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녹취자 : 장주은
성결교와는 인연이 깊고 제가 어렸을 때 성결교회에 다녔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상규 목사님이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에서 교회를 개설하셨는데 그 교회에 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큰 교회가 되셨고 원로목사님이 되셨는데 아무튼 느낌이 새롭습니다.
사실 설교의 계획을 신년도 설교 계획을 이야기하자고 하는데 여러분, 해보니까 설교가 계획 가지고 됩디까? 저는 가장 동의 안 되는 목회자의 설교 계획이 연초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52주 설교 본문하고 설교 다 정하고 내려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요즘은 기도원도 잘 안가지만. 그런 방법에 대해서 물론 목회자가 생각 없이 설교하지 않고 1년의 계획을 쭉 짜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설교 한편을 준비하는데 걸리는 생각을 염두에 둔다면 그 며칠 있으면서 52주, 그것도 수요예배까지 하면 100개가 넘는 설교의 본문을 짜서 그 계획대로 설교한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냐하면 계획을 짠답니다, 짜서 아주 다양하게 구색을 맞췄다고 하는데 어차피 노래방 가면 70점 밖에 안 나오는 노래인데 가곡을 부르던 유행가를 부르던 어쨌든 70점일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땡 하고 다음 기회에 라고 하든지.
그래서 제가 이 강의 제목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기본적으로 설교자는 어쩔 수 없이 수준이 사람마다 설교의 수준이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노력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데 우선 첫째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수준이 상승되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설교를 할 때에 무계획하게 하지 말고 계획성이 있게 설교를 해서 비록 자기 수준을 한 번에 올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설교의 영향력이 골고루 효과적으로 교인들에게 미쳐지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록 초등학교 2학년이 아무리 열심을 다해도 대학생 같은 수필은 쓸 수 없어도 최선을 다하면 2학년짜리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수필 중에서는 그래도 좋은 품질의 수필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설교 한 편 한 편에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서 최상의 설교를 만들어 내야 한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부터 이야기 하자면 설교의 수준을 향상시킨다고 하는 것은 크게 다시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는 기본적으로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영적인 체험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은혜, 자비, 용서, 사랑,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설교자는 비로소 가슴에 불붙는 케리그마를 담지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들어가서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난 모든 사람들이 수준 높은 설교자가 되었느냐,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설교자는 일생에 걸쳐서 서로 모순되지 않은 설교들을 토해놓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제가 1993년 12월에 열린교회를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지하에서 7명의 성도들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그 자리는 앞에 두 교회가 하다 하다 문을 닫고 나간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거의 폐허가 되어있는, 일주일에 몇 번씩 물을 퍼내야 하는 지하실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교회를 시작을 하면서 23년 지나오는 동안에 최근에 설교를 몇 편이나 했는지 통계를 냈는데 작년 12월 현재로 5215번 설교했다고 합니다. 참 많이 했습니다. 정말 건강했거든요. 한 3년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아파서 강단을 비운 적이 한 주도 없었습니다. 수술할 때를 빼고는. 편도선 수술 하고도 설교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설교했다가 수술한 게 터져서 피를 쏟아내서 두 주 설교 하지 못한 것 이외에는 건강 때문에 교회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엄청나게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토해놓았는데 그 설교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설교하려면 일관된 사상을 지녀야 합니다. 사상은 그것과 함께 살고 죽고 자신의 인생을 의탁할 수 있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성경과 신학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탈신학화 된 설교입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까 편하게 이야기 하면 텔레비전 많이 안 보는데 탁 틉니다. 불교방송은 언제 들어도 깊이가 있습니다. 심오한 교리에 대한 해설을 합니다. 그 옆을 틀면 카톨릭 방송이 나옵니다. 무슨 프로그램을 들어도 착합니다. 개신교 방송은 혼란스럽습니다. 저것이 과연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파되어야 할 설교인가. 신학에 전혀 기본적인 소양도 안 되어 있는 분들이 도배를 합니다. 그 중의 한 설교자가 나와서 “여러분, 하나님이 동그란 삼각형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은 만들 수 없지만 하나님은 만듭니다.” 신학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미 신론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뽀뗀띠아 오르딘나타 뽀뗀띠아 압솔로타”라고 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이야기하면서 나온 교리입니다. 그런 전혀 신학적인 토대가 잘못된 설교들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치열하게 공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연세 많이 드신 목사님들은 그냥 조금 공부 하면서 사역하시다가 끝나시겠지만 우리 젊은 후배 목회자들은 “스투데오 에르고 숨”,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 다짐을 가지고 제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러분이 신학생이고 내가 신학교 선생님이면 이것은 잔소리일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물론 강의하고 있지만 저의 정체성은 선생이 아닙니다. 서울도 안 되는 시골 변두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시골교회 목사입니다. 그게 나의 25년 가까운 개척해서 단독목회를 한 소감으로서 설교를 체계적으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때 무엇이든지 언제든 들을 내용이 있는 설교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모르십니다. 사실은 정말 하고 싶으면 방법은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뭐 얼마나 공부했기에 우리에게 아침에 와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합니까. 저는 아시다시피 공부하러 외국에 간 적이 없습니다. 특히 미국에는 열흘 이상 묵어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제가 대학원을 마치고 그때는 다 어렵던 시절이니까, 대학에 교수로 전임강사로 임명이 되었는데 그러다가 제가 교수가 되고 그 이듬해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강의하고는 상관없이 편안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러고 보니까 공부가 다 시시한 것입니다. 제가 사실은 구약에 깊이 빠졌었습니다. 히브리어를 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안 갔지만.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오가리더, 에케디안, 함무라비 법전을 읽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수메리안, 이런 것들을 혼자 독학을 하면서 특히 오가리 텍스트는 사이언스고든에 250페이지짜리를 혼자 독학을 해서 두 편을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내가 이런 공부를 계속 해서 뭔가 학계에 깜짝 놀랄만한 결과를 내놓겠다,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 이러고 있을 때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싹 쓸어버리고 나의 관심사는 이제 청교도, 신학사상, 역사, 이쪽으로 방향전환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좋은 대우를 해줬는데 다 멀리하고 사표를 내고 개척교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날개 돋친 듯이 나 스스로만의 공부의 세계를 펼쳐갈 수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막 수없이 부흥사로 집회를 다니느라 공부를 많이 못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쉬지 않고 공부해 왔습니다. 지금도 주된 업무는 공부하고 글 쓰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치에도 특별한 뜻이 없고 하니까.
그렇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제가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의 설교자가 일관성 있게 성경과 친숙한 상태에서 우리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비기독인들에게 까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믿는 신앙을 전파하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어떻게 이 학문이 목회를 윤택하게 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터득하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내가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공부하면서 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 5만 5천 권입니다.
결국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공부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은 각자 다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목회의 중심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의 설교로 영향을 끼쳤던, 건전한 영향을 끼쳤던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 청중을 뒤흔들어 놓는 위대한 설교의 감동을 끼쳤는데 그 사역이 오래 계속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했는데 탄탄한 신학지식, 두 번째는 성령의 강력한 감동, 세 번째는 자신의 삶이 그 선포에 합치하는 일관된 충성스러운 목회자로서의 삶,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면서 설교의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목사님들은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공부 안하면 쓸모없는 목회자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제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이 강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별도의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신학, 그리고 좀 더 넓게는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상황에서 우리의 설교를 듣는 이 세계와 회중들을 이해하는 지식의 지평들을 확장해 가서 지성적인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사역을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입니다. 제가 4년 반 동안 책을 썼습니다. 책의 이름은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했다’ 입니다. 4년 반 동안 1600페이지를 썼습니다. 1600페이지를 한 권으로 내려고 하니까 거의 궤짝 같아서 두 권으로 나누어서 첫 번째 책이 12월에 출간이 되고 두 번째 책이 내년 6월쯤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거기서 제가 상세하게 누가 신학공부를 하고 어떻게 신학공부를 하고 어떤 것이 신학공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철학, 역사, 과학, 천문학, 생물학, 의학 등 모든 것을 통합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은 비록 내가 영어를 자유롭게 읽지 못하고 독일어 원서를 못 읽어도 한글로 번역된 책이라도 읽고 우스갯소리 같은 것을 찾아내서 설교시간에 예화로 쓸 것을 찾지 말고 묵직한 책들을 읽으면서 그것을 자신 안에 지성적으로 축척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기초체력에서 성경을 대하면서 새로운 신학 사상들을 발견하게 되고 신학적인 내용들을 진출할 수 있는 학문적인 기초체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기도 속에서 주님을 만나서 거기서 영적인 체력들을 보강 받으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당위성,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진실한 자기 깨어짐과 회개, 이런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진수들이 자기 마음속에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설교가 불을 토하는 설교가 됩니다. 그리고 비록 고래고래 고함을 쳐서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지 않아도 조용히 설교해도 청중들은 설교자의 마음이 졸고 있는지 흐느끼고 있는지 피를 토하고 있는지를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종류의 세미나를 수없이 다니면서 특히 90년도에 수없이 다니면서 경험했던 마음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잘 하고 싶어 하지, 설교자로서 자신이 깨뜨려져 고통을 지불하고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설교는 설교자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preaching'이라는 말과 'sermon'은 다릅니다. 'sermon'는 설교할 내용이고 'preaching'은 설교 행위입니다. 설교 행위는 설교자의 인격, 설교자가 평소에 살아온 일관된 삶, 그리고 설교할 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능력,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여기에 담기지만 설교 내용은 아무리 성령을 받아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해야 합니다. 11세기의 신학자입니다. 티에리에 윌리엄이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띠띠아 입세 에스텔 인텔렉투스”, “지식은 그 자체가 지성이다.” 혹은 “아모르 입세 에스트 인텔렉투스”, “사랑은 그 자체가 지식이다.” 사랑과 지식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 철저하게 학문적인 탐구를 통해서 내용이 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한시라도 젊었을 때 책을 손에서 내려놓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이 단 하루도 목회자의 마음속에서 떠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그리고 어떻게 설교해야지만 사람이 모일까, 어떻게 설교할 때 사람들이 좋아하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게 만약에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라면 우리가 목회에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에는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크게 두 번째는 계획성 있게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는데 축복론에 대해서만 경험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지 축복을 받는다는 것만 계속 일평생 합니다. 그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기독교의 진리가 서론부터 종말론까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그 무지개 빛깔 같은 그 수많은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서 어떻게 빨간색 하나만 일평생 설교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선교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일평생 선교, 구원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일평생 구원론만, 성경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입만 열면 성경론만 설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어떤 한정된 주제에서만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부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해서 신학적인 지평이 열리게 되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 지식이 성경 본문 속으로 용해되면서 해석학적 순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학 공부를 전혀 안한 할머니가 성경을 200독 한 것과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 두 번을 성경 읽은 것 차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해석학적 순환을 위한 선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얼마나 풍성하게 형성되었느냐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과 이해의 깊이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되면 이렇게 성경을 계획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많은 폭넓은 설교의 능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를 연구하다가 그 성경을 설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방법도 있고, 두 번째는 사람들이 너무 궁금해 하는 이 시대의 현안들, 그것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성경은 답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자면 지금 시급한 게 다문화 가정과 갈등의 문제들, 외국인 노동자들은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부정부패의 문제들, 설교시간에 나는 이것을 지지한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국정교과서 같은 것들. 만약 설교 속에서 녹여낸다고 한다면 성경의 어느 구절 하나를 잘 이해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문화 사회, 이것이 주는 Globalization이 무엇인가. 그럼 그 세계화의 정신은 무엇인가. 가치 상대주의, 규범 상대주의, 실존철학, 이런 많은 것들이 아주 복합적인 구도 속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칼 바르트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 하면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 놓여있는 컨텍스트, 그것에 대해 항상 답을 들려주는 텍스트가 될 때 그 텍스트는 그 옛날 믿음의 선조들이 말한 화석과 같은 내용이 아니라 오늘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내용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문제를 가지고 현실적으로 목회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목회자 납세 문제 같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토론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노동해서 대가를 받았으면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것을 무슨 면세점을 높이자 낮추자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교회의 부목사님들 사례는 꽤 드리는데 세금을 안내니까 나라에는 전부 다 무직자로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그 자녀들이 모든 특혜를 받으면서 무직자의 가정, 수입이 없는 가정의 자녀 취급을 받으면서 어린이집도 무상으로 들어가고 혜택을 받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임대주택에도 못 들어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이야기를 꺼낼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이 교인들에게 일 년 설교를 하면서 어떤 것들이 주어져야 합니다. 노동자의 탐욕 문제만 이야기하지 말고 대기업이 어떻게 야비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가 하는 문제, 진보주의의 가치 상대주의만 이야기하지 말고 보수주의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민족사를 분열시켰는가 하는 이야기들도 설교 속에서 만약에 녹여 낸다고 하면 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녹여낸다고 하면 당연히 공부가 필요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렇게 설교를 해왔더라면 적어도 기독교가 한국 현대사에서 걸림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안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부는 단지 텍스트에 대한 공부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 대한 공부, 경제 상황에 대한 것, 세계화에 대한 공부, 유럽에서 시작되어서 전파된 상대주의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건축, 예술, 심지어는 복식, 동성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어떻게 녹아들게 되었고 이미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런 상대주의에 포위되어 버렸는가에 대해서 정직한 인식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목사는 최고 지성인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계획성 있는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계획은 무엇인가, 자기 계획을 따라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때는 교회를 비우고 이 때는 쉬어야 하고, 이런 계획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을 모든 회중들에게 모든 진리를 모든 마음을 다해서 전파하는 설교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이 시대의 균형 잡힌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들로 하나님 앞에 생명력 있는 존재로 자라게 하는 것이 설교의 계획성과 관련된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께 제가 오늘 책을 한 권씩 선물하고 갑니다. 이 책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입니다.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구절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리고 쭉 나오면서 “그리스도의 덕을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있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저는 그 부분을 보면서 언젠가 한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정말 오늘날 우리들에게 기독교 선교 방식에 대해서 주는 신성한 성찰, 반성을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편지가 쓰여진 것은 핍박이 이미 현실화되던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배교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두려워 떨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한 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실패했던 사람으로서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소망가운데 굳건히 서도록 요청하며 이 편지를 격정적인 서신으로서 이 편지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1장에서 소망과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3장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3장 이후에서 이야기 하는데 2장이 연결고리처럼 나옵니다. 그것이 “예수는 산돌이시다.” 'living stone'입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건축술과 관계가 있습니다. 벽과 벽이 와서 두 벽이 만나지 않습니까. 그 두 벽을 만나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모퉁이돌이 필요합니다. 모퉁이돌 하나 위에 한 쪽 벽과 또 다른 벽이 얹히고 의지하면서 비로소 서로 다른 벽이 하나의 건물을 지탱하는 구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축학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여기에 신학적인 생각을 사도 베드로가 풀어놓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모퉁이돌은 그냥 모퉁이돌이 아니라 산 돌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으로서 한 편으로는 이방인들로 연결되어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라는 것을 2장에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들을 여기서 다 할 수는 없고 조금만 앞부분을 설명하면서 설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희랍어로 ‘게노스 에클레크톤’이라는 표현입니다. ‘게노스’는 어떤 하나의 시조, 혹은 통치자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핏줄적인 동아리, 혹은 통치적인 동아리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하나의 문화에 의해서 모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연합을 지칭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에클레크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택받은, 선택된, 선택된 족속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당시 종족들을 구분 짓는 커다란 구분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물론 이것은 유대인의 시각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아주 다양한 족속들로 이루어져서 로마제국을 구성하고 있었겠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들은 모두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다른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족속들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냐,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 혹은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제 3의 족속들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 족속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크리스티아노이’라고 하는 이 그리스도인은 원래 경멸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 혹은 자칭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말하는 자들, 아주 경멸적인 표현을 쓰자면 예수똘마니들, 그런 의미로 사실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노이’가 붙으면 소유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역사의 기록을 뒤져보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로마시대에 불신자들이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책을 한번 잠깐 보겠습니다. 23쪽입니다. 중간부분입니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캅은 기독교가 핍박받던 시대의 인물입니다. 속사도 교부 중 하나입니다.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평가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방인들에게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스트로마타』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제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제 3의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제 3일까요? 유대인, 이방인, 분명히 둘 중의 하나여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이 두 족속들과는 완전히 다른 별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복음적인 삶의 방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주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뚜렷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중심으로 유대교 사상을 따랐고 이방인들은 이방의 세계관, 종교를 따랐습니다. 유대인과도 이방인과도 다른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족속들이었습니다. 『영웅전』으로 잘 알려진 플루타르코스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78편의 수필로 이루어진 『모랄리아』 라는 책을 씁니다. ‘윤리론’으로도 불리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로마 사람들은 로마 법정이 내리는 판정을 신성한 판결이라고 불렀는데 『모랄리아』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외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가운데 ‘멜리토’라는 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에게서 받은 독특한 인상이었습니다.
이제 여기를 보셔도 됩니다. 부족하지만 몇 개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어떤 인상을 받게 됩니까? 그 당시의 문맥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 주일이면 교회에서 사는 사람, 돈 갖다가 교회에 바치는 사람, 목사를 뒤따라 다니면서 열심히 섬기는 사람, 그런 인상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도 아니고 인생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도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다른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을 따라서 확신 있게 사는 사람들, 그래서 무엇인가 자신들은 그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70이 넘은 어느 스님이 자기의 어린 시절의 회상하면서 쓴 수필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방학 때 지방으로 친척집에 놀러갔습니다. 근처에 유명한 절이 있으니까 한번 가봐라, 해서 절 구경을 혼자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툇마루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저기서 젊은 스님 한분이 걸어오고 있더랍니다. 그러더니 학생 옆에 앉았습니다. 너는 누구냐.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있는 1학년 학생 아무개입니다. 그래? 너는 왜 사니?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대화를 했습니다. 헤어지고 이 아이는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부모님을 찾아뵙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제가 이제 가야할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하게 허락해주십시오. 이 집은 대대로 유교집안이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대체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그 옆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온 사촌이 있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 불교를 좀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야기 했습니다. 이 아이가 이제 인생에 대한 자각이 생겨서 자기 인생을 살려고 하는데 허락 해줍시다. 그래서 결국은 그때부터 출가해서 70이 되도록 불가에 몸을 담은 승려가 되었는데 그때에 자기가 툇마루에 앉아있을 때 걸어와서 자기 옆에 앉아서 너는 왜 사니, 그러고 물어주었던 젊은 스님이 성철스님이었답니다. 그 얘기를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아이가 열일곱 정도 되었으면 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나름대로 자기 인생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반성이 있는데 그것을 접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한 번에 불가에 귀의하고 70년 후회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그 이끄는 흡입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우라입니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울림이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요새 아우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일본말인줄 압니다. 아우라는 일본말이 아니고 라틴어입니다. 아우라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람, 공기, 분위기, 그리고 어떤 존재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적인 기상,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에도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똑같이 아우라 라는 단어이고 피타고라스가 이미 이 단어를 철학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70인역 성경에서 단 한번, 욥기에 아우라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거기에서는 미풍, 바람 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아우라는 무엇이냐. 그 사람이 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에게 방출하는 그 사람의 존재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우라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독특한 존재의 울림을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그 사람 안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입니다. 사상적인 영향력, 윤리적인 영향력, 이런 것입니다. 이런 아우라는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관된 원칙과 사상을 가지고 똑같은 길을 걸어갈 때 그 사람이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아우라가 바로 초대교회 시절에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웅변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였습니다. 2월이었습니다. 학교 나이로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막 3학년으로 올라갈 시점을 앞둔 때였습니다. 주일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교회를 기어 다닐 때부터 다녔습니다.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 슬픔이 밀려오면서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열다섯 살짜리가. 이유는 가난하고 병들고, 물론 그 때 가난했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야 하나, 신은 존재하는가, 세계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설교를 들었지만 그 설교는 내 가슴을 쥐어뜯는 이 질문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열 다섯 살 먹은 나만큼도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안 하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한참을 울고 논둑에서 일어나서 푸르른 하늘, 추운 겨울에 눈물을 훔치면서 열다섯 살 먹은 소년은 결심했습니다. 일생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리라. 그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했더니 어느 교인이 그럽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워낙 영민하셨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고민을 하셨지, 우리 자녀들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 스마트폰 가지고 뿅뿅 거리면서 게임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말을 안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떠든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침묵하나 저희들의 마음은 정으로 소리치고 있습니다.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 인생에 대한 고민을 나는 그 시절에 책을 읽었고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논둑이 엎드러져서 통곡하며 울었지만 얘네들은 그 통곡 대신 스마트폰, 음란문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서 읽지 못하는 것은 그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교회당을 두드립니다. 김진홍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납니다. 생사를 오가면서 도대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분은 있는 것인가. 생사를 오가는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 정말 당신이 살아있다면 오늘 내가 교회를 찾을 테니 답을 들려주십시오. 그러고 동네 교회에 갔답니다. 수요일에 목사님이 오셔서 건축하니까 헌금 많이 하라고 그러면 부자 될 거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뵈오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 20년 후에도 현직에 계실 분들이 대부분일 것 같습니다. 제가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예고할 수 있는데 20년 후에는 오늘 제가 여기서 강의하던 시대와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될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에 개척하던 때와 지금은 다른 시대입니다. 더 다른 시대가 될 것이고 기독교의 인구는 현저하게 감소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들이 아직은 방법이 약발이 통하던 시대는 지났죠, 지금은 약간 남아있습니다. 20년 뒤에는 그런 것들이 작동을 안 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양극화 될 것입니다. 지금 노인네들도 가득 차있는 교회는 사라지겠지요. 그리고 양극화됩니다. 양극화가 무엇이냐 하면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바에 철저히 맞춰서 심리적이고 인간학적인 요구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교회, 신학적인 틀을 벗어나서 자유롭게 변신하면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교회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대형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초대형 교회들은 불교에서 능인선원 같은, 그런 방식의 목회를 하는 교회들이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남는다기보다도 승승장구 할 것이라고 봅니다. 마음이 끌리시면 한번 준비를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부분의 교회는 명맥만 유지하는 아주 소수의 교회들이 될 것입니다. 중간 크기의 교회들이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속에서 그 위에 메가처치 교회에 진입하는 분들은 이 중에서 한두 분 될까 말까 정도 되고 나머지 분들은 다 떠나고 남은 소수의 교회를 가지고 피 튀기는 유치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피곤한 삶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어서 사는 것으로 가게 되면 전도를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영국 사람들하고 비슷해집니다. 열심히 전도하면, 영국에서는 전도도 못하게 되어있지만, 전도하면 반응이 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심각하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럼 그 속에서 피 튀기는 경쟁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에 승승장구 하는 교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 교회는 레드오션에서 교인을 유치하기 위해서 피 튀기는 교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능인선원과 같은 교회의 방식으로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면서 탈신학화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떤 교회냐. 아까 교회 가는 주일,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하고 울던 열다섯 살의 소년에게 기독교는 인생을 이렇게 말한다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교회. 그 교회는 성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경쟁자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인생에 대한 고민, 신학 공부, 철저한 자기 복종, 기독교의 철저한 내면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신학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겠지요. 목사님, 어떻게 그런 식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까? 증거를 하나 보여줄까요? 오늘날 노숙자들도 인문학 공부한다고 열풍이랍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이제 가난하던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였습니다. 그리고 좀 더 사람이 자란 후에는 어떻게 이것들을 관리하면서 할 것인가 하는 처세술, 경영학, 그리고 그 다음에 더 국민소득이 높아지게 되면 돈을 어떻게 굴리고 유족한 삶을 살 것인가가 아니라, 인생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은 무엇일까? 어떻게 나에 대한 정체성을 찾으면서 내가 강요된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내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공학이나 이 세속주의에서는 그것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인생의 본질에 대한 고민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문학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문사천’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오기 전까지는 유럽이나 미국이나 다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은 탄탄한 인문학적인 교육의 바탕에서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인문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인문주의 위에는 르네상스가 있습니다. 르네상스 위에는 13세기에 중세 때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실제론 중심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잘 아는 로켄루니우스부터 시작되어서 13세기에서 쿠자의 니콜라스나 윌리엄 오캄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소위 이야기하는 유명론과 실제론, 관념론 논쟁이 생기면서 아퀴나스 이래로 장구하게 구축되어 왔던 기독교적인 사상적 질서들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르네상스가 태동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우리들이 성경에 나오는 성인들의 그림이나 우리가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에서는 인간에 대한 그림이 주중을 이루게 되고 인간을 홀딱 벗겨놓고 사람들이 얼마나 육체가 아름다운지를 드러낸 그림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외설이나 육체미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모든 세계와 사실에 있어서 소외되었던 인간 자신을 제자리로 복귀시키는 움직임인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젊으신 목사님들도 계신데 기회가 많습니다. 르네상스를 공부해 보면 그런 공감을 아주 많이 갖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중세의 세계관을 벗어나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기독교에 대해 막 반대하는 사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성을 다시 회복시키자는 운동입니다. 여러 갈래가 나왔습니다. 그 르네상스 운동이 피렌체에서 예술을 중심으로 꽃피고 이것이 북부이탈리아로 들어가면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것이 다시 유럽에 영향을 끼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건한 기독교 사상과 인문주의 사상을 결합시키면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에 인간론에 대한 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세의 늪에서부터 그 참된 인간관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교회에 폭압과 억압 아래 짓밟히는 죄악 된 대상이 아니라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인가.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세계의 질서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영향을 받으면서 카톨릭의 치하에서 벗어나는 개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의 빛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변하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정말 올바르게 전하고 구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궁극적으로 여러분 자신들의 설교의 수준과 내용에 변화가 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공부 안하면 표절을 면할 수 없습니다. 표절은 여러분의 교회가 커질수록 표절해야 할 필요성이 늘어납니다. 언젠가는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학자들의 설교를 많이 읽고 동시대 사람들의 설교를, 이렇게 얘기하면 또 내 책을 사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니까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스로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고 그 시대에 대한 고민들을 통합하면서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서 답을 던져줄 수 있는, 그 설교를 들으면 실제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눈을 뜨고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선한 결심과 의지가 생겨나게 하는,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책 한권은 불과 두 시간에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읽으시면서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