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의 삶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1-3)
녹취자: 김세나
본문은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유언과 같은 편지라고 보아도 맞겠습니다. 바울은 편지 속에서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목회자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말을 기록하였는데 교회적인 것과 개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교회적인 것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 공동체를 ‘증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 교인들 앞에서 내가 너에게 부탁한 것을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심화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목회의 원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특별히 충성스럽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해서 수용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더욱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길러내는 일은 바로 그러한 유익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와 일치합니다.
은혜 안에서 강하라
그런데 이제 사도는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말입니다. 목회자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유함과 지혜, 슬기, 친절함 등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난 것은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목회를 할 때 어떤 사람을 대단하게 보겠습니까? 여러분 가까이에서 목회를 돕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 비상하고 재능이 있습니다. 지식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에 내키면 열심이 뻗치고 마음이 틀어지면 때려치우는 사람들을 여러분들 가까이 두고 목회의 동역자로 삼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점에 있어서 조금씩은 부족하고 모자라도 세워진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견디며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목회의 동지로 삼으시겠습니까? 그것은 대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합니다. 물론 아주 명석하고 예리하며 매너도 탁월한 사람이 견고하기까지 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마치 가랑잎 속에서 바늘을 찾을 정도로 희귀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모자라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무엇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가를 계산하면서 사람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숨겨놓으신 위대한 경륜을 성취해 가는 우리의 목회 사역은 한번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와 같은 행위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기업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이 파는 제품도, 자신들이 있는 가게 자리도, 심지어 전화번호나 가게 이름도 바꾸지 않고 수십 년을 유지해오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엄청나게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고 사회적으로 이미지가 엉망이 되자 회장도 사장도 해고하고 사옥도 옮기고 로고도 바꾸고 심지어 회사 이름도 바꾸는 기업도 있습니다. 회사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이미 국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회사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있는 기업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업 중 하나가 유한양행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제품은 웬만하면 신뢰하고 사용하는데, 로고도 보면 정말 촌스럽습니다. 버드나무 늘어뜨린 이미지인데 벌써 100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겠습니까?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있고 신령한 것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강함은 인간의 결기, 고집, 본성이 만들어내는 강함입니다. 그러한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좋지만 자연적인 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것 때문에 불리한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편지 속에서 “은혜 안에서 강하라.” 혹은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강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저는 몇 번의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받은 느낌은 성령을 체험하고 나니 갑자기 제가 큰 능력자가 되었다든지, 성령 체험하기 전에는 전혀 없었던 그 무엇이 뚝 떨어지듯 내게 생겼다든지 -물론 그러한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과거에 제가 들었던 성령 체험자들의 과장된 간증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있었습니다.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났을 때 어느 순간에 성경이 확 열리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느 본문을 펼쳐서 툭하고 손가락으로 짚어도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난 후에 저의 느낌은 그러한 변화들보다 오히려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나의 존재와 삶이 마치 요동치는 바다 위를 두 사람이 간신히 탈 것 같은 쪽배에 몸을 싣고 파도와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난 후에는 제 자신이 군함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내와 8만5천 톤의 배를 타 보았습니다. 배에 누워있는데 배가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그 바다가 유난히도 잔잔했다고는 하지만 배가 8만5천 톤에서 10만 톤 정도 되면 웬만한 높이의 파도에는 어마어마한 거구의 선체가 거의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한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강하다’는 것은 누구든지 한판 붙어서 상대를 뒤집어엎을 것 같은 폭력적 강함이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강하다’는 것을 알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자기의 유익을 버리고 이웃의 행복과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강한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아주 강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은혜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 앞에서 깝죽깝죽 댑니다. 그러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면서 한판 붙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랬을 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아무리 깝죽거리며 말 많은 사람이 있어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럴 수도 있지.’ ‘뭘 몰라서 그런 것이지.’ ‘본인은 얼마나 괴로울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을 알게 되겠지’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안에서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시기는 하지만 잘 깨지는 그릇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순수해도 유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투박해도 언제나 거기에 있는 강하고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폭력적이지 않은 사랑의 감화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짧은 시간에 이 구절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비결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미래에 어떤 일이 전개되어도 나는 하나님의 수중 안에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좋아하는 환경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거나 안전한 곳에 우리가 늘 사용할 수 있도록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강한 사람은 물론 그러한 것들을 원하지만 그것들이 사라지고 없어도 쉽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혼자 팔짝팔짝 뛰면서 뭔가 다 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한숨을 깊이 내리 쉬면서 ‘목사님, 저희 교구는 정말 큰 일 났습니다.’라고 낙담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신령한 강함이 있습니다.
병사의 삶
사도는 1절의 가르침을 토대로 교인들은 증인들이라 부르고, 목회자인 디모데에 대해서는 ‘병사’라고 부릅니다. 옛날 번역인 ‘군사’라는 말이 더 듣기 좋은데 왜 이런 번역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편집자 주: 이등병-병장까지는 병사, 하사-원사까지는 부사관, 그 이상은 장교) 한국에서는 ‘병사’라고 하면 병장 이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졸병입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졸병은 아니지 않습니까? 군대로 말하자면 그래도 여단장 혹은 사단장까지는 안 되어도 중대장이나 대대장쯤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왜 이렇게 번역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병사라기보다는 군인입니다. 군사라는 말입니다.
군사로 모집된 사람들은 자기의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다 빼앗는 이유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군 안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친구와 애인과 연결되고, SNS에 연결되어서 마음이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해병대나 특수부대(UDT) 같은 곳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어떤 관계에도 매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제는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입니다만 예전에 북으로 보내는 북파공작원들을 어떻게 모집했는지 아십니까? 법무부를 통해 약 20년 이상의 형을 받았거나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 중에 가족들이 없고 신체 건장하며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지 않은 젊은이들을 불러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어봐야 사형을 당하거나 20년 이상의 형을 살고 출소한다고 하더라도 쉰 살이 넘으니 한번 북에 다녀오면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자유도 주고 그 동안의 모든 기록도 지워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고 합니다. 초점은 이것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바로 아무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찾았던 것입니다.
플라톤의『국가론』을 보면 전사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가슴에 해당되는 전사 계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금의 시대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가정이 없습니다. 대신 늠름하고 씩씩한 양질의 유전자를 가진 군인들이 자식을 낳지 않으면 폴리스의 인구 전체가 심각하게 줄어들기 때문에 국민 중에서 특수 군부로 분류된 이들은 모두 공동생활을 하며 아내들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사람만의 아내, 어느 한 사람만의 남편으로 특정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낳지만 누구의 자식인지 확인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부다처제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전사는 인체에서 가슴에 해당되어 어느 순간 자신을 다 버려 공동체를 지켜야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데 그렇게 인연이 확정되면 그 대상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집착이 생겨나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들에게 음식을 주되 양을 제제하지는 않지만 질이 매우 높은 음식을 맛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속에서 끊임없는 욕망이 생겨나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전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상실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공동체 생활을 하지만 가정은 없고, 예쁜 애들이 있지만 자신의 자녀는 아니며, 먹는 것도 거친 음식뿐이고 아주 혹독하고 고된 훈련을 받으며 전투력을 단련해야 하는 이 전사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가? 이들의 특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탁월한 지혜를 가진 철학자인 왕과 가까이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 그 힘을 가지고 전사로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인체에서 아래 장기에 해당되는 일반 평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이유와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전사와 같은 사람들이 나라에 있어야지만 그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플라톤도 그런 나라를 실험해 본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 그려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없지만, 게다가 이 이야기를 성경에 모두 적용시킬 수 없지만 번뜩번뜩 빛나는 그 무언가를 보게 됩니다. 그의 통찰은 상당히 예리합니다.
어느 나라건 결국 무너질 때에 그 원인은 백성들이 부패하여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다 망가져도 똑바른 판단을 내려야 할 왕과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전사의 그룹들이 살아있는 한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역사를 보면 신라시대의 ‘화랑제도’가 있었듯이 고구려에는 ‘조의’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화랑과 같이 아주 젊고 건장한 젊은이들인데 이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나라와 결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죽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수나라와 당나라가 침공하였을 때에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조국을 위해서 산화하는 것에서 찾습니다.
예수의 병사로 부르심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군사다’라고 하였습니다. 군사는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는, 그 전의를 가슴속에 불태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한 전의에 불타야 하겠습니까?
신학적으로 보면 뱀이 들어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있어서 반란이었습니다. 그 반란은 지상에서 일어났지만 사실은 그 근원을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이 반란군들이 계속 세력을 형성하고 자손들의 피를 더럽히면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별하고 보호하십니다. 그 세력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그가 이기는 것 같아 보이나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구속의 날을 준비하시고,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의 싸움에서 아주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될 준비를 하시면서 구약에서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달려오는 것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두들겨 엎어서 당신의 나라로 만들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은 당신의 영광을 아주 극한적으로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늘의 사단이 뱀을 조종하고 죄가 들어온 것처럼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심으로 의가 들어옵니다.
전쟁의 그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 사단은 반역을 주도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하수인의 머리였고 모든 인류는 거기에 동참한 부역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청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토벌군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구원하셨다는 것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것만이 아니라 구원받는 그 순간 이 토벌대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즉시 영적인 전쟁터에서 전투로 수행할 군사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슴을 불태워야 할 것은 최종적인 승리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그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승리를 갈망하며
우리는 너무 달콤한 기독교, 유약한 기독교, 그리고 소비중심의 기독교, 자기만족중심의 기독교로 변질시켰습니다. 성경이 그려낸 구원의 그림은 구원 받음과 동시에 군사로서의 소명입니다. 그 구원 자체가 소명입니다. 군사로서의 소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사입니다. 문제는 군인들이 전황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쟁의 상황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태릉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1975년에 월남 패망 소식을 뉴스로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경악을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였는데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베트남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십니까? 아침에 미군이 무기를 구입하면 그 다음날 미군과 월남군이 그 무기에 맞아 살해되는 것입니다. 월남 군인들이 이 무기를 가지고 그 전날 밤에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 콩가이들에게 넘겨주면, 콩가이들은 밤중에 베트콩에게 돈을 받고 이 무기를 넘겨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베트콩들이 이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짓을 하다가 결국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왜 입니까? 군인들이 부패하고 전황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점에서 너무 우려가 됩니다. 연일 터지는 국방비리 사건들, 성희롱 사건들을 보면서 군인들의 정신이 전쟁에 있지 않다는 것을 봅니다. 너무 오랫동안 나라가 평안하다 보니까 전쟁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군이 포격을 하여 연평도가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니 대통령이 당장 출격하여 원점을 폭파하라고 하였더니, 국방부 장관이 하는 말이 “대통령님, 당신에게는 그러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가 김태영이라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의에 불타는 마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승리를 전망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