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8∼11)
녹취자: 배미라
안녕하십니까? 전국에 계신 횃불회원 목회자 여러분, 그리고 해외에 계신 선교사역자 여러분, 저는 열린 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남준 목사입니다. 우리는 유래 없는 코로나 팬더믹을 겪으며 2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도 이 상황이 터지고 나서 처음 한 두 세달 동안은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불안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목회를 해야 될 것인가? 대면예배가 모두 끊어지고, 성도들을 교회에서 가르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막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빨리 판단해서 온라인 시스템으로 전환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어떻게 대면하여 목양하는 사역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힘겹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간을 통해서 결국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목회해 해왔고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되었지요. 이보다 더 큰 시련과 박해도 이겨낸 교회의 역사가 있는데 이 팬더믹 상황 하나를 가지고, 치사율도 그다지 높지 않은 이 팬더믹 하나 때문에 교회의 모든 활동이 멈추는 것을 보면서,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목회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목회 해 왔는가? 그리고 앞으로는 이 팬더믹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도들을 양육하고 목양하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길러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성경과 신학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목회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변화된 세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경의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굳게 붙들며 부흥 목회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목회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 속에서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때 그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밑에 있었습니다. 노전도자, 노신학자, 노사도의 마음을 울리면서 나오는 이 목회에 관한 그의 견해를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만나게 됩니다.
목회란 무엇일까요? 목회하면은 하도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림이 선뜻 그려지지 않고 몇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심지어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도 목회란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금방 대답을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지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보다는 목회라는 활동의 영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하는 일이 하도 다양하기 때문에 어디를 입각점으로 정의를 내려야될지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말씀에 의해서 목회가 무엇인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그리고 그 기도가 일평생 지속되는 기도는 그의 비전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 교회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든 비전이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담겼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친 언급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33년의 생애는 3년으로 응축되고 3년은 다시 3일로 응축되고 그 3일의 핵심을 구성하는 내용이 주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주기도문이 펼쳐진 생애가 예수님의 공생애고, 그리고 그 기도를 이루기위해서 당신이 마지막 선택한 일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고 죽으시는 대속의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란 무엇일까요? 사도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여기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기도하던 바를 아주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오늘 성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목회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따르자면 하나님을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고,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계속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원과 함께 주신 그 성도 안에 있는 사랑을 어떠한 방법들을 사용해서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결코 목회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도 사모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열정을 품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담임 목사에게 맡겨야 되겠는데 그 담임 목회자로 사실상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물으신 질문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3번이나 부인하고 배신한 사람인데도 그를 목회자로 부르고자 하셨을 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3번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고, 소명의 체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에 대한 경험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고 그 목회자의 목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설득해서 사랑하게 하고, 전도라고 부르고, 이제 모든 돌봄을 통해서 목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예전보다 더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은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는데 그리스어로 ‘테리쉐’라는 단어예요. 어떤 뜻이냐면 물통 같은 것들이 테두리가 정해져있는데 계속 액체를 부어서 그것이 그 한계를 넘어서서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느 상태에 도달했으면 이제 되었다라는 지점이 없고, 계속 물이 솟아나서 샘물의 울타리를 넘어서 바깥으로 넘쳐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넘쳐 흐르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이 훌륭한 목회를 하는 사람이고, 다른 것을 모두 잘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못하는 것은 목회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목회를 훈련이라고 말하는데 그 훈련이란 자신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훈련이요, 어떻게 효과적으로 목양을 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가라는 것을 체험해 가는 과정 인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물건을 만드는 것 같은 제작자의 방식으로 훈련을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 자신이 거기에 일체화되어서 체화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을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일치를 배워가면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목회가 목회를 잘 하면 목회를 하면할수록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자기 자신도. 그리고 목회를 잘 못하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하면 그 목회자가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목회를 못하면 그 목회만 못 한 게 아니라 자기도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이제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넘쳐흐르도록 성장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자신을 돌아봅니다. 기준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왔는가 물론 그것도 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얼마나 교회에 헌신 했는가, 그것도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기준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지체들이 작년보다 하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사랑이 계속 불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한번만 불 붙이는 것이라면 부흥회라도 하면 되겠는데 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 불꽃처럼 타올라야 하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목표를 이렇게 세우지 않는 목회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소수입니까? 결국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한 것이죠. 그것을 오늘 귀국격(?) 전치사를 써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그려보십시오. 이 불길이 사랑의 불길입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신학자들은 이제 이 사랑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물론 그리스 전통에서는 이 사랑을 더 많은 것으로 나누지만, 신학적으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가페이신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그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그 아가페 사랑에 눈 뜨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죄인임에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속에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또 다른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은 아가페 사랑과 동질의 것이면서도 원천에 있어서는 달라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불렀고 그 아가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써의 사랑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까리따스를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지순의 사랑입니다. 애덕이라고 번역이 되기도 하는데 저는 지순애라고 번역합니다.
어쨌튼 하나님이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아마레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마레데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과 에로스의 사랑의 융합 지평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사랑하길 원하시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사랑 인 것이죠.
어쨌든 이것을 신약 그리스 성경에서는 ‘아가페’로 통일해서 말합니다. 그 사랑이 불꽃이라고 비유를 한다면, 이 불꽃이 계속 타오르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가연제가 있어야 해요. 땔감이 계속 공급되어야지만 이 불길이 계속 타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짝 마른 짚을 불태우면 어마어마한 열기로 타오르지만 시간이 얼마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계속해서 가연제를 공급함으로 그 불길이 타오르게 하여야 하는데 그것 없이 불꽃은 타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가 무엇이냐, 지식과 모든 총명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왜 지식 앞에는 ‘모든’이 없고 총명 앞에는 ‘모든’이 있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결국 사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이었을 것이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의 불길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이 지식이 무엇일까요? 그리스어로 이 지식이 ‘에피그노시스’라고 되어있습니다. ‘에피’는 무엇에 관하여 전체를 뜻하는 것이고 ‘그노시스’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기노스코’, ‘알다’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 뜻이 정말 심오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성경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신학적인 깊이를 가진 동사, 그리스어 성경에서 10개를 고르라고 하면 아마 최고의 순위에 있을만한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알다’, ‘기노스코’ 라는 단어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심오한 뜻으로 쓰인 것을 한번 보죠.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그의 마음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에피그노시스’라는 말은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철저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물들의 쓰임, 제작, 용도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결국 그 사물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까지를 아는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이제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칠 때에 ‘피지카’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 ‘루기카’ 거기에서 논리를 찾아내고, ‘에티카’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사물에 대한 지식을 사물에 국한시켜서 보지 않고, 나와 무관하지 않은 지식이라고 봄으로써, 사물의 모든 있는 존재들이 내 인생에 대해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나의 윤리적인 삶과 연관을 지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고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지식이었습니다. 이런 지식들이 근대 이후에 와서는 다 해체되어 물질 문명과 함께 이제 물질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나누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지식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깨지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간의 사고방식은 기독교 선교에도 적잖은 어려운 영향을 끼쳤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지식은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에요. 그 사물이 무엇인가? 크게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내’가 있고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사람’이 있으니, 이 두 지식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인간과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 이것이 바로 지식인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과 연관 시켜서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라고 말씀하시며 들에 핀 백합의 화학적인 성분이나 물리적인 작용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모든 지식을 공부하고 배우되, 마지막에 이것을 하나님과 인간과 자신과 연결을 시키면서 하나님을 결국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론은 있지만은 어거스틴이 작사했다고 알려진 그 동요 속에서 우리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을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어떻게 잘 알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가? 온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믿음의 지식을 가지고 보면 너무 세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타락하였으나 여전히 아름다움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주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을 성도들에게 잘 전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매일매일 새롭게 알면서 사랑이 증대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목회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눈으로 예전에 못 보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기를 힘쓰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만 하나님을 알고 나면 자신이 하나님을 더 아는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이미 알려진 바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여념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이 얼마나 대단한 용량이겠습니까? 한편으로는 망각되기를 바구니에 담은 물처럼 빠져나가고 한편으로는 더 이상 공급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퍼주니 그 지식은 빈곤함이 도래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 예전에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고자 하는 심미욕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풀에 매달린 이슬부터 반짝이는 이슬부터 시작해서 밤하늘에 끝없이 흐르는 우주공간의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온천하에 가득 묻어있는데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그 묘하심을 우리 어디서 지식으로 채취하여야 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정수처럼 모인 곳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예요.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인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구속의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 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이 모든 만물에 흩뿌려 놓으셨는데, 그것과는 비교 될 수 없이 어떤 원천적인 아름다움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들의 아름다운 것들을 마치 눈부신 빛줄기를 쏟아내듯이 그렇게 쏟아냈고, 그 빛줄기들을 모아놓은 것이 성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외연으로는 자연의 만물에 대한 지식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육체와 마음에 관한 지식으로 수렴되고 마지막에는 종교에 관한 지식으로 수렴되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의 역사로 수렴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지식의 체계는 이제 이 모든 자연적으로는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한 지식에서부터 우리의 지식이 시작하지만 그러나 그 구속주를 아는 지식으로 상승하고, 그 상승한 지식이 루터의 말처럼 다시 하강하면서 모든 만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드러나게 되고, 이로써 이 모든 세계와 비록 타락하여 인간이 여기저기서 악을 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그러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런 사물들에 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잘 심어줌으로써 성도들은 눈에 비늘이 떨어지는 것처럼 예전에 모르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발견한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이성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진짜로 상대방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마음속에 욕구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욕구와 진짜 아름다움이 만나면서 그걸 진짜 아름답다고 생각할 때에 사랑은 아주 빠른 속도로 ‘페리쉬에’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신학공부를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분별하고 알게 해주는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사랑을 창조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결국 그것을 도구로 우리 속에 전달 될때에 그 때에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사랑이 점점 더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성도들에게 찬란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용기에 담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너무 찬란하고 눈부시니까 그에 맞는 언어의 그릇에 담아야 됩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온몸으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알고, 이미 감격하고 있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성도들은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사랑의 불길을 점점 더 풍성하게 불러일으키는 첫 번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총명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앞에 ‘모든’이 붙지 않은 것에 대해서 굳이 신경 쓸 필요 없고 결국 모든 지식, 모든 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아이스떼씨스’라고 나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아이스따도마에’ 놀라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스떼씨스’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총론’이라고 번역이라고 되었는데 이것을 라틴벌게이트역에서는 ‘쎈쑤수’라고 번역을 했어요. 쎈쑤수는 직역을 하면 감각입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육체의 몸으로 하는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감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영어성경에서는 ‘understanging’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결국 칸트 이전의 철학에, 칸트 이후에는 좀 달라지지만, 칸트 이전까지로 보면은 이 ‘understanging’은 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존 로크의 계몽주의를 일깨운 한 책이 있었죠. ‘On human understaing’ 이라는 작품이에요. 인간오성론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이제는 이 오성이 너무 용어자체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다시 인간지성론이라고 번역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고전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정신 작용에는 추론하는 작용이 있고, 직관하는 작용이 있어요. 추론하는 작용은 이성이 담당을 하고 그리고 직관하는 작용은 오성이 담당을 하는데 이 오성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처럼 이렇게 우리의 물질적으로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분을 꿰뚫어 알게되는 믿음도 바로 이 오성의 역할을 통해 획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 ‘라치오케나치오’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사물들을 추론하는 과정이고, 그리고 이제 사물을 직관하는 것은 소위 디아레티케라고 해서 변쟁의 과정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깨닫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총명은 결국은 판단력이라는 작용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호크마라고 하는 단어와 그리고 그리스어 성경에서 소피아라고하는 이 단어가 그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파스칼이 말한바와 같이 인간의 이성에만 논리가 있는 줄로 사람은 생각하지만 인간이라고 존재는 마음에까지도 마음 나름의 논리가 있다. 다만 이성의 논리는 수식으로 풀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논리는 그것을 풀어서 쓸 수 없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확고한 그런 논리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러한 논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다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도 받아들이고 신앙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 만져질 수 있는 인간보다도 훨씬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결국은 두 가지 지식과 그리고 총명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을 밝혀 줄때에 그때에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데 ‘말론카에말론’, 어떤 한계가 없이 계속해서 증대되는 것 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러면 정리하겠습니다. 목회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한 두 수단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지식을 통해서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총명을 통해서 그렇게 성도들의 마음의 사랑이 불타오르게 한다. 그러니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또 믿음을 더 갖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점점 더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니 이일을 통해서 우리가 목회의 부름을 받았다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팬더믹의 상황 속에서 어려운 때에 사람들은 더더욱 이 지상의 일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천상의 일에 눈길을 돌려야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도움을 필요하고 있는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사명이 하나님 사랑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지식과 모든 믿음을 전달하는 사람들로써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충실한 도구로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인 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사랑으로 불타오르기만 하면 목회가 끝난 것이냐, 그것이 아니죠. 그렇게 불타오르는 사랑을 가지고 마지막으로는 사랑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랑은 천국에 가서도 그치지 않고 계속 되겠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얼마든지 그 사랑에서 멀어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포함해서 똑같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이웃을 변함없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우선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의미를 확장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게 결국 무얼 뜻하느냐,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그런 사랑을 가지고 성도는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것은 그리스어로 도키마조인데 직접 시험을 해본다라는 뜻입니다. 즉, 어떤 물건에 어떤 작용을 가해서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바깥으로 드러나보도록 조사하는 것을 가리켜서 분별이라고 부릅니다.
꽃이 있는데 이게 너무나 기가 막히게 기술이 발전해서 생화처럼 기가 막히게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가까이 가서 봐도 도저히 이것이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할 수 없어요. 그 때에 꽃이 파리를 뜯어서 손톱에 으깨 보면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이것이 진짜 꽃이구나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런 동작을 가리켜서 도키마조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놓고 교부들부터 많은 해석이 있어 왔는데 피터 오브라이언이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말해요. 많은 것들중에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해석보다는 19세기 주석가 뱅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보이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행위다.’ 이렇게 한 해석이 훨씬 맘에 듭니다. 무슨 뜻이냐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선하게 보이는 것, 예쁘게 보이는 것들은 수없이 많은데 사실은 그것이 눈속임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순수해진 사람들은 그 모든 지식과 총명을 가지고 사태를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예쁘게 보이는 것들을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대신 진짜 선한 것들을 찾아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목회를 해야 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했는데 결국 진실입니다. 여기서 ‘진실하여라’는 단어는 ‘에일리크리네스’라고 그리스단어인데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노’라는 동사가 합친 것입니다. ‘크리노’는 판단하는 것이에요. 그 앞에 있는 ‘에일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에일리’가 ‘에일레’에서 왔다고 보는데 그리스어에서 ‘에일레’는 태양빛을 가리킵니다. 즉 그 당시 문서나 혹은 값이 나가는 어떤 물건이나 작품같은 것들을 햇빛에 비추어봄으로서 진위를 판별한데에서 이것이 유래하였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검증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렇게 비춰서 진위를 가려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에일리’라는 단어가 채와 관계 및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구니처럼 되어있는데 가느다란 망사가 있어서 거기다가 곡식가루 같은 것을 넣어서 흔들면 구멍보다 작은 것은 빠져나오고 굵은 것은 걸리게 되어서 결과적으로 고운가루를 채로 쳐서 구별해 내는 그게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노’가 합쳐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크기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분말들을 채에 넣어서 흔들어보면 객관적으로 어떤 것들은 가느다란 가루고 어떤 것은 굵은 알갱이라는 것이 채질에 의해서 판명이 된다라고 하는 뜻 입니다. 그것은 결국 ‘진실하다’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로 발전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라틴어로 ‘베룸’이라고 하는 이 진실은 진리, ‘베리타스’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솔직해지는 것과 진리가 합쳐진 상태가 진실입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진실은 진리에 부합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 행실의 상태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사람을 죽였는데 ‘그래 내가 사람을 죽였다’ 솔직히 말하고 ‘어쩔래’라고 묻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솔직히 고백은 하는데 자기행위에 대한 진리의 판단이 결여돼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양심에 작용하는 진리의 빛이 없어서 그래서 ‘내가 사람을 죽였다. 어쩔래?’ 라고 물으니까 우리는 그것을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진리라는 ‘기준자’에 비추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백하며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선악 간의 판단까지 함께 고백하고 뉘우쳐서 다시 진리로 돌아오려고 할 때 우리는 이것을 진실하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흑흑흑’ 울면서 ‘그땐 제가 무엇인가 눈에 씌었나봅니다. 나는 정말이라도 그런 사람 인줄을 몰랐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래도 사람을 죽인 죄를 내가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면 이것은 진실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를 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이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진실이라는 미덕의 가치는 거의 1도 쳐주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까 OECD국가 중에 우리나라의 행복관이 가장 물질적이었습니다. 가장 물질 중심의 행복관에 아직도 빠져있는 것입니다. 벌써 나라는 잘 살게 되었어도 사람들의 정신이 그만큼 미숙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거 아닙니다. 진실성이 없으면 솔직해지면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진실성이 없는데 선을 행하는 척하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주님께 탄핵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 가운데 진실성에 대해서 아주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에서는 이 진실성의 가치를 아주 높게 쳐주는 신앙 훈련을 계속 해야지만 이 거짓된 세상이 참된 세상으로 돌아 올수가 있고 진리를 버린 세상이 진리로 돌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이 진실의 무게를 아주 천금처럼 여기며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 행한 모든 것을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진실은 결국은 끊임없이 진리로부터 이탈하려는 자신을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감으로서 그 진리의 합치되게끔 하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문제를 다섯 개의 논리로 아주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신학대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첫째는, 신자 안에 있는 성령은 진리를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리라’ 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하시는 일은 당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를 가르쳐주신다.
두 번째는 그런데 성령은 사랑하신다. 이 두 가지를 요약하면 진리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계신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사랑은 나누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의 열정이 사랑 일 수 있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열정은 참된 하나님 사랑의 열정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령은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둘째는 ‘성령은 사랑이시다’. 셋째는 ‘사랑이신 성령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신자를 인도하신다’. 넷째는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 하비투스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섯째 ‘신자는 그 올바른 성향을 가지고 만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성향은 성령이 함께하시는 결과다’.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이고 진리에 자신을 부합하려고 하는 것이니, 결국 진리에 대한 사랑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 누구도 이 진실을 추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실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진실하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들을 불타오르게 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음’입니다. 여기서 말합니다.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 허물없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아크로스코포스’인데 ‘없다’라는 접두어 ‘아’와 허물, 과오를 가진 크로스코포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결국 거치는 것이 없는, 흠이 없는,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신이 허물없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성도들이 허물없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나는 허물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다양하게 해석했지만 저는 초대교구, 동방교구 크리소스테네의 해석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이제 이 허물을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교회에나 거치는 자들이 되지 말고 남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런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물은 신학적인 허물과 윤리적인 허물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인격적인 허물로 통합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해야 할 목표가운데 첫째는, 분별하게 하고 두 번째는, 진실하게 하고 마지막에는 허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없는 성도들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살아가게 되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결국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빛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사람은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빛나는 빛이 되니 그 빛을 보면서 그들을 빛나게 해주신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뛰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최상의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목회는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진실하고 그렇게 해서 허물없이 살아감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들게 하려고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11절에 와서는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율법을 행하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무엇인가 덧입어 의롭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게 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결국 그리스도 구속의 의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의, 우리를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적인 의의 윤리적인 열매들이 가득해서 성도들의 삶을 보는 모든 사람들, 성도들의 인격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대로 목회를 하되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계속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도록 그렇게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목회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