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원(2)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시인이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이 시가 쓰여진 지가 언제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시점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나의 판단으로는 초창기의 시라고는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적과 원수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말고 당신이 노하심으로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왕이 된 이후의 시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늘 승리를 도맡아 놓은 유명한 장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가난하고 억눌리고 빚지고, 이러한 처진 사람들을 목자처럼 돌보며 이스라엘을 세웠기 때문이죠. 누려보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아마 다른 사람 보기에 좀 우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인은 그런 모든 인간의 영화와 부귀를 누리고, 영고성쇠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많은 시련과 고난의 계곡을 지나면서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남아있는 소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 소원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많은 환란은 때로는 고난과 결핍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 안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들이 너무 사랑스러우시지만 이 세상에서 언제나 형통한 것만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적절히 고난과 시련을 주시고 인생을 살면서 늘 돕는 자들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이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실망하게도 하시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가장 아픈 고통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마땅히 유지하고 있어야 할 성도로서의 궁극적인 소원을 저버리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고, 또 일깨우시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좌절과 시련, 고통,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의 각도에서 해석하게 되면 그것은 겉보기에는 쓰라리고 아픈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에 붙어 있지 못하도록 때려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이고, 사실 이런 것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느냐에 여하에 따라서 그래서 해석이 달라지게 되는 거예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그 쓰라림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말도록 일깨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됩니다. 수많은 재물을 누려보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난 직접 계산해 보진 않았어요. 어느 목사님이 금 한 돈에 50000원 할 때 다윗이 건축헌금으로 드린 금이 얼마치일까 그러고 계산을 했는데 30조원이었답니다. 어마어마하죠? 그러면 지금 뭐 20만원까지 치솟았었잖아요. 그러면 뭐 한 120조 정도 되는 돈이니까 좀 많죠. 그래서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그 건축헌금의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니 몇 억 건축헌금을 했다고 거들먹거리는 교인들은 하늘에서 다윗이 보면 얼마나 조족지열처럼 보이겠습니까? 그런 물질도 누려봤지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후궁과 여인들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또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도 한 몸에 받아보았지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쁨도 경험했지요. 이런 모든 인간의 환희를 외칠만한 그런 거를 경험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랬는데 그 모든 인간의 환호성칠 만한 행복을 다 경험한 사람이 마지막에, 마지막에 발견한 소원은 뭐냐 하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이거를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렸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가오는 거죠.
제가 오늘 중요한 것을 하나 가르쳐 드릴께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볼 때 참 아름답죠. 저 오늘 한 10년 만에 쌍무지개를 봤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보셨을 거예요. 그죠? 엄청나게 커다란 제가 보기엔 직경이 한 40km이상 되는 큰 쌍무지개가 그것도 희미한 게 아니라 선명하게 떴습니다. 너무 예쁘죠. 그렇게 예쁜 무지개가 떴을 때, 우리는 ‘야 정말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구나’, ‘참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예쁘구나’ 이런 생각합니까? 안합니까? 해요? 안 해요? 하죠. 근데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모두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묻고 싶겠죠? 그러면 목사님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면 그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도 하나님 정말 아름다우시다 이렇게 찬송할 자격이 없습니까?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걸 보면서 ‘하나님이 참 아름다우시구나’ 이런 생각을 못한다 이거죠. 이럴 순 있죠. ‘야 멋있다. 야 정말 좋다. 야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 산꼭대기에 와서 발 아래 구름이 흘러가는 이 봉우리에 올라와서 보니 야 인간은 티끌같구나’ 그럴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야~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렇게는 노래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 받은 사람들이 숲속에 가서 ‘야~ 흠 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감격하며 주님을 묵상할 때 안 믿는 사람들은 불판 준비하기에 바쁜 거예요. 삼겹살을 구워야 되니까.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러겠죠. ‘목사님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나도 가자마자 불판을 했는데요’. 은혜가 떨어져서 그래요. 또 이렇게 묻겠죠? ‘목사님 그때 저는 정말 기도 많이 하고 은혜 안 떨어졌는데’, 배가 고파서 그래. 그건 배가 고파서. 다양한 요인들이 거기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되는 거냐면 말이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잖아, 동시에 또 누구예요? 구속주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칼빈 선생은 이중의 지식이라고 불렀어요. 이중의 신지식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를 먼저 하시고, 나중에 구속하셨지만 하나님을 알 때에는 구속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죠.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보일 뿐이에요. 알긴 알죠. ‘아, 인간이란 참 하찮은 것이구나. 티끌이구나’. 그런 걸 깨닫게 되죠. 그렇지만 잘 몰라요.
그래서 제일 먼저 복음을 통해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리고 다시 내려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볼 때 이제는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구속주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보았던 찬란한 빛이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가장 빛나는 저 눈부신, 이런 눈부신 빛이지만 그 빛이 퍼져서 사방을 비치는 것처럼 그렇게 그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의 빛깔이 이 자연의 온 우주 속에 묻어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세계 여행은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가야돼. 가가지고 술이나 먹고 주정이나 하는 사람들은 개발의 편자야. 개발의 편자가 뭔지 알아요? 편자는 말발굽에다가 붙이는 쇠덩어리야, 개 발에 그걸 박아서 뭐하겠어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걸 보면서 ‘아름답구나’, 난 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눈물이 나요. 눈부셔요. ‘아 아름답구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거예요. 야 그러면서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거예요. 그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으시다니 하는 거죠.
근데 그런 아름다움이 그 많은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성경의 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대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그게 내 마음에 찍히게 될 때에 그때에 비로소 우리가 오늘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소원, 그게 뭐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무엇하게 하실 것이라? 사모하게 할 것이라’. 그러니까 그 사모하는 것이 아름다움에서 말미암는 다는 것을 3000년 전에 이 시인이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 중 최고의 철학자예요. 근대 그 철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는 철학이었어요. 18세기 이제 유럽에서 옥스퍼드와 캠브릿지를 중심으로 학자들이 이것을 부지런히 탐구를 했어요. 다윗이 다 결론을 내려 준 거예요. 사모함의 원인은 아름다움이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거죠.
그래서 시인의 첫 번째 소원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 소원은 자연스럽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그것이 이 시인의 소원이었는데 이건 두 개가 아니라 사실은 연결되는 한 가지 소원임을 보여 주는 것이에요. 이게 시인이 고난 속에서, 인생의 흥망성쇠 속에서, 번영과 쇠퇴 속에서 사랑과 미움 속에서 터득한 진리였어요. 이것이 시인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왕국을 잃어버려도, 부귀와 영화를 상실해도, 존경과 높은 평판을 차지하지 못할 지라도 그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언약 백성으로서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는 그것이 이 시인이 고난 속에서 발견한 궁극적인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는데 사실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돌아보면 문제가 해결되어서 문제가 풀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니까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나니까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되고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어저께 우리 김복남 전도사님 간증을 12년 전에 듣고 두 번째 들었어요. 그 중에 12년 전에 안한 간증이 그 고등학생 간증이에요. 12년 후에 생겨난 간증인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사고나 나서 휠체어를 타고 나니까, 하반신이 마비가 되었고, 그래서 겨우 시골로 내려갔는데 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온거예요. 그랬는데 엄마는 도망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전도사님이 자기가 절망했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야, 넌 어떻게 인생이 이럴 수 있니? 고등학생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전도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내가 그 얘길 듣는 순간에 야, 그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에 그런 놀라운 힘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젊은 애가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서 인제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또 간암 말기야. 그런데 지 에미, 애비는 도망을 가버려. 그리고 자기는 혼자 고아처럼 버려진거야. 3가지 중에 하나만 일어나도 아이들은 자살을 해 버려. 3가지 다 일어난 거야. 근대 뭐라고 그래요? 전도사님 너무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지켜주실 겁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그 얼마나 놀라워. 그렇게 해가지고 그렇게 좋은 대학교 들어가고, 사법고시도 합격하고, 완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만약에 몰랐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장 죽어버리지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부모도 자기를 버렸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풀려서 해결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올바로 알면 거기서 그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다윗이 그걸 경험한 사람이었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모반을 꽤했어요. 맞닥뜨렸으면 그 놈은 지 애비를 죽이고도 남았을 놈이에요. 근대 다행히 도망을 갔죠. 도망가는 길에 옛날 같았으면 쪽도 못쓰던 인간들이 다윗을 보라는 듯이 욕하기 시작했어요. 막 욕하기 시작했어요.
오늘도 칼빈에 대해서 좀 읽다 보니까 그 칼빈 목사가 말이죠. 제내바에서 그렇게 자기 적성에도 잘 안 맞는 일이었거든요. 그냥 조용히 앉아서 선비처럼 책이나 읽을 사람이었는데 그 역사의 격변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고 외치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계획을 할 수 있었죠. 아무도 은혜를 안 받으면 금방 죽여버리지. 그런데 한쪽에서 회심 안하는 교인들, 그 나쁜 놈들이 말이지 그렇게 외치고, 그렇게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몇 년 동안 사례비도 못 받았어요. 그리고 가서 그 가난과 싸우면서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고. 그리고 우리 생각에는 여러분 칼빈이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썼을 거 같죠. 엄청나게 병자들을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다니고 목회하면서는 수없이 그렇게 교인들과 함께 쉴 틈 없이 그렇게 하면서도 또 그 수많은 사람들과 신학적인 논쟁을 하면서 그러고 다녔어요. 그러고 다닐 때 칼빈이 그렇게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칼빈 개 새끼 말이지 그 새끼 나오라고 말이지’ 교인들이 그러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런 거를 다 했는데 그 사람이 주장한 것이 뭐냐 하면 이거예요. ‘우리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의 큰 주권 속에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일들은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일어나는 일이다. 나의 소망이 오직 주께 있사오니’ 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막 볼쉑같은 그런 인간들은 돌아다니면서 책을 써가지고 칼빈이 여자만 보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색광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자를 꿰차고 동성연애질을 하는 새끼다 이렇게 책을 써가지고 온 유럽에다가 뿌린 거예요. 그런 지독한 속에서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어때요? 현실은 그렇게 요동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비추니까 그 고난을 통해서는 이 세상에 정두지 않고 주님을 붙들고 평온한 환경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렇게 사랑하고 교회를 이끄신다라고 하는 믿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더 붙들고 살게 해 주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러나 만약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그 참된 지식의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해서 주님을 떠날 것이고, 순조로운 환경 속에서는 자기의 힘으로 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고 성공했다고 주님을 버리지 않겠어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고 복을 주셨기 때문에 교만해져서 하나님 앞에 미끄러진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시련을 주었더니 시련 때문에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는커녕 하나님을 원망하고 식었던 마음이 더 딱딱하게 굳어진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시인이 결국 우리 성도로서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 하나님의 지식의 빛, 곧 하나님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싶습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면서 노래했죠.
(찬양)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노래해요. 그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나같은 인간 보고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라고 부르신 그 자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그걸 깨닫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아무 손해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 하실 때 이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일 수가 없고 오히려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의 많은 의무들이 있잖아요. 그 의무의 껍데기를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이것도 본질 적이지 않으니까 벗겨버리고 벗겨 버리고 벗겨 버리고 이렇게 들어갈 때 마지막에 더 이상은 벗길 수 없는 마지막 핵이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성도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하나만 남는 거예요. 그것은 더 이상 벗겨낼 수가 없는 것이에요.
수많은 의무의 껍질이 껍질에 쌓여있어도 다 벗겼는데 마지막에 하나님 사랑하는 그 핵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건 다 생명이 없는 가짜 껍질이에요. 그런데 무슨 껍질이든지 벗겨 들어가서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이 나올 때 그것이 참된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뭐겠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그 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시련을 고난을 때로는 기회를 때로는 형통함을 하나님이 당하게 해 주시고 그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III 여호와의 집에서
그런데 이 시인이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있어요. 그런 소원을, 어디에서 그런 소원을 갖고 싶다는 거예요? ‘그 전에서’ 그게 누구의 집이에요? 여호와의 집에서 소원을 갖고 싶다. 이거는 이제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선 첫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집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성도의 언약 백성인 성도로서의 마지막 소원을 이룰 수 있게끔 교회가 이바지하려면 교회는 이 시인에게 하나님의 집은 이 시인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어야 했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궁금해지겠죠. 뭐가 궁금해질까요? 지금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큰 건물도 있고 어마어마하게 예쁜 교회당 많잖아요. 그죠? 요즘은 정말 교회도 잘 져요. 건축이 발달해서 그런지 옛날에는 사과 궤짝처럼 지어놨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제가 건물 이렇게 볼 때 웬만한 건물을 예쁘다고 안하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사람하고 건물에 대해서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는 항상 못생겼다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 저 건물은 정말 예쁘다. 참 예쁘다. 저 지은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게 하게 하는 건물들이 이제 가끔씩 우리나라에도 나오더라구요. 근대 교회도 그러니까 참 예쁘게 지어요.
근대 그것은 다윗 시대 때에는 그런 교회가 없었어요.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도 안 지어졌잖아요. 성전은 그 아들 솔로몬 때 지어지거든요. 건축 헌금은 모아놨지만 아직 공사를 시작을 못했어요.. 허락이 안 떨어져서 그럼 그때 뭐했죠? 성막이에요. 성막은 가장 자리가 광목같은 천으로 에워싸여져 있고, 그쪽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에 성막 뜰이 나오고 그 다음에 번제단이 있고 그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이제 성소가 나오는데 12평은 성소고, 6평은 대제사장만 들어가는 지성소예요. 근대 그 지붕이 뭐냐 하면 물돼지 가죽이에요. 가죽을 엎어 놨으니까 그게 한번 쓰고 그걸 버리는 게 아니라 계속 텐트처럼 쳤잖아요. 그러니까 햇빛에 그을르고 비 맞고 또 마르고 이러면서 그 긴 세월이 흐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게 마치 오래 끌고 다닌 가죽가방같이 그렇게 틱틱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이 노래하기를 ‘내가 개발의 장막과 같이 검으나’ 멀리서 보면 그 성전은 전혀 화려한 성전이 아니고 아름다울 수가 없지요. 성막은. 속에 들어가면 이제 아름다워요.
그러면 이 시인은 그 성소에 가서 자주 제사를 지내잖아요. 그럼 내가 한번 물어봅시다. 다윗이 한 나라의 임금인데 지가 사는 왕궁이 화려하겠어요? 아니면 성막이 화려했겠어요? 왕궁이 화려했겠죠. 그건 건축물인데 이건 텐트고 그러면 이 사람이 거기에 가서 발견한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어떻게 발견했겠어요? 그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일 큰 일이 무엇이었죠? 그렇지. 여러분 정말 정확하게 얘기했어요. 제사예요. 그러면 그 제사를 통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거야.
그러면 그 제사를 통해서 무슨 아름다음을 발견했을까? 그 대답을 왜 못해요 그래? 자, 아니 연상을 해봐. 여러분들 구약 시대로 돌아갔다고 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제사를 드리러 갈 때 어떻게 하죠? 집에서 기르던 양 한 마리 품에 안고 제사 드리러 갈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제 그것을 갖다 놓고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제사장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되죠. 제사장이 기도해 주면서 여러분들의 죄를 양에게 옮기는 거예요. 그때 양이 이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그게 막 피투성이가 되면서 그러면서 거기에서 죽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여러분들은 뭘 깨닫게 되겠어요?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깨닫게 되잖아요. 결국 그것이 껍질이 벗겨지고 사지가 갈라지기 시작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그렇게 자기를 따르던 양이 갈갈이 찢겨지면서 그러면서 번죄단에서 불붙게 되는 거예요. 냄새를 내면서 막 연기가 타올라 가는 거예요. 기름을 태우잖아요. 타 올라가잖아요. 그 속에서 뭘 배우게 되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그 속에서 배우게 되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그래서 뭘 발견하게 되요? 자기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요.
그러니까 공의는 공의대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대로 아름답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은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대로 아름답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는 영원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예요. 그 빛이 확 품어져 나오는 그게 뭐냐면 눈으로 보이는 이런 천장이나 바닥이나 거기에 갖다놓은 금빛나는 도구나 이런 것들 때문에 화려해 지는 게 아니라 뭘 통해서 그 속에서 제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성품의 다양한 빛깔이 있지만 그 다양한 빛깔 하나하나가 너무 너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이에요. 너무 너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이에요. 그걸 보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 그 성소 말고 성막 말고 어디에 그런 정도의 찬란한 빛을 비쳐주는 곳이 있겠는지 생각을 해 보라는 얘기에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되요?
그럼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교회는 회사가 아니에요. 직장이 아니에요. 기업체가 아니에요. 복음을 파는 상점이 아니에요. 성공을 파는 A/S센터가 아니에요. 백화점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야 멋있다, 야 크다, 야 예쁘다, 야, 기가막히다, 야 비싸겠다 이런 것을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보여줘야 될 것은 뭐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때는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제사 안 지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영원히 자기를 드려 제물을 삼으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잘 보여줌으로 그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형형색색의 찬란한 하나님의 성품의 빛깔들이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서 ‘아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우시구나’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는 얘기에요.
그래서 그것이 그 빛이 너무 강렬하고 찬란해서 더 이상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전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도록 그렇게 사랑하게 아름다움을 알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그것이 교회의 영적인 특성이라는 거예요.
사람의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부러 폭탄맞은 머리를 하고 교회에 나올 일 있어? 일부러 수염을 기르고 예배 시간이 등장할 이유가 있냐고 산에서 내려온 것도 아닌데 일평생 세수 안하는 것이 경건의 표징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잘 닦아야지, 잘 닦고 본판이야 어쩔 수 없지만 세수도 늘 하고 머리도 좀 이렇게 가다듬고 뭐 좀 바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변장의 수준 아니더라도 단장해서 자기를 올바로 보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도 교회도 더러우면 색칠하고 풀이 자라면 뽑아주고 그렇게 예쁘게 단장하죠. 그러나 그걸 보면서 감탄하게 하는게 목표는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보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교회에서 보여줄 수 있게끔 그렇게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것이에요. 이걸 여기서 보여주는 거예요.
시인이 그 성막에서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을 본 거예요. 아멘. 그럼 여러분 적용을 해 보세요. 여러분 어디 결론은 났잖아요. 결국 우리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수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비춰야 되는데 어디에 그게 있는냐는 거예요. 그래서 유행가 가사도 있었잖아요.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언제나 공허한 것 뿐이네. 무엇을 할까, 돌아보아도 보이는 것 아무것도 없고 웬 고래 그래서 고래 잡으러 간다’고 하잖아요. 고래는 안 잡히고 요새는 상어가 그렇게 많이 잡힌대. 바닷가 조심하세요. 천 kg짜리 상어가 두개가 발견이 됐어요. 서해 바다에서. 한번 걸리면 그냥 가는 거예요. 황소 두 마리 무게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게 인생에 있어서 그게 행복일 수 없고 해결 될 수 없고 어디에 가서 미친 듯이 놀아본 들 영혼의 빈 잔을 채울 수 있겠어요? 없어요. 실험해 보세요. 없습니다. 저는 회심하기 이전에도 술 거의 안 먹었지만 너무 화가 나고 괴로운 날이면 먹었는데 그게 먹으면 잊어버려지는 게 아니라 슬픈 일이 더 많이 생각이 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이를 악 물어요. 다시 술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머리가 터지는 거 같아요. 그게 인생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어떻게 해결되겠어요? 진통제일 뿐이지 어떻게 해결이 되겠어요? 해결이 안됩니다. 오직 해결은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실 때 우리의 역경, 우리의 순경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의미를 알게 해 주시는 것이죠. 교회가 이런 것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가장 그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아멘
저희 교회 한참 교회 나오시다가 하나님 부름 받고 가신 안세흔 장로님 생각이 났어요. 이 분이 여러 나라 대사도 지내시고 하시다가 우리 교회 오셔서 말씀의 은혜를 아주 많이 받으셨어요. 봉사도 많이 하시고 신문에도 자주 나오시고 했는데, 어느 날 암으로 돌아가실 때가 됐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심방을 가서 장로님 손을 꼭 붙들고 기도를 하는데 장로님 그러셔요. 내가 그랬어요. ‘장로님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 성찬 집례 해야죠’ 그랬어요. ‘목사님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자기 깨어짐도 2/3 읽다가 덮었는데 그것도 마저 읽어야 되는데, 매일 예배당에 오셔서, 기도 하시고, 퓨리탄 라리브러리에 가셔서 경건 서적을 읽으시고, 그 연세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영어 원서로 모두 읽으시고 그 기념으로 이 도서관에다 기증을 하시고, 어느 날은 만났는데 자기 요새 책 읽는 재미로 산다고 젊어서 너무 바빠서 경건 서적, 이 좋은 책들도 잘 못 읽었는데 요새 책 읽는 재미로 산다고. 하나님의 집에 가까이 있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접하며 살 수 있다는 이 성도의 행복을 그걸 오늘 본문은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시인이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고 싶습니다’ 노래했던 거예요. 마지막 두 번째가 뭘까요?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공동체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혼자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알아. 우리에게 ‘아, 그래 맞아, 예수 잘 믿어야지’ 하는 강한 도전을 받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이렇게 설교를 할 때 은혜를 받아도 그게 느껴지지만 이 설교를 해도 마음이 (???) 될 때 옆에서 나보다 더 형편없이 교회에 끌려나오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감동 받으면서 열렬하게 주님을 믿으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고 그래서 부끄러움에 떨게 되잖아요. 그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나한테만 저 설악산 꼭대기에서 알려 주시는 게 아니고, 교회에서 보여주심으로써 내가 아는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오늘은 이 지체에게 내일은 이 지체에게, 내가 오늘 그것을 알 때 나뿐이 아니라 저 지체,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고 가면 은혜 받은 성도들끼리 눈길이 마주칠 때 따뜻한 미소를 보낼 때 말은 없어도 소리로는 조용하나 마음으로는 소리치는 그런 은혜의 정서의 교류가 일어나는 거예요. 소리로는 조용하나 마음으로는 소리치는 그런 은혜의 정서의 교통이 일어나요. 그걸 보면서 어떻게 되요? 아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지체를 사랑하시는 구나. 그 속에서 참 존귀하구나 이거를 느끼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불러주신 언약의 한 지체로서 그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아주 뜨겁게 와 닿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 사랑하고 싶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살아계심을 전쟁터에서 보여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전쟁터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왕궁에서 보여주셨어요. 왜 아름답고 편안한 왕궁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의 수많은 정치가로서의 일생을 통해서 시시때때로 보여주셨어요. 근대도 왜 거기가 아니었을까요? 다른 사람이 와서 보면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거무틱틱한 가죽 속에 덮어 씌워진 그 보잘것 없는 여호와의 집에서 거기서 하나님을 사모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만큼 지체들의 영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 아름다움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지체들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니까 동일한 사랑으로 그 지체들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너무 많은 욕망을 버려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어제 김복남 전도사님 강의한 것 들으면서 그렇게 성경 한 장을 넘기기 위해서 뺨을 부비고, 온 몸에 마비가 와서 혀끝에 침을 뭍혀서 미친 듯이 구르면서 한 장을 간신히 넘기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어요?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누리게 하셨고 만약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잖아요. 욕심을 버려요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먼저 감사해보세요. 그냥 무조건 입 열자마자 감사합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원을 아뢰세요.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그러면서 매일매일 변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 분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