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게 구제하라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1. 흩어 구제할 때(잠11:24-25) 2010.1.24 주일오후 1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2. 경건의 표, 구제(약1:27) 2010.1.31 주일오후 7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3. 은혜는 구제하게 한다(고후8:1) 2010.2.7 주일오후 12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4. 주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심(눅6:38) 2010.2.21 주일오후 15
5. 구제와 하나님의 계획(고후8:14) 2010.3.21 주일오후 21
6. 구제, 목양의 열매(고후9:1-4) 2010.3.28 주일오후 27
7. 아낌없이 흐르는 사랑(신15:10) 2010.4.18 주일오후 34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1.흩어 구제할 때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오늘부터 몇 주간 동안은 구제에 대해서 오후 예배 시간마다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육체 자체가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물질을 의지하면서 살게끔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고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집도 필요 합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들이 미래에 우리들 자신이 불행해지는 사태에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한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구라파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여유입니다. 그래서 세금을 아주 많이 가져갑니다. 우리나라 세금 내는 것도 많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더 많이 세금을 걷어 가야 합니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 교육, 보건, 노후 이것은 나라에서 거의 완벽하게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지난번 학회 참석차 네덜란드에 갔을 때 오래도록 목회한 어느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나라가 참 좋습니다." "그래요?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치사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니까 "한국에서 목사님 돈 없어 보세요. 얼마나 치사해 집니까? 그런데 이 나라는 최소한 돈 때문에 치사해지지 않게끔 인간의 자존감을 지켜 줍니다." 물론 돈을 여러 군데 빌려 쓰고 안 갚고 도망 다니면 그것도 치사하게 만들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미래를 위해 별로 악착같이 그렇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을 거의 살인적으로 일하지 않습니까? 사실 일 시키는 사람들이야 옛날에는 별 보고 들어와서 별 보고 나갈 때 까지 일했다고 하는데 진짜 그랬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보면. 16시간씩 일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8시간 근무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보면 그것도 살인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일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설교를 할 때에도 항상 조심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흩어서 구제 하는 것이 좋다고 해 놓고 돈을 구제도 하고 자기도 쓰고 흩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달에 꾸러 다닙니다. 실제로 제가 아는 자매 한분이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자기 주머니는 정거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들어오면 모두 흩어서 진짜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청년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면 늘 교역자가 내는데 몇 번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면서 그렇게 하면 상관이 없는데 별로 못 벌면서 그렇게 하니까 늘 꾸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베풀 때 쌓았던 덕이 돈 꾸러 갈 때 심지어는 자기가 구제하여 준 사람에게 꾸러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해 전인데 저희 집 사람이 여보 이번 교역자 수련회를 가면 사모들을 모아 놓고 같이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데 뭘 하면 좋겠어요? 해서 제가 경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웬 경제입니까? 해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외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목회자의 아내 된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해 보니까 아니나 다릅니까? 실태를 조사하고 그 다음에 보니 어느 교역자의 아내는 일단 사례금이 들어오면 절반을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배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례금이 들어오면 칠팔백만 원이 되서 반을 헌금하고도 나머지 가지고 충분히 살 수 있으면 괜찮은데 적은 봉급을 자르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 텔레비젼도 못 보게 하고 찌그러드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바른 재정을 해 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도 이런 상황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흩어서 구제하는 그것이 너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데 대하여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구제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하게 해 주시고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더 적극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 질 것이요 또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 나온 것이 경고를 겸한 것이라면 뒤에 나온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윤택하게 하라 그러면 네가 윤택해 질 것이다 그렇게 구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구제는 우리가 나보다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 구제인데 그런데 이 구제는 영적인 구제와 육체적인 구제로 나뉘어집니다. 영적인 구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를 용서하고 그 다음에 그가 모르는 일을 가르쳐 주고 그가 신앙 안에서 잘 설 수 있도록 내가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도 구제 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는 그것은 돈을 건네주는 것 못지않게 아주 갚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영혼과 육체로 만드셔서 영혼은 하늘의 자원을 공급 받으며 살게 하시고 육은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공급 받게 하셨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배고픈 것이 잊혀질 수 있지만 은혜 많이 받아도 계속 안 먹으면 쓰러집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영적인 양식은 하나님의 진리, 은혜, 사랑, 돌봄, 정신적인 자유 이러한 따뜻한 것들이 영적인 자원이 된다면 영혼을 위한 양식이라면 육체는 당연히 먹고 마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 그래서 어느 분이 자기는 먹고 마시는 것 그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라고 극단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수도사였지만 당시의 그런 생각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은 단지 빵과 포도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인간다운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필요를 포함합니다. 그는 아주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사람이 대학과정을 다닐 때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는데 대학원 과정에서는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고 지난번에 갔을 때 그 분이 수도사로 맨 처음 들었 갔던 수도원을 갔는데 그것이 언제적 이야기 입니까? 500년전 이야기인데 500년전 루터가 학생이었을 때 그 수도원에서 자던 방 시설까지 있고 그 다음에 책을 가져다 책 가장자리에 글씨를 깨알 같이 나란히 써 놓았는데 그 책이 바로 피터 롬바르두스 라는 사람의 명제집이라는 아주 유명한 조직신학 책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그래서 어려서 부터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독서량과 공부의 양이 마르틴 루터가 굉장합니다. 그래서 온 몸이 사진에 보면 루터가 정육점집 주인처럼 나오는데 그것은 연세가 많아서. 63세인가 67세에 돌아 가셨는데 거의 말년의 모습입니다.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백 꼬챙이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공부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떡과 물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교육 받을 수 있는 그런 환경도 필요 하다 그리고 문화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그것도 필요 합니다. 그래서 맥주를 아주 좋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얼마나 남에게 퍼 주는 것을 좋아 했는지 다 그렇습니다. 칼빈, 루터, 쯔빙글리 그렇게 그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자기의 지체들을 그렇게 피 붙이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집에서 식구가 적을 때 20명이 식사를 했고 많을 때는 매일 100명이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모가 요즘 그렇게 하면 도망갈 것입니다. 매 끼니 많을 때는 80명에서 100명까지 가고 20명이 제일 작을 때 였고 40-50명은 항상 집에서 밥을 했다고 합니다. 요즘 아마 그렇게 밥을 하라고 하면 사모가 데모할 것입니다. 그랬는데 폰 보라라고 하는 그 여자는 훌륭하게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부지런하고 그랬는지 남편이 아내 이름을 비텐베르그의 새벽별이라고 지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여러분처럼. 그런데 하다 하다 돈을 못 대겠으니까 이 분이 프레드릭 3세라는 군주에게 독일이 통일된 나라를 못 이루고 공국이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서 맥주공장 설립 허가를 받아 설립해서 맥주를 만들어 팔아서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사서 그것을 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을 부부가 좋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문화를 누리던 것까지 모두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이다. 그러나 귀금속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 당시 사제들의 아내들이 너무 부패한 사치스런 생활을 하니까 귀족들도 그렇고 줄을 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치품은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다. 그러면서 일용할 양식을 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보면 사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미래를 위해서 우리 자신을 적절히 준비 하는 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제일 아름다운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나 가정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에 목사님이 은퇴하고 떠날 때 교인들은 많이 섬기겠다고 하고 떠나가는 목사님은 나는 이것이면 족하다고 해야 그것이 아름다운 이별 이듯이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아이들은 아버지 우리 집에 오세요 저희가 모실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어른들은 괜찮다 나는 노년에 너희들에게 신세지기 싫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며 살다 죽어야지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지 나좀 모셔 다오 하니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이름 외우기도 어려운 집으로 이사를 가 버리면. 아십니까? 힐더 샤인, 펜테리움 그렇게 복잡하게 라틴어 샹떼빌 그것은 불어, 영어, 독일어로 써서 시골에 있는 시어머님 못 찾아 오게 하려고 그렇게 이름을 짖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숨어 버리고 부모는 아이를 찾아가려고 하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는 아닌데 유산 물려 주지 마십시오. 워렌버핏이라는 투자의 귀재가 40조 가까운 돈을, 인류 역사상 최고 입니다. 그것을 기부금으로 내 놓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이 빌게이츠 부부입니다. 아들이 돈을 꿔 달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아버지가 돈은 아버지에게 꾸는 것이 아니라 은행가서 빌리는 것이다. 줄을 딱 긋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 합니다. 그래서 요즘 없어 졌는데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이 벌어 졌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 그 아이들이 그 재산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육 잘 시키고 독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그 다음에 죽을 때까지 물려주지 마십시오. 물론 그렇게 사는데 아이가 엄청난 사고를 당했다든지 도저히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럴 경우에는 괜찮죠 부모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나머지 경우에는 도와주지 마십시오. 그냥 가지고 살다가 교회에 내 놓던지 아니면 선한 구호자에게 내 놓던지 아니면 교회에 내 놓던지. 지나가는 이야기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깨끗하게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들이 미래를 위해 적절하게 자기의 품위를 지키고 자기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적절하게 자기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하는 것은 탐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가 뭐라고 합니까?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거라. 개미는 여름 내내 일을 해서 먹을 것을 쌓아 놓고 누구 신세지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탐욕이 아닙니다. 문제는 항상 모든 정도가 적절하면 올바른 것들도 거기에 인간의 탐욕이 개입하게 되면 항상 악으로 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아끼고 미래를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번영하고 더 많은 삶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과도하게 재물을 축척하기 위해서 부모도 안중에 없고 어려움에 처한 동기간도 안중에 없고 지체들이 어려움에 처해도 안중에 없고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주위에 궁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달란트 입니다. 그 달란트가 기회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는 상황 그 자체가 우리의 달란트 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물으십니다. 내가 그런 달란트를 너희에게 주었다.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 있어도 내가 손가락을 빨 정도면 도울 수가 없습니다. 물론 기도하고 다른 일로 돌볼 수는 있지만 물질을 흘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침 그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달란트 입니다. 그러면 도와야 합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돈 빌리는 것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후에 다시는 그런 이야기가 안 들어옵니다. 깨끗이 정리 해 주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것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빌려 간 사람들은 빨리 갚으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서 갚아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유리 창업자인데 전쟁이 나서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돈을 싸들고 은행으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은행 사람들이 문을 닫고 은행도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돈을 가져 온 것입니다. 대출 받은 것 갚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지금 전쟁이 났는데. 우리도 지금 피난 가는데. 그러니까 내가 왔지 않느냐? 당신들이 폭격을 받고 은행이 없어지면 나는 분명 내 돈이 아니라 당신에게 빌렸는데 갚을 데가 없다는 것처럼 황당한 것이 어디 있느냐? 빨리 받아 가라. 이분이 한국유리 창업주 입니다. 기업을 해도 그런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의 물질을 하찮게 생각하고 형편이 되어도 갚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부패한 욕망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남의 돈에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거래를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해야 할 일을 그렇게 상업적인 거래 심지어는 교회에서 이자까지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제가 전에 이야기 했죠? 제가 있던 교회에서 2부로 빌려다가 5부로 주고 중간에 자기가 떼어 먹고 그 정도 입니까? 어느 교회에서 10억짜리 대 수선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리노베이션을. 거기에도 건축위원회나 뭐 있을 것 아닙니까? 올라가면 전부 부결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 목사가 하다 하다 울 정도가 되었는데 꼭 한사람이 그렇게 집요하게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화가 나서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랬다고 합니다. 그럼 당신이 한번 해 보라고 나도 이제 지쳐서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맡은 다음에는 금방 통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 교회 다른 장로님이 먼 도시로 갔는데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그 음식점 주인이 그러더랍니다. 장로님 교회에 공사 크게 하셨다면서요? 그렇죠 우리가 10억을 주고 깨끗이 성전을 수리 했습니다. 그것 저의 아는 사람이 했습니다. 거기 까지는 좋은데 커미션을 오천만원을 주고 공사를 수주했다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그 반대하던 사람이 받은 것이 아니라 받아먹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탐욕들이 있습니다. 그 오천만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소개 해 주면 일본말로 와리가 5%입니다. 그것을 먹으려고 위원으로 들어가 앉아서 죽어라고 집사들이 결재를 올리면 그것을 짓밟으면서 그렇게 담임목사를 괴롭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반드시 지옥 갈 테니 두고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십일조를 냈을 것 아닙니까? 피 묻은 십일조입니다. 냈을 리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삼일동안 내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얼마나 괴로우면 저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까요? 정말 나쁜 것입니다. 세상의 회사 같으면 업무상 배임입니다. 그래서 유치장 가야 합니다. 유치장은 고사하고 감옥소에 가야 합니다. 탐욕이 개입되면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물질을 올바르게 관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 때 우리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우선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차게 되면, 욕망으로 차게 되면, 자기 사랑의 마음으로 차게 되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이 배부르면 종이 배 고픈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에게 엄마 올 때 뭐 좀 먹고 싶어 하는데 돈을 아끼려고 엄마가 안사다 줍니다. 그런데 엄마가 점심을 먹을까, 시장 다녀와서 먹을까, 배가 고픈데. 시장을 갑니다. 그 날은 장을 많이 봐 옵니다. 자기가 배가 고프니까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이 욕망으로 차 있고 자기 사랑으로 차 있으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때를 만나 계획을 세워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풍부하심을 흘려보내는 도구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부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없는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하기를 돈이 많으면 거기에서 조금 떼어 주는 것이 대단하리라 하는데 대게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부자는 절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인생길을 걸어가고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 생활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도대체 누가 보증을 하는 것입니까? 흩어 구제하면 부하게 되고 남을 윤택하게 하면 네가 윤택하여 진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동네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해 줄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지체들의 어려움을 살피면서 남을 돕는 그 금액과 크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백만 원이 푼돈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천원이 큰 돈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가 있는 처지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는 그것이 몸에 배어서 그러면서도 아까 이야기 했듯이 자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지혜 속에서 그렇게 슬기롭게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서 그들을 윤택하게 하고 구겨진 그들의 삶을 펴 주는 그런 역할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섬김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가족이 깊이 고통을 받는데 누가 여러분의 가족을 도왔다고 하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도 부유한 사람들만 당신의 자녀가 아니라 고통 받고 아픈 사람들도 주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그것이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여호와께 꾸어 주는 것이라 오죽 했으면 그렇게 까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변명이 뭐냐면 그것은 있는 사람들 이야기지 저는 돈이 없어요. 그러면 한 달에 천만 원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이 백만 원을 구제 한다면 십만 원을 쓰는 사람은 만원을 구제할 수 있고 만원을 쓰는 사람은 천원을 구제할 수 있고 돈이 한 푼도 없어 쌀을 먹는 사람은 한줌의 쌀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없어 졌는데 저희 어렸을 때 교회 다닐 때는 금식 전에 십일조를 내는데 무직인 사람은 십일조 할 돈이 없으니 자기 먹은 쌀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냈습니다. 그때는 성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없는데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성미통에 넣으면 그것을 목회자에게 드렸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집 밥은 아주 이상합니다. 바짝 마른 쌀, 덜 마른 쌀, 햅쌀, 안락미 온갖 것이 섞여서 밥맛이 아주 총천연색이 됩니다. 아직도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십일조를 냅니다. 왜냐하면 소득은 없어도 나는 밥을 먹었다 해서 먹는 것의 십분의 일을 남겼다가 교회에 내고 또 금식을 한 사람이 직장을 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 금식을 한 끼니를 돈으로 내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내가 금식하지 않았더라면 먹었을 쌀을 몇 끼마다 챙겨 자루에 담아서 저도 한번 교회에 낸 적이 있습니다. 직장이 없었을 때. 그렇게 해서 금식한 쌀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웃을 일이지만 그러나 그때를 보면 성도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순수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 할 때 내 실력으로는 십억 짜리 사업을 하다가 십오억을 부도내고 도망 다니는 사람을 도와 줄 수 없겠지만 오억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내가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당장 끼니가 없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즘 누가 끼니가 없겠냐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도 개학하면 매일 150명이 밥을 안 먹고 물을 마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실화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마음을 가지고 보면 그런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을 돕고 섬기는 그 마음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올 한해 무조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복을 주십시오. 하지 말고 한번 그런 복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마음가짐이나 생활의 자세를 고치면서 살아 보십시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 때 그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 하시겠습니까? 매주 재정 결재를 하는데 수시로 봉투가 들어옵니다. 저희들이 직접 주면 자존감이 많이 상할 것 아닙니까? 교회에 이름을 써서 내십시오. 그러면 교회에서 그대로 전달합니다. 저도 한번 받아 보았습니다. 지목 헌금으로. 선교사님들에게도 보내 줍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자녀들 다 키워 놓고 아이들이 시집 장가를 가는데 결혼하기 전까지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시집 장가를 가면 이들이 형제의 의가 갈라집니다. 왜냐하면 자매들이 들어오니까. 그러면 딸이야 시집간다고 하지만 아들들이 예를 들면 형제가 있다고 하면 둘이 이렇게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때 부모의 마음에 큰 기쁨은 그 아이들이 넷이고 여섯이고 짝을 맞추어서 사이좋게 서로 사랑하며 우애 있게 사는 것이 부모가 받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명절 때 나타나지도 않고 하는 자식들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서로 돕고 사랑하고 하는 그 속에서 부모가 기쁨을 누리듯이 하나님의 기쁨의 모상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사람들이 그렇게 허물을 용서하고 영적으로 필요 할 때 영적인 자선을 베풀고 육적으로 부족할 때 육적인 자비를 베풀면서 그렇게 살아 갈 때 그것이 자기의 능력에 맞게 베풀어 질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금년 한해 그렇게 살면서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흩어 구제하며 여러분들이 남을 윤택하게 하여 자신들도 윤택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2.경건의 표, 구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야고보서의 서신서는 어떤 환경에서 쓰여졌는가 하면 벌써 초대교회에 안 좋은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부자들이 들어오면 교회에서 대접을 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면 배려를 하지 않는 등 교회 안에 물질주의가 침투하는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의무를 회피하는 구실로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역사라는 것은 결국 새로운 것이 없이 늘 주인들이 하는 모습이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사람들이 잘못 해석을 해서 믿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하나님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없으니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든지 그것이 무슨 문제랴 어차피 일수불퇴인데 이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사실은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의 실천과 믿음의 관계는 아주 명료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지난주에 설교한 바와 같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고 그 나무에 합당한 열매가 맺히는 것이지 나무와는 다른 열매가 외식이 아닌 한 맺힐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야고보 선생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하고 토를 많이 달았습니다. 뒤집어 이야기 하면 불결하고 더러운 경건도 있다는 뜻인가 야고보 선생의 견해에 의하면 그런 경건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느껴서 하나님을 숭경하며 살게 하는 것이 그것이 결국은 경건인데 어떻게 그런 경건에 불결하고 더러운 경건이 있을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참된 경건이 아닌 거짓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열매처럼 맺혀져 있는 그런 살아 있는 경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모양을 내기 위한 외형적 경건 외식하는 경견의 모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결하지 못하고 더러움이 있는 껍질뿐인 경건은 참된 의미에서 기독교 적인 경건이 아니고 그것은 모양을 그렇게 갖추었을 뿐이지 사실은 경건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경건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3중의 수식어구를 다는데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니고 사람 앞에서 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의 평판이 어떨까 그리고 이렇게 내가 경건의 모양을 행할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정해 줄까 하는 사람 앞에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정결하다 더러움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경건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에 관련된 묘사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기적인 욕심이나 자기를 위하는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실천 그 실천과 어울리는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러한 경건은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경건의 시작은 내면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영혼의 참된 변화를 받고 우리의 마음이 진리로 쇄신되면 우리의 본성 자체가 변화되면서 변화된 본성에 어울리는 변화된 삶이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변화된 본성 변화된 삶이 흘러나올 때 이것은 내적인 경건과 외적인 경건한 삶의 행위는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경건의 행실이 참으로 뒤따를 때에 그때 그 사람의 내면에 하나님을 향해 변화된 것이 특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경건의 비밀은 경건은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아는 비밀이고 그 안에는 많은 영적인 경험이 있고 또 사랑 그 자체가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느끼는 모든 것이 참되게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으로 내면으로 표출될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변화 마음의 참된 경건의 함양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지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런 판단을 우리가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과의 내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지극히 신앙의 모든 본질을 내면화 하는 사람들과 또 한편으로는 내면화 되는 것은 없이 오직 바깥으로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고 사람들에게 외식을 하면서 나는 그럴듯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과시하는 외형적인 사람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참된 영혼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 이르고 마음과 본성의 참된 변화는 변화된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진정한 경건을 한번 열매 쪽에서 보거라. 그러면 참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학문이나 아니면 내적인 놀라운 신비나 이런 것들 많이 경건이 아니라 그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나오는데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는 것 뒤에 있는 것이 순결이라면 앞에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참답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성품에 의해 영향을 받은 거룩한 성도는 마음속에서 두 가지 특징을 지니는데 영혼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순결히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한분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하나는 이웃에 대하여 적용이 되고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하여 적용될 때 나타나는 상이점입니다. 하나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사랑으로 나타나고 자신의 삶과 관련이 될 때는 순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의 핵심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 선생은 경건의 경험을 지극해 내면화 하는 사람도 비판하고 외형화 하는 외식주의자들도 비판하고 참된 경건은 그리스도를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자신은 순결을 지키고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을 베푼 그런 생활이 경건의 핵심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 문제가 정말 큰 문제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그런 충분한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들 특히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면서 핍박을 받는 과부들과 그리고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고아들은 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고아원 운동으로 잘 알려진 조지뮬러 목사님이 영국에서 이 일을 합니다. 그 당시에 브리스톨리라고 하는 것이 큰 곳이 아니었는데도 조지뮬러 고아원의 원생이 이천 명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시 인구가 얼마나 된다고 이천 명이나 고아를 모았겠는냐 했더니 다시 한 번 조사를 해 보았더니 그 도시에서는 이천 명의 고아가 있을 수 없는데 그 고아원을 잘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륙의 고아들을 영국으로 보내서 말하자면 글로벌 고아원이 된 것입니다. 그랬는데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켰는지 이 아이들을 정말 잘 길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영국이 굉장히 가난해서 아이들 외출복이 두벌밖에 없었는데 조지뮬러 고아원 아이들은 옷이 다섯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디에 가서도 구겨지지 않게 옷차림을 하고 공부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시켜서 이 아이들이 졸업할 때에는 그 졸업한 아이들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워낙 신앙이 좋고 성실하다는 것이 정평이 나서 회사에서 쓸 사람이 필요하면 쓸 사장이 와서 뮬러에게 면접을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과연 데려갈 만한 사장인가? 그렇게 하고 합격을 하면 몇 명씩 뽑아 가게끔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놀랍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곳의 고아원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신실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그 영향력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부의 사람들이 고생을 했지만 그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그 영국사회에서 고아 출신 사람들이 그렇게 훌륭하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사회의 지도자가 되도록 그렇게 길러 냈던 것입니다. 조지 뮬러의 이러한 고아원 사업도 사실은 어디에서 배운 것인가 하면 플랑케라는 사람의 독일 경건주의에서 배운 것입니다. 독일의 그런 경건주의 속에서 철저하게 고아들을 돌보는 이런 사업을 했던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그때 보다 훨씬더 못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당장 길거리에 나가면 고아들 천지였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과부들이 많았습니다. 과부들을 중요한 구제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이때는 핍박이 아직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남편은 말하자면 기둥과 같은 존재 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사라지고 나면 재산도 빼앗기고 몸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고 해도 법이 그 여자들을 보호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구조사에 여자들은 숫자에도 안 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남편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처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똑같은 일들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면 종교개혁시대에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보면 종교개혁자들이 카톨릭에서 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종교개혁자들은 다들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들이 옛날에는 수도사들이고 해서 독신을 하려던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데 제대로 된 결혼을 하는 사람이 없고 애 딸린 과부, 도망 나온 수녀 이런 사람들하고 결혼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결혼을 해 주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호를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칼빈도 이벨레떼라고 하는 8살이나 많은 과부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루터도 도망 나온 수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망 나온 수녀들은 성난 폭도들이 폭행하고 겁탈하고 수도원에 난입해서 수도사들을 죽이고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다니니까 그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품이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과부들의 신변이 위협을 받는 때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이름이 이렇게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환란 중에 돌아본다. 그 환란이 무엇인가 하면 고아와 과부가 환란을 당할 때가 있는데 그때 돌아본다는 그 뜻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고아가된 것, 과부가 된 것 자체가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환란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그 돌아본다는 의미는 결국은 히브리서에 자주 나오는데 사랑을 가지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그런 종류의 돌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세끼를 돌본다고 할 때 가서 보고 온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이 있는 지 없는지 불편 하지 않은지 그렇게 필요를 채워 주면서 돌아보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돌아 봄 이듯이 마찬가지로 참다운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그 돌아보는 그것이 바로 참다운 경건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고 그리고 이제 어떻게 보면 이 당시처럼 이렇게 핍박을 받고 비참한 고아나 과부는 아주 적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교회가 사람들을 돌보고 구제해야 한다고 하는 이 정신은 추호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경건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제 야고보 선생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졌던 그런 오류 속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경건을 아주 내면화 해서 그래서 혼자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체험하고 묵상하면서 체험하고 하는 이것, 자기 마음 안에 일어나는 신비한 경험 이것을 경건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가 하나님을 느낄 수 만 있으면 그것이 은혜생활이고 경건이고 삶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그렇게 은혜를 받은 가운데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내면주의자들의 경건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외모만을 취합니다. 교회의 장로이니까 이렇게 행동하고 교회의 집사이니까 권사이니까 그렇게 해서 겉모양은 갖추어져 있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에 있어서는 신경을 쓰는데 그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내면과 일치한 경건이 아니라 그야말로 기도도 별로 없고 말씀의 은혜도 별로 없이 그저 잘 믿는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하는 껍질 뿐이고 이름뿐인 신앙, 이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렇게 못 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하찮게 여기고 하는 이런 풍조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모두 다 옛날에 야고보 선생을 비롯해서 사도들에게 책망을 받던 잘못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건의 또 다른 종류라기보다는 아예 그것은 참답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본질적인 경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 주님을 날마다 새롭게 만나고 은혜를 받아서 주님의 생명으로 넘치는 가운데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서 흘려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돈 많은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지체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제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이티에서 저렇게 전대미문의 사고가 일어나서 어려워하고 하는데 주일날 대표기도할 때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면 좋을 텐데 집에서는 물론 하시겠지만 공적으로 모여 기도할 때도 그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충분히 아파하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충심으로 기도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안에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겠습니까? 교회당도 무너지고 했다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충심으로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고 물질로 도울 수 있는 그런 생활을 우리들이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는 당시와 같은 그런 핍박과 환란이 현저히 줄었다고 하더라도 눈을 들어 우리 밖의 세상을 보아도 이 세계에는 여전히 수많은 굶주린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 내가 읽었는데 항상 마음 한구석에 맺히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프리카 인데 한 번도 안 가보았습니다. 갈 기회가 몇번 있었는데 엄두를 못냈습니다. 최소한 2주는 잡아야 한다고 해서 못 갔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생활합니다. 아이티 이야기도 여러분 들었겠지만 어떻게 진흙을 말려서 그것을. 그것이 펄벅 여사의 대지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지금 21세기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한 일들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갔는데 배가 고파 사람들이 난리를 치는데 너무 눈물이 나오고 불쌍해서 빵을 한 트럭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는데 12만원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한 가족 한 끼 외식비 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조금만 절제하고 하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 했으니까 나머지는 교회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신학생들을 위해 헌금할 때는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할 때는 가난한 사람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것들을 한번 언젠가 위대한 일에 쏟아 부을 허황된 꿈만 꾸지 말고 매일 매일 삶속에서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리고 또 베풀고 그래서 많은 재물이 아니더라도 주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누리고 살면서 살아가는 삶의 궤적 그 자체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줘주는 것이 우리 몸에 배인 그런 삶을 살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간직하면 사는 비결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흘러가고 사람들에게 빼앗긴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들을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 한 바와 같이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베풀고 나누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흩어도 더욱 부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물질을 선용해야 합니다. 항상 이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이것을 사용하는 도구가 될 때 나의 물질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피어나게 만들어 줍니다. 불행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들이 돈을 벌게끔 내버려 두지만 말고 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겨서 더 많은 소유를 획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대로 이것이 사용되어 지도록 그렇게 펼치는 삶을 살 때 그 사람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뒤 이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경건한 부자들이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사업을 통해 경쟁에서 이겨서 자기에게 패배한 사람이 승리 하였더라면 굳게 사용할 물질을 자기가 이겨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흘려보낼 그때 하나님께서는 많은 일들에 이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위해서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경건 입니다. 사람이 항상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고통 하는 신음 소리가 들리지만 사랑을 접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마실에 가서 놀다가도 골목에서 우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며 이 아이가 어떤 필요에 놓여 있는지를 헤아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우리가 분에 넘치도록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재물들을 적절하게 누리며 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이웃들에게 흩으면서 구제하고 돌보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될 때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정당하게 더 많은 물질을 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 물질 때문에 우리의 경건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하는 사람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돈 벌어서 남을 주려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강물처럼 흘려보냄을 받게 되는 그런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해 동안 이러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2.은혜는 구제하게 한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후 8:1).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시에 있는 교회입니다. 고린도시는 항구 도시였고 당시 국제무역항 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물건들이 수입되고 수출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동네가 부자 동네였습니다. 예로부터 항구 도시에는 돈이 많이 드나듭니다. 한때는 이 고린도 교회가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리스도 교회로 세워졌습니다만 후에 신앙이 식어 지면서 고린도시에 있는 정신이 오히려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물질고 관련한 도시의 정신은 인색함과 타산주의 즉 이기심 이었습니다. 돈이 많은 도시는 인심이 사나운 법입니다. 저희 초등학교 때만해도 시골에 가면 시골 사람들이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쓸려면 몇 십 리길을 걸어서 장날에나 가야 쓸 수 있으니까 오히려 물물교환을 많이 했습니다. 돈이 많이 없는 곳은 비교적 인심이 넉넉합니다. 사람의 봉사나 어떤 물질적 고마움을 화폐단위로 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도시화되고 모든 것이 물질로 환산되는 시기가 되면 인심이 사나워지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 주고 산 교회였으니까 이타적인 사랑으로 도시 안에 있는 이런 이기심들을 극복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넌지시 이 교회를 사도가 권면하면서 이제 어떻게 주님의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가운데 마게도니아 교회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지금에야 이 나라에서 흉년이 들면 저 나라에서 곡식을 사다 먹는 글로벌 시대이니까 비참함이 덜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지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흉년이 들면 그야말로 굶주리는 것 아닙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을 이 많은 이방의 교회에 전해준 그런 어머니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으니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도 굶주리기는 매한가지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을 보다 딱하게 여긴 사도들이 이제 이방에 있는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연보한 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게 되었을 때 사도들도 사람이니까 대충 마음속으로 얼마나 모금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하나도 안 하고 했다면 생각이 없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굳이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아도 대충은 마음속에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이제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어려우니까 조금 낼 것이고 어느 교회는 조금 넉넉하니까 더 낼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어쩌면 사도들이 거의 연보할 것이라고 계산해 넣을 수 없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케도니아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삼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 이 교회는 환란을 많이 당한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가 어떤 환란을 당하였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신앙을 인한 핍박일 가능성이 가장 많지 않겠습니까? 신앙적으로 끊임없이 박해를 받는 어려움이었고 또 이 지면에 다 기록하지 못한 글을 쓰는 사도바울과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 교인들만이 아는 또 다른 종류의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어려움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많은 시련이었습니다. 한번 환란이 닥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환란, 다수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니 환란과 시련이 겹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교회가 연단을 받으며 고생을 하고 있었으니 교회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큰 일이었지 않겠습니까? 그 위에 이 교회의 가장 불리한 점이 있었으니 마게도니아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 가운데도 가난으로 널리 알려진 교회였습니다. 지금 우리로 따지면 달동네에 함석지붕으로 지은 그런 교회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오늘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극한 가난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극도의 가난과 수많은 환란, 끊임없는 시련 이런 것들을 겪은 교회가 마게도니아 교회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헌금을 하는 것이지 없으면 헌금을 못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런 극한 가난과 환란의 많은 시련을 겪은 마게도니아 교회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가 표현한 거액의 연보중 상당한 부분을 헌금했기 때문에 그 사도는 오늘 이 교회를 가리켜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교회 두 번이나 풍성한 연보 넘치는 연보 더 이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의 연보를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내 놓은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극한 가난과 환란의 많은 시련을 겪은 교회인데 어떻게 고린도 교회도 부끄러워 할 만치 풍성한 연보를 사도도 깜짝 놀랄 정도로 넘치도록 할 수 있었을까? 갑자기 부자 교인이 들어 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돈을 부어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헌금을 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환란 시련 극한 가난 세 개나 삼중으로 둘러 싸여 있었지만 하나가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자 교회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풍성한 연보를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희 넘치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지만 기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는 환란을 당한 교회이었지만 낙심한 교회가 아니라 기뻐하는 교회였습니다. 시련을 많이 만나 다중의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교회는 우울한 교회가 아니라 기쁨으로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기쁨은 세속적인 만족에서 오는 땅의 기쁨으로 가득찬 그런 즐거움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 때문에 충만하게 된 거룩한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이 마게도니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이 기쁨을 마게도니아 성도들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셨더니 환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고 많은 시련 속에서 즐거워하며 극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흉년을 만나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를 위해서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은 부자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게도니아 교회는 우리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구제할 때는 넘치도록 풍성하게 구제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신 본을 받아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하나님 앞에 바쳐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 함께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이바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려 그들의 필요를 살피고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울 길을 찾도록 그렇게 끊임없이 우리를 도전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흩어 주위의 사람들을 살피는 일에 부지런 합니다. 그리고 그 살피는 마음이 필요하면 그들의 필요한 것은 나의 희생으로 채우고자 하는 마음이 깃든 돌봄이기 때문에 사랑의 사람들은 남을 즐겁게 구제하는 법입니다. 부자가 구제하고 물질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령한 기쁨이 충만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극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구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필요를 느끼며 고통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들을 채워 줄 때 여러분들은 주님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연보할 수 있었던 것이 마게도니아 교회가 큰 기쁨을 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환란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까지 극복하고 그러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구제하게 하였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에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비밀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마게도니아 교회의 교인들을 가득 채웠더니 자신들도 극한 가난의 삶을 살면서 기근을 만나 끼니가 간데없는 더 고통받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기억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연보할 마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그런 헌신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에 참여 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마게도니아 교회에만 부어 주셨겠습니까? 우리들이 받은 은혜가 마게도니아 사람들이 받은 은혜만 못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을 통해 주신 그 신령한 기쁨과 아름다우신 구원의 은총이 마게도니아 교회에 주신 것만 못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마게도니아 교회 못지않은 은혜를 부어 주셔서 우리로 구원의 기쁨 속에 살도록 만들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복음을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기는 하지만 마게도니아 교회처럼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기는 하지만 마게도니아 교회처럼 극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는 적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기쁨은 마게도니아 교회처럼 받았고 환란의 시련과 가난에 있어서는 마게도니아 교회만 못하니 우리는 더 많이 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충심으로 자기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심으로 헌신하게 될 때 그 때 그 헌신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가난을 면하게 되고 물질의 극한 고통에서 벗어남으로 주님 앞에 펼쳐진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도 한 주간동안 주위의 식구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소문 없이 소리 없이 한 손이 하는 것을 한 손이 알지 못하도록 그렇게 구제에 힘써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은혜와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4.주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천국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두 가지 주제를 계속 말씀하시다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는 31절에 나오는 황금률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계명은 황금률이라고 불리워집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황금처럼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 있는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가치가 없는 계명이 없겠지만 특별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 하라 이것은 다른 사람이 너희를 어떻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니 네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거라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만약에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여긴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천국백성으로서 독특한 삶일 수 있냐? 그것은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 죄인들도 자기에게 잘 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하고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미워하기 마련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의 천국시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 다르기 위해서는 너희가 오히려 원수들에게 선대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 때에 돌아 올 것을 생각하지 말고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모르는 악한 자들에게 조차도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시냐 그러면서 베푸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다가 오늘 주라 그리하면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는 이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은 31절부터 나오는 그리고 27절부터 계속되는 황금률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 결론 부분에서 두 가지를 38절에서 다룹니다. 전반부에서는 물질로 사람들에게 베풀어 구제하는 일과 후반부에서는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을 다룹니다. 그래서 전반부가 나눔이라면 후반부는 용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후반부부터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으리라 이것은 마치 비판받지 아니 하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을 헤아린다 이 헤아린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찾기 위해서 사람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그것을 들이 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네가 사람들에게 네가 판단을 해서 그 사람들을 정죄하고 그 사람들에게 행한 것에 대해서 네가 비판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을 네가 엄격하게 긍휼이 없이 재판하고 비판하려고 했다면 하나님도 너를 그렇게 다루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다룰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네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너그러워 진다면 하나님도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사람들도 너를 너그럽게 대하리라 그 말씀입니다. 우리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덕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덕이 있는 사람들은 늘 언제 어디를 가든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잘 베풀어 주는 사람이 늘 많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자기가 타고 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운명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절대 그렇지 않고 대게 인덕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하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아도 성격이 칼 같아서 사람들을 치는 사람들은 아부하는 사람들은 많이 모일지 모르지만 진심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기억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부터 믿고 지금까지 은혜생활 해 온 날까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한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 중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많은 것은 다 무엇을 나를 선하게 해주셨든지 간에 그 많은 것들은 우리가 거의 잊어버렸어도 은혜를 받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주님의 사랑에 빚지고 살지만 그것을 매번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해 주신 이 용서는 우리가 은혜를 받기만 하면 계속 살아납니다. 은혜 받을 때에 하나님이 아파트 사게 해 주신 것 우리 아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해 주신 것 예쁜 아가씨에게 장가가게 해주신 것 이런 것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으면 늘 무슨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감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런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찬송)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니까 우리가 게으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 순간에도 이 지구상에는 우리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지금 이 순간도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죄인이었는데 주님이 어떻게 큰 사랑으로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면서 살면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주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주님이 용서의 덕을 우리에게 많이 베풀어 주시니까 배은망덕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또 그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인데 이 용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말하자면 영적인 나눔 혹은 영적인 자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대해서 잘못한 사람들을 그 하늘나라의 백성들 안에서 끊임없이 용서해 주는 그런데 예수의 용서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은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사랑으로 용서 해 주셔서 당신에게 접붙이셨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용서함으로서 우리에게 붙어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우리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지체에 대해서 감격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게 만들고 그 사랑 안에서 형제의 사랑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지체들을 용서하는 것과 주님이 직접 용서하시는 것 사이의 차이입니다. 결국은 그 모든 용서의 사랑은 물질적으로 베푸는 구제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좌우 하는 것이 마음속에 있는 까리다스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에게 베풀어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 주고 육적으로 그 사람에게 물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주라고 할 때 누구에게 주라는 것입니까? 27절부터 읽어 보면 주는 사람이 주라고 할 때 주는 것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악인이든지 선인이든지 구별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필요한 사람,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주라 하면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요 했습니다. 터키에 갔었는데 선교사님들 집회가 있었는데 월요일 시간이었는데 기억이 납니다. 선교사님들이 굉장히 검속이 강해서 사실은 선교활동을 거의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은 많이 달라졌는데 10여년 전까지도 선교사의 숫자가 터키 전체의 그리스도 숫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선교사의 숫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았습니다. 굉장히 엄격하게 통제를 합니다. 그런데 모여서 이제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에 가서 제가 7-8시간을 제가 최선을 다해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터키에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기억하시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물건을 많이 보냈습니다. 터키는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그 나라가 6.25 전쟁 때 참전국입니다. 그리고 지난 월드컵 때 우리가 지는 바람에 우리와 더 친밀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쪽 사람들이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그들이 지진을 당했다고 했을 때 굉장히 많은 구호품들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정말 고마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뚜껑을 여는 순간 배신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뚜껑을 여니 온갖 구호품들이 많은데 그 속에 계속 성경책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우리가 재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신앙을 팔아서 구호품을 챙길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던 것들이 오히려 한국 사람들에게 강한 반감이 되어 되돌아 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그런 기회라도 통해서 성경을 보내서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믿을 사람을 믿게 하려고 했던 순수한 신앙을 생각했다면 비난 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말 지혜로운 행동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텔레비전에까지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선교적으로 지혜로운 행동이었을까? 왜냐하면 선교하고 하는 것은 지역교회 전도와 비슷해서 한 번에 가서 되면 되고 말면 마는 끝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왕래 하면서 우리들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부흥사가 와서 부흥회 하고 가는 것하고 선교하는 것 하고는 틀린데 그래서 그쪽 선교사들은 그 사건을 굉장히 난감해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를 그 은혜가 무슨 은혜입니까? 우리가 베풀어 준 은혜뿐 아니라 우리가 베풀어 준 은혜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어도 그 은혜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지 않냐 너희도 그렇게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라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불신자들을 구제하거나 할 때 이 구제가 전도에 미끼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옳은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불신자들이나 혹은 이교도들조차도 주리면 입히고 먹이고 할 때 그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야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많은 악인과 당신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햇빛을 주시고 비가 내리고 절기를 주셔서 그들로 수확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면서 살게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처럼 심지어는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그 곡식을 가지고 바알을 따르던 무리들처럼 그것으로 오히려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바 알게 감사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은 먹이고 입히시는 것처럼 그런 아버지의 창조주로서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돌보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불신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이 육체로만 구제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진정한 구원에 이르도록 그렇게 돌보아 주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이다 이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불신자와 심지어 하나님의 은총을 전혀 모르고 우리가 무엇을 베풀어 주어도 하나님께든지 우리에게든지 별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에 기초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을 향해서는 이러한 계명을 실행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이 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베푸는 그 모든 삶이 자기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속에는 종으로서의 유전자가 골수 깊이 박혀 있어서 그래서 언제든지 고통 받고 궁핍하고 필요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대한 결심을 통해서가 아니라 숨 쉬고 내가 주리고 배 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흘려보내는 생활이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냥 주라 라고 명령을 하셔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주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가 틀립니다. 부동산 가격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옛날에는 부동산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농사를 짓는 터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 집은 천석을 하는 집이다 백석을 하는 집이다 최대의 큰 부자이다 하늘이 내린 부자이다 하면 만석꾼이라 해서 추수를 하면 만석의 벼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들의 부자의 크기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역사를 보면 그렇게 큰 부자들이 그렇게 대를 물려가면서 농지를 관리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돈의 힘이 아니라 사실은 인정의 힘 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무리 땅이 넓어도 그것을 성심으로 경작해 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절대로 그 엄청난 토지를 유지할 수 없지 않습니까? 물론 당시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소작할 사람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석꾼을 하면 자기가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방십리 안에 백리 안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사람들을 마치 자기의. 백리면 옛날로 따지면 40Km입니다. 반경 40Km안에 들어가는 사는 모든 사람들 결국은 누구입니까? 자기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인들 아니면 자작농들 아닙니까? 그 사람들 중에는 굶주리는 자들이 없도록 베풀고 그 아이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면 전부 뒤를 돌보아 주고 이렇게 해서 말하자면 그렇게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은 고을 사람들 전체의 대모와 같이 큰집과 같이 그렇게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인심과 후원을 얻을 때는 그 가문이 번성했지만 그렇지 않고 개념 없는 인간이 나타나서 돈 좀 있다고 땅을 가지고 소작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쥐어짜고 할 때 그때 결국 그 주민들이 등을 돌리면 그 집안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 덕을 나누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시는 이 명령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창조 계획안에 있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무리들 속에는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멸망당할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의 가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택에 대한 감사 때문에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가리켜서 이것을 박애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적인 사랑은 사랑의 대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박애적 사랑은 저 사람의 가치와는 상관이 없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박애적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박애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늘어 간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교회의 결정적인 특징은 성령의 큰 역사와 초대교회에 부어졌던 것 같은 은사가 교회의 특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시대에 이 세상의 가장 결핍한 것을 교회가 가지고 있음으로서 이 교회가 주님의 통치에 넘치는 공동체인 것을 보여 주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랑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히 있어서 그래서 그 사랑이 넘쳐 나는 그 사랑이 교회 안에 넘쳐나서 세상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 교회에서는 용납이 되고 기다려 주고 믿어 주고 이해해 주고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유나 지위와는 상관이 없이 인정받고 그렇게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용납되어지는 이 사랑의 교통 사랑의 통치를 통해서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공동체와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양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숨 쉬며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에 내가 있음으로 내 가까이에 있는 형제나 이웃들이 덕을 입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누리는 최종적인 종착역이 될 때 우리는 그것과 함께 부패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통해 흘러 갈 때 주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맡기셔서 그것을 계속 흘러가게끔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사업을 경영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의 사업장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세월이 조그만 지나 보면 알 것입니다. 월급 받고 밥이나 빌어먹기 위해서 겨우 나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그 직장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 사람은 진정으로 우리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면 그 사람을 감시하려고 하겠습니까? 마음을 열고 이해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사랑하면 사실은 법이 많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식게 되면 법이 점점 많아집니다. 몇 시에 출근해라 그 다음에 중간에 왜 나갔냐? 하면서 이만큼만 주면 되냐? 많이 주는 것 아니냐? 하면서 집요하게 서로가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이해관계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어서 당신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를 통해 끝없이 흘러가서 당신이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그들을 세워 주는데 사용이 된다면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이 맡겨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불러 주시고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주라 명령하실 때 아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겨 주시면 안겨 주신 것 가지고 또 흘려보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나라는 그렇게 흘려보내는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계속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고 예수 삶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베풀고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이 생기든 무엇이 생겼을 때 우리의 필요를 따질 때 끝이 없습니다. 지금 필요하지 않으면 미래에 필요하게 되고 모든 필요가 끝이 없습니다. 그러면 희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그래서 물질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가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서 그렇게 해서 살게 하실 때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좋은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아서 더 많이 베풀고 나누어 주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5.구제와 하나님의 계획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4).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한창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때 사도바울에게 예루살렘 지역이 큰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그래도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예루살렘 교회가 예루살렘이 궁핍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제 이방의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두어서 예루살렘 전체를 도운 것 같지는 않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니까 성도들에게 먼저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은근히 두 교회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라고 하는 교회와 그리고 고린도라고 하는 교회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고 환란과 시련이 많은 교회였고 그런 교회였는데도 많은 힘에 넘치도록 연보를 해서 사도바울이 그 연보한 것을 보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이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을 것 같지만 목사들은 헌금 주머니를 붙들고 눈물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다니던 어느 교회 목사님도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했는데 그것을 붙들고 그렇게 우셨다고 합니다. 돈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환란을 많이 당하고 시련이 그칠 새가 없었던 그리고 가난한 교회인데 넘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헌신을 하였으니까 그들 안에 있는 그 믿음을 보고 바울이 그렇게 기뻤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자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지역 자체가 국제 무역항이 있는 항구도시여서 로마시대 뿐 아니라 그리스시대때부터 아주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도시니까 돈이 많았습니다. 한국으로 보면 여수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돈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인색한 것입니다. 결국 복음적인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혼을 낸 후에 이제 고린도 교회를 차근차근 타이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예수님을 보아라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진 풍족한 분이신데도 우리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느냐? 그렇게 자기를 다 버려서 가난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결국은 그 분의 낮아지심과 희생을 통해 우리들이 부요한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물질에 대한 견해입니다. 그렇다 해서 어느 곳에서도 성경은 부자를 높이 칭송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부자로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그를 복 주신 증거라고 하는 것도 성경은 글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물질은 불고 같습니다. 불 자체는 선하다 악하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데 쓰거나 산을 불태우는데 쓰면 그것은 나쁜 것이 되고 고기를 요리 하거나 추위에 떠는 사람의 몸을 데우기 위해서 쓰여지면 훌륭한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물질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전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사도시대에도 복음이 전해질 때는 모두 가난한 때였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아리마데 요셉 같은 부자도 나오고 또 사도행전으로 넘어 가면 굉장히 귀족집안의 사람들도 나오고 왕족들도 나오고 돈 많은 사람들도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했을 때 물질의 가난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도 보면 왕족이고 귀족이고 해도 거침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여러분들이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뭐냐면 평신도들의 역할입니다. 귀족인 평신도들의 역할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 귀족, 영주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 헌신하게 될 때 목사 수십 명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영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고 그 사람이 아주 아름다운 신앙의 모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강한 힘 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한 그 자체를 굉장히 높이 보거나 아니면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기에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해 지셨다 라고 하는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먹을 것을 안 먹고 입을 것을 안 먹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주셨다 그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위험 가운데 계신 분이 성육신을 안 해서 그것을 인성 밑에 감추시고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 오셔서 평범한 사람들 같이 궁핍과 어려움 속에서 사시면서 결국은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구역공과가 조금 어렵다고 하는데 책 이라는 것이 읽은 다음에 100% 이해된다는 것만 읽으면 재미없습니다. 아이들이 시험을 보는데 시험마다 100점을 맞으면 그 아이가 천재든지 선생님이 문제를 잘못 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90점쯤 나와야지 저는 대학에 있으면서 100점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100점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선생은 100점 맞을 수 있겠습니까? 99점이 최고이지. 약간 어려운 맛이 있어야지만 깨달았을 때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역자들도 제가 직접 두 시간씩 가르치고 그것을 영상으로 찍고 일주일 뒤에 올려 주기로 했습니다. 미리 알려주면 교역자들과 구역장들 체면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배울 때는 구역장 공부 끝나고 나면 올라가 있어서 구역장이고 구역원이고 거기에 들어가서 클릭하면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mp3 파일이 있으니까 그것을 듣고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을 안 듣고 하니까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셨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모범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영생이라고 하는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연합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이 두 가지 자원을 공급해 주시는데 하나는 영적인 자원과 육적인 자원을 주셔서 섭리 속에서 이 두 가지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영생이다 그러니까 물질로 공급을 받는 것 자체가 영생의 본질은 아니지만 영생의 효과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살면서 그러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받고 하는 기도와 응답의 관계 속에서 이세상의 물질과 사물들을 움직이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올바로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요하신 분이신데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셔서 결국 당신이 가난해 지셨기 때문에 너희들은 부요해 지지 않았느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스스로 동등될 것을 취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 분을 통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았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이번에 물질에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너희는 여유가 있는데 저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굶주리고 배 고플 때 너희들이 그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잘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어서 너희들의 물질을 뺏고 너희들을 불편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런 데서 뭐가 나타나는가 하면 가난을 예찬하는 것이 사도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성도로서 부자 동네에 살면서 많은 물질을 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너희들에게 뺏으려고 한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평균케 하려 함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여유가 있을 때 저희가 부족한 것을 돕는 것은 이 다음에 너희가 부족하고 저 사람들이 여유가 있을 때 다시 물질이 흘러 들어와 너희를 돕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신학교를 열심히 도울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돕는 교회도 물론 있지만 참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오늘 아침 설교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우리 자손들에게 최고의 투자는 두 가지입니다. 그 아이들이 선명한 복음에 심령이 인쳐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렇게 인쳐진 아이들이 자랐을 때에 자기를 제대로 복음 안에서 목양해줄 훌륭한 목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조건만 되면 웬만하면 극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음세대에 목회자들을 길러 내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산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이 만큼 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북처럼 여름이면 홍수 나서 집 떠내려가고 맨날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산마다 가 보십시오. 빼곡하게 들어서서 산에 가면 나무를 잘라서 가져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지게에 지고 갔을 텐데. 어떨 때 보면 잘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연료도 있고 하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앞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사람들인데 길러 내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투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신학교를 돕지 않는 교회는 전도사를 채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은 돕지 않아도 교회에서 공부 하는 사람은 싫어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만 좋아 하는 것입니다. 공부 하는 사람은 돈을 달라고 하니까. 다 끝낸 사람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지는 않고 열매만 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안 도울까? 사실 조금씩만 도우면 학교는 문제없습니다. 예산의 1%씩만 도우면 일반대학 안에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 될 것입니다. 신학교가.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안하나 하고 가만히 그 심리를 분석해 보았더니 답이 나왔습니다. 자기가 그런 도움을 받으면서 감동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노는데 그때 모이를 던져주면 물고기들이 확 모입니까? 도망갑니까? 모인다구요? 그것은 금붕어만 봐서 그렇습니다. 양식장에 금붕어들이 모이면 모이를 주지 않고 사람만 지나가도 입을 벌리고 새 빨갛게 덥벼 듭니다. 그래서 휙 뿌리면 덤벼들어서 잔치를 하면서 먹습니다. 그런데 호수나 개울에 가서 자연산 물고기들이 있는데 거기에 모이를 휙 던져 주면 다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자연산 물고기들은 모이를 공급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받은 대로 하고 본 대로 하지 내가 신학교 다니면서 어른들 하는 말로 띠알머리 사나운 교회에 붙어 있어서 자기는 밥을 굶는데도 쌀 한 포대 보태어 준 적이 없고 등록금 내는데 한 번도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한이 맺힌 것은 아니지만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 8년을 했는데 학교 등록금은 45만원인데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은 7만원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인들이 장로나 목사나 교인들이 머리가 나빠도 육칠이 사십이가 나오는데 3만원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는 8년 동안 5만원을 등록금에 보태어 쓰라고 받아 보았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지났는데도 마음이 상합니다. 다 용서해야겠지만. 어떻게 교인들이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지금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와서 봉투 주셨겠지? 없습니다. 우리 영래 태어 났을때 어느 여 집사님이 오셔서 4만원을 놓고 갔는데 너무너무 눈이 훤해서 그 후로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에 일부러 그 집을 찾아 갔습니다. 돈을 주면 받을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오렌지 정확하게 4만원어치 사 가지고 가서 주면서 내가 목사로서 간절히 축복의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어쩜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들끼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마음속으로 깊이 이를 깨문 것이 뭐나면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이런 학생들이 없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것 어떻게 그럽니까? 육칠이 사십이 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데. 한번이라도 등록금은 어떻게 했어? 물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8년 동안 있었는데 퇴직금 10원도 안 주고 내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로만 사랑이니 뭐니 그러지 말고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잘 하는 것 말고 공동체 전체에서 찌그러지는 사람이 없도록 그렇게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다닌 것입니다. 이를 악 물고. 그러고 다녔으니까 자기가 교회를 한 다음에도 여유가 있는데도 자기가 그렇게 다녔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갚고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즐겨 하는 말이 학교 다닐 때 고생 좀 해야 해. 자기가 좀 도와줘서 덜 고생해도 그 사람이 고생할 것이 많습니다. 또 다른 방면의 고생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까지 배려를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이것을 도와주고 나면 저 사람이 십자가가 없어서 신앙이 나태해 지면 어떻게 할까? 자기가 하나님 입니까? 그것입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영국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너무 힘들어서 죽겠더랍니다. 돈이 없어서. 더군다나 옛날에는 유학갈 때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어림없었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이 나갈 때 저쪽 학교에서 풀로 장학금을 준다는 보증서가 없으면 여기에서 출국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달러 가져다 쓸까봐. 그래서 한국 학생들은 다 풀 스칼라쉽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게 된 이즘에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냥 무료로 받아 주어야 합니다. 공부 할만한 학생들. 여기에서 공부하고 가면 전부 친한파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미국하면 껌뻑 죽게 된 요인도 6.25때 도와주고 원조해 주어서 그랬지만 미국 유학 갔다 온 사람들 때문에 사실은 우리나라가 미국하면 껌뻑 죽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진짜 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려워 죽겠는데 사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큰 일 났습니다. 책 살 돈도 없고 학비야 준다고 하지만 생활비도 없고 하는데 집에 와서 레포트를 쓰려고 하면 턱 하고 봉투가 떨어지더랍니다. 보면 그 때 돈으로 보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상당한 액수의 돈 입니다. 그런데 몇 번을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리에 떴을 때 슬그머니 집어넣고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이 분이 나도 이 유학을 끝내고 가기 전에 꼭 그렇게 해야지 그리고 당신도 그렇게 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풂과 누림의 관계입니다. 자기가 누군가가 그렇게 베풀어 주면 그것은 강한 전파의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도움을 받는구나!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끼워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사람은 여유가 있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으로 대답을 한번 해 보십시오. 내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일단 내가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안 살면 십자가도 고맙지 않은데 나머지가 뭐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은혜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어려운 사정을 말하는데 주위의 지체가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도와 줬는데 어렵게 어렵게 그 사람을 알아내면 그 사람에게 껌뻑 죽습니까? 그 사람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껌뻑 넘어 갑니까? 전자 입니까? 후자 입니까? 후자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 구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는 용서를 통해 사랑이 흐르고 그 다음에 육신적으로는 눈물을 통해 이 사랑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서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게 되면 좋은 것 생겼을 때 그 집에 나누어 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또 별로 사랑이 안 가던 사람도 마음을 드려서 그를 돕다 보면 그의 영혼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쪽에 사람들이 있을 때 그것을 흘려보내서 저쪽에 있는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 넘어질 때 이쪽에 있는 사람을 흘려보내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으셔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궁금증이 안 듭니까? 그것을 뭘 그렇게 어렵게 하시나? 하나님이 예를 들자면 내가 어려운데 저 사람이 도와줘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성도들 간에 사랑이 깊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인가 언제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 혼났지요? 이자 받고 돈 꿔주는 것 하지 말라고. 이자 안 받아도 그것 하지 마세요. 그래서 누구에게 돈을 꿔 줄때에는 그분에게 드려도 하등에 문제가 없을, 마음에 절대 걸리지 않을 그런 것을 해야 합니다. 이쪽에서 싼 이자를 빌려서 저쪽에 주고 그것 나중에 지옥에서 동창회 합니다.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때 이후로 모든 것이 정리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아직도 정리 안 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시고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오죽했으면 계속 그렇게 하면 치리한다고 했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결국은 다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돈 빌려 주고 원수처럼 변하는 것. 교회를 안 떠납니다. 빚을 받아야 하니까 교회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는 강남에서 강남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신 연세 드신 분들은 교회를 옮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주한 것이 많아서 교회를 싶게 못 옮긴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흘러가게 하셔서 하나님은 그 속에서 성도들이 성도들을 통해 사랑의 빚을 짊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알게 되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사랑하는 성도를 통해 내게 흘러 들어올 때에 자신도 그 사랑을 받아서 흘러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뭐냐면 큰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남을 위해서 실제로 구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없는 것을 너희에게 요구 하시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 중에 그것도 일부를 흘러가게 함으로서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돕게 하는 것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라는 일본의 빙점을 쓴 작가가 있는데 신앙서적을 많이 써서 한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십분의 일을 항상 떼어 놓습니다. 구제용으로 우리는 떼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이름을 붙였는데 만분지 일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니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만분지 일이라도 사람에게 갚는다는 의미에서 만분지 일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찌그러지고 엉킨 사람들을 풀어 주고 하는 역할들을 할 때 그때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여러분 한 3년 전인가 4년 전에 가정의 날 설교를 했는데 형제가 화목하라는 설교였습니다.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어느 남자 집사님이 올라와서 복도에서 나를 붙들고 막 우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부모가 자식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효도가 자기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우애 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년의 부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인간인 우리들도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교회를 내려다보실 때 자기만 알고 아무도 돕지 않는 그런 띠알머리 없는 사람들로 살아 갈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무엇이냐 했더니 이런 것이라고 시범을 보여 주었는데 말이 양쪽에 두 마리가 있고 목에 줄을 매었는데 양쪽 끝에 먹을 당근이 있는데 이 두놈이 서로 먹겠다고 잡아 댕겨 목이 부러지는 곳이 지옥이고 천국은 너 먼저 먹어라 하고 끌려가 주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코메디 같은 이야기지만 진리는 그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에 악악 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되새기고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우리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부자들 많습니다. 넉넉한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넉넉하게 주님께로부터 안 받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부요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덕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도 남을 위해 배우는 것이고 돈을 버는 것도 남을 주려고 버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흘러 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부요한 자를 통해 가난한 자를 가난한 자를 통해 부요한 자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심으로써 평균을 이루시며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교통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제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6.구제, 목양의 열매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9:1-4).
우리들이 자녀를 기를 때 아이가 공부를 잘 해서 많은 사람 앞에서 상을 받는다든지 할 때 부모의 마음이 굉장히 기쁘겠지요?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받는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참 훌륭하지만 내가 기른 아이가 어디에 가서 생활을 하다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야! 너는 누구집의 아이냐?" 물어 보는 의미가 "야! 너는 참 사람이 됐구나!" 이렇게 인정을 받는다면 그것은 앞에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을 사람답게 길렀다는 부모에 대한 칭찬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답게 잘 갖추어지고 인격도 있는 부모가 항상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밭에 그 콩이지 머리가 나쁜 부모에게서 머리가 좋은 자식이 나오기가 돌연변이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습니다. 그 유전자가 계속 대물림 하는 것인데. 그러니 그것이야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보면 피겨스케이팅을 한다든지 리듬체조를 한다든지 볼 때 경탄하게 되는 것이 흉내를 내 보려고 해도 위험 합니다. 어디가 하나 부러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유전자가 모두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동네 제기 차는 것처럼 누구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한정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는 것은 그것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누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투를 잘해서 세계 타이틀을 땄는데 인간성이 안 좋더라 하면 그것은 돈 놓고 돈을 먹는 그런 승부사의 세계에서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러나 참된 사람의 참됨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그렇게 인간 이하인데 그까짓 것 주먹질 잘 하면 뭐 하나 그럴 것 아닙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목양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이 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하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깨워야지, 밥 해 먹여야지, 씻겨야지, 돈 줘야지, 책 사줘야지, 학교 보내야지, 학원 데려 가야지, 말 안 들으면 때려서 야단 쳐야지, 혼내 줘야지 수 없이 하는 일이 많은데 결국 부모의 섬김과 노동을 통해서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 하는 것이 아이를 기른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디에 갔을 때 "너! 제 누구냐?" "아무개 집의 아이인데요 친구에요." "너 저 아이랑 놀지 마라. 인간이 안 되었다. 너 어울리면 물든다. 절대 놀지 마라. 경고 한다." 이러면 그 많은 수고가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목양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길러 주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라는 제도도 주시고 또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교회에서 일꾼들이 일 하는 것을 보십시오. 오늘도 제직회를 하는 데 어떤 사람은 열심히 말씀을 준비해 오고, 어떤 사람은 또 열심히 책으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또 열심히 그것을 영상으로 올리고, 어떤 사람은 또 그것을 열심히 교재를 만들고, 그림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공작물을 만들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열심히 서점을 운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열린 공간을 만들어서 열린 공간 2호점을 만드느니 3호점을 만드느니 그리고 공사를 하니 하고 또 성도들이 공부하던 책상이 망가져서 수리를 하고 이것이 종류가 많은 것 같아도 마지막에는 하나의 목적에 톱니처럼 맞물려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성도를 온전케 하고 온전히 봉사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에 행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창조목적에 따라 살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 결국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표입니다. 천사 표가 아니라 하나님 표입니다. 자기가 뭔데 천사표입니까? 그것은 공장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표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 보면서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눈으로만 보니까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 여러분들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변하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래서 가장 우렁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선포가 변화 받은 사람의 현존 입니다. 나 바뀐 것 보아라. 그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회심 안한 사람들이 나란히 있는데 그 중에 하나 폭탄이 떨어져서 놀랍게 변화 되면 주위에 있는 두 사람은 두려워하게 됩니다. 조금 변화가 일어나면 자기가 변화 되어 봤자지 개꼬리 3년 묻어서 황모가 되디? 그리고 뒤통수나 칠지 모르지만 워낙 놀랍게 변하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아니야? 왜 두려움을 느낍니까? 자기가 비뚤게 사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정말 놀랍구나!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아이들 때문에 부모가 변화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가 놀랍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 무엇인가 있구나 하는 것을 자기는 발견을 못했는데 아이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아이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두려움이 확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방을 열어 보니 아이가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데 자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로 할 때에는 웃기지 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 아이가 생생하게 하나님을 느끼면서 기도 하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는 것들이 꽂히듯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어디서 그렇게 목양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와 보이는 목양의 구조들을 가지고 우리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반듯하게 잘 하셨습니까? 하면 하나님 표이지만 하나님 표를 유통시킨 유통기관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제조원은 거기이고 그 다음에 가공해서 포장한 공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열린 교회일 수도 있고 무슨 교회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목양을 잘 받은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신실하게 구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교회가 이야기를 들으니까 놀랍게 그 편지를 받고 회개 했다는 이야기가 들린 것입니다. 너무 가슴아파 하면서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사도바울은 마음이 찡해서 내가 너무 심하게 야단 친것 아니야 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너 똑바로 해!" "내가 뭘?" 하면 저것 더 팰 것 하지만 "그렇게 해서 되겠어!" 했는데 자기 방에 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훌쩍 거리고 있으면 내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런 마음이 들어서 이제 고린도 후서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는 다 모르지만 그러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게도냐 교인들이 8장에 보면 너희가 마게도냐 교회가 주신 은혜를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극한 가난과 환란에 많은 시련들이 저희로 많은 연보를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를 처음에는 사도바울이 굉장히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맥으로 볼 때는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도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하고 회개하고 정말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정말 다시 사랑을 회복해서 헌신 한다고 하더라 그렇게 자랑을 한 모양입니다. 근거 없이 자랑하지는 않았겠죠? 그랬는데 걱정이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 연보 좀 하냐? 그 연보가 무엇인가 하면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의연금 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인들이 나와 함께 갈 텐데 갔을 때 마게도냐 교인들도 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넘치도록 연보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아름다운 사랑을 가진 교회였는데 고린도 교회가 신앙이 좋아서 더 많이 섬겼겠지 하는데. 왜냐하면 부자 동네 이니까. 하고 갔는데 예루살렘 도아 줄 연보 어떻게 되었냐고 하니까 계획은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들리면 내가 너희를 목양을 했는데 마게도냐 교인들 앞에서 내 체면이 무엇이 되겠냐? 그 이야기 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그렇다 해서 내 얼굴을 봐서 헌금해라 그 이야기는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얼굴이 무엇이 되겠느냐? 또 너희의 교회는 얼마나 부끄럽겠냐? 그러면 무슨 이야기 입니까? 겉으로 볼 때 신앙생활 잘 하고 믿음생활 잘 하는 것 같아도 돈감대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에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게 하셔야죠 아! 그러세요 제가 도아 드릴 게요 하는데 돈 이야기가 나오면 왠 돈? 이렇게 눈이 둥그레지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 선생이 말하기를 저도 그 교회에 가 보았는데 불같은 설교자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에 영국 인구가 비교가 안 될 때인데 만 명씩 모아 놓고 집회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하고 펑펑 울고 했는데 아주 싸늘하게 당신들이 아무리 울고불고 회개해도 나는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기 전 까지는 당신들의 회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뭐냐면 단순한 기분에서 나오는 것은 한번 할 수 있지만 꾸준히 물질로 누군가를 도우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 하지만 헌금 많이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액수는 절대적인 액수가 아니라 십만 원을 버는 사람들에게는 만원이 천만 원을 버는 사람에게는 백만 원보다 훨씬 큰돈입니다. 왜냐하면 십만 원을 만원 헌금하고 나면 구만원이 남지만 천만 원은 백만 원 헌금하고 나며 구백만원이 남지 않습니까? 훨씬 큰 돈 입니다. 비교할 때 없이 큰 돈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저는 그것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저는 처음 회심하고 나서 정말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내가 없는 것이. 있으면 주님을 위해서 다 냈을 텐데. 오죽했으면 제가 닭 한 마리를 봉지에 가져가서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21살 회심하고. 닭 한마리가 어디에서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회심하고 나서 한 달쯤 되었을 때인데 아무래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봉지에 넣어 가지고 가서 목사님 제가 돈이 없고 이것밖에 없는데. 닭이 목을 쭉 늘어뜨리고 털 뽑힌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교회에 가져 갈 마음이 생겼는지. 그런데 목사님이 너무 좋아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고맙다 하시더니 권사님 이것 조 아무개라고 아파서 빌빌 거리고 있는 자매가 있는데 가져다 끓여 먹으라고 주세요. 이 청년이 주님 앞에 바치는 감사헌금인데. 돌아오는데 저는 목사님이 잡수어 주셔도 감사한데 그렇게 해서 보내 주시니까 너무 감사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요즘 백만 원 헌금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항상,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더불어 인간에게 섬김을 받는 왕좌를 다투는 대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물질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단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거라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면 이를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바울이 너희는 우리에게 목양 받은 열매를 보이거라 주님의 사랑을 안 열매를 보이거라 그것이 바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것이란다 그런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들이 아이티 헌금을 했는데 얼마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 하도 헌금하는 종류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번에 천만 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하나도 안 남기고 깨끗이 아이티 보내라고 총회에 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흘러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얼굴색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흘러가야 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흘러 가야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이웃에게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기회 자체가 우리에게 부여 하시는 하나님의 달란트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덤으로 주신 것들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은 내가 최종적인 목적지가 되어서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요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이 흘러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영국 가서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목회자들이 50-60명 모이니까 목회자들이 김 목사님을 원하니까 오셔서 강의도 해주시고 설교도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아무것도 못 드립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에서 자비량 해 주어서 가서 봉사를 하고 왔는데 해마다 40여명 50여명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25명이 왔습니다. 유례없이 많이 모여서 그래서 거기에서 강의를 했는데 저녁에 저는 영국을 여러 번 갔는데 외국에서 그렇게 편안한 호텔에서 자 본적은 처음입니다. 정말 좋은 힐튼 호텔에서 재웠습니다. 여기에 있는 힐튼 호텔하고는 틀립니다. 시골스러운 힐튼 호텔인데 그래도 어쨌든 영국에 가서 잤던 곳 중에서는 제일 편했습니다. 잔디밭에 빨간 벽돌을 해서 깨끗이 꾸몄는데 거기에 백여 명의 목회자들이 잤습니다. 자고 먹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 세미나 하고. 만 파운드 정도 들어갔다고 합니다. 교회도 조그맣고 헌금도 많이 안 나오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했더니 유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이 한분 계셨는데 그곳에 있는 목회자들은 훈련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계신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큰 교회를 하다 가신 분들이 거의 없고 대게 젊었을 때 아이들 데리고 유학 떠난 분들입니다. 전도사나 많이 성숙한 분들은 부목사로 청년부 교역자쯤 하다가 유학을 가서 교회를 하게 되신 분들인데 그러니까 목회라고 하는 것도 한참 배워야지 습득이 되는 것이지 그리고 우리가 같은 일식집에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5년 근무 했어요 하는데 설겆이만 5년 하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일식집에 가서 회를 뜨는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을 뜨려면 몇 년쯤 걸립니까 했더니 설겆이부터 시작해서 3년이 걸려야 여기에 와서 생선을 다듬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생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봐라 생선을 다듬는데 3년이 걸려야지만 회를 친다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놓고 이것을 다듬는 데는 몇 년이 걸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해서 주는데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회를 해서 교인들이 모이고 열심히 목회를 해서 이러저런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경험이 쌓일 때 목회의 역량이 되는 것인데 너무 어린 나이에 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를 잘 모르십니다. 그리고 교회가 다 조그맣습니다. 50명 미만 입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다 일을 가지고 돈을 벌어야지만 가족의 생계가 되는 그런. 그러니까 미국같은 곳에서 세미나를 한다고 하면 가는 것을 엄두도 못 내고 한국 나온다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던 장로님이 우리 교회가 작지만 영국에 있는 그렇게 좋은 목사님들에게 설교를 배우고 목회를 배우고 신학을 배우고 싶어 하는 목사님들 모으니까 참 잘 모이십니다. 내용 있는 세미나를 하는데 교회가 작으니까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그렇게 모입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호텔에서 재워 준다고 하고 갈때 교통비까지 주시던데 목회자님들 기름 값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다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장로님 한분이 당신이 그렇게 헌신해 보고 싶다고 해서 시작이 된 것이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돈을 내서 호텔을 얻고 식사를 준비하고 장소를 마련하고 그분들 다 따뜻하게 환영하고 이렇게 해서 세미나를 시작한 것이 6년째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1년에 한 번씩 해 주면 너무 고맙겠다고 그런 부탁을 들었습니다. 어쨌든 한 사람의 섬김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섬김이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고자 하는 이 마음이 자기는 원래 계획에도 없던 놀라운 일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2차 대전 때 영국과 독일이 전쟁을 하는데 영국이 밀렸습니다. 독일 비행기가 매일 나타나서 폭격을 해 대는 것입니다. 그때 전쟁을 지휘한 사람이 여러분들 잘 아는 처칠 수상입니다. 커다란 담배 물고 뻐끔 거리면서 전쟁을 하던 뚝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문이 영국을 여러 번 구합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그래서 영국에서 아주 명문집안인데 전쟁이 막바지 인데 병이 걸린 것입니다. 폐렴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 페렴은 죽는 병입니다. 무섭습니다. 폐렴. 연세 드신분들 대부분 페렴으로 돌아가십니다. 무섭습니다. 덜컥 걸린 것입니다. 약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페니실린이 나왔습니다. 그 혜택을 받고 기적과 같이 살아나서 전쟁을 지휘한 것입니다.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닥터 플레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플레닌이 누군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그 플레닌이 나중에 와서 처칠에게 인사하는 것입니다. "수상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저는 선생님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마 기억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기 시켜 주었습니다. 옛날에 옛날에 어느 가난한 고학생이 처칠 경에게 편지를 보내서 내가 이렇게 어렵게 학교에 입학 했는데 등록금을 한번만 도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이 비서에게 그냥 해줘라 해서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 후에 의학을 전공하고 그래서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꺼내서 초기에 혜택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정말 물질 때문에 구겨진 사람들을 펼치도록 흘러가면 우리가 이것을 투자 했을 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놀랍게 계획을 여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장로선거하고 하면 임직을 할 텐데 임직할 때마다 우리들이 시골교회에 있는 목회자 자녀들 대학 등록금까지 중학교 고등학교 장학증서를 줍니다. 입학금까지 주는 것으로. 급식비니 뭐니 다 교회에서 주는데 대학 들어 간 다음에 아르바이트를 해도 되고 군대를 가도 되고 자기가 버틸 수 있지 않습니까? 해마다 대학 합격했다고 옵니다. 등록금이 480만원 500만원이 넘어 갑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저의 마음이 기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흘러가서 전라도에 사는 교인 20명밖에 모이지 않는 목회자의 자녀 한 아이를 이렇게 펼쳐 주는구나 그리고 그 아이가 앞으로 뭐가 될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흘러 갈수 있겠습니까?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 있어서도 이렇게 물질로 헌신하는 것은 필요 합니다. 하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 함께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흘러가서 굽어진 세상을 펴고 찌그러진 사람들을 펴서 그들로 하여금 참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 갈수 있도록 그렇게 마음을 먹고 눈을 열어 보면 영국을 가든 호주를 가든 미국을 가든 어디를 가든지 그렇게 구겨진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영국에 갔는데 목회자 부부께서 간곡히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 미국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왜 그런데요? 금융대란이 일어나고 나서 충격적인 여파가 제일 먼저 교회에 왔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전에는 50명이 모이면 교회가 현상유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전에 50명으로 유지되던 교회가 100명이 모여도 유지가 안 되어서 사모님들이 일을 구하러 나간다고 합니다. 50명 모이는 교회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했더니 이를 악물로 버티든지 아니면 파산해 버린다고 합니다. 그런 목회자들이 무지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도 불쌍해서 자기 교회가 그분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데 50명, 60명씩 모여서 돈도 없고 하니까 모여서 기도하고 점심 간단하게 먹고 부흥회 같이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흩어져서 목사님들이 청소부로 휴지 줍는다든지 하면서 일을 다닌다는 것입니다. 목회지가 없으니까. 그러면서 목사님이 열린 교회에서 오셔서 그 목사님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십시오. 용기를 줄 말씀도 있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 또 구겨진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강물을 잘 보십시오. 실개천이 모여서 개울이 되고 개울이 모여서 강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지를 가로질러 흘러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강은 그 물을 자꾸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 물을 먹으니까 강가에 있는 나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영국에 가서 보니까 저도 어디서 듣고 예화로 써 먹었는데 거기에 가 보니까 진짜 있었습니다. 강에서 50미터, 60미터, 70미터 떨어져 있는데 1700년대 초에 심은 포도나무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이 어마어마한 가뭄이 들어서 가로수들이 다 타들어 갔는데 그 나무는 절대 안 죽더랍니다. 템즈 강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이 흘러가면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물을 뺏어 먹습니다. 그래서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을 잡아 댕겨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뻘건 땅인데도 물만 흘러가면 몇년 지나고 나면 거기에 수초가 형성되고 물을 뺏어서 다른 데는 씨가 떨어지면 말라 버리는데 씨가 떨어지면 그 습기 때문에 풀이 나고 나무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을 막 뺏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물을 뺏어 가는데 그러면 한참 후에는 그 물을 강에게 돌려줍니다. 이해되십니까? 지구의 최대 저수지는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산 입니다. 흙이 땅에서 빨아들인 다음에 그 다음에 그것들이 나무들을 자라고 우거지면 숲에서 그것이 지하수가 됩니다. 그것이 다시 때가 되면 작은 개천들을 형성하면서 산으로부터 내려와서 강에 보태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으로 흘러가면서 이쪽으로는 많이 빼앗기는 것 같은데 흘러가다 보면 다시 또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큰 물이 흘러나오다가 저 밑에 내려가면 더 작은 개울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울이었던 것이 변해서 강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빼앗기는 것만큼 그렇게 채워져서 두루두루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자신의 미래의 삶을 선택해 보십시오. 우리의 소명은 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땅을 열매 맺는 아름다운 땅으로 그래서 내가 흘러가지 아니하였더라면 구겨질 사람들이 내가 흘러가면서 펼쳐지는 것 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자원을 주십시오. 흘러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셔서 썩히실 자원을 저를 주십시오. 흘러가는데는 자신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왜 안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영적인 변화를 받고 비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먹고 살라고 사업하는 것입니다. 먹여 살리려고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제는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구겨진 세상을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을 통해 펼치시는 아주 아름다운 하나님의 방법 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아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아프리카나 남미를 못 가본 것이 죄송한데 몇 번 와 달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용기가 안 나서 못 갔는데 아마 가서 보면 더 많은 소명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에서 나는 양식으로 온 인류가 먹고 살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 북한하고 남한하고 하나의 반도인데 중간에 짤렸는데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 남한에서 남는 쌀과 북한에서 모자라는 양이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남는 것을 보내면 딱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전세계 부의 80%를 10%가 먹고 흥청거리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음식들을 우리는 음식 쓰레기를 낭비한다고 하는데 낭비도 아닙니다. 닭 한 마리를 툭툭 건드리다가 생선 팔뚝만한 것 우리 가져다주면 토막 내서 일주일 먹을 것을 앞에 툭툭 파다가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포크하고 나이프까지 보따리 싸서 버려 버립니다. 그러니까 끔찍하게 낭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나 이런데 가면 너무너무 가난합니다. 어떤 분이 여행하고 와서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는데 아이들이 빵 하나만 달라고 애원하는데 눈물이 나서 이 아이들을 위해 빵을 얼마나 사면 되는가 했더니 한 트럭만 사면된다고 합니다. 한 트럭을 했더니 한 7,8년 되었는지 모르는데 백 달러가 한 트럭이더랍니다. 12만원에 빵이 한 트럭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원 없이 보내주고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흘러가지 않고 인간의 탐욕에 의해 한쪽으로 흘러가서 그것들이 말하자면 집중해서 흘러가니까 펼쳐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적절히 누리면서 사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은 미덕이라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에 있는 그림을 가지고 오늘날의 신앙의 세계에 잣대를 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조금 넉넉하게 쓰는 것인데 너무 지나쳐도 안 되고 또 하나는 흘러 갈 수 있는 자원들이 항상 계산된 가운데 소비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수없이 소비하고 흘러가지 않는다면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자원을 흘려 보낼때 구제에 있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훌륭한 방법입니다.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그리고 물질을 객관적으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는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연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아주 기쁘게 돕고 그의 영혼까지도 품고 기도해주면서 살아 갈 때 그 사람이 있어서 망가진 지구의 세계에 어느 한 구석이 펼쳐지고 온전해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사람이 거기에 있어서 이 세상이 더 아름답게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겠습니까?
기쁘게 구제하라 6
기쁘게 구제하라 1 (2010/01/24,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2 (2010/01/3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3 (2010/02/07,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4 (2010/02/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5 (2010/03/21,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6 (2010/03/28, 주일오후예배)
기쁘게 구제하라 7 (2010/04/18, 주일오후예배)
7.아낌없이 흐르는 사랑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이 신명기는 모세가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통해서 그 율법을 해설하는 가르침의 과정을 통해서 광야 생활 동안에 가르쳤던 것들입니다. 그것을 모세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중에 중요한 내용들을 추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가르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가 거듭 '신'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신당부한다고 할 때 한자로 이것을 두번 씁니다. 거듭거듭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주신 명령을 다시 한 번 더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희랍어도 마찬가지 이지만 뒤츠라놈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라는 말과 '노머스' 율법이라는 말이 겹쳐져서 그래서 신명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구제에 관한 가르침을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전할 때 이것이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도 이스라엘 속에서 영구히 계속 되어야 할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기를 이렇게 가난한 자는 이 땅에서 언제든지 그치지가 않는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면서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경쟁입니다. 치열한 경쟁입니다. 그런데 이 경쟁이 탐욕을 타고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그것은 승부가 나게 마련이고 한정된 자원을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얻다 보니까 거기에는 언제나 패배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패배자가 나오는 것은 욕망보다도 자원이 작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경쟁해서 패배한 사람들을 완전히 패배한 채로 남겨두면 그 자체가 일그러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한 나라가 경쟁을 도입하면 발전하는 것은 사실인데 이렇게 경쟁에서 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경쟁을 촉진하면 나라가 둘로 찢어지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이것이 바로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그 게임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하면 경쟁을 했는데 이긴 사람은 어차피 잊게 마련인데 진 사람이 공정한 게임이었다 나는 이 게임에 졌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이런 사회가 되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가 되기가 참 힘듭니다. 실제로 한번 보십시오. 보면 옛날에는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좋은 학교를 가고 출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투자를 많이 해서 이 아이의 교육을 디자인한 사람들의 자식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나는 강남에 살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서울대 입학 프로그램이 다섯 살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다섯 살부터 그 사람에게 통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 가면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맥도 형성이 되고. 그런데 이제 종종 보면 애가 유별나서 그 프로그램을 못 따라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거기에 반발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탈락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인으로 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갑니다. 그러면 집안도 좋고 학교도 좋은데 나오니까 어울리는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합니다. 주위에 인맥도 있으니까 직장도 좋은데 들어갑니다. 또 인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그 수준에서 또 만납니다. 사회가 계속해서 양극화가 되는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집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분의 세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공정한 게임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공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게임입니다. 이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자기가 졌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사회가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때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반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 일어나는 반란들 로마시대에 일어났던 노예들의 반란 이런 모든 것들이 억눌린 자들의 반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구제라고 하면 인심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나에게 구제를 의무로 지어주지는 못한다. 왕이 신하에게 은전을 베풀듯이 안 해도 되는 것인데 내가 스스로 마음이 좋아서 주머니를 풀어서 나보다 못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구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이 구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백성들 심지어는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시골에서 가을에 감이 입파리가 다 떨어져도 감은 있습니다. 어른들이 감을 땁니다. 맨 위에 따기 어려운 것 8개나 10개 정도는 남겨 둡니다. 딸 수 있습니다. 더 길게 해서 장대로 내려치면 왜 안 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따지 않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까치가 과일을 참 좋아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 쪼아서 빨아 먹는 것입니다. 까치에 대해 그것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똑같은 사상이 나옵니다. 그렇게 따서 일부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 낱알은 줍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두퉁이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나무에서 과실을 딸 때도 까치밥을 남깁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과객 이방인들이 그것을 주워서 빌어먹고 또 새들도 날아 와서 짐승들도 먹으면서 생태계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똑같은 개념을 하나님이 언약백성들 속에서 도입 하시는 개념이 구제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구제라고 하는 것은 해야 할 의무가 없는데 하나님께 감사해서 선심 쓰듯이 내가 주는 그것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구제는 항상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구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고마워서 팁을 줄 때에는 전에는 그냥 주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물어 봅니다. 이 가게 주인이세요? 여기서 일하는 분이세요? 제가 이 가게 주인 입니다 하면 안 줍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더 부자인데 왜 주겠습니까? 종업원입니다 하면 정말 애 쓰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다만 얼마라도 쥐어 주는 것입니다. 구제는 항상 자기만 못하고 결핍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가리켜서 구제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탐욕과 경쟁구조로 한쪽에 몰리기 쉬운 물질들을 사랑의 교통을 통해 흘려보내서 빈궁한 자들이 그 도움을 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평균적인 삶을 살게 하는 방법입니다. 로마가 한참 평화로울 때 그때는 나라가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하면 로마는 세계 최고의 도시이다. 그러니까 이 로마의 어떤 사람이 성 안에서 배가 고프다고 느끼면서 굶주린다면 이것은 로마시민으로서 수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에게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아침이면 어마어마한 빵을 해서 성문 어귀에서 굶주린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손을 벌리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라가 태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가 한쪽에 쏠리면서 부자들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방탕하고 탐욕에 가득 차게 될 때 반란과 폭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에 이런 악습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도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해 그 언약백성들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면 살아갈지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뭐냐면 아주 엄격하게 지금 우리가 읽은 10절부터 12절까지 나오는 구절의 어조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지 말고 구제 좀 하라는 사정하는 조 입니까 아니면 아주 엄격하게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는 것입니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정착된 농경사회를 이루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농산물들이 생산이 되고 그러면 공업과 모든 것들이 발전하게 되고 여기에서 경쟁이 생겨나게 되고 부가 어느 한쪽에 쏠리게 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백성들로서 일치를 이루고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부들이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엄중하게 경쟁을 부인하면 모두 가난하게 살게 되니까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구제하여야 하는 것을 엄격하게 명령해서 그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한 사람이 경건하다고 할때 그것은 하나는 하나님을 지성으로 섬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 두개가 경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신약 때까지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이방인 선교의 디딤돌이 되지 않습니까? 그때 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를 많이 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로 넘어 오게 되면 참된 경건의 요소가 과부와 고아들을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은 구제에 대한 그리스도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자본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안 해도 되는 일인데 내가 상당한 자비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베푸는 부가적인 선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의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없으면 경건이 거짓된 것이다 라고 까지 이야기 할 정도로 이 구제가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명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구제가 성경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또 실천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지도하고 돕는 것이 교회가 하여야 할 매우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잘 접할 수 있도록 정보를 주고 성도들 자신도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들을 도와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함께 나누고 그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의 일부를 흘려보내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을 해야지 이것이 자기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특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제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어떻게까지 이야기 하는가 하면 만약에 네가 빈궁한 형제에게 아무것도 안 주면 너는 죄를 짓는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9절에서 명백히 선언 합니다. 그러면서 이 구제해야 할 때에 그 마음의 자세를 이야기 합니다.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끼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제한으로 구제하라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탐욕 입니다. 사람들에게 의무를 따라서 언약 백성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구제할 때 거기에 탐욕이 게재되지 않도록 해라 그렇게 탐욕이 게재되면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요? 사람들을 도우면서 그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보상을 원하거나 이름을 낸 다든지 아니면 그런 구제하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고 한다든지 하는 금전 이외의 보상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주기는 주는데 거기에 탐욕이 작용하여 억지로 하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구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 구제를 의무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 중 우리가 기본적으로 먹고 입고 쓰고 인간답게 내가 교육을 받고 또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가 교육하고 또 어느 정도의 문화를 누리고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 좋은 도구들을 갖는 것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책을 사는 것이 사치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골프채 하나를 일억을 주고 샀다고 하면 사치입니까 사치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프로골프선수이면 사치입니까 사치가 아닙니까? 사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입니다. 돈을 버는 자본 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하는 아줌마가 한 달에 화장품을 이백만 원어치를 쓴다고 하면 사치입니다. 그런데 영화배우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관리를 해야지만 광고도 찍고 할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악기 하나를 40억, 50억 주고 가지고 다닌다면 사치입니다. 그러나 진짜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손에 들려진 50억짜리 바이올린은 사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을 갖추고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탐욕이 게재되지 않고 이것들을 흘려보내서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의무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어느 선상에서 적절하게 유지 하면서 그래서 시인이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아름다운 효입니다. 굳이 과도하게 구두쇠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존경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을 나도 그렇게 쓰지 못한다고 부러워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면 적절하게 도구로 쓰고 남는 것은 흘려보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누리면서 삶이 피어나도록 그렇게 돕늗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저는 종종 나는 경험을 못 해 보았지만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신학교 때도 그렇고 독지가의 도움으로 한번 찔끔 도와주는 것 말고 독지가가 네가 신학교를 마쳐서 목사가 될 때까지 도와주겠다 이렇게 해서 도움을 받는 것을 드물기는 하지만 몇 사람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만약에 그 사람이 그것을 올바로만 사용을 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어진 자신의 길을 걸어 갈 때 한사람의 인생이 활짝 피는 것입니다. 교육 받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았을 나이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은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는데 집에서 학교를 못 다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를 데려다가 자장면 집에 들여보냈습니다. 철가방을 들로 맨날 뛰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깨어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살면 내 미래가 없다 생각한 것입니다. 낮에는 철가방을 들고 밤에는 공부하고 공부하다 이 일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집을 뛰쳐나가 고아처럼 살면서 공부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그를 위해서 다른 삶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교육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희생을 해서 그런 기회를 줄 때 그것은 자기가 그 돈을 가지고 있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주시는 그 물질을 가지고 그렇게 사용을 해서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꿈나무처럼 자라서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한 모퉁이를 활짝 피어나게끔 이바지 하며 살게 될때 그 때 그 사람의 아주 작은 헌신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불쌍해서 내가 자비심으로 내가 누구를 도와주는데 이것은 나의 선택사항이다 누구도 나에게 강요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처음 신앙을 가질 때부터 기도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성경 읽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듯이 똑같이 가르쳐야 할 덕목이 구제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부다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전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자라날 때부터. 그러면서 자기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때 아끼는 마음 없이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낼 때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탐욕을 물리치고 살아야할 언약백성으로서의 본분을 행하 것이라는 것이 심겨 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로 인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범사와 내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하면 네가 부자가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돈을 못 받았다고 해서 복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의 결과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욕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듯이 천원을 도와주면 하나님이 만원을 주신다 살다 보면 그런 간증이 나올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것이 딱 들어맞습니까? 그러면 누가 구제 안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빚을 내서라도 10만원 구제하면 저녁때 백만 원이 들어오는데. 어느 주식사에 투자를 해서 하루만에 10배를 튀길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한번 우연히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이었는데 보니까 핀 하나를 가지고 집을 만든 사람이 나왔습니다. 클립 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집을 만들었습니다. 클립을 가지고 이 클립이 있는데 이 클립을 가지고 나에게 핀을 주신분 핀을 주니까 핀하고 볼펜하고 바꾸실 분 이렇게 해서 계속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집까지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제를 하면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단언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을 주시리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그를 행복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은 행복의 한 요소가 될지 모르지만 복 자체는 아닙니다. 물질이 많으면서도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살인 하는 사람도 있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남에게 베풀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은 모릅니다. 사람마다 그것이 각각 다릅니다. 획일적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복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은 이 세상에 말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기로 작정한 사람과 주님이 복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 둘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구제하고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나누어 주는 것을 언약백성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분부입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나의 본분이고 의무라는 생각을 조금 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한 번도 머리속에서 지나지 않게끔 해서 나에게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발견되면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복된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명령에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신바와 같이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기점으로 그렇게 구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나면 구제하는 것이 굉장히 즐거워 지고 편안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나, 나를 통해서 언약백성들의 일치를 이루고 그들을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분부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 가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의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이 구제의 의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수없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 생전 다시 만나지 못하고 때로는 얼굴도 보지 못해도 영적으로는 다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이 여러분들을 향하여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그 마음은 알 수 없는 신비적인 방법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고 돌보는 이것을 하나님의 큰 사랑 그리고 은혜라고 하나님께서 심지어는 당신에게 꾸이는 것이라고 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구제하라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