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 세 번째 지평 1
녹취자: 오희열
“부활, 그 세 번째 지평”이라고 제목을 붙이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온 사람들에게 불리할까봐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 보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부활의 지평,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 다음에 청교도의 경건의 핵심, 그리고 결론까지 되어 있습니다.
I. 들어가는 말
들어가는 말, 부활이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그 이후에 따라온 어떤 신학적인 결과들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십자가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십자가는 십자가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따라오게 하고 싶으셨던,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이 구원받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따라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어떤 결과를 위한 도입니다. 그것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 사함을 가져다주지만 우리에게 영생을 도입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도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영생이 무엇인지를 계속 이야기 하면 밤을 새워도 다 못합니다. 오늘 오신 분들 중에서 산상 세미나에 처음 오신 분 손 들어보십시오.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꽤 많이 계십니다. 그럼 이분들을 위해서 조금만,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이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로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럼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의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합니다. 그리고 육체는 이렇게 금방 소멸하여 죽고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 이렇게 분리된 것은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육체와 영혼 모두가 불멸하는 영원한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생명체가 계속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간다면 그런 끊임없는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자동차가 계속 가려면 엔진이 계속 움직여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사실은 끊어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서 끊어진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영원한 생명이 끊어졌지만 하나님이 이 영원한 생명과 완전히 상관없는 인간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완전히 짐승처럼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단번에 소멸되어 버리거나 멸절되어 버리거나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느 정도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는 양심이나 도덕에 대한 관념, 타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엄위를 느끼는 것, 이런 것들에 대한 소위 “sensus divinitatus”라고 하는 “신성에 대한 인식”을 살아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남겨두신 은총입니다. 그런 생명입니다. 만약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육체와 영혼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충만한 기쁨과 교제의 삶을 누리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되도록 무엇인가 끊임없이,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혼과 육체에 그 무엇을 공급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바로 그런 생명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두 가지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열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그 실재적인 생명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육체는 소멸될지라도 우리의 영혼과 정신 안에 부어지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으로, 원래 인간으로서 지음 받은 그 삶을 영위해 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도 얼른 죽으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 바로 그 일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 충만한 생명을 지금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 그 세 번째 지평입니다. 부활이 세 번째 지평이라는 뜻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그 부활에는 세 가지의 지평이 있는데 그 세 지평 중에서 세 번째 지평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자는 뜻입니다. 그럼 부활의 지평들을 보겠습니다.
II. 부활의 지평들
A. 첫 번째 지평 : 역사적 부활
첫 번째 부활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마귀는 깜짝 놀라고 천사고 있고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사실 굉장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Historical Resurrection”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불트만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러한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과학적인 상식과 맞지 않는 모든 기적적인 사건들을 신화라고 보았습니다. 신화가 무엇입니까? 신화는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그 신화를 통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종교적인 메시지를 그 속에 집어넣은 것을 우리가 신화라고 합니다. 신화는 하나의 형식이고, 그 형식을 빌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신화의 껍데기를 걷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걷어내고 나면 그 안에 원래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그 무엇이 그 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부활하셨다는 사건은 역사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서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에 성도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희망을, 종교적인 열심으로 신약성경에 담아 놓은 것을 사람들이 그 껍데기를 제거하지 않고 어리석게 통째로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믿는 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거대한 허구 위에 서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싹 걷어내야 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비신화화 작업” 이라고 합니다. 신화를 걷어내면 그 안에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드는 예가 벳세다 광야에서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덩이의 보리떡으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나는데 실제로 어린아이들과 여인들, 노인들까지 다 합하면 한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예수님이 기도 한 번 했더니 그게 화수분처럼 계속해서 솟아나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하나의 껍질이고 진짜 그것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너무 감동 받아서 내어 놓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 작은 아이가 저렇게 내 놓는데 우리도 다 같이 나눠먹자!”하고 도시락을 다 내놓았더니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이 싸 와서 다 먹고도 여러 광주리가 남은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을 연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고 하도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얘기가 되느냐 하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 신화 속에서 부활하신 사건 때문에 역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똑같은 논리로, 많은 구약학자들이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신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화 속에서 죄 지은 것 때문에 역사 속에서 예수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신화 속에서 지은 사실 있지도 않은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부활의 의미도, 역사적 사건이라는 부활의 성격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사망 안에서 있던 인류가 다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B. 두 번째 지평 : 종말적 부활
이 사진은 지금 강의와 맞지 않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구스타프 도레의 판화로 부활에 관한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이게 부활에 관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보십시오. 원래 그림은 예수님이 무덤 위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서 계시고 하늘에 구름이 떠 있으면서 수많은 성도들이 있고 예루살렘이 있는 것인데 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라고 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걸 구스타프 도레가 보면 짜증나겠지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지평은 종말에 있을 인간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종말적 부활, “Eschatological Resurrection”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신자의 몸의 우주적 부활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에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포함됩니다. 신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겠습니까?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에 적합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금 죽으면 몸은 여기에 남겨놓고 천국으로 갑니다. 그게 구속의 완성이 아닙니다. 죽는 그 순간 하나님이 성화를 완성시켜서 죄 없는 순전한 영혼이 되어서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몸은 여기에 있어서 영혼 뿐 입니다. 종말의 날에 이 몸을 모두 부활 시켜서 천국에 있는 영혼과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시 불멸할 몸을 입게 됩니다. 그런 몸으로 이루어갈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봅니다. 그렇게 부활하는 부활의 몸을 입고 이루어 가는 인류는 이 지상의 똑같은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여기에서 죄의 영향력, 효과가 모두 사라지고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문명의 사회를 건설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생활은 현저히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있긴 있지만 매일매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는 이런 육체가 아니라 불멸의 몸을 덧입은 육체이고 죄가 없기 때문에 이 육체가 죄에 굴복하면서 죄를 짓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초월적으로 임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거기는 오늘날 우리고 보는 이런 문명과는 다른 초월적인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며 서로 논쟁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확실한 사실 하나는 종말에 모든 신자들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의 상태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장소적으로 하늘에 있다고 해서 하늘이 아니라 지금과 비교할 때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몸을 입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복락을 누리기에 적합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불신자의 경우에도 부활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몸을 가지고 심판을 받는다고 합시다. 활활 타는 불 속에 집어넣으면 한 30분이면 다 타고 없어져서 멸절되어 버릴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면 지옥은 어때야 할지 생각들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이런 것들이 영원히 천국의 복락과 대조되어서 점점 천국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기쁨과 영생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지옥에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비극과 슬픔,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증진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에드워즈 연구가들도 굉장히 당혹해 하는 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에드워즈 연구 학자인 조지 마스던은 그 문제를 자기도 굉장히 힘들어 했다고 고백을 하면서 자기가 에드워즈를 연구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자기도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대화 속에서 들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백하게 그것이 왜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일정기간동안 그런 형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그 모든 것들은 다시 선한 것을 환원이 되고 그 다음에 마귀까지도 다 원래의 선함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긍정적인 지옥관을 펼쳤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런 얘기를 계속 많이 하며 불신자들이 상당히 희망을 가질지 모르지만 그것이 이번 강의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 견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 하나는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무엇인가는 변형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한 개인 한 개인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두 번째 지평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들어본 것입니다.
C. 세 번째 지평 : 현재적 부활
그러면 이제 세 번째 지평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세 번째 지평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첫 번째 지평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두 번째 지평이 우주적인 부활이라면, 여기 중간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누군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미래에 이루어질 이런 영원한 나라의 부활의 소망들이 침투해서 들어와서 누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이렇게 온 세상을 뒤덮는 방식을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결과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고 부활을 통해 도입한 그 영원한 생명을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세 번째로 이야기하는 부활의 지평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세 번째 지평입니다.
이 세 번째, Third Horizon 이라는 이름은 제가 어디서 따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붙인 것입니다. 왜 웃습니까? 아니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름을 새롭게 붙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고를 펼쳐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앱스토어에 들어가서 “김남준”을 검색하면 어플리케이션이 나옵니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신학용어 사전이 나옵니다. 거기에 “부활”을 검색하면 부활이 무엇인지 쫙 나오는데 어떤 것들은 전통적인 신학을 그대로 해 놓은 것들도 있지만 그러나 상당히 많은 부분들은 내가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정리를 한 것입니다. 요즘은 제가 뜸하지만 한 7,8년 전에는 새로운 용어를 끊임없이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지”나 “현견지” 같은 것 말입니다. 라틴어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아직까지도 사용되지 않는 용어들을 제가 한글로 만들어서 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원애”라든지, 원래에 있는 사랑, 원애의 개념이나 “애성”, “지성”, “의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하면 설교 듣기 편합니다. 어플리케이션이 무료이니까 다운을 받으십시오.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읽다가 툭 치면 그게 딱 나옵니다. 들어가면 제 책 몇 십 권에 대해서 e북으로 된 것의 일부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고 구입해서 끌어넣으면 자기가 속에서 다 분류해서 자동으로 만들어집니다. 내가 만들어 달라고 강요한 것은 아닌데 기꺼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최고의 기독교 작가 앱 입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활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지평이 있는데, 첫 번째 지평이 역사적 부활, 두 번째 지평이 종말에 온 인류가 부활해서 하나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부활이라면 사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고 소망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힘입어서 오늘 우리들이 계속해서 그런 영원한 생명의 힘을 입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세 번째 지평으로서의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나는 죽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만약 예수님 이렇게 계시다면 예수님이 당신 품 안에, 이렇게 형벌 받고 죽어야 할 수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리고 이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그렇게 끔찍한 형벌을 받으며 죽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끌어안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제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그 저주가 끝난 후에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 각자가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형벌을 받을 때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리고 이 옛 사람과 구별되는 새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옛날에는 그냥 죽은 사람으로서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보니까 아버지는 사업에 망하고 그 다음에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많고, 엄마를 끊임없이 폭행하고 엄마는 그런 가운데 상처를 받고 가정을 뛰쳐나가고 자식들도 고통을 받고 사람들이 다 그 모양입니다. 그 속에 살아있는데 이런 가정에서 이런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얼른 시집이나 가면 이 집안과 단절되어서 행복하겠거니 했는데 결혼해서 그 집에 갔더니 비슷한 집안입니다. 더 강력합니다. 자기 집은 그래도 핏줄이니까 좀 봐주는 게 있는데 거기는 더 망가진 집안입니다. 남편도 그런 인간이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할 것 없이 황당한 집안입니다. 회사에 가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좋은 데에 태어나는데, 어차피 그것은 부러워 할 수도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입니까? 마지막에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는 설교가 무엇입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은 우리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누가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내 맘대로 안 되는 일도 없습니다.”한다면 그는 몸은 땅에 속했지만 그 사람의 정신과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게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했고 그분의 뜻을 다 받아들였고 내 뜻은 없기 때문에 내 맘대로 안 된다는 일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다면 최고의 성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강력하게 원하는 그 무엇이 있고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우리는 매일매일 만납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생명”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새 사람”, 구원과 함께 살리심을 받은 새 사람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명 덩어리”입니다. “생명 덩어리” 입니다. 그게 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옛 사람에게 끌려 다니면서 죄 짓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파괴적인 삶을 살다가 생명 덩어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것이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연애 해보셨습니까? 어떤 청년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연애만 하다가 왔어도 목사님 설교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연애도 못해봤으니 뭘 알겠습니까? 연애를 못 해봤으니 순수합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인간으로 말하자면 애벌레 상태인 것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된장인지 변인지 구별도 못합니다. 온 인류가 태초부터 역사 이래 지금까지 아무리 문학 작품으로 소개해도 진력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마 다른 주제를 그렇게 써 먹었다면 식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천국에서 누구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을 사랑해 준 사람들 이외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에 열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 안에서 생명처럼 작용하면서 인생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을 때는 새들이 우는 것 같았는데 사랑의 고백을 받은 그 다음날 아침에는 새들이 노래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의 고백을 그날 밤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도 의미가 있어 보이고 예뻐 보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달동네의 계단을 타박타박 올라가면서도 근원을 알 수 없는 인생의 희망이 솟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는 것입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사생명이 아니라 진짜 생명입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여러분이 열광을 안 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생명이 없고 유사생명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아까는 그렇게 박수를 치면서 그러더니 말입니다. 회개하십시오.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현재적 부활입니다. 시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첫 번째 부활은 과거적 부활, 과거의 그리스도의 부활, 두 번째 지평은 미래의 우주적 부활, 세 번째 지평은 현재적인 영적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아까 이야기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순종하고 기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새로 살아난 그 사람이 부활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새 사람이 이렇게 살아납니다. 그러면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본성이 자꾸 침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젊었을 때는 진짜 건강했는데, 제가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제 체력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예민해서 미국에서 열네 시간씩 비행기를 타도 10분을 못 잤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새벽 6시에 딱 내려서 곧바로 8시 예배의 강단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밤까지 설교하고 그 다음날 집회가고 그 다음날 글 쓰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힘들어집니다. 죽음의 기운이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죽음의 기운이 얼굴부터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인류종말까지 영구히 번창할 사업이 화장품 사업입니다. 10년 전에 화장품 회사의 주식을 사 두었던 사람은 10년 전에 이동통신의 주식을 산 사람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스며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부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에 삼키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요새는 옛날 설교를 잘 듣지 않습니다. 진짜 게을러졌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열심히 들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 강의와 관련해서 추천하는 시리즈가 “은혜와 부패”입니다. 은혜가 부패한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이 은혜에서 떠나면서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던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부패하는지를 보여주는 시리즈입니다. 교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던 시리즈 중에 하나입니다. 꼭 들어보십시오. 그게 바로 새 사람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새 사람의 부활이라는 것이 말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인 부활은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고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이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종말론적인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고 이것은 모든 성도들과 불신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류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에 비해서 현재적인 부활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효과가 이미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거듭나서 새로운 본성을 입게 된 그 순간부터 그것은 죄에 의해서 침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끊임없이 새로운 본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죽었던 옛 사람을 계속 살려내면서 다시 살아난 새 사람을 공격해서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완전히 빼앗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 생명을 계속 허물어뜨려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새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표정을 지으십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못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신자가 긴장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영적인 긴장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부활을 놓고 본다면 신자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졌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희랍어로 ‘노모스’(νομος)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로 이야기 하는데, 일차적 의미는 “공표된 법”입니다. 자기 바깥에서 공표된 법입니다. 십계명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발표됩니다. 국가가 발표를 합니다. “오늘부터 여자도 군대 가야한다.”, 아니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법이 발표가 됩니다. 이것이 법의 첫 번째 용례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습성의 힘입니다. 성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무슨 뜻입니까? 나라에서 법을 공표했습니까? “참새는 방앗간을 절대로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모든 참새는 사형에 처한다.” 이런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참새 안에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서 참새의 성향 상 도저히 그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요새 카지노 때문에 굉장히 시끄럽지 않습니까? 제일 좋은 것은 그런 곳을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들어가는 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 들어가서 재미를 붙이면 성향이 생겨나고 그러면 그것을 끊기가 어려운데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중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게 바로 법입니다. 인간에게는 원래 이런 강력한 법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법입니까? 죄의 법이고 사망의 법입니다. 죄를 지향하고 결국 인간을 사망 아래에서 살게 만드는 그런 법이 강한 힘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길러보면, 존 오웬 목사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데 육아를 해 보면 안다고 합니다. 손녀를 키우는데 너무 귀엽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26개월 되면서 서서히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갓난 아이 때는 누워서 오줌을 싸든지 배고프든지 몸에 병이 있든지 웁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자기가 원하는 질서가 있는데 그대로 되지 않으면 막 발을 구르면서 소리를 지르며 웁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우는 광경을 지켜보는 너희 모두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해서 너희 모두는 내가 원하는 질서대로 환경을 만들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권력이 없으니까 뒤로 나자빠지지 권력이 있다면 명령하거나 위협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어떤 때에는 성격이 아주 강한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입술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쓰러집니다. 여자들 중에서 성격이 대단한 사람은 그러다가 아예 졸도를 합니다. 죽으면 다행인데 다시 깨어납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한 남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게 “법”입니다.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법을 인간이 끊어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도생활을 한다든지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들은 이 법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질이 자극받지 않으면 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끊어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여건이 주어지면 다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에 의해서 무너뜨릴 수 없는 법인데 하나님이 한 번에 무너뜨려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과 회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영혼과 정신의 세계에서는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법이 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주어졌는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해서 자살하기도 하고 기쁨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불신자보다 더 우울한 삶을 사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자 안에 역사하는 생명의 법은 조건적입니다. 그 생명의 법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법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법이 법답게 강하게 역사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과 함께 심겨진 생명과 성령의 법이 조화하는 풍취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죽이는 생활”, 그리고 “은혜를 받고 계속 살아나는 생활”, “순종”, “믿음”, 이런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누구든지 마음 안에 거듭난 선한 본성과 거듭나기 전의 악한 본성과의 갈등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신자의 성화입니다.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입니다. “sanctification” 그래서 신자 안에도 여전히 옛 사람의 본성이 약간 남아있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제거하면서 순결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 성령님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성화라는 것은 죄에 의해 오염된 신자의 전 본성, 신자 안에도 죄가 남아있는데 그 죄가 온 영혼을 뒤덮었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크기가 얼마이든지간에 그게 인간의 정신과 영혼 육체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미쳐서 그 어느 것도 그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 본성을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순결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성화”, “sanctificat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부분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선 단어입니다. 그게 낯선 상태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생명의 삶은 그만큼 멀리 있는 것입니다.
성화의 역사는 신자 안에서 신자와 함께 이루어지지, 신자 없이 신자를 거슬러서, 영어로 말하자면 'in, with'로 이루어지지, 'without, against'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어도,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거기에는 항상 자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것은 주님의 은혜에 자신이 참여한 것이고 악한 것은 주님의 은혜가 결핍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오르는 두 가지가 “죄 죽임”, “은혜 살림” 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죄는, 잔디밭이 있는데 거기에 잡초가 자라나게 하려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잡초들이 날아와서 잡풀들이 부성하게 자랍니다. 그리고 잔디의 양분과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죄가 똑같습니다. 끊임없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말씀의 은혜를 받고 특히 간절한 기도, 그리고 은혜로운 교제, 이런 것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죽이는 일, 죄가 죽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 죽임, “mortification of sin” 입니다. “mortify”는 “put something to death”, “무엇인가를 죽음에 두다, 죽게 하다”입니다. 생명을 끝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데, 은혜를 살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계속 간직해서 잘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불씨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을 차가운 얼음 밭 위에 휙 던져버린다면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꺼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잘 타고 있는 재 속에 묻어두면 그 다음날 꺼내도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살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죄를 죽인 만큼 은혜가 살고, 은혜가 죽은 만큼 죄는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죄 죽임과 은혜살림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mortification'이라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의 옛날 시리즈에 보면 “죄 죽임의 교리”라는 서른 몇 개로 된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것을 완독하시든지, 더 좋은 것은 열여덟 개짜리의 “죄와 은혜의 지배”를 듣고 책을 한 권 읽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루는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지 생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설교 잘 안 듣습니다. 주일에도 건성으로 듣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그래도 좀 나을 것입니다. 옛날의 열린 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계획을 세워놓고 계속 책을 읽고 테이프를 들으면서 독파를 ㅎ는 것입니다. 공부하듯이 말입니다. 공부하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비율이 엄청나게 줄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언제 하루에 한 90분에서 100분을 투자해서 그것을 듣고, 들은 다음에 책을 한 50페이지에서 70페이지를 읽을 용의가 있는 사람이 여기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2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사회가 빨리 변하니까 이제는 유튜브에 15분짜리를 올려놓아도 잘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3분에서 4분으로 요약을 해서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외국에 나오는 책들도 아주 웃깁니다. “40분에 독파하는 하이데거”, 하이데거를 어떻게 40분에 독파합니까? “니체, 40분 만에 읽다” 그것도 길어서 요새는 10분에 독파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작년인가 제작년에 히트 쳤던 책이 “넓·얕·지”, “넓고 얕은 지식”,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진짜 얇습니다. 어디 가서 대화를 하는데 딱 한 마디는 할 수 있지만 두 마디는 못합니다. 바닥이 다 탄로 납니다. 넓지도 않고 그냥 얇습니다.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그러다보니 온 몸으로 부딪혀서 피투성이가 되면서 겨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에 남는 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지만 가전제품을 사면 사람들이 설명서를 대부분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의 깊은 사람은 그 설명서를 꼼꼼히 읽습니다. 그러면 기계를 잘 고장 내지 않습니다. 요즘 기계 자체가 저절로 고장 나는 기계는 별로 없습니다. 조작을 잘못해서 고장이 납니다. 대형 사고를 냅니다. 온 몸을 부딪치면서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것을 서너 번하고 나면 30대에서 50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몇 번 더하면 병원 지하실에 흑백 사진으로 남는 것입니다. 영안실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솔직히 얘기해서 목회자로서 좌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 책을 읽으십시오.”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서점으로 몰려갔습니다. 지금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지금은 공과 책도 그냥 나눠주다 보니까 서점에 사람들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 자체를 읽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유튜브에 중요한 신학 시리즈가 3분, 4분으로 요약해서 핵심으로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올리나 두고 보십시오. 절대 안 올립니다.
왜 신자는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시 사는 일을 경험해야 하는가? 첫째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성과 작용, 그리고 중생의 본질과 신자의 소명입니다. 놀라운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죄는 은혜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도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고, 은혜도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계획을 가지고 여러분 속에 죄가 침투해 오는 것이고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이 예배에 왔는데 계속 졸고 은혜를 받지 못하다가 이 산상에 와서 한 번의 강의에 확 하고 가슴에 다가오면서 진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면서 은혜가 확 주어집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것은 여태까지 몇 달 동안 힘들었던 인생에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으시려고 하나님이 메시지를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발판 삼아서 여러분이 꿈도 꾸지 못했던 원대한 우주적인 계획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늘 쓰는 말입니다. 뭐라고 인간이 떠들고 변명을 하고 그래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신자 안에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옛 사람의 본성, 죄의 본성이 새 사람을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계획대로 못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자료들이 우리나라에서 우리교회처럼 많이 있는 교회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 같은 것, 그리고 “성화와 헌신”이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아마 2005년도 신년사경회 때의 시리즈일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엄청나게 은혜를 주신 시리즈이고 도서관에 가면 그 책도 있습니다. 지금 시중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책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한 열다섯 시간, 열 시간 정도만 투자를 해도 인생에 대한 생각이 바뀔 텐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내 소원은 평일에도 성도들이 도서관을 꽉 채우는 것입니다. 뭐 합니까?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빠도 아이들 유치원 보내놓고 학교 보내놓고 일부러 도서관에 나와서 앉아서 책을 읽고 아니면 집에서 보고, 그러면서 공부를 하고 탐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고 대처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는 중생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게 “새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 그게 원래 아담이 맨 처음 창조되었을 때 부여받은 그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새로운 본성은, 거듭난 본성, 중생한 본성입니다. 중생한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많이 느낄 것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이런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나를 구원해 주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내 안에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새로운 본성입니다. 완전히 죽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것을 좋아합니다.
중생한 신자를 겉사람, 속사람 이렇게 두 가지로 대조하는데, 이것이 영혼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것은 육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두 개가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겉사람이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의 행실”, 그 뿌리에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실을 통해서 이 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겉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이것을 추적해 내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이런 삶을 살게 만들었던 그 뭔가의 뿌리를 찾아내고 그 생명을 끊으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속사람, 새로운 본성의 사람이 확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부활의 세 번째 지평을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죄를 죽이는 실천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실재화”, 영어로 말하면 “actualization” 입니다. 실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실재화를 통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부분에도 나와 있고 “자기 깨어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이라는 챕터에서도 나오고, “죄와 은혜의 지배”에는 전면적으로 흩어져있고, 굉장히 많은 곳에서 이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한 1년 전인가 2년 전에 공부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 책이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그렇게 재밌는 책은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안에서 실재화 되는가 하는 묘사들을 여러분이 꼭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내용이 오늘 강의에서 너무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에 이것을 조금 확장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평안하게 이해하기 쉽도록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그것이 찬양을 통해서든, 성경, 경건서적을 통해서든, 혹은 다른 사람의 충고를 통해서든, 어떻든지 간에 말씀이 계기가 되어 나에게 깨달음이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많이 먹은 게 아닌데 그 먹은 것이 이 안에서 계속 그냥 그대로 동그랗게 뭉쳐서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 그런 체기를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없습니까? 저는 가끔 있습니다. 음식을 조금 먹었는데 전혀 소화가 되지 않고 그게 그대로 생으로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멘”이 아니라, 왜 아무데나 “아멘”을 합니까? “네”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네!) 얼마나 생기가 있습니까? 그런 것을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그냥 죄 가운데 있을 때는 모릅니다. 자기가 그냥 하나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통째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깨닫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내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게 옛 사람입니다. 자신과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입니다. “나”인데 너무 싫은 것입니다. 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엄연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간절한 기도와 은혜의 감각이 사라지면 얘도 없어집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아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얘가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나에게 타자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식으면 얘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내 속에 다 소화되어 용해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간절히 말씀을 깨닫고, 그래서 기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씀을 아무리 깨닫고 책장을 넘겨서 책을 읽고 정리가 되어도 마지막에 진짜로 죄를 이기고 변화된 삶을 사는 동력은 무릎을 꿇고 실제로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 했듯이 깊은 기도는 깊은 말씀에 사로잡힘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말씀을 그렇게 안 듣고 안 읽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가을부터는 뭔가 새로운 방법으로 여러분을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마음에 어떤 깨달음이 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어떤 인상들은 스쳐지나가지만 이게 푹 들어가서 확 자기의 심령을 파헤치는 경험이 없으니까 말씀의 강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자기가 말씀을 깨닫고, 그래서 먼저 지성적으로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단 한 사람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존경의 표입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을 듣는 시간에, 예배시간에 딴청을 부리고 산만하게 하는 사람은 신천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짜입니다.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깨달아지면 자신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그게 바로 자신의 옛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감격 속에서 그렇게 미워하며 자기가 버린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불신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뭐가 불신입니까?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만 믿고 여태까지 따라왔는데 마지막에 네가 나한테 시킨 일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것이구나!’ 하며 불신이 생겨납니다. 그다음에는 미움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증오하는 마음이 생겨나면서 실제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죽지 않는 나의 옛 성품 때문에, 내 옛 자아가 행했던 이러이러한 나의 잘못 때문에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천 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절절한 고통이, 그게 나의 마음속에까지 파고 들어와서 그 2천 년의 간격을 뛰어 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아픔이 나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불순종하기를 좋아하고 죄를 사랑하는 내가, 그 통절하는 회개 속에서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살아가고자하는 자신의 욕망이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실재화” 입니다. “actualization”, “실재화”라는 것은, 그것이 실재화 되기 전까지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입니다. Actual,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 안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고통이 자신에게서 실재화 될 때, 그때 죽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에 대한, 죄는 영어로 “enmity”, “적의” 입니다. “적의”가 무엇입니까? “적으로 간주하고 그를 파멸하고 죽이려고 하는 의지” 입니다.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성향입니다. 마음속에 흐르는 성향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반감과 대적으로 나타납니다. 반감을 품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죄의 정체입니다. 이게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는 만큼, 장사될 필요 없이, 즉시 죽는 것만큼 부활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큼 영적인 새 사람의 다시 소생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영적인 소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첫 번째 부활의 지평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평은 온 인류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지평은 오늘 일어날 수 도 있고 내일 일어날 수도 있고, 매일매일 일어날 수도 있고 별로 안 일어날 수도 있고, 이 사람 안에 일어날 수 도 있고 저 사람 안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말입니다. 이게 바로 현재적 지평입니다.
여러분, 이 한 마디를 명심하십시오. 환경을 가지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진을 빼면서 인생을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되지도 않는 허황된 꿈을 꾸지 말고, 원래 인생은 안 되는 것이 참 많다고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어학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불규칙 동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영어를 보면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말과 영어 사이에 어떤 규칙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어 하나하나를 다 외워야 한다는 것이 황당하게 느껴졌습니다. 동사가 현재, 과거, 과거분사로 바뀌는데 예외가 나옵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그런데 어학을 잘 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접할 때 생기를 느낍니다. ‘이야, 이게 진짜 재미있구나!’, 어학을 해야겠다는 의욕이 있는 것입니다. 너무 재밌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헛갈려하면서 사기가 떨어질 거라는 것이 얼마나 재밌습니까? 나는 하는 것입니다. 더 어려워질수록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드디어 경쟁자들이 거의 포기했겠구나!’ 얼마나 좋습니까?
신앙도 똑같습니다. 근본적으로 문제는 하나님을 리모컨처럼 움직여서 자기 상황을 바꾸는 것이 몇 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선 리모컨입니까? 솔직히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의미와 생명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이런 놀라운 의미를 찾아갈 수 있다, 그 무엇을 발견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생명은 잃어버린 유산입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사생명을 찾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불어넣으면 희망이 막 생깁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결혼하면 뭔가 변할 것이라고 새로운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속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생명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상황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하는 나도 사람인데 좀 어려운 상황에 있고, 힘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도 나 좋다는 사람에게 에워 쌓여서 살고 싶지 싫다는 사람에게 에워 쌓여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누가 원하겠습니까? 다 자기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미움 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행복과 슬픔, 기쁨과 희열 이런 것들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좌우되도록 우리를 방치하는 것, 그것은 너무 비굴한 삶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생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이는 감히 그렇게 자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생명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설명을 잘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왜 그렇게 기뻤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기뻤던 이유는 바로 이전에 내게 없었던 생명이 주어진 것이구나!’ 이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어떻게 생기고 유지되고 소멸하고 변하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황소 뒷걸음에 개구리가 밟히듯이 그냥 그렇게 우연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에서 주체가 될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탄탄한 지식의 기반,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자기의 지성 안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클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 분량이 얼마가 되든지 그것을 그 안에서 강력하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III. 청교도 영성의 핵심
리차드 백스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이 주제에 어마어마한 관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나를 강의하도록 부른 사람들이 키더민스터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의상 이 사람을 넣어 준 것입니다. 그쪽 출신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사람의 책을 제가 한 때 열심히 읽었는데 이 사람은 굉장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우스주의자 입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의 작품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회심』, 『천국에의 초대』, 『회개의 경종』, 『성도의 영원한 안식』, 이런 책들은 불후의 명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진짜 고난으로, 존 오웬과는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대조적인 사람입니다. 존 오웬과는 대조적으로 진짜 가시밭길을 걸으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A.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사람과 함께 같은 시대에 존 오웬이 그리스도의 연합의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독특하게 연합의 교리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union” 입니다. 혹은 “unity”라고 합니다. 이 연합을 이야기하는데, “federalism”, 언약교리에 의해서 신자와 그리스도가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 오웬 뿐만 아니라 모든 청교도들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그 뿌리는 이미 그 이전에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발견되고 거슬러 올라가면 교부들과 사도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연합을 이야기 합니다. 두 가지 연합을 이야기하는 하나는 “union in principle”,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저는 번역을 하고, 그 다음에 “actual union”,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분이 이야기하는 연합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있고 이 그리스도를 신자가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두 번째는 성화와 관련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가 이렇게 있는데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요소와 끊임없이 싸우고 이것을 이겨냅니다.
그 동기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지 않았을 때와 다른 연합이 생깁니다. 이것을 실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 그의 마음과 삶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이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의 연합을 느끼는 정도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만큼 사랑하면 대가로 예수님이 나를 그만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경험되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실제적인 연합,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 그것은 바로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인 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만큼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피터 마터 베르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라는, 거의 정확하게 칼빈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의 인물이고 칼빈과 함께 신학적인 깊이와 개혁주의적인 투철함에 있어서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고 이탈리아 태생의 사람이었습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박해를 받아서 이태리에서 탈출합니다. 신학자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칼빈의 존경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여섯 번이나 제네바의 목회자로, 자신의 후임을 부릅니다. 그런데 오지 못합니다. 이 사람의 책을 칼빈이 주의 깊게 읽었고 어떤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 사람의 의견과 자문을 구할 정도로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책을 제가 좀 읽었는데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청난 신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개혁자들과 17세기 정통주의자들의 그리스도와 연합에 관한 다수설, 보편적인 견해였습니다.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다르긴 합니다. 이렇게 나누어서 많은 신학자들이 여기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이런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난 여름 수련회 때에 세 번에 걸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참석하지 않으셨으면 지금이라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들어보십시오.
첫 번째는 “conjunction of nature”, “conjunction” 은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nature”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성적 연합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은 “conjunction of a hidden mystery”, “감추어진 신비적인 연합”, 그리고 “conjunction of similarity”, “유사성의 연합”입니다. 이 “유사성의 연합”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영적인 연합”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맞다는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연합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은 칭의와 관련된 연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성화와 관련된 연합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육신적 연합”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신학적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데 “왜 인간은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확장하십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이교도를 불문하고 그 모든 사람을 기본적으로 한 인간으로서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 보편애”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까? 첫 번째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이런 명제에 대해서 여러분이 동의하시면 “네” 라고 대답하십시오.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까?” (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내 대답이지 여러분의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은 존엄하다, 우리는 그것을 다 증명하지 못해도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직감적이라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를 사랑해야한다는 인류애의 의무, 모든 사람이 존엄한가? Yes! 이유가 무엇입니까?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게 우리와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기초를 “성육신적 연합”이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성육신적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양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인격은 몇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인성을 가졌으니 인간의 인격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의 인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다중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격은 신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신성에는 인간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신성을 닮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이 있습니다. 그 인성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창조될 때 그 모든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창조 이후로 모든 인간들이 인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인성과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고 영혼이 하늘나라에 잠시 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을 때, 그 인성을 부여받으셨을 때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과 연합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실 때 우리와 한 인간의 본성을 공유하셨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이 우리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의 토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왜 존엄한지도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신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시고 보편적인 인성과 연합을 이루셨기 때문에, 초대교회 교부들이 우리 인간의 이상은 참 신이 되는 것이라고 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진짜 신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그 참된 인성으로 돌아가는 자체가 “신화(神化)”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간의 본성에 참여했으므로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는 논리적인 근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그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논리적으로 성경에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와 제자들과 하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교리는 너무 명백한 것이 이 교리가 성경에 “성육신적 연합”이라고 “삼위일체”처럼 낱말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신이 성경 전체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백할 정도로 성경에 풍부하게 배어 있는 그림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궁금했던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였습니다. 간접적인 감화의 영향 말고 “어떤 연결을 이루고 있기에 우리가 믿을 때에 그의 죽으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가?” 였습니다. 이런 성육신적 연합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구원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할 때는 강조점이 언제나 이 위보다 아래의 두 개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의롭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서,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속죄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에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의 의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주님이 그분의 구속의 공로에 의존해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롭지 않은데도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는 그것이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될 것으로 예정되었지만 실제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는 예수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혜택을 입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한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고 양자 삼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의 영혼이 이미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접붙여지는 그 순간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핏줄이 다시 이어져서 피가 흐르고 신경이 이어지면서 원래 나는 예수의 몸이 아니었는데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면서 예수의 몸인 교회 전체가 느끼는 고통과 기쁨, 영원한 생명과 사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아들에게, 아들이 그의 신부인 교회에게, 우리는 그의 신부인 교회의 몸의 일부에 접붙여짐으로서 우리 모두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소용돌이가 바로 충만한 생명 입니다. 생명의 힘이 우리 안에 넘치니까 말도 안 되는 인생의 비극적인 상황이 생겼는데도 그 안에서 가슴 벅차는 감격을 경험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 의미를 발견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특별히 자식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 입니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유혹은 유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과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어떤 의미에서 유사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진짜 생명입니다. 그것이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같은 시리즈를 숙독을 해야 합니다. 정말 여러분 너무 안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정 시간을 독서와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밥 먹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는 것 입니다. 영원히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이것을 “칭의의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hidden mystery”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영혼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고 그 교회는 예수께 접붙여져서 그런 인성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hidden myster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화의 연합”입니다. “성화의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similarity”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데 똑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으로서 죄와의 갈등을 끝냈기 때문에 예수께 접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 접붙여졌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같은 때는 특히 사람들이 교회의 결점이나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그래서 그 교회를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 시키고, 심지어는 기독교를 버리는 이유로 삼기도 하는데 그렇게 교회를 버리는 것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순결한 교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중에 아무도 그런 교회를 다닐 자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가는 순간 그 사람 때문에 그 교회가 더러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교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교회가 참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런 마음은 우리가 많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교회 때문에 예수님 믿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면 그건 바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면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 그런 불완전함을 마치 자기가 불완전한 것처럼 느끼면서 아파하고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고난을 짊어지며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치면서 오히려 자기 갱신과 변화의 계기로 삼으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들이 죄와 싸우면서 주님을 닮아가고 거룩해져 가는데 그러면 “similarity” 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similarity to christ”, 그리스도와 닮은 그 무엇,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주님을 사랑하려고 했을 뿐인데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자신을 보는 사람들마다 예수를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similarity to christ”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신자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 사람이 예수를 많이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아우라 입니다. 정확하게 2년 전에 여기서 수련회를 할 때 그리스도인의 아우라, 존재의 울림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것이 아우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적인 연합은 칭의와 관련이 되고 영적인 연합은 성화와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는 뭐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초등학교 다니고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고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출렁거리는 물의 표면입니다. 이면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닮아가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닮지 못하는 고통”, 그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 자기와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는 경험, 그 속에서 매일매일 경험되는 그 충만한 생명, 그것이 없을 때는 지던 삶을 이기며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인 연합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신학적인 것들을 공부하면서 이것들은 굉장히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경험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진짜 온 인류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품고 살아가야 할 이유, 그리고 정말 복음서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의 행동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전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분리주의 정신 속에서 살아갑니다. “너 기독교 아니지?” 하고 쫙 줄을 긋습니다. “너 개신교 아니지?” 하고 줄을 긋고, “너 장로교 아니지?” 하고 줄을 긋고, “장로교 중에서도 엄격한 교리를 따르고 있지 않지?” 하며 계속 갈라냅니다. 그 얘기는 진리에 관한 신학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것은 인정하되 그리스도의 인성에 함께 참여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러한 성육신적 연합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던 전망은 인류 전체를 바라보는,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으로서의 기독교의 삶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B. 예수 죽음에 참여함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한 10분이나 20분 동안 후루룩 해서 끝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허무합니다. 그래서 오늘 산상세미나 온 이래로 이렇게 일찍 끝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는 후편으로 남겨두고 여기에서 강의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태어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성육신의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그는 존엄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아야 하고 그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효과가 바로 그 성육신적 연합 안에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원리적인 연합을 이루었고 이 원리적인 연합은 불변하는 것이니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끊임없는 닮아가는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위하거나 교회만을 위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혹은 순종하는 삶을 반복하면서 매일매일 끊임없이 경험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우리는 피할 수 없이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 혹은 그리스도와의 유사성의 연합을 이루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매일매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유는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니고 또 교회의 어떤 사람 때문도 아닌, 나는 오직 그 예수께 직접 부름 받은 성도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것도 내가 그분께 받은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따라 사는 것 이외에 제2, 제3의 선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이고 이유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장 많이 회개해야 할 것은 예수만을 사랑하지 않은 것, 그리고 우리가 가장 후회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신을 죽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더 치열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