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자이신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
녹취자: 이배훈
시편 23편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을 다윗이 언제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은 이 시편은 다윗이 목동 시절에 지은 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가적인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시는 다윗의 생애의 거의 말년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외우고 있는 성경의 장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많이 외우고 있다고 해서 그 의미를 깊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기회 있는 대로 이 시편을 설교하려고 했습니다. 시편 23편은 세 토막으로 나누어져 있고 첫 번째 토막은 1절입니다. 총론과 같은 주제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왜 하나님이 시인에게 목자이신지를 논증합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논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이 6절은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문을 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왜 이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했을까요? 이 질문은 하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세 개의 하나님의 존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학자들은 논쟁을 하지만 대개 두 가지 의견으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아마도 ‘알라흐’, ‘두려워하다’라는 동사에서 이 단어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보다 더 믿을만할 학설은 이 단어가 ‘엘’이라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의 복수이고 그 ‘엘’이라는 단어는 ‘울’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도토리나무를 의미합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폭풍이 불어도 끝까지 뿌리를 곧게 내리고 뽑히지 않는 힘센 나무가 도토리나무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 성함은 특별히 하나님을 모든 신들 위에 가장 뛰어나시고 권능이 많은 분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그 단어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능력이 뛰어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라는 존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열방의 사람들에게까지 계시된 이름이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존함은 ‘주’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그 고백 속에는 나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처분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하나님의 존함보다 더 뛰어나고 중요한 존함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 ‘야훼’라는 단어입니다. 이 하나님의 존함은 모든 하나님의 존함 중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도 감히 하나님의 본명을 부르지 못했고 성경을 쓸 때도 이 하나님의 존함이 나오면 무릎을 꿇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글씨를 써야 될 정도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존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된 존함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존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선택된 백성들에게만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존함이었으니,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명으로 혹은 별명으로 이름이 불리어도 호적에 있는 이름이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것처럼 하나님에게 ‘여호와’라는 존함도 그러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 시인 다윗이 이 유명한 시를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폭풍과 같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시인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마음에 그리고 있는 하나님은 그냥 힘센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시인과 특별한 언약의 관계를 맺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잘 생겼는지, 키가 큰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는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여태까지의 업적이 무엇인지 등으로 그 사람을 저울질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마음이 끌리는 사람, 별로인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등으로 구별하면서 인간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키가 얼마쯤 될까요? 피부 색깔은 어떨까요? 그 분은 도대체 어디 계실까요?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분이 계신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대로 공간이나 시간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먼 나라를 여행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유적을 보게 됩니다. 큰 성벽이나 어마어마한 왕궁을 봅니다. 그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거기에는 유적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적을 보면서 몇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사상과 능력을 가진 분인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늘을 거의 쳐다보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땅에서 볼 것이 별로 없어서 하늘을 봐야 했지만 이제는 땅에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러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에서 조용히 밤하늘을 쳐다보십시오. 그러면 도시에서는 불빛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중학교 과학시간에 한 학생이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지구가 우주라면 너희 아파트 화장실 전구를 돌고 있는 날파리가 지구이고 그 날파리 위에 붙어있는 세균이 너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우주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라는 걸 믿는다면 이 우주는 얼마나 넓을까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이 약 6천개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별들도 많이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의 크기가 빛이 150억 년쯤 가야 하는 크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봐야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폭발과 함께 매초 2천 km씩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우주 바깥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속한 곳을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이 은하계는 둥근 쟁반 모양인데 별들이 모여 있는 집단입니다. 이 집단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들만 약 2천억 개가 모여 있습니다. 태양은 그 2천억 개 중의 하나이고 이 은하계의 중심에서 좌측 하단으로 약 2만 6천 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의 주위를 여덟 개의 위성이 돌고 있으며 그 세 번째가 지구입니다. 지구 주위를 달이 돌고 있고 또 다른 위성 주위를 돌고 있는 약 160개의 다른 위성들의 가족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거리는 약 10만 광년이 되고 그 속의 모든 별들의 수는 과학자 칼 세이건에 의하면 약 4조 개쯤 된다고 합니다. 여덟 개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데 그것이 5백 원 동전에 들어간다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 서울에서 대구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4조 개의 별들이 우주 공간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우주 공간을 초속 220km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습니다. 4조 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은하계가 우주 전체에서는 큰 편이 아닌데, 이런 은하계 같은 곳이 천억 개 쯤 모여 있는 곳이 우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 본 별이 빛이 1.2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달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밤하늘을 쳐다볼 때 우리는 수많은 별들을 봅니다. 그 중의 어떤 별들은 수천 년 전에 그 별을 떠난 빛이고 어떤 빛은 몇 백만 년 전에 그 별에 떠난 것일 겁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수억 년에 걸쳐서 서서히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자 이 모든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우주는 이것을 창조하신 이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 분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보면 그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높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그 수많은 별 가운데의 지구에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숨을 불어넣어서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높고 위대하고 무한한 하나님이 시인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한 줌 흙과 같은 시인이 내 것이라는 소유격을 사용하여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신앙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절대자일 뿐일 것입니다. 신앙은 그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어 줍니다. 자기와 비교되지 않는 위대한 분이지만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의 출발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격차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처럼 생각하며 농담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신앙은 두렵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렵지만 하나님에게 이끌리는 사랑을 느낍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경건이라고 합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그것이 신앙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갖게 되는 반응입니다. 그 신앙은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만 그것은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오는 자발적인 순종이요 복종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니 자신을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문맥에서 보면 양은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양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온순하고 평화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고 법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양은 긍정적인 짐승만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라크 사람들은 다른 욕을 해도 다 참지만 ‘양 같은 놈’이라는 욕은 절대로 참지 않습니다. 그 욕은 머리 나쁘고 욕심 많고 더럽고 분수를 모른다는 모든 나쁜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긍정적인 짐승과 부정적인 짐승이 있습니다. 한국의 문맥에서 양이나 소는 긍정적인 짐승입니다. 그러나 뱀은 부정적인 동물입니다. 성경에서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로 나오지만 그것은 양의 이미지를 예수님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양은 어리석은 짐승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리석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순종적이어서 털 깎는 자 앞에서도 고분고분하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순순히 죽임을 당하는 이미지를 투사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성경에는 길 잃은 양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온 양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을 양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양의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아무리 연약해도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기제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동물의 왕국을 시청했습니다. 염소 같은 짐승이 사파리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 짐승은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고픈 사자는 포복하여 살금살금 목표물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이 작은 짐승은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사정거리에 왔다고 판단되었을 때 사자는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고 뒤늦게 사자가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이 작은 짐승은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백 미터도 달려가지 못해서 간격은 아주 좁혀졌고 이제 한 번만 발을 뻗으면 사자에게 붙잡힐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작은 짐승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달려오는 사자에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뿔이 사자의 겨드랑이로 들어가 등으로 튀어나왔고 사자는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짐승은 몸을 뒤흔들어 뿔을 빼어내었고 사자는 그 자리에 엎드러져버렸습니다. 아무리 약해보이는 짐승이더라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가진 말, 키가 커서 멀리서 오는 적들을 미리 발견할 수 있는 기린, 상대가 공격할 때 물어뜯을 수 있는 이빨을 가진 짐승들, 몸을 말면 온 몸이 가시가 되어 사자도 먹을 수 없는 고슴도치, 가스를 뿜어 다가오는 적을 기절시키는 스컹크, 주변의 색깔에 맞춰 자유롭게 피부색이 변하는 카멜레온 등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그런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양은 빠른 짐승이 아닐 뿐 아니라 지독한 근시라서 물체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열에서 이탈한 양은 결국 자력으로는 주인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 양은 채식동물이기 때문에 어금니가 발달했지만 누구를 물 수 있는 이빨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양은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도 흐르는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홍수가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둑에 올라가서 넘쳐나는 개울물을 바라봅니다. 저는 소가 떠내려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소는 헤엄을 잘 칩니다. 고양이는 쉽게 물에 빠져 죽지 않습니다. 개도 헤엄을 잘 칩니다. 돼지도 좀처럼 물에 잠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양은 한 번 물에 잠기면 깊이 가라앉습니다. 양에게도 뿔이 있지만 만두처럼 말려 있어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무용지물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혹은 우리 모든 인간을 양이라고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은 양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독립하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인간 가까이 살면서 인간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도록 의존적인 동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양으로 부르신 이유는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계심으로 아름다운 분이시고 인간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존할 때 가장 인간답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야생의 산양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산양은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 동물입니다. 짐승들을 피해서 계속 위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니 먹을 것이 없습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다니다가 추락사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보실 때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존하지 않음으로 아름답지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수록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인간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오백 킬로그램의 사자가 한 번 발을 들어 내리치면 2.5톤의 압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 오십 명쯤 물어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닌데 인간은 그 사자를 사로잡습니다. 바다의 고래는 몸무게가 160톤까지 나가는데 소 4백 마리에 해당되는 무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고래를 포획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탁월한 지능과 지혜, 감정, 의지와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술과 과학으로 어마어마한 문명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15분 만에 가는 기차를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 기차가 나오면 부산에서 프랑스까지 불과 9시간이면 갈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한 과학입니다. 기술에 있어서는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면으로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삶을 비관해서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개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목매달아 죽은 돼지를 본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다른 동물들이 하지 않는 고민을 하고 괴로워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와 그 분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가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론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나에게는 쉼이 없었나이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예수를 믿지 않으셨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고모들의 등에 업혀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14살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주일이었습니다. 둑길을 걸어서 교회를 가는데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논둑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습니다. 가난 때문도 아니었고 연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인가? 신은 정말로 존재하나? 나는 어린 나이에도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일 사는 것은 무서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서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냈는데 그것은 위로를 줄 뿐이지 대답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상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진리를 찾았다고 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들이 행복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6년이 넘게 방황을 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은 어느 가을 수요일이었습니다. 나 홀로 걸어서 벌판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 들어갔고 이십여 명의 성도들이 기워진 방석 위에 앉아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삐거덕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서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뒷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지만 철들고 처음으로 평화를 경험했습니다.
(찬양)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교회를 다녔지만 나를 사랑해준 선생님을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 내가 선생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면 6년의 세월 동안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학교 교사들은 잘 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 시인을 인도하실 때 그의 모든 약점을 알고 인격적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을 키우는 마부들은 낮에는 말을 풀어 놓고 밤이 되면 말에게 겁을 주어 한 곳으로 모읍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게 몰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던 사람이 글을 썼습니다. 그가 차를 몰고 가는데 길을 건너는 양떼를 만났습니다. 목동이 소변보러 잠시 자리를 비우자 양떼는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다시 목동이 돌아와 뭐라고 말을 하자 양떼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채찍으로 때리거나 발길질을 하면서 몰아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약점을 알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동일한 원리로 이끄시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법으로 이끌지는 않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서울의 한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유난히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그 청년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공부를 뛰어나게 잘 했거나 혹은 집안이 부유한 경우입니다. 저는 그 때 청소년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교사를 모집하면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청년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 중의 한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그 분은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계십니다. 어느 날 예배가 끝났는데 어느 집사님이 그 선생님과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가 끝난 후 제가 그 선생님께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의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고3 시절에도 잠을 충분히 자면서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시험에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시험에 떨어진 기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표정이 안 좋은 선생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여 체력이 떨어진 듯해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테니스를 배운 지 일주일 지난 후에 테니스 코치가 짜증을 내었다고 했습니다. 테니스를 가르친 지난 7년 동안 가르친 사람 중에 제일 못 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만 32세에 교수가 되었습니다. 막상 신학교 교수가 되어보니 이곳은 나의 사명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대학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비교적 입학하기가 쉬운 신학교로 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이중에는 신학교 원서를 쓰고 난 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불신자입니다. 저는 목회자를 기르려는 사명으로 교수가 되었는데 이 학생들은 전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시로 음주와 폭행으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태어난 이후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시간이었습니다.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흘린 눈물보다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정직하지 못함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부정행위를 싫어합니다. 신학교에서도 부정행위를 합니다.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하면 똑같은 내용의 리포트가 글자체만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비슷한 리포트를 제출한 당사자들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그러지 못하면 낙제를 시켰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학생은 야단을 쳐서 훈육하고 마음이 심약한 학생은 공감하면서 훈육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런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맞춤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 주는 곳이 없습니다. 항상 비교하고 우월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을 나눕니다. 똑같이 투자했을 때 누가 더 잘하는지 보고 못하는 사람은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고 잘하는 사람은 키워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유능하기 때문에, 일을 잘 하기 때문에, 말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싹싹하기 때문에 날 사랑하는 것이지, 한 사람 그 자체가 소중해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될까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까지 모두 아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저는 요즘 강아지를 키우는 재미에 빠져있습니다. 저의 아들은 이번에 목사가 되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의 딸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사역에 바쁘고 공부에 빠져 아들과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하지만 딸이 성장하고 나서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이후 아들이 결혼하여 손녀를 낳았는데, 손녀가 보고 싶어 점심시간에 안 가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예쁩니다. 그래서 유아용품 가게를 자주 들렀습니다. 요즘은 우리 강아지를 위해 애완동물 용품 가게를 자주 갑니다. 어렸을 때 개를 너무 좋아했는데 오십년 만에 개를 기르고 있습니다. 작은 말티즈인데 일주일도 안 키웠는데 너무 귀여웠습니다. 5분만 나갔다와도 5년 만에 본 듯이 반가워합니다. 어느 날 강아지를 안고 생각했습니다. 유기견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유기견은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 안락사를 시킨다고 합니다. 우리 개는 선택되었습니다. 나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요? 이 개가 불치의 병이 걸렸을 때 내가 지출할 수 있는 돈이 얼마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개를 쓰다듬으며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 개가 말썽을 부립니다. 집에 있는 아끼는 화초를 부러뜨렸습니다. 내 손가락을 핥다가 아프게 깨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도 밉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지 않고 귀엽기만 합니다. 구원을 설명할 때 우리는 구원받는 입장에서만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을 많이 줘도 저 학생들이 고민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강아지에 대해서는 해줄 수 있습니다. 먹여주고 사랑해 주면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신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이 지켜줄게 하시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목자는 이 양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말로 풀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목자가 양떼를 우리에 다 넣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늘 연약하여 사고를 치던 그 양이었습니다. 시간은 다섯 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목동은 양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양 한 마리 값어치가 얼마나 하겠습니까? 양을 찾으러 가다가 발을 다치거나 짐승이나 강도를 만난다면 더 큰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양을 찾으러 나선 것은, 자기 밖에 모르는 양이 어디선가 홀로 울고 있을 것이 너무 가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그 양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양이 힘들까봐 어깨 위에 얹어서 돌아왔습니다. 동네에 도착해서 외칩니다. “동네 사람들, 우리 집에 잔치가 있으니 모두 모여.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내가 너무 기쁘거든.” 예수님은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여러분 중 예수 안 믿어도 되는데 믿게 된 사람은 없고 사연 없이 기독교인이 된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 살 수 있는 한 끝까지 버텼고 도저히 혼자 살 수가 없어 어느 순간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희망이 없어서 예수를 믿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줄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참 사람의 모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주셨는데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를 위해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이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정말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그리고 희망 없는 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꿈들을 내려놓고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내 인생의 모든 슬픔이 내가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합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죄 없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희생에 대하여 감격을 느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이런 복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시인은 이 복음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기뻐했지만 우리는 그 복음이 성취된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의 은혜에서 발견하며 찬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했고 만나지도 못했던 시인이 약 3천 년 전에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렇게 감격하며 그 분을 자신의 목자라고 불렀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 분을 사랑하고 의지해야 될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여러분의 인생이 꼬이고 폭풍과 같은 환난을 만나서 어둠 속에 있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으면 여러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에게 나쁜 일을 행할 수 없는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실 때에 말씀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서 모든 신앙의 힘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폭풍과 시련도 그 말씀의 힘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집 나간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마음으로 지금도 여러분들을 찾고 계시니 다시 주님의 품으로 안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에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른 사람은 이 말을 할 수 있어도 다윗은 이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유명한 군인, 정치가, 어마어마한 부를 누린 사람, 영광의 나라를 건설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겉모습입니다. 다윗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어머니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다윗의 아버지 이야기는 여러 군데 나옵니다. 불행하게도 다윗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새의 집에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큰아들부터 나왔는데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좋았습니다.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하나님이 그 아이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아들을 다 데리고 왔는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새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이 아들들이 모두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 다윗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형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형들은 다윗을 무시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깊은 신앙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다윗이 법궤가 들어올 때 춤을 추며 기뻐하였지만 아내는 채신없이 까부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그 여자는 떠나갔습니다. 다윗은 외로웠기 때문에 자식들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강간범이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자식이 많았지만 아버지의 신앙을 닮은 자식은 없었습니다. 그 자식들은 많은 아픔을 아버지에게 주었고 그 중의 한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겠다고 왕년의 동지들과 작당을 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버선발로 도망을 가야 했고 모든 반란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아들의 죽음 소식과 함께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그렇게 외로운 인생을 살다가 한 눈에 반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 여자를 사랑한 기쁨은 잠깐이었고 가혹하리만큼 긴 세월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 지냈고 마지막에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나요? 그런데 왜 이렇게 고백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많은 슬픔이 다윗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온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정신병으로 죽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모든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이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의 세월과 뜨거운 눈물이 흐르던 고난의 시간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은 황금이나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어린 양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약점까지 알고 인도하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 때문에 길을 잃고 가시넝쿨 속에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시련과 환난이 시인의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 때마다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이 시인을 어루만졌습니다. 때로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를 때렸습니다. 눈을 뜰 수 없는 시련과 고난, 수치와 부끄러움이 시인을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의로운 은혜의 손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회초리로 때려 피가 나도록 고통을 주셨지만 시인이 미워서 복수하신 것이 아니었고 인격적으로 당신에게 승복하고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소서
그렇게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폭풍을 지나고 흑암을 통과하고 원수들이 이빨을 갈 때에도,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보고 고통을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하십시오. 내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주님의 사랑은 항상 그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는 나오지만 마치 같이 살기 싫은 부부가 아이들 때문에 억지로 사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 찢어주어 목마른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나눠주고 굶주린 우리에게 당신의 살점을 물려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