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위한 소명
(200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소명(빌1:20-21)2000.8.14 여름수련회(오전) 1
2. 거룩한 인격에 이르는 도구(딤전4:5)2000.8.15 여름수련회(오전) 14
3. 인격적 성화와 성령(벧전1:22)2000.8.16 여름수련회(오전) 26
1.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소명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새벽 시간에는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설교를 하기로 했고 저녁에는 예레미야서를 그리고 이 아침 시간에는 구원받은 자녀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차례대로 강론해가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구절은 빌립보서 가운데서도 가장 감동적인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려 한다는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받은 우리들은 즉시 주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주님을 부지런히 닮아가야 합니다. 성품과 인격에 있어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러한 인격적인 변화, 주님을 믿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품의 변화에 대해서 그렇게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대개 가치를 부여한 것 중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은사도 받고 능력도 받아서 펄펄 뛰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가치였습니다. 그렇기에 남다른 능력을 받으면 순식간에 지도자가 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영적인 열등감과 같은 것을 느낍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은사는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들을 분별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를 주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의 놀라운 지식의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이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기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눈에 보이는 능력과 같은 것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며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최고로 고상한 목표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실제로 그런 능력을 받은 사람도 많지만 그러한 것을 과대 평가하는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과장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몇 주전에도 설교하면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요즈음 계속 내게 말씀하시는데”와 같은 말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혀 쓰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가끔만 쓰십시오. 기도도 하지 않고 매일 놀면서 입만 열면 그런 말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 외식입니다. 그것을 처음 믿는 신자들이 모두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사악한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먼저 믿은 사람들의 그릇된 모본입니다. 그것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마치 자신이 굉장한 영안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은근히 과장하고 뻐기는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그런 물줄기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현상, 아류입니다. 그런 극단 쪽으로 갑니다. 그런 현상들이 한국 교회에 상당히 팽배했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그 반대쪽에서는 일에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적당히 해야 합니다. 항상 일 그 자체는 우리 자신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저도 경험해보아서 압니다. 일 자체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를 매료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없으면 못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생각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세상의 일입니다. 그 한쪽으로 치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런 경향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 주님을 위해서 얼마만큼 일한다. 무슨 일을 하는가?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는가? 목회를 하는데 몇 명이 모이는가? 얼마나 큰 교회당을 지었는가? 얼마나 부흥회를 다녔는가? 교회당을 몇 개나 건축했는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식의 물량주의적인 자랑 말입니다. 이런 것이 가치있게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가치는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섬기면서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교사생활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오랫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들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날 기분이 어떻습니까? 참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신경도 쓰지 않고 놀다가 토요일이 되면 주일날 아이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 걱정됩니다. 그래서 두루두루 전화를 했는데 한 아는 놀러가고 한 아이는 아프다고 하며 나머지 아이는 친구를 따라서 학원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며 우리 자신이 굉장히 겸비해지지 않습니까? “봐라. 교사가 이렇게 쉬운 것이 아니구나! 일주일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겸비하게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더니 영혼들이 전혀 하나님 앞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하고 깨닫지 않습니까? 이제 아이들의 태만한 신앙생활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평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깊이 우리 자신을 뉘우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 자신이 점점 거룩해져갑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는 반성없이 그냥 일만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이 허락받고 있는 영향력, 그 능력 안에서 자신을 뻐쳐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합니다. 교회도 팽개치고 가정도 팽개치며 일에 미쳐서 사는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현실을 하나님 앞에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잊어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섬긴다고 애를 써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장부책에도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기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기반이 튼튼해야 합니다. 일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격은 없습니다. 일에 대한 욕망은 있고 일에 대한 왕성한 욕심은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망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고 난 다음 마지막에 자신이 자랑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 자신의 의, 의로운 삶 밖에는 남는 자부심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 자체가 병들기 시작합니다. 견실하고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서도 영적으로 거의 죽어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의 상당수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화) 부산으로 집회를 갔는데 어느 장로님이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목사님! 부산에서 저만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명함을 주는데 명함 뒷장에 직함이 일곱 가지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리고 나서 집회가 이삼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우연히 성경 본문이 그 상황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떡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분을 겨냥해서 한 말씀은 아닌데 하나님이 말씀이 치거나 때린 것이 아니고 밟아서 완전히 뭉개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 떠나오는 날 그 의기양양하던 얼굴은 사라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참 부족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올라왔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정신질환에 걸리지 않고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소개할 때 부산에서 자신만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없다고 소개합니까? 정말로 대단합니다. 저는 그래도 착한가봅니다. 옛날 같았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장로님 정신질환이 아닙니까?” 옛날 같으면 충분히 하고 남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정신질환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이렇게 마주 앉았을 때에 그 짧은 시간에 단 둘이 담임 목사실에 앉았는데 자신이 이 위기 속에서 교회를 어떻게 구출해 내었는지에 관한 많은 양의 말을 할 수 있는지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모두 람보 콤플렉스입니다. “람보”라는 영화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마주 앉았을 때에 그 오물이 쏟아 나오듯이 자기 자랑을 쏟아 놓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신은 이렇게 산다고 하며 주저 없이 쏟아 놓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결점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조금 전에 찬송 부른 것처럼 “그 형상 볼 때에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와 같은 고백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고백이 주님을 닮아가는 아주 결정적인 경험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영향은 거의 없고 모두가 수평적으로 받는 영향들입니다. 우리가 일은 하지만 일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많이 해본 사람이 일을 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가르침은 없고, 대부분이 수직적인 가르침은 없고 수평적인 경험들을 통해서 그냥 배우고 획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신이 그런 일들에 익숙해져 갈 뿐이지 영적인 성장과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인격적인 변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변화는 수평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수평적인 것들이 도구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그 은혜에 의해서 우리들이 변화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나만큼 주의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충만하게 차 있는 것이 수많은 명함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 노릇하며 살아온 사회적인 명예심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신령한 사고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사람들에게 진리에 대해서 혹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면은 우리들의 간증이 참으로 많아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참으로 만나고 나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참다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항상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게 되고 그렇게 자신이 승리한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항상 그것들을 억제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자기 낮아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에게 하나님이 제일 먼저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중대한 질문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보다 인격적으로 조금 훌륭한 인간도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함에도 우리가 주님을 닮아간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닮아간다는 그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똑같이 된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 아름다운 작품을 똑같이 그려낼 수는 없지만 다른 것 말고 그 그림처럼 그리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던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셨고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자신의 부패성과 우리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말은 주님과 같아진다거나 주님을 추월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목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뜻이 예수님을 닮는 것이기에 우리의 인생은 다른 스승, 다른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목표로 두고 할 수 있는 데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을 하나씩 하나씩 닮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는 그분처럼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영원히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를 쓰겠다는 결심을 우리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는다고 할 때에 그런 말을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에 우리 안에 새생명을 심으셨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심기어진 그 새생명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역사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 안에는 부패성과 죄악된 본성이 남아 있지만 적절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만 하면 주님이 새롭게 심어 놓으신 생명의 놀라운 은혜가 진정으로 크고 놀라워서 우리 안에 계속해서 생명을 창조하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새생명의 번성할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꽃을 좋아합니다. 꽃을 사다가 꽂으면 요즈음 같은 여름에는 이틀만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냄새가 납니다. 악취와 벌레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학생에게 받은 꽃을 집에 가지고 와서 지극정성으로 정수기 물을 받아서 계속 갈아주었습니다. 물 자체에는 꽃꽂이로 심어 놓은 꽃의 밑동을 부패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꽃을 꽂아 놓고 정수기 물을 받아서 차가운 갈아주었더니 놀랍게도 나무로 된 꽃에서 하얀 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수경 재배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두 가지 본성이 하나의 꽃병 속에서 싸웁니다. 꽃아 놓은 꽃을 밑동부터 썩게 만들려는 물의 부패시키려는 본성과 뿌리를 내리려고 생명의 물을 빨아들여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식물의 본성이 싸우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전자가 후자를 이깁니다. 그런데 정수된 물을 자꾸만 갈아주자 전자를 후자가 이깁니다. 그래서 뿌리가 하얗게 내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주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안에 새생명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부족하지만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새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만드셔서 우리가 왕성하게 주님을 닮아가도록 만드는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신앙의 인격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불명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교회는 다닐 곳이 못된다고 말하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언제 입니까? 무엇인가 가까이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깊은 결함을 보고 아주 실망했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고 실망했을 때에 교회,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 신앙, 그리고 더 심하면 모든 종교에 대해서 회의적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의 말뿐인 전도는 당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그것은 조잡한 제품을 속여서 파는 상점이 단골 손님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팔고 도망가버리는 보따리 장수와 같은 장사를 하지 않는 한 그렇게 장사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그래도 예수를 믿는 사람 편에 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 자신이 신뢰했던 사람들의 인격적인 문제에서 깊은 실망을 할 때, 그때에 자신의 신앙에 상처를 받습니다. 물론 그것이 순수하게 그 사람의 잘못인가는 살펴보아야 하지만 어째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변화되지 않아서 아주 조잡한 인격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인격 하나를 보고 우리가 믿는 모든 신앙의 도리, 나아가서는 성경의 모든 진리 자체를 귀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사람들에게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복음은 누군가가 자세하게 증거해 주어야만 그 내용인가를 알 수 있지만 인격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그대로 그 인격이 자신에게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좋고 즐겁기도 하며 나쁘며 불쾌하기도 합니다.
꽃의 종류를 보면 외국의 어떤 꽃들은 썩은 달걀 냄새를 내는 꽃이 있습니다. 사실 꽃향기를 말하면 우리는 모두 냄새 맡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썩은 달걀 냄새나는 꽃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 맡으려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꽃향기라는 것은 결국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보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냄새가 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그 꽃에 대한 큰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가 거의 같은 비율로 사람들의 마음을 끕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많아 닮아서 옆에 있으면 옆에 존재하기만 해도 향기가 납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처럼 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 그 끼치는 악영향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특히 개신교는 더 그렇습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기는 하는데 그것을 입증하는 인격적인 변화가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신학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조교를 했습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인데 교리학을 가르치시는 원로교수님이셨습니다. 한자 섞어서 갈겨 써내려간 옛날 사본과 같은 강의안 노트를 전부 교정해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만들어서 수백 권을 찍었습니다. 그것을 강의실에 가지고 가서 쉬는 시간부터 한 권씩 돈을 받고 책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들어오시더니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김 전도사. 수업시간이 다 되었는데 언제 한 권씩 돈받고 주겠는가? 먼저 다 나누어주고 책값은 내일 가지고 오라고 해라.”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을 범죄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교단에서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20% 정도는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성자와 같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신 데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자 전혀 이해를 못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냐고 하십니다. 가지고 갔으면 그 다음 시간에 와서 책값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데 누가 사갔는지를 적어 놓지 않았다고 해서 20% 이상의 책이 없어졌다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해가 잘 되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매일 손뼉 치고 할렐루야! 아멘! 하는 데만 열심을 내었을 뿐입니다.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주소
이와 같은 고백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비윤리적입니다.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탈세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옛날에 어느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집을 팔고 사면서 세금을 내는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가 그런 일을 하면서 죄를 지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이 다음이 그런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시켜달라고 합니다. 집사라는 사람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불감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대해서 교회가 깊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함께 모였을 때에 예배한다거나 기도한다거나 함께 삶을 나눌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주님을 닮기 위해서 많이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에서의 그 사람처럼 이 분야에서 자신처럼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위에서 살면서 단 한사람이라도 “그래! 아무개 자네는 주의 일을 많이 해서 좋겠네. 나는 너무 괴롭네. 예수 믿은지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내 인격은 너무나 조잡하네”라고 말하면서 눈물 흘리는 동료를 보았더라면 그렇게 정신 질환적인 말은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것이 환경에도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부모를 그대로 닮는지를 아십니까? 몇 해 전에 가정예배를 하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기도를 하면 그렇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잘 때 기도하라고 했더니 자기 부모가 하는 것을 똑같이 흉내 냅니다. 엎드려서 엉덩이는 하늘로 쳐들고 “하나님 아버지·····. 흑흑” 우는 흉내를 그대로 냅니다. 초등하교 2학년쯤 되었을 때인데 말입니다. 그 때 환경이 이렇게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고민하지 않는 신앙은 자신만이 문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본보기를 끼쳐 주어서 다른 사람들도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신앙생활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가장 감동시킬 수 있는 일은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감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한 인격에 있어서 진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신앙의 인격이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고 있습니까? 닮아가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정지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뒤로 후퇴하고 있습니까? 몇 개의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여러분 스스로 해보십시오. 잘 모를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을 닮는 신앙에서 거룩한 인격의 진보가 있는 사람들은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조잡한 인격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보가 없거나 퇴보하는 사람은 자신의 조잡한 인격은 보이지 않고 이 바닥에서 나처럼 주의일 하는 사람이 없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닮아 가는 것, 이 인격적인 변화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생각이 행동을 낳고 행동이 쌓여서 습관이 낳고 습관이 쌓여서 인격을 형성한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격이 이렇게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한번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다고 해서 인격이 크게 바뀌고 한번 말씀의 은혜를 받고 펑펑 운다고 해서 인격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격적인 변화를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의 물에 깊이 잠겨서 장시간 동안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고쳐지는 가운데 생각이 바뀌면서 그 생각이 예전의 행동과는 다른 행동을 낳고 그 다른 행동들이 쌓여가며 다른 습관을, 다른 습관이 쌓여서 예전과는 다른 인격을 갖도록 우리를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노력해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 속에서 살지 않으면 인간의 근본적인 밑바탕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사도는 이일에 목숨을 건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 일이 목숨을 건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것은 생사를 건 싸움입니다. 자신은 죽고 예수님은 살아서 그 안에 충만하게 예수를 드러내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것, 이것이 사도의 간절한 소망이었고 바램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조잡한 인격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십니까? 이 고민이 살아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양쪽 극단에 빠진 사람입니다. 신앙의 참다운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른 목표를 가지고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도 여러분 속에는 주님을 닮아 가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에 진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일을 하는 사람일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지 자신의 취미 생활이었는가는 하나님 앞에 가 보아야 압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우리들이 변화를 받게되면 제일 먼저 부각되어 떠오르는 가장 커다란 주제는 하나님 앞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족하다.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을 정도로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일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일을 줄여서 자신을 돌아보든지 워낙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늘 일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아주 희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룩의 진보가 있겠습니까? 수평적인 것들을 통해서 많이 배우는데 그것은 모두 배우는 것을 뿐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져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들이 구원받고 난 후에 불행해지는 이유는 지금 말씀드린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 그곳에서 보람을 찾고 기쁨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에 기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할 때에 우리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아 가는데 무슨 보상이 있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보상은 즉각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의 진보가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옛적 길을 설명하면서 위험한 요소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씀이 많이 들어가고 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갖추게 되면은 말씀도 잘 이해하고 말씀에 담긴 뜻들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그것에 계속 진전만 있을 뿐 거룩한 정서도 생기지 않고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도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고, 주님을 닮아 가는 개인적인 거룩한 삶의 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닮아간다고 하는 것은 내 편에서 보면 주님을 닮지 않게 끔 형성된 우리 자신이 자꾸 깨드려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부어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깊이 깨어졌을 때에는 자신이 깨어지는 것이 아프지만 이 아픈 것이 지나면 항상 아주 강한 자아가 가로막았던 하나님의 은혜의 둑이 터지면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이 깨어지지 않았을 때에 흘러 들어오지 않던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인격적인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자기 깨어짐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고 그런 자기 깨어짐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부어주심이 있습니다. 새로운 은혜의 지속적인 부어주심이 있는 그곳에는 영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진정으로 한없이 자라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장이 멈추었을 때에 말은 그렇게 안하지만 내심으로 자랄 만큼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사고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바른 목표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인격적인 자기 부서짐이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닮아 가면 닮아 가는 것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그 친밀함을 보여주실 적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아는 지식의 지평들이 넓어져 갑니다.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고 나면 항상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지식입니다.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바닥까지 내려서가 겸비해진다는 것,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천국이라는 것,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이 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개인적인 신앙의 풍부한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을 아는 지식이 풍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인격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해본 적도 없고 예수님의 성품과 그분의 성품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자신의 죄악된 성품을 비교하면서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기쁨이 무엇이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병아리가 그 알 속에서 그 세계에 대해서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처럼, 아이가 엄마의 배속에 있을 때에 배가 적다고 불평하는 아이가 없는 것처럼 그 세계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일단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를 만약에 계란처럼 생긴 곳에 다시 집어넣고 테이프를 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즉어버리든지 아니면 살겠다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미 그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것도 결국은 신앙생활의 목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아서 안수집사나 권사, 장로가 되지 않습니까? 모두 그런 것은 아닌데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신의 어떤 인격적인 성숙이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교회생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소수만을 만나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책임감으로 교회에 다닙니다. 물론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어떻게 됩니까?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자기 깨어짐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두 신앙생활에 있어서 목표 설정 자체가 빗나가고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을 하면은 자신의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이 나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이제 순교할 때가 가까운 때입니다. 거룩한 사람입니다. 한없이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읽은 고백을 압축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셨으면 좋겠다. 내가 주님을 많이 닮을 수 있다면 나를 가차없이 죽여버리고 싶다”. 이런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간절한 소망은 주님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 인격적으로 그 주님을 닮는 것을 그렇게 열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적인 변화의 작용의 뿌리 자체는 영적인 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께 깊은 은혜를 받고 성령의 감화를 받기 전에는 자신의 인격이 왜 그렇게 조잡한가,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부끄러운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변화가 잃어나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고 고백하다가 마지막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욕망을 가진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변화를 간절히 갈망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더욱더 간절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믿었으면 처음에 주님을 믿을 때에는 미성숙했기 때문에 허풍도 떨고 거짓말도 했으며 너절한 인격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연단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면 즉각적으로 옛날의 조잡한 인격이 변해갑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이런 분야에서는 자신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라는 고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를 잘 아는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 그의 인격에 대해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는 참신자가 아닙니다.
저 멀리 피어 있는 꽃의 향기는 이곳까지 오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을수록 그 향기는 강하게 진동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 볼 때에는 아주 그럴 듯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서 그만큼 일하며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까이에 가보면 썩은 냄새밖에 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멀리에서 보면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없습니다. 일등이 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대화를 해보면 대화를 한 다음에 사라져도 그 사람과 나눈 대화 속에서 여운이 남습니다. 향기가 남는 것입니다. 그냥 무심코 오고간 한 두마디의 말인데 그 말 자체가 거룩하신 주님을 닮기 위해서 피흘리며 분투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때문에 그 사람과 헤어져도 평범하게 흘러나온 한 두마디의 말이 계속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감화에서 오는 말의 능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엄청나게 고생하며 믿음을 지키며 일평생을 산 할아버지가 된 그리스도인이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시련과 환란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평안한 날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할 때에는 가슴에 밀려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친히 그런 과정을 밟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들의 마음에는 눈물이 흐르며 거친 세상에서 주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중학교에 입학한 한 아이가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모진 바람과 가시밭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편할 날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드는 생각이 제 엄마에게 심하게 맞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격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말과 인격을 통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말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그렇기에 어떻습니까? 주님을 닮는 인격적인 참된 변화가 없는 가운데서 지식은 늘고 느는 지식을 가지고 말은 잘하면 어떻게 됩니까? 모두 조화를 만드는 사람과 같습니다. 향기 나지 않는 가짜 꽃들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신앙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는 것 같습니까? 디지털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어느 곳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가 감동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디지털 시대가 되고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여전히 인간들 속에 간절한 소원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감동임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엄청난 세트를 제작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재난이 일어나며 인간의 힘으로서 거대한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있지도 않은 공룡을 살려내어 숲을 뛰어 다니는 그림을 만들어 내어도 그것을 통해서 감동받는 것은 그 영화를 상영되고 있는 시간뿐입니다. 그런데 인격으로부터 오는 감동은 우리의 인생을 움직입니다. 진정으로 두고두고 우리의 인생을 움직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제고 오류에 빠지거나 판단해야 될 때에, 선악을 판단해야 할 때에 항상 떠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떠오르지만 제가 깊이 존경하던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분이라면 지금과 같은 목회 상황에서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에도 제일 먼저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그 다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둘이 더 있는데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은 얼마나 실망할까하는 것과 저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저를 신뢰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이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당사자들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인격의 영향은 시간을 초월해서 두고두고 영향을 미칩니다.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한 인격이 부패한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예수님이 아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마음먹고 실제로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를 본받지 않으려는 아들과 같습니다. 그러면 사실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고 물주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비용을 대주는 사람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인격적인 변화를 가지고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눈에 우리의 가슴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아는 눈물, 그리고 살고 되고 싶은 자신의 존재와 실재로 존재하는 나 사이를 안타까워하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슴에는 멍이 가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사랑, 하나님이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건져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전에는 이 세상 속에서 짐승과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 그 인격을 닮아가면서 희미하게 나마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인격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슴속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성질, 버릇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오면서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잘 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경건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기도, 성령의 은혜. 지속적인 살아있는 은혜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인격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신앙생활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수련회를 맞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때부터 이제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격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언제까지 변화되다가 언제부터 더 이상 변화되지 않고 멎었는가를 보십시오. 보면서 주님을 닮아가고 변화되어가며 새롭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생명을 버리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사도바울이 생각했던 이 신앙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어야지. 성질도 죽고 버릇도 죽고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도 죽고. 그래서 어떻게 든 내 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존귀케 되고 나의 말과 행동, 마음속이 흐르는 나의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이 되도록 해야지” 하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입을 열어 말할 때에 주님처럼 말하고 생각할 때에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할 때에 주님의 섬기시는 것처럼 행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데서 행복을 느낄 때 우리는 날마다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되어 갈수록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가 우리의 가슴속에 깃들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친밀함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살면서 예전에는 이길 수 없었던 죄악들을 이기면서 거룩한 성도가 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인격에 이르는 도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5)
그렇습니다. 인격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거셨던 가장 중요한 기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축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머리 맥췌인」이라는 청교도도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축복은 그리스도를 크게 닮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주님 닮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입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나면 진정으로 주님을 닮고 싶어집니다. 주님을 본받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충만한 감격이 있는 상태가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무한정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는데 현실을 보면 그것을 계속 유지하며 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잠깐 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뜨거워지다가 식어버리고 나면 뜨거운 동안에는 주님을 닮아가지만 그것이 식어지고 나면 다시 주님을 닮아가는 노력도 잘 하지 않게 되고 실제로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어져가는 인격적인 변화도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선 구원받은 다음에 예수님을 잘 닮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그저 은혜받았기 때문에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살아간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슨 과자 상자 속에 들어가는 네모 반듯한 쿠키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필요한 사람, 사회가 필요한 사람이 되기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사실 왜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당신을 많이 담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삶은 그 인격이라는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를 아십니까? 인격적으로 오랫동안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 앞에 진실해진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그것을 억누르며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습니다. 자기 속에서 그것을 잘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격이라는 것 속에서 결국은 행동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순환 작용 속에 있습니다. 생각을 통해서 행동이, 행동을 통해서 인격을 형성하며 형성된 인격이 다시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행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잘 닮기만 하면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주님을 보여주기 싫어도 주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격적으로 변화되는데 우선 그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목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왜 이렇게 말씀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한 생활을 했는가 하면 그렇게 주님을 닮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목표가 되지 않음으로 말씀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을 닮는 인격적인 변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인격적인 거룩한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때, 우리는 설교를 복잡하게 들어야할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해야할 필요도 별로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변화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과 행동에 대해서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술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고 여러분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단히 심오한 통찰 끝에 얻어낸 결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인격적인 변화는 힘든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떻게 닮겠습니까? 여러분, 뚱뚱한 사람이 날씬해 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잠깐이면 됩니다. 기다란 옷을 입는다든지 줄이 그어진 옷을 입는 방법을 쓰면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날씬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날씬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고생을 해야 합니다. 한끼나 두끼가 아닌 여러 달을 먹고 싶은 음식을 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기 싫은 운동을 해야 합니다. 누워서 텔레비전 시청하는 것이 취미인데 엎드려서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해야 합니다. 줄넘기를 하고 수영장을 다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단해서 입술을 부릍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본질적으로 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화장을 해서 얼굴을 바꾸는 것은 몇 십분만 노력하면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일 수 있지만 우리의 인격이 분장을 해서 잠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회용으로 착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삶과 행동 자체를 재갈 물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변화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살아가는 삶, 심지어는 내면의 생각까지 하나님을 그곳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반성하며 반성해서 잘못한 것을 뉘우치는 삶, 말하자면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불빛을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 밝혀 놓고 살아간 결과 맺혀지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할렐루야! 아멘! 믿습니다. 성령충만. 운수대통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삶 전체를 밝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어떻습니까? 삶 전체가 그 빛으로 밝혀지고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뜻대로 살려고 하는 지속적인 노력과 실천의 결과에 의해 맺혀지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삶을 주님의 뜻대로 살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까,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까를 고민해야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자세하게 가르쳐 주면 말씀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주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자,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예화) 큰배를 탔다고 가정해 봅시다. 엄청난 폭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아직은 견딜만 하지만 그 폭풍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선장이 말합니다. “이 폭풍 속에서 여러분이 지금부터 살아 남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바다에서 사십 여년의 세월을 보낸 사람입니다. 이런 폭풍을 수없이 만났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잘 들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 구명 조끼를 입는 것과 구명정을 타고 내리는 것, 어떤 물건을 버리고 챙겨야 하는 것, 바다에서 조난 신호를 보내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런데 “아이, 너무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병원에서 의사가 고달픈 이야기를 합니다. 환자가 아파서 보호자를 오라고해서 병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사람이 다시 와서 보호자라고 하면서 병세를 묻습니다. 남편, 아들, 삼촌, 고모라고 하면서 계속 옵니다. 질병에 대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데 가끔 의사는 영어도 섞어서 말합니다. 그렇지만 가족이 “아이 너무 어려워. 뭐 그렇게 어려워. 그래서 산다는 거야, 죽는다는 거야. 결론만 이야기하면 돼지 뭘 그렇게 길어. 죽으면 장례 준비하고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족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거룩한 인격은 거룩한 삶의 결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거룩한 인격은 거룩한 삶을 위한 분투의 결과입니다. 각자 각자가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 주님을 위해 살았는가는 인격에 맺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며 살든지 주님과 관계가 삶과 섬김의 동기가 되면은 일은 자신이 하는데 일이 자신을 변화시켜주는 것이 아니고 그 일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화) 제가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입니다. 한 학생이 있었는데 교수들이 모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듭니다. 신학교에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러 왔는데 열심히 공부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운동권 아이들을 찜쪄 먹을 정도로 휘젓고 돌아다닙니다. 와서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 가방은 팽개쳐 놓고 교수들 비리나 캐러 다닙니다. 심지어는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공부할 때는 잠자고 데모할 때는 충만합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면 학교를 휘젓고 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저 애가 목회를 할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서 돌아왔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를 물었습니다. 학생일 때는 앞장서서 데모를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데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식으로 서지 않습니다. 운동권에 있을 때는 똘마니들이 쫓아 다녔는데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떻습니까? 그냥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매달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과거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은혜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인들은 어쨌든지 너라도 은혜를 받았으니 그 교회는 할만하다.”
그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리의 인격을 그렇게 주님 닮도록 하십니까? 그것을 성경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오면 항상 말씀과 기도밖에 없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다. 그것 밖에 없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무엇으로 구원하십니까?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하십니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는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오시도록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안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인격적으로 아주 조잡하고 야비하며 비열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닮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과 기도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십니다. 제가 왜 결혼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볼 때에 좋아하는 사람하고 모두 시집가고 장가갈 수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눈물의 씨앗입니다. 왜 그렇게 바보와 같습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조금 좋아하기 전에 객관적으로 사람을 보십시오. 그래서 인격적으로 비열한 사람, 야비한 사람, 삶에 있어서 표준이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 그리고 자매들이 터프한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나면 고생을 엄청나게 합니다. 터프한 것이 좋습니까? 시집가서 얻어맞아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하고 결혼하면 안됩니다. 일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면 할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인격적으로 그렇게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속에 들어가서 그 인격적인 결함보다도 큰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진다는 보장, 고쳐졌다는 보장이 없다면 눈물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점점 연애 결혼에 대해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 결함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후보자 명단을 작성해 놓고 신앙의 선배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런 다음 좋아해도 괜찮은 사람을 좋아하십시오.
그런데 결국은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사람이 내 앞에 과거는 어쨌든지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그를 볼 때마다 주님이 생각나게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때, 과거에 대해 많이 알아보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자신 앞에서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존재하고 주님의 향기를 어느 정도 풍기고 그 인격을 보면서 예수님이 생각나게 할 정도라면 그는 소쩍새 우는 사연을 간직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듯이 엉망인 인간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부서짐과 연단 속에서 살아 왔겠습니까?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돈이나 학벌, 명예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돈도 중요하고 학벌이나 명예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누구의 말처럼 학벌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초등학교를 안나와도 되는데 변호사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중요한데 결혼 생활이나 모든 생활에 있어서 덜 결정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격이 잘못 되면은 치명적이고 결정적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팔자를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80%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주철학, 동양철학을 하지 않았어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질이 좋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사람들은 좋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인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성질이 아주 좋지 않아서 만나는 사람보다 물고 뜯는 사람에게 인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그 사람 옆에 누가 오겠습니까? 그 사람의 인격이나 행동을 보면서 판단해주면 거의 들어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 지금 성질이 변덕스럽고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이 살아온 삶을 압니다. 상처도 많고 평탄치 못한 인생을 살았지”. 그렇게 말하면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보지 않아도 평탄한 삶을 살았을 리가 없습니다. 성질이 그렇게 좋지 않은데 어떻게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감탄하는데 감탄할 이유가 한가지도 없습니다. 나타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생긴 대로 판에 박힌 운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존재합니다. 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왔고 또 걸어갈 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모두 보이는데 앞으로 커다란 이변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이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전기가 있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가난했던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였던 사람이 완전히 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 못하던 사람이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서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생을 싸고 있는 하나의 껍질을 뿐이며 그 근본적인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격에 따라서 자신의 인격이 결정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주님을 모르고 힘들게 살아 왔습니다. 똑같은 나무라 할지도 물과 햇볕이 적고 척박한 토양에서 자란 나무는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똑같은 마루라 할지라도 모양이 다릅니다. 돌 틈에서 자라나는 자그만 나무들하고 다릅니다. 말하자면 기름진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과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의 종류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르는데 험한 인생이 태어났습니다. 돈 많고 신앙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없더라도 온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고 매일 바가지나 던지며 문고리가 부서지도록 싸우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보는 앞에서 아빠가 엄마를 두드려 패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 것은 자신이 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은 삶이라는 구간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 속에서 태어나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서 반응하며 살다 보니 모두 망가진 인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의 책임도 많이 있지만 물론 그 사람의 책임만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렇게 엉망인 인격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의 선조들이 가문을 따지고 성장 환경을 따졌던 것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전의 자신이 상황이나 환경, 사랑하는 사람, 본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인격이 망가지고 형편없고 야비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변했다고 할지라도 그 때 자신에게 주었던 영향보다도 더 커다란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믿는 순간에 그렇게 변화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이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을 때에 그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인격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을 잘 받지 못하고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 사람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자신의 구주라고 고백하며 신앙생활하며 산다고 하는데 문제는 안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 때문에 맺는 삶을 살아가듯이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말은 조금 적합하지 않지만 자신의 인격에 의해서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자신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음에도 인격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삶을 거의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입니다.
여러분, 모두 대답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살도록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조잡하고 야비하며 폭압적인 성격이 변해서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변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해서 사랑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를 고치고 치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님 사랑을 늘 받으면서 주님께 진 그 사랑의 빚을 어떻게 보답하면서 살 수 있을까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살피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주님을 닮으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 성질이 아주 못되고 변덕스러워서 가까이 가기에 두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성자와 같이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아무리 망가진 채 살아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주위의 사람들을 성자와 같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형편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두 공사중입니다. 그런데 가끔 지나다가 보면 집을 지으려고 골조를 세워놓고 벌겋게 녹이 슬도록 공사를 중지한 채 방치해둔 모습을 발견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공사중이 아니라 중단중입니다. 주님을 닮다가 공사가 중단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아서 주님을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자 주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들은 멀리 사라지고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친정하고 자상하므로 비슷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닮는 인격적인 삶은 반드시 우리의 삶에 보상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상당한 사랑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열혈남아였습니다. 피가 펄펄 끓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운동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다음 놀라운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사랑으로 기록한 것 가운데 고린도 전서 13장을 능가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전부다 한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런 것을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어쩌면 연애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그것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서 배운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배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훼방하는 자였던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건져 주셔서 주님의 놀라운 자녀 삼으신 이 놀라운 구원을 생각하면서 전심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입니다. 주님을 닮고 나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어제 살펴본 빌립보 사람들이 바론 그런 사람들이고 오늘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디모데가 바울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자식이 아비를 사랑함과 같이 디모데가 바울을 사랑했고 바울을 섬겼습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가 커지면 수많은 들짐승과 새들이 깃듭니다. 잎이 없이 죽은 나무에게 새도 잘 모이지 않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잎이 무성하고 울창한 나무에게 벌레도 많고 둥지를 틀 장소도 많습니다. 적당히 집을 지으면 다른 날짐승에게 표적이 되지 않고 은신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한순간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로부터 신령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감화입니다. 말씀의 깊은 감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깨닫는 통로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수련회에 오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 옵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동안에도 그런 일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에 주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새롭게 안 것이 있습니까?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성실하심을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는 깨달음 속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인격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에 비유할까요? 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에 감의 껍질을 벗기면 노랗지 않습니까? 살색 빛이 도는 감을 실로 엮어서 매달아 곶감을 만듭니다. 감이 햇볕에 말라 적당히 굳어진 때에 먹으면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무나 오래 말려서 오징어포처럼 굳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의 계속적인 은혜를 받으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며 주님이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 살았을 때는 가책을 받고 잘 살면서 고난을 받을 때는 위로와 격려를 받고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것에 대해 새롭게 가르쳐 주셔서 삶의 방향을 지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서 말씀과 함께 웃고 말씀과 함께 울고, 말씀과 함께 결단하며 말씀과 함께 안식을 얻고, 말씀과 함께 고난을 받고 말씀으로 인해 영광을 받는 삶과 그 말씀 자체가 완전히 결탁된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인격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혹시 정말로 “저 분은 주님의 향기가 난다, 저 사람은 주님이 참으로 좋아하시겠다. 저 사람은 주님의 기쁨인 것 같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찾아낼 수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있다면 잘못 고른 것입니다. 저도 보면 깊이 존경이 가는 몇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인격적으로 그렇게 감화를 줄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한 두 가지 선한 일을 할 때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격은 그 인격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감화를 받을 때 말씀의 감화가 우리의 삶을 계속 규제합니다. 그래서 잘못 살 때에는 잘 못하려고 마음을 먹는데 말씀이 그에게 감화를 주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자극을 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게 회개가 되며 회개하는 가운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프게 회개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말씀의 감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제동 장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갑니까? 벼랑에 구를 때가지 계속 갑니다. 또 백번 양보를 해서 말씀을 감화를 받는 정도가 마음의 숨겨진 죄까지는 드러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잘못을 했을 때에 말씀으로 감화받는 생활이 살아 있으면 잘못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즉시 깨달아 집니다. “네가 무엇을 했느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물으시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하면 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말이 대단히 길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하나님 앞에 범죄한 그의 마음을 생각나게 해준 것입니다. 말씀의 감화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못 살면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즉시 말해 줍니다. 그런 제동장치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악하고 잘못된 삶으로 치닫지 못하고 자꾸만 제동장치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 신앙의 세계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죄의 길, 불순종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거침없이 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커다란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서야 멈추는데 사실은 브레이크를 밟아서 멈춘 것이 아니고 자동차가 완전히 부서져서 갈 수 없어 멈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두 종류의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크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주님이 거시는 기대가 주님을 닮는 것이 가장 크다란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말씀의 감화를 받으며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말씀의 세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닮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즐거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불우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주님을 닮아가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자신이 깨뜨려지고 변화되고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조금씩 새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깊이 뉘우치고 그런 영혼의 상태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살면 살수록 죄가 계속 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죄가 자신을 삼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닮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끊임없는 감화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도 요약해서 이야기하면 두 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감화를 받는 것과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닮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 닮는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서 상당부분 차지해야 할 것은 자신의 인격적인 변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기도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는 시간 못지 않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왜 입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그 형제를 보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변화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보도록 만드십시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경우를 보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 주위에는 엄청나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큼 고상하지 못한 사람도 많이 만났는데요”.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분명히 본문을 보면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했는데 실제로 주위를 보면 우리는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기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금식을 밥먹듯이 하는데 인격적으로 동의가 안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때문인 줄을 아십니까? 무조건 매달리는 열심있는 기도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 인격에 대해서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기도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져가는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에 기도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영향력이 깃드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이해가 되십니까?
참된 기도는 하늘에 있는 영향력을 문제를 향해서 명령해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며 쏟아져 나오는 것이 참다운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겉멋 들어서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 처음 은혜를 받고 기도원을 열심히 다녔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가 있다고 기도원의 목사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문제 해결될 지어다”. 그 때는 순진해서 “아멘”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해결되기는 무엇이 해결됩니까? 모두 허풍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와서 말하면 “그렇습니까?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이 형제가 이 문제로 인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얼굴도 잘 모르고 서로는 잘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하나님 한번 도와주시옵소서”라도 한번 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문제 해결될 지어다”. 그러면 모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만날 지어다”. 모두 이상한 것을 배워 가지고 허풍을 떱니다. 저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인격적으로 되어 보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누구에게 명령하는 것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에게 말하면 저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해결될 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해결할 수 있으면 그 사람에게 어떻게 상담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기도할 때에 지존하시고 엄위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지존하신 하나님. 우리 같은 인간이 눈을 들어 쳐다볼 수도 없는 지존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인간이 엎드려서 주의 자비와 은혜를 간절히 바라보는 진실하고 겸비한 기도, 그런 기도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나자 그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우시면서도 그 하나님을 자신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당신께 가까이 가지만 자신의 공로가 아님을 고백하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존경, 사랑과 공포가 함께 동반된 가운데, 그 절대자 앞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겸비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하면 기도 제목이 무엇이든 간에 기도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지식이 기도하는 자세를 바꾸어 놓고 기도하는 자세를 통해서 기도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신령한 힘이 있습니다. “그 문제 해결될 지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허풍입니다. 그리고 위선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인격이 변화되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 가를 아는 지식에 있어 매우 천박하기 때문에 열심히 기도해도 자신은 거룩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룩해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미미한 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도 가만히 보면은 하나님을 복싱 선수가 권투를 하면서 코너로 몰고 가듯이 하나님을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화) 어느 신학교에 가서 강의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강의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채플실인데 제가 매일 가서 기도할 때면 그 학생이 와서 기도합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무엇인가를 많이 기록해와서 기도합니다. 저는 처음에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참을 들어보니까 하나님 앞에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지만 맞는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하나님을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성질이 나면 큰 소리로 말합니댜. “하나님! 분명히 이렇게 됐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이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펀치를 날립니다. “그런데 왜 이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한 수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이렇게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르셨지요. 제가 용서해드릴 께요”.
그런 식의 기도는 기도 속에서 아무리 성구를 인용하고 난리를 쳐도 기도자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교만해집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또 한가지를 질문하겠습니다. 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주님을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특징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입니까? 항상 확신과 자신에 불탑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에 가득찬 열렬한 기도가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기도의 세계, 그리고 주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뼈저린 인식, 주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교만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제 한번 설교 시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메일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책인가 설교인가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세월이 많이 변해도 변치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답장을 썼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다. 누가 장담하겠느냐? 십년 이십년 후를 누가 장담하겠느냐? 다른 것은 장담할 수 있어도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염려되면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기도해 줘라”.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자신의 친절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분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거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주님을 닮아야한다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뚜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눌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이 보호해주시는 그 은혜 안에서 삽니다. 오늘 하루동안 범죄하지 않고 살았으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하루를 선한 일을 하며 사록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다면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의 자세,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를 아는 바른 지식과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바른 지식 속에서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기도자 속에 존재하지 않으면 기도할수록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이중에도 저에게 그런 충고를 들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가 오면 “당신은 나의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가지 기도하지 마십시오”. 왜입니까? 현저하게 이런 지식이 결핍도어 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어떻게 그렇게 이루어지고 나면 자신의 잘못된 사고를 강화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라고 했지만 이 두 가지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말씀의 감화가 있는 곳에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정확한 지식이 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깨닫는 겸비한 기도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기도자 자신이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3. 인격적 성화와 성령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케하여..(벧전1:22上)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우리가 궁금한건 이거에요. 만약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주님 닮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를 그런 거룩한 사람 만드느냐 이거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를 주님 닮은 사람으로 만드냐 이거죠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우리를 주님 닮은 인격을 가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에요.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거의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요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종종 우리들 주위에는 아주 뜨겁게 열렬히 기도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면에서 도무지 진보가 없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어제 말씀 드렸죠 그죠? 그리고 그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에 기초한 그런 기도생활이 않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쟎아요 그죠? 아무튼 열렬한 기도생활을 하면서도 인격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들 우리 볼 수 있쟎아요 설명이 않되쟎아요 설명이 않돼 그 설명이 않되쟎아요
그 대답이 뭐냐하면은 말씀과 기도는 도구일 뿐이에요. 그리고 진짜 우리를 예수님 닮는 인격으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결정적인 신앙생활의 결함이 뭐였어요? 영이 없는 문자에 매인 삶을 사는 거에요 그죠?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교훈을 사랑했어요. 얼마나 그들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결정적으로 결핍된 건 뭐에요? 생명이 없어요. 하나님의 영이 없다 이거에요.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지식이 있어도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앞에 주님 닮은 인격으로 변해가질 않는거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말씀과 기도생활은 성령의 도구일 뿐이에요. 성령님의 도구일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기도생활 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우리들이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그순간 성령님이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나를 강력하게 찌르고 고치고 변화시켜서 나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고쳐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해야해요. 내가 아무리 말씀을 정신차려 듣고 그 말씀에 깨달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이 말씀 생활속에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그저 모든 것은 지식으로 쌓일 뿐 나를 변화시켜 줄수는 없다. 그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알게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이거죠. 그래야지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신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들이 기도해도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강력한 기도를 오래도록 지속해서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탄원할 수가 없는 거에요. 탄원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렇죠? 조금씩은 다 체험을 가지고 있을것 아니에요 그렇죠? 성령님이 함께하셔서 말씀을 듣는 시간에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면 시간개념이 없이 말씀속으로 확 빨려 들어가요. 성령님이 하시는 거죠 그렇죠. 성령님이 하시는 거죠.
어제 저녁에는 조금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좀더 길게 해야되는데 너무 일찍 끝나서... 여름에 어느 선교단체 집회를 갔는데 한 3시간 설교했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있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을 굉장히 대견스럽게 생각해요. 태어나서 3시간 짜리 설교를 똑바로 앉아서 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거에요.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런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4시간 반씩 설교를 해도 요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런거에요. 그럴 때 우리 자신의 인격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렇니까 참 신기해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있쟎아요 착실한 교회생활, 매일매일 성경을 읽는 삶, 정해놓은 시간에 기도하는거, 새벽기도의 습관, 움직이지 않고 정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것, 그 다음에 프로그램에 따라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성경공부에 참여하는거.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쟎아요
그건데 문제는 뭐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없이 이런일들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익숙해질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 이거에요 항상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은 그 성령님의 은혜없이 3시간, 4시간씩 계속되는 설교를 정자세로 앉아서 깨달으면서 듣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해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아요? 처음에는 그렇쟎아요 그 수련회를 갔는데 정희자매 왔나? 그 자매가 그 선교단체 같이 갔어. 설교가 끝나고 나니까 자매한테 와서 모두 명복을 비는 듯한 표정으로 "야 넌 너무 불쌍하다." "왜?" "어떻게 매주일 저렇게 긴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돼? 명복을 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그런 세월이 오래 지나요. 잘 들으세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몇년 그러구 지나요 그게 몸이 쫙 배어요. 그러면은 성령님의 도움없이도 그게 가능하다구. 제가 여태까지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러 다닌 중에서 아무리 설교 오래해도 끄떡없는 학과 학생들이. 누구냐하면 의대생들, 하루에 10시간 심지어는 12시간 앉아서 강의를 들어서 앉아있는데는 이골이 났어. 전혀 요동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영적으로 뛰어나서 집중을 잘하고 해서가 아니라 그 대학교 예과,본과를 다니면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도 않될정도로 엄청한 길이의 수업을 다 듣다보니까 이골이 난거에요. 등뼈가 달라 그러니까 하는거죠.
성령이 아니면 처음에는 불가능하지마는 세월이 흘러가면 그 다음에는 몸이 쫙 배는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것이냐면 성령없이 사람이 보기에 은혜 속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아니라 이거에요. 기도생활도 다 만찬가지에요. 여러분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그렇게 세상의 게으른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없이 새벽기도 나올수 있냐구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런데 오래 새벽기도 나오면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가 아니어도 책임감 때문에 새벽기도 나와요 그 몸에 배이는거 아니에요. 도시에 살아도 항상 노인네들이 새벽에 일직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 옛날에 시골에 살면서 항상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서 그게 수십년 살아오면서 몸에 뱄어요. 옛날에 우리 할머님은 저녁만 잡수시면은 눈이 게슴츠레 해지시는거에요. 우린 아직 반짝반짝해서 한참 한낮인데 새벽에 일찌감치 일어나시는에요 그게 몸에 밴거에요 처음엔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새벽기도 못나오죠 그런데 몸에 배고나면 성령이 않도와주셔도 새벽기도 나온다고.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 성령의 은혜 아니면 주일 지킬 수 있어요? 하루만 놀면 돈이 얼만데, 놀면 뭐해요 먹고 살아야지 그런생각을 한다구 그러나 오래와서 은혜받고 성령의 은혜로 주일지키는 행복을 안 다음에는 그다음엔 어때요? 성령이 않도와주셔도 주일지켜요. 그 뭘 보면 알수 있어요? 주일날와서 푹 자는거 보면 알 수 있쟎아요? 성령이 않도와주셔도 와서 잘자요. 푹..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하는거에요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게 성령의 은혜 아니면 않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면은 가능해져요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오래한다라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에요
정말 두려운 일이라고 왜? 그럴 수 있는 위험성들을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거야 다가지고 있는거야
그래서 오늘날 오래 예수 믿은 사람중에 신앙의 뜨거운 감격속에서 사는 사람들 봤어요? 대부분 초신자들이에요 제 말이 틀려요?
교사를 시켜봐도 말이죠 그냥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월급 타가지고 애들한테 쏟아붓는 사람들은 교사한지 얼마않된 사람들이라구. 20년씩, 10년식 교사한 사람들은 노련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령받은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해. 성령 없으면서도 근런데 그건 단지 일할 뿐이에요 생명이 없다 이거죠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그러쟎아요 얼마나 불행한 일이에요
-직장에 다닐대 가끔 한국은행에도 왔다갔다 했는데, 돈을 찾아오는날 30억씩 이렇게 찾아오는데 월급한 15만원씩 받을 때 한 30억씩 찾아오니까 ......이 돈을 하루에 십만원씩 쓰면 며칠이나 쓸까 하면서 말해도,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가도 그것 하고는 상관없어요
은행직원들이 돈을 어마어마하게 세고 묶고 그래도 마지막에 돈 타갈때는 요만큼....
자기게(?) 아니쟎아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도구는 됐는데 그 은혜와 자기는 상관이 없어요 그게 비참한 것이거든요
제가 언제 한번 예화를 들은거 같은데 ...
-미국에서 심야에 설교를 하는 유명한 여자설교자가 있었는데 불면증환자를 설교로 평안을 주던 설교자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시체로 발견
그 사람이 설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감화를 끼칠수 있었는데 돈 나르는 사람처럼 날라다가(?) 줬을뿐이지 자기하고는 상관이 없게 되는 수가 얼마든지 있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닮은 인격으로 변화되어 가지 위해서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도구를 사용해 주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우리에게 계속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잘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말씀에 집중하게 해주시옵소서, 기도를 쉬지않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하는것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고 그 위에 우리가 그렇게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누가 역사해주실 때? 그렇죠 성령님이 역사해주셔서...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맘 어루 만지사 위로와 평화 주소서
참 이 매일매일 성경 읽는게 쉽지 않쟎아요 그죠? 근데 그성경을 이렇게 읽어도 말이죠
매일매일 정해진 장수대로 성경을 읽어나가도 그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지 아니하시면은 성경 읽는 것이 우리가 주님 닮아가는 것에 거의 도움이 않돼요
저는 말이죠, 매일매일 성경 읽고 습관적으로 큐티 하면서도 주님을 거의 못만나는 핍절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봤어요
그게 결국은 뭐냐하면은 묵은땅이 되어가는 거에요 형체는 남아있는데 형체는 옥토와 같은 형체인데 실상은 그 땅이 다 이렇게 망가져가는거 그러기 때문에 어떤 형식 그 자체에 안주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거에요 자기의 영을
뭐가 필요한 거에요 ? 성령님의 은혜에요 그게 우릴 변화시켜 주는거에요. 그 우리를 주님 닮은 사랑으로, 주님 형상 닮은 사람으로 날마다 우릴 변화시켜 주시는거에요
그럼 인제 궁금한건 그거에요. 궁금한거 어떻게 해야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그렇게 말씀생활 할 때와 기도 할 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인격에 영향을 끼치셔서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바꿔가실 것인가 그거쟎아요 그죠
어떻게 해야지만 성령이 없는 말씀생활, 성령이 없는 기도생활을 하지않고 기도할때마다 주님의 성령이 오셔서 거칠기 짝이없고 황폐할 때 이를때 없는 우리의 인격을 어루만지시고 우리를 고치시는거에요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거에요 어떻게 해야지 그렇게 되느냐?
오늘 이 베드로 사도의 그 가르침을 보면은 ‘너희들의 영혼이 깨끗케 되었다.’ 깨끗케 되었다. 너희들의 영혼이 깨끗케 되었다. 이건 구원받았다. 그의미 이상이에요 물론 우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에 주님이 우리를 모든 불법과 불의에서 깨끗이 씻어 주시죠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게 해 주시는거죠
근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성화와 많이 관련이 된 그 깨끗함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의 영혼이 깨끗케 되었다. 더러운 영혼이었는데 깨끗케 되었다.
그 여기에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인격을 움직이는 심장부에요 그것이 깨끗케 되었다.그리고 깨끗케 된 것을 실재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마음이에요
너희들의 마음이 깨끗케 되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쟎아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격속에서 흘러나오는거에요 사람이 인격이 충성되면 그 충성된 인격을 가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빈둥빈둥 놀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형벌이에요 괴로워서 살수가 없다고 괴로워 살수가 없어요
이 귀한 시간에, 이 아까운 세월을 어떻게 주님 섬기지 않고 어떻게 주님 섬기지 않고 어떻게 태만하게 보낼수 있는가 이게 인격이에요
인격이 사랑으로 가득찬 인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악랄한 일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할 수가 없어요 왜 그 인격에서 삶이 흘러나오는데 인격은 A인데 B라는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것에요 살수가 없는거죠
뒤집어서 말해도 마찬가지에요 야비한 인격을 가진 사람보고 진실한 행동을 해보라고 하는 것은 그건 상놈이 갓쓰고 도포입는거 같이 그렇게 부자연 스러운 거에요 이 되질 않는것이죠
늘 예쁜옷만 입고 그림처럼 걸어 다니는 자매들한테 완전군장을 시켜놓고 세워놔보세요
그리고 뛰어다니라고 해보세요 아마 철모 붙들고 가방 붙들고 이러고 뛸거에요
어울리지 않쟎아요
그 삶과 인격이라는 것이 그렇게 결부, 결탁되어 있는것이에요
그러쟎아요 근데 그렇게 인격의 심장부에 뭐가가 있냐면은 마음, 영혼이 있어요
그것이 깨끗케된 사람은 깨끗한 인격을 가지고 순결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거에요
그건데 그렇게 됐다이거에요 너희들의 영혼이 깨끗케 되었다, 너희들의 마음이 순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정절을 지키는 신부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게 됐다 이거죠 근데 오늘 이 사도 베드로는 오늘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어떻게 우리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가 성경이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 영혼이 깨끗케 됐다 이거죠
자 우리의 더러운 마음, 불결한 영혼을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오직 누구에요? 성령님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수 있는거에요 성령님만이 깨끗하게 하실수 있는거에요 깨끗하게 할수 있어요
태어날때터 얼굴이 새카만 사람이 아무리 세수를 한다고 해서 그리 옛날에 검둥이 세수 하나마나, 넌 공부 하나마나 공부를 못하는 애들한테
나는 흑인들 나오는 영화 왜 칼라로 찍는지 이해가 않가요 돈만 버리게 말이야 흑백으로 찍어도 마찬가지인데
이 세수해도 그대로 있쟎아요 뭘해도 우리의 이 불결하고 더러운 마음, 양심 그리고 때묻은 우리의 영혼은 깨끗하게 될 수가 없어요 무엇으로도 깨끗케 될 수 없어요 어떤 것으로도 깨끗케 될 수 없어요, 절대 깨끗케 될 수 없다구 절대 깨끗하게 될 수 없어요 오직누구 만이 깨끗케 할수 있어요? 성령님이 이 사람들의 마음에 오셔서 그들을 깨끗케 하셨다 이거에요 언제 언제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거에요? 그렇죠 진리에 순종할 때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거에요
그러나 여러분 이런 말 할 수 있쟎아요? 아 그럼 목사님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아도 우리가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죠? 교리적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 아닙니까?
그말도 맞죠, 근데 이 성화에 있어서 우리를 주님 닮은 인격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성령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다고 하는것은 사실이지만은 성령님은 순종할 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도와주시는 거에요 그냥 아무나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진짜 주님을 닮아서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실재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이거에요
-온몸과 영혼이 주 오실 그날에 흠없이 원하노라
그렇게 흠없고 정결하게 되는 사람들은 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거에요
아 오늘은 주님이 오시려나. 왜 정결하고 흠없는 사람들은 그 소망을 갖는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성령님은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시냐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오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물론 성령의 은혜속에서 살기를 원하고 또 성령의 강력한 은혜로 자신이 살기를 원하나 사람은 성령주시기를 간절히 원해야죠
오늘도 하나님의 말슴을 이해할 뿐아니라 이해속에서 주의 성령이 오셔서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바꿔주시길 원한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거에요 간절히 기도하는거에요
그래 바꿔주시기를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는거죠
그게 필요해요 당연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순종하는 일 없이는 성령을 구하는 그 모든 간절한 기도가 의미가 없다이거죠 결코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보면은 성령의 은혜안에서 하나님앞에서 많이 거룩하게 된 사람들 그래서 그 사람을 볼 때 마다 주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사람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에요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
안드류 머레이의, 그 아주 참 훌륭하신 분인데 남아프리카에서 선교사였고 원래 화란사람이었어요 영국에서 공부하고 그랬는데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을 써놓은 월터 발로우란 사람이 기록에 보면 그렇게 되있어요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아주 왜소한 체구의 영적인 거인이 무릎위에 두손을 포개고 조용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는 애정어린 미소를 우리에게 보내었고 그때 그는 우리가 감히 침범할수 없는 명상적인 분위기속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제안했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기도가 끝난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앞에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온몸에서 거룩의 기운들이 흘러나오는 거에요 근데 그런 사람들이 흔하지 않아요
근데 그분의 고백을 보면은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받은 이후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사는 동안에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 불순종한 적은 없다는 거에요 없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수 있느냐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지않은 거죠
그러니까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니까 성령이 늘 그사람의 인격에 계셔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거에요. 그런데 처음에 그 기록을 보고 놀랬는데 똑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이 여렀있었어요 그 신앙의 위인들 가운데 말이에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살지는 않았지만은 저렇게 하면 않된다라고 하는 것을 알면서 고의적으로 불순종한적은 없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게 굉장이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적인 약점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사셨던거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성령님이 말씀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주시고 그리고 성령님이 그들이 기도할때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뤄지게 만들어 주셔서 거룩한 하나님의 인격의 영향을 그들이 받도록 그래서 주님 닮은 사람들로 그렇게 변화시켜주시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도록
오늘 새벽에도 일어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확실한거 하나는 말이죠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님이 거시는 최대의 기대는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에요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내생에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을 닮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주님 닮는 것 그 외에 나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주님을 잘 닮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이 않기뻐하는 사람인데 일은 하나님을 너무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사람 발견한적 있냐구 예?
아 제가 그런데요 그거는 자기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라고 하는는 것은 착각이에요, 착각이라구 . 성령님과 함게 주님 닮아가면 그런 인격속에 자연스럽게 삶이 흘러나오죠
그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거에요 세상사람들이 하나님께 여쭤봐서 하나님, 주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주님은 어 그래 서울에 내려가서 열린교회 다니는 아무개를 봐라 그럼 내가 누구인지 알게되리라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가 곧 나를 본 자였던 것처럼 그를 본자는 곧 예수님을 보았느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거에요
그러니까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는 하는 것이 성령님의 은혜를 실재로 간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이 자세가 되어있을때에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거에요 날마다 날마다 우리 완전하지 않쟎아요 날마다 더럽쟎아요 날마다 깨끗하게 하시는 그래서 총체적인 정결함으로 나아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이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숨을 쉬면서 이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거에요 이게 예? 이게 고민해야 될거에요 이게 가장 커다란 고민이에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그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고민속에서 진전을 보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에요 왜
-주님과 같이 내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그게 우리가 정결해질수록 주님의 풍성한 만져주심이 있는거에요
그때 우리 영혼에 진정한 만족이 와요 죄악된 세상을 이길 신령한 힘이 성령의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져요 그게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거에요 그럼 생각해 보세요
성령이 함께 하고 있어요?
성실한 교회생활에 성령님이 함께 하고 있느냐구요
여러분들이 불신자들로 살아갈 때에는 그렇게 성실한 교회생활을 하기에는 성령의 강력한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 진거에요
지금은 아니에요 습관이에요 습관, 습관이라구
바리새인들이 그랬쟎아요 고도의 종교적인 실천을 했쟎아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시간정해놓고 기도하고 성령없이도 그렇게 할수 있었던 거에요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 처음에 성령님 아니면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구 그러한 말씀생활에 성령님이 함께 하냐고 제가 묻고 있는거에요
단지 하나님에 관해서 알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느냐 이거에요 단지 죄에 대하서 깨달을뿐 아니라 죄의식 때문에 몸부림치고 양심의 가책때문이 그 찔림이 있느냐 이거죠, 어찌할꼬 가슴을 두드리는 자기 부서짐이 있느냐 그런게 있느냐 그런게 있느냐
기도생활 의무적으로 늘 이어가기는 하지만은 그것도 훌륭하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죠 진짜 거기에 자기를 고치시는, 바꾸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냐 이거죠
옛날에는 그랬죠, 옛날에는 성령의 도움 아니면은 새벽기도 나올수 없었죠? 요즘음 아 그냥 얼마든지 가능한 거에요 그런데 거기에 자기부서짐이 계속 있느냐이거에요 자기 ...
계속있느냐 이거에요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혜가 사라진 거에요 그런데 오늘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진리를 순종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 똑같은 이야기를 누가 하냐면은 초대교회때 사도들이 똑같이 고백하는 거에요 성령이 오셨어요 오순절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있하셨어요 기도하는 그 120명의 성도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는데 베드로의 고백에 의하면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에 그 올라가실 때 500여 형제가 봤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을 거에요 예? 그게 뭐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너희에게 주실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데 그 500명이 그 명령을 다 들었는데 오순절이 임했을 때 남아있던 사람들은 120명이었어요
하나님이 그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성령을 내리신 거에요
야, 얼마나 놀라워요 놀랍지 않아요?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성령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한 결정적인 인물이 두사람있죠? 베드로와 고넬료 두사람 다 무엇의 사람이었어요?
순종의 사람이었어요
무엇을 한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 베드로가 기도할 시간에 기도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이에요 보자리를 열어서 보여주시는데 율법에 의하면 더러운 짐승들, 벌레들이 가득 있었어요 먹어라, 무슨 끔찍한 얘기에요 불가능합니다. 먹어라 불가능합니다. 나는 그런거 먹을수 없습니다. 않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거죠, 그런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오는거에요 우리 주인 고넬료가 기도하는데 당신에게 가서 당신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주라고 그러시더라
그때에 아까본 환상과 딱 맞아 떨어지면서 늦게나마 즉각적으로 알아차린거에요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유대인으로서 상종해서는 안돼는 그 이방인들의 본 고장으로 가는거에요, 그게 우리가 볼때는 단순한 것이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건 굉장히 불가능한 일이죠, 굉장히 불가능한 일이죠
그건 동족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한거에요
지금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그런것과 맞먹는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아요 뭐 어떻게 될까요 비유를 하자면 이정도 될까요?
신군부가 나와서 광주에다가 군인을 투입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난리를 쳤는데 광주, 시민중에 한사람이 그때에 그 백성들을 학살한 사람의 생일파티에 가서 술을 따라줬데더라
그것보다 더 확대시킨 것 만큼 할수 없은 일을 베드로가 한거에요 자기가 어떻게 유대인으로서 거길 가느냐고 베드로도 복음의 의미를 확실히 몰랐을때였거든요
아직 정리가 않됐을때라구 근데 간거에요 오직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거기로 부르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확신 하나 때문에 간거라구
고넬료도 마찬가지죠 그죠?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방의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부어주시는 통로가 되게 하시는 거에요 정말 놀랍죠? 역사속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자기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서 그렇게 고백을 하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가 바로 메시야 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이다 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봤기 때문에
그런데 사실 우리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그것을 증거하시는데 성령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느냐 그것은 성령님에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일목요연하게 아주 딱 맞아 떨어지는거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신앙의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은 실재적인 내면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순복이 없는 자세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뭐에요?
성령의 은혜가 없는 신앙생활이에요 성령의 은혜가 없는 신앙생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기대는 시시각각으로 변해요 변한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변하는 정도가 더 높아진다구.
어렸을 때 아이들, 애들 기르면 부모가 바보가 되쟎아요
-돌 지나고 서는 자녀를 보며 신기해하고, 자랑하는 어른들
종이를 손으로 가려놓은걸 보려고 하는 아이를 신기해하는 부모이야기
그런데 아기때를 지나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서서 다니는 것은 당연히 여기듯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은혜받고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는 주일 지켜주는 것만해도 진짜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참 대견하기 짝이 없는거야
오늘 낚시터에서 고기나 낚고 있을 텐데
낚시터도 말이죠 바다라던지나 흘러가는 강에서 해야지 요만한 가둬놓고 낚시 집어넣고 말이지 그런거나 하고 주일을 보냈을 사람이 이른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하나님 보실 때 참 감사한거라고 그렇니까 목회자들도 예배끝나고 나서 뭐가 감사해 ,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주일 지킬 인간이 아닌데 주일날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신앙이 좀 깊어지면은 하나님이 만족하시는게 그 정도로 만족 않하시는 거에요 에?
은혜 많이 받고 여러분 가운데 은혜체험 많이 한 가운데 최근에 주일날 딴데 않가고 교회나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신다는거 경험한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봐요
손들어 보라구 없쟎아요
잘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순종의 기대도 마찬가지로 함께 자라가는 거에요
이젠 절대 하나님이 주일을 지키고 심지어는 매일 넉장씩 성경 꼬박꼬박 읽은 것 때문에 얘야 나는 눈물이 쏟아아지게 너한테 고맙다 왜, 어쩜 그렇게 주일 잘 지키냐 하나님이 그러시지 않으신다는 거에요 옛날에는 그러실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질 않아요 왜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고 성장 했기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들이 자라가길 원하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에요
그 아무리 애들이라고 그러는거 않좋거든요
-공공장소에서 엄마 쉬, 엄마 쉬 하면 차가 막 지나가는데도 아이들 쉬 하는거
누구도 그거 보면서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지나가면서 그냥 웃고지나가지 경찰에 신고해서 노상 방뇨죄로 고발하는 사람 없어요 왜 어린아이니까
여러분이 만일 그런다고 생각을 해봐요
-고등학교 3한년때인데 예배고사후 친구 한녀석이 경찰서 앞에서 방뇨를 함
경찰에게 끌려들어가서 조사를 받음, 아버지가 오셔서 ‘넌 나이가 20살이나 된 놈이 오줌도 못가리냐?... 그 나이때에 맞는 기대
그 거는 기대가 성장함에 따라서 계속 변하는 거지 그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도 마찬가지라 이거죠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온혜를 받고 목양을 받고 그러면서 성장해 갈 때 주님의 기대도 함께 자라가는 거에요
더 진실한 사람, 더 정결한 사람, 더 순전한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 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이젠 행동 뿐만아니라 말 한마디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 뿐만아니라 마음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정말 진실하고 주님 앞에 아주 아름다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그 소망을 베드로 사도도 뭘라고 하냐면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쟎아요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그렇게 온전한 사람 ,온전함이란 말이 굉장이 많이 나오쟎아요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주님이 기대하시는 거에요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고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분요하면 분요할수록 그 마지막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집팔아서 사고 단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에요
잠들지 않고 늘 깨어있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정결하고 흠이 없고 점이 없는 깨끗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거에요
그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훌륭한 준비라 이거죠 이게 그렇쟎아요? 그거에요
근데 그렇게 주님의 기대가 점점 높아져 가는데 그 기대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은 행복이 없는거에요. 행복이 있느냐구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우리 행복해야 돼요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그런 행복, 그러니까 뭐 잘먹고 잘살고 이런 행복만이 행복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알아가는 행복,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세상의 어떤 시련도 뒤흔들어 놓을수 없는 완전한 평강이 주는 행복.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느낄 수만 있으면 행복해요
그래서 불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행복한 사람들 많아요
그런 축복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느냐. 하나님의 진리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순종하는 삶이 없으니까 항상 뭔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어도 그것이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아니에요 그게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해요
그죠?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해요
-어렸을 때 방학때 시골에서 머루를 큰독에다 집어놓고 술을 부어서 머루주를 만듦
겨울이 되면 설탕을 붓고 뚜껑을 담아놈
냉장고에 집어넣으면 겨울이 되도 그냥 포도위에 하얀 설탕이 얹어져 있을뿐
그런데 온도가 일정한 장소, 땅에다 묻거나 창고에 넣으면 신기하게 여름에 보면 포도도 아니고 포도주 물도 아닌, 설탕물도 아닌 완전한 새로운 성분의 것이 되는데 술이에요
포도주가 되는 것이에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거에요 이제 그건 포도즙이 아니고 포도 국물도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에요 그건 뭐에요? 포도주 술이에요 완전히 다른 변화를 경험하는 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회 출석해도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지 않으면은 포도위에다 설탕을 뿌려서 냉장고에 넣는거랑 똑같애요 그대로에요 몇 년을 넣어놔도 차가운 냉동실 같은데 집어넣으면 포도위에 설탕이에요 포도와 설탕 두개가 존재하는거. 그런데 적당하게 발효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포도국물도 아니고 설탕물도 아니고 설탕도 간곳없고 포도도 간곳없고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양질의 포도주로 변하는것이에요
우리도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주셔야지만 주님 닮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거에요
그럼 이제 명백해졌죠 말씀과 기도록 바뀌는데 단지 말씀을 이해하고 기도의 습관을 계속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하구나
그리고 그런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주님께 성령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해 갈때 성령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위한 소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