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는 계십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박나리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썼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다윗이 목동 시절에 쓴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23편을 잘 읽어보면 이 시는 결코 다윗이 어린 시절에 쓴 시가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숙한 시기에,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런 모든 고난을 겪고 왕이 된 이후 혹은 인생 말년에 쓴 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떤 잘 나가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중년인데 불과 40대 중반밖에 안 되었는데 알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밤이면 잠이 안 오고 식은땀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가득 들고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수가 없이 건강이 나빠지면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다녀봤지만 병원에서는 그 병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지인이 잘 아는 정신과 의사한테 이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정신과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면서 토로하고 있는데 그때 의사가 조용히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아주 중요한 충고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았고 약을 처방하는 처방전을 썼습니다. 그러더니 그것을 봉투에 넣고 풀로 붙여서 그 환자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 병은 제가 꼭 고쳐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에 처방전이 들었으니 약국을 가기 전에 먼저 집에서 저녁때 밤중이 되면 혼자 조용히 이 편지를 한번 뜯어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써줬습니다. 그래서 이 신사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참 이상한 의사도 다 있다. 그리고 왜 처방전을 써주고 약국을 가지 말라고 그랬을까." 그리고 집에 와서 저녁 시간이 되고 밤이 되어서 혼자 자신의 방에서 스탠드를 켜고 의사가 써 준 봉투를 뜯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무개 귀하,
귀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약의 종류 : 구약
약의 이름 :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하루에 다섯 차례 물 없이 천천히 씹어 드시오.
이 사람이 편지를 받아보고 확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 ‘웬 개뿔 같은 의사가 자기가 아프니까 의사도 자기를 놀리는구나' 하면서 마음의 분노가 일었습니다. 이제 그날 밤새도록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엉금엉금 기어가서 쓰레기통에서 그 처방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생각을 바꿨습니다. 의사면 약을 지어주든지 아니면 수술을 하든지 뭘 해야지만 돈을 벌 텐데 왜 돈도 안 되게 이런 처방전을 써주었을까 생각을 하면서 이게 도대체 밑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언제 읽었는지 모르는 책장 선반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는 옛날에 교회 다니다가 지금은 안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시편 23편을 한번 펴봤습니다. 그것을 이제 하루에 다섯 번이라고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아침 먹고 점심 사이에 한 번, 점심 먹고 저녁 사이에 한 번, 그리고 저녁 먹은 후에 한 번, 마지막 잠들기 직전에 한 번, 이렇게 다섯 번을 읽으라고 지시가 되어있었습니다. 이 성경을 들고 다닐 순 없으니까 시편 23편을 작은 카드에 정성껏 옮겨 적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일어나서 정원을 산책하며 이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면서 6절까지 읽었습니다. 그렇게 5번을 읽으니까 일주일이면 35번, 그다음에 한 달 4주에 140번 두 달이면 280번입니다. 두 달 쯤 읽으니까 그다음에 그 카드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달쯤 지나면서부터 거의 외우기 시작하다가 두 달 되니까 이제 완전히 외웠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그 처방을 따라서 일어나서 정원을 거닐면서 시편 23편을 조용히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부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23:1-6)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그 성경을 외우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커다란 다 낡은 콘크리트 같은 건물이 와르르 파괴되듯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와르르 무너지면서 생전 처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병이 아직도 무엇인지 모르는데 자신은 한때 세상에서 자신만만하게 잘 나가던 금융 엘리트였고 출세가 보장된 길을 달려가고 있었는데 자기 인생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이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가 이 세상에 혼자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의 비극이 이 병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자기의 인생의 불행은 자기에게 목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깊이 회개하면서 거기서 어릴 때의 신앙에서 배웠던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만나고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병이 나았겠습니까, 안 나았겠습니까? 정신에 관계된 거니까 놀랍게 회복이 되면서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시편 23편은 바로 이렇게 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심오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토막이 1절입니다. 그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그 여호와 하나님이 이 시인에게 목자신지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인 6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사람이 어떻게 미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결단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 집회에 한 절씩 해서 5절까지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은 마지막 날 저녁때 모든 걸 설교하려면 3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래서 6절은 그냥 맛만 보여드리고 5절을 상세히 설명해서 6절을 마무리하고,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에게 23편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오늘부터 빠지지 말고 오셔서 한 절도 남김없이 여러분들이 들으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첫 번째 토막인데,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여호와'라는 말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성함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함이 크게 세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하나님, 그리고 주, 그리고 세 번째 '여호와'입니다. 이 세 하나님의 성함 중 가장 거룩한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우리로 말하자면 호적상에 등록된 이름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고유한 이름인데 이 하나님의 성함은 이방인들에게는 계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가 되고 그것도 이제 출애굽기 6장 이후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계시하게 됩니다. 그 전에 나오는 것들은 아마도 그때 계시가 된 이름을 투영해서 옮겨 놓은 것이지, 원래는 '여호와'라고 당신 자신의 본명을 계시한 때가 모세에게 계시하시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이름은 굉장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여호와'라는 성함이 하나님이 계시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이름이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성함이 각각 지시하는 바가 조금 다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라는 성함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원래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의 말로 쓰였습니다.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엘로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함이 어디에서 왔을까 학자들이 생각하는 데 여러 가지 의견이 많지만, 대표적인 의견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려워하다'라고 하는 '알라흐'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학설은 '울'이라는 단어에서 왔을 거라고 봅니다. 울은 도토리나무입니다. 그게 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됩니까. 복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워낙 특별하고 장엄하신 분이기 때문에 복수를 쓴 것입니다. 신이 셋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왔냐면 태풍이 많이 부는데 끝까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뿌리가 저 땅에 단단히 박혀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는 도토리나무 혹은 상수리나무였습니다. 그래서 힘이 세고 강하다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함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계시가 되었어요. 그래서 엘로힘 하나님 하면, 그것은 모든 신들 위에 가장 뛰어나시며 모든 것들을 지배하실 수 있는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가지신 신이시라고 하는 의미로 이 하나님의 성함이 나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라는 성함은 '아도나이'라고 하는데, 주는 원래 주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상전을 부르는 주인을 가리키기도 하고, 신하가 임금을 가리킬 때 '주'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아내들이 남편을 부를 때도 '주'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이 ‘주님’이라는 단어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심지어 나라는 존재 그 자체도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뜻에서 주님이라는 하나님의 성함이 우리에게 계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성함과 주님이라는 성함이 똑같은 한 분, 높으신 그분을 가리키는데 그 성함을 통해 알려주고자 하는 바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 '여호와'라고 하는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가 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은 멀게는 아담과 노아에까지 이르지만, 본격적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이 맺어진 것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언약이 발전해 오면서 모세와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 관계에서만 불리는 성함이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시인이 말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자신은 언약 관계 속에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선택이 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원래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속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운명이 함께 묶인 관계가 됩니다. 그것을 언약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한 번 언약을 맺으시면 깨는 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아주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수시로 그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에 그 언약의 관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들고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정도 정리해 놓고 보면 시인이 자신의 고통 받았던 날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세밀하게 인도해 오시고 자기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자전적으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부르고 있는 높으신 그 여호와를,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지칭하면서 부르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말과 그 하나님과 맞은편에 서 있는 이 세상, 혹은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를 한번 비교해 봅시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고 그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하고 비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그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떨리는 두려움 속에서 신앙이 출발하는 겁니다. 그 떨리는 두려움이 너무 무섭고 두려운데 그냥 도망가버리고 싶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포라고 부르지,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무시하고 두렵고 떨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또 한편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의해서 이끌리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동시에 있습니다. 너무 무섭고 떨리면서도 도망가기 싫은 그런 사랑의 이끌림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을 갖는 것으로 신앙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걸 얼마나 유지하면서 사느냐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보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합니다. 원인은 무엇입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경외심만 없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은혜를 받았든지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옛날의 은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떤 경외심을 가지고 사느냐, 그것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실까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양과 형체, 그리고 빛깔과 부피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1호선 전철역에서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10시 20분 수업이 끝나고 내려와서 밤에 고단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고 전철에서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전도를 했습니다. 거기 이상한 사람들이 때리려고 끌어내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저기 어떤 사람이 술 좀 먹은 것 같았는데, 손을 들었습니다. “여보시오.", “예", “당신, 하나님을 봤어?" 그리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봤다고 그러면 어디 한번 보여달라 그럴 것이고 못 봤다 그러면 너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왜 전하냐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우리가 양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을 종합병원에서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양심이 있냐고 하니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배를 갈라보자 해서 외과 의사가 배를 갈랐습니다. 콩팥, 쓸개, 간, 염통, 창자, 대장, 소장, 다 있는데 양심이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엇을 착각한 것입니까. 양심이라는 것이 쓸개나 간처럼 그렇게 고깃덩어리라고 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구도 양심의 존재를 외과에 가서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물의 영역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물건처럼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마치 외과에 가서 배를 갈라서 양심을 찾아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억지 주장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잘못 보일 수도 있고 불확실할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보는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실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많이 들여서 몇 천 년 혹은 몇 만 년 된 유적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지어 놓은 유적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이 유적지를 남겼는지를 생각을 하면서 감동합니다. 제가 처음 로마에 갔을 때 받은 그 충격은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의 기원전 1세기, 기원후 1세기, 이런 때에 지은 건축물로 우리로 따지면 한사군 시대 때에 지은 집들인데 그런 어마어마한 판테온 같은 건물을 지어서 수천 명이 기둥도 없는 예배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그 문명사적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하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행성에 살고 있습니다. 그 지구 중에서도 손톱만 한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 그것도 남북으로 반으로 갈라져서 그저 한 9만 5천 제곱킬로미터 쯤 되는 땅덩어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차를 밟고 달려도 한 네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정도의 땅덩어리에 살고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갔다 그래봐야 그 지구를 몇 바퀴 왔다 갔다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는 사실은 태양계에 속해 있는 작은 별입니다. 태양은 항성입니다. 항성은 항상 불타는 별입니다. 그 항성 주위를 행성이 돌고 있습니다. 이제 불꽃처럼 타오르는 별, 항성을 중심으로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여덟 개의 별이 돌고 있고 그 여덟 개의 별 주위를 또 작은 별들이 됩니다. 태양계 전체의 가족은 그저 한 250개 정도의 별들이 돌고 있는 자리입니다. 이 태양계는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은하는 바람개비 같은 모양으로 되어있는 쟁반형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인데, 태양과 같은 항성이 약 2천억 개쯤 모여 있고 거기에 딸린 가족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약 4조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그 별들의 덩어리입니다. 거기 좌측 하단에 태양이 있고 그 주위를 돌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별들 중 달 이외에 아무 데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밟은 땅은 달밖에 없는데 달은 빛이 12초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별입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러한 4조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우리 은하에는 우주 전체에 있는 은하계 중에서 결코 큰 은하계가 아닙니다. 얼마나 있을까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학자들은 대충 관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우리 은하 같은 4조 개의 별들이 모인 그런 은하들이 약 2천억 개쯤 있는 것이 우리의 관측 범위에 들어오는 우주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좀 생각이 다릅니다. 이쪽 끝에서부터 이쪽 끝까지 거리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150억 광년 쯤 될 거라고 보고, 많이 보는 학자는 960억 광년일 것이라고도 보는데, 그것도 저 끝까지 가본 적이 없고 그 끝에서 끝이라고 하는 것은 관측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우주가 1초당 폭발을 일으키면서 2천 킬로미터씩 커지고 있습니다. 그 끝 밖에는 무슨 물질이 있는가 하는 건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이제 다중우주 이론이라고 해서 이런 우주가 수도 없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 우주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나옵니다. 이 우리 은하계가 이 4조 개의 별들이 우주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초속 220킬로미터의 속도로 이 4조 개의 별들이 우주 공간으로 비행을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그대로 질서 지어진 가운데 도는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우주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그 우주를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있으라' 하는 그 한마디의 말씀으로 모든 우주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살아봐야 100년, 최대한 많이 잡으면 100세 넘게 사는 사람들도 있으시긴 하지만 극히 드물고 보통 그래서 넉넉잡아도 90세 아니면 아주 넉넉히 잡아도 100년쯤 지나면 여기서 다시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80세, 100세라고 하는 그것이 얼마나 짧으냐 하면 그린란드에 사는 상어의 평균 수명은 460년입니다. 수백 년을 산 거북이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은 동물들 가운데 결코 긴 목숨이 아닙니다. 진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살다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하나님은 있다, 없다, 그리고 있어도 내 인생에 상관하지 마라, 심지어 하나님은 지구를 떠나라, 이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1954년도에 창립하시고 세 번을 건축해서 여기 오셨다고 하는데 1995년도에 이 교회당이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교회당을 다 보십시오. 수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물건은 만들어 놓은 사람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설계를 따라서 목적이 있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벽은 냉기와 한기와 바람으로부터 햇빛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은 비와 이런 것들로 보호하기 위해서, 마이크는 소리를 키우기 위해서, 종은 치기 위해서, 그리고 이런 모든 형식은 또한 아름다움과 밝음을 위해서 이렇게 우리들이 누군가 우리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이 생겨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결국 인간이 저절로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에 눈을 뜨는 것이 신앙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망원경으로 보면 저 멀리 유난히 큰 별이 보입니다. 다른 별들은 좁쌀만 하게 반짝거리는데 어떤 별들은 막 엄지손가락만 하게 큰 왕별이 보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그걸 왕별이라고 그랬습니다. 왕별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수천억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입니다. 하나의 은하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한한 우주 공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항성들이 얼마나 넓으냐 하면 태양과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이 500원짜리 동전 안에 들어간다면 태양과 똑같은 별은 대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500원짜리 동전 안에 태양계가 모두 들어가는데 여덟 개의 항성이 다 들어가는데 그다음 태양과 같은 별은 대구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별이 2,000억 개가 모인 곳이 우리 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밤하늘에 별을 보면 이 별빛들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보통 몇백 년 전에 출발한 빛이고 멀리 오는 빛은 몇 만 년 전에 출발해서 겨우 우리 눈에 도달하는 빛입니다. 그 별들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하면, 별들마다 다르겠지마는 별들의 나이는 40억 년에서 100억 년 이상 됩니다. 인간의 나이 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무궁하게 흐르는 이 우주의 그 시간과 그 드넓은 우주를 생각하면 인간이 정말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무한한 우주의 공간은 나를 두렵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신 끝없는 하나님이라는 걸 우주 공간에서 발견하게 될 때,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생각하면 그때 인간이 우주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들풀 끝에 매달려 반짝이는 이슬과 같은 것이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은 무한하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은 바로 고난 속에서 그 역경을 헤치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와 언약을 맺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인자와 자비의 인자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을 의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근데 신앙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 '목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양을 치는 목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이 했으면 가슴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 텐데 실제로 목동 생활을 했던 다윗이 이 말을 하기 때문에 훨씬 마음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평생을 살아보니 그 하나님이 나에게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마치 내가 양 떼를 인도하는 것과 같더라는 것을 이 시인이 깨닫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목자는 결국은 짐승을 치는 것인데,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양이라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근데 사람들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자신은 양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23편을 읽습니다. 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자기는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물 중에 부정적인 동물이 있고 긍정적인 동물이 있습니다. 뱀은 부정적인 동물일 것입니다. 물론 이제 정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인 동물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뱀, 하면 '아이' 그럽니다. 양,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동물입니다. 제가 양띠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 그런 의미로 순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양을 씁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중동 지방, 특히 이라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못 참는 욕이 있는데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고분고분하다 가도 그 표현만 쓰면 덤벼든답니다. 그 사람들에게 양은 부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래서 게으르고 머리 나쁘고 먹는 것만 좋아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양 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닭대가리 같은 인간이라 그러면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돼지같이 욕심이 많으면서 닭처럼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양 같은 놈'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이 양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그려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거늘' 하면, 양은 길을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로 나옵니다. 어느 성경을 봐도 스스로 돌아온 양이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집 나간 양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에서 목동이 양을 찾아 나선 것도 이유가 결국은 어디서 인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양은 시력이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한 2.5 미터까지는 또렷이 보는데 그다음부터는 근시라서 잘 안 보인답니다. 그런데다가 모든 짐승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무기를 자기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엄청나게 빠른 임팔라 같은 동물은 염소처럼 생겼는데 엄청나게 빠릅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사자를 만나도 쉽게 따돌릴 정도로 그렇게 발이 빠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카멜레온은 변신을 합니다. 스컹크는 방귀를 뀌어서라도 그 적군들을 제압합니다. 오징어는 먹물을 뿜어서 자기의 존재를 숨기기도 합니다. 모두 각각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등등 무엇인가 있습니다. 기린은 긴 목이 있어서 미리 감시를 잘하는데 양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이빨은 어금니만 발달해서 풀 같은 것을 껌처럼 씹어 먹기에 적합한 이빨이지 누구를 물어뜯는 이빨은 아닙니다. 뿔이 달렸는데 염소는 그래도 뿔이 뾰족해서 한번 받아보면 될 수 있는데 양은 만두처럼 이렇게 빚어져서 붙어있는데 완전히 장식품이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성경에 보면 수많은 동물이 있는데 왜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양이라고 부르고,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양 떼라고 심지어는 어린 양이라고 부르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 인간은 인류학자들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은 이렇게 큰데 옛날에는 인류의 최고가 한 11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채어 가기에 딱 맞은 최고였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잘 먹고 변하면서 이렇게 사람들이 덩치가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2천 년대, 2010년도에 제가 북한을 가보고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국경을 지나 군사 분계선을 지나서 버스가 들어갔는데 북한 군인이 차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검문 검색을 하는데 우리가 웃음 터져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삼촌 군복 같은 큰 군복을 중학생이 입고 모자를 썼는데 모자가 쑥 들어갔습니다. 1990년대에 고난의 행군 때 태어난 아이들이 군대에 들어왔는데, 지금 북한군하고 한국군하고 키 차이가 10센티미터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딱 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 한 5, 6학년 학생이나 넉넉히 잡아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 키입니다.
우리 원래의 최고가 그렇게 작았다는 것, 그런데도 이렇게 가장 이 지구에서 우세한 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뛰어난 지능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심지어 5톤씩 되는 그런 코끼리들을 포획해서 노리개로 삼아서 동물원에 가둬 놓고 구경을 합니다.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는데 일본의 오키나와에 가니까 제가 보기에는 한 10톤 정도는 돼 보이는 소 세 마리 정도 크기가 되는 고래를 잡아다가 어항에다가 집어넣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힘으로 따지자면 인간이 100명 매달려도 그런 고래를 잡을 수 없을 텐데 지능으로 해결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말 위대한 존재입니다. 어떠한 동물도 이룰 수 없었던 이 위대한 문명을 이루면서 여기까지 살아서 결국은 인간을 이길 수 있는 자연의 적들은 없는 동물들은 없는 그러한 우세종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에 있어서는 다른 짐승들보다 뛰어나기는 하지만 복잡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강단에 제가 아마 지금 7시 45분쯤 돼서 올라갔는데 현재 오십몇 분쯤 흘렀어요. 근데 34분마다 우리나라에서 한 명씩 자살합니다. 오늘 저녁에 집회하는 동안에 두 명 정도는 이미 최소한 세 명은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도에 죽은 20대 가운데 절반은 자살로 죽었습니다. 절반은 병이나 사고로 죽고 절반은 자살로 죽은 것입니다. 인간은 지능은 그렇게 뛰어나지만, 정신과 마음으로는 혼자서 독립해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미친 듯이 오직 그 물질적인 풍요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행복해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행복의 한 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더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인간이 모든 동물 위에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렇게 뛰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 안 믿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여러분들은 예수 안 믿으셨을 분들입니다. 혼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게 뭔지 아십니까.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목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양으로 보는 것인데 이 시인도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이시고 자기는 하나님의 양인데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시는 것이 마치 자기가 목동이었을 때의 양 떼들을 인도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이 목자라는 말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경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더 넓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양이라고 표현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창조된 너희는 모든 동물 위에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렇기 때문에 나 하나님 여호와를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나에게는 이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양을 비단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지칭하여 양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들에게 이것이 선교의 큰 동기를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결코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목자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길래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양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저녁때 목자가 돌아와서 양을 모두 인도해 우리에 집어넣고 세어보니 한 마리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찾아 나서면 결국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거고 그러면 맹수를 만날 수도 있고 도적을 만날 수도 있는데 만약에 다치든지 혹은 죽든지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손해입니다. 그러면 양 한 마리 포기하면 욉니다. 근데 이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겐 양 한 마리가 얼마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양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디선가 목자를 잃어버리고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을 그 양을 생각하니까 이 목자가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 양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양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저기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있는 양을 이제 목자가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옵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그 어깨가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양을 이렇게 죽은 멧돼지 떠메듯이 한쪽 어깨에 떠멘 게 아니라 양쪽 어깨에 편안히 메고 집까지 오는 것입니다. 이해 못 할 일이 그다음에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다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왜?", “저녁 먹었어?", “아니", “우리 잠시 후에 우리 모이자.", “왜?", “내가 잔치를 할 거야?", “왜?", “이 잃어버린 양을 찾았거든, 그래서 내가 너무 기뻐서 너희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오늘 내가 잔치를 해서 저녁을 쏠게." 설마 그 양을 주겠다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응." 그 양 한 마리 얼마나 된다고 양 한 마리 찾은 거 가지고 온 동네 사람 불러서 잔치하면 잔칫값이 양의 값보다 더 많이 들 텐데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양을 찾은 게 너무 기뻐서 그날 저녁에 손을 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을 보여주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종 젊은이들 상담해 보면, 문제가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너무 없습니다. 자기는 돈도 없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도 못했고, 자매들은 얼굴도 예쁘지 않고 몸매도 별로고 능력도 별로 없고 좋은 직장에도 못 다니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사람들과의 비교 의식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삽니다. 결혼한 주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은 저렇게 떵떵거리고 잘 살고 해외여행을 가고 강남에 아파트를 샀다고 하면서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이렇게 결혼해서 허덕거리고 이렇게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그러면서 진짜 왜 나는 좀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안 하겠습니까. 또 같은 남자도 나는 왜 이렇게 좀 능력 있는 처갓집을 못 만나서 내가 왜 이렇게 살까, 이번에 영국 총리 된 수막이라는 사람도 자기는 그렇게 부자가 아닌데 아내를 우연히 만나서 미국에서 교제하게 되었는데 인도 재벌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순간에 1조 6천억인가 가지고 있는 부자가 되어서 총리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나는 왜 그런 남자 같은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면서 밤에 옆에 자고있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있습니다. 그냥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나이를 들고 보니까 젊었을 때 우리는 목회자니까 사실은 돈, 돈, 하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없는 살림에 교회 살림을 꾸려 가려니까 늘 교회 때문에 빚에 시달리고 교회 때문에 돈, 돈, 그랬지 개인적으로 돈, 돈,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살고 보니까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돈이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이제 병원도 가야 하고 요양원에도 가야 하니까 필요하겠지만 젊어서는 기력도 있고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쓰는데 나이를 먹으면 밥도 소화가 안 돼서 옛날에 잘 먹었을 때 먹던 거 절반밖에 못 먹고 그다음에 더 나이가 들면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남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얘기한답니다. 이제 50살이 되면 그다음에 학력 평준화가 된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서울대를 나오고 이 아줌마는 이화여대를 나오고 여기는 연대를 나오고 그랬는데 어차피 50대 되면 자기가 차 어디다 세워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세금 냈는지 안 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맨날 핸드폰 잃어버려서 쩔쩔맵니다. 학력 평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60대가 되면 외모 평준화가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예쁜 사람하고 못생긴 사람하고 차이가 크게 나고 좋은 화장품을 바른 사람하고 그냥 보통 동동구루무나 바르는 사람하고 차이가 크게 나는데 60대 입장은 그냥 얼굴 자체가 늙어서 어쩔 수 없이 모두 똑같이 외모가 평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70세가 되면 그다음에 이제 경제 평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해외여행을 못 하고 없는 사람도 원래 못했고 기력이 없어서 비행기를 탈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휠체어에 앉아서 살거나 아니면 보조기 차고 다니거나 아니면 어디 좋은 요양원에 가서 그저 매일 침대에 누워서 뒹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쓸모가 없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그 미친 듯한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자기의 가치를 그런 데서 찾으려고 그러면 너무 비참합니다. 젊었을 때 아주 예뻤던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보면 우울해집니다. 젊었을 때 대기업에서 잘 나가던 상무, 전무 하던 사람이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있거나, 아니면 아파트에서 경비 서고 있는 겁니다. 별 볼 일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나이 든 다음에 일단 퇴직하고 나면 아주 특별한 사업에 재능이 있든지 아니면 학문이 뛰어나든지 등등 어떤 재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제2, 제3의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이 먹으면 그 자체가 퇴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든 다음에 보면 '젊은 게 참 재산이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젊다는 그 사실 그 자체가 좋구나'라는 생각을 누구나 다 하지 않습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도 한때는 다 그렇게 아름다운 때가 있었고 젊었을 때가 있었고 또 부자였던 때도 있고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한 사람들도 있지마는 넉넉했던 때도 있고 가난한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 의미는 거기에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거기에서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이 모든 인류 속에 섞여 있는 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 자녀가 인류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그 아내들이 가끔 남편을 멸시하면서 이 인간, 저 인간, 그러는 경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애는 자라면서 자기 아버지 이름이 인간인 줄 알았답니다. 하도 엄마가 그 말만 나오면 '인간아, 인간아' 해가지고, '아,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인간이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게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녀가 인류 중의 한 사람이라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 아닙니다. 나에게는 정말 'everything to me', 나에게는 모든 것이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니까 그와 나와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다.
어거스틴이라는 기독교의 성인이 있습니다. 4세기, 5세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기독교 역사에 아주 위대한 한 획을 그었습니다. 배척받은 기독교의 그 사상적인 토대를 놓아서 로마를 설득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그 아주 우주적인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저서를 남기는데 아직까지도 인류는 그 사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서구 사상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수문을 통과해서 만들어진 서양 바다가 바로 서양 사상입니다. 어거스틴 없이는 서양 사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서양의 그 문명이 어거스틴에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고 기독교 쪽에는 테르툴리아누스나 아이오스나 오리게네스나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자신의 수문을 통해서 서양 사상의 바다로 나가게 만든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자기의 고백록이라는 유명한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무엇이길래 하나님은 우리 보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손해나 되는 것입니까.' 그 말,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못 받으면 혼자서 너무 외로우신 분이라 그러면 그건 하나님도 아닙니다. 뭔가 모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고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왜 우리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그래서 묻는 겁니다. 왜 우리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큰 손해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위협하시면서까지 우리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데 말을 안 듣습니다. 이 사람은 뭘 좋아하나 봤더니 땅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그다음에 살아있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너 나를 사랑하면 있는 돈도 뺏어버리고 준 땅도 도로 빼앗길 것이고 그리고 네 목숨까지 거둬갈 것이다, 이렇게 협박하시면서까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그걸 통해서 바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과 맺고 있는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손들어 보십시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지금 엄청 경건한 교회입니다. 영화도 안 보십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봤습니다. 보면서 아주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10년 내에 한국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감동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동을 받은 게 아니라 인간의 외로운 실존을 그렇게 절절하게 그려낸 영화가 없습니다. 나중에 끝나는데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감동을 받아서 운 게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외로운 존재구나, 그런 것을 아주 절절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영화를 보는 순간 보면서 다 끝나고 내려오면서 특히 교회에 있는 40대 여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영화를 보여주면서 내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너희들이 봐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 외로운 거다, 그리고 너희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너희는 아직 근처도 안 갔다, 그러니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잘 믿어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메시지하고는 다르지만 이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자기에게 밀려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할 수 없는 허무감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건 허무감입니다. 세상이 성적으로 타락하고 세속적으로 되어 가는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인간의 그 외로움과 소외, 그리고 허무감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라도 젊은이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을 딴 데 팔아야지만 자기가 얼마나 근원이 없고 외롭고 비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을 파스칼 같은 철학자들은 회피라고 불렀습니다. 인생의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오락에 빠지고 그다음에 미친 듯이 세상의 즐거움에 빠진 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운동화 한 켤레가 올라왔습니다. 4억 3천만 원이랍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장인이 한 켤레만 만들었나, 아닙니다. 그냥 메이커에서 나온 건데 워낙 희귀해서 4억 3천만 원에 팔린답니다. 그걸 사 놓으면 또 오른다는 겁니까. 도대체 운동화가 무엇인데, 4억 3천만 원 집 한 채 변두리에, 요새는 변두리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경기도 지금 멀리 우리 동네에도 그 돈으로 못 사는데, 하여튼 더 멀리 나가면 어쨌든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운동화로 사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버닝썬 사태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거기에서 너무 범죄들이 저질러졌습니다. 예쁜 아가씨들이 폭죽을 터트리면서 술을 이렇게 쟁반, 가마 같은 것에 담아서 어깨에 메고 이렇게 폭죽을 터트리면서 옵니다. 술병 몇 개가 얹혀 있고 안주가 있습니다. 이게 1억 원짜리입니다. 술 한 세트를 사람들이 수시로 주문하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환락에 빠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외로움입니다.
그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많이 느꼈을 사람이 시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면서 인생의 그런 허무를 극복하면서 의미를 물으면서 찾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 사랑하는 엄마에게는 그 아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잘 생겼느냐, 그런 건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내 새끼입니다. 그래서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 그 자체가 엄마에게서는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 때문에 인생의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헛된 욕망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았을 때는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영원히 있는 것과 잠시 있는 것도 구별이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도 구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은 미워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겁니다. 자기는 미친 듯이 돈 벌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이 땅에서의 번영을 위해서 몸부림쳤지만 자기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왜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그 고백을 하는 겁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깊이 회개하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소경과 같은 삶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말입니다. 눈을 뜬 것입니다. '아, 내가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내가 길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목자가 험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한 마리의 양을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겁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올바르게 받지 못할 때 아이의 마음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인생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을 시인이 깨달았던 겁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인도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제가 1993년도에 교회를 7명 교인을 데리고 개척을 했는데 29년 전입니다. 그때 아주 마음 깊이 사무쳤던 것이 인격적인 목회를 하고 싶었습니다. 인격적인 교회, 인격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인격적인 사이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라고 그러려면 자녀하고 말이 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서로 감동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 훈련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인격적인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는 이렇게 부흥회를 하면 그냥 부흥 강사가 왕이었습니다. 막 반말도 하고 욕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다 일어나라 그러고, 거기서부터 얼마 헌금할 건지 부르라 그러고, 옆에서 쓰라 그러고, 얼마라고 이야기하면 그거 가지고 안 된다 하고, 벌 받을 줄 알라고 그러고, 협박하고 막 울먹이면서 서서 이렇게 합니다. 그게 제가 보면서 자란 시절입니다.
그게 전부 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가 떨어지는 겁니다. 어느 후배가 어제도 '목회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목회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한 사람이 계속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흥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고 건물이 커지는 게 부흥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인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갈 때 성도들의 마음속에 당연히 잃어버린 영혼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연히 은혜받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겁니다.
2천 몇 년도, 이천 한 오 년도에서 칠 년도가 사이에 일 년 동안 교회에 전도되어 온 사람들을 몇명인가를 조사하고 누가 전도했나 하고 조사를 했더니 전도되어 온 사람들 중에서 70%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1년 미만 된 사람들이 전도했습니다. 일 년 동안에 처음 와서 은혜를 받으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한 겁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밥 사주고 선물하고 해가지고 예수를 믿게 만든 겁니다. 그게 결국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그 사랑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당신을 경배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 안 하면 안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 가지고 부러뜨려 가지고 주저앉아서 무릎을 꿇게 만들거나, 하나님 경배하기 싫다는데 머리채를 끌어 가지고 땅바닥에다 처박으면서 군화발로 뒤통수를 밟으면서 나한테 절하라고 그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결국 우리들이 뭘 발견하게 됐냐 하면 인간의 자율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 인도하실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응답하며 나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느 교회 앞에 택시가 하나 섰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붕대를 가면 어떤 사람이 내리는 겁니다. 교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 몸으로 교회를 나올 수 있을까 했습니다. “이게 누구예요?" 그러니까 “아, 저 박 아무개 자매예요.", “아니 근데 이 몸이 왜 이렇게 됐어요?", “사고가 있었어요.", “왜 그랬어요?", “이따가 간증 시간에 얘기할게요, 어르신." 드디어 이제 예배가 끝나고 간증 시간이 됐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냐 그랬더니 이제 자매가 간증하는 겁니다. “여러분, 저는 그냥 나이롱으로 교회에 다니던 교인이었습니다. 그날도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일하고 주일은 좀 푹 자려고 하는데 벨이 울렸는데 벨를 끄고 잠들다가 보니까 11시 10분 전이었어요. 예배 시간에 이제 늦었구나, 큰일 났구나, 하고 바로 교회 앞에, 집 앞에 교회니까 그냥 대충 눈꼽만 떼고 그냥 아무 옷이나 껴입고 마스크 쓰고 이제 교회 가야 되겠다 그러고 나오는데,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리는 거예요. 핸드폰을 받아보니까, ‘너 왜 안 나와’ 이러죠.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나 지금 교회 가는 중인데 내가 어딜 나가, 너 우리하고 등산 가기로 약속했잖아, 우리 모두 모여 있으니까 빨리 와, 이 바로 아래 관악산 아래, 야 그러면 안 돼, 나 교회 가야돼, 너는 왜 그러냐, 너희 하나님은 열 한시에만 교회에 나타나신다냐, 아니면 안 오신다냐, 낮에 실컷 놀고 저녁 예배 때 가서 예배드리면 되지, 그러니까 그래도 가야 돼, 잠깐만, 기다릴게 빨리 와, 끊어버리는 순간에 이제 번민이 생긴 거예요.
내가 교회에 갈 것인가, 등산을 갈 것인가, 교회 생각을 하니까 갑갑한 거예요. 그래서 또 그 긴 설교 그리고 들으면서, 또 한참 졸다가 와야 되고, 헌금도 해야 되는데, 그래 저녁 예배를 드리자,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거니까, 하고 성경책을 넣고, 그다음에 이제 헌금 몇 푼 넣고 가방을 메고, 그리고 가볍게 등산화를 신고, 관악산으로 갔어요. 그리고 이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등산을 하는데, 정말 교회 안 가고 여기 오기를 너무 잘한 겁니다. 왜냐면 주일날 산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봄날에 좋다 그러고 깔깔대며 그러면서 이제 올라갔어요. 사람도 많은데 중턱쯤 올라간 다음에, 우리 그만 올라가자, 우리 배고프다, 여기서 도시락 까먹자, 그리고 평평한 데를 찾았어요. 그래서 앉아서 이제 서로 웃으면서 도시락을 꺼내 놓고 먹는데 얘들아 목마르다, 나 물 한 잔만 다오, 하고 했더니 캔맥주를 다 꺼내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아니 나 나는 이거 안 먹어, 나 교회 다니잖아, 물 줘, 그러니까 우리 물 없어, 이것밖에 없어, 맥주가 음료수지 이게 술이냐, 그리고 친구들 여덟 명이 먹었는데 다수결로 맥주는 음료수인 걸로 결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먹었는데 오랫동안 끊었는데 그 옛날 맛이 그대로 살아나면서 더워요. 오장육부가 그 술에 대해서 반응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좋아서 웃고 떠들면서 하나씩 하나씩 하다 보니까 여덟 통을 까먹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오후 늦게 저녁때가 되어서, 이제 우리 하산하자, 그리고 이제 내려오는 거예요. 친구들과 함께 술에 취해서 웃어 떠들면서, 나는 요새 너무 외롭다, 너희 좀 자주 좀 연락해라, 그러고 내려오는데, 돌계단이 막 가파른 돌계단이 쭉 내려오는 거예요. 갑자기 온몸이 공중으로 치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바나나 껍질을 밟았어요. 공중으로 몸이 푹 떴어요. 계단에 쾅 떨어졌는데 몇 바퀴를 굴렀는지 기억도 없는데 어렴풋이 눈을 뜨니까 그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서 차에 실려가는데 게슴츠레 눈을 뜨게 된 겁니다. 그러고는 조금 있으니까 의사들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작이 났네, 아작이 났어, 야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서졌을까 일부러 할래도 이렇게 안 될 텐데, 아니 이게 들리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자기가 벌 받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주의를 어겼더니 이런 끔찍한 사고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적으로 이제 깁스를 하고 간신히 살아나는데 너무 교회 가고 싶어서 그날 온 거예요.“
너무 감동 받지 마십시오. 제가 지어낸 얘기입니다. 저 뒤에는 어떤 사람이 안대를 이렇게 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근데 이 사람은 낚시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이면 명색이 집사인데 그냥 낚시를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말했어요. 당신 그렇게 주일을 빠지고 집사가 낚시 다니면 안 된다, 목사님한테 전화 오지 않냐 가지 마라, 그날도 고집을 쓰고 다른 사람은 사람 남는 어부가 되지만 나는 오늘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겠다 그러고 갔습니다.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낚시를 했는데 그런데 왠지 오후가 됐는데 기분이 찜찜한 겁니다. 친구가 낚시를 처음 와 가지고 미끼를 던진다고 던졌는데 그 낚싯바늘이 왼쪽 눈에 다 낀 겁니다. 오른쪽 눈이 이렇게 찢어져서 다친 겁니다. 그러면서 여기 붙이고 오면서 내가 주일을 안 지켰더니 이렇게 됐구나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교회를 와서 이제 늦게나마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중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주일을 안 지키면 모두 그렇게 굴러 떨어져서 다 뼈가 아작이 나느냐, 그리고 그다음에 주일날 낚시를 가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애꾸가 돼서 오느냐, 그건 아닙니다. 참 이상한 심방 전화도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따르릉 하다 받았습니다. “집사님”, “네", “집사님 맞죠?" 그러니까, “네, 맞아요.", “요새는 집사님 교회에 왜 안 나오세요?" 아니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어떻게 집사일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이상한 심방 전화가 어딨습니까.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은 왜 집사를 시킵니까. 얼른 빨리 잘라버려야 합니다. 집사님 교회 왜 안 나오세요, 권사님 요새 왜 교회 안 나오세요, 만약에 한 번 주일을 어겼다고 해서 모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가 아작이 나고 왼쪽 눈이 찢어지고 그다음에 주일날 교회 안 나오고 외식하던 사람들은 손가락이 부러지고 그다음에 주일날 교회 안 나고 컴퓨터 앞에 매달려서 일하던 사람들의 머리가 터진다면 무서워서 어떻게 교회에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건 하나님 경배하려고 모인 게 아니라 이 시간에 여기 없이 딴 데 있으면 큰일 난다는 공포의 도가니로 모인 게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당연히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것을 아껴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일을 안 지켜도 하나님이 모두 심판하셔서 죽여버리시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참아주시는 겁니다. 기다리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라고 깨닫고 이렇게 살면은 안 되는 거라는 거를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돌이키도록 그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끝까지 계속 그런 식으로 삽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벌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게 하나님이 만드시는 겁니다.
천하에 바꿀 수 없는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고 까불고 자기 잔재주 피우고 신앙을 떠나면 불행하게 된다는 것과 부족한 게 많아도 하나님 의지하고 살면 반드시 그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벌 받을까 봐 무서워서 십일조를 내고 벌 받을까 봐 무서워서 주일날 교회를 나오고 벌 받을까 봐 무서워서 구역장을 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지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 감사합니다. 이렇게 방황하고 밥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런 비참했던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 인생의 허무함에서 건져주시고 나에게 이렇게 복된 가정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구나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일이 스스로 기다려지는 날이 돼야 합니다.
주일이 스스로 너무 사랑스러운 날이 되어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아직도 하나님이 사용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떨리는 두려움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마음에 기쁨이 되기 위해서 사는 신앙, 그 신앙이 우리가 주일을 지키게 하고 교회를 섬기게 하고 슬프나 괴로우나 주님의 교회에서 섬기게 하는 그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험 모집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한 교회를 52년째 다니고 있답니다. 그래서 내가 칭찬해줬습니다. '참 대단하다, 한 교회를 52년을 다녔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변함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 시인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뭘 보여주냐 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우리 각자를 인도하시는 방법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인 분이신가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 학교에서 있었던 사람이고 34살에 교수가 되고 10년 남짓한 시간 빼놓고는 항상 교수로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교육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능한 교수, 지혜로운 교수는 모든 학생을 똑같이 다루지 않습니다. 학생을 다 살펴보면서 그 학생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제가 혈기 충천하던 때 34살에 교수가 됐습니다. 가서 보니까 학교가 개판입니다. 목사 되겠다고 신학과에 들어온 학생들이 담배 피우고 다니고 골목에서 패싸움하다가 경찰서에서 연락 오고 개판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대학 가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그냥 신학과가 만만하니까 좀 약하니까 그때도 8 대 1이었는데 들어오는 거였습니다. 젊은 교수로서 가보니까 얘네들이 공부를 가르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항상 제가 가면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저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그 당시에 학생 수가 많아서 몇백 명이었습니다. 제가 대충 생각할 때 한 학기에 500명 정도가 제 강의를 수강했습니다. 거의 5백 명을 누군지 알았습니다. 그러면 제 학생이 시험 레포트를 냈는데 지금 같으면 그냥 이렇게 채점해 줬을 텐데 조교하고 레포트를 복도에다가 다 펴놓고 백 개씩 놈을 찾아내는 겁니다. 이제 그거를 이렇게 찾아줘서 다 분류를 한 다음에 이만하게 써 붙이는 겁니다. 1번 하고 8번, 그다음에 10번과 16번, 20번과 88번은 손잡고 교수실로 올 것, 안 오면 낙제 처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 왜 둘이 레포트를 썼는데 왜 똑같으냐, 똑같은 걸 써서 얘는 샘물체로 뽑고 얘는 명조체로 뽑아서 낸 겁니다. 또 어떤 애는 여기서 반 따고 저기서 반 따가지고 합쳐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말해봐라 하면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한 사람씩 부르기도 합니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얘는 누군지 내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면 나는 화가 그 정도까지는 안 났는데 아무개가 들어오는구나, 그러면 내가 여기서 이제 레포트를 가지고 있다가 문을 딱 열고 들어오는 순간 소리를 질러서 기선을 제압해야 됩니다. 얘는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놈입니다. 레포트를 집어던지면서 ‘너 이게 네가 전도사 될 사람이냐’ 그러고 집어던지는 겁니다. 그리고 화를 벌컥 냅니다. 문을 닫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앉으라 소리도 안 합니다. 그리고 “야, 나 너하고 얘기하기 싫으니까 너희 어머니 권사님이시지 전화 걸어서 좀 바꿔라, 니가 어떻게 신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내가 오늘 좀 얘기를 좀 해야 되겠다. 전화 빨리 걸어라” 합니다. 전화 걸어주겠습니까? 못 겁니다. 그거 가지고 안 될 거 같으면 당회장 목사님하고 통화를 좀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도대체 네가 신학교 들어올 때 너를 추천서를 써줬는지 그 목사님하고 한 번 통화 좀 해보자 그럽니다. 빨리 전화를 할래, 아니면 네가 낙제를 맞을래 합니다. 전화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용서를 빕니다.
그다음에 한 학생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이제 너 그따위로 하려면 때려치우라고 그러면 얘는 마음이 약해서 내려가다가 자퇴합니다. 그럼 그러면 안 됩니다. 얘기 들으니까 바깥에서 이게 김 교수한테 엄청나게 혼났다고 나오고 그 당회장님하고 통화하겠다 그러고 엄마하고 통화하겠다 그래서 자기가 고생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거는 완전히 얼어서 들어오는 겁니다. “어서 와라, 여기 앉아라, 커피, 홍차, 녹차, 생수, 주스 다섯 가지가 있는데 뭐 먹을래요?", “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뭘 택해라.", “예, 생수 주십시오.", “그래 너는 냉수를 많이 먹고 속을 차려야 된다", 냉수를 하나 따라줍니다. 그리고 이제 혼날 각오가 돼 있는 겁니다. 얘기를 합니다. “그래, 넌 요새도 세차장 아르바이트 계속 하냐. 너희 아내는 아직도 인쇄소 다니고? 권사님은 새벽기도 아직도 나가시냐?", “네.", “널 위해서 매일 기도하시지?", “네.", “힘내라. 그렇게 살지 말고 내 이번은 봐줄 테니까 다시 레포트 써오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살아라.", “예.", “너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그렇게 힘쓰는 애들 많다, 용기를 내라" 그리고 두드려서 보냅니다. 얘는 그러면 감동을 받고 다시 학교를 다닙니다. 하나님이 그걸 다 보시면서 인도를 하는 겁니다.
제가 한 교회에서 전도사를 할 때 일이었는데 그게 거기에는 일류 대학교 학생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웬만하면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그중에 서울대 박사 과정에서 다니는 학생이 있는데 공부를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났는데 안 가고 저 뒤에서 어느 집사님하고 계속 이야기를 심각하게 했습니다. “뭐야, 도대체?" 그랬더니 자기 아들 공부 하나도 안 한다고 저한테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공부 못한다고 하소연을 했더니, “어? 전도사님, 왜 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아니 어떻게 하면 공부를 못 할 수가 있죠?", 그래서 나는 공부 못하는 게 참 이해가 잘 가는데. “이해가 안되네" 그럽니다. 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한 번도 학원을 안 다니고 고3 때도 8시간씩 안 자면 공부를 못하는 애였답니다. 그렇게 했는데 서울대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들어가고 박사 과정 들어갔는데 태어나서 친 모든 시험 중에 운전면허를 포함해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게 이해가 안 되냐’ 그러니까 자기는 이해가 안 된다고, 아니 선생님이 다 가르쳐주시고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면 또 선생님 한테 물어보면 정답을 가르쳐 주시는데 어떻게 특별히 노력하지 않는 한 공부를 못할 수 있느냐에 이해가 안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 속으로 ‘잘났다’ 그러고 있는데, 한두 달쯤 됐는데 굉장히 우울한 얼굴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아, 인생 살 맛이 안 나요." 공부만 하니까 너무 몸이 축나서 그때 테니스 붐이 일어서 테니스를 하러 갔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 동안 코치가 테니스를 가르쳐주는데 너무 못하니까 나중에 막 신경질을 내면서 오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못하냐고 내가 여기서 테니스장에서 7년을 했는데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답니다. 여기 책에 다 나와 있고 내가 다 가르쳐주는데 왜 못하냐고, 그런데 생각에는 꼭 될 것 같아서 했는데 공이 안 맞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다른 능력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두 이해합니다. 여러분들 자녀들에게 공부 못 한다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걔네들은 여러분들이 공부 못한 얘기를 외할머니한테 다 들었습니다. '엄마는 한 공부 했어' 그랬더니, 엄마도 공부 안 했다고 외할머니가 그러던데, 맨날 학교 안 다닌다고 공장 간다고 그러던 얘기 다 들었는데 왜 엄마도 못 한 거를 나한테 이렇게 강요하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굳이 아이들에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냐 하면 아이들을 그냥 자율적으로 자라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없습니다. 공부가 꼭 산수 잘하고 영어 잘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걔네들은 그걸 못하는 대신 다른 데 기가 막힌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유재석씨가 학교에서 꼴등이었던 거 아십니까. 그런데 저렇게 방송계에서 1위를 달립니다. 그 아이에게 맞는 게 뭔지를 찾아야지, 원래 생겨 먹기를 공부 못하게 생겨난 아이를 공부하겠다고 그러고 피아노의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조성진처럼 만들겠다고 그렇게 윽박지르니까 관계가 깨지고 애들이 불행해지는 겁니다. 걔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로 태어났는가 하는 거를 찾아내는 게 부모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재능에 맞는 거를 밀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게 부모가 하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결을 따라서 그가 가장 딱 맞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대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시인이었고 정치가였고 그리고 왕이었고 장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편 중에 거의 절반가량을 쓴 위대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사실 개인적으로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에 시달렸고 아들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기름 부으러 왔을 때 결국은 모두 형들을 들이대고 다윗은 생각도 안 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을 사랑했는데 형들은 미워했고 아내와 결혼했는데 그 아내는 자기의 신앙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러다가 외로운 나머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은 끔찍하게도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치열하게 가시밭길을 지나는 것 같은 그리고 피눈물 나는 고통의 세월을 지내면서 그렇게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연단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어땠습니까. 자식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1도 안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죽이기를 밥 먹듯 하고 심지어는 딸을 강간했는데 그 강간범이 또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만 일어나도 우리는 자살을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울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다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게 시련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 인격적인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시인은 '내가 그렇게 상처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 상처보다 위대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고 그 사랑에 잡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의 여정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고 고통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상처를 받아도 더 위대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위대하게 만난 모든 사람은 결국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죄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더 깊이 깨닫는 위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벤자민 브레킨릿지 워필드라고 하는 20세기에 3대 칼빈주의자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짓고 나서 깊은 고통에 시달리면서 통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는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그러한 범죄가 없었더라면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몰랐을 것입니다. 죄가 위대한 하나님을 저절로 만나게 해준 게 아니라 죄를 짓고 그 괴로움 속에서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있었던 그 불우했던 과거조차도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도구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절의 상처와 고통, 괴로움의 탓만 하고 있지 마십시오. 그 상처와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하십시오.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자이시고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받는 한 사람의 소중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십시오.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일생에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괴로운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고통스러운 일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면서 우리 모든 것을 인하여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이 집회 기간 동안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이 새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