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6 토요교리반
교리반 6주차
녹취자: 최원정
12과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
1. 죄의 기원
성경은 최초의 죄가 낙원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 왔다고 한다. 이 최초의 죄는 뱀의 형태로 가장한 사단의 시험에 의해 발생한 것인데 사단은 마음속에 의혹과 불신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우리는 뱀을 유난히 미워하는데 그럴 필요 없다. 뱀은 죄가 들어오는 하나의 통로로 사용된 도구였을 뿐이지 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이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죄를 미워해야지 죄를 안 미워하고 뱀을 미워하면 안되겠죠. 부당하게 미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절대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면 선악과를 안 따먹고 뱀을 잠아 먹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력에 좋다고 하니까.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께서 금하셨던 것이기에 죄 된 것이다. 실과를 두고 먹은 것이 무슨 효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과일이었다. 남자들의 목에 튀어나온 부분을 adam's apple이라 하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기를 apple in eyes 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의미가 하나님이 금하셨기 때문에 먹었을 때 죄가 된 것이다. 실과를 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선악과를 먹으면 ① 지적인 면에서는 불신앙과 자만심, 자만심인 이유는 자만심은 주님은 먹으면 안되지만 내가 생각해기에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죄의 뿌리는 사랑이고 그 죄를 행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자만심(교만)이라고 본다. ② 의지면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③ 감정면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으려는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결과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음의 지배 아래 있게 되고 말았다.
2. 죄의 본질
(1) 죄는 특별 악이다.
특별 악이라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해서 징벌 받을 책임 있는 어떤 일을 하게 하는 뿌리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언어에 혼동이 온 것이 죄와 악을 자꾸 혼동을 한다. 죄를 가리키는 말은 영어로 sin, purnishment, crime 죄와 벌의 영어 번역. 이 두 개의 차이는 sin은 말하자면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어떤 불법적인 행동을 하게 한 내적인 동기로서의 죄에요. 이것은 굉장히 포괄적이에요. 근데 이것은 어떤 국가에 의해서 혹은 성경에 의해서 제시된 규칙을 행동으로 위반하는 것이에요. 포괄적이라기 보다 특별하거나 개별적인 것이다. sin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열매를 맺어서 열매를 맺은 것이 evil이다. crime은 교통을 위반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하나하나가 crime이고, crime전체를 통틀어서 악이라고 한다. 신학적으로는 혼돈하면 안된다. 죄는 뿌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죄인은 없나니 할 때 이 죄를 의미한다. 악은 죄의 결과이다.
(2) 죄는 절대적인 성질을 갖는다.
죄의 본질은 악의 일종, 즉 인간이 책임져야 할 도덕적 악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죄아래 놓이게 된다.
(3) 죄는 하나님의 뜻에 관계된다.
오늘날 죄를 이웃에 대한 잘못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잘못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어긋날 때 죄라 할 수 있다. 죄는 불법이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복종의 결여이며 신적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랑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죄를 율법과 관련해서 생각한다. 죄와 선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한데 기준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지가 기준이 되어서 표준이 된 것이 성경이다.
(4) 죄는 죄책과 오염을 내포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형벌에 빠뜨리게 하는 죄책(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 선천적 부패성(도덕적 오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가 있으므로 부패한 성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5)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죄를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죄는 영혼의 경향성이다. 그 경향성이 마음 안에서 작용을 할 때에는 마음의 성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밖으로 활동을 해서 나타날 때,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되는 것이다. 죄를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거기에서 그것이 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죄에 대해 정리를 해 보겠어요. 죄는 영혼에 있어서 경향성이고 영혼이 인간의 마음(영혼의 작용)에 성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성향이 있으면 성향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공부하지 않고 놀려고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지나가랴. 참새에게 낱알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서 못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향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의 정체가 무엇이냐면 반감과 대적(opposition)이다. 하나님께 대한 반감과 대적이다. 반감은 정서에 대한 것이고 대적은 의지이다. 지성과 정서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반항하고자 하는 성향의 정체가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죄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작용을 하면서 자꾸 무엇을 산출하려고 한다. 맨 처음에 신앙의 자리가 어디라고 했죠? 인간의 마음이다. 죄의 자리고 인간의 마음에 있고, 인간의 신앙도 인간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을 향한 사랑도 인간의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왜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모일까요? 마음에 모여야지 마음을 움직여서 그것을 행동으로 생산해낼 수가 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신도 모르게 표현이 되죠. 말도 툴툴하게 된다. 신앙이 들어가도 모든 것이 마음에서 작용하게 된다. 신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죽이는 경건한 생활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을 지킬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6) 죄는 외부적 행위만은 아니다.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외부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상, 감정, 의도까지 내포된다고 믿는다. 법은 여기까지 관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 이것을 양심의 자유라고 한다. 내가 마음속으로 무슨 상상을 하더라도 그것은 법에 의해 심판 받지 않는다. 법은 인간 자신을 고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이웃에게 해가 되는 죄에 대해 징벌을 해서 사회적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복리를 증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3. 인류생활에 있어서의 죄
(1)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
가장 어려운 점이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와의 관계이다.
a. 실재설
최초의 설명은 실재설인데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본래 하나의 일반적인 인간성을 창조하셨는데 이 인간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부분, 곧 인류 각 개개인으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 일반적 인간성 전체를 소유했는데 죄를 지음으로 유죄가 되어 더럽혀 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이 모든 개인의 인간성도 이런 죄책과 오염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론과도 관련이 되는데 인간에게는 인간성이 있잖아요. 하나의 저수지처럼 하나의 성이 있고, 인간성 하나하나를 받아서 인간이 되는 것인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저수지 전체가 더렵혀졌기에 거기에 기원을 둔 모든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다. 죄책과 오염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 죄책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이에요.
b. 대표설
제일 중요한 설이다. 개혁 시대에 대표적인 학설로서 이 견해에 의하면 아담은 그의 후손과 이중적 관계를 갖는데 그는 자연히 인생의 머리가 되었고 언약의 머리로서 인생의 대표였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했을 때 이 죄는 인류에게 전가되어졌고 그 결과 모든 인류는 부패한 상태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이 학설이 개혁주의 견해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제일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서 여자를 창조하시죠. 원래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는데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이에요. 그 언약은 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아라.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명령함으로써 이 세상 모두를 아담에게 통치하도록 맡기셨지만 그 선악과를 보면서 하나님이 금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은 질서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명령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그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니까 그 실과 앞에 설 때마다 내 위에 하나님이 게시고 하나님이 나와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명령하셨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가 선하게 사용했더라면 굉장한 은혜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마다 아무 것도 아닌 약한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신앙이 있으면 은혜가 되지 않아요? 신앙이 없으면 허무하게 느껴지고 죽었으면 하고 낙심되지만 신앙이 있으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은혜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사용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아라. 그 시험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험이었을까에 대해서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시적으로 시험을 하신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 언약을 깨뜨리고 그 결과로 죄와 심판이 들어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아담이 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켰다면 그 후에 태어나는 모든 후손이 영생을 누렸을텐데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이었다. 아담은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담의 범죄는 우리는 거기에 참여해서 실질적으로 과일 하나 먹은 것 없지만 아담이 먹은 것이 우리에게 책임이 전가가 된 이유는 우리와 아담 사이의 언약적인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옛날에 지금이야 나아졌지만 부모가 무엇을 잘못하면 대역죄를 지으면 삼족을 멸하고 부족이 연류되어 반역자의 집안이 되는거 아니에요? 하나의 연대라고 보면 되죠.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을 뿐 아니라, 2000년전에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은 예수님의 희생이 어떻게 그 십자가에 함께 매달리지 않은 우리에게 공로가 되어서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가져다 주느냐에 대해 성경은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을 이야기하며 두 번째 아담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의 머리가 되었고,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받을 백성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이 대표설을 따르게 된다.
c. 간접전가설
아담의 죄책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다. 아담의 부패는 후손에게 전가되며 이 부패성은 간접적으로 인간들을 죄되게 만든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라 부패했기에 죄가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우리 모두에게 실제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죄를 잘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살 수 있는 기능은 약해지고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는 죄 된 가능성은 많아져서 인간이 죄를 쉽게 짓고 그것 때문에 죄인이 된다는 하나의 도덕주의적인 견해이다.
(2) 원죄와 본죄
우리는 죄를 원죄와 본죄로 구분한다. 모든 인간은 죄 된 상태와 죄의 신분에서 출생함으로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본죄의 뿌리이다. 본죄는 신학에서 다양한 용어로 부르는데, 고범죄라고 부르고 자범죄라고 부르고 좀 더 좋은 말은 실행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과 부패한 오염을 가리키는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이고. 실행죄는 그것들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범을 범해서 죄를 지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남의 집 담장을 들이 받았다. 그러자 담장의 일부가 부서지고 새로 뽑은 자기 차가 찌그러졌다. 남의 집 담장을 받았으니 큰일났잖아. 문을 열고 벌컥 나온 것을 보니 같은 교회를 다니는 권사님이었어요. 무너진 담장을 보고 권사님이 그냥 가라고 보냈다. 이것은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와 보니까 차의 앞이 콱 찌그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결과로서의 망가진 부패성이다. 이것이 오염이다. 죄책은 구원론에서 칭의로써 해결된다. 사법적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너는 의롭다.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이전에 의롭다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책은 칭의에 의해 해결된다. 부패성, 오염은 성화에 의해 해결이 된다. 죄책은 칭의로 한순간에 해결이 되지만 부패는 오랫동안 성화의 삶을 통해 서서히 변화되어져 가는 것이다. 실제의 관심의 대부분이 성화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하는 바가 다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인간 본질 전체를 부패시켰고 인간으로하여금 어떤 영적 선이라도 행할 수 없게 한다는 의미를 뜻한다. 인간은 아직도 그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할지 모르지만 최선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행위가 하나님 사랑함에 의해 충동된 것이 아니며 영적 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은 펠라기우스파와 알미니우스파, 현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인되었지만 성경은 분명히 전적타락과 전적무능력을 입증해주고 있다. 전적 타락이란 모든 인간성이 타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끔 죄에 오염되어 있다는 뜻이다.
본죄, 실행죄 혹은 자범죄는 외부적 행위의 죄뿐 아니라 원죄로 인해 일어나는 의식적인 죄된 생각, 욕망, 결심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이 고유한 성질과 경향으로부터 구별되어 행동한 죄다. 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원래의 자연적인 인간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것이 원죄는 하나이지만 본죄, 실행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두가지로 나뉘는데 외적생활의 죄, 내적생활의 죄로 나뉜다. 내적 생활의 죄는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죄이다.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악한 욕망 등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짓는 죄이다. 외적생활의 죄는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발생하는 죄이다. 이들 중에는 용서가 될 수 없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있다. 이것은 불신앙의 죄이다. 지속적인 불신앙의 죄. 이 죄를 범하고 나면 심령의 변화가 불가능하면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3) 죄의 보편성
성경과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펠라기우스파까지도 죄를 나쁜 환경이라든가 악한 신뢰, 그릇된 교육과 같은 외부적 조건의 탓으로 돌리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의 죄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된 존재로 가르치는데 죄의 보편성은 모방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다. 유아라도 죄의 죽음의 지배아래에 있다. 갓난 아기가 태어나면 잠을 자거나 젖을 먹거나 웃고 있을 때는 인간이 못된 존재라는 것을 잘 모른다. 천사같아 보인다. 2-3살쯤 자아가 형성되면 행동을 저지하면 입이 새파래지고 복도에서 드러눕고 소리를 지르며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하나님처럼 대해달라는 것이다. “되게 하라.”내 하고 싶은 허하라! 뉘 감히 바라는 바를 방해하느뇨. 파르르 떨면서 소리를 지르며 좀 더 자라서 유치원쯤 되면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엄마도 때리게 된다. 인간이 얼마나 자아가 강하고 무시무시한 욕망을 가진 인간인가 하는 것을 작은 아이들 속에 있는 죄성을 통해 보게 된다. 점점 자라면서 죄를 짓는 수준과 높이가 달라지게 된다. 인간성이 성장함에 따라 죄도 더욱 담대하고 어마어마한 죄로 상승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능력이 있으니까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끝으로 가려고 한다. 죄에 대한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죄가 보편적이다. 누구든 죄의 지배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3과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인간
이 교리를 알기 위해 구속계약과 은헤계약을 구별한다. 이 둘은 밀접한 관계이므로 한 가지로 생각될 수 있으니 구속계약은 은혜계약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1. 구속계약
(1) 성경적 근거
스가랴 6:13 평화의 의논이라고 불린다. 이는 삼위를 대표하는 성부와 선택 받은 자의 성자 사이의 언약이다.
(2) 구속계약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는 구속계약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보증이 되신다. 보증인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짊어지셨고 자기 백성의 법적 요구에 응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계약은 그가 본래적 계약의 요구에 응하셨던 행위계약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은혜계약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행위계약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당연히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언약의 성취의 성패가 행위에 달린 것을 행위언약이라 하고 은혜에 기초하는 것을 은혜 언약이라 하고 구속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구속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언약, 계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계약이라는 말로 번역을 하지 않고 언약이라고 번역을 했다. 번역이 좀 그런 것이,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 할 수 있다. “언약을 맺다” 라고 하는 말을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로 카라트, 베리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카라트는 자르다 라는 뜻이고 베리트는 계약이라는 뜻인데 당사자 두 사람이 약속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이 바리투에서 올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하는데, 바리투는 족쇄이다. 사람의 두 다리를 묶는 것을 족쇄라고 하는데 묶인 사람을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처럼 베리트는 계약 당사자를 한 운명을 가진 사람으로 단위로 묶는 것이다. 하나의 배경이 있다. 이스라엘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ancient realist, 고대 근동지역에 속한다. 여기에 있는 문화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문화를 가지고 우리에게 당신의 계시를 전달해주시는 것이다. 이 문화 속에 계약을 맺는 문화가 있다. 이 계약은 두 사람이 있는데 무엇에 대해 서로 약정을 하고 여기에 증인들을 세워서 증거로 남기는 것을 계약이라 한다. 둘이 계약을 맺어서 하나의 단일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계약이 서로 대등한 당사자가 있고 대등하지 않는 당사자가 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일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의 물건을 사고 판다. 라고 할 때 대등한 관계이다. 그래서 양쪽 사람이 물건을 살 사람, 팔 사람이 계약을 맺으니까 일반적으로 대등한 당사자에요. 전혀 대등하지 않는 관계에서 맺어지는 계약이 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한 번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겠다고 각서를 쓴 적이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육법전서를 비롯해 대한민국 법령을 모두 준수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이것은 부대등한 관계이다. 이것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을 어디에서 모티브를 끌어 오냐면 15세기에 고대 근동, 모세시대에 종주권조약이라고 하는데, 한 왕이 큰 땅을 가지고 있는데, 종주라고 부른다. 종주가 가만히 보니까 나라를 혼자 다스리기 버거워서 나라를 쪼개서 자기는 이 중앙에서 다스리고 쪼갠 나라에 자기가 맘에 드는 신하 하나를 골라서 작은 왕과 같은 존재로 세운다. 세금 걷는 것의 얼마를 중앙에 왕께 바치고 그 왕만 섬기고 전쟁이 나면 목숨을 위해 싸우도록 의무를 준다. 그 신하가 왕이 부르게 되면 영광으로 생각하고 벧셀이라고 하는데, 신하와 종주사이에 계약이 맺어지는 것이다. 짐승을 쪼개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르게 되는데 그때에 이 두 사람이 이 핏길을 걸어가면서 자신들이 맺은 서약서 3부를 작성해서 들고 지나간다. 그리고 수많은 증인이 있고 천지신명을 불러서 이렇게 약조를 맺었는데 이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약조를 위반하면 신들을 우리를 이렇게 벌하소서. 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죽기까지의 맹약이다. 지사맹약. 서약서 한 장은 신당에 보관을 한다. 이 왕이 아무 상관없는 신하를 영지를 주면서 영주로 삼았으니까 이 계약은 일방적인 계약이다. 항거할 수 없는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에게 calling을 받는 것. 그러나 어기면 죽는다. 이런 점에서는 의무를 지게 된다. 이것을 함께 까지고 있는 것이 계약이다. 성경적인 계약을 말한다. 언약이란 말은 쌍방성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다는 점에서 일방성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쌍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약이라는 말이 온 것이다. 이 약이 옛것이기에 구약이고 새것이기에 신약이라고 부르게 된다. 성경의 유래가 된다. 약이라고 할 때 testament라고 하는데, 신과의 언약, 약속이다. 사람과 맺은 약속은 promise이다. 아브라함이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귀하게 여기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자신을 많은 신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다. 축복을 하신 다음에, 고기를 쪼개 놓게 하시고 불길로 그 가운데를 지나가신다. 이것은 굉장히 신성모독적인 장면이다. 아브라함에게 익숙해진 광경이 고대근동의 언약체결 의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쪼개놓은 제물 사이로 불길처럼 지나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한 말을 안 지킨다면 이 동물처럼 쪼개지리라. 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못 알아들으니까 눈높이로 설명해 준 것이다. 이것을 신학에서 아코모다치오(accommodation)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는 데 그 사이에서 맺어지는 것이 구속 언약이고 성부와 성자 사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맺어진 언약이다. 그 구속언약을 따라서 성자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언약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이 구원을 바라보며 맺어진 언약이 은혜언약이다. 이 은혜언약은 성자의 언약을 기초, 담보로 맺어진 언약이다. 최대의 약속이란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을 이루기 위해 구속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해 형벌을 짊어지셨고 자기 백성에 대한 법적 요구를 따라서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은 행위계약을 따른 형벌이었고 예수님이 그 계약을 성취하셨기에 그 계약이 우리에게 은혜언약이 된다.
(3) 구속계약의 요구와 약속
a. 구속계약의 요구
성자 자신은 죄가 없지만 인간의 현재의 나약성을 책임지도록 성부에게 요구하셨다. 즉 성자는 선택자를 위해 형벌을 받으시고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법아래 두셔야 했으며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자신의 공복을 자기 백성에게 적용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헌신하게 살게 해주셔야 했다.
b. 구속계약의 약속
그런데 구속계약의 약속이 있는데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해 몸을 준비하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며 그의 사역을 지원하시며 사망권세에서 건져내어 오른편에 두시며 교회 설립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며 택한 자를 불러내 보호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후사에게 그를 허락하실 것을 성자에게 약속하셨다.
2. 은혜의 계약
행위계약과 반대이다. 행위계약은 인간의 순종하는 행위를 조항으로 하는 계약이라고 한다면 은혜계약은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계약에 근거해서 은혜 계약을 확립하셨다.
(1) 계약의 당사자들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있어서 제 1 당사자이다. 제 2 당사자는 누군지는 쉽지 않다. 개혁파의 통상적인 견해는 이 당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죄인들이라 해야 한다.
a. 목적 자체로서의 계약
상호친교 또는 생명의 교통의 언약, 계약의 목적 그 자체는 역사과정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것이다. 계약이란 어떤 특권이 영적 목적을 위해 증진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약속된 축복은 실현되는 것이다. 생각해볼 때 이 계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받은 죄인과의 은혜로운 계약으로서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축복과 함께 자신을 제공해주시고 택함을 받은 죄인은 하나님과 그의 모든 은혜로운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체결한 은혜로운 협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일방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b.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계약
영적 목절을 실현하기 위한 순수한 법적 협정을 말한다. 성경은 이스마엘,에서, 엘리의 악한 아들들 죄가운데 죽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같은 사람처럼 실현되지 않은 경우까지고 포함한 계약에 대해 가끔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이 계약은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증해주신 순수한 법적인 협정이라 간주할 수 있다.
언약을 이처럼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믿는 자들과 그의 자녀들에게 이룩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무슨 뜻이냐면 은혜언약이라 할 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은혜계약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은 사람들은 아버지가 다 믿음의 조상들이다. 이게 다 은혜언약에 있다. 은혜언약 안에 있어서 어떤 특권이 있지만 불순종함으로 언약에서 이탈해서 구원의 밖으로 떨어져 나갈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이 은혜언약을 중립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은혜언약의 혜택이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이 구원이 실현된 사람이다. 은혜언약에 있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중립적이어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일반적으로 은혜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자신이 불순종해서 이탈해 나가면 구원 못 받을 수도 있는 의미로 많이 사용 된다.
(2) 은혜계약의 약속과 요구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아니어서 공로가 될 만한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지만 요구하는 것이 있으며 의무도 부과시킨다. 계약 관계에 있는 자들은 계약과 그 계약에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계약의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책임 있는 삶이어야 한다. 의무에 관념이 생겨난다.
인간들은 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새로운 순종심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이 새생명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은혜 언약 아래서 공급해주신다. 그런 원리를 따라서 순종심으로 살아야 한다.
(3) 은혜계약의 특성
a. 은혜로운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와 표현이므로 은혜로운 계약이다.
b, 영원한 계약이다
인간의 계약은 깨지지만 은혜계약은 영원하고 폐할 수 없다.
c. 특수한 계약이다.
계약의 범위가 광범위하지만 특정한 인간만 포함하므로 특수한 계약이다. 신약시대 계약은 구원처럼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미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d. 단일한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단일성이 특성이므로 계약 이행의 형태는 변하지만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약속, 복음, 믿음도 동일하다
e. 조건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인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하므로 조건적이라 할 수 있고 계약이 가져다주는 생활의 기쁨은 신앙에 의존하기 때문에 조건적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순종하고 기도 많이 하면 은혜 충만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황폐해지기에 조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은혜계약은 인간의 어떤 공로도 의지하지 않는 면이 있기에 무조건적이라 말 할 수 있다. 일방성과 쌍방성을 함께 갖고 있다.
f. 유언적 계약이다.
은혜계약은 하나님 편에서 자유롭고 주권적인 처분이므로 유언적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서 9장의 '유언은 사람이 죽어야 되나니'에서 나온 것이므로 유언적 계약이라 할 수 있다.
① 은혜계약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협정이다.
② 은혜계약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소개가 아니라 도입되었다.
③ 하나님께서 그가 요구하시는 바를 계약 속에서 주신다,
g. 계약의 중보자
은혜계약은 중보자가 있다는 면에서 행위계약과는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새계약의 중보자로 나타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중재하신다는 면과 화평의 실질적 성취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면에서 중보자이다.
그리스도는 보증인으로서 죄를 담당하고 벌을 받으시고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화평을 회복하셨다.
(4) 은혜계약 안에 있는 회원
그렇다면 은혜계약 안에 있는 회원, ‘누가’ 은혜계약 안에 있느냐?
a. 계약 안에 있는 성인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계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불신상태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다. 성인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b. 계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
믿는 자의 자녀들은 믿음에 의한 합법적 협정으로서의 계약은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것이 생명의 교통으로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계약에 들어갈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계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들어가는 즉시 성령이 내주하셔서 우리의 내적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 생활이 시작이 되요. 쉽게 말해서 중생과 회심이다. 이미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부모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도 은혜계약 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들이 중생하여 자기 안에서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는 자기가 부모에게 가르침 받은 신앙을 저항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때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이 신앙을 가짐으로써 중생하고 회심한 새 생활이 시작이 된다. 이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또 반대로 에서나 이스마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약에 안에 태어났으나 언약을 배반하여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계약 생활이 그들의 생애 속에 실현 될 것을 확신을 준다. 신앙에 반항하지 않는 한 새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자라면 자발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므로 계약의 책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실패할 때는 계약의 파괴자가 될 것이다.
c. 계약 안에 있는 비중생자
앞서 말한 것을 보아도 비중생자도 일시적으로 순수한 합법적 관계를 맺는 계약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직 중생하고 회심하지 못한 사람. 왜냐하면 중생과 회심은 개인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은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으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걔도 자녀에요. 물론 내 아들이 나를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고 형님이라 부르지 않겠죠. 그 아이가 나은 손자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한테 형님이라 그러지는 않겠죠. 유명한 청교도의 말이에요.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 각자가 결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5) 계약의 시대적인 경륜
a. 계약의 최초계시
계약의 첫 번째 계시는 3:15이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을 것이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 뱀이 발꿈치를 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한다. 원복음, 어머니의 약속이라 불리는데 계약의 형식적인 확립이라 말할 수 없다.
b. 노아와의 계약
노아 언약이라고도 불리는데 노아 언약은 혈육 있는 자와의 계약으로 일반적 성질이 있다.
이것은 단지 자연적인 축복이므로 혹은 자연의 계약, 혹은 일반은총의 계약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은혜계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계약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며 은혜계약의 실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연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c. 아브라함과의 언약
계약의 형식적인 확립을 나타낸다. 구약의 특수한 통치의 시작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만 국한된다. 신앙은 현저하게 계약의 필연적인 요구로써 나타나며 할례는 이 계약의 증표가 된다.
d. 시내산에서의 계약
본질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 동일하지만 형식면에서는 달리 이스라엘 전체와 맺은 언약이므로 국가적인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율법의 수행을 강력히 강조하지만 행위계약이 회복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죄의식을 증가시켰으며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월절이 제 2의 성례로 첨가되었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은 행위언약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성질을 가지고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율법이 되었다.
e. 신약의 새 계약
신약에 계시된 새 계약은 본질적으로 구약과 동일하다.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에 깨며 축복이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확장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이 계약의 축복은 보다 충만하며 영적이며 세례의 성찬은 구약의 할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시간적으로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계약이다. 구약의 계약인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므로 당신의 오심과 함께 도입되는 새 언약의 독특한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 새 언약이 계명의 형태로 주어지는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런 새 계약,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성령이 내주하시며 함께 하시는 놀라운 축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새로운 언약이 도입됨으로 아담을 머리로 하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모두가 구원받은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