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와 축복
“환란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시 20:1, 2)
I. 본문해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시편 20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탄원의 시를 많이 썼지만 오늘 이 20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의 시입니다. 다윗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많이 찬송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찬송시는 고난으로 얼룩진 그의 삶 속에서 그가 어떻게 영혼의 원기를 찬송을 통해 얻으며 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 속에서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함께 언약 백성 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삶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때문에 무엇을 많이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데서 인생의 보람을 찾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옹달샘에 영광이 그 샘에 물을 가두어 썩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샘에 와서 물을 먹고 그 샘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신자의 삶도 이렇게 하나님 때문에 많은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복의 통로가 되어서 다른 사람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으로서 조상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면서도 이러한 사상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백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실 모든 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장 찬송이 참 귀한 것입니다. 저는 한동안 1장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성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모든 복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신데 어떻게 아브라함보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하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비유하자면 주님은 복의 저수지이고, 아브라함은 그 저수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받은 작은 옹달샘으로서 또 다른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원천적 근원이시고, 신자들은 파생적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 파생적인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의 통로를 통해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풍족하게 공급받으면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내 안에 주신 하나님의 복들을 누리게 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복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이 많아야합니다. 지식의 빛도 많아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그저 불 때고 열심히 믿으면 되지, 고시공부 하느냐고 하면서 머리에 쥐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자기처럼 머리가 텅 빈 사람들에게만 전도를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세상의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들어 있으면서도 곤고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 저에게 학자의 혀를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왜? 자랑하려고? 아닙니다. 그가 뛰어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초보가 아니라 꽉 차 있으면 곤고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지식의 빛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면 계속 빛을 비춰 줍니다. 그러면 “아, 놀랍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거의 천재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서 방황하다가 마니교에 빠졌는데, 마니교는 그 당시에 지성적인 사상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빠지고 철학도 하고 비상하고 뛰어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을 합니다. 누가 그 사람의 마음에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거리의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지식이 없이 믿음만 뜨거운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무릎을 꿇고 회심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암브로시우스라는 설교자를 통해서였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당대에 아주 뛰어난 지성인인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어거스틴의 마음에는 어두움이 꽉 차서 웬만한 빛으로는 밝혀지지 않는데 암브로시우스의 지성과 마음에 있는 빛이 워낙 찬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자신이 이제껏 찾던 우주와 생명의 근원이시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빛도 많아야 합니다. 은혜도 많아야 합니다. 은혜가 떨어지니까 1년 365일 전도하다가 막판에 대판거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냥 전도하기 위해 기 죽어지내던 것 은혜가 떨어진 차에 폭발을 해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고, ‘나중에 회개를 한이 있더라도 한번 당해봐라’하고 달려듭니다. 은혜가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좀 도와주려고 그러는데 있어야지요, 많아야지요! 그래야지 도와주죠! 그 모든 지식, 은혜, 사랑, 물질... 모든 것들이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것을 많이 받아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줘야 합니다. 그것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우리의 덕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 덕을 입으면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소생하고, 무지한 자들이 빛을 발견하고, 물질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도움을 받고, 미움과 질투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사랑을 누리는 것을 보며 행복해 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복된 삶입니다.
II. 언약 백성의 삶: 축복함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의 삶이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받은 강복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백성들에게 강복이 되시는 방법이 오늘 성경에 세 가지로 등장합니다.
A. 응답하심
첫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입니다. “환란 날에 네게 응답하시며”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해놓으시고 한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한번도 후회하지 않으시고, 선택하신 후 우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인도와 보호라는 방법으로 마지막에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을 향하여 이끌어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선택받고 인도받고 보호를 받은 우리가 처음 선택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려는 그 목적을 향해 우리의 마음도 함께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의지하면서 따라가는 길이 참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는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자기가 정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여기에서 불순종과 반역이 생겨납니다. 이때에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과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존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종 환란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환란의 폭풍을 보내신다기 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계획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악에 빠져서 뒤엉킨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고통입니다.
물론 성경은 폭넓게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고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럴만한 사람들에게 그런 징계와 책망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인간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법도,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규칙이 있습니다. 요즘같이 차고 건조한 날씨에는 찬바람을 쐬지 말아야지만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 규칙을 어기고 생활을 하면 우리들이 약할 때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런 환란을 당하게 하심으로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이 환란을 극복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때 신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기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의존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과 완전히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가득 차서 마음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가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이 될 때입니다. 환란 속에서 그런 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응답해주심으로 주님을 더 많이 의존하게 하십니다. 그 의지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가 복의 근원이신 그분께 깊이 연결된, 그 의존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쥐뿔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내가 교리반을 두 번이나 하고, 성화반까지 했는데, 이 정도면 내가 대단한 신앙의 지식이 있다고 하지 않을까? <기독교 강요>를 세 번이나 읽고,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까지 한번을 읽었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은 거의 외우고, <죄와 은혜의 지배>는 거의 세 번이나 독파를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지식이 빛이 자기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신기하죠! 그럼 언제 들어올까요? “하나님, 저는 깨닫지 못하기가 무지하여서 짐승과 같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이지만 저에게 다시 들려주십시오. 제 어두운 눈을 열어 주님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은혜의 빛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더 많은 진리의 빛을 주시옵소서. 제가 이 세상에 있는 값진 모든 재물보다 주님의 진리의 빛을 사모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식의 빛이 들어옵니다. “은혜하면 나만큼 받은 사람이 있겠어!” 하는 사람에겐 더 이상 은혜가 흘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분초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의존의 마음일 때 통로가 열리며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은혜가 흘러들어옵니다.
이곳 예배당 길이가 72미터잖아요. 거기다 제가 눈이 좀 나빠요?! 그러니까 저 뒤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요즘 얘기 들어보니까 예배 시간에 늦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단언하건대 그런 사람들은 은혜 못 받아요. 왜? 의존의 마음이 없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 제가 이 주일에 주님을 못 만나고 은혜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으면 먼지뿐인 이 세상의 타박타박한 길을 일주일 동안 어떻게 걸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제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제게는 너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올 때 은혜가 흘러들어 옵니다.
여러분들이 민감한 돈 얘기를 해볼까요? “이 정도면 먹고 살고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거야 주님이 방해 안하시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지. 축복은 바라지도 않고 털어나가지 말라고 그래.” 그러면 안 되죠. “주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들이 있고 저는 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한 가운데 있습니다. 혹은 제가 먹고 쓰기에는 모자라지 않지만 제게 사명을 주셨으니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려면 제게 물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한번 믿고 일단 맡겨 보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모든 원천적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자원이 내려오는 것은 이 의존의 감정을 통해서 내려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은 제일 먼저 신자의 의존하는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환란을 만나게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게 하셔서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주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 때로는 마음 아픈 일까지도 하나님이 뜨겁게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성심스러운 초청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막혔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죠! 은혜의 문이 막히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지식의 빛이 막히고, 물질의 흐름이 막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죠!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르짖으셨습니까? 오늘 약속하십니다. 선택한 백성인 여러분들을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당신을 의지하기 원하십니다.
요즘 월요일마다 인턴쉽을 하는데 힘들지만 보람이 있습니다. 테잎도 듣고, 책도 읽고, 토론도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 갑니다. 엊그제 모여서 어느 한 신학생이 간증을 하는데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인턴쉽을 하면서 자신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 달 전에 목사님이 자신에게 수요예배에 설교를 하라고 하시더랍니다. 교회를 보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생각을 많이 하다가, 전도사가 설교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저도 그랬거든요. 얼마나 설랬겠습니까? 만사 제쳐놓고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고 매일 기도를 했대요. 마지막에 그냥 금식까지 하면서 수요예배 설교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대요. 드디어 올라가서 설교를 했는데, 신학교 1~2학년짜리 설교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초보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교인들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최고의 예물은 상한 심령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주님을 깊이 의존할 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B. 높여 주심
두 번째는 높여 주심입니다. ‘높인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의 질서 상 다른 모든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영광의 몇 가지 의미가 있지만, 이 문맥과 관련해서 영광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효과를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이 시편 2편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나의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그 2편의 문맥은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그냥 정신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압살롬의 칼날을 피해 도망갈 때의 다윗의 심경을 그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며...” 그랬습니다. 방패는 보호하는 것이죠. 수많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도 방패 뒤에 숨어있으면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방패이시며 모든 화살로부터 자신을 막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악인이 아무리 정확하게 시인의 심장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려도 방패 되신 하나님 뒤에 숨으니까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시인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효과를 발휘하게 합니다.
그 반대가 뭐냐 하면, 멸시와 치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명히 나에게는 하나님 때문에 내 안에 귀한 것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도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셔서 나를 사용하시고 이제껏 나를 이끌어 오시고 붙들어주시고, 그렇게 나에게 주신 소중한 것들을 사용해서 당신을 섬기며 살아오게 하셨는데, 어느 한 순간에 악인에게 짓밟히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는 수치와 부끄러움과 더러움으로 짓밟힘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서 그 사람을 높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 모든 영토와 재산은 사실 선왕 때에 이루어놓은 것이지만 다윗은 그것을 누리지는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솔로몬이 보여준 영광은 둘로 나뉩니다. 의존적 영광과 독립적인 영광입니다. 의존적 영광의 대표적인 사례는,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에 한 일이 무엇이었죠? 일천 번의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일천 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번제를 일천 번을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마다 짐승을 잡아서 각을 떠서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드려도 삼 년을 넘게 드려야하는 제사이고, 아침과 저녁 드려도 일년 반을 넘게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그 일천 번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아무것도 모르는 미천한 인생이 언약 백성의 나라에 왕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이 백성들을 재판하고 다스릴 수 있는 지혜입니다. 지혜를 다른데서 찾을 수가 없으니 하나님 자신이 지혜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마음을 다 모아서 그 일천 번의 번제를 드리는 동안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꽉 붙어있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만 주신 것이 아니라 “참 장하다!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내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한다는 말이냐! 참으로 내가 부귀와 영화도 네게 주겠다.” 이 때에 이것이 의존적인 영광입니다.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솔로몬을 볼 때에 거기에서 비춰오는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면서 솔로몬의 솔로몬 된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정말 아름답고 고귀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후일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자 그가 가지고 있는 영광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영광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자원에 의존하는 독립적인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궁을 짓고 없는 것 없이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부귀와 영화를 누렸지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 입은 모든 옷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도다.” 하찮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사업에 성공했을 때? 아닙니다. 지위가 높아졌을 때? 아닙니다. 성형 수술 했을 때? 아닙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때, 성도의 자리에 있을 때, 장로의 자리에 있을 때, 권사의 자리에 있을 때, 집사의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의 자리에 있을 때, 아내의 자리에 있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과 맞닿아 있을 때 거기로부터 내려오는 근원적인 영광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찬란한 빛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신앙을 팔아서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영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자리를 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많은 물질을 얻었어도 그에게 절대로 영광의 빛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워지고 가장 아름다워질 때에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말 아름다운 영광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C. 도와주심
세 번째는, 하나님이 도와주심입니다. 뒤에 나오는 붙드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와주신다’는 이야기가 사실 우리말에서 보면, ‘도와준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주도권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힘에 무엇을 보태어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도와주심’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에제르’입니다. ‘에벤에셀’ 할 때에 ‘에셀’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이 ‘에제르’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도움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6.25 전쟁 때 다 밀려서 낙동강까지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전투가 벌어지고 돈 있는 사람들은 부산 앞바다에 배를 사두었습니다. 왜? 여차하면 타고 제주도나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때 유엔군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우리가 싸우면 힘들게 이길 것을 유엔군이 도와줘서 쉽게 이긴 것이 아니라 도움이 없었으면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도움을 통해서 이 전세와 판세를 뒤엎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이 없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날개를 달아주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 때문에 다 기울어가던 우리 인생의 막판에 역전의 드라마가 연출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언약 백성들의 축복입니다.
참 신기하잖아요! 아무 길도 없고, 어떠한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니까 하나님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언약 백성들은 원천적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파생적인 근원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고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복 속에서 그들도 또 하나의 근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그 안에서 복을 받게 해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께 빌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기의 언약 백성들을 축복하는 광경입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높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되면 지식과 은혜와 사랑과 물질 등의 많은 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누리며 살도록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III. 성도: 강복의 중심
그런데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강복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우리들이 받을 때에 비로소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 그들을 위해 축복할 때에 우리에게 내리신 그 강복을 그들이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성소에서 너를 붙드시고 너를 도우시고” 이것이 결국은 성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때까지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막이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성막이 있는 그 주위를 가리켜서 성소라고 하고, 혹은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방을 가리켜서 성소라고도 불렀습니다. 어떻든 이곳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그것이 후에 성소와 시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땅, 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소가 보여주는 생각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 많은 땅 중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로 지정하신 곳, 이것이 바로 언약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때에 우리도 파생적 근원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자신의 영혼과 모든 삶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주는 중심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바르지 못한 관계를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그대로 투영합니다. 그렇게 구겨진 관계를 가지고 교회를 대합니다. 거기에서 꺾어진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성도들을 대하고, 지체들을 대하고, 섬김을 대하고, 사명을 대하고, 목회자와의 관계를 가집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이 다 꺾어지고 일그러진 가운데 투영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그분께로부터 오는 응답과 높이심과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계속 메마른 땅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지식의 빛도 없고, 은혜의 샘물도 없고, 사랑의 옹달샘도 없고, 이 세상에 물질적인 자원의 여유도 없이 핍절하게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그 모든 좋은 것이 거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고통을 받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서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가시가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를 배에 태운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까? 하필이면 요나가 그 배를 타서 그 사람 때문에 풍랑을 만나고 사람들의 짐도 다 버리고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까지 가게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나를 바다에 던져라” 그랬는데, 요나를 던지면 되지만 이미 버린 짐들은 얼마나 아깝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되어서 복이 없으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과 손잡는 것이 지상 최대의 실수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손 좀 보시려면 반드시 그 사람과 손잡은 사람도 덩달아 손을 보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할 짓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올바로 못 믿으니까 내가 재앙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탄 가정이라는 배에 환란이 오고, 여러분이 탄 직장이라는 배에 시련이 오고, 사업에 환란이 온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지만 그런 점에서 요나를 태운 배에 있는 사람은 그에게 배표 판 것을 땅을 치면서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갑판을 치면서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반대의 사람이 누구일까요? 요셉이죠. 돈 몇 푼에 팔려서 끌려왔을 때에는 말도 안통하고 무식하게 보였는데 불러다가 마당이라도 쓸어라하고 일을 시켰더니 성경에서 뭐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요셉을 생각하사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온 집과 온 땅에 복을 내리시니라” 그렇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가 뭡니까? 요셉이 요나보다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힘이 셌습니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는 없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근원이 마른 사람이었고, 요셉은 비록 비천한 노예살이를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의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잘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보물들을 가득 소유한 파생적 근원이 되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모든 축복들이 어떻게 주어진다구요?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번에 미국 가서도 제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민 교회들은 왜 그렇게 싸웁니까?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많이 싸웁니다. 고달프고 상처를 많이 받은 이민 생활에서 사랑에 대한 욕구가 크니까 그러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마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 복이 없다! 선교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복의 선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복을 받고 소생을 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이 내게 말씀을 듣고 변화가 되고... 이러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잖아요! 이것이 없다 이거에요. 그러면 사실 선교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교회에서 싸우고, 교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교회와의 관계도 바르지 못하면, 자기가 조금 상처받으면 눈이 멀어집니다. 예수의 몸인 교회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난 요만한 상처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칼로 푹 찌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복이 없습니다. 자신의 복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 내게 가득해요. 하나님께서 교회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그들에게 빛을 주십니다.
은혜가 떨어졌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성소에서 은혜가 다시 회복이 됩니다. 물질적인 고난을 만나도 나의 영광을 잃어버릴 때에도 하나님이 거기에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근원을 아무렇게나 망가뜨리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 복의 파문이 번져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는 겁니다. 이번 여름에도 보십시오. 평촌 한 구석에서 은혜를 받으니까 그 파문이 우즈베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밀려가잖아요! 그래서 그들에게 가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잖아요! 이게 파문입니다. 그런 파문의 중심에 성소가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 생명이 바로 이 교회를 통해서, 은혜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에게 분여되는 것을 알고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짜증나고 성질나면 ‘집어 쳐버리지’하고 교회 생활을 하면 영적인 거렁뱅이의 생활을 하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이 이런 세 가지의 축복들을 내려주십니다.
IV. 결론: 복의 근원이 되라
그럼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지치고 곤고한 많은 영혼들이 쉬게끔 하나님 내게 더 넓은 가슴을 주십시오. 지친 영혼들이 내 품에서 쉬면서 주님을 배우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팔을 두 배나 네 배나 길게 해주십시오.” 왜?“ 여러 명이 내 팔을 베고 눕게 해주시옵소서. 내게 더 많은 물질을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것들로, 물질이 부족하여 구겨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펴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하면서 하나님 앞에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누리며, 우리를 통해 채움을 받으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많은 영적인, 육적인 자원의 근원이 어디일까? 도대체 물이 어디에서 공급 되길래 이 작은 옹달샘에서 물이 마르지 않는 것일까? 파생적 근원에서 더듬어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나겠죠! 거기서 원천적인 근원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