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
녹취자:이병두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분이 얼마나 책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흥과 개혁사 도움으로 조나단 에드워즈 책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고 소개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그 이전에도 부흥에 관한 책들이 한 두 권 나왔고, 제가 자그마한 소책자 같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쓴 책자들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사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소개가 됐습니다. 그분이 이분에 대해서 극찬의 발언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알프스 산맥이라면 칼뱅과 루터는 히말라야이고, 만약에 그들이 히말라야라면 본인은 정말 유감스럽지만 조나단 에드워즈를 에베레스트에 비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든 책을 다 읽고, 그것에 대해서 깊이 동의했느냐에 대해서는 저는 좀 의문입니다. 실제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세우신 LTS에 가서 그 쪽 교수들 하고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 자기들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어째든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가 만난 정말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제는 여러분에게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강의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을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었습니다. 저의 목회와 생애에 커다란 신학적인 영향을 끼친 네 사람의 스승이 있습니다. 칼뱅, 아우구스티누스, 존 오웬,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제가 6년 전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저의 신학에 있어서 다섯 가지 중요한 원천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현재 우리들이 두 종류의 저서를 접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영국의 베난 오브 트로스에서 나온 두 권으로 깨알 같은 글씨로 된 ‘옥성 조나단 에드워즈’란 책을 여러분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마존에 들어가면 두 권에 대략 돈 십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정도로 저렴한 값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고서방에서 책을 얻었다고 하는 책이 그것 이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베난 오드 트로스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 책을 보고,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너무나 차이가 나서 자기가 조나단 에드워즈 앞에서 아주 티끌 같이 초라한 존재가 되는 것을 느꼈다는 그런 책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웍스입니다. 그 책은 빠진 자료들이 많은데 1951쪽입니다.
그러면, 미국 예일대학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프로젝트를 짜서,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을 메뉴 스크랩트하고, 다시 트랜스 스크랩트 해서 책으로 만드는 작업들을 했습니다. 현재 26권이 나왔습니다. 일단 작업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이 70권정도 되는데, 그것들은 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허접하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줄도 막 그어져 있는 그런 자료들입니다. 지금도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웹사이트 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6권을 모두 구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는 정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좋아했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6개월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다 해체를 해서, 일렉트로닉 파일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안줍니다. 지금 제 방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검색을 하면 보통 파일로 단어가 다 검색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인용해서 논문을 쓸 수 있게 만들 정도로 애착을 가졌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 전집에 대한 부분적으로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이 레슨이라는 교수가 쓴 부분인데 꽤 두껍습니다. 그 모든 책을 다 샀습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1930년대 이후에 쓰여진 박사 논문 130편 정도를 유앤아이에서 주문해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박사를 받고 온 사람들은 제가 거의 개인적으로 모두 만났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토론을 했습니다. 제가 26권이나 책들을 전부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서너 권정도 못 읽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읽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이제 거의 다 읽었고, 어떤 책들은 서너 번까지 읽었고, 어떤 책들은 다섯 번까지도 읽었습니다.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가르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왜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일까? 사실 커다란 붐이 일어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이 세계적입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루마니아 같은데도 이미 조나단 에드워즈의 학회가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학회가 있고, 굉장히 관심이 큽니다. 미국 태생의 학자로서 300년이 지나갔는데, 새삼스럽게 관심을 끄는 학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심을 끌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가지고 있었던 놀라운 하나의 접신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인물이 활동했던 18세기는 이미 유럽에서는 계몽주의가 승리하고 있던 때였고, 그 계몽주의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미국을 덮치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알다시피 그 당시에도 신실하게 유신론을 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은 이미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확고한 개혁신학에 입각한 신학으로서의 유신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데카르트, 칸트 이후로 사유가 물론 중세부터 내려오지만, 르네상스가 있었고 13세기 중세 교회사 말기에 사실은 기독교 철학 안에 대대적인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가 이미 태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수님이 전공이시지만 이쪽 르네상스 부분도 공부하면, 아주 굉장히 재미있는 사실들을 굉장히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교회사를 잠깐 이야기 했는데, 우리의 지금 문제는 우리가 현재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이야기 할 때, 역사를 너무 고려하지 않고 아주 간단하게 직선적으로 자기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체계를 구성하는데 사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독단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역사적인 것에 대한 생각, 특별한 시대와 시대를 연결되는 그 고리에 대한 이해, 예를 들자면 초대교회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고리,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고리, 이때마다 사실은 폭발적인 사상의 변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계속 되어오던 종교개혁이 계몽주의와 만나는 고리,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탈근대주의와 만나는 고리, 이러한 것들에 대한 집중적인 제대로 된 이해가 있어야지만 신학이 어떤 지속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내려오고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잘못 내려왔는지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사실 계몽주의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계몽주의 물결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중세까지의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핵폭탄적인 영향을 끼친 사고의 대변혁이었습니다. 그 사고의 대변혁이라는 것이 이전까지는 모든 신학이 존재론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덧없는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고 장소적인 것이니까 하나님,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모든 삶의 중심이었던 것을 데카르트가 처음 한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에 와서 무르익은 이 사상들을 종합정리해서 ‘이제는 존재가 중심이 아니라 인식하는 내가 중심이다.’라고 하는 인본주의의 기초를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데카르트가 만들었다기 보다는 이미 인류 이래로 늘 있는 사상들이었는데 폭발하듯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 13세기에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이 무너지면서 사상의 대변혁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르네상스의 태동이 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란 그 자체가 ‘다시 회복한다. 돌아간다.’입니다. 다시 돌아가는 목적지가 그리스 시대 때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존중을 받던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라스티치 넨토라고 해서 다시 그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재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놓고 보면 결국 그 중심은 중세의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정반대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이것도 설명하면 굉장히 깁니다. 그리스 유적지에 가서 그리스 시대 때에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헬라문명을 이끌어 갔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들은 저쪽에 있는 문명사적으로는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런 어떤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이런 자연주의 사고방식 대신에 인간중심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저쪽은 산업자체가 어업적인 것이고, 농사를 짓고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에서 오고가면서 거기에서 무역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관심의 중심이 사람을 만나서 물건을 사고팔아야 되니까 사람이 사고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서 인간의 존엄, 가치, 이런 것들에 대한 사상이 뿌리를 내리면서 인류 문화사에 기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동의할 수 있는 훌륭한 면들이 있지만, 사실 중세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관점 자체가 신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들이 일어나고 그것들이 인본주의로 내려오면서 하나는 세속적 인본주의로 가고, 하나는 기독교적 인본주의 돌아가면서 성경이 인간을 존엄하게 생각하라고 했는데, 교회에 의에서 짓밟히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이 무엇이냐? 그것을 찾은 사람들이 기독교 인본주의자들이고 예외 없이 이 기독교 인본주의자들은 종교 개혁자였던 것입니다. 즉, 종교개혁자들은 예외 없이 기독교 인본주의자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르네상스가 함께 남겨주었습니다. 그 남겨주었던 것들이 종교개혁 이후로 내려오면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1725년을 기점으로 종교개혁의 전통을 잇던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합리주의에 모든 손을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몽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조적으로 낭만주의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때였습니다. 그러면 낭만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계몽주의 초창기에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인간관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이성대로 움직이는 존재냐? 그것이 아니고 훨씬 더 복잡한 존재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인간이 무엇을 느끼느냐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일종의 낭만주의(romanticism)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 운동으로 느낌, 감각, 아름다움 이런 것들에 대한 강조점이 커지자 이성, 논리, 체계 이런 것들 보다 이쪽이 훨씬 더 강조점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계몽주의와 함께 낭만주의도 결국 인식하는 인간 그 자체를 중심으로 놓자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보면, 계몽주의의 맥을 잇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쓰나미처럼 미국 사회를 덮쳤던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모든 면에서 유럽하고는 상대가 안 되는 수준의 나라였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유럽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우리 옛날 사람들이 미제는 똥도 좋다고 받아들였듯이 그냥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하니까 그것은 굉장히 앞선 것이고, 좋은 것이다 여기면서 막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실 1774년에 미국이 세워지지만 세운 사람들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열렬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하고는 다른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한번 연구해 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이미 나라가 태동 될 때부터 인본주의적인 기초를 가진 각색된 기독교 신앙 위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한번 보십시오. 이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완전히 찌그러졌습니다. 이쪽에서도 벌써 이 사람들이 건너온 뒤(1620년에 건너왔는데) 앤드류 보나르 같은 사람들이 편집한 역사 기록에 보면, 이미 이 사람들이 이쪽으로 넘어오고, 70년 정도 지났을 때 청교도들의 정신들은 벌써 다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70년이라고 해봐야 1690년대쯤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한참 활동 할 때는 1700년대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그 당시 사회가 급속하게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기울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계몽주의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확하게 개혁신학을 가르치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가르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점점 현재 밀려오고 있는 계몽주의와 접촉점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무조건 멀리하거나, 아니면 열심히 받아들이거나 이렇게 되면서 사실 이것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지를 미국사회 전체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그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당대에 거의 모든 학문들을 치열하게 섭렵을 했던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버지는 티모시 에드워즈라는 사람인데 상당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사우스닌자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는데 동네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인구가 460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였는데 거기에서 아버지가 굉장히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다. 한 교회에서 64년을 목회했습니다. 25살부터 목회를 해서 89세까지 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지독한 엄격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엄청나게 닦달을 합니다. 세살부터 자기가 생각한 것을 글로 쓰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교도 책들과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랐고, 6살 때에 생애 첫 번째 논문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8살 때 유물론에 관한 논문을 쓰고, 13살 때 되던 해에 예일대학에 입학을 합니다. 그때 이미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이런 것들을 열심히 공부해 가지고 들어갑니다. 4년 후에 수석으로 졸업을 합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 대학교 교수가 되는데 19살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면서 16살 때에 자연과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유럽의 유명한 저널에 발표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당대에 휩쓸고 있었던 철학들을 섭렵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경험주의 철학이 밀려오는데 그런 철학들을 섭렵하면서, 계몽주의를 피하거나 빗겨가지 않고 계몽주의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 계몽주의를 다 이해하고, 그 계몽주의자들이 내리는 해석과 다른 해석을 신학적으로 제시하면서 ‘기독교가 참 진리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는 것을 변증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혁신학자였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6세기 의미에서의 개혁신학자가 아니라, 21세기 의미에서의 개혁 신학자가 아니라, 18세기에 충실했던 개혁신학자였다고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실 은혜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어쨌든지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계몽주의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의 정신세계를 뒤흔들어 놓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뉴턴이라는 사람이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책을 씁니다.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책인데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프린키피아라는 책은 자연에 일어나는 모든 과학적인 현상들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설명될 수 있다고 보고, 미분과 적분도 발명을 해서 미적분에 대한 것들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예전에는 자연의 모든 세계가 신비했었는데, 그 신비가 모두 과학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꽝하고 번개가 들이치면 하나님이 진노하셨나보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음전기와 양전기가 만나서 그렇게 빛이 있는 것이고, 우뢰가 떨어지는 것이다. 라는 설명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모든 세계의 신비는 이성이 아직 무지하기 때문이지, 이성이 발달하고 설명할 수 있으면 이 세계는 모두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설명이 되는구나! 이렇게 되니까 가장 위협을 받는 경우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재해석하거나 귀착하려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성의 추론에 의해서 인식 가능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이성주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뉴턴은 과학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찰스 다윈의 진화론도 뉴턴주의를 생물학에 적용을 한 것입니다. 에르고섬 같은 사람은 그것을 사회에 적용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커다란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그들의 사상을 철저히 공부하고, 그것을 가지고 그것이 아니라고 하고 논박을 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 중에서 'Philosophy of sci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연과학의 대한 과학철학’이라고 있는데 상당히 두껍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뉴턴 물리학에 대한 해석입니다. 지금은 과학이 훨씬 발달된 시대지 않습니까? 지금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많고, 잘못 해석한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분명한 것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떻게 하든지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뉴턴주의의 증거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바로 거기 살아계시다고 하는 그것을 입증하는 재해석하는 일들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중 하나를 예를 들자면, 힘(power)이 무엇이냐? 이 힘이란 사물의 전권과 후권 사이의 관계(relation)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철학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에 A라는 사물이 있는데, A1입니다. A1이 A2로 변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당연히 T1, T2가 될 것입니다. T1에서 A1의 상태였던 사물이 T2에서 A2로 변한다면, 이것을 변하게 하기 위해서는 힘(power)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무엇이냐? 어떤 사물이 있는데 이 사물이 여기는 후권이고, 이쪽으로 넘어가면 A0가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이 전권이고 이것은 후권입니다. 이 전권과 후권 사이의 관계가 바로 힘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뉴턴은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느냐하면, 어떤 사물 A가 A0에서 A1으로 변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것은 여기에 자연적인 법칙이 적용했기 때문에 A0에서 A1의 상태로 변하게 됐다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변하게 하는데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사실 제가 김영길 박사님하고 이 힘 문제를 가지고 한참 토론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이 과학자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기에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panentheist다라고 합니다. 어디에나 하나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범신론자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것에 대해 대표적으로 책을 쓴 사람이 토마스 쿠커라고 하는 학자는 panentheism입니다. 그 사람이 'The other of the philosopher'를 썼습니다. 철학자들의 다른 하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panentheist로 올렸는데,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렇지 않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책 8권 뒷부분 부록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레퍼런스가 있습니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자기에게 질문했던 사람에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답을 쓴 것입니다. 모든 의문이 다 풀립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실은 개혁 신학에 밝은 사람이었고,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작품에 친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독서량은 감을 잡기 힘들 정도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만을 공부할 때는 이 사람이 굉장히 천재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 학자들이 글 쓴 논문을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처음 발견한 것이고, 독창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중세를 공부하고, 아우구스티누스, 개혁파 정통주의에 들어가서 공부해 보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 기독교 세기에 걸쳐서 탁월한 작품들을 수없이 읽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런 식으로 학문을 했으면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80년 어간에 쓴 책이 아니면 인용을 안 해도 됐습니다. 그 옛날 사람들이나 근세 철학자들 같은 사람들의 글에서 힌트를 얻은 것들을 막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본질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의 본질을 혼동할 정도로 그렇게 부주의한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8권에 보면 윤리적 접근, 이것을 보면 현재 부분적으로는 번역이 되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 '참된 기도의 본질' 그런 식으로 쪼가리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8권의 또 다른 내용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 전서 13장 강해에 실려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 전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오해 받을 만한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를 설명하면서 '에마네이존' 이것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말츨이라는 단어입니다. 레마레이션은 귀환, 혹은 회귀란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부터 물질이 나왔고, 이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회귀한다. 이렇게 플라톤주의자들의 용어를 여러 번 사용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단어를 사용하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필을 못했을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예일대학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에 가서 미터마 소장하고 서너 시간 같이 있으면서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사람 설명은 이렇습니다. 에마레이션과 레마레이션의 유래는 플라톤 철학이 아니라 까발리즘이라고 합니다. 까발리즘은 스페인 계통으로 들어간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말합니다. 12세기경으로 알고 있습니다. 까발리즘의 해석을 받아들이면서 사용한 용어이지 플라톤주의에서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고 설명을 합니다. 무슨 책에 나오느냐고 까지는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사람들이 계몽주의가 들어오면서 느끼기 시작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혼란이 아닙니까? 전 세계에서 많은 학생들이 오는데 그래도 새벽기도에 모이는 학생은 한국학생입니다. 그런데 모인 인터내셔널 학생 중에서 가장 부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나오고 은혜 많이 받은 학생들이 가장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반성들을 체계적으로 해보자 것이 이 책의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 아니라 2주 동안에 확 써내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똑같은 고민이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같은 경우는 열심도 있고, 기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는데 윤리적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똑같은 시대에 똑같이 그런 고민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데,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런 방면이 왜 이렇게 치열하게 하게 되느냐 하면, 이미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인간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간은 죄인이고 아무 희망이 없다. 그래서 은총을 입어야지만, 겨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사상이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종교계의 비리가 장난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 캐톨릭에서 막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사실 지금 개신교만 이렇게 나쁜 것처럼 매도를 당하는데, 사실은 종교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캐톨릭이나 불교 같은데서는 이런 것들을 잘 관리합니다. 전담 창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신교는 독립정신이 강해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관이 바뀝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들이 아주 분명하다면 그것은 진리와 일치할 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서 신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진리를 팔아서 자기행동을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가능성이 없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조금 전에 내린 인간이 진리를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복권시키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다. 인간이 이런 도덕을 찾아갈 수 있다고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Synteresis'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Synteresis'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입니다. 보편적인 가치는 인간이 생내적으로 가지고 있고, 이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과 함께 선을 행하면 상이 있을 것이고, 악을 행하면 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상필벌입니다. 이런 원칙에 대한 모든 감각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을 가지고 인간이 충분히 보편가치에 일치하는 세계를 찾아감으로서 행복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가정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낙관 속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낙관을 배반합니다. 그러면서 계몽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들어온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탈근대주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탈근대주의는 계시가 위에 있고, 인간의 이성이 있었는데, 계시를 두드려 엎고 인간이 보좌에 등극했는데, 이것을 믿고 살아보니까 세상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 너도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끌어내리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성이 이성을 신뢰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판단을 한 것도 이성입니다.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
거기에서 '크레타 패러독스'가 나옵니다.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예로부터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크레타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 때 그 명제는 틀려도 말이 안 되고, 맞아도 말이 안 됩니다.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말한 사람은 크레타 사람입니다. 그런데 '크레타 사람은 도둑놈이다.' 하면 맞습니다. 맞는다면 이 사람은 올바른 말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하면 그것이 틀렸습니다. 그러면 명제 자체가 성립을 안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도 틀리고 저렇게 해도 틀리게 됩니다. 여기서 '크레타 패러독스'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근대주의가 몰락하게 됩니다. ‘인간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존재다. 이 세계에 어떤 보편가치들을 세울 수 있는 존재다.’라는 사상들이 아주 팽배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덕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너도 나도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코스모폴리터니즘에 입각해서,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다. 에둡도 나오고 이웃사랑도 나오고 별것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들을 받아들여 그렇게 살아가면, 그것이 진짜 사람다운 삶을 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회가 되겠느냐? 라는 고민을 하면서, 이에 대한 대답으로 세편의 중요한 논문을 씁니다.
그것이 'Original Sin'이라는 작품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도 한글로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18세기 영어를 따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문법이나 스펠링도 틀립니다. 이것은 존 테일러라는 사람하고 논쟁을 하는데, 이 사람은 사실은 세미펠라지우스 내지는 극단적이 알미니우스주의자로서 인간을 타락한 존재라고 보는 그 자체에 대해서 인정을 안 합니다. 그러면서 논쟁을 하면서 'Original Sin'이라고 하는 작품을 씁니다. 이것 가지고 안 될 것 같으니까 두 번째 작품을 쓰는데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고 하는 작품을 쓰고, 세 번째로 쓴 것이 'The Nature of true virtue'라는 작품을 씁니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특히 이 두 작품이 자매 격인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창조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이 지혜는 지성과 관련이 되고, 사랑은 의지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할일 없는 분이 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 주위에 보면, 수많은 인간이 만든 것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인간이 다 가공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가공을 했겠습니까? 지금 이 나무는 왜 이렇게 됐습니까? 도대체 이렇게 생긴 것은 왜 만들었습니까? 모든 것은 만들 때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쓸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하나 다 다른 목적이 있는데, 이것들은 이런 식으로 조합을 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예배를 드리고, 강의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술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면, 여기에 조명을 환하게 하면 장사가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을 하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architecture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르케와 테크네입니다. 테크네에서 테크닉이라는 단어가 옵니다. 아르케는 원래, 주된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테크네가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돌을 붙일 줄 아는 테크네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이 사람은 돌만 붙이고 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여기다 붙이는지 잘 모릅니다. 칠 테크네가 와서 여기에 칠만 하고 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은 architecture입니다. 이것은 건축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테크네는 다른 테크네를 넘어서는 아주 수준 높은 테크네라고 보는 것입니다. 나라에서는 이것을 '제왕학'이라고 부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이 모든 것을 아울러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야 되겠다. 국민의 가장 큰 불행은 머리 나쁜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는 것 입니다. 국민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사태가 생각이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물 하나하나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목적을 서로가 목적연관을 이루면서 모두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에 이바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이바지 하는 최종적인 목적을 가리켜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 사물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 스스로를 결정 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거기 있으니까 있는 것이고, 동물은 그냥 살아 있으니까 뛰어다니면서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인간과 천사들입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도덕적 피조물이라고 이야기 하고, 혹은 이성적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이성적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지성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지성적 피조물(rational creature)입니다. 지성적 피조물은 인간, 천사,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피조물들은 도덕적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인간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 ‘Synteresis’를 따라 공존 가치를 인식하고, 무엇인가 선한 것을 추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완전히 일치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규범이 있으면 거기에 가까이 있느냐, 멀리 있느냐 하는 차이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식으로 인간이 찾아갈 수 있다는 자체를 부인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이 없는 이교도들의 탁월함, 신앙 자체, 종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우월성 이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그래서 이런 것들은 ‘Synteresis’이론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조나단 에드워즈 입장에서는 모두 성령의 작품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은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특별계시에 의해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의해서 재해석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대에 유행하던 도덕, 철학들을 다 섭렵하면서 그 이론을 가지고 역으로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미덕, virtue라고 합니다. 여기에 덕이라는 것을 키케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물을 사용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은 기술이다. 자기를 이용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자는 아니지만은 이것은 어떤 행동에 대한 도적적 평가입니다. 사실 이 도덕적인 평가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애매모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도덕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Synteresis’로 설명하지만, 사실 이것은 기준이 애매하고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트스모더니즘에 와서는 저런 것을 다 부인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설명을 합니다. 결국은 이런 virtue, 인간이 정말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이 기준은 이렇게 희미한 것 가지고는 기준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 안에서 인간 각자는 왜 자기가 여기에 존재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판단되어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저의 판단입니다.
사실 저의 판단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아주 깊이 참착을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한다고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평생 책을 읽었는데, 아무 책을 읽으면서도 이 저자는 천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제 느낌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의 책을 읽을 때, '야! 이 사람은 천재다'라고 무릎을 꿇었는데, 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사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자기 사상의 큰 틀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빚졌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충실했던 학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존 칼뱅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칼뱅은 심지어 무엇이라고 했느냐하면, '의지를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면서 나는 이점에 있어서 그 위대한 분을 이해하기에 너무 택이 없다.' 그렇게 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확고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 사상가이고 그 분은 바다입니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써 놓은 책과 사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심지어는 서구의 철학도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러한 인물인데 무엇이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 기준은 이것이다. 그러면 이 기준을 따라서 살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이 무엇이냐? love,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도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와 사상적으로 일치를 보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떤 인간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데 참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secondary beauty, 이차적 선 혹은 이차적 미라고 부르고, 이것을 일차적 선, 일차적 미라고 부르면서 구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만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없고, 완전한 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전적인 타락한 부패성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필요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전체는 이성주의적이면서도 이성주의를 도구로 해서 당시에 있었던 모든 계몽주의의 사상들을 극복하는 커다란 도구로 삼아서 이것들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누가 에드워즈를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원전의 세계로 들어가십시오. 남이 한 이야기 매일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들어가서 원천을 봐야 됩니다. 그것이 저의 공부 방법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굉장히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받은 은혜를 제가 여기서 일주일 간증 집회를 해도 다 못할 정도입니다. 분명히 그 안에는 신학과 철학, 미학, 심리학, 천문학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학문들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사용된 흔적들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참 조나단 에드워즈에 심취했을 때 '도덕적 통치'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투덜거리기도 하고, 누구보고 읽으라고 이런 책을 썼느냐?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떤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분인데 너무 은혜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박사들도 너무 어렵다는 사람도 나오고, ‘드디어 김 목사가 변질했다.’이런 사람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굉장한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깊이 매료 되었던 것이 우주적인 신앙입니다.
(찬송)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어여쁜 화초밭 비오다 개이면 하늘의 뻗친 무지개 참 아름다워요
이 노래 누가 작사했는지 아십니까?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다 하면 정말 재미있습니다. 우주적인 것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보아서 알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knowing GOD' 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본질을 안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The ways of doing at builts.’ 이것은 속성의 시행 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속성이라는 것은 무한하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유한하고 한정된 사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여기에서 어떤 효과(effect)를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이 효과를 드러내실 때, 나타나는 어떤 효과를 보면서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아주 못되고 불의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판 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을 보면서 이 사람이 깨닫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정의(justis)로우신 하나님이시구나!' 그래서 결국 악인이 하나님 없이 번영하는 것 같고 하나님을 모욕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시 우리의 착각이고, 결국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아주 쓸모없고 비천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짓을 볼 때에 이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람을 아주 사랑하고 후하게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죄지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잘라버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시지 않고 이 사람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인간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갖고 싶으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에 의하면 사랑이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에게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로만 회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모르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사적인 사랑과 교통적 사랑이 있습니다. 사적인 사랑은 단절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적인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 울타리 안에 들지 않은 사람과 단절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교통적 사랑은 끊임없이 교통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모든 피조물을 돌아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해서 이 전체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류 사회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창조하지 않습니까? 하와를 데리고 오시니까 아담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했는데, 히브리어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뼈, 살 바싸르 앳찬 이라고 하는데, 중에 라고 한말은 the best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 본문을 결혼식에서 주례할 때 많이 쓰지 않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둘이 한 몸이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남녀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했던 세상이 모든 인류가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여기는 이런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다 박살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죄가 모두 제거되는 완성의 때에 다시 이 고백을 따르는 인류사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맛보게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분열의 정신이 충만해서 정말 패역무도하게 죄를 짓고 있습니다. 교회끼리 욕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회론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에드워즈의 교회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여기서 밤을 새워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런 교회론은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서로 물어뜯고 험하게 싸우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정말 아름다운 교회론을 안 배웠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쁜 교회론을 공부하면서 ‘아! 이것이 교회구나’ 하는 사실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짐승같이 그렇게 살지 않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그런 교회론에 대한 전망을 우주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복원이 되는데 복원이 되는 도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선택된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는 이 비참과 회복되는 놀라운 기쁨들을 동시에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죄와 은혜의 컴플리트입니다. 교회가 완전성의 측면과 불완전성의 측면을 지상적인 측면과 천상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면서 이 교회가 마지막 시대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평생 추구했던 이상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그리스도 교회의 영적인 번영입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종말에 대한 이상이 아주 굉장히 강합니다. 특히 천국에 대한 비전이 굉장히 강합니다. 천국으로 부터 오는 강력한 비전의 빛을 받으면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소망,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점승하는 영광의 교리라고 하는 이 이론은 조나단 에드워즈이 신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학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으니까 이 안에는 분명히 어떤 질서들이 있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질서들을 찾아가는 것을 학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제대로 된 신앙의 터전에서 공부하면 학문이 높기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것 같은 비이성적인 짓은 안합니다. 오히려 이 학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들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 같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가는 것이 학문의 가치이고, 그 모든 학문들은 결국 하나의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식의 원천이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포괄적이고 우주적인 신학을 가지고 이런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공부하면서 목회적으로 받았던 유익은 설명할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 몇 가지가 있다면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가 이 세상에 만들어진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내가 개인적으로 열심히 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도들 각자가 받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 부어진 사랑이 교회가 그리스도와 맺은 신부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이 부부의 일체를 통해서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부어진 사랑이 교회의 지체된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라고 보면서 모든 것들을 공동체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신학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면 그 교회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런 사상들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정말 몰랐구나 라고 하는 자각들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에 나온 어떤 계명들을 이렇게 지켜라 저렇게 지키라고 목구멍으로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에 그 명령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전체적인 목적과 어떤 연관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거대한 그림들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실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교부들이 이로나이우스, 테르툴니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로 부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빛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 롬바리두스,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로 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끌레드레 베르나르 이런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기 어렵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사실입니다. 그리고 번역을 부흥과 개혁사에서 열심히 잘했는데 또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어가 안 되도 할 수 없습니다. 읽어야 되겠지만, 제가 가능하면 18세기 영어를 좀 공부해서 읽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책들이 실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웬만한 신학자들은 실제 신학만 공부하는 것입니다. 철학까지 공부한 사람들은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 철학, 과학, 미학, 심리학 이런 것을 아주 깊게 공부하면서 무엇인가 이 사람은 저 천상의 세계 속에서 교향악처럼 울려 퍼지는 지식의 심포니를 본 사람입니다. 이런 천재들의 글의 특징은 다집행적입니다.
여기 죽음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이쪽에 의학적인 관점에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게 아니라 의학 문학이 아니라 미술의 관점에서 죽음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이야기 하면서 마지막으로 성경이 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아주 풍부하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보았을 때, 이 사실과 연관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실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그런 것을 해석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광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특히 에드워즈 제1권이 'Freedom of the Will'이라는 책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밤새도록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책을 읽다가 마지막에 미친놈이 쓴 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어려운 책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 자신도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렵게 썼지.’ 두 번을 읽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정리가 안 됩니다. 굉장히 난해한 책입니다. 첫 권이 256권밖에 안 팔렸습니다.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많은 논란들이 있고, 극좌에서 극우까지 수많은 해석들이 나옵니다. 저도 아직 판단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조지 마스턴 같은 학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속 시원한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제가 2시간 동안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그 때 같이 갔던 목사 한 사람이 “목사님! 그렇게 깊이 찌르시면, 그 교수님 마음 상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도 “만났으면 본전을 뽑아야지!” 그랬습니다. 그런데 속 시원한 답을 못 들었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해야 됩니다. 이 사람은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며 윤리학자이며 문학가이며 교육학자이며 설교자이며 독립 운동가이며 우리들이 갖지 못한 다양한 국면들을 가지고 당대의 계몽주의와 싸우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의 개혁신학의 참된 하나님에 관한 증거와 사상들을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드러내고 구현하려고 했던 그런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주 풍부한 접신성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이렇게 다양하고 변화된 사회 속에서도 그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인가 이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선교의 방향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가 그의 철학과 사상 쪽에 많이 뚫려 있었습니다. 요즘은 소위 이야기 하는 ‘뉴 브런치 오브 무브먼트’라고 예일대학이나 트리니티쪽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물결들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물결의 중심이 이번에 시카고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유능하게 가르치고 있는 더글러스 스위밍 교수라고 소장파 학자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지난번에는 네다섯 시간 대화를 했고, 이번에는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너무 이 사람이 위대하고 사상적으로 깊으니까 철학자, 위대한 신학자로만 우리들이 너무 그 인간에 압도당해서 그의 신학을 해석을 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 사람은 그 위대한 사상과 철학자이기 이전에 매일 목회지에서 설교하러 올라가야 했던 한 지역교회의 목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그의 최고의 관심사는 독창적인 철학사상이나 이런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올바르게 설교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었다.’그런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경해석자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단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에 더글라스 스위밍 교수의 책이 나왔는데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씀 사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무브먼트에 대한 분위기들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쉽고 은혜도 됩니다. 저자가 추천 해달고 해서 추천서를 써줬는데, 읽어보시면 아주 쉽고 평이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책 번역 요청 들어오기 전에 원서로 읽었는데 아주 잘 썼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최근 예일 대학에서 책을 한권 내놨다고 들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대한 책을 내놓았는데 제가 4월에 갔을 때는 곧 나온다고 했는데 그것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경해석에 대해 연구한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물론 이 26권을 다 읽으리라고는 저는 생각을 안 합니다. 전문적인 학자들도 읽지 쉽지 않은 책들이고, 300년 전 영어라는 벽도 있고, 많은 어려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한권이 대략 700페이지 정도 됩니다. 26권이니까 18,000페이지 정도 됩니다. 하루에 10페이지씩 읽어도 1820일이 걸립니다. 600일은 못 읽고 300일만 읽어도 6년 걸립니다. 하루에 10페이지만 읽어도 10페이지의 분량은 적은 분량이 아닙니다. 20페이지 정도 읽으려면 모든 것을 전폐하고 워낙 뛰어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읽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3년이 걸리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가 만난 수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그의 저작 전체를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매우 탁월한 신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글로 썼으니까 집에 가서 읽어보면 주욱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이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He so beautiful. 너무 아름다운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읽어라'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고 싶으면, 우선 제 생각에는 이 강의안을 읽고 서점에 가면 '도덕적 통치'라는 책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왔는데 조금 여러분에게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낱말 같은 것 나오면 사전 찾아가면서 읽으십시오. 양낙홍 교수가 친절하게 추천서를 잘 썼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제3장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장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면 그 장만이라도 이해될 때까지 찬찬히 읽고, 그 다음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온 설교집 부터 먼저 읽으십시오. 설교집은 쉽습니다. 설교를 읽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에 도전을 하십시오. 지금 3권인가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천천히 읽으시면서 저의 오늘 강의를 상기한다면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세상에 살았다면 이런 식으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제가 이번에 써 본 것입니다. 그 전체가 마태복음 15장 14절에서 16절 사이의 세절을 해설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서 ‘아!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세계가 넓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Q. 뉴턴은 과학자로서 굉장히 뛰어났지만 신앙으로도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고, 신앙적으로 굉장히 신실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학설을 통해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펼쳤는데...
A.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기존까지 내려오던 학문들은 신학과 철학과 자연과학과 모든 것들이 통합을 이룬 체계로 학문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것이 피지카, 로기카, 에티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 시대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자연, 논리, 윤리입니다. 자연에 관한 어떤 것을 발견한 것이 나의 삶과 상관이 없는 법은 없다 이것입니다. 이것을 논리에 연결시키면서 윤리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 방법을 잘 했던 곳이 동양입니다. 예를 들면 “너 왜 그렇게 분수를 모르고 사니?” 물이 흘러서 갑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이 법을 따라야 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예수님이 “얘들아 공중 나는 새를 봐라 창고가 없지 그치,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다 먹이시지 않냐?” 이것이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지식을 습득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이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학과 과학의 법칙들에 대한 분화가 일어납니다.
이분화가 일어나는 것이 여기에 나옵니다. 뉴턴주의의 해석과 판단에 대해서이다. 형이상학과 자연철학과의 구분은 이미 16세기 말에 개혁주의 신학자 람베르 다메오, 히스케를 비롯해서 17세기 중초 반에 르테브르 데다쁘, 홀베르다, 드레인, 레기우스등에 의해서 이미 편만해진 구분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라고 하는 작품은 그런 점에서 사실은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변화들을 잘 반영을 하지 못한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린키피아’라는 책을 데카르트도 씁니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원리가 아니라 철학의 원리입니다. 여기서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뉴턴이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제목 그대로 수학적 원리들을 제공함으로서 근대과학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이데거나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에 의하면 인류가 미친 기관차를 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사고 없이 사물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물들을 최대한 쥐어짜서 인간의 물질을 풍부하게 하는데 골몰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물질적인 풍요가 17세기의 왕족들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자연은 회복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3000년도가 지구용도 폐기 기간이라고 합니다. 3000년까지는 지구가 존속할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3000년 뒤에는 아무도 살 수 없어서 용도 폐기되어야 된다. 그래서 화성 이주 계획 같은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는 정도로 심각하느냐 하면 태평양 바다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까? 태평양 바다 밑에 가면 거의 북미 대륙의 몇 분의 일쯤 되는 커다란 대륙에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크기의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데, 그것이 물에서 약간 아래로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것들이 수없이 분해되면서 모든 물고기들이 먹는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 연안에서 고기가 잡혔는데 세슘이 발견됐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피해를 입은 고기가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이미 이제는 무공해라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수없이 그런 중금속과 플라스틱 쪼가리를 먹은 물고기들을 인간이 먹고 그것이 다시 환경호르몬과 먹을 것들로 인해 여자가 아이를 못 낳고 불행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해 불과한 것입니다. 어디까지 영향이 펼쳐져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이 과연 어마어마한 물질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오래 살게 되지 않았는가? 엄밀한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 하면서 살아가는가?’라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크리토피아 같은 것들은 그런 폭발적인 힘들을 현대문명의 발전을 우리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과학에서 뭘 좀 발견을 해도 항상 사람들이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도움을 받으면서 완성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속도로 과학 기술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인간을 과연 덕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느냐 하면 전혀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여기에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제가 이쪽 근처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명절에 어른들 만나면 머리 쓰다듬으면서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그리고 용돈을 줬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승의 날 노래에 스승이 뭘 하라고 그랬습니까? ‘참되어라 바르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이런 것들은 벌써 보편적 가치 같은 것들은 벌써 무너지고 인간이 물질주의 중심으로 크게 회귀를 한 것입니다. 물질이 좀 결핍되고 불편하게 살 때에는 덕을 양보하면서도 물질의 유익을 얻어야 될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미 물질에 깊이 젖어있기 때문에 덕을 좀 잃어버리더라도 이 물질 생활을 유지해야지 이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물질주의의 물량 있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비유를 생각해냈습니다. 사실 저도 이것은 하나의 커다란 계기였습니다. 목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주일날 중요한 것은 제가 아무리 잘 가르쳐도 이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살고 온 세상이 공해로 꽉 찬 세상을 살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신학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17세기 신학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아무리 비싸도 그 책들을 화란 가서 사온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신학을 그대로 리바이벌해서 앵무새처럼 말하는 것은 그들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사실은 하나님도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시대를 위해서 선교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흐르는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특히 개혁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문제입니다. 제가 사실 가는 곳 마다 늘 강조하는데 데이비드 웨일즈의 4부작을 읽으라고 합니다. 데이비드 웨일즈의 4부작을 꼭 사서 읽으십시오. 돈이 없으면 다른 책 팔아서라도 사십시오. 지난 4월에 가서 데이비드 웨일즈 교수 만나 2시간 동안을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너무 저를 만나서 행복해 하셨습니다. 사회와 기독교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도 오늘날 우리 개혁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예언자적인 외침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저 같은 설교자하고는 다른 의미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 정도로 기독교와 일반 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분석해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읽으라고 해도 안 읽습니다. 읽으십시오.
인간의 가장 큰 임무는 죽기까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것입니다. 중심 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제가 우리 교회에 가면 항상 교리반 하기 전에 구호를 외칩니다. 여러분도 한번 외쳐볼까요? “스튜데오 에르고슘, 나는 공부합니다 그러므로 존재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공부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모든 공부의 중심은 성경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시대는 종교적인 열심 하나로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에는 너무 어려운 시대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항상 손에 놓지 말고, 성경이 중심이 되어서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배우면서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Q. 신학자요 철학자인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는데 교회론에 대해서 에드워즈에게 접근하다가 천상의 교회 모습을 보고....
A. 최근에 어떤 사람이 그런 글을 썼습니다. ‘김남준 목사는 개혁 신학자가 아니다.’ 이유를 썼는데, 첫째가 교회가 너무 컸다. 그렇게 교회가 컸다는 것은 똑바로 안했다는 증거다. 똑바로 했다면 절대 교회가 커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자가 아니다. 두 번째는 교회에 카페가 있기 때문에 개혁신학자가 아니다. 세 번째는 설교할 때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개혁신학자가 아니다. 물론 동의가 안 됩니다. 우리가 이럴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그 사람하고 대화를 했는데 사상이 흠잡을 데가 없이 정말 신학적으로 올바르다 논리도 명쾌하다 열심도 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그 사람을 계속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개혁주의 실컷 가르쳐 놓으니까 청령도를 갈아서 그 칼을 복음주의 목에다 딱 대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하는 것이 있으니까 복음주의도 고쳐져야 됩니다. 그런데 칼을 잘 갈아서 복음주의보다 더 나쁜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이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도전해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기에 가서 싸워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지적능력이 안됩니다. 배운 적이 없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현대의 정신이 무엇인지? 왜 아바타라는 영화가 미친 듯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지, 왜 전에는 어둠속에서 행해지던 일들이 이제는 엄청나게 보편화 되면서 사회가 미친 사회처럼 흘려 가는지?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우리가 계몽주의를 반대하지만 학문을 할 때는 계몽주의 언어로 학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하고 대화가 안 됩니다. 나의 사상을 전달하고 네가 믿는 것이 왜 아닌지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버나드 렌은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계몽주의가 아니지만 언어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을 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안 믿으려는 사람들의 말도 되지 않는 불합리를 의기로 꺾어야 됩니다. 저는 인터넷을 일 년에 10시간도 안 들어갑니다. 며칠 전에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쓴 글이 너무 많다는 것에 놀랐고, 이렇게 사람들이 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는구나! 넘겨도 수십 페이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일들을 왜 이렇게 많이 하고 있을까? 그런데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저의 비난에 대해서 그렇게 큰 비난도 없지만, 보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제가 성경적이라고 믿는 대의들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양보했던 적은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제가 19년 열린교회를 7명의 성도와 함께 개척을 해서 목회를 했습니다. 지금은 19년이 지났고 4700명쯤 모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올해의 목표를 정해 본 적이 없고, 그것을 교역자들에게 강요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윤리적으로 올바른 교회를 이루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거룩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 눈에 안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입니다. 목사님들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목사님들 아닌 분들은 잘 이해가 안가지만 목사님들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100% 세금을 내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세금을 목회자 사례금에 대해서 내느냐? 물론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물건을 살 때 완벽한 세금을 냅니다. 한국교회에서 실현하는 교회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른 목회 하시는 분들은 아마 아실 것입니다. 저 피아노가 500만 원짜리입니다. 그러면 500만원주고 삽니다. 그런데 세금 영수증을 달라고 하면 550만원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탈세입니다. 원래 부가가치세는 최종 소비자가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는 돈이 일 년에 제가 생각하기에 3, 4억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마저 그렇게 조력적이지 않으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은혜를 주셨습니까? 왜 사랑을 해 주셨습니까? 저의 대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이기고 또 견디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째든 저의 간절한 바람은 앵무새 같은 개혁신학 하지 말고 에드워즈처럼 자기의 시대를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면서 본질을 양보하지 않고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선교적인 패션을 가져야 됩니다. 개혁신학하는 사람들이 전부 안합니다. 어는 교회 갔는데 개혁신학하는 교육 전도사가 물어봅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이 다음에 목회를 잘 하겠습니까?” “요즘, 전도 나가요 안 나가요? 그렇게 계속 하면 나중에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됩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 불신 세계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롐성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가야됩니다. 이 세상에 들어가서 부패한 것들은 우리들이 미워하지만 이 세상을 깊이 끌어안고 고뇌하면서 사랑하면서 무엇인가 선교적인 영향을 끼칠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재앙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불행하고, 교회를 위해서도 너무 불행한 것입니다. 부지런히 탐구하면서 힘 있는 대로 열렬하게 기도하고, 몸부림치면서 우리의 한 생명을 주님을 위해서 불태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신학을 하는 이유이고 가치입니다.
Q. 목사님은 인류대학을 나오신 것도 아니고 목회를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시간을 어떻게 관리해서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일류 대학을 못나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를 공부하느라 학교 공부를 못했습니다. 이 동네 살 때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두려운 것이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 현실, 그것이 무섭고도 두려웠습니다. 그것이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때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철학책들 사상서들 문학작품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 목회할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등록금이 없어서 못가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야간 신학대학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야간 신학대학을 다니고 그러면서 총신대학원 들어가고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놓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Q. 지금은 시간을 어떻게 관리해서 큰 교회를 목회하면서,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사람은 좋아하는 것은 하게 마련입니다. 하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어는 부목사가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습니다." " 그래, 애를 많이 쓰는구나." 그날 저녁에 부부가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면 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많이 안타까운 것은 있습니다. 옛날에는 돈이 없어서 책을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점심값을 모아서 책 한권 사가지고 오고 그랬는데 지금은 돈은 있습니다. 6년전 까지만 해도 제 돈으로 다 책을 샀는데, 6년 전부터 교회에서 책을 사도록 후원을 해줬습니다. 지금 현재 수집한 책이 5만권입니다. 우리 교수님이 굉장히 부러워하는 눈치입니다. 거기가면 한국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없는 책들이 거기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안 나니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공부를 안 하고 있는 동안에는 설교할 수 있는 이유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심방하든지, 설교 준비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회의를 하든지, 교회 행정적 일을 처리하든지,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든지 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와 휴식의 차이를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이 휴식입니다. 취침은 책을 덮고 자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