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지도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김명진
제가 우리나라 나이로 34살에, 그리고 만으로 32살에 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 달 이상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고 외국에는 어학코스도 가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신학대학의 교수로 공채로 들어갔고 저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대학의 교수로 들어갔는데 2년 있다가 그 학교가 대학 인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대학에서 제가 4년을 있었는데 제 인생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던 사역지는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그 당시에는 학교 친구들이 아직 전도사로 있을 땐데 제가 교수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어느 사명도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린 사명이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신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했지만 여러분과 같이 제 마음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보니까 학생들이 너무 불쌍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학년의 지도교수를 나에게 맡겼는데 1학년이 제일 골치 아프니까 1학년을 제일 어린 저에게 맡겼습니다. 제가 지도교수로 맡은 클라스가 40명이었는데 40명 중에서 25명은 자기가 원해서 신학과에 들어왔는데 15명은 원해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적이 안 되니까 제일 약한 곳이 신학과니까 들어온 것입니다. 그 40명 중에서 15명은 제가 봤을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매일 싸워서 경찰서에서 전화오고, 술 먹다가 경찰에게 걸리는 등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4월이 되면 데모한다고 투쟁하다 걸리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은 그 대학에서 저의 별명은 검찰총장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섭게 했는지 제가 그 학교의 감독을 들어가면 장학생 분포도가 바뀐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일 미워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Cheating은 최대의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낙제를 주고, 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4학년 2학기까지 필수과목으로 매학기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잘 못 보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 엄격하게 하면서도 제 마음에 감사했던 것은 그 학생들이 영혼으로 보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곤고하게 살아가고 자기 소명도 아닌 신학과에 들어와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늘 목회를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에 눈물을 많이 주셨고 학생들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회심한 학생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재미있는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은 기독교교육과에는 제가 강의를 잘 들어가지 않는데 기독교교육과의 강의를 저에게 한 학기를 주었습니다. 처음 들어가 봤는데 신학과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과목을 해설을 하면서 60권의 참고 서적을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야유를 해서 혼을 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의 4분의 3이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의 마음이 토라졌는데 한 학기 강의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기독교교육과 다시는 들어가지 않는다.’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강의를 아주 빠르게 진행해서 한 학기 3분의 2 정도를 지났을 때 학과를 모두다 끝내버렸습니다. 그때 제가 가르쳤던 것이 신약개론이었는데 3분의 1이 남았을 때가 가을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는데 학생들에게 성경을 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부터 중요한 구절들을 지금처럼 툭툭툭툭 짚으면서 차분하게 해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렇게 첫 시간이 흘러갔고, 그 다음 시간, 그 다음 시간이 흘러가서 마지막 끝날 때가 될 때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역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른 내용들, 다른 지식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 수도 있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누가복음 11장 1절을 읽고 장황한 이야기를 하느냐면 바로 그 시절에 제가 11장 1절을 읽으면서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가을이었습니다. 저에게 얼마나 강의 시간을 많이 주었는지 일주일에 20시간을 강의를 했고 오전뿐만 아니라 야간까지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 4시 정도 되면 학생들이 모두 끝나고 가고 6시 정도가 되면 야간 학생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두 시간 가량은 캠퍼스가 조용합니다. 첫 번째 교수 연구실이 조그만 한 방이었는데 여기처럼 산이 있고, 창문을 열면 새들이 와서 노래를 하곤 했습니다. 아주 바람이 시원했는데 그곳 창가에 앉아서 성경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성경을 펼쳐서 읽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그 학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길면 두 시간,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 정도 성경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 성경을 읽는 방식이 있습니다. 원어 성경을 옆에 놓고 천천히, 자세히 읽습니다. 그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오스티미스의 책을 보니까 역사적으로 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다 읽고 나서 마지막에 깊이 내린 결론이 “이제까지 내가 배운 기독교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고 내가 가르친 기독교도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 고백을 마음 깊은 곳에서 할 정도로 그렇게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남다른 깨달음을 얻은 때였습니다.
그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읽을 차례였습니다. 한 절을 세 시간 반 동안 계속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에 잊혀 질 수 없는 깊은 복음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서 교회에 돌아와서 한 달에 걸쳐서 11장 1절을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50분 정도에 농축해서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그 때 성경을 읽으면서 깊은 감화를 받은 것은 우리가 하는 기도생활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 기도생활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의 세계를 알고 깊은 기도 생활의 헌신이 있었다면 우리가 이 성경 속에서 얼마나 깊은 진리를 발견했겠는가 하는 깊은 깨달음이 제 마음속에 각인이 되었고 그것이 나의 사역과 신앙을 특징짓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왔더라.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CGNTV에서 녹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 주기도문이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제일 먼저 그때 제 마음을 깊이 후벼 팠던 깨달음은 “예수께서”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주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 신학적으로 어떻게 되냐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실 때에 신성을 부여받았고 예수님은 신성으로서는 아직까지도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우스운 결론이 나오느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를 듣는 하나님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 올릴 때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절대자를 의존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 중 어떤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위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인력과 장비가 모자라서 밖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것을 아웃소싱이라고 하는데 아웃소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싶으셨고 동시에 참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으로서의 생애를 통해서 한 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성품을 가지신 분이고 위대하신 분인가를 배울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우리 참 인간이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우리와 우리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가 있는지를 예수님의 섬김과 사람으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보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으로서는 기도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인데 스스로 그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그래서 주님 앞에 섬기며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순간을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주님의 도움을 입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으로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은 우리의 회피할 수 없는 의무, 결코 누구에게도 위탁할 수 없는 일, 아무리 모든 것들을 다 갖춘다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대신할 수 없는 일,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 견딜만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아주 부패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목회나 선교사역이 늘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받으시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이신데 이상하게 잘 안되게 하시고 난관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성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일은 망가졌는데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일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들은 항상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마 세상의 영광과 번영, 사회적인 출세를 위해서 이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지난번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 직원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목회자는 어차피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렇게 가엽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 길을 갈 사람이고 우리교회에 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다른 교회에서 고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와서 목회하는 것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 만큼 고생하지 않고 밥 먹고 사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너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역이나 헌신을 미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도 승진이 있겠지만 CGNTV에서나 승진을 알아주지 사회에서 무얼 알아주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팀장도 있고 실장도 있습니다. 자기네 세계에서나 알아주지, 심지어는 대학원을 나오고 소위 명문대라는 대학을 나와서 교회에서 직원을 하고 있습니다. 뭐하느냐고 물으면 교회 도서관에서 목사님 책 정리한다고 하면 집안 식구들이 한심하게 봅니다. 형제들은 장가가기도 힘들고, 자매들은 결혼하는 데는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변호사나 의사인 초등학교 교사나 이런 사람들보다는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보면서 감동이 된 것은 우리교회 직원들이 생각이 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월급이라고 내밀기도 미안할 정도의 대접을 받으면서 불같이 일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일 년에 일주일의 휴가를 주면 그것을 다 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누가 시켰냐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이 진리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을까?”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여기에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감동을 받습니다. 일을 하다가 지칠만하면 같이 가서 숲속에 가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제가 늘 쓰는 레파토리가 있습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나면 각자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각자 이야기해 보자.” 얘기해보면 내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우리교회에 오게 되었는지, 자기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 마지막에 끝날 때 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숲속에서 기도를 합니다. 갈등을 쓸어버리고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고 나는 이렇게 모자라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지’ 고백을 합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늘에서 직접 우리의 영혼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님은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례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한 마디를 안 해도 포도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고 떡을 떼면서 흐느낍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은혜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도는 경건 그자체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가 즐거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결국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의지할수록 기도는 아주 풍부해집니다. 연애를 하면 평소에 책과 담을 쌓고 살던 사람들도 문학소녀가 됩니다. 그리고 풍부한 언어가 솟아오릅니다. 두 가지 경우입니다. 사랑할 때 언어가 풍부해지고 열 받았을 때 언어가 풍부해 집니다. 누구에게 화가 났을 때 부글부글 끓으면서 밤새도록 언어가 풍부해 집니다. 네가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 할 거야. 만나면 내가 이렇게 퍼부어 주어야지. 그러면 꼼작도 못할 거야. 그러면서 언어가 쏟아져 나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허락하시네
주님 앞에 마음을 쭉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으시는 아름다움의 하나님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을 의지할 때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의 용어로 하나님의 독립미라고 말하고 인간의 그것은 의존의 아름다움입니다. 가장 훌륭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연애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맨 처음 어떻게 주님을 만나고 여기에 부름을 받게 되었는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부르심 때문에 거기에 매여서 그것과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풀고 기쁜 일이 오면 하나님께 찬송하고 힘든 일이 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형제자매들이 서로 격려하며 살고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냐하면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회개해야합니다.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많은 간증들을 남겨 주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기도는 아웃소싱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본인 자신이 기도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본인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옵니까? 한 곳에서, 이것이 제 마음을 사로잡은 두 번째 메시지였습니다. 영어로는 In certain pray, 어떤 곳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와 같이 정확한 역사의 기록하는 사람이 왜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특정하지 않고 어떤 장소라고 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끊임없이 여행하시는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을 떠나신 적이 없지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면이 꾸준히 나오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는 매우 다양합니다. 어느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는 한적한 곳이라고 되어 있고, 어느 곳에는 심지어 강에서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사신 생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까지든, 병든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무지하고 시련을 만난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예수님은 찾아다니셨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사마리아까지 들어가셔서 인간으로서는 막장 인생을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까지 만나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생애였습니다. 고정된 잠자리와 주거지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깊이 흠모하며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준 이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교회에서 설교를 하다가, 저는 사실 복음성가를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가끔 복음 성가를 합니다. 그러면 젊은 애들이 집에 가서 “엄마, 우리 목사님 정말 놀라워. 우리도 모르는 노래를 알고 계셔.” 제가 부르는 찬송이 25년 30년 전 찬송이니까 그 아이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지금 부른 찬송도 20년, 30년 전의 곡입니다.
그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많은 새도 쉴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은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런 저런 여건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핑계일 뿐이지 사실은 그것이 핵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갈망하면, 시간이 없어서 연애편지를 못 쓰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반드시 합니다. 우리교회 부교역자가 보고를 하는데 젊은 부교역자가 자기가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우리 네 부부가 심야극장에서 만났습니다. 오줌 눌 시간도 없다더니 심야극작에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싶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합니다. 사랑과 열정이 모자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가? 그렇게 예수님은 고달픈 생애를 사시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만나는 최고의 시간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리더십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리더십에 동의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성이 달라도 그 리더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 깊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일단 그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리더를 따라가는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결정도 저 리더의 깊은 기도의 고뇌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때에 저항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아우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리더와 신앙의 세계에서의 리더와 다른 점입니다. 총명한 머리, 스마트한 아이디어, 모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하나님께 항상 어떤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기도하는 리더, 그 때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깊이 자기 자신을 그 앞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
우리가 교회나 선교 사업이 무엇인지 해나가다 보면 하드웨어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방송장비를 이야기 하다가 왔는데 방송장비들이 그렇게 비싼지 몰랐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드웨어입니다. 그런데 컨텐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경영은 그것 두 개면 끝납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역에는 또 하나의 웨어가 필요한데 그것은 스피릿웨어입니다. 무엇인가 시설과 공간을 이용해서 정해진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으로 제작을 하고 방송이 나갑니다. 왜 그런지 그 방송이 나갈 때 청취자들로 하여금 회심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영적인 감화를 받게 만드는 그 무엇은 아이디어나 물질적인 장비를 갖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신령한 그 무엇이 그 안에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할 때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 것 같은 번뜩이는 성령의 역사. 이런 것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입니다. 그런 사역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하지만 자신은 진리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한 설교로 사람들이 회심하지만 자기는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설교자가 될 때 이것은 비극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형제 찰스 웨슬러가 있습니다. 그분이 찬송가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분이 18세기 조지 윗필드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조지 윗필드를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미국으로 가면서 윗필드가 자신의 사역의 일부를 찰스 웨슬레에게 맡기면서 이런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데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수단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두렵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자기가 찬양하고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데 그들이 누리는 것 같은 놀라운 은혜가 자기를 관통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말씀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을 때 자기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위험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은 기도 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던 개인은 모여서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이 솟구칩니다. 자신의 개인의 기도의 세계가 거의 허물어진 사람이 모이면 음악은 힘차게 나오지만 그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번뜩이는 기도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 충천한 화염과 같은 열정적인 기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기도대로 살았느냐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어려운 환경을 지나면서도 당신 자신이 어떤 곳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기도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도하기에 너무 좋은 환경은 우리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우리가 부패하고 환경이 어려워도 우리의 심령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연애해 보셨습니까? “.헤어져.”, “그래, 끝내? 그럼 가. 네가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다면 너보다 더 최악의 여자를 만나겠니? 헤어지자.” 쫙 긋고 돌아갑니다. 그것이 끝이면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돌아서면서 그를 어떻게 만나서 우리가 고통을 만났을 때 어떻게 우리가 의지하면서 함께 지냈는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확 쏟아지면서 모든 것이 용서가 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자존심 같은 것은 없고 “미안해, 잘못했어.”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지를, 사라지고 나서야 그가 차지했던 마음의 공간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무서운 것은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우리의 영혼의 부르짖음에 귀를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아름다운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지금보다 훨씬 여건이 어렵고 환경이 힘들 때에도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그 시련과 고난을 이겨냈던 과정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이 단어가 ‘에파우사토’라는 희랍어입니다. ‘에파우사토’는 여러분이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맞먹는 히브리어 동치어가 ‘샤바트’입니다. ‘샤바트’에서 ‘사바트데이’가 나온 것입니다. ‘샤바트’는 창세기 1장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창조하고 쉬시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마쳤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기도하고 쉬시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아주 짧은 기도가 아니라 장시간에 자기를 쏟아 부은 그런 헌신적인 기도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 속에서 믿음 만능주의를 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너희가 산이 옮겨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구나. 역사가 거기에서 일어나는구나.’ 그래서 다급한 위기가 왔을 때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됩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로 하늘의 큰 능력을 불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가나안 정복을 했던 여호수아가 나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해가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도망가는 원주민들은 그 땅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처음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저 사람들을 추격해서 진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비니까 해가 멎었습니다. 그러니까 낮의 길이가 길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기도입니다. 사도들이 성령강림 사건 후 병자들에게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변형된 기도입니다. 이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 들였던 사람들, 짧은 기도 속에서 커다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소에 깊은 기도 속에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쌍시옷 발음으로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시킨 사람이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하수인인 것처럼 하나님께 시키는 사람이 그런 위대한 능력을 본 것이 아니라 그런 짧은 기도가 있기 전에 장구한 세월을 기도 속에 헌신했던 사람들에게 그런 위대한 역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처음 불러주신 그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일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일 하는 사람과 다른 것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보수와 세상의 영광과 이런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고 지금도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 섬김을 통해서 빛으로 나아오고 있다는 그 기쁨,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고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기도하시는 시간이 대부분 이른 새벽이 아니면 깊은 밤이었습니다. 이른 새벽의 기도는 새벽기도의 근간이 되고 깊은 밤의 기도는 심야기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시간에 기도를 하셔서 후일에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셨을까? 이렇게 새벽시간과 저녁 시간에 기도의 시간으로 선택하신 것은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탐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벽시간이나 밤 시간에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추론입니다. 왜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시고 밤에 기도하셨을까? “낮에는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환자들이 많이 몰려와서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고 불치병환자들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데 “지금 나는 기도 시간입니다.” 하고 어디에 가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왜 깊은 밤이었습니까? 그 친구들이 자느라고 당신께 나오지 못하니까 그 시간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편안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기독교교육학과 그 시간에 마가복음을 폈습니다. 예수님이 환자들을 고치시고 “새벽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시니라.”그것을 쭉 설명했습니다. 제 자신이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저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온 몸이 천근과 같이 무거운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일어나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일어나니까 예수님이 안계셨습니다. 예수님만 온통 찾아다니다가 가보니까 예수님이 저 멀리에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과 기도하고 일어나니까 어린 여학생이 울면서 “하나님, 너무 많이 자서 죄송합니다.”하면서 울었습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홈그라운드 싸움이 아닙니다. 수많은 우리 동포들의 응원소리를 들으며 하는 홈그라운드 경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기도로 헌신하면서 하늘의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서 받으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한 번 기도해 보십시오. 삶이 사역이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이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느껴지는 그 엄숙함과 진지함 때문입니다. 드디어 기도가 끝나셨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 당시에는 스승이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곳에는 항상 기도의 가르침과 함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네 번째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예수님의 기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화력이 있는 기도생활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봬오면서 저렇게 간절히 매달리고 장시간동안 자신을 쏟아 놓는 예수님을 봬오면서 진심으로 그분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을 따르는 팀원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습니까? 결국은 헤어지게 될 텐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나와 함께 사역하던 우리 팀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세상천지의 맛 집을 꿰고 있던 사람, 아니면 노는 것이라면 놀이동산도 밤중이라도 달려가던 사람, 자기 일에 거의 열정적으로 미쳤던 사람, 그것보다는 기도하던 사람.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인도하는 팀에 소속되어 있어서 참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힘든 일이 닥칠 때 팀장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자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자기를 지켜주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한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를 배우고 싶게 하는 감화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기도가 이렇게 인격적인 특징이 되어서 그래서 영적인 진정한 리더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