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음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럭을 행한 것이라” (고후 12:12)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은 악기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가구 같은 것은 몇십 년만 써도 망가지는데 바이올린 같은 것을 200~300년 된 것을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을 보면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악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나무는 질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 나무가 아무데나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맞으면서 수분을 잘 먹지 못하고 나무가 자라면 아주 단단한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 나무를 캐어다가 소금물에 담구고 말리고 기름을 먹이고 해서 여러 번 과정을 거쳐서 소금물에 담그고 그늘에 말리고 햇빛에 말리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백 개를 놓으면 거의 다 터지고 마지막까지 안 터지는 나무를 가져다가 악기를 만들 때에 변성이 안 된다고 하는데 동의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원리가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받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다냐? 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크게 쓰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연단 가운데서 인내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커다란 두 가지 경륜이 숨어 있습니다.
첫 째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달아 보십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메네메네대갈고바르신’이라고 하는 벽에 쓴 글자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달아보십니다. 그 사람을 다시는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와! 저것 굉장히 많겠다’ 달아보면 ‘얼마 안 나가네’그것이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그 사람을 달아보십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정도, 인격의 정도, 성화의 정도를 고난이라는 저울을 통해서 달아보십니다. 또 하나는 앞에 이야기 한 것이 완료형이라면 두 번째 이야기 하는 것은 진행형인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을 단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쇠를 뜨거운 불에 담궈서 기름 속에 집어넣고 또 다시 불에 구워서 집어넣고 하는 것이 담금질인데 그 담금질을 통해서 칼을 만들면 칼이 바위를 내리치면 바위가 박살이 나서 칼날이 빠지지 않을 정도가로 강한 쇠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단련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받았는데 나는 그런 비유를 합니다. 여러분, 그랜드피아노를 보면 값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입니다. 무엇에 따라 다르냐면 그랜드 피아노의 앞이 얼마나 앞으로 더 튀어 나갔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명연주자가 와서 연주하는 피아노는 앞이 깁니다. 길면 공명 턱이 크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때 아주 멋있는 소리가 납니다. 고난은 요만큼 밖에 안 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을 이만큼 늘여서 공명 턱을 깊이 파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성화의 길을 걸어온 사람, 그 사람이 뭔가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특히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인생의 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울림이 탕 치면 공명 턱이 크고 깊으니까 텅~ 하고 깊은 소리가 납니다. 대화는 끝났는데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났는데도 마음속에서 그 말씀이 자기의 마음속에 울려 퍼집니다. 고난이 그런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고난 속에 사람을 그렇게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동적인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거칠게 만들고, 강퍅하게 하고, 자기 보호본능에 가득 찬 사람으로 만듭니다. 교회 교역자나 직원들 중에서 보면 이만큼 살아오니까 사람이 도움을 주고 따뜻하게 해 주는데 그것을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벌써 딱 보면 혼자 살아온 사람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온 것이 아니라 피해를 받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고 누군가가 도와주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성격이 불고처럼 형성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삐뚤어 진 자기 사랑입니다. 굴절된, 휘어진, 자기 사랑입니다. 패역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아이고 많이 깨어져야 되겠구나’ 그러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피해도 받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 고난은 인간을 그렇게 외톨이가 되게 만들고 자기 보호본능에 가득 차게 만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도 이렇게 보면 목회자들은 다 리더들인데 너무 인색합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왜 저렇게까지 할까 자기의 사람들인데? 그런데 처음 살아올 때부터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자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계속 깨뜨려져서 새롭게 형성되면 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을 경우에는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보호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이 커다란 리더가 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주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망가뜨리는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떨 때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의 인격을 깊이 있게 만드는 그 비결이 뭐냐 하면 신앙으로 그것을 소화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그 고난을 주시면 그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참 나를 귀하게 쓰시려고 다듬으시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땔감으로 쓸 나무는 한 번씩 쪼개서 불 속에 집어넣지만 조각품으로 쓸 나무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깎고 찌르고 쪼개고 파내고 불에 굽고 별 난리를 다 칩니다. 그런 것입니다. 제가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면 정말 어쩌면 그렇게 힘들고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왔는가 생각됩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고난을 받으면서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고난의 길도 걸어왔고, 또 이런 저런 사이에 끼어서 교회와 직장, 학교와 교회 사이에서 고통 받고, 인격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목사님 밑에서 원인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면서 고난을 받고, 개척을 하고 나서는 또 하나가 이기고 끝나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 스탭, 또 그 다음 스탭인데 이것이 완전이 아롱이다롱이 입니다. 총천연색으로 경제적인 문제 이제 끝났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경제적인 문제를 겪은 다음에는 다시는 저는 경제적인 문제로 시험을 안 받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것을 통과되고 나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경제적인 고통을 겪을 때에는 경제적인 시험만 벗어나면 될 것 같잖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김남근 집사가 맨날 저에게 ‘형은 특수 목사’라고 합니다. 왜냐고 하니까 ‘돈도 많고’ ‘내가 무슨 돈이 많냐?’ ‘다른 목회자들은 다들 가난한데...’ ‘그래 허긴 그렇지.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돌아보면 치열할 정도로 받는데 얼마나 기가 막힌 지 아십니까? ‘아니 왜 다른 사람들은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신학생들한테 장학금 많이 주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한 번도 안 주냐 이거야, 어떻게 그래? 저는 본 교회에서도 신학생 장학금 한 번 못 받아 봤습니다. 그렇게 죽어라고 섬겨도 말입니다. 제가 가르친 후배들은 집을 얻으러 갔더니 누구냐고 해서 전도사라고 하니까 ‘아이고 전도사님,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그냥 들어와 살아라’ 하고 또 제자 하나는 대학원 다닐 때 3학년 때 강의를 나갔는데 ‘교수님, 선배님 이제 저는 걱정 없게 되었습니다’ ‘왜?’‘직장 그만 두고 공부만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어느 집사님이 70만원씩 대준다고 했습니다’ 70만원이면 지금 170만원정도 됩니다. ‘왜?’ ‘일주일에 한 시간만 성경공부 가르쳐주면 70만원씩 준답니다’그러면서 ‘목사가 될 사람이 그렇게 돈 벌러 다니면서 무슨 공부를 하겠냐고 아이 둘하고 생활은 목사 안수 받을 때까지 모두 내가 책임질 테니까 공부만 해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봐도 나도 그 사람들만큼 하나님 사랑하고 기도하는데 왜 나는 하나님이 나만 미워하는 것인가 했는데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려고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끔 연단하시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난한 교인들, 또 학생들이 고민 있다 하면 그렇게 가슴이 미어질 수가 없습니다. 끝나고 나면 이제는 됐나보다 하면 또 다른 것,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것, 이제는 뭘까? 이제는 교회도 어느 정도 컸고, 교회도 옮겼고, 이제는 내가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것이 뭘까? 했는데 이제는 내 자신입니다. 자신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옵니다. 지성의 그릇도 너무 작고, 능력도 너무 모자라고, 그리고 영혼들이 뒤에서는 예배도 안 드린다 이런 소리 들려오면 주일 날 저녁 먹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이제 나는 어떻게 되어가나? 이제는 벌써 인생의 내리막길로 내려가는데 이대로 살다가 진짜로 신실한 신자가 한 번 되어 볼 수 있을까? 새까맣게 요원 하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내 속에서 쓰레기 같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지금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진짜 안식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끝나지 않은 숙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안주 나오듯이 곁다리로 겹친 가족들로 인해서, 또 무슨 일로든지, 동생들로 인해서 사연사연 겹치면서 아롱이다롱이 일곱 빛깔 무지개같이 다양하게 무지개는 일곱 개면 되는데 일곱 개는 벌써 넘은 것 같은데 계속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의 유혹이 고난을 제공합니다. 그런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 배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그렇게 나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되어가게 하는데, 아니 최소한 아직 멀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게 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을 겪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길거리 위에서 조각품 같은 것 만드는 것 어떻게 만드는 지 아십니까? 여러 사람이 나무를 수십개를 놓고 한 사람이 한 부분씩 맡아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에 5천원 6천원씩 파는 것입니다. 이렇게 후진 작품은 칼도 한 두 개면 되지만 진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조각칼이 수십 개입니다. 그것도 싸구려는 대충 쑤시다가 가는데 이것은 칼도 잘 갈아서 팝니다. 그러니까 실수가 없습니다. ‘너 그렇게 교만하고 까탈스럽지? 너 그것 가지고는 내가 너를 쓸려고 하는 거기에 적합하지 않다, 내가 파줄게’ 하고 주님이 칼을 갖다 대십니다. 그러면 어느 한 기간 안에 하나님이 어느 하나를 집중적으로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생활에 초점이 없어서 기도도 안 하고 탱탱이 노니까 이것이 집중적으로 다루시는지 아닌지 잘 모르고 지나가다가 중간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안 쓰시지만 기도하면서 보면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사업 털어먹고 그것 때문에 욕먹고, 그것 때문에 손해보고 이렇게 하면서 집중적으로 하나님께서 다뤄 가십니다. 물질 사랑해?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속 집중적으로 고통스러울 정도로 다뤄 가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십니다. 조각칼로 대어놓고 탁 그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자지러집니다. 한 사람은 잘 사는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미인을 만드시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칼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깎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듬어 가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쉬우면 사람이 왜 미끄러지겠습니까? 미끄러진다는 이야기는 올라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올라오지도 않고 비비는 사람들은 올라왔어야지 미끄러지지 바닥에 누워있는데, 침체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끄러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우셨을 때는 그 때입니다. 왜냐하면 열린 교회를 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은 정말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는데 다 이야기를 못하지만 불 가운데를 통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철저하게 칼을 들고 에누리 없이 깎아내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안 받아들이고 뿌리치면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십니다. 왜? 그것이 성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혼자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깎으시려고 칼을 대시는데 ‘아이 씨, 그냥 냅둬요. 이대로 살다가 죽을께요’ 하면서 뿌리치고 불순종하면서 가면 하나님이 그냥 놔두십니다. 그러면 아프지는 않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생긴대로 삽니다. 생긴대로 사니까 걸어가는 발자욱 마다 죄입니다. 그리고 죄는 마지막에 항상 죄의 결과를 몰고 오는데 그것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올 뿐이지 죄의 고통을 통해서 이 사람은 망가진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뭐가 남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런 것이 올 때 하나님 앞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비결이 인내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도가 ‘내가 사도다, 내가 사도인데 내가 사도가 된 표가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참음과 모든 인내 종교를 불문하고 내가 잘 참았다 그러면 사도 아니냐’ 그 다음에 기적과 표적을 행한 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라면 참을 수 있었겠느냐? 참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는다는 것은 그냥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봅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섬기며 사역을 합니다. 사역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 둘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만둘 수 없어서 그냥 거기에 있다고 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이 아주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고 거기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이 속에서 심령이 아주 부패하게 망가져 버리는 것입니다. 고난은 오는데 소화는 못하고 소화는 못하는데 그냥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고난이 부패작용을 일으키면서 그 사람의 내면의 틀들을 전부 다 망가뜨려 버립니다. 그러면 뛰쳐나갑니다. 뛰쳐나가면 더 잘 망가집니다. 그러면 문제는 내가 입증하고 싶은 것은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참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참음은 거기에서 오는 고난을 소화시키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잘 섬기지 못해도 세워주신 자리에서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닥치는 많은 고난을 소화해 내면서 주님을 닮아가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사람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에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몇 번 야단맞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만 두고 싶다는 이야기가 죽 돌아서 나한테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냐? 그만 두겠으면 기도 많이 하고 제가 그만 둬야 되겠습니다 하고 담임목사가 임명했으니까 담임목사 찾아와서 이야기 하면 되지’ 만나는 사람마다 ‘아, 아무래도 나 그만 둬야 할 것 같아’ 그렇게 계속하면 나중에는 ‘목사님 아무개 그만 둔다는데 언제 그만 둬요?’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너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오늘 이야기 한 것은 ‘내가 사도인 증거가 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참는 것입니다. 소화해 내는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직장에 있다가 승진을 해서 우체국장으로 갔는데 그 때 처음 관리자가 되어 보고 나서 하도 윗사람들한테 치여서 내가 직원이 열두 명이라고 해서 ‘나도 가서 윗사람 없는 곳에서 살아보자’ 하니까 그 분이 ‘그래, 내가 보내줄게’ 하면서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해서 갔습니다. 석달 만에 그만 뒀습니다. 직원이 열 두 명이었는데 교환원이 열 명이고 지금도 정말 상상하기 싫습니다. 차라리 열두 명을 모시고 있지 교환원들이 원래 거칠지만 자기네들끼리 세상에 국장이 부임을 해서 코스모스 향기를 맡으며 갔는데 나와서 인사도 안 합니다. 결국은 교환실에 내가 들어갔습니다. 핑계는 대죠 계속 바빠서 그렇다는둥... 말하자면 길들이기 식이죠. 저는 길들지도 않고 그만 뒀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 지체들이 성숙하기는 하지만 걱정됩니다. 가면 생각이나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기에서 많은 것을 참아야 됩니다. 아직까지는 잘 몰랐을 것이지만 여러분들이 이제 제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사도는 오늘 이야기 하는데 참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견디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을 잘 견디고,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잘 견디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노동을 잘 견디고 다양한 것이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으로 모든 참음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만 아니라 내가 못하는 것, 아롱이다롱이 일곱 빛깔 무지개로 총천연색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깎고 다듬으십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그렇게 힘든 속에서 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내 속에서 연단 받는 우리들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오늘날 말씀 설교 사역을 해 나가면서 말씀 사역을 통해서 제가 뭐가 있습니까? 얼굴이 잘 생겼습니까? 학교를 좋은 곳을 나왔습니까? 우리 후배들, 내 제자들 벌써 박사학위 받고,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도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미국의 퓰러 신학교에서 교수하고 있는데 내가 말씀 사역 때문에 왔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런 것입니다. 전도사 생활하면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혼들이 너무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교수생활하면서 여러분 안 믿어지겠지만 설교 한 편 준비하는데 48시간 걸렸습니다. 오죽하면 매주 토요일마다 복사 집에 가는데 복사 집 아가씨가 ‘이것이 설교 원고예요?’ 자기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아이구, 목사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해서 토요일 날 가서 밤 세우고 그리고 밤새도록 기도하고 주일날 올라와서 새벽기도하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 하고 와서 아침도 못 먹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내가 이렇게 하면 나중에 뭐가 될까 하는 것 필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영혼들이 회심할까? 그러면서 걸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일 년 동안에 원고지 2500매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설교를 어떻게 작성하는지를 터득하게 되고 많은 책들을 보게 되고 그러면서 이해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내의 과정들을 통해서, 그러면 애들이 설교를 그렇게 기쁘게 듣습니까? 이 자식들이 전도사가 열심히 설교를 하는데 벌떡 일어나서 ‘에이 씨’ 하고 발길로 문을 쾅 차고 밖으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나가서 햇빛에 죽 앉아서 떠들고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사만 아니라면 개 패듯 패고 싶었습니다. 내 성질에 문 열고 나가서 대걸레로 개 패듯 패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너무 괴롭고 왜 그렇게 곤고하게 살고 아이들이 그렇게 강퍅하니까 밤중에 가위에 눌리는 것입니다. 시커먼 옷 입은 사람이 와서 밤에 자는데 목을 누르고 가위에 눌린 것입니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말씀사역이 뭔지에 대해서 겨우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박기태 목사님이 옛날에 하신 말씀이 ‘주님을 위해서 참고 고생한 것은 하나님이 공짜로 그냥 쓰시는 법이 없이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언젠가는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1년 하고 나서 이 중에 한 두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저 팀장 못해먹겠습니다’ 라고 할 사람이 아마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때를 미리 대비해서 내가 미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참아야 됩니다. 그래서 인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 하면 내가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하기 싫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그 다음부터가 인내의 시작이다, 하기 싫을 때까지 하는 것은 취미이고, 하기 싫어도 의무 때문에 고통을 참으면서 하는 것이 인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내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내를 발휘 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6개월이 멀다하고 사표를 써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내가 끝까지 계속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인내를 통해서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우리는 일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듬으십니다. 저는 원래 성격이 유리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듬으셔서 이제는 놋쇠 그릇쯤 되었습니다. 와서 두드려도 조금조금 찌그러지는 소리는 나지만 띵 하다가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장에 보면 ‘내가 너를 놋 기둥이 되게 할 것이며 사람들이 너를 칠 것이나 너를 놋그릇이 되게 하겠다.’ 유리그릇은 땅 치면 쫙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느냐 사느냐 활딱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놋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갈밭이 되어야 합니다. 자갈밭은 누가 와서 물을 쫙 뿌리면 물이 확 빠져버려서 누가 와서 떠들면 다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단단한 놋그릇처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데 그 원천이 무엇일까? 그 대답을 고린도전서 13장이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도 바울은 아주 성격이 아주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참을성이 없고 과격하고 즉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과격한 것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나타납니다. 공무를 청해서 쓸어버려야겠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성품이 일곱 빛깔 무지개보다도 더 찬란한 사람이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참고, 견디고, 참고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예수에게서 그 참는 복을 발견합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 생각을 많이 하면 이깁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며칠 동안 몸이 안 좋았는데 계속 브레이너드를 생각하면서 새벽기도를 기어 나왔습니다. 와서 두 세 시간씩 어떤 때는 3시간 반씩 기도하고 가는데 몸이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브레이너드를 생각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 수는 있는데 몸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 때 ‘왜 이렇게 몸이 아프지, 할 일은 많은데’ 이렇게 생각하면 이 몸이 아픈 것이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 내 몸에 대한 미움이 생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서 ‘주님, 많이 아프네요, 주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렇게 힘들고 아프실 적도 있었겠지요?’ 하면 마음이 확 풀리는 것입니다. 범사에 예수님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면 내가 지금도 ‘주님,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주님이 만약에 내 자리에 서 계시다면 진짜 청룡도를 꺼내서 저 지체를 단칼에 베었을까? 아닐 것이다, 참고 인내하고 그러셨을 것이다’ 하면서 계속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눈으로 보면서 상심할 때도 참고, 입으로 참고, 또 귀로 참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내를 이루어 그것을 소화해 내야 합니다. 소화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이 이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많이 맡고 그 다음에 내가 중요한 자리에 서 있으면 서 있을수록 이제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 하면 계속 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이상하게 내가 데리고 있는 지체들이 일을 잘하고 화합도 잘 합니다. 기도 안하면 둘이 싸웁니다. 일만하면 사고를 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마음에 고통이 생겨납니다. 그런 경건과 은혜의 생활이 있을 때 그런 고난을 참을 수 있는 여력들이 생겨납니다. 그것을 소화해 내야 합니다. 땅을 생각해 보십시오. 농산물 찌끄러기 집어넣고, 똥도 집어넣고, 오줌도 싼 것 집어넣고 별것 다 집어넣으면 땅이 그것을 소화해 내면 모두 비료가 됩니다. 소화를 못하면 뿌리를 죽입니다. 만약에 김치 국물 같은 것을 땅을 파고 부어 버리면 소금기 때문에 채소가 모두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집어넣어가지고 그것이 분해가 되어서 땅이 소화를 해 내면 그것이 모두 고기든지 뜬물이든지 모든 것이 소금기 없이 분해되면 훌륭한 비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랍니다. 고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벌써 그리스도인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머릿속으로 뱅글뱅글 도는 사람들은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슴까지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단을 다 받은 사람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마음고생 많이 하면서 깨뜨려진 사람들은 ‘사랑은...’ 하고 이야기 하면 가슴속에서 공명을 통해서 쫙 울립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들이 인격화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오래 참아야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