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외치는 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사40:3~5)
녹취자: 김경애
우리들이 흔히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사실은 아주 애매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은 목회를 한다는 것이 한 단체를 경영적으로 종교적으로 리더십과 비전을 가지고 이끌어간다는 말하고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라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4, 5년 전에 교회에 새로 등록한 사람들이 한 일 년이 지나고 나서 교리반에서 공부를 하는데 한 열댓 명쯤 모아놓고 이 교회를 오기 전에 목사님을 누구라고 생각했느냐고 물으면서 정직하게 대답하라고 하면서 쭉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라는 조직의 최고 리더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쭉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명과 관련해서 목회자를 이야기한 사람은 딱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오늘날 우리들의 목회가 얼마나 본질적인 것들을 성도들에게 일깨워주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느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는 일차적으로 사실은 목회자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Minister인데 Minister라면 사역자가 되는 것이고 Pastor라면 목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좀 애매모호하고 그리고 두루뭉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본질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그냥 따라가서는 안 되고 비판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과연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하고 비판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가 누구인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목사가 누구인가? 청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견해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피 뿌리며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목회자라는 애매모호한 표현 속에 감추어져있는 목사의 정체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선지자와 신약에서 사도가 신학적으로 Continued가 있는 부분도 있고 Continued가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한 Continued 와 Discontinued 가 다 있는데 그런데 그 Continued는 무엇이냐 하면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소명될 때에 오늘날 우리처럼 사업을 하다가 보니까 길이 막히고 학교 시험을 치니까 자꾸 떨어지고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펜을 굴리자니 능력이 안 되어서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신학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고 선지자는 세습직이 아니었습니다. 그 의미는 제사장은 세습직이었는데 선지자는 세습직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암시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임하고 자기가 외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이 선지자로 소명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는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조금 더 추가가 됩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소명이 주님께로부터 그들에게 임한 그 말씀을 직선적으로 임한 그 말씀을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적용해서 외치는 것이 선지자의 말씀에 관한 주요 직무였다면 사도들은 그렇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거기에 깊이 사무쳐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외쳐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외쳐야할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때그때 주시는 직선적인 계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최대의 계시적 사건 즉 구속의 사건에 대한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속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구속받은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가르쳐야할 그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믿은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견고한 신앙이 되게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형태는 다르지만 똑같이 그들의 마음속에는 강렬한 말씀의 불이 불붙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나는 스데반을 구약의 예레미아와 많이 비견합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시위대뜰에 갇혔을 때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결심하였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고백이었습니다. 그렇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말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스데반이 똑같이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순교를 당하면서도 설교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게 결국은 목사가 가져야할 내면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목회라는 것을 합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목회라는 직무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그 말씀사역을 통해 일어난 결과들을 Handling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 목회라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결과가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첫 번째 결과가 생겨나지 않으니까 그 나머지부터는 모두 인본주의적으로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돌아갑니다.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회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부해서 사람들이 왔으면 좋겠는데 안 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모아야합니다. 그러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도 상당히 통합니다. 모읍니다. 그다음에 거기까지는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야지만 목양을 받고자하는 요구가 생겨나는데 목양의 요구라는 것은 뭐냐 하면 불신자들은 목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어서 목자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이렇게 반응을 해야지만 목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을 안 하니까 그런 반응을 보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에는 뭐냐 하면 성도들을 잘 이끌고 인격적으로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따라 살게 하는 그 일을 해야 되겠는데 그 일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의 목표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의 친목단체처럼 그렇게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다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목회 자체를 하나의 기교 내지는 전문적인 기술로 보고 그 다음에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근한 예로 열린 교회가 만약에 50명쯤 모이는 지하실의 교회였어도 여러분들이 여기에 왔을까 라고 생각하면 반 이상은 회의적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미 어느 정도 이 교회가 목회에서 성공한 교회라는 말자체가 어패가 있지만 그런 생각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시간 이후로 그런 생각을 다 지워버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목회를 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오면서 이룬 어떤 성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은 모두 양파껍질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 벗겨내고 마지막에 중심에 진짜 목회자가 무엇으로 준비되어야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사도들이 사도행전 6장에서 교회가 큰 침체에 빠집니다.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돕는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 화평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이 정확하게 간파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자신들이 선지자의 후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직무가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이 모든 재앙을 면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직무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두 번째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사소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사도들은 바뀌었나? 왜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여야 하리라 라고 바꾸어서 말했나? 그럴텐테 그 의문이 바로 그 뒤에 풀립니다. 사도들이 말을 할 때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집사가 다 뽑혀진 다음에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 라고 나옵니다. 실제의 Praxis에 있어서는 그 순서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정말 안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거의 유치원생 같은 사람들이 계속 신학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유학을 하고 학위를 따고 이렇게 하면서 종교적 야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 사회적인 위치가 되면 그 다음에는 웬만해서는 더 이상의 추가적인 회심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최근에 깊이 깨뜨려져서 회개를 경험해보았습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굉장히 어려운 시대에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총신을 학교 다닐 때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나서 참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모교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도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심으로 학교를 사랑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총신에 다니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깊은 경각심을 가져야합니다. 뭐냐 하면 제가 많은 신학교에 집회를 다닙니다. 순수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덕적으로 수준이 낮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례합니다. 왜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그게 여러분들이 놓여있는 환경입니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그러한 여러분들이 놓여있는 그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그 시류를 거슬러서 살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똑같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합니다. 선지자 내지는 그 사도들의 임무의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초창기의 사역이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러 올라가지 않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러분들이 5기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에 여기에 와서 어떤 정보 정도를 얻으려고 그리고 김남준 목사와 교제를 나누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왔으면 다시 교회로 돌아가서 본연의 일에 충실한 것이 훨씬 유익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뭔가 이렇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삶의 판 전체를 버전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셔야합니다. 여러분들이 훈련받는 기간 동안에 깊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아주 Secular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별로 노력할 것이 없지만 진실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상황을 다 알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런 것들이 자기를 찍어 내리려고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저항을 해야 합니다. 시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월이 조금 흐르고 나면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자기가 찍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이렇게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교계 전체도 그렇고 목회자들을 보아도 그렇고 또 총신학생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뭔가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너무 순수하다기보다는 어떤 야망이랄까 뭔가 성공을 향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그런 양상입니다. 그러니까 깊이 기도하고 이 Sprit 자체가 빌딩 되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지성을 연마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요즘으로 표현하자면 신약시대에서는 복음으로 대변되는데 복음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복음 자체만이 아니라 복음에 관계된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간단하지만 그 복음에서 거룩한 삶과 신령한 생활을 위해서 수립되는 교리의 체계들은 그것은 배워도 또 배워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면서 낙심이 될 정도로 그렇게 신앙생활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본 길을 인도하는 것이 지도자인데 나 자신은 무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지런히 탐구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를 한다고 그러면서 비전을 목회의 성공이라고 둔다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게 가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자훈련을 하면 다 옥한흠 목사님 같은 교회를 할 것 같습니까? 성령운동을 하면 모두 조용기 목사님 하시는 교회처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직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이 없습니다. 문화사역을 하면 하용조 목사님 교회처럼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높은 산들이 몇 개 있지만 그게 제일 아름다운 산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은 8800미터가 넘습니다. 동네에 있는 산은 80미터밖에 안되어도 예쁜 산이 많습니다. 그게 중요한 가치가 아닙니다. 어떻게 일 년을 하다가 죽든지 십년을 하다가 죽든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똑바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 낙도면 어떻습니까? 도시면 또 어떻습니까? 해외에 나가서 교포면 어떻습니까? 변두리면 어떻고 부자들이 모이는 동네면 무슨 상관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달동네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목회를 하면 생활비도 좀 더 받고 집도 좀 괜찮고 차도 좀 나은 것으로 타고 다닐 것입니다. 책도 마음대로 사고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설교의 제목을 가지고 산다면 사실은 그런 안락한 삶이 그 사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안락도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사무쳐서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설교를 잘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설교를 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르칠 사람들은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보냈더니 기껏 하는 이야기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하나도 쓸 것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것은 그른 이야기가 아니라 정확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배우게 하자고 그러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자기가 걸어간 신앙의 발자취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되어라. 이렇게 살아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이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파고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그렇게 되셨고 그렇게 사시려고 했고 그렇게 사셨던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온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깊이 개탄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들이 신앙이 별로 없습니다. 신학생들이 신앙이 약합니다. 여러분들 여기 전부 열 명이 모였는데 여러분 남들이 보면 전부 다 정식대학원 학생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여러분들이 신앙의 순서대로 세워놓으면 1번부터 10번까지 쭉 나열대로 서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안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라는 것은 기독교신앙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사명자라고 자꾸 그러는데 사명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신자의 사명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이 적어놓으신 총신대교훈이 있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에 되게 촌스럽다고 그랬습니다. 어디 가서 교훈이야기도 안 꺼냅니다. 진리입니다. 처음에 신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말 주님 보시기에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계속 있어서 그 사람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고 그 다음에 피가 솟구치게 해서 그러는 속에서 자신이 먼저 그 진리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터득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살아라. 그래서 그것을 전부 자신의 삶속에 소화해서 그래서 그 위에 영혼에 대한 사랑이 더해져서 그래서 학문과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재료가 되어서 그것으로 영혼에 대한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부족을 아는 참회로 눈물을 흘려서 그것을 반죽해서 성령의 불로 그것을 구워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의 영혼의 심금을 울리는 설교가 나오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보다 하는 사연입니다. 그래서 위해서는 정말 여러분들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갖추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는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훈련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