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장의 목양 생활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여 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겔 34:7-10)
녹취자: 이경순
오늘 여러분들이 지체를 목양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만나는 어려움 속에 있는 네 유형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이 성경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주신 말씀입니다. 특별히 영혼을 돌보아야할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지적하신 내용이 목자의 마음으로 양떼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서 하나님이 양을 찾고 하나님이 직접 그 양떼들을 다루시겠다는 책망의 음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들은 결국 영혼을 돌보는 이 일을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관심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영혼들을 돌볼 때 이 일이 정말 멀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가깝게는 한 인간의 인생이 달린 문제라고 하는 것을 깊이 자각하면서 이 영혼들을 돌보는 이 일에 헌신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시하는 다섯 가지 유형 이외에도 또 다른 형태에 속하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을 다 다룰 수는 없고 우선 이 다섯 가지 유형만을 소개하고 이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을 이해를 해도 아마 다루기 힘들었던 많은 지체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선 제일 먼저 많이 만나는 첫 번째 유형의 지체들은 교리를 배우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도 이야기 나왔지만 성장반이나 구역공부 하면서 학습에 깊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학습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게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 저의 경험에 의하면 학력하고는 별 상관이 없이 아주 굉장히 고학력자인데도 거의 하나님의 진리를 학습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능력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있고 초등학교 정도 밖에 졸업을 못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탐구 하는 데에 아주 탁월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것을 먼저 집고 들어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교회에서 워낙 훈련이 안되어 있어서 우리교회에 와서 엄청난 부담을 느낍니다. 다른 교회 가면 좀 잘 대접을 받고 풀어주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이랬는데 여기에 와서 뭘 자꾸 하라는 것이 많으니까 그것을 내가 굳이 내가 그렇게 해야 되나 그리고 거기에서 훈련이 안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예전의 교회생활과 비교하면서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실은 교회도 떠나고 정착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작은 것이다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여러분도 아마 듣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영적인 요인과 이성적인 욕구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요인은 욕구가 있으면 어려운 것이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욕구가 있으면 그것을 터득하기 힘든 것이 자신에게는 모험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지식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거기서 오는 왜 나만 이런 걸 해야 되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성취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해본적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언젠가 한번 스타크래프트 교본이 나왔는데 500페이지 정도의 커다란 전과 같은 것을 초등학생들이 사서 읽으면서 스타크래프트를 해서 청소년들이 대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어렵다고 생각을 안 합니다.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아주 좋은 겁니다. 교역자 수련회를 갔다 오다가 제 고향에 들러서 커피 집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주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감리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몇 번 오셔서 저분은 꼭 목사님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짐작이 맞았네요. 그러면서 말문을 트며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커피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자부심도 가지고 있고 해서 여러 가지 물어보았는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는데 그 세계에 들어가 보면 한없습니다. 기구부터 시작해서 커피에 대한 지식 커피의 명칭부터 시작해서 기호 취향까지 아주 복잡합니다. 그러면서 커피를 맛있게 먹는 법을 이야기를 하는데 팁을 주는데 절대 생수로 커피를 끓이지 말랍니다. 그 물은 커피 타 먹는 물이 아니랍니다. 미네랄워터를 반드시 쓰랍니다. 광천수를 쓰랍니다. 아주 질이 좋은 지하수를 쓰든지 아니면 최소한 아예 자연에서 광천수로서 채집해서 나온 생수 그런 것을 써라 그러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지식들을 아마 그 사람도 상당히 다년간 공부도 하고 아카데미도 다니고 하면서 자기도 제자를 길러내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많은 것들이 커피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자주 짜증나고 귀찮게 느껴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즐거운 이야기이고 그리고 오묘한 사실을 하나씩 둘씩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아주 신비감을 주는 즐거움을 주는 겁니다. 문제는 그러한 영혼의 욕구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교리를 배우기 힘들어하고 말씀을 깨닫는 것을 힘들어 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역장이 물건을 선물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제일먼저 우리들이 기도해아 될 것은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생과 회심일수도 있고 혹은 이미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이 새롭게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변화되는 회심의 반복일수도 있겠으나 어떻게든지 영혼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정말 변화를 받으면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그담에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렬히 탐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목양의 절반은 부담을 더는 겁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에도 웨스트민스터에서만 설교한 것이 아니라 엘에이 온 누리 교회에서도 설교하고 사우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에서도 한국 신학생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는데 굉장히 그 교회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열린 교회 설교를 정기적으로 청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그 사람들이 모두는 아니지만 열심히 있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저한테 와서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을 누가 그것을 강제로 하라고 하면 70분 80분씩 되는 설교를 매번 듣겠습니까? 그중 어떤 사람은 토요일 앉아서 매주 4번의 예배를 모두 드린다고 합니다. 똑같은 것을 왜 듣느냐 했더니 똑같아 보여도 들어보면 조금씩 다르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중에는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만났는데 말씀의 이해력이 아주 탁월합니다. 그들이 실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이런 사람들은 뭔가 영적인 깊은 변화를 받으면서 말씀의 맛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변화받기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질적으로 그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람이 아무리 배가 부르고 음식의 욕구가 없어도 그날 분위기와 음식의 종류는 없는 것처럼 보였던 식욕을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밥 먹을 생각이 거의 없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들기름에 부친 고소한 빈대떡, 배가 불러도 한 젓가락 정도는 사람들이 먹어보고 싶어 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역장을 하면서 영혼들을 쭉 살피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민감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떠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이 지금 사람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무슨 철학이나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관심사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그 사람이 고민하는 것에 대한 답을 성경과 말씀을 통해서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해 주는 그런 지식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네가 사람들에게 많이 권했던 책이 여러 권 있지만 초창기에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많이 권했던 책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조셉 얼라인의 『회개의 경종』이라는 책하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로이드 존스의 『영적 침체』였습니다. 조셉 얼라인의의 책은 누구에게 좋냐면 구원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굉장히 애매해서 아주 고민하는 사람에게 주면 금방 반응이 옵니다. 집어던지든지, 회개하든지 반응이 옵니다. 그담에 기도하고 싶어 하는데 기도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브레이너드의 책을 준다든지 영적인 침체 속에서 막 혼란스러운 사람들에게 로이드 존스 책을 들려주면 금방 옵니다. 그런데 바꿔서 주면 반응이 매우 더디게 옵니다. 자기가 민감해하고 있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로 삼도록 그렇게 돌보는 겁니다. 거기에는 아주 세밀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따뜻하게 해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길입니다. 실천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적용이 매우 풍부한 쉬운 말씀부터 접근을 해서 성경을 읽게 하고 그담에 교리를 배우게 하고 그담에 신학을 공부하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람이 견고한 지식의 기반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의미는 사상의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의 체계가 바로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귀의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는 도대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누구시고 이 세계는 무엇이며 그래서 인간은 어떤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또 인간을 바라보고 역사를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하는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누에가 고치 속에 갇혀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껍질 안에서 자기를 중심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 관점은 객관적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고치에 있는 사람은 이 생각을 하고 저 고치 안에 있는 사람은 저 생각을 하고 그런데 그 사람이 누에고치에서 튀어나와서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에 비로소 자기가 전부인줄 알았던 누에고치 안에서의 세계는 단자에 불과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것보다 훨씬 큰 그 이상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앞에서 그에게 회개하고 그를 전심으로 믿으려고 할 때 바로 그렇게 세계와 인간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객관적인 관점이 생겨나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객관적인 관점에 대해서 성경이 풍부한 지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어떤 시각으로 성경을 읽을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성경에서 골자를 모아놓은 것이 교리고 교리를 풍부하게 한 것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그 신학을 가지고 다시 성경을 바라보고 그래서 그 성경에 의해서 신학이 조정되고 그래서 올바르게 된 신학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이 되고 하는 해석학적인 수난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믿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가야되는지에 대한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백스턴 목사님이 우리는 농부에 불과한데 이렇게 어려운 교리를 계속 배워야 합니까? 하고 교인이 투덜대니까 천국에 가는 길이 당신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습니다. 농부가 아니라 농부보다 더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하는 교리를 배워야지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압적으로 자기의 지식을 뻐기면서 하면 안 되고 사랑으로 그렇게 잘 모본을 보여서 저 사람의 정돈되고 질서 지어진 확고부동한 삶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할 때에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에서 나오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환란이 계속 겹쳐서 힘들어하는 지체들입니다. 어려움이오면 소나기로 온다고 시험에 들고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계속 엎친데 덥친 격으로 환란에 환란이 겹칩니다. 그렇게 될 때 지체들은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고 마음은 아주 혼란스러워지고 충동적이 되어서 가지런했던 삶의 양식들이 훼손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이리저리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떠하던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씨름을 하다보니까 마음이 너무 분산되어서 기도하고 하나님 의지하고 이럴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상황이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되고 시련이 계속 오니까 하나님을 향한 적당한 원망도 있고 또 이런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교회의 질서에 대해서 신앙의 질서에 대해서 내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앙심 같은 것도 있고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도 있고 이러면서 마음속에 불평이 쌓이면서 마음이 엉클어져서 아주 인간의 마음의 정념이 아주 변덕스럽게 되고 고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말 너무 환란이 많이 겹치면 사람들은 얘기하기조차 싫어합니다. 너무나 비극적인 일을 당하거나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울 때 나타나는 제일 첫 번째 특징은 사람들을 회피하는 겁니다. 싫은 겁니다. 만나기도 싫고 대화하기도 싫고 뭔가 어려움 있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전 단계에 있는 사람이거나 너무 지쳤기 때문에 이제 외부에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실 절망적인 상태가 아닌데 연락을 일체 끊습니다. 휴대폰도 안 받고 연락을 일체 끊고 그러면서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드는 것입니다. 심하게 되면 우울증, 대인기피증 같은 것도 오고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데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우선 대부분 그런 환란이 일어난 것들을 외부자의 힘으로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편과의 갈등이라든지, 이혼 , 자신의 정신적인 질병의 문제라든지 등등등등 여러 가지 한 번에 우리가 대신 해결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경우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에 제일 필요한 것은 함께 아파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도움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환란과 시련을 계속 만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주 예리하게 파고들어오는 시험의 목소리는 ‘너는 혼자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너는 외톨이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네가 그렇게 아파하고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려도 너의 고통에 동참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제 너는 외톨이다. 이 제 것 네가 맺어왔던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은 다 피상적이고 거짓이었고 위선 이었다. 이런 속삭임들이 막 들어옵니다. 그래서 완전히 고립 시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놓고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게 만들면 그러면 절망에 이르게 하기가 아주 쉬운 것입니다. 마귀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아파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우선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잘못의 결과로 그런 것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등등의 논리적인 것들이 다 있을지라도 그것을 먼저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왜냐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 죄를 지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죄의 결과인 비참이 가져도 주는 고통에 동참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 참여해서 그가 아파하는 것을 자신도 아파해주는 겁니다. 사람은 영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파하는 것을 이 사람이 진심으로 동참해 주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동참해 주는 겁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매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혼을 했습니다. 나는 하지 말라고 교역자를 통해서 몇 번을 권면하고 편지도 쓰고 어쨌든 간절히 권했습니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하고 일 년 가까이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왜 안 나왔느냐고 하니까 교회가면 목사님에게 혼날 것 같아서 못나왔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왔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이기 때문에 야단을 치면 그 일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렇게 쳐다보니까 나를 마주치지 못하니까 열린 공간에서 피해 가는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살려고 했던 사람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가까이 걸어갔어요. 깜짝 놀라는 겁니다. ‘아, 이제 드디어 바가지로 혼을 내려고 걸어오는구나.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깨를 꽉 잡아주며 딱 한마디 했습니다. 많이 힘들지? 그래도 힘을 내라, 그리고 나는 본당으로 들어갔습니다. 후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며 그러고 나서 얼마나 그 자매가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사람은 공감 받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최근에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감을 받지 못할 때 그때에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란이 겹쳐서 어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줍지 않게 뭘 도와줘서 고통을 덜어줄까 이런 것 생각하지 말고 제일먼저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식구들이 있으면 다 바쁘니까 각자 다 밥 차려먹고 옷 입고 나갑니다. 그러다가 가족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온 가족이 그 사람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회사도 일찍 끝나고 병원으로 달려오고 절대 그런 것 안하던 아내가 집에서 반찬도 만들고 해서 죽도 쒀가서 들고 나오고 애들도 꽃 사가지고 오고 그럽니다. 바로 그런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역에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일시에 초토화 되어가지고 온 구역이 전부다 환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 명이면 두세 명쯤 그런 사람이 있고 상태가 좋은 사람이 서너 명 있고 오락가락하고 그저 그런 사람이 서너 명 있고 석여 있습니다. 그러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 사람이 힘들어하지 방식으로 알리고 관심을 갖게 만들어 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하면서 아픔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어느 지체가 아이가 아파서 거의 온가족이 초토화 되었습니다. 남편은 지방에 근무하는데 지방에서 뛰어 올라 오고 도와줄 가족도 없고 아이는 계속 지켜야하고 자기는 직장을 다녀야 되고 구역에서 구역식구들이 하루씩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6시간씩 이렇게 도와주었답니다. 얼마나 커다란 힘을 얻었는지 모른답니다. 그렇게 그 슬픔에 고통에 동참 해주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의 마음은 정말 간사하기 때문에 은혜 안에 있던 사람들이 미끄러져서 어두운 길로 가기도하지만 어둠속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놀랍게 바꿔서 하나님께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시련을 당하면서 막 혼란스럽다가 기도를 많이 해주고 그렇게 아픔에 동참해주면 어느 순간에 이 사람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가 실제적인 답을 찾을 수 있기 시작할 때 어두움 속에서 빛이 들어오는 겁니다. 문제는 구역장을 하는 사람들이 그 영혼이 그러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 시련과 어려움이 물러가야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기 때문에 그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아주 신비스럽게 역사하셔서 오히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을 육신적으로만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회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목양사역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열매를 거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역장들이나 순장의 마음속에 저 영혼의 상태에 대한 거룩한 갈망이 있어야 됩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마음속에서 편안함이 없는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일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면 어떻게 영혼을 섬길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 어느 수술실에서 수술을 끝마치고 의사가 수술실에서 나왔습니다. 가족들이 가슴을 졸이면서 기다리다가 ’선생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니까 .정말 수술은 기가 막히게 잘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아 다행이다, ’그런데 환자는 죽었습니다.‘ 수술이 잘되었으면 환자가 살아야지 수술은 잘 되었는데 환자가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신학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하고 그담에 목양에 대한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영혼의 구원과 변화라는 열매로 나타나야지 교과서 대로 가르쳐 준대로 훌륭하게 했는데 영혼은 죽었다 그것은 수술은 잘되었으나 환자는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 의사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라고 모든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환란이 겹쳐서 힘들어하는 지체들과 환란에 동참하라 그래서 그의 괴로움이 자신에게도 아픔이 되게 하라 그리고 그 후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지혜가 따라오게 됩니다.
세 번째는 기도가 안 되어 힘들어 한다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어 정말 힘듭니다. 기도가 안 됩니다 이럽니다. 이 말이 두 가지입니다. 정말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담에는 사실은 그게 아니라 별로 기도를 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가 기도를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에게 경우에는 욕구가 모자라는 것이고 전자의 사람들은 기도하려고 욕구를 갖는데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다 모자랍니다. 본질적으로는 사실은 기도의 친밀함을 가로막는 것이 결국은 죄 이외는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기도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기도하도록 계속 격려하고 독려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지만 가끔은 기도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기도할 의무를 해제 시켜줍니다. 기도하기 너무 힘들면 하지 말라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읽게 한다든지 설교를 듣게 한다든지 묵상을 하게 한다든지 특히 책을 읽게 하는 겁니다. 읽으면서 그러면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위안도 됩니다. 책을 읽다가 보면 여러분들이 잘 골라야 합니다. 그런 책들을 경건에 도움이 되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면 저 같은 경우에는 기도생활을 일으키는 데 위인들의 전기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 설교문 이런 것들이 제게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읽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적인 자극도 되고 어느 순간에 마음이 따듯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길게 몇 시간을 기도하지 말고 그렇게 마음이 움직일 때 거기가 어딘지 간에 짧게 짧게 기도 하는 겁니다. 짤막짤막 하게 진심을 담아서 기도하게 되면 그것이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싶은 또 다른 욕구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불을 땔 때 보면 작은 나뭇가지를 놓고 불을 붙여서 조금씩 조금씩 큰 나뭇가지를 놓고 불을 때듯이 그렇게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기도 안 되는 사람에게 새벽기도를 나와라 철야기도를 해라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그것보다는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독서 혹은 설교듣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마음이 움직일 때 한정된 분량만큼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의 기도보다는 마음을 진심으로 심어서 일분 이분이라도 기도를 하게하고 또 그런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자극을 받고 이렇게 하면서 그 사람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함께 기도해주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그리고 마음이 열려서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면 그 때에 기도에 관한 교리들을 배우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책들은 한국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비주의계통이나 관상기도계통으로 가지 않는 고전적인 좋은 책들을 읽고 기도가 왜 잘 안될까 라고 할 때 기도가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 그담에 교리적인 분석 이런 것들을 다룬 시리즈는 우리교회에서 가장 많이 한 설교가 십자가와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시리즈로 무엇이라도 여러분들이 먼저 듣고 은혜를 나누고 지식을 가르쳐주고 이렇게 하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계속 격려를 하면 그담에 작은 기도모임에 나오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회복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그런 모든 회복을 위한 도구일 뿐이지 그 회복 자체를 가져다주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인도해서 그래도 안 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돌볼 때에 우리가 그 영혼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해서 기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 앞에 호소력을 가지고 또 환란에 있는 성도들이 정말 저 환란에서 벗어나서 다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 그 일이 내일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이 일 년 이년 그 지체와 함께 지낼 때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느끼면서 그 지체와 자기 자신이 그리스 도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터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양을 해 나가고 그 결과를 우리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목양입니다
네 번째는 관계를 맺는 것을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성숙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헤아려서기 사람 중심으로만 떠 받들어주고 그러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숙도 문제가 있고 또 그를 받아주는 사람의 성숙도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을 힘들어 하는 지체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 자꾸 모임을 기피하고 안 나오려고 하고 그리고 자꾸 교회를 자꾸 떠나려고 그럽니다. 교회를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유가 사실은 관계입니다. 말씀이 별로 없어도 관계가 너무나 좋고 만족을 주면 사실 말씀을 희생하고라도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러니까 말씀의 깊이가 없고 신앙의 안정감이 없었는데 관계가 잘못될 경우에 떠날 수 있는 구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는 지체들이 있는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사랑의 특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관계를 새롭게 맺고 이미 맺어진 관계를 심화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 안에 그런 사랑이 많이 있으면 지체들을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든지 도와서 자신과 관계를 맺고 지체들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런 경우에는 혼자 하기에는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까 구역원들 가운데 상태가 좀 좋고 그리고 자신의 목양사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동역자 들을 갖은 구역원 안에서 늘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 사람에 대해서 이해를 시키고 설득을 해서 함께 관심을 보이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린 것만큼 만 사람을 향해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은 그가 관계를 맺기 힘들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어떤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변화와 관련된 문제지 단순히 사교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기도해 주고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계 맺기 힘들어 한 사람은 여기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에 교회에서 올 때에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온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일생을 살면서 그렇게 관계 맺기 힘들어 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런 관계를 잘 맺고 하나님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들을 잘 터득하고 나면 그러면 이 사람이 떠 날 수 없는, 자기가 이공동체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새 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제가 언젠가 교사 세미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편지 쓰기가 일상화 되어야 합니다. 요즘은 문자도 있고 이메일도 있고 많이 있지만 카카오톡도 있다고 하니까 그런 방법도 좋고 무슨 방법도 좋지만 그렇지만 난 아직까지 생각이 좀 그래서 그런지 편지가 참 좋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기록에 남아 있고 해서 참 좋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씁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고 그래서 마음을 열고, 저의 경험에 의하면 진심으로 기도하면서 편지를 쓰면 열통을 쓰기 전에 마음이 안 열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열통 쓰는 게 쉬운 것이 아니지만 열통을 쓰면 반드시 마음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대접 해줄 수 있는 곳이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런 거 하라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도 내가 쓰는 편지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주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갈 길을 보여주고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편지쓰기가 생활화 되어있습니다. 난 한통도 안 받았는데 하시는데 어떻게 다 씁니까 그렇지만 외국에서 오는 편지 국내에서 오는 편지, 할 수만 있으면 다 합니다. 무시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묻는 사람에게 무시하는 법은 없습니다. 최근에도 교회 안에 지체들이 몇 가지 한국역사에 관해서 물어 본 것도 있고 어려운 질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의껏 답할 뿐입니다. 아는 한도 내에서 그렇게 하면서 편지를 씁니다. 몇 년 전부터 나도 약아져서 편지 쓴 것을 전부다 다 보관을 합니다. 출력을 해서 보관합니다. 온 편지는 박스에다 보관을 하고 있는데 미디어 속에서 온 것들은 전부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전부다 출력해서 온 편지들을 나만 이해할 수 있도록 보관합니다. 준 내용 받은 내용 이런 식으로 쭉 보관합니다. 그렇게 편지를 쓰면 쓰는 가운데 그 영혼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고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로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그러나 정말 그럴수록 사람 마음속에 깊이 호소하는 언어의 힘을 가진 그런 편지는 많지 않습니다.
언젠가 백금산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백 목사 내가 뭐하나 좋은 거 보여줄까? 그러면서 탁 보여주니까 이거 당신이 군대 가서 이병 때 나한테 보낸 편지야 ‘형 나는 지금 뭐 잘 지내고 있고 군대와 보니까. 어쩌고 뭐 그 친구 군대에 있을 때 나는 교수생활 했거든요 이거 뭔지 알아 하고 보여줬더니 깜짝 놀라는 겁니다. 자기가 보낸 카드입니다.’ 형님 첫아들 영래의 돌을 축하합니다. 김영래 전도사 돌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넘겨보기만 해도 아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못 떠나나게 만드는 것은 추억의 힘입니다. 그런데 구역장하고 인연은 있었는데 아무 추억도 없습니다. 추억이라고는 자기가 교회 안 나오니까 전화해서 닦달하듯이 왜 안 나오냐고 그러려면 떠나라고 이런 이야기나 하고 그러니까 추억이 없는 겁니다. 관계를 맺기 힘들어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누구에게서도 받아 본적이 없는 그런 헌신이 필요합니다. 편지쓰기를 한번 해보십시오. 정말 좋습니다. 내가 늘 이야기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사실 별로로 생각했었습니다. 읽으면서 인간 김대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뭐냐면. 관제엽서 에다가 원고지 50매 분량을 적었습니다. 깨알같이 적은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그런 편지 써보십시오 관제엽서에다가 플러스 펜으로 돋보기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게 작은 글씨로 써서 그중에 모양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 담겨 있는 겁니다. 막 선물을 퍼 날라주고 그러는 것만 능사가 아닙니다. 마음을 기울여주는 겁니다. ‘아, 나 같은 사람과의 관계를 저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구나.’ 그 속에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문제는 ‘제가 그럴 힘이 없습니다.’ 구역장이 이러는 겁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그래도 되는데 엄마는 그러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엄마입니다. 어린나이에 홀로 되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그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 넷을 두고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으니까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오직 이 네 아이를 키워야 된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각하나로 3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아이들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거의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은 여러분들 정돈된, 칼빈이 즐겨 쓰던 표현이 있는데 기독교 각료에서 원래 프랑스본이 나왔는데 ‘뷔에 본네 오르돈니’ 뷔에는 삶이고 본네는 좋은 그런 뜻이고 오르돈니는 분사로 오디네이티드 그런 뜻으로서 잘 정돈된 질서가 잘 지어진 삶입니다. 그것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목사님 제 삶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습니다.작장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직장으로 교회로, 그게 좋은 것입니다. 딴 데 가봐야 뭐하겠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파격적인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똑같이 집에서 직장을 가도 성령 충만하면 매일매일 직장생활이 새로워 직장에서 교회에 와도 똑같은 교회이고 주위에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지만 주님의 말씀을 새롭게 들고 진리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면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정에 갈 때 어제의 가정이 오늘의 가정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형적인 삶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으로 아름답게 채워질 때 거기에서 진정한 정돈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그담에 회개하고 자기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시련들을 그리스도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로 승화시키고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그러고 살아가는 생활이 자기에게 있어야지만 그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좀 떨어졌어도 이것은 의무이기 때문에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엄마가 되어서 자식을 넷이나 다섯이나 놓고 혼자되었는데 오늘 기분이 꿀꿀 하다고 밥 안주고 저녁때는 기분이 멜랑꼴리하다고 애들 내버려두고 자기 혼자 춤추러가고 친구 만나러 가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굶어죽든지 사고가 나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싫어도 그것이 나의 의무이기 때문에 라고 생각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만날 때마다 빈말로 사랑한다고 해보세요. 한 백번만 하면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될 거 같은 운명 같은 걸 느낀답니다. 정말입니다. 물건 같은 거 실증 날 때 ‘아 이거 나한테 너무 소중한 거야’ 하면서 의미를 찾으면서 ‘소중해’ ‘소중해 ’그리고 자꾸 만져보면 절대 남 주고 싶지 않습니다. 쓰레기통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서 아주 소중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설교가 안 들린다고 그러는 지체가 있습니다. 되게 많지요 그때에 본인도 잘 안 들리면 참 신날까요, 체면에 나도 그런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설교가 안 들린다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지적인 수준이 안 따라오기 때문에 안 들린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고요 또 하나는 자기의 관심사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안 들린다 어렵다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설교라고 하는 것은 사상을 세우는 수단입니다. 사상을 세우는 수단인데 거기에서만 끝나면 철학 강론입니다. 그런데 사상을 세울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을 세워가는 과정이 윤리적인 실천으로 나타나도록 이 두 개를 함께 묶어 주는 것이 설교의 역할이고 이것이 항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설교가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켜서 설교가 요구하는 삶이 이 사람의 성향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짧은 시간에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하고 앉아서 가면 가장 빨리 갈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라고 이야기는 안하겠는데 집회를 갔습니다. 집회를 가기 전부터 ‘목사님 집회하신다음에 꼭 이박삼일만 시간을 내주세요. 정말 좋은데 보여드릴게요. 그러는 겁니다. 일박이일 시간을 내서 갔습니다. 이틀인가 집회를 했는데 정말 벌로 다시 만나고 싶지를 않았습니다. 거기에 세계적인 휴양지가 있는데 사진을 보여주는데 진짜 캘린더와 같았습니다. 제가 갔겠어요? 안 갔겠습니까? 제가 일이 생겨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여행은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같이 앉아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것은 정말 괴로운 여행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길의 구간이 어딥니까? 머리에서 가슴까지입니다. 평생을 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설교가 잘 안 들린다 그럴 때는 두 가지 요인인데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초점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안 들립니다. 절대 안 들립니다. 두 번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의 갈피갈피에 들려져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이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제일 중요한가지는 집중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흐트러진 마음과 자세로 열 번을 설교를 듣는 것 보다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해해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한편의 설교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중의 한사람은 자기가 은혜를 받고 자식들이 너무 안타까우니까 설교테이프 하나 들으면 10만원씩 송금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아버지 계시면 좋겠지요? 중요한 것은 집중입니다. 1992년도 4월5일 제가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었을 땐데 주기도문을 설교를 시작을 했었는데 첫날이었는데 화장을 곱게 한 예쁜 자매 하나가 앞자리에 앉아서 나를 정면으로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나서 펑펑 울면서 그날 회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랬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평생 불교신자였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오늘은 들어보리라 하고 들었답니다. 그런 결심이 굉장히 중요 합니다. 나를 미워하던 마음으로 째려보던 지체들도 변화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맨날 설교시간에 야단치니까 도끼눈을 뜨고 짝 째려보는데 나는 그것을 놀라운 집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중을 권합니다. 듣고 난 다음에 정리하고 하고 하는 것은 대부분 지적인 활동이 많고 중요한 것은 똑바로 앉아서 집중을 하도록 권면을 하세요. 그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종종 예배시간에 은혜 못 받는 사람을 거의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 속에서 은혜를 못 받고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을 우리의 힘으로만 양육한다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몇 사람이나 그런 사람을 신앙적으로 잘 돌볼 수가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열심을 다해서 구역에 있는 혹은 순에 있는 지체들이 좋은 예배자가 되어서 주님을 만나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 우리의 구역이나 순모임에서도 아주 적극적인 사람들이 되고 가르침들을 들을 때 그들에게 깨달음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안 들려 힘들어 하는 지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려고 하지 말고 아주 정확한 권면, 그래서 너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기도해라 그리고 한편이라도 좋으니 집중해서 설교를 들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변화를 기대하라 그렇게 충고해 주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구역원 들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변화 받은 간증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그 파급력은 아주 굉장히 큽니다. 구역장이 이야기 하는 것하고 같은 구역원이나 순원 중에 누구 한사람이 간증하는 것 하고 권위가 놀랍게 다릅니다. 구역장이니까 어차피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하겠지 그러지만 구역원들은 다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되도록 섬기면서 가는 어떨 때는 성과가 너무나 미미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미미해도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그렇게 가는 것이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