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함
1. 하나님과 동행 하는 신자의 두 가지 특성은?
신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한다하나님과 평화를 말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재기가 쉽다.
2005.7.17, 31 구역장교육
하나님과 불화 하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 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이래야만 하나님과 다시 화해 하게 된다고 생각 한다.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면 그렇게 말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격히 보면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과 화목이 깨트려 졌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나 육체의 욕심 이런 것 들에 의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변적인데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서 불변적이시다.
그것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탕자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죽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해서 떠난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육신의 소원대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서 멀리 떠나서 아버지와 불화 하게 된 것 이다.
아버지의 입장은 어떤가요? 아버지는 자식과 불화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자식이 일방적으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지 아버지의 마음은 똑같다.
아들이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발견하고 반긴다.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당한 것 이다. 아버지가 떠나지는 않으신다.
우리도 마찬 가지이다. 하나님과 불화 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멀어 진 것 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서 거리감을 느끼는 상태인 것이다.
2.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숙제는 ?
잃어 버릴 수 있으므로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계속 평화를 계속 누려 나가는 것이다.
잃어 버린 사람들의 가장 급한 것은 참회와 용서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시편에서 " 여호와여돌아오소서" 이것은 하나의 현상적인 묘사 일뿐이지 실제로 돌아오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자기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 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라고 하는 문학적인 묘사인 것 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는 자는 그 소중함을 안다. 작은 것에 의해서도 그 평화가 깨어짐을 아는 것이다. 그 평화로부터 끈임 없이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3 .평화라고 하는 것은 뭐가 사라져야만 평화가 온다
평화를 애기하기 전에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은 적대감이다. 이것이 사라져야지만 평화가 오는 것이다. 적대감이 사라진 상태에서 평화가 오는 것이다.
남북 문제는 푸는 데도 먼저 치중해야 할 것은 적대감을 해소하는 것을 먼저 풀어야 한다.
한 나라가 백성에게 해주어야 할 기본적인 의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목숨 걸고라도 해결 해야 할 문제다.
혹 100개를 준비 했는데 적의 공격이 하나 밖에 없어서 99개를 쓰레기 통에 버린다고 할지라도 100개를 준비해야 한다.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안보를 설계 해야 한다. 끈임 없이 경계하고 무력 충돌이 일어난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잇는 힘을 가져야 한다.
적대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해소가 있어야지만 평화가 온다.
지난 과거의 역사를 보면 기가 막힌다. 공산 치하에서 ... 억울하게 죽은 ... 백성들의 학살.... 이쪽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 가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것만 얘기하다 보면 계속 해서 마음 속에서 동족들을 향한 적대감만 일어 날것이다. 그러다 보면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이다.
경계하고 어떤 무력에 충돌이 있어도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적대감을 해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고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
전쟁만큼 미친 짓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는 통치하는 자들이 서로 적대감을 조장해서 자기 정권을 이용 한 것 이다. 백성들은 정권에 불안해 하면서 그 정권에 순종하고... 이렇게 하면서 역사가 이어져 온 것 이다. 이것은 어두운 것이다.
평화가 수립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적대감이 이루어 져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으로 향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태어 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 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적대감을 해결 해 주신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들 이렇게 질문 하고 싶을 것이다.
아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깨트려 지는 법이 없다고 해 놓고는 이제는 적대감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건 틀린 것이 잖냐구.... 말하고 싶겠지만..
불신자와 신자의 경우는 틀리다. 불신자의 상태에 대해서 사도는 우리가 불순종 아래 역사하는 진노의 자녀 들이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이기 전에는 대적하고 살아온 악한 자들이었기에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진노가 풀어 지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로 감동 받게 만들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 것 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수립 된 것이다.
이 평화는 깨트려 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멀리 떠나 감으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다.
4. 공로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중보 사역에 의해서 하나님과 평화가 수립 되고 죄인들에게 적용 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공로로 하나님과 화해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적용 되게끔 역사 해주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공로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중보에 의해 유효적으로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이미 구원 받을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고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죽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때 이미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기초를 완성 하신 것이다. 내가 구원 받는 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2000년 전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죄를 생각 나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중보가 내 마음에 믿어지게 할 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던 적대감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5. 공로적으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중보 때문에
유효적으로는 성령님의 역사해 주심 때문에
적용적으로는 우리들이 예수님이 믿을 때 역사 해 주시는 것이다.
믿음이란 이 작용 자체가 성령님이 역사하기 때문에 생겨 나는 작용이다.
성령님은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믿게끔 역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회개를 설명 할 때도 동양이나 서양을 불문하고 장작을 쪼갤 때 세워 놓고 나무를 세워 놓고 정수리를 패는 것이다 나무 결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나무 결을 놓고 벌어지게 해서 쪼개는 것이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동서양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도 믿으려고 하는 신자 안에 역사 하셔서 그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공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 유효적으로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적용적으로는 신자의 믿음을 통해 이 세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 되는 것이다.
함께 역사 함으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공로가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고 인간에게는 그 믿음이 없을 때 와는 다른 영원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을 거스리던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욕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수립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거듭 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거듭난 후에는 자기가 스스로 탕자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다. 그래서 깊은 거리감과 낯 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 하는 방법도 똑 같으다.
원리적인 평화는 구원 받은 이후에 깨트려 지지 않고 실제적인 평화는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 흔들림이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돌아오게 되는 일들이 필요한데 참회와 용서를 통해서 다시 평화를 회복 하게 되는 것이다.
6. 최초로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가 수립 된다고 했다. 그렇게 새워진 평화는 불순종과 죄 때문에 깨어 지는 것이다.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 지는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는 구성 요소의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 한다고 할 때 하나님과의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특성이다. 나누어 지기는 하는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잃어 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갈망을 갖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트려 지게 된다. 평화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감정이다. 잘 모른다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편을 잃어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은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다. (원리적인 연합은 그리스도께 접붙혀 질 때 일어 나는 것이고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가 느끼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내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실제적인 연합이다)
무엇이 이런 연합을 가져 오냐면 사랑이 그런 연합을 가져 오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 덩어리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한 장씩 읽으면서 외워라.
교리 하는 데도 보탬이 되고 말씀을 듣는데도 도움이 된다. 외우지 않은 지식은 끈 떨어진 가방이다. 그 가방은 들 수가 없다.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을 통해서 연합이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합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연합이 그리스도의 평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범죄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사랑이 깨트려 지게 되고 연합의 감정이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과 평화를 상실한 신앙 생활이 된다.
7. 하나님과 평화를 잃어 버리게 되면 하나님과 직접 교통 하므로 해결 될 수 있고 얻을수 있는 것은 안된다. 기도가 안되고 (열렬하게 기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초점이 그분께 맞춰 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마음을 찌르고 자기를 변화 시키는 일들이 일어 나지 않는다. 치명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 영혼에 직접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들이기에 .... 이런 것들이 차단 되는 것이다. 이런 것 들을 극복하게 하는 방편이 참회와 용서이다.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길( 시편 130편)
용서라는 것도 어는 한 순간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 하셨다고 생각 하면 안된다.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죄가 죽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성화와 기도 이다.
하나 하나를 연결 해 놓고 퍼즐 맞추듯 찾아 가야 한다.
성경을 가르칠 때 하나를 배워서 하나를 가르칠 때는 늘 불안하다. 그리고 잘못 가르치기 쉽다. 열을 알고 하나를 가르키는 것과 하나를 알고 하나를 가르치는 것은 엄청나게 잘못 될수가 많다. 이해가 안된 것을 가지고 가르칠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열을 알고 하나를 가르키는 것은 하나를 확실히 알고 가르키는 것이다. 연결 고리가 바로 성화와 기도이다.
열렬하게 기도 하는 가운데 자기 안에 있는 죄가 죽고 은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내가 느낄수 있을 정도로
8 순종과 사랑이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보호하는 외적 껍질이 된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의무의 개념이 들어온다. (나의 마땅한 의무가 무엇인가...본분....이것을 행하면서 걸어가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보호된다.
사랑은 내적인 질을 의미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은혜로 유지되고 지식의 밝은 빛을 통해서 우리의 의무를 깨닫고 순종할 때 하나님과의 복원된 평화가 유지 되는 것이다.
9. 하나님과의 누리는 평화의 핵심은 기쁨이다. 가장 큰 핵심은 기쁨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면 놀라운 기쁨이 따른다. 신령한 기쁨으로...
세속적인 기쁨은 자원에서 오는 것이다. 자원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진다.
신령한 세계를 아는 은혜 속에서 오는 기쁨.... 삶의 질이 변해도 우리로 하여금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기쁨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한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영적 상태의 개선 없이 기뻐 하고자 하는 것은 세속적인 기쁨 밖에 없다.
10. 신자는 평화를 누리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 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은혜 생활을 잘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다들 들러리 인 것 같으다.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일을 이루어 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도 우리를 섬기고 우리밖에 있는 모든 사람과 자원도 우리를 섬긴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서1장9절 설교 요약분을 들어 보라
하나님이 나를 기뻐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기쁨은 쌍방적인 것이 된다. 나도 하나님을 기뻐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 그 안에서 하님을 즐거워 하는 것 ...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이다. 성화의 삶에 있어서...이 기쁨은 세속적인 기쁨하고는 다르다. 권력을 손에 많이 넣은 기쁨 세속 적인 여러 기쁨과는 또 다른 것이다. 모든 신자의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신자가 왜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냐면 실제와 표상의 문제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 있으므로 사물 속에 있는 본질 적인 볼수 있는 총명이 흐려 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 해 질거라고 생각 하고 헌신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은 가시와 엉겅키를 거두어 들이면서 좌절 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일을 인생의 본업이라 생각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기울여서 주님을 알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하고 배움 바 되로 살고 싶어 하고 잘못 산 것은 회개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서 교회를 고치시고 세상을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 기뻐 해야 한다.
밖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역자들이 ....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 받은 성도들이 .... 하나님 이외에 대해서 다른 것으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이미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존 오웬 같은 신학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신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 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까지 했다. 심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오래 묵상을 하다 보니 이것은 진리였다.
어떤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 오랜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신랑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집에 가서 서랍을 열어보니 많은 편지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른 여자의 생각들로 사랑이 가득 차 있는 내용의 편지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사람과 결혼은 할 수 없다. 범죄 한 것이 아니지만 용서가 안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는 혼인 한 관계 이다. 신자가 되어서 한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묵상하고 생각 하는 것은 당연 한 것 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성화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관하여 생각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영광에 대한 생각 이다.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다.
교리를 다루 고 있는 책들을 반복하자. 나는 18번을 읽었다.
외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 하는 것이다. 묵상을 할려면 아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지적인 탐구가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다 들 꼭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빠도 영화 보고 산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도 가고 ..........
자가기 정말 원하지 않으므로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다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계속 축척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글 속에서 우리가 왜 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공부 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 중에서 재밌으니까........ 이것이 많은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 씩 공부 해 가면서 자신의 삶을 세워 가면서 신자가 그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 밖에 또 다른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부패 하고 말 것 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몰라서 잘 못 믿었는데 이제는 노력만 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게 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대해서 많이 알아간다면 그 영혼에 건설적인 것을 채워 주지 못할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어떤 개별 적인 의무 하나를 승리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설교가 되야 한다.
집을 닭장 같이 짓고 말려면 기초 공사가 필요 없다.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온전한 신자가 되고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싶은 것이 모든 성도들의 바람 이라야 한다. 주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고 살다가 죽고 싶다는 마음이 살아있는 모든 신자들의 소원이 되야 한다.그렇게 건축 해 가고자 하니 한계가 오는 것이다. 제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열정도 한계가 오고 헌신도 한계가 오고 섬김도 한계가 오고..........
그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이 지성적인 기초 바닥이 탄탄 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뼈져리게 알게 된 것 이다.
왜 공부하게 됬느냐..? 다른 것은 필요 없는데 책을 더 사달라고 했다. 일년에 만권씩 해서 10년 후에 도서관을 만들어 .....그 속에서 20만권의 도서를 가지고 평생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 조국 교회 그대로 기부하고 죽겠다는 것이다.
3층 4층 까지는 올렸는데 5층 6층을 더 올리려고 하니 기초가 너무 취약 한 것이다.
지식을 자랑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탐구해서 세우기 위해서는 내가 너무 젊은 날들을 허비 했구나........... 너무 어리석어서 쓸데 없이 시간을 허비했구나.... 더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면 더 풍부한 말씀 사역 목회 사역을 할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 것 이다. 결코 지식에 대한 욕심이 아니다. 더 많이 얻어서 뭐하겠는가..?
나 세상 사랑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아무 쓸모 없는 우리들을 불러 주셔서 우리의 지성으로 헌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무지한 교인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 지는 것 같으다.
외치는 자 많거만 생명수가 말라 있는 이때... 교회는 이렇게 서 있는데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ㅠㅠ
치열하게 탐구하고 자신의 지식의 자랑으로 삼지 말고 그것을 사용해서 거룩한 삶이 계속 생겨 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다 보면 눈물이 펑펑 쏟아 질 때가 많다. 이런 일이 잦아 지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물론 먼저 자신 일테고 여러분들 일 것이다.
한 사람의 신자가 그것을 사모하면서 깊이 탐구하면서 주님을 닮아 가려고 하면 지나 가기만 해도 그것이 빛이 되는 것이다.
신앙 생활 하면서 가슴 아픈 것은 저 나이 되어서 저 분 같은 신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을 못 만난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야 한다. 자라나는 사람들이 보면서.........
내가 30년 후에는 저런 장로님 처럼, 저런 집사님 처럼.......... 이런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일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걸어야 그런 사람들이 나타 나게 된다.
은혜가 떨어지면 미움 질투 시기........... 이런 것들을 눌르면서 살아서 성공 해 봤자 외식 인 것이다. 실패 하면 튀어 올라와서 배교의 삶을 사는 것이고 ( 짐승처럼...........)
둘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계속 배워 가야 한다. 그 안에서 거룩하고 성숙한 주님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나 자신을 건축 해 가야 한다. 일평생의 의무는 자신을 건축하면서 사는 것이다. 주님 오라 하는 그 날까지..........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 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 합니다~~~~
날마다 날 마다 지식의 말씀으로 불 붙혀 그 사랑을 담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깊이 참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다시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어디서 쓰러지던지 그 쓰러진 그 지점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구역장 공부
1.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면서 사는 것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영광에 시련에 비례하는 것이다. ( 하나님 만난 것 만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05.8.7 구역장교육
예를 들어 하나님은 높으시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워 왔지만 배우는 것 만으로는 참된 실천적 지식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진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만 위대 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삶으로 적용이 된다. 잘난체 하던 사람들이 자기 교만을 꺾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깨닫고 깨트려 져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럽게 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 나는 것 만큼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를 체험하고 나면 마음만 다스려 주는 것으로 만족 하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다스려 주기를 원하는 마음... 그것인 것이다.
2.첫 번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음. 두 번째가 그 일을 위해 삶을 재편함
세 번째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아파함. 네 번째는 영광이 나타 남과 함께 즐거워함
이것은 항상 신앙이 온전하지 않으면 두리뭉실 하게 믿게 된다. 그것은 힘이 없다. 위험 한 것이다. 수시로 무너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해야 한다.
논리나 생각 들이 최대한 철저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의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진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지..... 확고한 가치여야 한다.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면 구체적으로 총체적인 진술에만 만족 하지 말고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가..? 그것으로 인해서 삶이 재편 되어 있는가? 그렇게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아픔이 있는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 하고 있는가? 이것들이 시금석이 되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 보다는 세상적인 성취와 자기 만족 성공......가치로 등장 하는 것이다. 이런 것 들은 가치가 전도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전반적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탈 되게 된다.
3. 하나님의 영광 은 신학적으로 본체 적인 영광, 발산적인 영광,(하나님께로부터 발산 되는 영광) 효과적인 영광(그 영광을 보고 반응 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들이 얘기 하는 것들은 대부분 효과적인 영광, 반응적 영광이다.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다. 하나님 자신은 영광스러워 지거나 덜 영광 스러워 지거나 할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름이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 지기도 하는 것이다. 신자 각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독특한 삶, 도덕적이고 신령한 삶을 통해서 우리 뒤에 계신 모든 자원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 신자의 삶의 목적 인 것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회적 성공으로 많이 이룬 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 거꾸로 된 것 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 해 주시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인정 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많이 받아서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 한 것이 그 증거이고 자녀들이 잘되고 번영 하게 된 것이 그 증거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가치가 전도 된 것 이다.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이 앞에 와서는 안된다.
4. 교회에서만 신앙 적인 사람들이 있다. 신앙을 보여 줘야 할 곳 은 교회가 아니라 불신 세상이다. 촛불을 켜서 형광등 아래 두지는 않는다. 등불은 어두운 곳에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등불의 효험 가치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 적이어서 어린 신자들이 볼 때 교회는 다른 가치가 통용 될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어야 할 곳은 세상이 더 많이 필요 한 곳인 것이다.
성도들의 이 원론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아주 속되기 때문에 속되게 살고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은 이원론 적인 것이다. 이것이 심하면 주일날 예배 끝나고 나갈 때 죽지 못해서 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 세상으로 갔다가 일주일 내내 교회 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아니다.
기독교 비관 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세상으로 나가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세상에 기쁨하고는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궁극적인 기쁨과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세기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곳은 이 땅 모든 곳에서 통전적으로 신앙을 생각 하면서 영광을 나타 내면서 살아야 한다.
5. 아파 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 얼마나 사랑 하는 줄 알어?"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 할 때, 고통 할 때 아파 하지 않는 것 가짜고 사기사랑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 깊이 아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 하는 사람이다.
진짜 애국자는 나라가 잘 될 때는 모른다. 나라가 어려움이 처했을 때 나타 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으로 아파 하면서 고통만 느낀다면 힘들 것이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 아픈 것으로부터 회복이 되고 .....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6.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중의 위로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위로이고 또 하나는 섭리 속에서 오는 위로 이다.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아파 하면 그때는 많이 아프지만 기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위로를 주신다. 영혼에 직접 어루만지시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파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 하면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쪽으로 일들이 이루어 져 가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신자가 기뻐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오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서 많이 기도 했더니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남의 일에 내 기도로 하나님이 개입 하는 것이 느껴 질 때 그때 하나님의 섭리 속 에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없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은 사라진다. 신자들이 경험한 두 가지가 함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다시 사심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많이 아파 하면서 주님의 죽음을 경험 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서 깨어나게 될 때 하나님이 자신을 다신 살리시는 것을 경험 하게 되는 것이다.
내적으로 그런 기쁨과 슬픔이 공존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끈어 져서 고통스럽다가 놀라운 기쁨이 찾아 오기 전에 자기 죄 때문에 아파 하는 것이 있다. 그 후에 기쁨이 찾아 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자에게도 놀라운 회복과 변화가 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할 때 삶의 방법이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명제가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으로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아주 작은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신자가 온전하게 서 가는 것이다.
구역장 교육
1.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합치 두 번째 목표의 하나됨 세 번째는 그 사람 안에 그런 삶을 살수 있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겨 지는 것
2.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어떤 개인의 결심의 차원의 문제라기 보다는 성향의 문제이다.
칼빈은 최초의 생명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자기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2005.8.14 구역장교육
이후에 생명은 선행의 경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최초의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회개와 함께 갖다 심어 놓으신 것이지만
이후에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뜻대로 살아가는 헌신적인 삶을 통해서 생명이 유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뜻을 세우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 지려는 작용들이 일어날 때 그 사람 안에서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최초는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 지는 것 이다.
예전에는 나를 주인으로 생각하고 살던 옛 자아가 거듭남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그 사랑 안 에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적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 져야 한다.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면 신자는 평안 하지 않다.
세상으로 돌아 가고 싶어 신자가 세상으로 돌아가면 옛날의(거듭 나기전...) 세상이 아닌 것이다. 거듭 난 신자 안에 주신 내적 생명이 심겨 져 있기 때문이다.
영적 죽음이란 영혼이 완전히 죽어 있는 영혼이 아니다. 영혼이 죽어 있으면 산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죽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의미이다.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은 생명을 향해서 올바로 반응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위에 세가지가 나왔었다. 하나님과 신령한 것 들에 대한 반감(나는 거룩한 은혜가 싫어.... 하는 이런영적 반감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응할 수 없는 절대 적인 무능함, 생명력이 쇠퇴된 상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영적 죽음이라 말한다.
영적 죽음상태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추구 하면서 살수가 없다
살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서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살려진 영혼이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쇄신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수 있는 것이다.
3.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은 신비한 생명이다.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도 신비하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도 신비 신비한 것이다.
죄도 우리 속에서 살아있고 은혜도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은혜를 계속 쏟아 내는 것은 내적 생명의 원리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 놓으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내는 것이다.
이것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번 하나님이 심어놓은 내적인 생명력이 감퇴 된다든지 하는 일들은 일어난다. 완전히 죽는 경우는 없다. 죄와 불순종을 통해서 계속 막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가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물리 치기 위해서 신자가 힘써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죄 죽임과 은혜 살림의 생활이다.
죄 죽임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죄를 죽이시는 주체인데 성령님이 그냥 사용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신자들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시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은혜를 계속 살리는 것이다.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은혜의 방편들에 많이 참여 해야 하는 것이다. 은혜 살림과 죄 죽임이 모두 필요 하다.
죄를 죽임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더 사모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과 죄 죽임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죄는 우리의 삶을 자아 중심으로 이끈다. 자기 중심으로 이끌리는 만큼 하나님 중심에서 이탈하지 아니하면 자기 중심의 삶을 살수 없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면 자기 중심으로부터 이탈 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수 없는 것이다.,
강한 쪽으로 우리의 삶은 당겨 지는 것이다. 죄 죽임의 삶을 끈임 없이 실천하고 은혜 살림을 살면 자아 중심으로 끄는 자기 사랑의 힘이 허약 해 진다.
죄 죽임은 우리 안에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힘을 약화 시키고 은혜 살림은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우리의 힘을 강화 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일평생 신자가 가지고 있는 숙제이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 할 때 마다 두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해야 한다.
기도 하는 자신과 목회자를 위해서........
"나는 다시 태어나면 성도로 태어 날것이다. 여러분의 위치에 있고 싶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먼저 기도 할 때 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 하라. 좋은 신자가 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 하라
존 오웬을 만나면서 나는 인생이 변했다. 이번에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을 만나서 영혼 안에서 계속 빛 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더 많이 깨트려 지고 나면 설교 할 것 이다.
머리끝 발끝 까지 예수 따르는 삶을 살고 싶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여러분들이 많이 깨트려 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끝까지 교회 남겨 두실 것 같으다. 가나안의 믿음의 영웅들이 정복을 나갔지만 산지에서 다 쫓아 내지 못하고 남은 부족들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교만 해 질만 하면 그 사람들이 내려 와서 이스라엘 에게 가시가 되었듯이 .... 그렇게 될 것 같으다.
마지막 내린 결론은 우리 모두 교회 안에서 회심 하지 못한 자들을 보면서.... 그것이 교회의 아픈 부분이라 생각 하고 교회의 한 부분이라 생각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 하지 말라. 결국은 내가 더 많이 아파 하고 더 많이 깨트려 지고.....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보았던 진리의 아름다운 세계를 보면서 ...........
대체적으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간다. 구체적인 삶 속 에 까지 그대로 베어 있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심오한 세계가 보일 것이다. 우리의 삶 구석 구석 그런 정신이 베여 있어야 한다. 얼마나 예수를 위해서 물질을 건강을 바치고 살았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업적도 없이 흘러 가버린 분초마다의 삶 속에 예수 죽음의 정신이 깊이 깃들어야 한다. 대의에 있어는 십자강의 정신으로 사는데 구체 적인 삶( 업적도 없이 떠내려가 버린 시간들....)의 부족함을 느낀다.
대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만 업적도 없이 흘러가 버린 구체적인 삶 속에 그 정신이 깃들지 않으므로 우리의 눈이 흐려 지는 것이다.
이성의 원초적인 빛인 광명의 진리를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몇 달째 어거스틴을 보면서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할 수만 있으면 모진 나를 결별하고 싶지만 그날은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자신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목회자를 위해서 많이 기도 해 주길..........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시길, 찬란한 빛을 보고 그 안에서 살고 죽고 하는 과정을 .....
하나님을 향한 영광에 깊이 불타고 그 빛으로 여러분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기를 바란다.
종교라는 것은 라틴어로 "렐리가레이" 반복 하다라는 뜻이다. 더 깊은 뜻은 묶이다. 반복해서 묶이다...신앙이란 것 자체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복 해서 묶이는 것이다.
우리 부패성은 거기서 자꾸 이완 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구역장 교육
4. 계명,(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어둡다- 밝아져야 한다)
조명(인간이 지성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계명과 지성이 없으면 신령함으로 판단 하지 못하게 된다)
2005.8.28 구역장교육
감화( 이런 것 들을 깨닫게 될 때 성령께서 마음이 변화 된다. 마음은 삶을 만들어 내는 공장과 같은 곳이다. 영혼의 빛을 적용 해주면 마음이 사용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모든 것들은 성령님이 하신다.
5. 하나님의 영광을 끈임 없이 갈망해야 한다.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는 효과이다.
목회 사역의 최고 사역의 회심을 보는 것과 본 회심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보존 시키는 것
이다. 회심할 때 깨트려 지면 예수를 위해서 살고 싶어하게 된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신실한 신자가 되고 나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 인데 지속적으로 보존이 안된다는 것이다. 은혜와 부패의 시리즈를 보면 왜 보존이 안되는지 알수 있다.
만물은 무로부터 창도 되었다. 하나님 이외 모든 것들은 창조 된 것 들이다.
삼위 일체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아버지에게 아들이 나시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성령이 나시지만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창조 된 것 이지 무로부터 창조 된 것이 아니다. 성령님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신 것이지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 하신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무로부터 창조 된 것이다.모든 것은 전 일성이 있는데 머리부터 끝까지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삼위 일체 하나님을 제외 하고는 모든 것들은 변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회심의 은혜는 적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있는 것이다. 그 적들이란 인간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 죄악 된 세상, 영향을 미치는 죄악 된 마귀의 권세... 특별히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회심의 전 일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성이다. 이후에 얼마나 자기를 부패 시키려는 요소와 더불어서 자기가 존재 한다고 생각하고 끈임 없이 경계하고 기본 적인 것부터 구도의 정신을 가지고 바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걸 찾아가고 끈임 없이 제거하면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잘하면 예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다.
18세기에 로보트 멕체인 이라는 청교도는 설교하러 올라 오면 시작 하기 전에 사회를 보기 전에 교인들이 울기 시작 했다고 하는 것이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했다.
젊은 멕체인 목사가 하나님께 기도 하고 강단에 섰을 때 우리에게 찬란한 빛이 나는데 그가 기도 했던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 하신 분이실까..? 그러면서 회개 한다는 것이다.
한 순간의 회심이나 목회의 큰 능력에서 나오는 빛은 아니다. 오래 동안 쉬지 않고 구도의 삶을 살면서 닦여진 삶의 부분 부분이 모두 온전해 가기를 힘써 가는 만큼 성령님의 은혜가 깃드는 것이고 그런 것들이 인격적으로 나타 나는 것이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하는 것은 회심 못한 자들에게서 보면 큰 축복이다.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커도 구원 받은 이후에는 그 회심을 보존하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잘 보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저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부패 할 수 있기 때문이다.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이 땅을 사는 동안...........
회심의 역사.... 이미 회심 한 사람들은 그 회심이 계속 갱신 되어서 회심의 은혜가 보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심의 은혜가 새로워 지는 것은 영혼 안에서 일어 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시작 되어서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다시 마음에 영향을 미쳐서 회심의 은혜가 보존 되는 것이다. 일의 성격상 이것은 영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일어 날수 없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어도 일어 날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많다. 다른 것들이 잘 이루어 진다고 해도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 지지 않으면 결단코 그 사람의 회심이 보존 될수 없는 것이다.
위선과 거짓.......이런 것들은 초 신자들이 짓는 죄가 아니다. 오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달라 지기 쉽다.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필요 한 것 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치면 옛날에는 그렇게 살수 밖에 없었겠다...
자신이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넘어서 자신의 지식의 새로운 것들을 보여 주지 안으면 빛이 들어오면서 깨트려 지기가 힘들다.
회심은 일어나기는 하는데 보존이 되지 않는 것이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보존 되어야지만 교회의 건강한 몸이 있고 계속 부흥 되는데 몸은 계속 달라붙고 위에 세포는 계속 병들어 가는 것이다. 결국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가 비 신자들만 생각 하고 설교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월이 흐를수록 설교는 더 깊어 져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살수 있다. 회심의 은혜가 잘 보존 된 사람은 말씀의 욕구가 점점 높아 진다. "주여! 나의 눈을 열어서 주의 귀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문제는 회심이다. 회심하고 나면 설교가 쉽게 들려 온다. 회심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설교가 들려 지지 않는다.
6. 작용하는 방식은 새 성품이 심겨 지고 옛 성품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새 성품이 심겨 진 사람이어야만 예수의 몸에 접붙혀 진 사람이 되고 또 이미 접붙혀 진 사람 일지라도 본성 자체가 얼마든지 부패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회심이 쇄신 되므로 새로워 져야 하는 것이다.
처음 회심 하는 사람들은 회심과 함께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심겨 지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줄기 세포다. 그 속에서 세포들이 생성 되는 것 이다. 그렇게 세포가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새 성품이....
회심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처음 회심 할 때 그것들이 심겨 진 것 이다.
이미 회심 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마음 자체가 영혼 전체가 우리 안에 심겨진 줄기 세포가 성령님이 좋아하는 풍미가 있는 환경이 될 때 새로운 세포가 많이 형성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옛 성품은 죽임을 당하고....
처음 회심 할 때 주께로부터 부름 받았던 것들이 계속 쏟아나고 유지되고 보존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육체와 매우 유비 적인 관계를 보여 준다.
살이 찌고 나면 운동 하는 것 자체가 싫다. 몸이 가벼워 지면 자꾸 움직이고 싶어 진다.
영혼도 마찬 가지이다. 처음에는 기도가 되지 않고 말씀 섭취에도 게으르다. 그러면서 옛사람의 성품들이 자기 안에서 자라 나는 것이다. 일정한 시간들이 흐르고 나면 체중이 불어 난 것 처럼 순발력 있게 기도 하고 싶고 마음을 물같이 쏟아내고 싶지 않는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살이 찌는 것 처럼 영혼도 기존에 있었던 은혜가 줄어가면서 옛사람의 성품이 살아 오르는 것이다. 결국은 그냥 하기 싫어서 하지 않지만 하고 싶어도 시간이 지나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재가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절재와 함께 우리 자신이 새로워 져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실 때 사람을 사용해서 이루시기에 이 일은 아주 중요 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은 삶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구역을 을 맡고 있는데 회심 하지 못한 영혼들이 많이 있다면 그 영혼을 위해서 울어주고 기도 해 주어야 하는데.... 힘들어서 못하게 된다면 여러분 자신 안에서 회심의 은혜가 쇄신이 안되고 쇠퇴 되어 가는 것이다.
영혼들은 병들어 있는줄 알면서도 기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그러고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충분히 들어 사용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사역의 현장은 병들어 가게 되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 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 없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병든 영혼 병든 섬김의 터전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열매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계속해서 교만 하지 말고 끝없이 깎이어야 할 존재 일 뿐 이라고 생각 하고 살아야 한다.
현존하는 사물들을 수 없이 대하면서도 이것을 뛰어 넘어 영원한 가치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걸어 가는 길이 구도의 길이다.
구역장 교육-하나님과 동행함
7. 하나님이 신자의 인격의 변화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사악한 사람이 흉내 낸 착한 삶( 오래 갈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의 사람됨과 균형을 이루어 간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받고 싶어 하는 삶은 사람은 사람은 변화 되지 않았는데 그가 여러 가지 동기에 의해서 영광 돌리는 일은 불가능 하다.
신자의 변화는 거룩한 삶을 항구화 한다. 그 사람이 변화 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거룩한 생활을 항구화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물을 만드실 때 모든 것이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 까지 사람이었고 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물이었고 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돌이었고 영혼은 영혼이었고......... 이것이 창조 하실 때 의 창조이다.
자기 자신의 본질로 가득 찬 상태를 가르켜서 전일 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라는 것이다)
예) 사과-흠집이 없고 둥근 바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 사과는 좋은 사과다
썩은 사과는 나쁜 사과다. 썩은 부분은 본질이 사과가 아니다.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겼는데 그 썩은 부분을 도려 내어서 사과 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 해 놓으신 사람 자신 이어야 하는데 이 속에서 변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 사람이 아닌 것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로만 사는 것이 아니
라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영혼과 마음이다. 영혼과 마음이 어떤 상태 인 것 인가에 따라서
육체가 따라 간다.
성향이 잘 형성 되어 있으면 잘못 살다가도 후회하고 금방 돌아 온다.
성향이 잘못 되어 있으면 힘과 용기를 내어서 좋은 일을 두 번 정도는 잘 할수 있을 지라도
더 이상은 못한다.
욕망이 강하면 절제 하는 게 엄청난 힘이 든다.
조나단 에드워드-리잘뉘슌이라고 해서 생애 적인 결단을 매 순간 금식 기도 하면서 내린다
고 한다. 100여가지가 넘는 결심문 을 쓰는데 그 중에서 8가지가 먹는 것에 대한 결단력이
라고 한다. 이렇게 먹지 말자.......심지어는 그렇게 결단을 했는데도 파티에만 가면 먹고 싶
어 미치겠다는 식으로........
깊이 깨달은 것은 먹는 것 뿐 만 아니라 삶에 모든 것에 있어서 이치를 깨닫게 된 것 이다.
절제력이 떨어지기에 건강에 잘못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너무 과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것에 대한 기대- 저녁이 되면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기대가
생긴다. 기대가 생기면 기대를 타고 욕망이 증대 된다. 욕망이 증대 되면 절제라는 것이 힘
들어 진다.)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주신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다.
욕망이 많으면 결단력이 있어도 절제가 잘 안된다. 기대를 버리면 절제가 쉽다.(먹는 것 뿐
만 아니라 모든 것에 다 그렇다)음식을 절제 하지 않고 먹으면 사색이 안된다.
의학적인 입증이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피가 아래로 몰린다. 폭식하는 철학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 하기 위해서 먹고 생각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생각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말씀을 위해서 생각 하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 하는 것은 살기 위해서 생각 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생각 하는 사는 것은 기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란 논리를 가지고 살면 마음에 평정도 찾아오고 절제 해야지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
기대감에서 욕망이 떠오른다. 욕망이 커지면 절제가 어렵다. 떠오르게 될 때 누르는 것도
중요 하지만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면 욕망이 덜하다. 모든 삶에 적용 된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라(시편에서 강조 되는 것)
기대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는 것이다. 기쁨에 대한 희망이 기대를 갖게 된다. 기쁨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발견 하게 되면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쁨을 발견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욕망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사물을 바라볼 때 객관 적인 눈이 되고 욕망이 있지만 미미하기에 통제력이 생기고 그 은혜가 잘 보존 되므로 기도 할 수 있고 순종 할 수 있다.
시기심은 욕망을 갖는 데서 나온다.
사도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욕망 때문이다.
탐심을 가지면서 실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은 최악 이다. 많이 가지고 있어도 탐욕이 없는 것이 좋다. 그런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맞게금 배분을 할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있으면 학교에도 아프리카에도 선교지에도........ 이렇게 배분하면서 살아 갈수 있다.
세상을 치료 하려면 자원이 있어야 한다. 자원 없이는 안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자원으로 복음을 전하고 주신 자원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에 맞게금 펼치고.....그때에 세상이 두루 고쳐 진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면 프란치스를 생각 한다. 탁발승처럼 맨발로 걸어 다니면서.............. 이런 것들이 미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거기에 욕망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때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공정하게 사용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참된 변화는 항구적으로 이런 것들을 굳게 세워 주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살도록 고정 시켜 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선하게 변화 되면 하나님과 엄청 나게 가깝게 느껴 진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끈을 수 없다. 그러나 죄는 끈을 수 있다. 죄의 본질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이 작용하면 선한 의지가 부패 된다. 결국은 굽은 의지가 되는 것이다.
삶의 모든 방향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무한정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으면 그는 자기를 죽이고 거룩한 신자의 내면 속으로 들어 갈수 없다.
욕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 교리가 잔인하게 느껴 질것이다.
미워 하는 마음은 사랑 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다. 우리 안에는 욕망 덩어리가 있기에 하나님과 친교가 멀게 느껴 지는 것이다.
8. 신자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는 이유는 ?
친교가 이루어 진다. 자기 깨어짐과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 시켜서 만들고 싶어 하는 모습이 예수님 이시다. 영혼이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 가까이 가도록 만들고 싶어 하신다. 형태가 자꾸 일그러 지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욕망들이다.
욕망이 자리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서 만물을 대할 수 없다.
그 나라와 의가 맨 위에 있는데 ... 이런 것들이 순서가 뒤 바뀌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죽어야 하는데 분량 이상의 욕망을 가진 것을 회개 할 때 자기가 잘못 됐다고 깨닫는 것이다. 자기를 심판 하고 나면 처벌이( 죽음 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찾아온다)따른다. 형벌은 딱 하나- 사형 언도 밖에 없다. 사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집행 된다. 죄를 지었고 이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정말 잘못 되었는데 이런 잘못된 것들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런 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옛 자아) 사형 선고가 내린다.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면서 욕망이 죽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 하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신자의 연합의 진수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은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 아닌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의 모습은 살아난다.
널 보는 이 마다 주 생각 하리~~~~ 이런결론이 나오게 된다.
자신의 지성으로 헌신을 해야 한다. 지성 적인 헌신이 없이는 불가능 하다.
영혼의 어두움은 복음으로 빛이 들어와서 벗겨 진다.
무지는 복음의 교리로 벗겨 진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비칠수 있다.
끈임 없이 지성적으로 헌신해서 진리를 깊이 깨달으려고 해야 한다. 이때 성화의 삶이 진전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