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백성은 불꽃처럼 살아야한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녹취자 : 이시내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 형제 된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역사적인 하나님의 쓰심에 준비하는 미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꿈은 꾸지만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 올바로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듣기 전에 가슴에 먼저 새기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곧바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준비하고 역사를 사랑하면 이 미래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그 날을 대망하며 하나님 앞에 준비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며 주님 앞에서 하듯 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실 때마다 그 전환점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온 땅에 가득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한 백성을 뽑아내셨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의 참다운 백성으로서의 기업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들 가운데 노예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속량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민족을 일으켜 세우심으로 당신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로 작정하십니다. 그 일들을 이루심에 있어 하나님의 시작은 갈대상자에 누워서 나일강에 떠내려 오는 한 아이를 주목하시는 것으로 한 역사의 시작의 여명은 밝아왔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진술은 이루 말하기에 지루할 정도로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운 때를 헤매던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라고 하는 한 아이를 여호와 앞에서 자라가게 만드셨습니다. 모두 다 타락하던 그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건한 어머니 밑에서 젖을 먹고 자랐던 그 믿음의 사람의 아들 한 사람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역사의 한 여명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조차도 이 같은 공식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한아이가 요셉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 모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뛰놀며 그리고 목수 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가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한 역사 아니 세상의 구원의 역사를 위한 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고자 하는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꿈도 아이와 함께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세례요한을 오늘 우리는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400년 동안 끊어진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한 사람이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사람들 마음속에 예수 오시는 앞길을 내기로 예정된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진부한 목소리가 아닌 하늘을 가르고 내려온 그 어떤 목소리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열정에 불타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를 향해 전달해줄 수 있는 사람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이 시대를 향해 쏟아놓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알리기 위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 그 누군가의 실현을 하나님 역사는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빛이 온천지에 빛나는 광명한 시대가 오기 전에 언제나 암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오기 전 새벽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시대를 찢으면서 비춰오는 한줄기 빛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사람을 통해 비췄습니다. 하나님의 빛이었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비추거나 자신을 통해 비췬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비췄습니다.
저는 부산신학대학에서 80절을 가지고 이미 네 번을 설교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반부를 중심으로 설교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세례요한은 많은 준비 육체와 순결의 준비 인격적인 준비 성경과 지식의 준비 학문의 준비 무엇보다도 거룩한 열정에 타오르는 사랑과 열정의 준비를 갖추면서 함께 자라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보다도 중요한 한 준비가 오늘 이 80절 말미에서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며 그다음 심령이 강하여져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으로 커가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주 간난아이 적에 광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동안을 그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심령이 강하여지고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주의를 끌게 합니다.. 첫째는 ‘프뉴마’ 라고 하는 이 심령과 강하여지고 라고 하는 진행형 동사가 연결된 것이고 두 번째는 강하여지는 것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이렇게 점진적으로 강하여진 것이 광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심령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심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인격의 가장 깊은 좌소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심령의 축복을 여러 번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강하여지고 라고 하는 것은 바로 파워,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곧 심령과 능력이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예고된 바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은 말합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프뉴마 심령’과 ‘듀나미스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른 자를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을 때에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의 길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완악했고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며 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이 사실은 우리 일생가운데 한 번의 증거를 통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18세가 위대한 신학자이며 복음전도자이고 부흥으로 쓰임을 받았던 천재적인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증거는 단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평생동안 계속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요한이 역사에 쓰임받기 위해서 그가 마주해야 했던 역사는 단순히 윤리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자기의 몸을 다 바쳐서 사랑으로 불사르기만 하면 세상이 저절로 바뀌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싸움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해서는 세례요한이 모든 지성과 학문과 인격과 정서와 사랑과 열정과 모든 것이 귀하게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의 중요한 준비에 의해서 지지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습니다. 능력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이미 이사야서에서 예언되었지만 그는 소리꾼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를 토하며 그 시대를 향하여 너희는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러나 그가 꿈꾸는 사회는 단지 법을 지키고 정의롭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꿈꾸는 사회는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왕이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역사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 다시 한 번 이 이스라엘에 거룩한 말씀의 영광이 꽃피울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예수를 통해서 실현되는 그 영적인 왕국을 꿈꾸면서 온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감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조국의 역사와 조국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물어보았습니다. ‘더 킹덤’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로 회복시켜주시는 때가 이때이옵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왕국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구약시대를 살아가고 예수님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꿈꾸고 그리워하던 다윗왕국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를 복속하고 그리고 그 나라가 와서 무릎을 꿇고 왕에게 조공을 바치던 그런 강력한 국권을 가진 영광스러운 나라 그런 나라를 꿈꾸고 그리워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님이 바라는 하나님나라의 시각과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하나님나라의 시각이 굉장히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온다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옛 시대에만 새 시대에만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해야 하는 이때에도 이미 적용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빵을 나누어먹고 옷을 나누어입는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역사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고 그리고 교회를 가지고 아파해야 합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에 그것을 배우십시오. 나이 들면 쉽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피 묻은 이 조국의 역사 다친 다리를 끌고 온 이 조국의 교회의 역사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역사는 무관심한 다수가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쓸어안고 고통 하는 소수에 의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기록되어 나갔습니다. 특히 복음적인 청년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깊은 각성을 요구합니다. 이제 조국은 말합니다. 교회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교회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퇴치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그리고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기도하고 그들을 돕고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아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 가운데 한분이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한이 맺혀진 것이 무엇이냐면 교회는 맨날 지네들끼리만 좋아해 그리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세상을 너무나 돌보지 않아 그래서 부산에 내려와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이번에는 이제 정말 몸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와서 열심히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쓰레질도 하고 가난한 사람들 쌀도 퍼다 주고 정말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도 그 전도사님은 아주 성자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동네사람이 가난한 동네니까 아파서 사람이 사경을 헤매면 교회 와서 전도사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그 사람을 엎고 뛰면서 병원비를 대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교회는 안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한 3년 지난 뒤에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니까 교회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혜택은 많이 받으면서도 교회는 잘 안 나옵니다. 그다음에 조용히 반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내가 몸 바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줘도 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는 입을 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안 일어났겠습니까? 좀 큰소리로 대답을 해보십시오.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아멘.
그러니까 한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민족과 역사와 이런 것에 대한 의식도 없고 그냥 예수천당하고 거리를 누비는 그런 삶도 결국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60년대에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문 사람들이 그렇게 와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그래가지고 와 몰려온 사람들이 오늘의 교회에서 무거운 짐이 되고 비곗덩어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다수의 회중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못하는 비곗살이 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아주 훌륭하게 목회하시는 목사님 교계에서 존경받는 목사님 그분이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교회가 내 맘대로 안 되기 시작한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비곗살이 끼는 것입니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들어도 복음은 머리에서만 감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보게 되면 결국은 큰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삶이 변혁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악을 쓰고 그 부흥의 불길을 끌려고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17세기 아일랜드나 아니면 18세기에 뉴잉글랜드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에 정말 웃을 수 없는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형제 목사님 중에 한분이 윤락가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참 귀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그런 사역을 후원해야 됩니다. 그 룸살롱을 누비면서 때로는 두들겨 맞고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라운지 그 창녀들이 목요일이면 룸살롱 구석에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누군가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눈물을 씻겨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그 생활을 청산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 수입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기술도 없습니다. 어느 직장을 택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믿고 싶습니다. 이것이 딜레마라는 말입니다. 강제로 빼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공부하고 오늘밤에 또 몸 팝니다. 내일아침에 회개하고 모레 또 몸 팝니다. 글피 성경공부하고 어떻게 해야 이것이 종식이 되겠냐는 말입니다. 돈 문제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고민해봅시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대한 아주 멋있는 해답을 18세기 부흥이 준다는 말입니다. 오늘 한 도시에 부흥이 일어났는데 말씀전하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조금 왔습니다. 꽉 찹니다. 창틀에 매달려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들에게 커다란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왔습니까? 무엇이 새롭습니까? 늘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 하나님 경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살면 하나님이 혼내십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증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술꾼들이 밤에 나와서 술 먹으러 술집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골목을 갔는데 한집도 문을 연집이 없습니다. 술꾼들이 “야,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오늘 무슨 요일이냐? 평일인데 왜 술집이 없냐?” “가만히 있어봐. 저기 무엇이 붙었잖아. 뭐야? ‘오늘 부로 폐업함. 어젯밤 술집주인이 회개하였음.’” 여러분 웃죠? 아까 질문한 문제에 대해서 그게 답이 아닙니까? 굶으면 어때? 그것 하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확신가지고 먹든지 굶든지 살든지 죽든지 이제 이 길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길인지 내가 알았으므로 주님 날 정결케 하시고 주의 자녀답게 살게 하소서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멘? 그런데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싫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활 청산은 못하겠는 것입니다. 왜? 한 달에 2,3백 만원 수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있냐는 말입니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막 몸부림치면서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 윤락가 가서 복음 전하고 예수 믿게 하고 새사람이 되도록 애쓰고 그래서 그를 이끌어 나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로 하여금 옛 생활을 단절하고 주님께로 이것은 누구만이 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제 마음 아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이쪽으로 치우친 것입니까? 저쪽으로 치우친 것입니까? 제 마음 아시겠습니까? 한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다 끌어안으면서 마지막 궁극적인 해결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 가야되지 않습니까? 크리스천 모습을 갖춘 윤락녀 이것이 성경에서 의미가 있냐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몸 파는 여자 의미가 있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라도 안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능력이 임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가서 전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안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만나는 손님이 와서 복음 전해주겠습니까 동침하는 남자가 예수 영접 시키겠냐는 말입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그곳에 우리는 가야합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고통 하는 자와 고통하고 그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싸안고 고뇌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은혜받기 위해서 여러분 오셨을 것입니다. 은혜주시면 무엇하시겠습니까? 힘들게 살아가던 그리스도인의 삶 편하게 살아가보기 위해서 은혜 받으려고 한다면 번지수 잘못 찾으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 고달픕니다. 능력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삶 가시밭길입니다. 권능이 충만한 사람들의 삶 핏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 낮은 자리에 오셔서 이 조국의 역사에 주님이 오시면 어느 자리에 앉아계시겠습니까 아름답게 지어지고 카펫이 깔려져있고 몇 십억씩 하는 오르간을 갖다놓고 봉헌예배를 드리는 그 로열박스에 예수님이 앉아계시겠습니까 난 사회사업가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를 보십시오. 한 민족의 역사와 단절했던 모든 신앙의 운동은 파멸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사되었습니다. 역사에서 외면되었습니다. 물론 사상에 따라서 어떻게 이 역사를 가지고 고민하는가는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무슨 신앙이냐 그것 묻고 싶지 않습니다. 교단이 어디냐 합리주의냐 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그것 묻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적이면 됩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민족의 역사 여기에 대해서 얼마나 고뇌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원에 가거나 부흥회에 모인 그 수많은 군상들을 보는 것입니다. 박수치고 북소리에 맞춰서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그리고는 도대체 바뀌지 않는 삶을 그대로 짊어지고 세상에 내려가는 사람들 이것이 무슨 역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폴란드가 공산화될 때 95 %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항거 없이 조용히 공산화 되었습니다. 숫자를 가지고 기독교의 세력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거기까지는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돌이켜 서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낮은 자를 찾아가고 그들과 함께 고통하고 슬퍼하고 우는 것까지는 우리의 인격으로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누구의 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려가서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준비하는 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을 깎고 돋우는 일이었습니다. 높은 산은 낮추고 꺼진 웅덩이는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적인 힘을 가져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사역을 위하여 복음의 섬김을 위하여 영적인 준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기술이나 재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역에 영적인 섬김에 필적할 수 있는 거룩한 단련과 준비가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 사역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성공은 세상의 차원에서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한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 역사를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6장에서 윤리적인 권면을 합니다. 아비에 대해서 자녀에 대해서 종과 상전에 대하여 다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실제적인 윤리적인 삶의 권면의 마지막에 가서 뭐라고 말 하냐면 종말로 너희는 주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라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나오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나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남편을 존경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 가정이 자꾸 찢어지고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어떤 세력이 들어와서 두 사람사이를 갈라놓고 오해를 깊어지게 만들고 영적인 갈등이 생기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온유함으로 기르고 싶은데 그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부모에게 순종하고 싶은데 내안에 무엇인가 불순종의 요소들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으면서도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빛다운 삶을 살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게 되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훈련의 부족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양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소양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뭔가 이렇게 섞여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이 무엇이냐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이 구약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복음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도 선지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구약의 궁극적인 의미를 드러낸 일관된 해석이었습니다. 성령강림 후에 있었던 사도들의 중요한 임무도 구약을 통해서 신약시대에 일어난 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성령강림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역모두 영적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들에게 놀라운 능력이 필요했고 엘리야가 그 점에서 모든 세대의 말씀 사역자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요한이 엘리야의 능력으로 와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앞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완강하고 무지하고 어두웠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가운데 어두움을 비춥니다. 길어봐야 2년 정도 되는 아주 짤막한 세월을 살다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정계의 중요한 인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역사의 변혁이었습니다. 이 역사를 뒤집어서 혁명적인 변혁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를 거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이 역사를 바꾸는 것도 이 민족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아직도 1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등소평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파리를 등소평이 활보하던 그 시기에 누군가에 그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들었다면 중국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훌륭한 미래를 향한 투자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향해서 쏟아 붓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해 쏟아 붓는 것입니다. 언젠가 손봉호 교수님과 하루저녁 잘 시간이 있었는데 교제하는 가운데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교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왜? 무슨 백 몇 억 삼백억 사백억 이제는 무슨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자기가 화란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그렇게 진 교회들이 100년이 되지 않아서 다 부서지고 철거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 팔리고 부서져서 디스코텍으로 바뀌고 슈퍼마켓으로 바뀌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건물이 없어서 교회가 망하는 법은 역사적으로 없었습니다. 누가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그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영적인 사람들 그 교회를 채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사람을 향해 돈을 들이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 말하자면 투자하는 그런 교회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강하여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약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적에는 약했습니다. 그는 무슨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 광야에서 강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몇 년 하셨습니까? 맨날 무슨 찬송 좋아하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찬양)
지치고 상한 나의 마음을 주여 받아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갑니다
험한 세상에 날 혼자 있게 마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거친 비바람 불어올 때
나를 보호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참 곤고하던 시절에 이 찬송을 지체들과 부르면서 참 마음 많이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 찬송은 몇 달에 한번만 불러야지 맨날 부르면 안 됩니다. 도대체 패잔병과 같은 그리스도인들 모아놓고 무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습니까? 싸우러 가긴 가지만 질 줄을 믿사옵나이다. 그러고 가는 사람이 그러고 돌아와서 지치고 깨졌사옵나이다. 그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물론 주님만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우리의 찢어진 마음 주님만이 고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매일 그렇게 살아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례요한은 재능과 외모를 가지고 역사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꼼꼼히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꼼꼼히 준비했는지 그 준비를 듬성듬성 이야기 하는 데만 4일이 걸렸습니다. 정말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리고 또 정서에 있어서 육체의 순결에 있어서 많이 준비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인격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인격 믿고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습니까? 아니라고 말 좀 해보십시오. 인격을 믿고 역사에 나타났습니까? ‘내가 30년 동안 고매한 인격을 닦았는데 지들이 내 말을 안 듣겠어?’ 그러고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광야에서 지식적으로 잘 준비했습니다. 지식을 믿고 역사에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광야에서 독학은 했지만 박사학위 서 너 개 딴 것만큼 공부했는데 그래도 내말 안 듣겠어?’ 그러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순결한 육체로 준비했습니다. ‘나같이 경건한 사람 있나 나와 보라고 해. 내가 이렇게 자매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장가도 안 들고 순결한 몸으로 나오는데 지들이 내말 안 듣겠어?’ 그것 믿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또 그는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과 역사를 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타락한 제사장들 나같이 이렇게 진실하게 이 민족의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러고 역사에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꼼꼼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준비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를 믿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성경의 예화 하나를 오늘 다른 각도에서 또 한 번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서 물맷돌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몇 번째 돌멩이로 사태를 종식시켰습니까? 첫 번째, 그런데 통에는 몇 개가 있었습니까? 다섯 개. 그럼 네 방은 헛발 할 것 각오하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한발 그것으로 사태를 끝냈지만 그는 다섯 개를 준비했습니다. 준비하지 않고 이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잘 먹고 잘 살다가 갈 곳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나갔습니다. 물매를 던졌습니다. 생전처음 해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왕년에 수없이 해보았습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50미터 바깥에다 담배 한 가치를 세워놓고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들이 이것을 던져서 정확하게 맞춘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그런 것 생기면 그 아이들이 금메달을 싹 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사자가 슬금슬금 나옵니다. 저놈이 어디 양떼들한테 덤벼들라고 해 저것을 맞추긴 맞춰야 하는데 어디를 한번 맞출까 왼쪽 눈을 맞춰서 애꾸를 만들어버릴까 콧등을 부러뜨려버릴까 이빨을 모두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버릴까 맘먹으면 거기에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의하던 관습대로 나간 것이었습니다. 눈감고 던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겨냥한 곳이 있었습니다. 온몸 어디 맞아도 안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딱 한군데가 있는데 갑옷이 홈을 내느라고 요렇게 만든 것입니다. 거기에 맞추면 되겠습니다. 물매를 돌리며 뛰어나갈 때 오랜 세월동안 연습해오던 물매였지만 물매를 던지는 기술을 의지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까? 그럼 퀴즈를 내겠습니다. 몇 대 몇입니까? 50대 50? 좀 심합니까? 30대 70? 하나님 70 기술 30 됐습니까? 됐으면 아멘 하십시오. 0대 100 다 준비했지만 준비한 것 갖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 안했습니다. 누구 의지했습니까? 하나님 의지했습니다. 놀랍습니다.
목회사역을 하거나 복음전도를 위해서 수고하는 일꾼들을 딱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주시나 했더니 ‘내가 이렇게 준비가 다되었는데 세상 정말 나 몰라볼 거야? 화나면 나도 세상이 아무리 오라고 해도 안 가.’ 이런 사람은 안 씁니다. 그러면 준비도 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그런 사람도 안 씁니다. 열심히 그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되었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는데 그런데도 하나님 주님이 나 안 밀어주시면 어떻게 주님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 하나님이 만나면 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놀라운 준비를 했지만 전혀 그 준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누구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자기의 심령이 점점점점점점 강하여져가는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 것입니다.
제가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를 제법 많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은혜 받고 싶어 하는 젊은이는 많습니다. 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은혜 안 받으면서 사는 것은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잠깐 동안은 괜찮은데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고 싶어서 그 휴가도 반납하고 회비까지 내고 교역자들한테 야단맞으면서도 그 불편한 수련회에 쫓아옵니다. 그런데 은혜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소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정말로 삶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강하여져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약합니다. 대포 소리 들으면 깜짝 놀라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전쟁을 치르겠느냐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 없습니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총 쏘고 대포 쏘던 1차 대전과 같은 시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에 전쟁터에 나가는 말을 어떻게 준비시켰는지 아십니까? 귀마개를 해놓고 옆에서 대포를 계속 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귀마개를 하나씩 둘씩 벗기는 것입니다. 그 훈련을 안 받고 말이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막 뛰어가다가 꽝 하면 곤두박질치는 것입니다. 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사로서 말하자면 이 세상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말미암는 복음의 놀라운 변혁을 위해서 영적인 전쟁의 한 마당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군기아래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강하여진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능과 외모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 능력은 천차만별입니다. 바울도 내가 알고 예수도 내가 알거든 너는 누구냐 귀신이 물었습니다. 귀신의 세계에서도 기억해주는 영적인 인물이 있고 기억할 필요도 없이 무시되는 인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오날도 레이븐힐(Leonard Ravenhill) 이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천국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지옥에도 기록되는 사람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강력한 세력에 의해서야 쫓겨나가는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도 영적인 능력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한 역사를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한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를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내어보내시기 직전에 하늘로부터 커다란 능력의 부으심을 한번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놀라운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이 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는 또 한사람의 선지자가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의 특징은 능력이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에 특이하게 부어주시는 커다란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는 그런 능력의 부으심을 사모하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는 꿈꾸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부어주심이 그를 선지지로 만들기 전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영적인 힘과 특성 영적인 자질들이 강화되어가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학교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입학하기 전에는 기도의 영을 간직하고 제법 간절히 기도하고 무엇인가 영적인 은혜가 깃들여있던 사람이었는데 신학교 들어와서는 마치 그런 열렬한 기도생활과 그리고 뜨거운 복음전도의 열정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이 촌스러운 가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학교에 안에서 후딱 집어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찮게 여겨 잃어버려지도록 자신을 방치하고 관념과 제대로 소화되지 못하는 신학적인 개념 몇 가지를 손에 쥐는 대가로 귀한 영적인 삶들을 하찮게 버리고 마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예화) 제가 잠깐 강의를 나가던 그런 신학교가 하나 있었습니다. 한 한 학기 정도 나갔습니다. 토탈해서는 세 학기 정도 나갔지만 말입니다. 오순절계통에 있는 어느 신학교였습니다. 순복음교회에 다니는 분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학교 가서 기도할 때 그렇게 눈물이 납니다. 긴 수업들어가기 전에는 찬송을 하나 부르고 들어가는데 학생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는데 저쪽 뒤에서 말입니다 노트에 엎드려서 흐느끼면서 웁니다. ‘내가 몇 학교 다녀봤지만 여기 참 좋구나.’ 정말 애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몇 학기 못나갔습니다. 그러다 한 이년이나 삼 년 있다가 다시 한 학기 나갔는데 와 어떻게 그 시기에 그렇게 학교가 변할 수 있습니까 입학할 때는 똑같은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삼년쯤 학교 다니고 나면 교수님 저도 아무래도 할 게 없는데 외국 가서 박사 학위 받고 신학자나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50넘은 신학생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지적인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답안지 보면 알지 않습니까? 한자는 획이 틀리고 한글은 맞춤법이 틀리고 영어는 알파벳이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답안지에 일본어까지 썼는데 일본어는 나도 모르니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어올 때 인생 마지막 길에서 예수만나고 그리고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리고 막판에 복음을 위해서 들어왔는데 3년 다니는 동안에 그 기도의 영 은혜의 생활 말씀에 순종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다 팔아먹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한 가지 확신입니다. ‘나도 신학하면 될 겨. 나도 한번 막판에 이름한번 신학교에 띄워 볼 겨.’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있지 않습니까? 아주 존경받는 기독교 사상가입니다. 그분이 쓰신 책 가운데 “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위기, 재앙이라고 할까 그런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정말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한 사연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한 사람이 아까 말씀드린 것같이 그런 복음의 열정에 불탑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들어가는 첫 학기에서부터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 보면서 ‘야. 너 신들렸냐? 신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 촌스러운 거야.’ 하고 벗겨버립니다. 교회 나가서 열심히 봉사합니다. ‘야. 그런 것은 신학생들이 하는 것 아니야.’ 하고 벗겨버립니다. 성경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뭐라고 하냐면 ‘창세기는 신화고 출애굽기는 꾸며낸 역사고 레위기는 여러 개의 문서가 짝 잇기 되었고 계시록은 사기꾼들이 만들어 놓은 조작이다.’ 그러고 보니까 가죽껍데기 두 개 남습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그것을 다 받아들인 것입니다. 막판에 이 사람이 귀신 들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 무당을 찾아가서 스피리추얼리즘(spiritualism) 영매술에 빠집니다. 막판에 완전히 폐인의 인생을 가면서 마지막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쉐퍼 박사 앞에 고백합니다. “박사님. 나는 은혜를 받고 떡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신학교는 나에게 돌과 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참 많이 속으로 흐느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 우리를 향한 경고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문은 강력한 신앙의 다스림 아래서 관념은 건전한 말씀의 체험의 통치아래서 다스려지지 아니하면 좋은 지식들이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지식을 그런 영적인 자질을 주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신학함의 오류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신학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의 차원의 일반적인 신앙의 생활에 대해서 말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전히 좋은 것입니다. 여전히 뜨거운 은혜생활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감격하는 삶은 여전히 좋은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깊은 보람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를 끝내고 난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끝난 다음에 모든 교인들이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돌아가지 못하고 그 바닥에 엎드려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검은 머리를 헝클이며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온 나날들 무너지는 자신의 가치관을 부여잡고 하나님 내 인생 어떻게 치료해주시옵소서 내가 너무나 어리석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막 애처롭게 우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너무나 애처롭게 울어서 다른 사람이 교회에서 기도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서 어깨를 두드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너무 안 무너집니다. 그리고 세상도 너무나 안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언제나 마음을 녹입니다. 뜨거운 기도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절한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를 쓰실 날들을 기대하며 우리의 영적인 삶이 나날이 강하여져가는 이런 놀라운 영적인 자질들의 함양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예수를 믿고 회개하던 때에는 그렇게 뜨겁고 간절하던 기도가 집사님쯤 되고나면 식어지기 시작합니다. 신학교 들어올 때 불같은 기도가 그래서 신학교에서 학생들이 그럽니다. 1학년 클라스강의들어 가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왜? 성령 충만하니까 말도 제일 잘 듣습니다. 레포트 많이 내줘도 아멘, F를 맞아도 주여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1학년들이 기도하고 있으니까 3학년이 와서 족치는 것입니다. “야. 그만해 임마. 우리도 한때는 다 그랬어 메뚜기도 한철이야. 너희도 3학년 되어봐. 철들 때가 있어.” 그러고 나서 졸업할 때 쯤 돼서는 이미 완전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졸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 벗겨졌을 때 그때 이제 대학원 졸업반이 됩니다. 그리고 나가보니까 안 됩니다. 요령 피워서는 사람이 안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시 이제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러고 기껏 7년 가르쳤더니 나가서 하는 소리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 모조리 헛것이다 그럽니다. 무엇입니까 신학교에서 가르친 사람은 무슨 보람입니까 내용은 사라져버리고 차가운 형식이 지배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찌하든지 여러분의 가치를 이제는 어디다 둘 것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그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되자는 운동이 말하자면은 한국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제자가 되는 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 안 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도의 후예들이 되어야 됩니다. 영적인 권능으로 충만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일들을 위해서 영권을 가지고 나아가서 싸울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의 선포는 낡은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에 다 나오는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앞에서 많이 듣던 말이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서 나오니까 달리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족보도 없고 추천자도 없는 이단에 비슷한 들사람 앞에 나와서 세례를 받게 하고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을 담대히 꾸짖었는데도 그들은 쩔쩔매며 살아온 새로운 삶의 방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미래를 예비하는 길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말씀의 사역이 영적인 사역임을 복음 전도의 사역이 정말 신령한 사역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능력이 세례요한 앞에서 강화되어 간 것은 그의 심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능력은 심령이 어떠한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의 기이한 은혜를 힘입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목사나 전도자들만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성도들 질그릇과 같이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을 사자와 같이 만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사역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말이 어눌해서 잘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뭔가 복음을 전해야 될 텐데 어떻게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동네사람들 보고 “야 우리 집에 다 모여 내가 뭐 줄게.” 그래서 사람들이 건넌방에 모이니까 목사님이 써 놓은 설교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말을 못하니까. 그 설교집을 읽을 때 사람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으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성령의 권능이 만들어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냐면 참회가 없습니다. 근본이 바뀌는 정직한 회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신학교를 섬기고 있는 어느 장로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저는 장로지만 회개하라는 간절한 외침을 설교단에서 들어본 게 30년 전입니다. 여러분 바뀌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가득 채우면 그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회심해야 되지 않습니까? 거듭남의 역사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죄가 책망 받고 거룩한 삶을 촉구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으로 가득해지는 것과 성도가 많아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신령한 은혜로 가득 차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모이는 것은 성령이 아니어도 할 수 있습니다. 모여서 사이좋게 서로 기대면서 살아가는 신용 협동 조합 같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주님을 사랑하며 이교회의 정직한 회원으로 남는 것은 성령이 죄를 책망하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은 이러한 능력이 자기 속에 강화되어 갔습니다. 그가 어떠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겠습니까? 그는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흔적이 있지만 이제는 단지 능력을 받았던 자로 기억되어야 좋을 사람이 있습니다. 위장과 허위로 예전의 능력이 있는 자로 행세하려고 하지만 분명히 말씀과 복음 사역 속에 뭔가 빠져나간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결하게 보존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늘나라의 능력이 역사하겠습니까? 거룩한 삶을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거룩한 성령이 오시겠느냐 말입니다. 예수께서 12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할 때에 우리는 가룟 유다는 제외되었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는 한때 그러한 능력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게 되자 그의 심령에는 능력이 사라지고 사단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구약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악신을 임하게 하시기 전에 먼저 사울의 마음이 심령이 하나님 앞에 변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안타깝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주시옵소서 라고 애원한 것은 그가 범죄 한 후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깨끗한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은 그의 구원은 확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안에 분명히 계시고 떠나실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범죄 하자 그는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고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심령이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것들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렵사리 누리게 된 그 놀라운 영적인 특권들 그 놀라운 첫사랑의 축복들 그 놀라운 영성들을 하찮게 잃어버리고 육체로 영적인 일들을 감당하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바퀴 잃은 수레를 힘으로 밀고가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 말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언덕위에 땅을 개간해놓았는데 아무리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비올기미가 없습니다. 작물이 타들어갑니다. 할 수없이 농부는 결심했습니다. 물지게를 아래계곡에서 물을 지고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20분, 30분 걸어서 그 언덕배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리에 넣어서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물을 새로 긷기 위해서 내려갔다가 다시 한 초롱 두 초롱 길어서 올라오니까 아까 뿌린 물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짓을 하루 종일 했는데 그 다음날 나가서 보니까 햇빛은 또 비취고 어제와 똑같이 작물은 타들어갑니다. 이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주저앉아서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기 시작합니다. ‘솨아’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딱 10분 왔습니다. 그런데 땅이 흠뻑 젖고 잠시 후에 와보니까 그 모든 작물들이 싱싱하게 소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음 이것을 전하며 복음 사역을 감당 해나가려고 하는 이 일과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의 부으시는 은혜와 도움을 통해서 감당해나가려고 하는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흥을 기다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흥은 우리가 수 십년 동안 할 수없는 그 일을 위대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어 지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어도 만약에 우리가 복음으로 이 민족의 역사 이 교회의 변혁을 위해서 승부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바꾸는 일에 작은 기여밖에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 가장 절망적으로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변합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변하나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한번 변하나 보십시오.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예배드리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밀려와서 자기의 옛 삶을 드러내고 그리고 옛 묵었던 상처를 드러내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눈물의 회개를 드린 것이 언제였습니까? 몇 년전이었습니까? 눈에는 눈물이 마르고 가슴에는 불이 꺼져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도와 형식의 틀 속에 안주해버리려고 하는 교회의 속성과 그리고 안일한 메시지에 위로를 받으면서 그렇게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구원의 티켓 하나를 가지고 위안을 받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행심 어린 회중의 종교적인 심리와 그리고 종교적인 습성 이것들과의 사투가 없이는 교회를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이들로 가득 찬 교회는 하나님에게는 고통입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는 단지 그들은 단지 교회운영비를 대고 목회자의 생활비를 대는 물주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당한 때에 거대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조국의 교회의 역사에 필요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글자하나를 가지고 따지고 논쟁하는 그러한 말하자면은 현학적인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태와 형식에 젖어서 하나님의 면전의식 없이 살아가는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워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모두를 그런 사람들로 역사는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가며 누가 이 민족을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나아 갈꼬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깊이 절망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부정한 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뵈었습니다. 그는 이제 큰 일 났습니다. 그는 고통하며 괴로워하며 흐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무능력하고 죄악 되고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하나님 앞에 절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펼쳐진 우리의 사명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예수 잘 믿다가 복음도구로 십자가를 타고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담보로 하여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이 세상의 안락이나 누리다가 역사를 뒤로하고 우리만 달랑 천국의 티켓을 들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가 그 사람의 추구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참된 복음을 만나면 만날수록 뭔가 내가 생각했던 기독교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어두운 세상을 지나며 살았는가 보십시오. 그들은 영혼이 거듭난 것이 아니라 삶의 목표가 거듭났습니다. 삶의 꿈이 거듭났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 여호와 앞에 돌아오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누구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리고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온 눈으로 복음의 삶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우리가 핏빛으로 살아야 될 것인지 어떻게 이 어두운 시대를 안락을 미워하고 명예를 미워하고 그리고 안일한 삶을 청산하고 우리 앞에 살아갔던 위대한 영적인 거인들과 같이 그렇게 한시대의 개벽을 알리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아야 될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빛은 언제나 어두움보다 소수입니다. 소금은 언제나 아주 작은 것입니다. 작은 자라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언제든지 불신자가 다수였습니다. 교회는 소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잠자는 사람은 다수였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역사를 온 몸으로 고난을 받으며 지나갔습니다. 문제의 많은 시대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님이 깨우신 영적인 부흥과 각성을 위해서 부르짖으며 살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그 고난을 맞으며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영혼을 만지고 지나가셔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들 먹고 마시던 시대에 산상에서 토굴에서 외로운 교회당에서 금식하며 그 시대를 지났습니다. 모두들 춤추고 노래하던 시대에 그들은 흐느껴 울며 역사를 부둥켜안았습니다. 모두들 희망이 있다고 말하던 시대에 그들은 아파하면서도 절망을 말해야 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개울이 흐르고 꽃피고 벤치가 있고 아기자기하고 발 담그고 놀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열사의 햇볕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워서 모닥불을 지펴야 하고 어두워지면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무서운 광야입니다. 세례요한은 그곳에서 컸습니다. 그 외로운 광야에서 바람소리를 친구삼아 고독을 이웃삼아 하나님 앞에 커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광야는 어디입니까 거기로 나아가야지만 강해지던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광야는 어디입니까 형식적인 예배생활 건성건성 나와서 드리는 신학교 수업 건성건성 나와서 봉사하고 헌금이나 몇 번 내고 돌아가는 의식 없는 예배의 삶 그런 것은 결코 광야가 아닙니다. 그런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그렇게 크게 만난 곳이 빈들이었습니까? 왜 광야였습니까? 왜 따뜻한 가정이나 도서관이나 예루살렘의 거리나 핫도그집이 아니었습니까? 왜 하필이면 이 외로운 광야에서 그것도 잠시 동안에가 아니라 피를 말리는 것 같은 혹독한 연단이 30년이나 흘러간 다음에 사역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까 하나님은 구별된 삶을 살고 거룩한 심령을 가진 자의 마음속에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은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래 너 참 예수 잘 믿는다. 너만큼 예수에 미친 사람이 어디 있니?” 그렇게 말해도 그들의 마음은 허했습니다. 뭔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야 합니까? 내 마음속에 있는 놀라운 갈증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사무치는 이 무엇인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영광과 그 이름을 위해 살기 위해서 한없이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싶지만 그러나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인내의 밤을 슬기롭게 지냈습니다. 고통과 멸시의 밤을 그들은 지혜롭게 보냈습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운 역사의 한 밤중에서 새벽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모두들 춤추고 노래하던 시대에 위기를 외치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혼의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당신을 찾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들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이 교회와 그리고 우리 안에 부어주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준비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완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고 고백하며 하나님 우리에게 거룩한 능력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이 교회에 거룩한 권세를 부으시기까지 하나님 앞에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울며 매달려 기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함성으로 한 시대의 역사의 밤이 마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 앞에 고정된 심령으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권능으로 민족과 교회위에 충만하게 나타나게 될 영광스런 복음의 때를 복음의 풍년의 위대한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던 그 사람들의 눈물의 기도가 마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부흥의 여명을 이 땅에 주셨던 것입니다.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사십시오.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훌륭하게 준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준비된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의 옷을 벗어버리고 광야에 빈들로 나아가서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서 그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그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