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2
녹취자:이경순
<칭의>
칭의 라고 하는 것은 한자어로서 의롭다고 칭 해 준다. 그런 뜻입니다. 사실은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불러주는 것을 칭의 라고 합니다. 칭의 의 정의가 나옵니다. 칭의란 문장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칭의를 집약한 것입니다. 빠진 것이 없이 더들어간 것이 없이 압축된 문장입니다. 이 안에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우선 제일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첫째 죄인이 등장합니다. 죄인을 의롭다하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선언하는 것은 칭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불러줘야 됩니다. 친구들이 만나서 넌 잘못 없어 절대 네가 한 게 아니야 해도 재판장이 사형 이라고 판정을 내리면 친구들의 많은 이야기는 소용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거들어 줄뿐이지 법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첫째 요소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 이것은 법적행위구나 그렇다면 이것이 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법적행위는 하나님도 뒤집지 않으셔야 맞는 것입니다. 너는 의롭다 이렇게 불러주시고 그 담에 아 내가 착각했다 오늘 하는 짓을 보니까 너는 다시 안 의로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법적 행위라고 하는 것은 국민이 투표를 해서 헌법을 통과시켰는데도 그런데도 투표한 국민도 그것을 자신이 지킵니다. 국회의원들이 구속될 때 다 누가 만든 법에 의해서 구속이 됩니까? 자기들이 만든 법에 의해서 구속됩니다. 그런 법적행위입니다. 세 번째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해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 그렇구나. 이 칭의는 자기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 보면 예수그리스도, 완전한 의 이렇게 세토 막으로 나눠집니다. 아 그것이 완전한 의였구나. 그리고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 된 것이구나 그 토대위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구나. 이것이 바로 기독교 교리를 배우는 묘미입니다. 이 한 문장 써놓고 한 시간 쭉 설명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 만드는 힘이 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칭의는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죄가 몰고 온 결과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결과가 두 개입니다. 아담의 죄가 몰고 온 죄가 원죄입니다. 그 원죄는 결국 죄책과 오염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죄책은 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입니다. 죄에 대한 법적 책임입니다. 오염은 부패한 본성입니다. 이 두 개가 결국은 원죄로서 우리에게 물려졌고 그 원죄에서 비롯되어서 짓는 실행 죄 이렇게 됩니다. 실행 죄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생각으로 짓는 죄와 행위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칭의는 바로 이 죄책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해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제 너는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 면제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 죄인 밖에서 선언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에 완성되지 칭의가 두 번, 세 번, 네 번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성화는 이에 비해서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책입니다. 죄책이라고 하면 잘 모를까봐 죄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내부 안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계속적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성화되어 갈수록 우리들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수록 원래 하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그 인간이 되고 원래 하나님이 만드시고 싶었던 인간이 되어 가면 갈수록 그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행하게 되고 그렇게 될수록 인간은 행복해지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된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이 이웃에게도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칭의의 요소>
칭의의 요소 에는 소극적인 요소와 적극적인 요소로 나뉘는데 소극적인 요소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죄의 용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이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시간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 내가 있는데 내가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는데 이게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당연히 여기는 현재이고 여기서부터 여기는 당연히 과거입니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지나온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논리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살아갑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다음에 미래의 죄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나고 천국에 갑니다. 죽는 순간이 옵니다. 이렇게 천국으로 가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살다가 죄를 또 지을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으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매일 매일 회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죄라고 반드시 생각할까요? 바꿔서 말하면 죄를 지었는데도 죄인줄 모를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죄 인줄 알았는데 기억을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죄를 죄인 줄도 알고 기억이 나는데 회개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나요 없나요? 그러면 그렇게 남은 죄들은 어떻게 처리가 됩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고 회개할 때 이렇게 현재와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하나님 앞에 함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아니 죄를 지어야 회개를 할 텐데 짓지도 않았는데 벌써 용서를 받았다 야 이거 진짜 신나는 일이구나 꼭 요술 양탄자를 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을 안 하며 그러면 칭의의 완전성 문제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것이 우리 눈에 복잡해보일까? 그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시간이 없으신데 인간에게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복잡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에서 한 번에 쫙 보시면서 한사람의 과거와 과거뿐 아니라 그 영원한 맨 끝은 하나님이 김 아무개라는 사람을 창조해야 되겠다. 라는 관념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는 영혼이 그가 어떤 삶을 누리게 될 것인가를 한 번에 하나의 지식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때 만약에 당시를 기준으로 현재와 과거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하고는 관계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과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영원한 속죄의 효과에 근거해서 우리가 칭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가면서 죄를 지어도 괜찮은 거냐. 그런 것이 아니라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가 올바르지 않는 길로 계속 가면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셔서 그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고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구원과 관련지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당연히 논리적으로 반복될 수가 없습니다. 반복되면 언젠가는 칭의가 사라진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두 번째 하나의 자녀로 양자됨 이것을 수양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양자된다는 것은 입양된다는 것일 말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그 집안에 양아들로 혹은 양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적에 등기가 되면 원래 낳은 그 집안의 아이들과 똑 같은 권한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 권세를 부여함 법적 영적으로 양자됨 그래서 중생과 성화를 통해서 도덕적 자녀와 구별됨 이것은 사람들이 그냥 도덕적으로 잘 다듬어져서 나쁜 짓 안하고 선하게 삽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볼 때에 저사람 하나님 믿는 사람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되는 그것 그래서 영적으로는 자기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같이 보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칭의 와 시간입니다. 이것은 칭의 라는 말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칭의 는 이것들이 서로 병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이것은 사람들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일 것이고 뒤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그를 믿게 하셨기 때문일 것이고 더 뒤로 가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일 것이고 쭉 거슬러 올라가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만세전에 인간을 창조 하시고 타락할 것도 아셨어야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게 웬일이야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타락한 사람들을 구원해 내실 것도 하나님이 아셔야지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면 바로 내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이것이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의롭다 칭해주시려고 선택 하셨구나. 이것을 우리들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가 피 택자 에게 택함을 받은 자에게 전가 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영원한 작정에서 그를 의롭게 하실 것을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이란 뜻입니다. 그담에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에 대한 칭의 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 속에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영원으로 부터 는 칭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영원한 작정과 역사과정에서 실현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된다. 그래서 영원한 작정은 있고 그것이 역사의 과정에서 실현되는데 이 두 개는 연관은 있지만 서로 구분 되어야된다 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생각 속에서 세계를 창조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지만 창조된 세계는 세계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각은 생각입니다. 혼돈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칭의 이것은 선택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의롭다함을 얻음 그래서 죄인에 대한 개인에 대한 칭의 와는 다릅니다. 그림을 보면 여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역사가 전개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주님께로부터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의를 받습니다. 이것이 이 시점에서 생각을 하면 이게 1번에 해당되는 영원으로부터 오는 칭의입니다. 그 담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서 선택받은 자들 여기 앞에 나 말고도 이후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이 앞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시므로 서 당신이 구원할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칭해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이 뒤에 구약시대 때에 구원받았던 사람도 같이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 칭의입니다. 자 그런데 1번과 2번은 사실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을 많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라면 3번은 개인적인 것과 관련 있습니다. 내가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칭해 주시는 것 이렇게 서로 나눈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3번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은혜가 주관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실 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서 그 안에 역사하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이 되어서 그 의를 하나님이 거기에 전달해주시는 것입니다. 전용이라고 하는데 그 죄인에게 전적으로 소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칭의의 도구에서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에 믿음이 의로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는 하나님이 주시는데 믿음으로 그 칭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칭의의 근거는 죄인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받은 의는 우리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의를 전가해주신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이렇게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칭의의 교리에 대한 반대설이 있습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므로 은혜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공로에 근거해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이미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라고 부를 수가 없다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치렀으니까. 이것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 저녁에 딸로부터 생일 선물로 잠옷을 한 벌 받았습니다. 그런데 너 이거 어디서 났니? 나 이거 거저 얻었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돈 내고 사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거 공짜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돈을 내고 사왔으니까 그러나 내가 선물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아 그거 나 거저 생겼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칭의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연히 희생을 치렀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칭의는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적용받는 우리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그 칭의에 합당한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치르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시고 그 죄를 기초로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모든 것이 결국은 우리가 한 것 없이 우리가 받는 것이므로 은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설 하나는 타파되고 두 번째 칭의 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무가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롭지 못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죄인들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의 의로 옷 입혀진 것으로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무가치한 것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독론 할 때도 설명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함께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한 몸으로 당신이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죄에 대해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만족시키셨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영원히 형벌에 죽을 우리를 구원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똑같이 그런 점에서 칭의는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 지은 자들에 대해서 그 죄의 대가를 치루시므로 당신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들이 의롭다 혜택을 받은 것입니다. 칭의 교리는 도덕생활에 무관심하게 만든다. 의롭다고 칭해버리면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아 이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하고 죄를 짓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상상이고 내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이 기초가 오히려 더 도덕적으로 살도록 그 사람을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의 자녀야 이렇게 살도록 그 사람을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성경 구절이 칭의에 대해서 아주 그림처럼 보여주는 성경 구절입니다. 기억하고 계십시오. 어쩌면 이런 시험이 아마 이런 식으로 괄호 치기로 나올 수 있습니다.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내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정결한 관을 머리에 씌우시며 옷을 입히시고 여호와의 천사는 그 옆에 섰더라. 중요한 성경 구절입니다.
<성도의 견인>
여기에서 이 ‘견’은 견고하다 할 때 쓰는 견입니다. 무언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것을 견이라고 부르고 ‘인’은 인내한다 할 때 인자입니다. 참는다는 뜻입니다. ‘성화’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래 구원을 받아도 죄의 본성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정도는 순종하고 죄를 죽이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며 살면 그런 것 좀 남아 있어도 크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사는데 있어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방치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은 다시 세력을 규합해서 구원 받았으나 불신자와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아가도록 그 죄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상세하게 쓴 책이 죄와 은혜의 지배입니다. 성화는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완성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신자들은 완전하게 완성하셔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거기 있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다시 육신을 입게 되는데 그래서 하늘나라에 있던 영혼이 육체와 만나서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몸은 부활의 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삼시세끼 먹지 않으면 안 되고 늙어가고 얼굴이 변화되고 이러지 않고 있는 불멸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성화라면 견인은 한번 구원 받은 성도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것이 견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성화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거 안 나오는 시험은 무효입니다. 매번 반드시 나오는 시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은 무엇이라는 정의만 외워도 40점은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합니다. 성화란 성질이라고 하는데 잘못 읽으면 승질이 됩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성질이라고 번역을 하기 보다는 본성이라고 번역해야 됩니다. 여기서 다시 법조문을 따져봅시다. 첫 번째 성화란 죄인을 순결하게 하시는 구나 성화의 대상은 모두 신자입니다. 그럼 결국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죄인은 구원 받았는데 순결하지 않구나.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담에 두 번째는 본성과 관련됨을 알 수 있습니다.본성이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며 살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본질입니다 성품입니다. 그것과 관련 됩니다. 아 이런 것은 아니구나. 이것 하나를 하지 못하게 하고 저것 하나를 하게하는 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말로 해도 사람들이 계속 버립니다. 그런데 내일부터는 쓰레기를 버리면 바로 사형입니다. 사람들이 덜 버릴 겁니다. 그래도 계속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끔찍합니다. 쓰레기하나를 버리면 사형이라는 것이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 100만원입니다. 그 얘기가 나오는 즉시 사람들은 쓰레기를 안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념 별로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띵 ’하고 날라 왔는데 과태료 납부 고지서 백만 원 며칠 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당신 자동차, 집, 그리고 월급 압류 들어갑니다. 그러고 옵니다. 그래도 안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짜 직장으로 딱지가 날라 왔습니다. 월급을 받았는데 백만 원이 깎여 나온 겁니다. 이게 뭐냐 그러니까 쓰레기 버린 값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쓰레기를 안 버릴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의 본성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사람은 그런 양심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 지키면 백만 원이 날라 갑니다. 그래서 그 담에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나오는 이야기는 형상으로 새롭게 하며 입니다. 형상이라는 것 우리가 배웠습니다. 장시간에 걸쳐서 배웠습니다. 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성품을 닮게 하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이 성화는 결국은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거구나 그런데 이것은 본성과 관련 됩니다. 선한 사람이 하는 일이 선입니다. 선한 사람이 하는 일이 선행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선행을 억지로 합니다. 그것을 위선 이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에게서 악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사람이 선을 행할 때 위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선한 사람인데 어떤 이유에 의해서 자기는 꼭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악을 일부러 행합니다. 그것을 위악이라고 합니다.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 얘기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나쁜 짓을 한번 시범적으로 친구들 앞에 맘에 없는 것을 해봄으로서 나쁜 친구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 이런 것들이 위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 이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구나. 여섯 번째는 아 이게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은혜로운 작용이구나. 이런 것들을 이 안에서 분석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외워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성화란? 이것을 다른 곳에 적지 말고 책에다 깨알같이 적어놓으세요. 그 한권의 책에 다 들어가 있게 하세요. 항상 성경 밑에 깔아놓고 성경 읽다가 뭘 발견하면 또 거기를 펼쳐서 이게 어디에 나오는 것인지 메모를 하세요. 그렇게 해서 너덜너덜하게 메모를 하면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거 하나만 가지면 여러분들이 무엇이라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약을 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구원 받은 사람을 보다 더 선하고 보다 더 선한 일을 많이 사람으로 성령이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재창조적 행위이다. 왜 재장조입니까? 창조는 이미 거듭나게 하실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처럼 역사가 일어났고 그 창조를 계속하는 것이 성화의 작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걸쳐서 흐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쨌든 간에 관록이 붙으면 성화가 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를 성화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이 끊임없이 믿음과 순종으로 산 시간들이어야 합니다. 그럼 확실하게 그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반대일 경우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고치기 어려운 게 잘못 믿으면서 오래 믿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온몸으로 시험해보면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현세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 성화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피조물인 인간의 전 본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두 번째는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옛사람의 억제 새 사람의 태동 옛사람의 죽음 혹은 새 사람이 계속 힘차게 살아나는 것 생명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기본적으로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집니다.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아직도 죄의 본성이 남아있는데 이것을 옛 본성 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본성은 새 본성이라고도 말하고 새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옛 본성은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본성이고 새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입니다. 이 두 본성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예배 잘 들이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잘 읽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고하면 옛 본성이 점점 작아져서 거의 영향을 못 끼칩니다. 그리고 새 본성이 충만해집니다. 성령 안에서 그런데 반대가 되면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본성이 기를 펼 수가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도 죄악 된 생각이 지배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겨도 잘못된 동기가 섬김에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는 옛 본성이 죽고 약화되고 새 본성이 강화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세 번째 전인에 영향을 준다. 어는 한부분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믿고 성화되더니 시간에 대해서만 철저해질 수 있다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 본성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화에서 온 것이 아닌 경우에는 대게 그런 사람이 시간 안 지키는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도 안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남의 것을 잘 훔칩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헐’ 그럽니다. 그래서 뭔가 인생에 대해서 견해를 가질 때 어떤 신념을 갖는 것들은 긍정적인 면과 매우 위험한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관으로 갖는 게 좋습니다. 가끔은 사람들이 신문사나 방송국이나 잡지사 에서 흔히 묻는 이야기가 목사님! 목회철학이 무엇입니까? 입니다. 제 목회철학이 무엇인거 같습니까? 저는 기본적으로 목회철학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학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마치 인성을 성경과 모든 것 위에 더 높이 있는 나의 신념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말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목회는 그런 두 단어가 양립해서 목회철학이라는 그런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도 한마디만 해달라면 저는 나의 목회철학은 ‘태멘’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할 때에 창세기 1장 1절 첫 번째 구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마지막 글자입니다. 4번 신자가 협력하는 사역이다 협력이란 같이 협동해서 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협력 할 때는 힘을 서로 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는 것인가 할 때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니셔티브 말하자면 주도권은 성령님이 가지고 계시고 인간은 순종하므로 서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성화는 그렇게 안하는 것입니다. 가끔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으시죠? 신앙생활 여러분들이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 들어 보신 적 있죠? 여러분들이 하기 싫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렇게 이런 성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성화되려는 마음이 없으면 불순종하면서 살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개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생명 전인에 영향 신자와 협력하는 사역입니다.
다양한 삶의 환경이 있습니다. 돈 벌고 애 낳고 장애가 되어서 도움을 받아야 되고 심장병 같아요.
노래방 가서 신나고 이거는 삶의 괴로움, 이혼하는 장면 결혼하고 그러다가 너무 슬퍼하고 대판 싸우고 그러다가 결국은 늙고 죽고 그러면서 젊었을 때는 누구한테 편지를 보낼까 무슨 노래를 부를까 주가가 얼마 올랐나, 오디오 좋은 거 하나 살까, 이번에 카드 명세서는 어떻게 나왔나 뭐 이런 것 같습니다. 어째든 인간은 수많은 삶의 환경을 겪으면서 삽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 살든지 간에 성화가 잘 되는 환경이 있습니다. 그 환경은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인간의 두 축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인간의 마음이 성령이 그를 성화시키시기에 제일 좋은 환경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런 다양한 삶의 환경을 겪고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든지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은혜 안에 있을 때 그 때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성화시키기 제일 좋은 환경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청년들을 놓고 특히 나이든 시집 못간 청년들에게 너희들만 보면 내가 너무 걱정 된다 너희들이 이렇게 나이 들어서 시집못가는 것을 보니 내가 잠이 안 온다. 목사님이 그러셨답니다. 그래서 한 청년이 자기가 이렇게 나이 먹도록 시집을 못가는 것이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했답니다. 우리 교회 와서 설교를 듣는데 그거 삶의 양상에 불과해 그렇게 설교를 하더랍니다. 그때 비로소 아 이게 내가 나이 들어 시집 못간 게 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 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시집가면 열렬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남편 속 썩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가요 가는데 그것은 내가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 하는 그것은 시집가고 안가고 혼자 늙고 양로원에 가고 뭐 그런 가족들이 잘살고 못살고 금 수저로 태어나고 잃어버렸던 유산을 찾고말고.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성화는 한사람이 성화됩니다. 그래서 선한 인격을 갖습니다. 당연히 사랑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람이 그 진리의 영향을 받아서 선한 인격을 갖고 성화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사람은 모든 방면에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결국은 선한 생활을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고 선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과 선한 생활을 하는 것 둘은 나뉘어 질수 없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은 선한 사람이 하는 일이고 선한 인격은 그것이 인격으로 머물지 않고 반드시 그것은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견인이라고 하는 것은 견인이란 외우셔야 합니다. 카드에 써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세요. 이렇게 성경에 증거들이 있고요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 것은 굳게 참고이기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인이라는 말은 여기에 성도가 있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견인을 합니다. 견인이라고 해서 견인차 주차위반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견인을 생각하면 결국은 하나님 이 사람을 안 놓고 붙드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도를 견인하시니까 그러니까 성도가 실질적으로 견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질>
교회는 희랍어는 카알 이라고 부르고 그리스어로는 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에크는 바깥으로부터 클레시아는 클레어 부르다 입니다. 결국은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단어는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불러내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무리들 이것이 교회라는 말의 기초입니다. 우선 제일 넓게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모든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구원 받고 천국 간 사람도 있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안 태어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장소적으로 땅과 하늘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하는 안 되냐 그러는데 지하는 몸만 묻혀있으니까 지옥에 있는 선택받을 백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하는 안 되고 지상과 천상 우주적으로 이 세계 전부에 흩어져 있는 구원 받았고 구원 받은 그담에 구원 받기로 선택된 사람들의 무리가 보편교회라면 지역에 모여 있는 무리들이 지역교회입니다. 갈라디아교회 그러면 우리처럼 갈라디아시 갈라로 갈동 25번지에 십자가 세워놓은 교회일거다 생각하면 안 되고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모든 성도들 전체를 갈라디아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그들이 실제로 모일 때는 갈라디아교회에 모든 성도들이 모일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었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일만한 장소도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중앙 체육공원에 모일 수는 있겠지만 모두 죽었겠지요. 그래서 그냥 가정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함께 믿는 가족들이 모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정의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위가 가정이 되고 지역교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결국은 노회의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장로회에서 노회제도로 교회들을 묶어놓은 그 교회를 가장 기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론 에서 하기로 하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할 때 로마 가톨릭에서는 외부적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다 해서 굉장히 폼 납니다. 교황이 발코니를 열고 하얀 모자를 쓰고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이것이 전 세계의 텔레비전으로 방송이 되면 가톨릭 국가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경의를 표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교황을 머리로 대주교 주교 이루어지면서 교회라는 조직체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조직체 그것을 교회의 본질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배운 내용하고는 안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는데 그 교회가 둘로 크게 구분이 되는데 가르치는 교회와 그 담에 가르침을 받는 교회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대주교 주교 사제들이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이 두 개의 관계가 아주 철저한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이 복종을 참 잘 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대들기를 잘합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분에 붙어있는 몸입니다. 여기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신자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 이것을 영적교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영적 연합 이것을 교회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인 연합이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매번 나오는 문제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공동의회다 당회다 아니면 투표다 교회의 본질은 영적인 연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성도들 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서 교인들이 개도 천당에 함께 갈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우리에게 좀 말해 달라 어떻게 내가 이 개새끼랑 헤어지겠느냐 여러분들에게는 덜 심각하지만 진짜 애견가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적 지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이속에 안 들어갑니다. 다른 것은 안 들어갑니다.
< 교회의 구별>
장소를 기준으로 할 때는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 전쟁의 상태를 보면 지상의 교회는 아직도 악과 사단의 무리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전투적인 교회 천상의 교회는 이미 승리한 교회 형체로서는 이 땅과 지상 이렇게 나누면 안 되고 지상에서 유형적인 교회와 무형의 교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천상 있는 교회도 물론 무형교회의 실현입니다. 유형교회는 눈에 보입니다. 안양시 동안구에 위치한 성도 몇 명이 모이는 몇 평의 대지위에 몇 평 건평이 지어진 교육관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총 등록 수 몇 명의 교회이고 담임목사는 누구이고 등등 설을 풀면 그게 결국은 유형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십니까? 다 유형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직을 기준으로 볼 때는 유기체적인 교회 그리고 조직체적인 교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조직체 그담에 그것들이 서로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다는 것 이것이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