무슨 말씀을 전할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사모님들도 모두 모이셨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오신 교역자들은 지금 거의 2년 만에 수련회를 왔으니까 열린교회를 맨 처음 세울 때 하나님이 제게 주셨던 말씀을 설교 드리는 것이 아마 도움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34살에 교수가 되고 35살 되던 해 교수생활 2년차 나는 아직 Th 과정에서 공부를 끝내가고 있었는데 그 때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서 93년도가 되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교회를 개척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밤에 잠이 안와서 그냥 기도를 했는데 밤새도록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똑같은 일을 3일을 경험하고 드디어 응답을 확신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을 때 주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예전에도 많이 읽었는데 목놓아 울면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회당에서 많이 가르쳤는데 사실은 그 회당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모든 도시와 마을이라고 그러는데 원래 이것이 City and Village입니다. 옛날에 성경에 보면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많이 모인 곳인지 적게 모인 곳인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가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영혼들을 구하시는 장면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도 ‘제가 어디로 가든지 사람이 있는 곳이면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아주 절절히 녹인 것은 사실 35절이 아니라 36절이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까?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런데 요새는 쫌 뜸하지만 그 때는 헬라어를 열심히 할 때였습니다. 아주 젊고 기억도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니까 그리스어 텍스트를 넣고 성경을 읽는데 몇 가지가 내 눈에 가슴을 확 찔렀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그랬습니다. ‘휘다’라는 동사가 분사로 쓰입니다. ‘보다’라는 대표적인 동사가 그리스어 성경에 두 개가 나오는데 ‘브레포’, ‘오라오’ 라는 단어입니다. ‘브레포’라는 단어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들을 대개 가리키는 것입니다. 눈먼자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렇게 물으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에 비해서 ‘오라오’라는 단어의 분사인데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네가 니 속이 다 보인다고 할 때에는 육신의 눈으로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정신의 눈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쓰여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뭐 대수냐?’ 그렇겠지만 저는 하여튼 한 단어 한 단어가 통곡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사람들을 보면서 영적인 눈으로 보다는 육적인 눈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가구나 솔직히 말해서 부교역자 심방을 해도 돈이 좀 있고 건강하고 사업도 잘하고 이런 가정에 가서는 절실하게 저 사람들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된다는 이런 절실한 마음이 덜 들었습니다. 그런데 돈도 없고 돈도 들고 한약 끓이는 소리도 나고 사업도 바닥을 쳤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집안에 아이도 아파서 심지어 장애아가 태어나고 이런 인생을 막판에 다 간 걸로 보이니까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방에 그런 나의 이전의 목회의 시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잘 차려 입고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도 옷에 시체의 냄새가 풀풀나는 사람들이 있다 말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 합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생명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가 참된 목회를 하고 있는가 하는 어떤 가슴 아린 후회들이 밀려왔습니다.
나는 부교역자 생활 내 집사람이 증인이지만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진짜 요령 안 부리고 심지어 교수하면서도 울고 웃고 가슴 아프고 뒹굴고 한 것은 사실은 학교에서도 그랬지만 대부분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 가르치다가 주님 만난 것이 아니라 사실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살아왔지만 제 주위에 있는 동료들 가운데 나처럼 부교역자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너 보다는 낫다’ 능력있다는 그 뜻이 아니라 ‘적어도 나는 마음과 0(20:38)을 다해서 내가 부교역자 생활을 하리라’ 그것이었습니다. 박목사님 항상 고맙게 생각을 하셨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했는데 이 성경을 보면서 그렇게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적으로 무리를 보라’ 그렇게 보면 비로소 영혼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다른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으면 결코 뜰 수 없는 눈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어서 장례도 지내주고 개업예배도 드리고 돌예배도 가고 임종예배도 드리고 이런 거 다 합니다.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며 같이 아파하는 그 고통이 없다면 그게 하나의 종교적인 서비스지 그것이 무슨 목회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기도제목이 ‘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교역자인데 아주 열린교회에서 열심히 했습니다. 칭찬할 만한 사람인데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자기 지체들하고 한 이야기가 돌아서 돌아서 나에게 들어왔습니다. ‘나는 도대체 목사님이 영혼을 보면 눈물이 쏟아진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목사가 되었는데도 그런 것을 잘 모르겠다.’ 그러더니 떠나갈 때쯤 되어서 ‘이제야 조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양떼들이 처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게 해 달라’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으면 목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비참하게 사고를 당해서 피투성이가 되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를 제외하고는 ‘어떡하지?’ 라는 마음이 생겨나고 너무 이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습니까?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영혼을 보면서 ‘저 영혼이 너무 불쌍하다’ 그 마음을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권력자들이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000(23:41).
두 번째는 ‘불쌍히 여기시니’ 그랬습니다. 이것이 ‘에스피라크이스떼’ 라는 단어입니다. 유명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 ‘다함’하고 좀 비슷한 단어인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간에 있다고 믿었고 또 심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적을 수청해서 죽인 다음에 생간을 꺼내서 씹어 먹는 장면, 그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관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씹어 먹어야지만 영혼이 부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자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왜 창자에 있다고 봤는지까지는 내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창자에 있다고 보았고 결국은 우리는 심장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한다면 이 사람들은 창자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할 정도로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결국 영어권에 들어오면서 ‘be moved to once ours’ ‘그 때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고 번역이 됩니다. 이것을 만약에 우리말로 등과 번역을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느끼게 하소서’ 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그들을 보면서 창자가 떨리기까지 그렇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동시킨 광경이 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것입니다.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게 해 드렸던 그 광경은 ‘목자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 때도 열심히 원을 찾으면서 헬라어 성경으로 볼 때니까 ‘에림메노히’ 뒤의 단어는 ‘에스퀴메노히드’ 이렇게 수동태 분사로 나옵니다. ‘에림메노히’ 라고 하는 것은 ‘립토’라는 동사에서 나오는 활용입니다. ‘립토’는 ‘내던지다’, ‘버리다’는 뜻이고, ‘에스퀴메노’는 ‘스킬로’ 라는 단어에서 나옵니다. ‘스킬로’는 ‘못 살게 굴다’, ‘괴롭히다’ 뜻이고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내동댕이쳐진’ 그런 뜻이고, 뒤에 것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면 예수님이 무엇을 느끼셨는데 그 느낀 것인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는데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동댕이쳐진 영혼들, 누군가에 의해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영혼들의 상태를 보시면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아파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소명이라고 봅니다. 목회의 소명은 내가 기도체험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라는 그런 주관적인 과거의 경험이 목회의 소명의 증거가 아니라 그런 소명이 진실한 사람은 성화에 따라서 그것이 민감도가 달라지긴 하지만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성화가 어떻든지 간에 반드시 이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소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왜 그 사람들이 내동댕이쳐졌을까? 왜 그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을까? 진짜 그를 괴롭게 하는 주체는 누군가?’ 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죄이기도 하고 사탄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 사람 자신이 자기에게 한 일이기도 합니다. 어땠든지 무지든지 자신의 선택이든지 사람의 강박이든지 간에 어떻든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쨌든 현재의 상태로 볼 때 어떤 사람이 내동댕이 친 것같이 그렇게 갈 길을 몰라서 유리하고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깊은 고통을 당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리고 이 소명은 부부가 함께 느껴야 됩니다.
요즘에 매우 우울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는 목회를 하는데 부부가 같은 배를 안 탑니다. 그러니까 너는 목회 길로 가고 나는 내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적인 일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교회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란 부부가 함께 성도들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둘 중에 한 사람이 성도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할 때 그것은 목회적인 역량이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나라 일은 아닙니다. 목사님이 없어서 담임목사를 공채를 하는데 설교를 매우 잘 하십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같이 오셔서 목회를 하시자고 그랬는데 그 교회도 문제가 좀 있기는 합니다. 충분히 목사님을 생활을 보장할 처지가 안된 것입니다. 분명히 함께 목회를 하기로 가족들이 이사를 오기로 해놓고 안 온 것입니다. 사모님은 사모님대로 직장생활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를 다니고, 당신만 와 가지고 그래서 가까이 계시면서 평일에는 집에 내려가고 금요일쯤에 올라가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마음을 안 줍니다. 그러니까 ‘나가십쇼’ 이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그만큼 하시는 분도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교인들이 마음을 안 줍니다.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교인과 함께 삶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입니다.
여기에 사모님들 오셨는데 둘 중에 하나 여러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편을 평생 기독교 알바하게 할 것인지 진짜 목회자로 만들 것인지 목회자로 만들려면 한 배를 타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목회의 보람과 기쁨, 슬픔과 고통, 아픔과 괴로움, 환희와 감격을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교구에 남편의 목회하는 거기에 부서에 한 아이가 회심하고 어떤 부부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그럴 때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목회의 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남편이 교회와 잘 지내고 월급 많이 받아오고 할 경우에는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작은 교회는 모르지만 이렇게 있다가 한 400~500명되는 교회에 가면 사모님들 직장생활 못하게 합니다. 못하게 할 권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충분히 사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자기 혼자 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목회에 동참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하루아침에 훈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달리기 계주를 한다든지 둘이 함께 노를 젓는 복식 조정 경기를 한다고 할 때 같이 매일 7~8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추며 노를 저으며 조정 경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파서 못 나온다 그러고 아무나 갔다가 사람 집어 넣으면 이길 수 있습니까? 안 믿습니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됩니까? 내가 보기엔 최소한 10년 이상 지났습니다.
그래서 현대에는 목포댁이 많습니다. 목포에서 이사 온 사람이 아니라 목회를 포기한 댁입니다. 목회를 포기한 사모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함께 성도들의 아픔을 느끼는 그것이 너무너무 목회에서 중요합니다. 큰 목회를 하느냐 작은 목회를 하느냐 그것은 각자 하나님이 세우신 그릇에 따라 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다 순복음 운동을 한다고 조용기 목사님처럼 하는 것도 아니고 찬양집회 한다고 온누리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제자훈련 한다고 사랑의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교리 설교를 한다고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더 커질 수 있겠지만 각자 자기의 결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유리하는 자들, 버림받은 자들, 괴롭힘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세상에 괴롭힘을 당하고 자기 자신의 죄에 괴롭힘을 당하면서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의 상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며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불화하고 버림받고 내동댕이쳐지고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삶 속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관심사가 세속적인 데에 쏠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서 누리고 먹고 마시고 좋은 데 가고 그런 것에 모두 쏠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가고 늙고 변해가고 맨 처음에는 소명이라고 무엇을 받고 목회를 해 보겠다고 꿈을 꾸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과는 별로 상관없이 그냥 직업이 그래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의 유능함, 진실함, 열정, 모든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누군가가 막 열정적으로 사역하고 기도 응답을 받고 성령 충만하고 창의적으로 사역하고 성도들과 한 마음이 되어서 막 목양을 해 나갈 때는 성도들이 그 목자를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추석때가 되어도 담임목사한테는 사과 하나 안 보내도 부목사한테는 고기를 사서 보내고 그것이 다 성도들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열정의 불이 꺼져서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이 버려진 것 같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다 라고 하는 마음의 고통이 없으니까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장소적으로나 자기와 항상 함께 해주시고 때마다 나타나도 마음이 자기를 떠난 것을 부부와 교인은 금방 압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와도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아내는 알고 늘 교회에 붙어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없다는 것을 성도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서 사랑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불평과 불만이 일어나게 되고 어떤 섭섭한 마음을 듣게 되면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은혜의 힘이 자기에게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만 뒀으면 좋겠다.’ ‘빨리 정리를 했으면 좋겠다.’ ‘빨리 은퇴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답답한 교회를 그만두고 좀 괜찮은 교회로 가고 싶다.’ 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도 살다가 보면 ‘이 여자말고 저 여자랑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남자말고 저 남자를 만나보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그 교회 목회자가 그 교회를 가지고 그런 생각 한 번쯤은 안 해 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딴 교회 욕심은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세월을 헛질하는 것입니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있느냐? 남이 못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냐?’ 입니다. 궁금한 것은 도대체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만나지도 못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혼들이 굶주리고 곤고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왜 어떤 목회자는 바로 앞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유리하고 방황하며 고생하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스스로 울 수 없는 교인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직업입니다. 실제로 그런 직업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상이나면 옛날에는 곡소리가 안 나면 법도가 있는 집안이 아니면 곡 하는 사람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상복을 입고 울어줍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심으로 울어 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영혼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목회자의 영혼은 병들지 않습니다. 그럼 왜 못 울어줍니까?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못 울어주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수련회가서 중고등부 아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 아이들이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 이상해요’ 기도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환청 같은 것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 중 여러 명이 목회자가 됐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울어주고 계신데 목회자는 그들을 위해서 울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 잘 하십시오. 새벽기도 나오셔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슬픈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에서 한 말처럼 ‘정을 억제할 수 없어서 물이 가득 고인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성소에 나와서 확 쏟아 놓는 것’ 이라면 누가 그것을 기도할 의무를 거기에다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자신이 쏟아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런 마음이 자꾸 사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건져내야 할 목회자가 자신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렇게 된 사람은 그렇게 된 다른 사람을 건져낼 수 없습니다.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남의 영혼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견실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육지에 발을 딛고 있어야지만 손이든지 밧줄이든지 작대기라도 내면서 끌어 오르지 자기가 발이 닿지 않는 물에 빠져 있고 수영도 못하는데 누구를 건져내겠습니까? 최악의 구조는 헤엄 못하는 사람 둘이서 함께 물에서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냥 각자 가는 것이 둘 중에 하나라도 살지 둘 다 손 붙들고, 더군다나 두 손을 붙들고 놓지 않으면 둘 다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기도를 안 하십니까? 어떻게 자매는 왜 1년이 지나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이것은 단순히 (?)으로써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신념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는 이렇게 보고 이렇게 느끼면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무언가 그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일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가르치시고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사람들에게 큰 능력으로 설교를 하시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고치신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100% 적용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거를 가지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은 이 당시에 이렇게 기적이 아니면 수많은 병들을 현대의학으로 고칩니다. 나는 이것을 고친다는 개념도 들어가지만 또 하나는 실제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는 삶의 치료를 함께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아프면 기도하면 낫는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것과 함께 이제는 그들의 고통받는 자리로 내려가서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지구상에 있는 눈 먼 자들 ‘다 떠!’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시고 눈에다가 발라 주시면서 뜨게 하시고 문등병자를 안수해서 기도하시고 앉은뱅이를 앉아있는 몸을 일으키시면서 그렇게 구원의 복음이 개인적인 터치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도록 영혼 하나하나를 돌보신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비극적인 상태에서 건져내는 것이 결국 첫번째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데 그 속에 어떤 능력이 나타나서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지루하고 아무것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고 심지어는 저도 자기가 하는 말을 느끼면서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성경책 하나 소지하지 않으신 채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서 천국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성경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고 성경을 가르치면 변화되었는데 지금은 사회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져서 삶 자체의 틀을 바꾸지 않고는 성경만 가르치는 것 가지고는 그 사람의 전체적인 삶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이 쉽지 않은 때에 이르렀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성경공부를 통해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 그것 뿌린 씨앗을 새들이 날아와서 먹어버릴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 시간 성경공부하고 집에 가서 핸드폰 켜 놓고 텔레비전 동영상 켜 놓고 2~3시간 보내면서 정신을 다 빼고 일주일을 그렇게 살다가 그 다음에 성경공부를 하러 오는 것입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어떻게 성경을 가르쳐서 이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될 것인가를 가져야 합니다. 부교역자 때 한 가지 경험을 가져야 하는데 성경공부를 시켰는데 아이들이 놀랍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영원히 목회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영혼이 변화된다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뚜렷한 기억이 만약 없다면 그러면 여러분들이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왜 내 성경공부에는 아무도 변화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되는 성경공부에 참여해서 내게 없는 무엇이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게 천국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면 설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은 설교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자기가 설교를 못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설교를 못하는 것이 목회에 있어서 그렇게 결정적인 거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담임목사라면 매우 매우 탁월한 설교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훌륭하게 해내는 그런 사람들이 부교역자로서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많이 인정을 받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부서를 맞고 교구를 떠나서 자기가 한 교회를 세우고 개척을 할 경우에는 그 때에는 설교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학교는 어차피 부모 따라서 교회에 오는 아이들이니까 내가 설교를 못한다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모였던 교회도 설교를 못하면 떠납니다. 떠날 때 ‘설교를 못해서 내가 떠난다’ 이렇게 말하고 떠나는 교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떠나거나 말없이 떠납니다. 마지막에는 설교가 재미가 없어서, 설교가 맛이 없어서, 은혜를 못 받아서 떠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좋은 설교자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J.A.알렉산더가 한 것처럼 구 프린스턴대 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렇게 저 깊은 대양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설교하지 않으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이 몇 명이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그 자기의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 때마다 회심하는 영혼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거의 없다 그럴 때에는 내가 진짜 설교자로 소명이 된 사람인가 되돌아봐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다른 일들은 잘 하는데 설교를 너무 못합니다. 그러면 목회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이 뭐하는 사람은 교회 행정을 잘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경영하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반죽이 있어야 빵을 합니다. 결국은 밀가루가 있어야 반죽을 하고 반죽을 해야 빵을 하잖습니까? 그런데 밀가루를 빻아오는 일은 설교가 하는 일입니다. 설교를 듣고 모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깨뜨리고 반죽을 하고 그 신학을 가지고 반죽을 빚어서 빵을 만들고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부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해야 됩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1980년대 영국 목회자로서 한국에 이름을 떨쳤던 강해 설교자 데니스 레인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진짜 그 분의 인기는 절정이었고 한국에 오면 구름같이 목회자들이 모였습니다. 학생들이 신학교를 빠지고 갈 정도였습니다. 제 친구 목사 하나가 데니스 레인을 만났다고 합니다. 만났다고 그래봐야 만나 주었을리는 없고 걸어나오는데 붙들고서 안면몰수하고 만났다고 합니다. 로이드 존스에 빠졌던 친구인데 그래서 ‘데니스 레인 목사님, 제가 한 가지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라고 하더랍니다. ‘당신은 정말 탁월한 설교를 하시는데 너무 감동이 됩니다. 어디서 누구한테 그런 설교를 그렇게 잘 한 계기가 있습니까?’ 물어봤는데, 그 때 이 친구의 관심은 성령 세례였습니다. 참고로 나는 성령 세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당연히 데니스 레인이 ‘제가 모년 모월 모시에 성경을 읽다가 불이 임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 알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런 특별한 계기가 없습니다.’ 그럽니다. ‘어떻게 그리 잘 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옥스퍼드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학교 때에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될 때까지 저는 설교 못하는 설교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나?’ 그랬더니 ‘오직 두 사람만이 나에게 설교를 했는데 로이드 존스와 J.A.패커 두 사람만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신앙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강해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요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간략히 이야기하면 첫째는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을 깊이 만난 모든 사람이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하나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되고 두 번째는 좋은 설교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어야 됩니다. 그것이 책이든지 실제 설교든지 간에 많이 듣고 자랐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자기 학문의 내공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라고 내가 늘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내가 오늘 처음이야기 하지만 열린교회 있으면서 너무 안타까운 것이 ‘나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났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해. 그건 내가 의심하지 않아. 내 사상은 잘 안 배워. 그러고 그렇게 설교를 많이 했고 같이 있으면서 수천편의 들었고 내가 준 책만 수십 권이고 내가 강의해준 것만 해도 수십 편이고 얼마든지 많은데 얼마간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어떻게 저 머리에서 저런 행동이 나올까?’ 할 정도로 신학적으로 전혀 아닌 사람 뒤에 가서 줄을 서고 그것을 이용해서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 있는 동안에 나를 사랑하고 좋아했지만 내 사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길을 찾는데 내 설교와 내 책 바깥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회자 제자는 있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사상자의 제자는 없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새가족반 졸업한 다음에 열린교회에서 구역장 생활 5년만 했으면 절대 그런 선택을 안 할 사람이 그런 단체에 가서 교육을 받고 그것을 자기 목회의 부흥의 수단으로 삼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보입니다. 그 많은 기회들을 다 버리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라고 하니까 유학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보가 됩니까? 유학을 가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목회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유학을 하고 와도 목회에 도움이 안 됩니다. 자기가 나처럼 계속 공부를 하면서 목회에 접목시켜 나가는 그런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공부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자기 적용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들어도 자기의 신앙과 연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목회에서 장점으로 써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듣고 가져와도 이 사람의 생각은 그 진리를 자기에게 적용해서 새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설교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설교자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머리가 이해되고 들어갑니다. 그러고 나오면 결국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설교가 되려면 들어갑니다. 배 속에 들어가서 난리를 쳐서 완전히 쓴 물이 쏟아져서 피가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살과 피가 된 다음에 비로소 육화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 적용력입니다. 무엇을 들어도 내 인생,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예배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예배를 자기 영혼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교역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보여주려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교역자가 되어가지고 담임목사한테 ‘예배 드리는 자세가 틀렸다. 왜 똑바로 못하냐? 왜 설교 시간에 딴 데 쳐다보냐? 왜 핸드폰 만지작거리냐? 왜 뒤에서 자꾸 돌아다니냐? 읽지도 않을 것 노트한다고 고개 숙여서 필기하고 있느냐?’ 그런 지적이나 받으면서 교역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수없이 정보를 김남준 목사를 통해서 들었을 지는 모르지만 자기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원하면 빈들에 나가서 영혼들을 돌보려고 하다가 보면 결국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물도 없고, 피도 없고, 땅도 없고, 남이 못 본 것을 본 것도 아니고, 남이 못 먹는 것을 느낀 것도 아닙니다. 좌우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교회 하나 만들어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이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 아닙니까? 그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예전에 있었던 교역자 한 사람이 ‘목사님,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도 열심히 심방하고 열심히 목회하고 있습니다.’ 누가 안 한 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묻는 사람에게는 해 줄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신앙의 비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굳이 목회자가 아니어도 주님을 깊이 만나야 된다 하면 성도들은 다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교역자는 이해를 못하고 상황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목회의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본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기도를 나오면 어떠니?’ 사모가 마음이 산란하고 여러가지 일이 어렵고 힘들고 남편과의 관계가 어려워도 나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 목회의 사명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워도 여기서 주저 앉을 수 없다.’ 목회자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경회 때 은혜받은 성도들도 똑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가 사랑스러우냐?’ 하면 예배시간에서 눈물 흘리는 교역자가 제일 사랑스럽습니다. 그가 일을 못하면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술을 모르면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능력이 좀 모자라는데 참고 기다려주고 도와주고 그랬는데도 작은 교회밖에 못한다면 자기 몫이고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시인이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친구다. 능력있는 사람들의 친구가 아니라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친구다.’ 나는 여러분들이 교인들로부터 들려오는 평가가 ‘정말 훌륭하셔요. 정말 진실하셔요. 정말 우리를 진심으로 신방하셔요.’ 그런 이야기 들어올 때가 ‘기발하셔요. 천재예요.’ 그런 이야기가 들려온 적도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로 감동이 없지만 아까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국은 열린교회의 정신이 아니라 모든 목회자가 가져야 될 정신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소명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비극적이어서 무엇인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는 자기가 죽을 것 같은 것, 그것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짓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것이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간직하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야 됩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이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고 그러지만 그 가수 되는 사람이 몇 사람 안되는 것처럼 목회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길을 걷지는 않지만 수천명 수만명을 이루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몇 만명의 한 둘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백명, 오십명을 놓고라도 목회할 수 있는 사람, 투박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 목자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려고 한다라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목회자, 그것이 오늘 날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그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곧게 하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잠깐입니다.
그제 권성수 목사님을 만났는데 혜성같이 나타났다고 그랬는데 이제 벌써 은퇴입니다. 목사님하고 나하고 3살차이인가 4살차인가 그렇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의 인생 별거 아닙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한 번 시작한 이 목회에 하나님 나에게 영혼을 붙여 주시고 한 번 캄캄한 시대에 나로 말미암아 인생의 참 생명의 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엊그제도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가 그 감옥 속에 갇힌 채 말씀의 불이 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눈물 나게 그리웠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목회자들이 저렇게 거역할 수 없는 불을 마음에 느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뒤로 물러서지 않는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날이 많이 있었지만 괴로운 모든 날을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일반적인 기도로는 그것을 그 운명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기도를 어느 한 순간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를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좀 이해가 안 갑니다. 가끔 여러분 디스하는 것은 아닙니다. 격려하는 것입니다. ‘저 목사님, 담임목사님을 잠시 뵐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비서가 ‘무슨 일이세요?’ 그러면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목사님께 말씀드려 볼께요.’ 그러면 시간을 잡아 줄 것입니다. ‘나를 보자고 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될 거 아닙니까? 여러분, 만나자고 그럴 때 내가 안 만나 준 적 있습니까? 어느 순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면 내가 스케쥴이 있어서 못 만날지 모르지만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왜 만나 주겠습니까? 아무도 거절한 적 없습니다. ‘저 죄송합니다. 저 한 일주일 교회 안 나와도 되겠습니까?’ ‘왜?’ ‘광림수도원에 가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려고 그럽니다.’ 나는 이런 상담 좀 받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상담은 ‘아이들을 친정에 맡겨 놓고 사모하고 같이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런 상담 좀 받아봅시다. 돌아오면 모든 것이 변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40일 기도하고 오겠습니다.’ 그것까지는 대답 못합니다. 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밖에 없는 우리 인생 정말 하나님 앞에 보람있게 쓰임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