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위하여Ⅴ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경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교사가 되라 1 2000.6.6 교사대학 1
2. 성경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교사가 되라 2 2000.6.6 교사대학 16
3. 교사의 경건생활과 기도생활 2000.6.6 교사대학 26
1. 성경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교사가 되라
(*본문 없이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좀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한 6-7년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까 그런 필요들을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들이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없어요. 저는 교회를 (목회)하고 이제 6-7년이 지났는데, 저의 섬김에 하나님이 참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굉장히 많이 부어주셨는데,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막 감격하고 그래요.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어요. 교회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깊이 은혜 받고 변화를 받으면, 모두 견고한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 굉장히 격렬하게 회개하고 은혜 받고 또 말씀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말씀도 깊이 사랑하고 그 말씀에 깊이 감동받고 또 그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봤어요. 저는 그런 것들을 보며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어요. 왜 그럴까? 의문이 들었는데, 간단히 결론이 왔어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말씀에 저 영혼이 정말 은혜 받은 것과 겉으로 나타나는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은혜를 굉장히 받아서, 영혼에 지대한 변화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이 폭이 크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조금 밖에 영혼에 영향을 받았는데도 아주 격렬한 회개와 열정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저렇게 격렬하게 은혜를 받은 표현들을 하고, 얼마 안 가서 와르르 무너지는 사람들은 아마 처음에 표현은 그렇게 격렬하게 했지만,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게 아니다, 하는 사실을 느꼈어요. 주위에는 그런 격렬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견고한 것도 아니지만, 또 안했다고 해서 견고한 것도 아니고, 주위에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잘 서 있는 견고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 이더라구요. 그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깊이 아끼고, 뭐 안 아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뭔가 해주고 자꾸 교제를 가져주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견고히 서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굉장히 특별히 사랑해주고, 교제도 많이 가지고 그랬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봐도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와르르 무너지는 사람도 있더라 이거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 깨달았어요. 이건 목회자의 인간적 돌봄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또 다른 것이 이 현상 이면에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라는 것을 느꼈어요. 나중에 파악하게 된 공통점은, 그렇게 견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사상의 어떤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 사상의 골격을 세운 사람들이예요.
비유하자면, 엊그제도 우리 목사님들이 모여 토론하다가 그런 얘길 제가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예를 들어 존 스타트 목사님 같은 분들이 굉장히 젊은 복음주의 청년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고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 영국에 가 보면, 존 스타트 목사님이 세계적인 목사님이라는 실감을 하기가 참 어려워요. 영국 내에서 미친 영향은 참 미미하거든요. 여러 가지 운동들을 하지만, 그런 것들이 기독교 사이에 미치는 임팩트는 아주 제한적이에요. 한국에서는 굉장히 많은 팬들을 가지고 계시죠. 그런 이유는 뭔가 생각했더니 오직 하나에요. 존 스토트 목사님 경우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 고정적 사상들을 다 버리지 않고도 거의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이에요. 쉽게 얘기하면 칠을 하고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것처럼 충분히 가능한 그런 사상입니다. 그에 비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 안에서도 미치는 영향이 확실히 분명하거든요. 광범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분명한 하나의 물줄기를 영국 안에 만드셨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사상적으로도, 청교도주의가 확실한 관심을 받도록 만들어준 장본인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왜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 한국에서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 작은가? 그 이유는,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 자기 것을 다 파 엎어 버리는 변혁 없이는 받아들이기 굉장히 어려운 사상입니다. 즉 덧칠이 안 돼요.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 사상위에 목사님의 사상을 추가적으로 받아들여, 보완하는 식의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공통적으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비교적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공통점이 사상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 말씀을 들으면서, 한 때, 한 번 쯤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관, 성경에 대한 생각 등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기 세계가 이렇게 무너진 각성들을 경험한 사람들이예요.
두 번째는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어요. 뭐냐하면, 자기 것들이 무너져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요. 남는 것 없이는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에요. 이 세상에 아무리 무식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인생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인생관이 없이 산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인생관이라구. 아무렇게나 막 산다 짐승 같이 산다, 그 자체가 인생관이에요. 인생은 짐승살이다 그런거죠(웃음) 하여간, 그런 자신의 생각들이 무너지고 나면, 말씀에 대한 강력한 갈증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부지런히 탐구를 해요.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정보의 양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네 번째 특징은, 근본적으로 말씀이 그들의 내면을 뒤흔들었기 때문에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가운데 말씀을 가지고 고민한다는 거예요. 그 무슨 얘긴지 이해 되죠. 결국 인생관, 신앙관이라는 것도 살기 위한 것이거든요. 살기 위한 것....삶의 문제과 깊이 연관되어 고민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봅시다.
예화) 예배에 대해 지난 번처럼 세미나를 가졌다 합시다. 그것들을 다 듣고 나서, 자기가 드리는 이 예배 현실이 정말 성경적일까 그런 것을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제시를 받았을 때는 자기 예배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이 묻어 있어야 하잖아요.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예배를 드리는 그의 삶에 변화가 와야 하고, 변화를 추구하면 할수록 성경이 이 점에 대해 뭐라 할까에 대해 고민해야 하잖아요. 그런 것 없이는 안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바로 공통점이라는 것입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 고민하니까 다섯 번째는 어떤 고민이 나오느냐 하면, 이제 기도하게 되요. 깨달았는데, 그 깨달음이 우리에게 주는 삶이 A라는 방향의 삶이에요. 그런데 나는 계속 B라는 방향에 익숙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A 라는 것을 알면서도 B 라는 방향으로 밖에 안 가는 거예요.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뭐에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잖아요. 그런 다섯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계속 견고한 지식을 쌓여가게 만드는 거에요. 그런 삶의 추구를 통해서, 삶 자체가 배어있는 고민을 통해서 정답을 얻게 되면, 그것이 체험적 지식이 되어서, 성경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고, 체험으로 확신을 강화시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씩 답을 얻어가게 되는 것이죠.
물론 그들이 항상 성령 충만하냐고 물으면, 나는 결단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여러분과 같이 성령 충만할 때도 있고, 덜 충만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이런 차이에요. 길을 똑바로 알고 가는데, 어떤 때는 힘이 많아서 가야 길을 아는 사람은, 한 길로 가. 쉬어도 그 자리에서 쉬고, 다른 길은 길이 아닌 걸 아니까. 그런데 이런 것 들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 가다가 언덕이 많이 나오고 힘이 들면, 그 다음에 어떡해요? 다른 길을 택하게 되는 거예요. 어제도 우리들 그런 경험을 했잖아요. 뿡~ 하고 차가 왔어. 그런데 포장도로가 딱 끝나는 거야. 여기일 리가 없다. 비포장도로가 있다면 분명히 약도에 그런 표시가 있었어야 된다. 지나온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돌아가잖아요. 이 길이 그 길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다른 길로 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확신은 상태가 많이 좌우해요.
분명한 사상으로 정리가 되어 있으면, 이 길이 그 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사상적 정리가 되어 있으면, 힘이 없어도 이 길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가다가 비포장도로가 나오면, 이 길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이런 울퉁불퉁한 길로 갈 수 있겠어. 그러면서 한 바퀴 뺑 도는 것이죠. 그런 것이거든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에요. 교회에서도 이제 보시면, 좀 이렇게 견고한 사람들, 항상 말씀에 대해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있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정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상의 프레임이 세워진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이런 다섯 가지들을 충족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해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지금도 보면 이런 것들을 굉장히 안타깝게 기회 있을 때마다 가르쳐주는데도 뭘 가르쳐 주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굉장히 신앙이 견고해 지기가 힘들어요.
이런 거 있잖아요. 예를 들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함께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신념을 의미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의 사상은, 사람의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자기가 가장 깊이 공유되는 것을 붙들고 그대로 살아가면 사상이 되지만, 신앙적 기독교적 영역에서 볼 때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가 그 기독교 사상이 성경에서 우러나온 신념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갖고 있다 보면 어떤 유익을 얻게 되느냐 하면, 사상을 통해서 인생이나 교회, 삶의 여러 문제들을 판단할 수 있는 시야를 얻게 되는 것이에요.
가끔 보면, 여러분들도 경험했겠지만, 인생에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여러 문제에 부딪쳐요. 그럴 때 그거 하나하나에 대해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지 목회자에게 대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인생에 있어 답을 정말 모를 때도 있고, 답을 알아도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인생을 좀 더 많이 살고, 신앙을 가지고 고민했던 목회자의 고민이 꼭 필요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은 어쩌다 한번 오는 것이지, 뭔가 자기가 판단을 거의 못 내리는 사람처럼 되어서, 직장이라든지, 교회, 가정 영역에서 하나하나의 판단을 목회자에게 물어봐야 하는 처지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있어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곧 목회자를 많이 의지하고 사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판단을 내리고 살아야 하는데, 기독교 나름의 사상적 골격이 세워진 사람들은, 어떤 하나를 판단하고 내린 결론이,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판단으로 내린 결론과 맥이 닿고 연결이 이루어져요. 그렇게 될 때, 그의 인생 전체가 논리가 있고, 조화를 갖춘 삶이 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적으로 생각해요. 제가 중국에 작년과 올해 다녀왔는데, 거기서 사업하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기절할 정도로 웃었어요. 천진에 갔더니, 일본 사람들이 꽤 인내가 있는 사람들인데, 다 회사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어요. 열 받아서 도저히 사업을 못하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은근과 끈기로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국 사람이래요. 그런데 그들도 거의 정신이 뒤집힐 정도래요. 왜 그런고 하니, 어느 세탁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물건을 만드는데, 공장이 두 달도 안 되었는데, 거기서 만들어서 수출만 하는 스웨터인데, 온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스웨터를 다 입고 다니더래. 이게 어떻게 된 건가했더니, 일꾼들이 다 품쳐다가 판 거에요. 동네 사람들도 창고에서 훔쳐가고. 우리 같으면, 그런 거 못 입고 다닐 텐데 입고 돌아다니면서, 이거 어디서 났냐? 하면, 뭐 얻었다구 그러더래. 그래서 이거 우리 건데 왜 훔쳤냐 하면, 뭐 좀 많이 있으면 좀 나눠 입으면 되지.....그런 식이랍니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한국 사람은 뭐 돈이 좀 있으니까 좋은 차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오토바이가 쏜살같이 오더니, 문짝을 박살 내 놓고 자기는 뒹굴어졌어요. 그래서 불쌍하니까 일으켜 보니 많이 다쳤더래요. 차는 다 박살나고....그 사람은 병원에 입원을 시켜주었죠.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 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보상을 해달라는 거예요. 왜 내가 보상을 하냐?? 내가 다쳤지 않나? 내가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와서 뒷문짝 박고 내 차 박살냈는데, 인간적으로 불쌍해서 병원에 입원시켜줬는데 내가 왜 보상을 하냐 했더니, 중국에서는 그렇게 하는 거래요. 말이 안 돼서 재판을 걸었대요. 판사가 하는 말이 그래 니가 잘했고 오토바이가 잘 못했다. 당신이 피해자 맞다. 그런데 니가 물어줘 그러는 거야. 아니 왜 그러냐 했더니 판사 하는 말. 얘가 잘못했지만 돈은 니가 많잖아. 물어줘. 그러니 뭐에요? 다 개방이 되어서 민주사회로 가는 데도 여전히 사고 방식이 공산주의에요. 피해를 봤지만, 돈 많은 사람이 물어줘라. 이 사람은 니가 안 물어 주면 거덜나는 사람이고, 너는 물어줘도 넉넉히 살지 않냐. 또 한번은 똑같이 서로 피해잔데 물어주라고 하더래. 한국 좋은 승용차를 다 망가진 중국 트럭이 와서 받았는데, 또 피해자보고 물어주래. 왜 내가 물어 줘야 하냐? 하는 말이 얘는 보험을 안 들었고, 너는 들었잖아.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모두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사상이 다르니까 살아가는 방식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들을 그들 식으로 논리가 정연해. 아까 남의 회사에 들어가서 물건 훔쳐 입은 거, 우연한 행동이었잖아요. 교통사고 피해자에게 오히려 물어주라는 것도 우연한 일이었잖아요. 다 각각 행동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논리가 나오잖아요. 그게 사상이에요.
그리스도 인들이 세상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볼 때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의 삶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구요. 왜 저럴까? 그런데 가만히 그의 내면을 보면, 그의 모든 행동들이 하나 하나 이어져서, 논리적인 연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 속에 생겨 나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상적인 골격들이 신앙에서 생겨나지 않으면, 말씀을 듣는 기쁨들이 오래 지속되기 어려워요. 제가 소수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기독교 사상의 골격이 세워진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공통적 특징이 설교를 많이 들었어요. 정보의 양이 많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성실이라기보다는, 그런 골격을 가지고 있다보니까, 하나 하나 말씀을 터득해 가면서, 자기 나름의 신앙의 집을 짓고, 완성되어 간다는 기쁨이 있었던 거에요. 제 자신이 굉장히 그런 기쁨이 있었어요. 처음에 제가 하나님 만나고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 엄청나게 책을 읽었어요. 청교도 계통의 책들을 읽으면서 굉장히 기뻤던 이유는, 전에는 책을 읽으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유익을 얻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경험 이후에는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책 하나 하나가 내가 전체적인 신앙 사상의 집을 짓는데, 아주 유용하게 되는 거예요. 비유를 하자면 전에는 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품을 파니까 사람들이 집을 짓는 재료들을 나한테 댓가로 주었는데, 이집에서 열심히 일하면 벽돌 다섯 개, 저 집에서 일하면 유리창 두 장, 그렇게 얻어서 우리 집에다 가져다 놓았어요. 그런 보상도 책을 읽는 기쁨에 속했지만, 그때는 그냥 가져다 놓는 거예요. 열심히 일하면, 잔기다마도 몇 개 주고, 돌멩이도 주고, 그런데 그게 열심히 일 할수록 쭉 쌓이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나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 벽돌을 줍는데, 그 벽돌로 짓다가 만 안방 벽을 쌓는 거예요. 그리고 아주 적합한 비유 같은데, 막대를 주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하면서 마당 한 구석에다가 비를 맞으면서 그냥 두었는데, 이제는 그 막대기를 빨리 가져다가 유리 창틀을 만들어서 벽돌을 놓고 벽을 쌓는 그 위에 놓아서 안방 유리창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부지런히 읽고 나면, 안방하나가 만들어 지는 거예요. 또 하나 돌맹이를 주워 정원석을 놓고 이러면서, 계속해서 탐구열이 우러나는 거예요. 하나 하나 깨달을 때마다 완성도가 높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요. 이런 거 있잖아요. 사람이 사상적인 골격이 있으면, 누가 공격을 해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껴요. 빙산이 있어서, 바다가 해군이 항해를 하다가 웬 얼음 덩어리가 이렇게 솟아있어요. 자식들 말이야, 누가 이런 걸 가져다 놨어. 하구 대포로 꽝 쐈어요. 그랬더니 물 위에 있던 얼음이 싹뚝 날라가 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피가 나요? (웃음) 다시 떠오르죠.10분의 9는 물 속에 잠겨 있으니까.....면적이 높이 떠오르는 거예요. 계속 떠오르는 거죠. 그것처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만만하게 볼 수가 없어요. 논쟁을 한다든지, 어떤 논리를 가지고 공격을 하게 되면, 틀렸지?? 하고 꽝 대포를 날렸더니, 싹둑 하고 물위의 얼음이 날라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조금 있었더니 물 위에 이렇게 연기가 나더니 슉 떠오르는 거예요.
여러분, 인터넷 들어가 봤어요? 수요일에? 언제가 설교 시간에 예배 세미나 참석해서 난리치고 지나갔던, 그 버릇 없는 청년 있잖아요. 뭐 이름도 모르겠는데...왜 남을 비판하냐? 또 뭐,,,.,,그렇게 해서 당신네 교회 예배만 살아 있다구 이야기하는 건 결국 남의 교인 뺏어가기 아니냐, 그러면서 중구난방 좌충우돌 공격했잖아요. 그런 글 읽으면서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 많았을 거에요. 몇몇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사실, 그 사람같은 질문을 자기가 많이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답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를 4시간에 걸쳐서 A4용지 6장 정도로 죽 답을 썼는데,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렀는데, 그리고 나서 저는 사실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참 있다 편지가 왔더라구요. 잘못했다고. 잘못했다.....목사님의 인품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용서를 빕니다. 버릇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쭉 얘기를 하더라구요. 자기는 사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고, 사실 목사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합당치 않은(웃음) 참 인간이라는 게 간사해요......그런데 그 편지 끝에도 그렇지만.....하면서 또 토를 달았어요. 요새 그걸 또 박살을 내고 있는데, 편지를 쓰다 말고 미완성으로 두었어요. 하도 양이 많아져 가지구. 굉장히 많이 썼는데, 한번 날린 적도 있고.....
하여간 설교가 무슨 훈련과 전도 이런 것들이 종교 개혁과 관련돼서 그런 것들을 잘 몰랐고 소홀히 했고....뭐 그러면서, 그런 것들이 설교의 시녀가 되는 것을 자기는 원치 않고, 또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뭐 그런 식의 얘기 인데, 공통점은 뭔가 하면, 자기 얘기는 하나도 없고, 다 남한테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이에요.
그래서 그걸, 성경 해석 하듯, 한 구절 한 구절 해석 하면서, 그 사람의 말들이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죽 풀어나가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보며 승복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사상적 싸움이에요. 남의 말을 주워듣고 감정적으로 욱~할 때 공격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문제는 그런 공격을 당할 때, 그걸 사상적으로 받아서 그가 공격하는 문제들이 어디에 뿌리가 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비판 받는 내용들이 어디가 사상적으로 연결되는 지를 보여 주면, 아까 예를 든 것과 같이 빙산을 꽝~하고 대포로 날려 버린 것 같지만, 다시 또 떠오르는 거예요. 그것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큰 힘이에요.
우리들이 청교도의 설교 같은 것들을 읽어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아무리 간단한 설교라도 아~깊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이유는, 그런 설교가 그런 사상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설교 하나를 가지고 깊이 캐들어 간다든지, 비판을 한다든지 하면, 반드시 그 뒤에는 아주 심오한 사상의 체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런 사상의 체계는 쉽게 공격해서 무너뜨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해요.
그런 것들이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죠.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가 그런 사상을 갖지 않고도, 거룩한 삶을 살았던 때가 없어요. 성도가 어떤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때에는, 아주 깊고 심오한 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시대라 이거죠. 그런 사상이 있다고 모두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칼빈이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구교에서 뭐라 비판하냐 하면,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모두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면, 그것이 하나님 뜻이겠냐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건, 종교개혁 자체를 캐톨릭의 부패에 대한 하나의 윤리적인 공격 운동이라고 보는 거거든요. 사실, 시작은 캐톨릭의 면죄부라든지, 연옥설이라든지 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동기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건 하나의 동기였고, 실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면서, 그들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전수해 주려고 하는 신앙의 이 거대한 골격과, 구교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골격이 도저히 화합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느낀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 같은 경우, 루터도 마찬가지지만, 캐톨릭의 어떤 부정과 부패에 대해 치를 떤 분노하는 혁명정신 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 부분에서 테입이 30초 가량 묵음 상태로 녹음 불량입니다. )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간 거에요. 교부들 속에서 참된 신앙 사상을 발견하고, 그걸 받아들인 거에요.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쓴 것이 27세, 아니 26세 때인가로 기억되는데 뭐 그 어린 나이에 그걸 썼다는 것이 정말 놀랍구요. 지금 시대라면 오히려 놀랍지 않죠. 누구라도 능히 뭐 쓸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는 중구 난방으로 여기 저기서 카톨릭이 이렇게 잘못 되었다 저렇게 잘못되었다 비판 거리가 널려 있는 데서 단순히, 카톨릭을 산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참 된 신앙은 이런 것이다, 라고 전체적인 체계를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교부들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이런 전체적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그가 힘을 쏟았던 사역 가운데 하나가 논쟁이었어요. 그리고 그 논쟁에서 언제나 혁혁한 성공을 거두었죠.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서 지성적인 준비에 대해 스위스 로잔에서 있었던 그 논쟁에 대해 언급했죠. 그런 정도의 해박함을 말하는 것이에요. 단순한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영성과 무엇보다도 전체적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공격할 수 없었던 거에요. 그 골격을 가지고 칼빈은 역사 문학 종교 국가 사회 인간 그 모든 것들을 조망할 수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탁월한 사상가는 될 수 없겠지만, 그런 류의 사상을 반드시 소유해야 된다는 것이죠. 제가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 상당히 오래 다녔고, 은혜도 받았고, 다른 교회 안 가고 열린 교회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보니까 뭐, 다른 대안이 특별히 없는 모양인데, 문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런 것들이 사상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흔들려요. 언젠가....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이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그건 여러분들이 많은 양의 설교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는 하나의 시리즈라도 깊이 듣는 것이 굉장히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 교리반에서도, 누가 솔직한 고백을 하더라구요. 여기서도 대부분 교리반 지나신 분들이지만, 교리반에선, 대부분 <죄와 구원> <목자와 양> <신앙과 은혜체험>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듣는데, 들어온 사람들의 얘기가 굉장히 실망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새가족 반에서도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닳도록 공부했고, 목자와 양도 지겹게 들었고, 거기서도 리포트 다 써냈고, 그런데 똑같은 거 또 하더라는 거예요. 체제가 왜 이럴까?? 거기서 했으면 여기서는 이제 그걸 기초로 다른 단계로 넘어가야지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결국 20주 정도 하고 난 다음 내리는 결론은, 그 때는 뭘 몰랐다는 거예요. 그리고 새가족반은 성질 상 시간이 짧으니까 일반적인 강의식으로 나간단 말이에요. 교리반은 지금 2시간 30분정도 하거든요. 지금 시간을 많이 늘렸어요. 옛날에 1시간 시절에 받은 사람들은 졸업장을 무효로 할까 생각 중이에요. 그 시간 중에서 1시간 30분 정도는 쓸데없는 일에 쓰고, 2시간 중에서 초창기에는 한 시간 반 정도를 서로 나누는 데 사용했다구요.
자기가 듣는 것은 쉽지만, 듣고 나서 어떤 것들을 깨닫게 되었는지는, 신앙 사상을 표현하는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아주 깊은 이해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그러는 거에요. 무슨 말이냐하면, 거기 교리반 들어올 정도면 우리 교회 온 지 1년 정도 지난 사람들이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고,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온 사람들이에요. 초신자는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쭉 나누는데, 대부분 이단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 부분이 그렇게 무지한 거에요. 죄와 구원도 사실, 아주 간략한 설명에 불과하거든요. 청교도들이 들으면, 저렇게 간단하게 가르치면 어떡할까 할 정도인데, 사람들은 겨우 그거 들으면서도,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지는 거에요. 그게 사상이에요. 어떻게 죄가 들어왔으며, 인간이 왜 죄인이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그리스도가 유일한 희망이며, 그리스도께 구속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죄를 극복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들을 복음적으로 정리하고 나면, 정리된 것을 가지고 잘 사상적으로 잘 정리해야만, 자기가 성경을 읽을 때 실제적으로 사상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얻게 되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여러 개를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한 시리즈만이라도 제대로 깊이 듣고 그것을 사상적으로 잘 정리해야지만, 자기가 다른 성경을 읽을 때에 사상의 도움을 받으며 체계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에요.
이번에 교리반을 마치면서 보니, 처음에 막 2개월 정도 되었을 때는, 뭘 물어보면 막 제가 정말 좌절을 느꼈어요. 내가 어떻게 목회를 하고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허당이구나......그런데 5개월 정도 지나면서 굉장히 급속하게 발전했어요. 흔들리지 않는 그런 정돈된 사고들을 가지게 되니까 성경이 굉장히 재밌어 진다는 거예요. 성경이 중구난방으로 막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 저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 틀을 가지고 다양한 저자들을 사용해서 쓰신 거거든요. 우리들이 그런 틀들을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틀 같이 완전치는 않지만, 거의 유사한 그런 틀을 가지고 보니까 굉장히 성경이 재밌어 지는 거예요.
그런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 사상적으로 체계가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하면, 개인적으로 성경을 깊이 사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에요. 우선 말이죠. 많은 양의 설교를 들으면서 쌓아가는 것은 나중 문제고, 핵심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주제가 있잖아요. 죄와 구원을 통한 구원론, 예배에 관한 것, 목양과 교회생활에 관한 것, 죄 죽임의 교리와 성화, 신앙과 은혜 체험, 그건 말하자면 열정과 성경적인 체험의 문제. 이 열개 정도의 시리즈를 아주 깊이 들으라는 것이에요. 개인적으로 들으면 사실 깊이 듣는 것에 한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가장 좋은 것은 교리반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세사람 정도, 그 중 누가 여러분들 생각에 저 형제나 저 자매는 우리보다 훨씬 말씀에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중심 축이 되어서, 한 3-4명 정도가 동일하게 하나의 테입을 듣고, 교리반에서 처럼 같이 나누는 거예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게 힘들면 한 달 동안에 한 시리즈를 각자 듣고 만나서 시리즈 전체에 대해 토론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이 말하고, 저 사람은 저 말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게 있다구요. 공격을 받으면서 구축된 사상은 공격을 받지 않으면서 쌓아올린 사상보다 훨씬 강력해요. 왜냐하면, 제가 어떤 진리를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 말고 상대방이 공격을 해요. 그러면 제가 그건 이런 거다 하면서 설명을 시작하게 되죠. 그러면서 골격들이 세워지는 것이에요. 기독교의 사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세워진 것의 일부 공로는 이단들이에요. 이단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단의 공격을 통해서 두루뭉술하던 교리가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 졌어요. 그리고 진짜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 연구에 생명을 거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틀들이 좍 세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가 인간과 유사한 분이시냐, 아니냐 하는 문제 하나를 들고 탁 들어가도 역사적으로 그 문헌들을 보면, 이런 건물 하나에 쌓아둘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문헌들이 있어요. 얼핏 보기에는 뭐 사람들이 그까짓 것 하나 가지고 저렇게 싸우나 그럴 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진리 전체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이니까 그런 논쟁의 역사들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가 쌓아져 온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 받으면서 아멘 아멘 아멘 하면서 쌓아진 체계는 힘이 없어요. 공격을 받아봐야 해요. 사람들과 나눠 보세요. 왜 나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니가 틀린 것 같다. 계속 그렇게 토론하다 전체적으로 종합이 되면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 하나 쌓아져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 체계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책들을 통해서 이런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기도 해요. 책을 중구난방으로 읽지말고 저자별로 읽어라. 칼빈의 책은 꼭 읽어라. 기독교 강요부터 시작해서 그 삼십 여권에 이르는 주석까지 전체적으로 읽고 그가 쓴 논문집, 칼빈에 관한 논문집. 전기....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칼빈을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되는 거예요. 칼빈 자신이 그런 방법을 택했다구요. 어거스틴을 통해서 성경을 새롭게 보고, 칼빈의 신학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볼 때, 성경만 본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만 안 본다, 이러는 사람 만큼이나 위험한 거라구. 누구를 통해서 성경을 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이번에는 칼빈을 통해 성경을 전수 받고 나름의 신앙사상을 쌓아가는 거죠. 그래요. 그건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일단은 문헌 접근이 참 어렵고, 칼빈의 저작 전집 같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라틴어로 된 것 중에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도 엄청 많고, 영어로 번역된 것들도 옛 영어들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고, 또 대부분의 자료들은 불란서 어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많은 벽들이 있고, 우리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읽는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하는 것은 그것이에요. 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여러분들이 저를 딛고, 제 어깨를 밟고 더 넓은 세계를 보면 되요. 나는 청교도들을 통해 성경을 보고, 설교를 하지만, 누구도 내 설교를 가지고 청교도 설교라고 하지는 않아요. 나는 20 세기를 살고 있는 한 목회자의 설교이지, 청교도 시대는 갔는데, 내가 어떻게 청교도 설교일 수 없고, -청교도 적일지는 모르지만- 또 나는 근본적으로 누구를 이식시켜 놓은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로이드 존스를 존경하지만, 그분이 내게 이식되었다고는 생각지 않고, 오웬도 좋아하지만, 오웬이 이식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나일 뿐이에요. 김 오웬도 아니고, 로이드 남준도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런 것은 힘이 없어요. 땅을 보세요. 여러 가지 것들이 들어가지만, 결국은 흙으로 변하잖아요. 그 흙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그런 사상들을 먹었죠. 먹었지만 그 무엇도 이식된 것은 아니에요. 나는 나 나름대로 이런 신앙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나를 통해서 보고 여러분의 사상을 갖게 되면은......제가 로이드 존스 추종자에요 ? 제가 청교도들의 똘만이에요? 그들도 그걸 원하지 않고 나도 그걸 원하지 않아요. 나는 나일 뿐이에요. 한 설교자일 뿐이에요.
90몇 년도인가? 그 형제는 그러니까 꽤 고민을 많이 했고, 말씀에 대한 감각이 있는 형제였는데, 수련회를 갔는데 설교를 죽 듣고 나서 자기네 끼리 신학하는 형제들하고, 신학은 안 해도 말씀 사모하는 형제들이 모여서 토론을 했대. 뭐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자들 가운데, 김 목사가 누구를 본땄겠느냐. 저 사람도 분명히 자기 스스로 그런 것들을 발견한 사람은 아닐 텐데 원류가 누구겠느냐? 결론은 뭐냐하면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라는 거예요. 그건 뭐 어떤 우월성이나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예요. 물론 로이드 존스도 나의 훌륭한 뿌리이고, 에드워즈나 존 오웬이나, 리차드 벡스터 같은 분들, 다 뿌리에요. 그러나 그분들의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는 없어요. 저는 모두 깊이 존경하지만, 대체적으로 목회적인 실천에 따르지만, 신학적인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아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훌륭하게 존경하지만, 그러나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모두 융화 되어 가지고, 나라고 하는 사람이 나온 것이에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성경을 보는 독측한 시야를 갖게 되었다고 할 때 저는 여러분들을 제 똘마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고. 뭐 나를 추종하는 사람도 아니고, 저는 제가 이식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여러분들은 그런 걸 가졌기 때문에 이제는 내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를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되었고 사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이 너무나 유사하다 라고 한다면 그건 함께 말씀을 공유했기 때문이지, 나를 의식하거나 나를 추종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사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군가를 깊이 모방하면서, 한사람의 사상 속으로 깊이 젖어 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그 사람의 복사판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씩 터득하면서, 전체를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작년부터 제가 어떤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는데, 교회가 커지면서 이런 박약함들이 굉장이 많이 드러나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설교를 하는 것 말고 한 시리즈 정도를 한달에 한번 정도 많은 사람에게 숙제로 권고하고, 이제 다 들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나의 주제에 대해 무수한 질문을 받으면서, 뭐 공격이라고 해도 좋고,....뭐 방어를 하고 그렇게 설득하고 그러면서 전체의 사람들에게 골격을 갖게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보았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아주 실제적인 노력을 해야 되는데, 한 시리즈라도 깊이 듣고,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설렁설렁 읽고 던지지 말고 공격을 스스로 받아보라 이거예요. 자신이 동의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동의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지체들에 대해 공격해 보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하나라도 정립이 될 때 그때 그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것들을 보는 하나에요. 제가 어느 책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누가복음 19장인가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시는 장면들이 나오잖아요. 그 한구절인데, 그걸 쭉 보면서 기도에 관한 강력한 도전을 받고 나서, 성경 전체 속에서 흐르고 있는 신약을 보게 되는 거예요.
존 오웬이 원래 로마서 8장 13절 가지고 설교한 것은, 총론으로 설교한 것은 딱 한편, 불과 6쪽 정도의 분량에 지나지 않아요. 그 나머지 엄청난 분량은그 6쪽을 상세하게 해설해 나간 것이거든요. 그런데 첫 페이지 처음 읽으면서, 성화에 대해서 내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골격들이 전혀 개혁파적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보면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것, 어느 선교단체에서 전파하고 있는 성화의 교리들이 굉장히 위험한 교리라고 하는 것을 직감하게 된 거예요. 그거 하나 딱 보고 나니까 그 전에는 성화에 관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교리들이 쭉 꿰어지면서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전체적인 시각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많은 양도 필요하지만, 중요한것은 하나를 깊이 쾅 하고 부딪치는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사상을 볼 수 있는 시야를 획득해야 해요. 그러면 성경을 보는 것이 놀랍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냐 적게 읽냐 그러는데, 저는 그런 비교들은 기도를 오래하냐 짧게 하냐 하는 말과 똑같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영적인 깊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여러 시간 기도하면 그거는 그냥 여러시간 기도할 뿐이에요.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다르다 이거예요. 성경을 몇 시간 읽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 성경을 보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설교 준비도 마찬가지에요. 한 사람이 하나의 성경 구절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다 보면, 보다 더 자세히는 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영적인 통찰을 뛰어넘는 것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는 것들은 불가능해요. 그런 레벨은 일상적인 어떤 노력을 통해서 상승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그런 사상의 빛을 받아서 충격을 받으면서, 자신 속에 그런 사상이 생겨날 때에 말씀을 볼수 있는 깊이가 생기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흔히 질문을 하게 되잖아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대부분 보면 답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못해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최소한도 거기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각도에서, 너무 일상적인 데에 허덕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주일학교 허덕허덕, 껄덕껄덕 하면서 가르치고, 교회 출석하는 것도 허덕허덕 하면서 살아가니까 진전이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좀 더 깊은, 사상적인 임팩트가 있었으면 싶어요. 어떻게 하든지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을 더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요. 그렇게 되면, 말씀을 대할 때 눈이 흐릿해지는 그런 일들은 사라질 거예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살다가 불꽃처럼 죽었던 성도들이 있었던 교회 시대에는, 사상이 있었어요.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아주 분명한 사상이 있었어요. 그것 없이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견해 하나만 바꾸면 되는데 왜 거기 생명을 걸어요. 그냥 아니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인데. 사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쉬운 거예요. 참 그런 면에 있어 여러분들에게 깊은 자성을 촉구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설 수 있는 모판이거든요. 인생 아직까지 많이 남았잖아요. 잠시 그런 노력을 하는 것, 결코 손해나는 일 아니에요. 질문 있으면 하세요.
질의 응답)
질문1 (*질문자의 물음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답변) 그 두 개가 뗄 수 없이 연관된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성경적인 어떤 용어, 그리고 그 용어가 엮어져 나가는 교리, 이런 것들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것이 사상과 연관 될 수 없어요. 확신이 있는 사상, 그 뒤에는 신념이 있고, 그 신념 뒤에는 어떤 문제에 대한 아주 명료한 인식이 있다고. 그 명료한 인식 때문에 신념을 가질 수 있고, 신념없이 사상은 생기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연관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잠시 질문자가 첨가적 질문을 함 /신앙적 용어들, 단어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리가 이루어지면 그 사상의 체계르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느냐는 내용 ) 단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예를 들어 죄와 구원 같은 시리즈를 쭉 설교해 가면서도, 용어 같은 것들을 해설하고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단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정의죠. 정의. 구원이 대체 뭐냐......죄는 뭐냐.......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 교리반 11기에서 간증이 있었어요. 열린교회와서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은 것이 죄에 대해 굉장히 많이 설교한다는 것이었대요. 처음에 아주 짜증도 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점점 은혜를 받으니까 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게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뭐 어떻고.....막 이야기할 때 전적으로 아멘이 되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교리반을 하고 나서는 굉장히 더 많이 다가오더라는 거예요. 왜 죄가 인간에게 그렇게 절망을 가져다 주는가, 죄가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동의가 되었고, 아멘이 되었는데 인간의 그 완전히 평화로운 낙원에 죄가 들어온 그 죄의 기원, 그리고 그 죄가 물밀듯이 들어와서 인간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박살내고, 죄악 중 자녀들이 태어나고, 그 자녀들끼리 서로를 죽이게 만들고,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던 것과는 얼마나 형편없이 차이나는 방향으로 악하게 가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런 것들이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쭉 깨닫게 되니까 똑같이 지금도 동의하고 전에도 동의했었는데, 죄에 대한 그런 사상이 생기고 나니까 왜 저사람이 저렇게 죄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는가 그것이 사상을 가진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항변하기 어려운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는 거예요. 그게 사상을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차이에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 사상을 갖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야, 저 사람들 봐. 너무 불쌍하지 않니? 우리 이렇게 잘먹고 잘사는 것 죄스럽지 않니?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이 보십시요, 고통받는 우리의 인민이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은 느낌이에요. 그 순간에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느낌을 받은 거예요. 그러나 후자는 느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삶 전체에 사상이 밀고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런 고백을 했을 때는, 부자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혁명을 일으킬 준비도 되어 있는 각오된 사람의 발언이에요. 설명이 되었나요?
질문2) 신학자들 사이에서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일치를 보더라도 사상적으로는 다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들 중 누가 더 옳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가?? 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고 화합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문제들....
답변) 두가지 질문을 했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세계관 문제하고 연결이 되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또 그런 아닌 것 같다, 그런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협의적인 신앙 사상, 즉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신앙 사상에 적용한 거예요. 세계관은 없는 사람이 없어요. 예를 들어 무속신앙 시대에는 모든 것들이 귀신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이에요. 비가 왜 와요? 귀신이 오줌 눈다...뭐 그런식. 인간의 불행이 왜 오냐? 귀신의 장난이다..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거든요. 제가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골격을 잡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적용시킬 때 세계관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는 렌즈가 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세계관이 나올 수 있겠죠. 그리고, 또하나는 세계관이라 하는 것은, 다양한 세계관을 공부하면 자기가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종류의 세계관은 그 사람의 세계관이지 자기의 세계관은 아니에요. 진정한 세계관은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만물이 주께로 돌아간다고 말하잖아요. 거기서 주가 누구에요? 그리스도잖아요. 그러니깐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기독론이 세워지게 되잖아요. 그걸 가지고 세상을 쭉 보게 되었는데, 뭐냐하면 저렇게 다양한 만물의 기원은 그리스도다, 어떻게 존재하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마지막을 어떻게 되나?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 그렇게 아주 명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신앙의 경험이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파악하게 만든 것 아니에요. 이게 적용이에요. 이게 세계관이라구요. 그러니까 그 두 개가 서로 관련이 있지만, 사도 바울 처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관에 의해 세계를 바라본 것이 세계관이에요. 사도 바울이 만물이 주께로부터 왔고, 마지막에는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이 사상은 사도 바울의 세계관이에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세계관. 그런데 이 세계관의 기원은 신앙관이에요. 이 사상의 렌즈로 세계를 쭉 볼 때 충돌이 안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이건 내 것이고, 저건 남의 것이라고 할 때는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어요. 또 두 번째 질문 좋은 질문인데, 복음주의자라고 할 때 그 복음주의 폭이 엄청난데 어떻게 되는가? 넓은 의미로 복음주의 라고 하면 우파로 시작되는 근본주의부터 시작해서 칼 막스 사상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진동의 폭이 엄청나요. 아니 복음주의 기원을 종교개혁이라 본다면 종교개혁은 폭이 좁은가 아니거든요. 갚은 개혁 신학자인데도, 칼빈이 사회를 보는 것과 쯔빙글리가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다르거든요. 쯔빙글리는 사회를 뒤집어 엎어서라도 새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전사잖아요. 실제로 전쟁에 나가서...그런데 칼빈은 달라요.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거죠. 이렇게 진폭이 넓어요. 그러니 이제는 복음주의 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걸 가지고 프란시스 쉐퍼 같은 사람은 말하잖아요. 미국에서 복음주의라고 하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다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제 삼 세계에 게릴라 투쟁 하도록 무기를 대 주는 WCC 들도 다 복음주의라고 하니, 우리가 어떻게 복음주의를 신뢰할 수 있겠냐 하는 말이에요. 그건 아니다 이거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이건 각자 고민해야 할 문제에요. 누굴 추종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복음주의 진폭이 넓으니까 그 복음주의 중에서도 어떤 것이 정말 성경적일 것인가 탐구하면서, 세워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세운 것들이 어느 사람과 매우 유사할 수도 있어요. 칼빈과 유사할 수도 있고, 루터와, 쯔빙글리와 유사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완전히 같을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면 제임스 패커 같은 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사상에 대한 통찰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성도들을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의 경우 영국 국교도란 말이에요. 여러분은 영국 국교도, 성공회의 기원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알죠? 헨리 8세가 자기 마누라를 버리고 엔돌렌이라고 하는 예쁜 궁녀랑 결혼하려 했더니 교황이 안된다고 했거든요. 그래? 너 나 장가 못 가게해? 그럼 나도 너 짤랐어. 하면서 만든 게 영국 성공회거든요. 그런 교리에 우리가 동의할 수 있겠어요? 안 되잖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리차드 벡스터 같은 사람은 알마니안 주의자예요. 우리들이 다 수용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 지점에서 우리의 긴장과 고민이 그치지 않는 거예요. 끝없이 항상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어도 그 사람 전체가 다 자기의 교주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어느 것이 가장 성경적인가를 계속 고민해야 해요. 존 오웬 같은 경우 초기에는 장로교가 가장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후에 변해요. 회중교회 주의자로 변하죠. 그런 점을 로이드 존스가 굉장히 존경하잖아요. 자기가 처음에는 이런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연구하고 탐구해 보니 나중에 생각해 보니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결론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냐, 그건 또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분들과 논쟁을 할 수 있는 신학적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냐? 그건 아니에요. 그분들은 특출한 천재성 속에서 살았지만, 그 분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들을 추종할 수는 없잖아요. 여기 자매들 많으신데, 자매들보다 예쁜 사람이 무슨 화장품 쓴다고 해서 그거 가져다 발라요? 그건 아니잖아요.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능력의 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구도자의 자세로 고민하며 나가는 거예요. 거기는 우리와 일치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건 언제나 그래왔어요. 거의 같은 것 같은데도, 결국 칼빈파와 루터파가 화합을 못하잖아요. 사실을 우리는 성만찬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결국 합일을 못하잖아요. 그런 것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에요. 각자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죠.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 변화와 개혁하기 위해 진리가 아니 다른 영역에서 화합해야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문제라구요. 어느 정도 답이 되었나요?
질문3) (*정확히 들리지 않아 요점만 씁니다) 교리의 틀이 먼저 제시되면, 성도 자신이 고민해가며 스스로 성경을 보는 시야가 오히려 제한될 위험이 있지 않은가?
답변) 두가지로 답변하겠습니다. 성경을 깊이 읽기도 전에 어떤 사상에 눈을 딱 뜨게 될 때 성경 읽는 것을 제한하지 않느냐는 질문인데, 그 말은 맞아요. 맞는데......그런 사상이 없을 때 성경을 읽으면 읽으면서, 성경적인 사상을 발견해 내는 것은 몇 백년에 한번 씩 밖에 안 일어나요. 그게 문제라구요. 쉽게 말하면, 마틴 루터가 수도원에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구원 의미에 대해 천착하는 동안, 그가 가장 중심에 두었던 것이 구원론인데, 인간이 대체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에서는 답을 얻을 수 없었어요. 캐톨릭 신학 안에서는 답이 안 되는 거예요. 그 당시 캐톨릭의 신학은 영광의 신학이었는데, 그것 가지고는 답이 안 되는 거예요. 고민을 하다가 탐구를 아무리 해도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을 하며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가죠. 금식을 너무 많이 하니까 수도원장이 쫓아냈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박사가 되고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데, 히브리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런 것들을 가르치다가 결정적으로 로마서를 읽으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발견하잖아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쫙 열리면서, 복음의 빛이 들어오면서, 마르틴 루터의 독특한 사상이 이제 잉태되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제 얘기는 그것이에요. 그 사람을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다행히도 로마서를 통해서 탁 열리는 것을 만나고, 성경을 보는 빛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은 루터 만큼은 고민을 안 했을 지 모르지만, 유사하게 고민하는 더 많은 사람들은, 캐톨릭 신학의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봐요. 그때 루터가 그렇게 고민하다가 정답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 서문을 몇 쪽 읽다가 완전히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복음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이 후대에 나오게 되는데, 그게 웨슬리예요. 그러면, 웨슬리하고 루터하고 자리를 바꾸어 놓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루터가 자기는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고민을 하던 그 때, 누가 가서 십자가가 성경의 중심이 이 시편 31편에서 말하는 이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게 입혀진, 수동적인 의라고 하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한다면, 당장 복음 전체의 빛을 받게 되었을 가능성이 많아요.
형제가 말하는 것은 지금 전제잖아요. 전제. 사상이잖아요. 자기가 확인한 사상은 아니잖아요.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한 사상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사상이 성경에 기초한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동질의 사상을 경우는, 그 사상을 딱 가르쳐주는 그것이 성경 그 자체를 가르쳐 주는 것보다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이거예요.
성경이 이렇게 있잖아요. 성경을 해석을 해야할 것 아니예요.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원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원리가 형제가 말한 대로 교리일 수 있고, 사상일 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없으면, 성경 해석이 안 되요. 예를 들어 여기서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것을 심히 후회하셨더라. 사상이 없더라면 여기서 후회가 국어 사전에 무슨 뜻이에요. 자기가 한 것을 깊이 뉘우친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단순하게 아! 하나님도 후회하신다. 후회는 옛날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니까, 결국 하나님의 창조는 문제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하기 시작하면, 이게 안 되잖아요. 이런 식의 오류를 막기 위해서는, 성경을 볼 때 어떤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 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봐야 한다구요. 성경에서 후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다. 그에게는 후회가 없으시다, 라는 사상 없이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이런 것들이 또 하나의 엉뚱한 전제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해석의 원리가 필요한데 이 원리해석으 산물이 성경 자체로부터 나온 진리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동질의 것이 나온다구요. 능력에 있어 풍성할 수도 있고, 또 덜 풍성할 수도 있지만, 논리에 있어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는단 말입니다. 캐톨릭의 경우, 성경을 해석할 때의 원리가 성경으로부터 나온 논리 더하기, 자신들의 전통 역사 등이 가미된 거예요. 이 모든 걸 합쳐서 하나의 원리를 구축해 버린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다보니, 성경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닌 원리들이 섞여서, 그 해설의 결과가 성경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나오는 것이예요. 이런 말을 왜 하냐하면, 보세요. 이런 원리없이 성경을 본다, 는 것이 가능은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나오는 거예요. 형제의 논리대로라면, 형제도 나도 일단 예수를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오염된 사람들이예요. 성경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어요. 그럴 거 아니예요. 여러분, 캐톨릭에서 성경 읽을 때, (캐톨릭 식의 빠르고 높낮이 없는 톤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이렇게 읽는 줄 알아요? 어느 한 부분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 깔려있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누가 가장 편견없이 성경을 볼 수 있을까요? 전혀 예수 안 믿는 사람이죠. 논리대로라면. 예수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면..(*테이프의 끝입니다)
2. 성경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교사가 되라
아주 쉽게 얘기하면, 전제를 가지지 않고 사물을 볼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고 성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건 가장 성경적인 전제를 가지고 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이론적으로는 형제의 말이 가능한데 현실에 있어서는 불가능해요. 그럼 내가 물을 께요. 형제가 처음 주님을 믿기 시작해서 막 성경을 볼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객관적이었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문제가 생기는데, 누구의 사상이 가장 성경적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 거에요.
마틴 루터가 자기의 눈으로 성경을 봐야 한다는 말은, ‘자기의 눈으로’ 라는 말을 크게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봐야한다’ 라는 말을 크게 보라는 것이에요. 자기의 눈으로 성경을 봐야한다 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자기가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좋아요. 예를 들어 우리 눈으로 성경을 보고도 여러 가지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굉장한 한계를 일단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이제 칼빈을 스승으로 삼기로 했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칼빈의 사상이 성경적이다 그러더라, 역사적으로 그런 평가를 받았다더라, 그래서 칼빈의 사상을 전체를 봤더니, 그 사상을 통해 이제 성경 전체를 본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 뭘 주의해야 하냐하면, 그 칼빈의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건 좋은데, 그 성경이 칼빈의 생각을 동의하는 선까지만, 칼빈의 생각을 받아들여야지 칼빈의 생각으로 자기가 읽는 성경을 도배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이거예요. 그러면 또 그런 질문이 떠오르죠. 이미 칼빈의 사상이 입력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성경을 읽으면서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건은 로이드 존스를 보면 알아요. 그는 때로 칼빈을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버려요. 종교개혁자들을.....그는 자기 스스로 종교개혁자들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거기서 흘러나온 청교도들을 아주 높이 평가해요. 그러면서도 그는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들을 여지없이 공격하면서 박살을 내버려요. 그러니까 로이드존스를 하나의 독특한 기독교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자들의 똘만이가 되었겠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성경을 연구해야 되고, 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자기와는 정 반대편에 선 사람, 내가 비록 칼빈의 시야를 가지고 성경을 보지만, 정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다시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전체적인 사상에서는 칼빈의 얘기에 동의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에게 동의하기 힘들다,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거예요. 제가 칼빈의 사상을 깊이 좋아하고 그렇지만,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 시에서 행했던 개혁의 방법이라든지, 그런 면에서는 저는 동의할 수 없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영적인 방법과 이 지상에서 이루어진 방법사이의 구별을 오늘 날 건전한 복음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연한 인식을 못가진 채 행하지 않았는가, 그 역시 중세 시대의 한계를 지닌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아무리 권력이 나에게 주어줘도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했던 그런 방식대로는 안 할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칼빈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동의하지는 않는 것이죠. 다음 질문..
질문4) 무수히 많은 책들을 부팆쳐 자신의 신학 체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찾아가기란 일반인으로서 매우 힘에 겨운 일이다. 예를 들어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같은 식으로 명쾌한 도움이 되는 책을 권해 주십시요.,
답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상을 적용한 저자들을 읽는다는 것은 너무 방대한 일이에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죠. 요즘 현대의 조직신학 책들을 기존의 조직신학 책들이 교리를 중심으로 쓰여진 데 반해 이제는 그것들을 폭넓게 확대해 적용의 문제들, 환경의 문제들도 다루고 있어요. 제가 생각키에는 학문을 갖든지 신앙을 키워가든지 항상 동심원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에여. 처음에 성경이 있으면, 그걸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교리들을 배우고, 또 교리들을 좀 더 자세히 좀더 자세히....이러면서도 언제든 다시 성경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런 구조를 가져야 하거든요. 지적으로 좀 미숙한 사람들은 이 원을 적게 그리는 것이고, 지적으로 능력있는 사람들은 원을 굉장히 많이 그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작업없이 한꺼번에 동심원 바깥으로 뛰어나가서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식이 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아직 신학자가 아니고 평신도에 불과하잖아요. 여러분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고유한 교리에 관한 지식과 책들이에요. 고유한 교리. 그것을 보다 더 상세히 이해하고, 그것이 교리에 대한 이해고, 또 한편으로는 설교를 통해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교리와 적용시켜 나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것들을 함께 병행할 때 여러분들이 쌓여가는 것이지, 갑자기 뛰쳐나가 광범위한 범위에서 책들을 읽는다고 할 때 체계가 쌓여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면에서 우리의 주의가 요구되고...... 지금 교리반에서 이제 루이스 베르콥의 <기독교 교리요약>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는 많이 달라졌어요. 이제는 교회안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꽤 고학력이 되고 있고, 우리 교회가 강남에 있다보니 이런 현상이 더 심화되어 있죠.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고, 젊은 사람들의 많은 수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에요.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지적 능력은 개발하기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그 책 정도로는 이제 안 된다. 적어도 350쪽 이상 되는 <기독교 신학개론> 같은 , 혹은 교역자들이나, 전문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베르콥을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은, <조직신학> 7권 정도의 전집을 가지고 얘기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우리들은 이제껏 이것이 참 된 것이다 정도를 배웠지만, 이제는 역사적으로 왜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인 교리인지 까지 풍부하게 나오거든요. 성경계시, 종교계시 성경만해서만도 한 권이 될 정도니까......그런 책들을 통해서 뿌리 깊은 이해들을 갖게 되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그런 사상들을 갖게 되면, 그런 책들을 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책들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전혀 새롭게 들리지는 않게 되는, 자기 나름의 시야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해요.
사실은 그런 정도를 훈련 받아야 할 필요를 느낄 정도로 교리나 사상에 대해 탐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소수라는 것이죠. 시편 23편 설교도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지금 같이 말하고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런 다양한 요구들을 공적인 예배에서 다 만족할 수가 없어요. 복음적이고 교리적인 것들로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가고 그런 노력들은 소그룹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 날 교제, 친교 목적 이런 소그룹 얘기하는데, 그런 사상적인 성숙을 이루어 가는 소그룹들이 얼마나 있어요? 누가 소그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서, 자기네 선교단체의 논문 몇 십페이지를 띄워 놓았길래 내가 야단을 좀 쳤는데, 소그룹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소그룹 안에서 뭐가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어요? 답이 되었나요? 예를 들어 존 스타트 목사님의 <현대 기독교 문제에 대한 답변> 이라는 책들이 있거든요. 거기에는 낙태문제라든지, 도시 문제라든지 그런 것들을 보는 기독교적인 시야들이 있다구요. 그런데, 자신의 그런 체계가 생기면, 그런 시야들이 형성이 되어가는 것이죠. 더 넓어지고, 더 넓어지면 폭이 더 넓어 지고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화 된 사상이 중요하다 이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분들이 신경 쓸 것은, 교리, 교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고, 교리의 내용들을 깊이 영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사는 것이고, 또 그 교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한 거룩한 삶의 추구, 그리고 설교를 통해 이런 가닥들을 잡아가는 것, 개인의 경건생활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사상화 되어 가는 것. 이런 방면에 눈을 뜰 때 잘못되기 쉬운 것들은, 부지런히 책을 읽으면 그런 것들이 확 형성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건 아니에요. 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추구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결정체예요. 뭐 독서를 많이하면 저절로 되고, 수없이 설교를 들으면 저절로 형성되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삶의 고뇌가 묻어있는 추구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는 것도 나는 결코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것이 어렵지 않냐는 누군가의 말) 어렵죠. 그래서 결국은 뭐가 필요하냐하면, 저도 지도를 받아야 해요. 그래서 저도 지금 굉장히 사모하고 있는 작업 하나가 있는데, 뭐냐하면 교회 안에 복음주의 도서관을 하나 만드는 거예요. 성경주의 도서관을 만들던가......이름을 적당하게 지어서, 그 도서관 안에는 성도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책들, 그것만 해도 사실 평생 다 못 읽거든요. 그것들을 쫙 비치해 놓고, 그곳에 독서지도를 담당하는 교역자를 두어서 자기의 영적인 문제들을 상의하면, 어떤 책들을 어떤 방법으로 읽으라고 리드할 수 있는 그런 방법과 시설, r런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 안에 작은 토론실 같은 것들이 있어서 같은 책들 읽은 사람들 어느 날 모여라, 해서.....예를 들어 라일의 <거룩> 과 같은 책들을 읽고 성화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해결을 봤으면, 그 문제들을 토론하고....그런 것들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자꾸 목록을 얘기해 달라고 하는데, 작성을 하려고 하고 하고 있는데, 어려운 점은, 코스를 만들면 참 좋겠거든요. 딱 들어 왔을 때 뭐뭐뭐.....그렇게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힘이 빠지는 것은, 진짜로 지체들과 상담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획일화시키기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되요. 각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다 다르고.....개인적인 케어의 차원에서 깊이 그와 히어링 하면서, 깊이 그와 대화하고 그의 요구를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을 느끼거든요. 그러다 보니 자꾸 자신이 교역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자꾸 높아져 가는 거예요. 그러니깐, 굉장히 어렵죠. 이번에도 교역자를 뽑으면서 참 힘들었는데, 사람도 진실해야죠. 신앙사상도 가지고 있어야죠. 그러면서도 책들도 많이 읽었어야죠. 사람이 성실하고 포용력도 있어야죠. 지도력도 있어야죠. 그러다 보니 천사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천사같은 사람이 별로 없더라구요.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을 찾는데,,,,그게 그래요. 어쨌든 그런 작업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나마 나 나름으로 그런 노력들을 돕기 위해 하는 것이 한달에 한번, 고전들을 소개하는 것, 그리고 내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 싣는 것, 또 테이프 열린 말씀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바쁜데, 그 해설 한 줄도 다른 사람한테 안 맡기고 내가 다 쓴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설교한 자신이 써야지만, 핵심을 쓴다구요. 그것만 꼼꼼히 읽어봐도 자기가 어떤 영적 어려움을 겪을 때 자료가 없다고 말하지 않거든요. 이 테입 전체에선 뭘 말하는지 보고 참고할 수 있잖아요.
우선 그걸 활용하면서 그런 시설이 생기길 바래요. 이런 거 한 다섯 배 되는 도서관이 있어서, 쭉 그런 책들이 있고, 거기서 좋은 책들 번역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유능한 독서지도사, 모든 교역자가 다 그러면 좋겠지만, 특별히 책 읽기에 대해 탁월한 은사가 있고, 또 경건의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독서지도를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이것이 아주 나의 꿈입니다. 절실한 꿈이에요. 기다려보세요.
질문 ) (*질문은 다 들리지 않습니다. 개략의 내용만 요약합니다) 기독교 사상이나, 체계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어떤 그룹들을 양성해서, 예를 들어 칼빈의 저서들을 그 해에 읽었다면 그것으로 논문을 쓴다든지 하는 성과물들을 내어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보신 일은 없는지
답변) 그 문제에 관해 두 가지로 답변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될 점은, 이곳이 교회라는 점을 상기해야 해요. 여기는 학회가 아니라 교회거든요. 교회는 언제든지 성도들이 교회에 나왔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고, 경배자로서 살아가는 도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확인하는 곳이 되어야 하거든요. 그런 것들과 관련시킬 때, 저는 평신도들에게 가르치는 일들을 이렇게 맡겨 놓는 것들이 좀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교회에 나왔을 때 성도로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생각은, 여기서 내가 무엇인가 활동을 해서 보람을 찾는다는 느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거기가면 내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거기서 내가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긍휼과 은혜가 필요한 한 피조물인 것을 확인한다.....그것이 가장 중요한 유용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제언은 매우 좋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우리 아세아 연합 신학교에 계신 박은규 교수님 등록하셨죠. 종강하고 미국으로 들어가셨을 텐데...... 저희 교회에서 새가족반 하고 계시죠. 제가 가시라 그랬어요. 항상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어요. 목회자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교회 왔을 때는, 여기서 내 사상을 펼쳐야겠다 꿈을 펼치겠다 그런 거 말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마리의 양일 뿐입니다. 그저 평범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학문적인 역량이나, 전문적 분야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깊은 존중심을 가져요. 그래서 그 교수님도 제가 한번, 신학생들 교역자를 한번 모아놓고, 박사논문을 발표할 계획을 가져볼까 그런 생각을 해 봤어요. 운은 띄워 놓았어요. 그리고 아까 형제가 말한 그런 작업, 중구난방으로 다 자기 잘난대로 사역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가 깊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동질의 신앙사상을 가진 사람이 교육학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얘기죠? 사업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교를 한다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알고 싶다는 것이죠? 아 그래서 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교회가 좀 더 커지고 여유가 생기면, 신학교 교수님들 가운데 그런 교수들이나, 선교사들이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학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와 같은 종교적 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독자적인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논문을 좀 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죠. 일년에 한 천 만원 정도를 드리고 논문을 좀 써라. 대신 판권을 우리가 갖는다.......그렇게 해서 논문을 쓰게 하는 것이죠. 선교도 그런 시각을 가지고, 부흥이나 청교도 신앙의 시야에서....만약 선교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 굉장히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제 마음에 있는 그런 질의 내용이 아니겠어요? 선교를 보면서도, 저는 전문적인 선교사들은 제가 못 보는 선교의 영역들도 보겠지만, 나는 사실 선교사가 아니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으로 그 선교의 문제들을 볼 수 있고, 한 교회에서 성숙을 위해 설교하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선교사들을 보면, 선교사들은 짚어낼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을 짚어 낸다구요. 최근 여러 나라들을 돌아보면서 예를 들어 이민 교회같은 것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이 뭔가 하면, 사람들은 뭐 상처가 많다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니다, 재정적으로 열악하다. 현실적으로 살면서 고난의 삶을 산다 등등 얘길 하면서 이민교회 문제들을 얘기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더라 이거예요. 아주 간단한 문젠데 그게 뭐냐하면, 미숙해요. 목회자들이 영적으로 미숙하다는 거죠. 어떤 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환경과 맞물리면서 교회모습이 힘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대안은, 좋은 사람이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민교회의 척박함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자라는 사역자들 중에서 이민교회에 관한 사명감을 주어서 그런 교회에 시한부로 파송하면 좋겠다. 아직 자녀가 없거나 많이 자라기 전에, 파송을 해서 한 3년 정도씩 사역하다가 컴백하도록....왜 컴백하냐 그냥 계속 두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워요. 다 말할 수 없지만 굉장히 어려워요. 선교사의 마음으로 한시적으로 가서, 이민교회의 아픔들을 소화해 내고 여기서 참된 신앙을 심는다, 나는 여기 미련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훨씬 안일에 빠지지 않고, 철저하게 소신껏 목회하고 그 사역에 대한 평가는 본국에서 하고 이래 나가면 이민교회가 훨씬 신선하고 새로운 지도자들과 만나 충전하지 않겠나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논문 쓰고 동일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거나 할 때 유학할 때 지원하고 하는 것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질문) 한 사람의 사상은, 인생과 삶 전체의 결과물이고 뿌리인데, 우리는 보통 그 열매의 결과만으로 쉽게 이 사람의 사상이다, 라는 일반화 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하나의 공부거리로 전락시키지 말고 한 사상가의 인생 전체를 탐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답변) 그게 아까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아까 교리를 이야기 했는데, 교리가 신앙사상을 세우는 데 도움된다는 것이지, 그 교리가 신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같은 보수주의자 중에도 루이스 벨코프의 신학에 전체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것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거든요. 그리고 거기서 바롯되는 교회의 모습 등이 서러가 서로를 동의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는 것들을 볼 수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당장 칼빈이나 루터같은 사상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 앞에 신앙을 몸부림치면서 진리를 찾고 적용하고 교리를 구축하고 하면서 결국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면서 신앙이 성숙해 졌던 것처럼, 그런 모습들을 우리도 갖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오늘 예배 좋아 은혜 받았다, 눈물 많이 흘렸네, 좋다...잘 살아야 해..이런 결론만 매일 내리고 말씀이 쌓여있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지도 모르는 미성숙이 반복되는 것은 결국 사상적으로 신앙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제가 하는 말은 칼빈의 사상을 알아라, 루터으 전집을 읽어라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주일 예배시간에 설교 들으며 은혜 받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탐구적 노력을 하며 설교를 들으라는 것이에요.
내가 뭘 공부해야 복음적 가치관을 확고히 할 것인가?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어떤 분이신가? 그런 의문들을 가지고 설교를 듣고, 설교를 듣고 깨달은 진리의 내용들이 나름대로 사상을 구축하는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설교를 깊이 있게 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리의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섯째는 그런 진리들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고, 기도와 말씀으로 경건생활을 이어가면서, 이 전체가 자기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삶의 실패와 고민에 답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왜 내가 이렇게 자주 영적인 침체에 빠질까? 의문이 들면, 문제가 뭘까를 고민하기 시작해야지, 어디 가서 이 컬컬한 마음을 해결할까? 그런 식으로 나가면 상황대응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왜 내가 이렇게 똑같은 죄에 매일 빠질까?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다룬 설교는 있는가? 그런 의문점을 가지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탐구하는 마음으로 듣다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으로 형성이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의 주제만을 파악해도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는 것이에요. 충분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이런 노력을 하고,. 한편으로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축을 세워갈 때에 이 둘 사이에 연결 관계가 일어나면서, 사상들을 접할 때, 아 이신칭의가 이런 것이었구나. 이제 이건 내 사상이야 이렇게 되면 그건 내 사상이 되어가는 것이잖아요. 그런 것이예요. 예를 들어 기도를 하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전부 거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막혔던 벽들을 허물고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는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해서 그게 내 사상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온 무게를 걸고 자신이 그렇게 매달려 기도해 보니 되더라 이랬을 때 비로소 아, 인생에 있어 내가 풀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이 이러한 의미로구나. 온 몸을 실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고 막다른 길에서 빛을 보여주시는구나, 체득하게 되잖아요. 이것이 사상이에요. 그런 것들이 하나 하나 연결되어서 삶 전체를 포괄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교회와 역사와 사상을 바라보게 하는 큰 틀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교리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죠. 그 전체적인 것이 어우러져 사상이 되어가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진주가 조개 맺히는 게 암 비슷한 것이라면서요. 조개 안에 무슨 사금파리 같은 것을 넣어서 상처를 내면, 무슨 호르몬 같은 것이 나와서 진주가 형성이 되는 것이래요. 마찬가지로 아픔이 있고 고뇌가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해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런 고뇌와 아픔이 없는 사람들은 무수한 정보가 입력된다 하더라도 그게 사상이 될 수 없어요. 어떻게 적당히 살아가는 정도로 사상을 구축할 수 있겠어요?
질문) 우리는 말씀의 빛으로 삶을 조명하잖아요. ..(이후 안 들림)
답변) 여러 사람 기죽게 하는 질문이네요. 그건 경건을 이야기할 때 다시 다루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질문?
질문) 중고등부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질문(?) (잘 안 들림)
답변) 중고등부 아이들이라 해도 나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쉽게 말하자면, 장년이건 중고등부건 성경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깊은 자기 부서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언젠가 얘기했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나는 회심의 현상과 영적 각성이 부흥과 관련해 일어날 때의 유사한 현상에 대해 설교시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경우에도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깊이 회심하고 거듭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고 나면, 아이들이 말씀에 대한 강력한 갈증을 가지거든요. 그때 세가지를 함께 가르쳐야 해요. 하나는 교리를 가르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가지고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가르치고 셋째는 경건생활을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이들 속에 독특한 신앙적 인생관이 형성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형성된 것은,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아요. 장년에 세워지는 것보다 훨씬 강력해요.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영적인 거성들의 경우 모두 십대 때 주님을 만나요. 그래서 아주 움직이지 않는 확연한 신앙의 사람이 되죠.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아이들 데려다놓고 사상 전집을 읽히면 뭐 하겠어요. 교리, 그 뼈대를 가르치고, 하나님 말씀의 지식, 그 능력의 통로가 되는 경건생활......그걸 잡아줘야 하는 것이죠. 나무는 어려도 나무도 자라도 나무에요. 특별한이유 없이ㅡ 나무가 풀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풀은 나무가 안 되요.
질문) 열린교회 안에서 교사로 섬기며 느끼는 것인데,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선적 목표는 회심인데, 설교 내용이 만약 일년 내내 십자가에 갇혀진 설교였거든요. 아이들의 회심을 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일 년 정도 전파될 설교의 커리큘럼 이랄까? 폭넓은 가르침 이런 것들이 함께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 지.
답변) 그 질문의 일부는 말이 되고, 일부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일년 내내 모두 전도설교라는 문제죠? 그런데 그 설교가 모두 전도설교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성도들도 있지만, 불신자도 있거든요. 아이들도 거듭난 아이들과 아직 거듭나지 않은 두 종류의 아이들이 있는데, 한 쪽은 전도설교를 듣고 거듭나야 할 것이 꼭 필요한 경우이고. 또 한쪽은 거듭나서 소유하게 되는 생명을 더 풍부하게 해 주고, 실제로 거룩하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런데 일년 내내 전도설교만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성화에 관한 설교를 하는 데도 전도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케리그마와 디다케즉 복음에 대한 근복적 설교와 가르침들이 하나의 구조적인 통합속에서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르쳐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그 설교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모두 마찬가지고 거듭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는 영혼에게는, 교회 설교만으로 안 되고, 그들을 매우 특별한 사역의 대상으로 여기는 방법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필요성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교회에 5-명 내지 60명 꾸준히 등록을 했는데, 그 중에는 3분의 2는 새가족반으로 바로 올라가도 되지만 그 중 3분의 1은 거듭나지 못했거나 거듭났다고 해도 뭐낙 머리가 텅 비어있기 때문에 죄와 구원이라든지, 목자와 양 같은 것들을 아무리 설명해도 자신이 왜 그런 것들을 배워야 하는 지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죽은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은 설교나, 새가족반 같은 대형 강좌로 다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개인적으로 돌보고, 눈물 흘리며 돌볼 수 있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교회학교가 교사의 긴장을 유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교회 나온 모든 아이들을 구원받은 훌륭한 신자로 상정하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르치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둘째로는 또 그 영혼들 중 일부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매여 계속 구원의 도 만을 설명해서, 이미 거듭난 아이들의 영적 성장 기회를 막는 것, 그런 것들도 경계를 하며, 양자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꾀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교사들이 회심하지 못한 영혼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질문) (들리지 않음)
답변) 그것은 하나의 과도기적인 현상이에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깊이 소화해 그것으로 성경을 깊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면, 해소가 되는 문제예요. 비유를 하자면, 풍선이 이렇게 있는데 후 하고 바람을 넣어서 아직 빨간 부분이 불투명하게 보일 정도의 상태에서는 어느 부분이 더 튀어나기도 하고 덜 튀어 나오기도 하죠....그건 과정이잖아요. 바람을 충분히 다 넣고 나면 주름하나 없이 팽팽하게 잘 펴지잖아요. 자매가 말한 것은 그렇게 아직까지도 말씀을 들으며 그것들에 동의하는 것과 소화되어 자기 사상이 되었다는 것은 다르거든요.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이 과도기 적으로 올 수 있어요.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정리가 잘 되어있고 어느 부분에서는 덜 정돈이 되어있고.....점차로 섭취하는 말씀의 양들이 많아져서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정돈된 지식을 갖게 되면, 잘 불어진 풍선처럼 정돈된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삶에 대한 깊은 고뇌 없으면, 사상의 발전이 없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만일 목회를 안하고 학교에만 있고, 부흥회만 열심히 다니느 사람이었다면, 지금과 굉장히 세계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집회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망치로 한 대 뒤통수를 얻어맞고, 깨어나야 할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더 큰 쇠망치, 강력한 휘둘림, 그리고 쾅 얻어맞고 졸도하는 역사, 그것 외에는 필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교회를 목양하며 보니까, 그렇게 얻어맞고 졸도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딴 짓 하더라 이거예요. 그 사람들이 왜 딴 짓 하는가 파악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파면 팔수록 너무 오묘하더라 이거예요. 그래서 목회를 시작하던 그 시기가 저에게는 제2의 영적 각성의 시기였어요. 지금도 그 성도들을 깊이 다루다보면, 설교를 통해 다루어야할 너무나 많은 주제들을 만나게 되요. 사실, 이번에 가족문제를 좀 다루었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의 10분의 1도 못 풀었어요. 여유를 두고 그걸 하나씩 하나씩,,,,왜 부부가 그렇게 되는가 왜 형제가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풀고 싶은 그런 열망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 자신들이 짐승처럼 살수록 저는 선생님이에요. 그를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우대해 줘야해요(웃음) 너는 우리 목사님에게 설교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람이다...진짜예요. 그런 것들이 목회적인 아픔속에서 넓혀져 가는 거예요.
정말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하나는 교회가 너무 사람을 싶게 생각하는 것이예요. 와 하고 대단하게 깃발 한 번 흔들면 대단한 군대가 되는 줄 아는 데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요. 한사람한사람이 너무 놀라워요.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몰라요. 그랬기 때문에 사실 청교도들의 설교가 심오했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깊이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지 않고는, 그런 문제들을 터치해야할 결정적인 필요들을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굉장히 많은 터치들이 지난 시간들 동안 이루어 졌거든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답이 저기 있는데, 활용을 안 하는 거예요. 답이라고 가르쳐주어도 활용을 안 해요. 그렇다고 새롭게 새롭게 발견되는 주제들이 있는데, 자꾸 뒤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뒤로 돌아가요. 그래서 지금도 계속, 조금씩 다룹니다. 미움의 문제라든지, 거룩한 삶의 문제 등을 다루어요. 삶이 진리를 깨닫고 깊이 소화해 내게 되면, 점차 그런 것드링 없어지게 되요. 사람은, 모든 방면에 있어 자기의 영적 수준만큼 이해를 갖게 되지, 어느 방면에 있어 뛰어난 이해를 갖는 것은 쉽지 않아요. 영적인 부분에서는. 물론 자기가 어떤 전공을 했다거나 하면, 뛰어날 수 있지만, 그런 종류의 전문적 지식 말고 영적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만큼 인간을 이해하고, 기도를 이해하는 것 만큼 말씀에 대해 이해하고, 천국에 대해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그렇게 전체적 사상의 균형이 온다 이거에요. 그래서 capacity를 늘려간다고 하는 것은, 요 정도의 풍선이, 점점 더 커질 때는 그런 문제들이 완전히 해결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특히 그렇죠. 같은 학문을 공부하는데 예를 들어 신학을 공부하면, ThD 즉 신학박사거든요.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PhD를 주는 거예요. 철학박사죠. 이것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인문과학이나 학문을 공부하면서 철학박사 쪽으로 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 의미는, 학문의 많은 분과가운데 신학이라는 파트가 있거든요.그런데 PhD의 의미는, 이런 분야를 공부하면서 시야를 가지고 학문 전체를 보게 한다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사상이 capacity가 커가고 하면 자기가 성숙한 만큼, 자기 이외의 모든 분야를 보고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되는 것이죠. 그러면, 예를 들어 한국교회서 자랐고, 한국 교회에서 신앙을 배웠지만, 외국교회에 가서 생활하면서, 외국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쭉 파악할 때, 이런 것들은 이 교회가 성경적인 전통을 유지한 것이고, 이런 것들은 아니고, 교회가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들은 이러한 영적 문제 때문이다, 라는 판단이 가능해 지거든요. 그런 것들이 사상이 내려주는 판단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성경의 이해 이런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삶 전통 등 모든 것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만들죠. 그런 의미에서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답이 되었나요?
질문) 구역공과 자체가 이런 사상들을 잡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커리큘럼이면 좋겠다는 취지의 질문
답변)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이 공과공부가 주일 한 시간 정도 모이는데, 밀도가 너무 낮아요. 커리를 만들어 준다 해도 구역장들이 그것을 그렇게 심도있게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예요. 구역장 숫자는 교인들이 늘어가는 것만큼 구역장을 세워햐 하잖아요. 이번 6월에도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거에요. 청년 교구도 이번에 하나 새로 구성이 되거든요. 그런데 급속도로 성도와 구역장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 질이 신뢰하기 힘든 사람들까지 구역장으로 세워야 하는 현실이라구요. 그런 사람들에게 커리를 만들어 준다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겠냐는 의문이 나오구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커리를 만든다고 할 때, 2-3년 걸려 만든다 할 때,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어 들어오는 거예요. 이 순환이 과연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구요. 또 한 시간 정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집중도가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죠. 생각 같아서는, 구역마다 작은 방 하나씩 만들어서, 전혀 방해받지 않고, 모여서 공부할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현실적 한계가 있는 상태에서 커리가 있다고 해결 될 문제는 아니거든요. 분명 그런 필요성을 느끼기는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냐, 우선, 단기적으로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우리 장목사님 하고 하는 작업이 뭔가하면, 새가족반 코스를 획기적으로 12주로 늘렸어요. 사실 7주씩 새가족반 하는 교회도 많지는 않지만. 그가 만약에 교회에 와서 복음반 대상으로 분류가 되면, 일반 구역으로 들어가는 데 24주가 걸리는 거예요. 중간에 뭐 빠지고 이런 것들 합하면 7-8개월 후에 일반 구역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현대적인 목회 경험이나, 이론으로 보면, 교인들을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악을 선택일 수 있어요.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에 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 자랄 수 있도록 심는 것이 문제다....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속히 일반 구역으로 보내 거기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해서 끈끈한 정으로 묶어 교회를 못 떠나게 만들게 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신앙이 무엇인가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가르쳐서 그 과정에서 그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에 정착하고 이 교회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겠다, 그렇게 판단에 기초에 목양 그늘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교회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성장을 유도하는 길이다 판단해서 이런 수를 두고 있는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한 일년 정도 하고 싶어요. 4코스 정도 만들어서....그래서 그 4코스를 통과한 사람들은, 진짜 신앙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사는 삶을 살아가는,.....최소한 길을 몰라 엉뚱한 짓을 하지만,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타협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12주 코스 그것이거든요. 열린교회만의 교제를 만들고 있어요. 우선 새가족 12주 코스는 텍스트까지 전부 집어넣어서 참고도서, 참고 테입, 매주 <죄와 구원1> 을 듣고 온다고 한다면, 그 매주의 포인트는 어디인가? 그리고 그 내용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들, 테입을 듣는 방법, 어디를 읽는 방법등을 편집해서, 상당히 두툼한 바인더를 현재 만들고 있어요. 몇백만원 들어갈 예정인데, 그렇게 만들어서 테입까지 세트로 열린교회 로고 찍어 만들어서, 그것 하나만 가지면, 뭘 듣고 뭘 공부해야 하는 지,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그렇게 새가족반의 경우네는 교리를 접목시킨 것,,,그런 것들을 가르칩니다. 교회에 왔는데,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왜 구원 받아야 하는지, 그런 것들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서 살아가는 길을 들은 소감을 말해보라고 하고, 목양에 있어 진리의 중요성에 관해 말해보라고 하는 것은 구름 잡는 이야기거든요. 그것 보다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가? 성경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구원은 무엇인가? 전도란 무엇인가? 매일 경건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12주 코스로 그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겁니다. 말하자면 양육 코스거든요. 양육코스에서 이루어지는 게, ccc 책자라든지 그런 것들을 전도학교 것들이랑 연관해서 읽고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가까운 시일 내에 신학적인 검토를 하려고 해요. 그래서 차라리 제가 책으로 쓰려고 해요. 그 전체를 택스트 속에 넣어서 그것을 공부해나갈 수 있도록,.....그러면 급한 대로 새가족반과 복음반의 커리는 서는 겁니다. 구역은 지금 공부하는 대로 차라리 내버려 두고, 연초에 하려고 했던, 성경학당 등을 만들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식으로 등록하고 와서 밀도있는 성경공부와 나눔의 시간을가지는 것이 낫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공과를 가지고 구역공부를 하는 유익이 뭔가하면, 일단 설교가 이미 된 시리즈들이 많은데, 다시 공부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 사상적인 뼈대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구역공과를 하고 있고, 할 수만 있다면, 필요에 부응하는 좋은 청교도 저작들이나, 다양한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해 스터디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이 있습니다. 좀 추천할 만한 지적 책들은 너무 어렵고, 예를 들어 <회심> 같은 책들은 어렵고 양이 많고, 그래도 꼭 공부하고 싶은 책은 있긴해요. 편집하고 찍고 그런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긴 합니다. 자 이제 식사를 해야하겠죠.....아, 이렇게 합시다. (끝맺음의 말이 나오다 말고 끊어짐)
3. 교사의 경건생활과 기도생활
이제 이런 문제점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감이 있겠죠. 제가 설교 사역을 하면서, 느낀 사실 중 하나는 강력한 설교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풍성한 예배,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그것 없이는 신앙이 균형을 이루며 성장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강력한 설교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한 요소가 있어요.
그것은, 설교나 예배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나머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매일 살아야 하는 경건생활이 소홀해지기 쉬워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얘기를 그저께도 목사님들 모인 자리에서 했더니, 한 목사님 말씀 하시기를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될 만한 교회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느냐, 쉽게 말해 교인들이 너무 설교에 집중하고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경건생활을 게을리 하는 교회가 정말 있느냐......그 자체가 서글픈 질문이죠. 하여튼 어떤 좋은 상황에든지 우리에게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자신에게 있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면, 그 은혜 때문에 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어떤 것인지 그런 것들도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런 고백은 설교 사역을 하며 뼈저리게 느껴온 것이에요.
말씀 사모해요. 그리고 예배드리는 태도도 아주 진지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신앙과 삶을 예배 중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인도하시고 그런 것들이 자기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것을 인정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올바르게 이해가 안 되니까 거기에 대한 기대를 과도히 가지고, 내가 아무리 침체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설교를 통해 만나 주시면, 예배 중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한방이면, 내 영혼에 불이 당겨진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 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옛날에 의식 없이 살아갈 때에 어떻게 해서 하나님 급작스레 만나고, 그랬을 때는 한 번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은혜 세계로 깊이 들어갈수록, 침체가 찾아오면 그 침체가 매우 교묘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대적으로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발견해요.
이런 것들을 제가 상세히 다룬 적이 한번 있는데, <신앙과 은혜 체험2>에서 물러가 자가 돌아오는 길이란 제목으로 호세아 5장 마지막 절부터 시작해서 6장 3절 까진가를 세 번에 걸쳐 설교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그런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었고, 왜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그렇게 힘들게 하시는가, 에 대한 문제들을 다룬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런 것들이 참 문제라는 것을 발견해요. 심각하죠. 부끄러워하지 말고 손을 들어보세요. 맥체인 성경읽기를 따라 성경을 어제까지 읽은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세요. 높이 들어 보세요. 아니면, 맥체인 표를 따라 읽지는 않지만 하루라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읽습니다 라는 분 손 들어 보세요. 한 달에 어쩌다가 한 두 번 몰아서 읽는 적은 있지만, 거의 안 거르고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사이) 이게 현실이라구. 여러분들은 굉장히 위험한 거예요. 제가 이런 문제점들을 벌써 꽤 한참 전에 느꼈어요. 이번에 다행히 낮 설교 시리즈가 끝났고, 저녁 설교 시리즈가 끝났어요. 그래서 이제 새로운 시리즈를 하는데,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해요. 여러분 이렇게 하면 안 되요. 이런 문제.....바로 이런 문제.....여기서 더 압축시켜서, 매일 성경의 어떤 본문을 묵상하는 사람 손 들어 보시오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게으름이나, 육신적인 어떤 많은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 적지 않게 작용하는 것은 설교와 예배의 강조를 많이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하는 것들은,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이런 생각들이 작용된 거예요. 이런 것들은 또 하나를 건너 뛴 것이에요.
여러분들 보다 훨씬 더 영적인 삶에 있어 질이 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들에 있어 훨씬 더 손을 많이 드는 거 아세요? 썰렁한 이야기죠.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맥체인이 성경 읽기표를 만들어 성경을 읽고 자기 뿐 아니라 동료들을 가르치고 심지어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 성경표를 존 스토트에게 주면서 당신이 이것을 한번 활용해 보라고 권하고.......아직도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있어요.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저는 맥체인 성경표를 활용하고부터 성경을 읽는 것이 성실해졌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았냐하면 그렇지는 않았거든요. 깨달음이 없는 삶 그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1년이 지나도 성경 한 번을 못 읽어요. 여러분 솔직히 은혜를 받았느니, 시리즈를 몇 개를 들었느니 하지만, 책을 몇 권을 읽고 구역장이 되었느니.....하지만 여러분 아직 손 안 닿아본 성경의 부분 있죠. 회심하고 한번도 눈길이 가보지 않은, 성경을 탁 펼칠 때 오늘 처음 본다 싶은 성경 쪽수가 있죠. 레위기 같은거 말이예요. 창세기나 마태복음 같은 건 별로 안 그렇겠지만.......
그런 유형들을 이제 보게 되더라구요. 다 제 잘못이죠. 융단폭격을 받을 준비를 하래요. 이번 주일부터......항상 우리 신앙은 까딱 잘못하면 허풍쟁이나 바람잡이 같이 되기가 쉬워요. 와와 하며 지나다니고 말씀 말씀 말씀 하면서 바람잡이 하고 다니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땠어요.
세 가지로 설명 할께요. 한 사람이 신약이든 구약이든 좋은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어땠어요? 구약에서 보면 선지자들, 신약에서 보면 사도나 혹은 목회자들에게 공적 예배를 통해 풍부한 말씀을 공급받는데 열심인 사람들이었어요. 그렇죠? 그 다음,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예배 이외의 현장에선 어떤 사람들이었죠? 그렇게 깨달아 진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을 내 건 희생적인 삶.....그런데 공적인 예배의 현장도 아니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도 아니고, 홀로 있는 시간에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어떻게 나타났죠? 성경을 읽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묵상하는 거죠. 이 세가지가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이 사람이 진심으로 말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여러분들은 혹시 말씀을 엔조이 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진짜 말씀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그 뿌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고 한다면 이 세 모습이 함께 나타나야 하는 거에요. 공적 예배에서 말씀을 섭취하고자 하는 진지한 귀 기울임과 내적 승복 그리고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처절한 희생 분투, 그리고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 말씀을 늘 읽으며 깊이 묵상하는 것......물론 그것에는 경건 서적을 읽는다든가 하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어요.
공적인 예배에서 그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개인적으로 성경 읽기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제가 이미 말씀 드렸죠. 그렇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예배에 의해서 설교를 듣고 설교에 의해 영향 받는 것의 보조적 삶이라고 할 것 같으면, 경건서적을 읽는 것은 혼자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의 보조적 부분이에요. 말씀 생활에 있어, 공적인 예배를 통해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개인이 성경을 읽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했지,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왜 성경을 꾸준히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묵상하는 개인적 삶이 지속되지 않고 있느냐.....이것이죠?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여러분 내면 세계에서, 그러한 말씀을 매일 매일 읽어야 될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자매들 중에 특별히 밥을 잘 안 먹는 자매들 있죠? 끼적 끼적 하고 그런 자매들 있잖아요? 왜 그럴까요? 처음에는 몸매 관리한다고 조금씩 먹고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 밥 먹기가 싫어지는 거죠. 욕구를 못 느끼니까 사람들이 많이 안 먹고 그러는 거거든요. 많이 안 먹는 사람들 가운데, 욕구는 강한데, 스스로를 많이 절제하며 안 먹는 사람들은 소수에요. 오늘 점심 먹으면서 두 배쯤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스스로 미용과 건강을 위해 절제한 분들 손 들어 보세요. (웃음) 질문을 확실하게 이해를 못 한 거 같네요. 어쨌든, 그런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밥을 안 먹는 건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게 첫 째 이유에요. 그러면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할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설교에 대한 욕구는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한 60% 정도는 회의적이에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말씀에 대한 감각은 있으면서도 삐쩍 마른 영적 삶, 늘 분주하게 일하면서도 영혼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비즈니스에 가까운 사역, 그런 핍절한 삶, 이런 것들은 그런 내면의 세계에서 오는 것이예요. 정말 예상은 했지만 심각해요. 이제 정말 파악이 되었어요. 이러니 이게 마귀가 웃을 일이 아닌가요?
가슴에 새기세요. 성경에서 한 사람이 말씀의 사람이 어떻게 사는 지 말하고 있잖아요. 지금 우리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만일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고 한다면 아까 말한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야 해요. 공적인 예배에서 은혜 받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집중된 의지, 두 번째 그 말씀대로 살려는 철저한 노력, 삶에 대한 반성과 후회, 그리고 세 번째는 성경을 읽고 그 성경 속에서 공급받는 것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살아있는 삶.
지난 주 설교에서 들은 말씀이 계속 기억이 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일 성경을 읽지 않을 수가 없어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성경 읽기만 제대로 하면 이 성경 읽기가 나에게 필요없다....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매일 성경을 읽는 삶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는 삶이라 할 수 없어요.
기독교 역사 이래로 성도가 하나님 앞에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개인적인 경건 생활의 두 날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 읽기와 기도였다구요.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건 성경 읽기가 경건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된다.......그렇게 평가되던 시대가 없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뭘 믿고 매일 성경을 안 읽는 거예요. 물론 한 달을 사는 동안 하루 이틀 정도는 그런 날이 생길 수 있어요. 정신없이 돌아가서 진짜 ,그것이 옳지는 않지만 특히 주일 날 같은 경우, 주일 날은 제가 새벽 기도를 안 나오거든요. 늦게 까지 자요. 휴식을 취하고 말씀을 전할 때 심적으로 느껴지는, 체력적인 안배 때문에 쉬거든요. 그러느라고 못 읽죠. 또 지난 주 어떤 날 같은 경우는 주일 날 사역 끝나고 나니까 11시 15분 이예요. 아니 10시가 다 됐어요. 끝나고 나니 목사님들 모임 기다린다고 해서 올라가서 스터디 하고 나니까 12시 40분이었어요. 뭐 그런 날들, 거를 수 있어요. 한 달 동안 하루나 이틀 그런 날 정도는 이해가 가는데, 일 주일에 하루 이틀 그렇다고 하면 지속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예요. 아니 읽을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들 하나도 없으면서, 설겨 시간에 나와서 꺼이 꺼이 울고......그런 정도로 안 된다는 것 여러분도 알 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요.
첫째 안 읽는 이유는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이었고 둘째 못 읽는 이유는 게으름이에요. 핑계할 것 없이 게으름이에요. 환경적으로 도저히 못 읽을 만해서 성경을 못 읽는 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날은 한 달이나 두 달에 피할 수 없이 그런 날이 있지 대부분의 경우 이유는 나태예요. 저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이 나태라고 결론을 내리면 여러분 받아들여야 해요. 전혀 동의를 안 하는데 받아들이세요...금요일 날 말씀 준비를 하고 토요일 날 12시에 딱 도착을 해서 샤워를 하고 1시에 교회에 딱 들어오니까 한 사람 기다리고 다음 끝나면 다음 사람....다음 사람.....다음 모임 그런 식으로 다 끝나고 나니 밤 11시 였어요. 이승현 간사가 증인이예요. 그런 삶을 살면서도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것이에요. 욕구가 없기 때문이고, 나태하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매일매일 일정 분량의 성경을 읽도록 자기가 스스로를 결박하지 않으면 내 안에 있는 게으름과 부패한 속성들 때문에 이 성경을 읽는 삶이 지속될 수 없다 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을 때 조금씩이라도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앗아갈 것이며 이런 삶이 계속 되면 결국 예배를 통해서도 깊이 영혼이 깨어나는 말씀의 자극들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그런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에요.
성경을 읽으면서 탁 펼쳤을 때 깊은 성경의 숲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막 그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실 때는, 맥체인 성경표를 따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런 말 한 적이 있죠. 그런데 그런 때가 매일 오는 것 아니잖아요. 맥체인 따라 읽다가 어느 순간 은혜가 쏟아지면 어차피 진도대로 못 나갈 텐데 그 두려움 때문에 성경을 안 읽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금 스스로 자신을 비웃었어요. 그렇죠? 그런 건 절대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그대로 방치해요? 그건 정상의 삶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한 설교자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겠네요? 그러면 그게 어디 하나님 바라보는 삶이예요? 사람 바라보는 거지. 누가 그런 신앙생활을 가르쳤나요?
청교들에게 있어서 개인 적인 경건을 유지해 나가는 큰 축 3가지가 있었어요. 아니 4가지네요. 첫째 공적인 예배, 둘째 성경 읽기 셋 째 기도하는 것, 네 번 째로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즉 묵상하는 것. 말씀에 깊은 맛을 보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 한없이 어려보이는, 여러분이 보기에는 잔챙이 같아 보이는 교인들이 성실히 큐티하는 것 본 적 있죠. 물론 자기는 깨달았다고 나누는 데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가소로와 보이는 그런 이야기들......그런 거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교만한 거예요. 그런 것들이. 게으름과 교만, 그런 것들이 지속적인 성경 읽기를 가로막고 있는 거에요. 제가 오히려 묻고 싶은 것이 여러분들이 그렇게 성경 읽기에 게으르니까 구역원들이 혹은 구역장들은 자기 구역원에게 매일 매일 성경을 읽을 강력한 가르침에 대해 가르치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가 매일 안 읽는 사람들이 절박하게 매일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치겠어요? 못 가르치죠. 자기가 실제로 살아가지 않는 삶은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도 힘도 없어요. 여러분 기도하세요. 매일 새벽 기도 나와야 합니다. 새벽 기도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힘을 주십니까? 새벽마다 청교도들은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 받는 삶을 경험했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나와 은혜 받으세요.....이까지는 상관없는데 맨 마지막에 나는 못하고 있지만,,,,,,그러면 앞에 이야기한 모든 것이 위선이고 허위잖아요. 자기도 소화하지 않는 삶을 왜 이야기해요. 최소한 둘 중 하나,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삶을 능가하고 있던지, 아니면 그런 삶을 살려고 최대한 몸부림을 치지만 도달치 못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던지 둘 중 하나는 되어야 지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거예요. 후자의 근거는 뭐예요?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세요. 내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러나 나는 계속 달려간다. 나는 언제나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내가 감히 너희에게 가르치노니, 너희도 온전해 지기 위해 노력하라, 그렇게 가르칠 수 있는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성경 읽기를 포기한 것은 개인적으로 경건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도록 결심한 거에요. 여러분들 그 태도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 슬퍼하셔요. 어떻게 매일 성경을 읽냐구요? 신문은 매일 보잖아. 음식점에서 하루만 지난 신문 가져오면 이거 말구 오늘 거!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왜 성경은 안 읽어요? 그러고도 어떻게 우리가 교역을 한다고 말할 수 있구, 신학을 한다고 말할 수 있고, 더구나 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내가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이런 질문 한번 할께요. 최근 한 달 안에 자기가 가르치는 구역식구나 어린 영혼들에게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간절하게 권면하신 분 있으면 손 들어봐요. 이거 봐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까 여러분들이 대답한 것과 지금 대답이 관계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자기 영혼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치는 영혼들의 경건생활도 병든 상태를 계속 유지하도록 만드는 사람이에요. 교사가 무엇이에요. 교사는 말과 삶으로써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예요. 교사를 만났을 때, 항상 저 교사의 모습은 내가 이렇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구나 하는 교사를 통해 무엇을 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삶이나 말이 그 지체들에게 충격이 되어야 해요. 거의 성경을 안 읽고 있었는데, 그 교사가 어느 날 자기를 딱 무릎을 꿇어 앉혀놓고 간절히 말하는데, 아 성경읽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깨닫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과 다부짐이 어디서 나오느냐하면, 자기가 실제로 그렇게 살 때, 생활에 피곤하고 쩔고 엄청난 스케줄에 시달려 죽을 것 같을 때도, 꼬박 꼬박 성경을 읽으면서 심오하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나중 문제고, 이것이 매일 매일 의무라고 생각하고 매일 매일 읽어가는 것이에요. 로이드 존스의 생애에서 감동을 주는 것이 그것이잖아요. 건강이 나빠져서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으니까 잡지도 끊고 책도 끊고 다 끊었는데, 마지막 운명하시고 나서 딱 성경을 펴 보니까 마지막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맥체인 성경 읽기표에 체크가 되어 있어요. 하루는 돌아가시는 날이어서 못 읽었고, 하루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못 읽은 거예요. 그래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수없이 가르치는 자로서 영혼들을 대해서, 그와 맞물린 대화와 내가 지켜보는 교사로서의 삶을 보면서 번쩍하는 어떤 빛이 비춰가지 않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어떤 자극, 그런 것들이 안 비취는 거예요.
깊이 회개하고 동일한 이야기를 들을 때 가책을 받는 것이, 오늘로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죽는 그날 까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 때 가책을 받는 것이 오늘로서 영원히 종식되어야 해. 당장 읽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사실 매일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거예요. 제가 매일 성경을 읽고 포를 하고 하는 것이 율법적인 것처럼 여겨졌고, 또 매일 뭐 큐티라고 하는 데 애들 장난하는 것 같고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살아보니까 인간의 이 부패성과 나태함, 교만 그리고 영적인 미비에 대한 둔감함 이런 것들은, 목사나 평신도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있는 약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되요.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이 성도로서 당연한 의무다. 이것은 죽는 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나의 최소한의 경건생활이다.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되잖아요.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깊은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예가 거의 없죠. 그럼 또 한번 물어봅시다. 최근 한 달 새에, 성경을 읽는 동안에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단 한번이라도 진실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다 손들어 보세요. 거 봐요. 소수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도 무미건조하고 깨닫는 것이 없으면, 성경을 읽으며 자극을 느끼는 거예요. 아 이것으로 충분치 않은데......그리고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내일 성경을 읽을 때는 깨달음이 있게 해달라고.....그런데 만약 이걸 아예 안 읽어요. 그러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 지도 모르고 또 내일도 읽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니까 내일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도 안 나와요. 왜 ? 읽을 수 있으면 읽고 말면 마니까. 그런데 그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더 나쁜 것은, 그렇게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지 않으니까 성경에 대해 탐구할 욕구를 안 느끼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히브리서 같은 것 쭉 읽으면서, 아 제사가 가지고 있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는 성경적인 사상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그런 갈증들은 히브리서를 보며 계속 생겨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읽지 않으니까 자기가 굉장히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일 성경 읽어야 해요. 성경 읽기표 딱 끼워 놓고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 매일 성경을 읽는 거예요. 성경을 몸에 지니고 한 장씩이라도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요.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어가야 해요.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 당연히 예상했겠지만, 기도 생활이에요. 기도생활,.....이건 그래도 말씀을 안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더 이행치 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죠. 가장 큰 것은 예배에 빠졌을 때 일테고. 기도생활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하면, 기도를 안 하고도 살 수 있고, 섬길 수 있는데 더욱 효과적으로 사역하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가 있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지만, 좋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그것은 기도생활이 자신의 삶에 있어 아주 절대적이고 떼어놓을 수 없는 자신 삶의 일부분이 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기도 생활을 견고하게 이어가지 못하는 큰 원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말씀에 깊은 감화가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옛날에 발동기 보면, 줄을 막 감아가지고 확 잡아 당겨요. 부르릉 하고 툴툴툴툴툴 거려요. 그러다 부르릉 하고 발동이 걸리죠. 마찬가지로 기도가 거의 멎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발동기를 다시 걸어 발동하게 하는 작용은, 말씀의 깊은 감화와 감동을 통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주시는데,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나면, 기도 생활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어요.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의 말씀의 흥왕함을 믿지 말고, 말씀의 흥왕함이 없는 기도의 열렬함도 믿지 말라 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요인은, 기도하는 시간을 움직일 수 없게끔 정해 놓지 않기 때문이에요.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는 다는 것은, 마치 성경 읽기표를 갖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성경읽기표 없어도 성경 읽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목표를 정해놓고 꾸준히 성경을 읽지 않으면, 목표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풍성히 읽을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가능성도 있는데,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인간의 부패성 여러 문제들과 함께 작용하면서 항상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은 것보다 항상 못한 결과를 가져 와요. 그렇죠? 어떤 사람이 4장씩 성경 읽는 것으로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는가? 자기는 10장 정도씩 읽겠다 생각을 했는뎅, 일년을 살고 보니, 표를 따라 꾸준히 읽은 사람은 구약 한번 신약 두 번을 읽었는데, 그까짓 것 읽어 어떻하냐며 열 장씩 읽고자 했던 사람들은 다 못 읽어요. 인간이 그런 존재예요. 기도도 마찬가지 예요. 시간을 딱 정해야 해요. 그 시간은, 평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지금의 생활 패턴이 계속 되는 동안에는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물론 살다보면 특별한 시기가 있죠. 새벽 기도 끝나고도 특별히 몇 시간씩 기도하는 것이 일과인데, 만일 누가 8시 까지 부산에 오라고 했다, 그러면 끝나자 마자 비행기 타고 가야 하는 것 아니예요. 그런 특별한 날은 빼고, 해명할 수 있는 특별한 일들이 있는 날은 빼놓고 나머지 날들은 계속 유지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예요. 기도에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봐도 틀림없어요. 언제가 기도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간 날 때 늘 기도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거의 시간이 안 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참 쉽지가 않죠. 그래서 제가 권하는 것은 뭐냐하면, 새벽 시간을 기도시간이라고 못을 박아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직장 생활도 일정하지가 않아요. 5시에 퇴근 시켜주는 때도 있는가 하면, 10시가 되도 퇴근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떻게 해도 일정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어쨌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시간은 새벽 시간이에요. 오후나 저녁 때 기도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환경과 함께 자기 자신의 게으름도 이기고 환경도 이기고, 여러 가지 문제와 더불어 싸우면서 이겨야지만 겨우 시간이 나지만, 그러나 새벽 시간에는 대체로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과만 싸워 이기면 시간이 나게 되요. 구래서 새벽 시간을 권하는 겁니다.
그러나 새벽 시간이 구조적으로 어려우면 저녁 시간을 택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확실한 거 하나는 시간이 언제냐 이거예요. 이런 질문을 할 때 정확하게 대체로 몇 시에서 몇 시 까지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매일 거의 기도하지 못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열매있는,더구나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요. 그런데 성경 읽기야 표가 있으니 체크한다고 하지만, 성경 읽기는 누가 여러분들을 체크할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에요. 자신이 기도 생활을 하나님 앞에 잘 유지하고 사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에요. 우리 안에 있는 이 내적인 생명은 계속 우리 속에서 풍부하게 역사할 수도 있지만, 순식간에 말라 버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풍성함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열렬한 기도 생활이 필요한 것이에요. 열렬한 기도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윗필드의 자기 점검만 봐도 알 수가 있어요. 매일 자기를 점검하는 16개의 목록 가운데, 앞에 나오는 세 개가 다 기도에 관한 것이에요.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는가? 정해진 길이만큼 기도했는가?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의 영을 유지했는가 하는 것이 제일 앞에 나오는 자기 점검이예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그가 어떤 삶을 살던 간에 매일 정해진 시간에 풍부하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그의 영적인 삶은 아직 건강한 거예요. 그런데 자기 경건 생활도 유지를 못하고 중구난방인 사람에게 하루에 한번 영혼을 위해서 비지땀을 쏟으며 기도할 것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운 욕구라 이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깊은 긍휼과 연민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중보하며 기도할 수 있겠냐 그말 이지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여러분, 정말 이건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에요.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원하고 내적인 갈등을 딛고 궁극적으로는 말씀에 의해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 자기들이 그 말씀이 자기 삶 속에서 열매를 맺기 까지 흘려야 할 노력을 안 하는 거예요. 그런 기도 생활과 강렬한 경건 생활없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알게 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영혼들에게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 영혼들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라고 기대하는 사고 방식은 씨앗을 뿌려야할 밭에 구슬을 심으며 열매가 나기를 바라는 농부 같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사역은 커녕 여러분 자신의 경건도 없다 이게에요. 난 정말 이해를 못하겠는게, 수요일날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왜 목요일날 기도를 안 하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대부분 우리의 죄를 이기지 못하고 그런 것들이 거룩한 삶을 사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잖아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이 계속 풍성히 역사해서 우리의 내적인 죄를 이기고 밖으로 부터의 수많은 유혹들을 파괴하면서 그 내면의 세계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 어느 한 순간의 격렬한 감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신앙 생활에 있어, 어떤 자극을 받는다고 하는 것과 열정을 계속 유지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에요. 그리고 삶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계속 집중해서 살고, 그 말씀대로 자기 인격이 변화되기를 위해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있는 말씀의 갈망이 정말 열매를 위한 갈망입니까? 아니면 단지 엔조이를 위한 갈망입니까? 말씀을 깨닫는 삶을 통해 뭔가 즐거움을 얻고, 그런 말씀의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해 우월한 감정을 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꼭 기대해야 겠다 라고 하는 의지가 별로 없는 거예요. 의지가 강하고 소원함이 열렬하면, 환경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극복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 있어 굉장히 약하고 하나님 앞에 거의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단지 연약하다 라는 말로만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삶이 정당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연약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예요.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강력하게 기도해야 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말고라도, 말씀에 의해 강하게 소원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서, 내가 경건생활에서 심히 잘못 되어 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강력한 자극이 일어날 때에 순종하느냐 이말이예요. 순종하느냐? 적극적으로 없는 데서 뭘 찾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개인적인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내가 정말 기도하고 싶다라는 소원함들이 밀려올 때에 거기에 대해서 정말, 그 소원함들이 내게 흘러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를 내버려 두는 그런 순복이 있느냐 그말이예요.
하나님의 불을 자꾸 꺼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우리 안에 완전히 메마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회복시키시고 기도의 영이 완전 바닥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도의 영을 부우실 때에 폭포수처럼 혹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우리 자신의 존재는 간 곳 없이 확 살라버릴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은혜는 폭풍과 같이 다가오지 않고, 미풍처럼, 충천하는 화염같이가 아니라 작은 불씨로서 감당할 수 없는 폭포수와 같이 다가오지 않고 처음에는 한줄기 가는 빛줄기로 다가 오는 것이에요. 작은 빗줄기를 마시면서, 메말라 가문 영혼에 한줄기의 빗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더많은 비를 하나님 앞에 구하며, 한방울 두방울 빗물을 모으려고 할 때에 그 가랑비가 소낙비가 되고 그 소낙비가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은혜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져 가시더라......
말씀의 은혜도 마찬가지에요. 처음에는 작은 불씨로 다가와요. 처음에는 비록 작은 것이라 할 지라도 춤추는 화염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의 메마른 삶에 하나님이 이런 불씨를 주셨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당장은 헌신적인 삶, 열렬한 경건의 삶을 살 능력은 없지만, 지금은 나를 이렇게 살라고 주셨으므로 나는 간직한다 그걸 가지고 훅~불면, 시골에서 불 필 때, 작은 불씨를 가지고 이렇게 훅~불어 아궁이를 불태우는 큰 불이 되잖아요. 그러면서 우리 신앙이 자라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불씨가 주어져도 그저 방치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비가 조금 내려도 어차피 폭포수도 아닌데.....하면서 그냥 살아버리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경건을 마다하고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거예요. 힘들다......그렇죠.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스도인이 내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충만한 영적인 자원을 자기 내면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어요?
여러분들은 맡고 있는 영혼들이 얼마나 되나요? 그들이 수십명씩 된다면, 저는 그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대 여섯 명씩 되는 영혼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돌보고 있는 영혼들의 명단을 생년월일까지는 몰라도 정확하게 쓸 수 있는 분이 몇 분 쯤 될까요? 매일 기도한다면, 그걸 쓰는 일은 얼마나 쉬운 일일까요? 여러분들, 매일 그렇게 해나가고 있습니까? 문제는 뭡니까? 기도 생활이에요.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매일매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점검해 가는 거예요. 기도가 안 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채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하는 자극을 받아야 해요. 기도를 들으시면,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뇌하고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는 것을 받으시는 구나....우리에게 뭐가 중요할까요? 매일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해 놓는 기도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도전을 주어도 시간을 정하려 하지 않아요. 그 심리는 뭔지 아세요? 가책 받기 싫다는 것이에요. 시간을 안 정하면 가책 안 받아요. (성경 읽기)표만 없으면 가책 안 받아요. 성경만 펼치면 그 표 안의 작대기가 보이는 거예요. 그게 너무 힘든 거죠. 이제껏 못 읽었었도 상관없어요. 오늘부터 읽으세요. 과거는......거기가 크게 써 놔요. 주께서 아시리~ 오늘서부터 하세요. 오늘부터. 기도도 시간을 정해요. 시간을 정하라구. 새벽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면 어때요. 그거 죽는 거 아니잖아요. 아니잖아요.
집이 교회에서 가까우면서도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은 각성하세요. 이사올 때는 매일 기도해 달라 그러구, 새벽기도 나오게 해달라 그러구......코 앞에다 가져다 놓으면 안 나와요. 방 빼요. 방 빼. 오구 싶어 하는 다른 사람 얼마나 많은데......요새 방이 없어요. 눈을 씻고 봐도 방배동에 방이 부족하다구요. 방빼고 노원구로 가든지 의정부로 가든지.....어차피 주일날 한 번 밖에 안 오면서. 매일 새벽기도 하고 싶어하는 사람 주란 말이에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에요. 그러면 남의 영혼이라도 풍성해지잖아요. 여러분들의 영혼은 썰렁해 지겠지만. 얼마나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왜 자리만 차지하고 그러구 있어요.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와야죠. 그리고 이건 그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저 피할 수 없는 짐이려니 하고 하나님 앞에 지켜야해요. 물론 몸이 아프거나 하면 못 나올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도 삼 일에 한번씩 그런 일이 있다 하면 그건 둘 중 하나예요. 빨리 죽든지 아니면 건강해져서 하나님 섬기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문제죠. 어떻든지 간에 기도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기도 생활을 해야하는 세 번째 필요는 무엇이냐 하면, 영혼들이 여러분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예요. 영혼들이 여러분 기도를 필요로 해요. 그러니까 변화되지 않는 영혼을 보면서 아, 정말 방법에 문제가 있구나 방법을 어떻게 바꿀까 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에요. 또 인간의 내면에 들어가 본답시고, 변화되지 않는 지체를 보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가 틀림없구나. 얼마나 강퍅한지 안 돌아서는구나.....그러지만, 사실 영혼을 돌보는, 목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이 얘야, 니가 부족해서만이 아니라, 니 양떼라는 그 인간이 워낙 강퍅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해 주실 수 있는 말이고, 그렇게 주님이 말씀 하셔도 아, 그럼요.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모두 제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고 영혼을 잘 못 섬겨서 이런 것이죠. 하나님 모든 상태가 내 모습입니다. 하고 용서를 빌어야죠.
저는 오늘 너무 슬퍼요. 여러분들이 이러니, 교사가 아닌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이게 우리 모습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라구요. 아무리 나무가 훌륭하고 땅이 기름지고, 햇빛이 쨍쨍나도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아요. 절대적인 조건이에요. 물이.....나무가 아무리 좋고 토양이 뭐 아무리 난리를 쳐도 그저 일 미터를 파도 모래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가물었는데, 그런 마른 흙에 무슨 생명이 붙어있겠느냐 그말이죠. 좋은 교육 시스템. 잘 갖춰진 교사, 잘 들으려는 영혼, 아무리 있어도 그 심겨진 영혼의 꽃밭에 가르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 물을 주지 않으면, 그 영혼은 자라지 않아요. 물론 물을 줘도 안 자라는 영혼도 있죠. 죽었을 가능성도 있고 여러 가능성이 있죠. 그러나 어쨌든간 사역의 본질은 영혼들이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당연한 것이에요. 기도하지 않으니까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이 안 생기는 것이에요. 가끔 나타나서 그들을 위해 서비스를 하는 그런 들러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너희들의 영혼의 태도와 참다운 변화가 내 기도에 달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간절한 촉구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개척하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설교가 십자가에 대한 설교와, 기도에 대한 설교인데, 양으로 비교해 보자면 아마 기도에 대한 설교가 훨씬 많을 것이에요.
기도의 참된 의미와 복음적인 뜻을 몰라 기도 안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영혼들을 위해야 하잖아요. 흔히 하는 말로 영혼들을 위한 해산의 고통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게 무슨 고통이냐 이거예요. 정말 해산하는 여인들 고통이 어떤 것인 줄 알죠? 뭐 아기 가져서 아프고 뭐 그럴 떄- 저는 물론 낳아보지 않아 잘 모릅니다만- 야 그거 애기 날 때는 100배는 더하다. 겁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잖아요. 살이 찢어지고 자기 육신이 동강나는 것같은 고통.....그런 것 느껴본 적 있어요? 아픔이 없는 사랑 있어요?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애정이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되요. 한번 쭉 돌아보세요. 교회학교 잘 안 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잘 되고 있어요.
영아부 하고 유치부도 이제 또 나누어지죠. 문제는 아무리 겉모양으로 잘 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느냐....그리고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느냐 그걸 돌아보아야 해요. 여러분 개인의 경건생활은, 여러분만의 것이 아니라, 영혼들의 것이기도 해요. 목사가 기도 많이 하면 교인들이 왜 좋아해요? 결국 자기들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요. 기도 많이 하면, 영혼들에게 큰 유익이다......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죠? 간절히 눈물 흘리며 영혼들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그들을 변화시키세요. 어떡해요?? 그래요. 한 번의 가르침으로 영혼들을 가르쳐 뒤집어 회심시키 능력이 없어요. 변화되지 않는 애들 머리에 손 얹고 강력하게 기도할 떄, 불 받아 넘어뜨릴 능력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잖아요. 우리가 당장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에 대한 통증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나를 불쌍히 여겨 영혼들이 은혜를 누리도록 간구하는 것 말고 할 수 있겠게 뭐가 있습니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도우심을 구하고, 그렇게 희생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주님이 너무나 은혜를 부어주셔요. 그리고 그런 고통보다 훨씬 큰 위로와 사랑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 안되는 신앙 생활이지만,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 행복했던 때는, 환경이 여유롭고 편했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많이 동행해 주시던 때였어요. 그땐 언제냐 하면, 많이 기도하는 때였어요. 기도하기를 포기한 것은, 싸우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에요. 되는 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기도 안 하고 주일날 예배에 와서, 뭐라도 얻어가려고 설교에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한 두 주야 하나님이 긍휼로 보시겠지만, 그런 식으로 굳어져 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정말, 주의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로 보시겠는가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으로 보시겠는가?
힘들다는 얘기 많이들 하는데, 편하게만 살려 하지 마세요. 편안하게 살려면, 죽는게 제일 편해요. 먹을 염려도 굶을 염려도 없고, 다이어트도 없고. 욕망과의 싸움 없어도 되고......그런데 그럴 수 없잖아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여러분 속에 있는 부패한 요소들과 싸워 이겨야 해요. 기도하지 않으면, 내 안의 부패성들은 반드시 역사해서 계속 불붙는 생명이 될 수 없어요. 무기력한 삶을 계속 살면서 실패의 친구가 될 것이고, 나태의 이웃이 될 거예요. 그는 결코 높은 이상에 도전할 수 없을 것이며, 원대한목표를 위해 꿈을 가질 수 없을 것이고, 그는 매우 왜소하고 의기소침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고 나아가서는 부패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을 거예요. 값지고 귀한 것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죠.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이들이 다 달아날 지라도 상을 얻는 자는 단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트라인에서 다 같이 출발해요. 다 질주하고 마지막 골인 지점에서 쓰러지면서 동행의 품에 안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 사는 거죠. 매일 자기 자신이나 얼르고, 아 나는 불쌍한 사람이야. 난 상처도 많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그것도 한 두 번이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는 경험을 가져야 하잖아요. 하여튼 저는 간절히 촉구합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자극 받고 기도하지 않는 모습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 하면, 청마 유치환의 시처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정말 꿈쩍도 안 해요. 너무 마음 아파요.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굳어져 가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선 안 되겠죠.
과거는 과거로 묻고, 이제 정말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야 겠다, 라는 결심으로 떨치고 일어나야해. 제가 여러분 만할 때 변화되고 나서, 총각 땐데, 그때 주일학교 자료를 찾아보면은, 그때 가장 괴로워 했던 문제가 바로 이런 개인 경건의 문제였어요. 스스로 쪽지를 만들었어요. 월화수목금토일 성경 읽은 장수 기도한 시간, 큐티한 성경 구절. 어떨 땐 그래프도 그려보고 동그라미도 쳐 보고 점수도 매겨보고 그만큼 어려워요. 여러분 내버려 두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육체를 성령으로 제어해서 하나님 앞에 살게끔 그렇게 해야 해요. 마냥 기다리면 좋은 날은 안 와요. 여러분들에게는 돌이키는 순간이 필요하다......
제가 새벽마다 기도해주는 자매 있죠. 너무 착해요. 몇 번 상담했는데, 해결이 안 되요. 기도해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기도하라 하니까 목사님 기도가 안 되요.....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매일 새벽기도 올래? 매일 기도해 줄게. 매일 새벽기도 와요. 저는 가끔 못 나와서 약속을 못 지켜도 자매는 꼬박 꼬박 나와요. 매일 기도해 주었어요.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것을 하면, 하나님은 니가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해 주신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시겠지. 새벽 마다 나와요. 여러분들 어때요? 훨씬 더 낫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할 때 개인적인 경건 생활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같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교사를 위하여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