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리즈 1
예배란 무엇인가 ②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여러분 저의 이 질문을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십니까? 오늘도 드려진 이 모든 예배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고 계십니까? 나아가서 묻습니다. 주님이 그 예배가운데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표적이 있습니까? 저는 지금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심각한 상처에 한 가운데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것을 여러분은 영원히 잊지 말고 상기하셔야 됩니다. 예배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중요한 것은 기념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으면 그 기념도 감사도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이신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우리의 인생이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는 곳, 그곳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에요? 급한 일이 있어서 예배에 늦는 일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주 계속된다면 그 심령 속에 깊은 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나 피곤하고 곤하면 예배시간에 졸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만 졸겠습니까? 베드로는 사형선고를 받고 옥 속에서도 잤습니다. 뭐 믿음이 있어서 잤겠지만 피곤하면 졸수도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매 예배시간마다 계속된다면 그것은 깊은 병이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눈을 떠야 되요. 살아있는 생명이 생생하게 자기의 영혼 속에 하나님과 교류하고 있다면, 그런 예배라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왁자지껄 모이고 정해진 시간에 예배가 끝나고 우르르 쏟아져 나갈 때 ‘아 예배가 끝나구나!’라고 해방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까? 예배가 견디기 어려운 무거운 의무와 짐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깊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병들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성도들이 병들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결코 교회는 예배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우리가 주님이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예배를 통해서 떠오르고 그것을 기억하게 되고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예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기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도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예배의 목표는 아닌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생생한 만남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생생한 만남이 없을 때 예배는 어떻게 됩니까? 형식은 갖춰져 있지만 그러나 차갑고 침묵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절차는 복잡하나 사람들의 마음은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성가대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음악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예배 속에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설교자가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예배의 순서가 정통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장악하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권능가운데 예배가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권능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예배가 드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시는 예배가 될 때에 사람은 시간관념이 사라져 버립니다. 초대교회 때에 보면 초대교회 부흥사 가운데 어떤 목사님은 주일예배 가운데 11시 예배를 드리는데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목회기도를 하는데 목회기도가 끝나니까 3시 반이에요. 4시간이 흘렀어요. 그런데 성도들은 40분이 흐른 것 같았어요. 4시간을 기도하고 나서 7시간 설교했으니까 예배가 몇 시에 끝났어요?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왜 1시간 안에 끝나는 예배가 왜 그렇게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엉덩이에서 좀이 쑤십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애인과 꿈에도 그리다가 만났는데 30분 만났는데 엉덩이에 좀이 쑤시고 몸이 비비 틀려요? 뭔가 두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그 자리에 임재 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 시간이 아니라 30분도 길고 20분도 긴 것이에요.
그래서 요즘에 뭐라고 그래요? 예배는 간단히, 찬양은 힘차게, 기도는 뜨겁게, 예배를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도 어때요? 무엇을 하든지 꼭 예배를 해야지만 된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제직회! 그것을 하면 되는 것이지…….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서 무슨 또 묵도, 찬송, 기도, 축도까지 하고 예배를 드려야 됩니까? 무슨 생각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에요? 예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이 예배시간에 복을 안주시고 예배를 안 드리면 뭔가 빠진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예배는 진실로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 때에 모든 것은 타파되고 사라져요. 그래서 집회에 나가서도 말씀을 전할 때에 거기에 들어와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세 시간을 설교했는데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러죠. 그러나 지겨운 사람은 어때요? 지긋지긋한 것이죠. 시계가 안 가는 것이죠.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는 생기 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에요.
보십시오. 오늘 주님은 예배의 요소가운데 또 하나를 들고 계십니다. 진정이라는 것입니다. 진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진심-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알레데이아’ 진리예요. 진리…….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어떻게?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또 어떻게?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두 예배가 아니라 한 예배에 두 요소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에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하나의 예배에요.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인데 in 뒤에 나오는 것은 두 개란 말이에요. 이것이 뭐에요? 영과 진리에요. 영에 대해서는 말씀드렸고 오늘은 진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가하면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그러니 어때요? 만약에 이렇게 아니라 저렇게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안 찾으시는 것에요. 좀 냉정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따라서 예배 방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헌금을 먼저 할까? 뒤로 할까? 성경봉독을 앞에 하고 찬송을 한 장 부를까? 말까? 주기도문으로 끝날까? 축도로 끝날까? 아니면 맨 앞에 일어서서 찬송을 부를까? 앉아서 부를까?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찾고 안 찾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이 안 찾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는 예배의 현장은 어때요? 싸늘한 적막이 감도는 에스골 골짜기와 같죠.
그럼 또 하나는 무엇이에요? 그런 순서를 가지고 안 찾지는 않는데 그것이 무엇이에요.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면 안 찾으신다는 것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높이 눈을 떠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구약에 호소해서는 안돼요. 이것을 먼저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와 그 의식에 호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어요. 그러니까 예배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과 특별히 지금은 교회니까 초대 교회시대를 중심으로 해서 찾아나가야 되요.
그들 중에 말씀을 맡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사도였어요. 후에 장로들이 생겨나고 목사가 생겨나고 교사가 생겨났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예배로 모였습니다. 예배로 모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모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것이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었습니까? 전혀 모르는 것이었어요. 무엇을 몰라요? 구약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약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그리고 하늘로 휙 가버리셨어요.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초대 교회 교인들 중에 극소수에 불과했어요. 그러니까 어때요? 만약에 사도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도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부활하셨으며, 죽으신 것과 부활이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어떻게 되며, 그분을 믿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며, 복음전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아무도 가르쳐줄 사람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사도들의 발 앞에 모였겠어요? 무엇을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에요. 이것이 예배의 이유였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그렇게 모였을 때는 진리의 말씀이 그들에게 가르쳐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할 적마다 ‘아! 그리스도가 그래서 죽으셨구나!’ ‘아! 그리스도가 그래서 살아나셨구나!’ ‘아! 그러므로 우리도 다시 사는구나!’ ‘아!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회개해야 되는구나!’ ‘아!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전해져야 되는구나!’ 이렇게 매 순간마다 깨닫게 되었던 것이에요. 무엇 안에서? 진리 안에서…….
그런데 이게 교회의 시대가 흘러가면서 말씀의 선포가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예배의 중심자리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자리를 지탱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배가 어떻게 되요? 점점 즐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가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면서 같이 회중이 찬양을 부르는 것이 가장 기본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우리는 낼 수 없는 고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 구라파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이 성가대가 생겨나고, 전문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순서를 막 복잡하게 짜고 하나하나를 시간을 배정을 해가지고 쫙 짜서 그 틀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이러면서 이제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니까 그것을 지키면서 예배드리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러나 부흥이 올 때마다 여지없이 그것은 산산이 부서졌어요. 다 같이 기도합시다. 성령이 놀랍게 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쏟아놓는데 누구도 그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어요. 무너지지요. 말씀을 선포하는데 하나님이 진리를 설교하는 설교자를 강하게 사로잡으셔서 말씀의 선포를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붓게 만드셨어요. 설교시간이 4시간이 넘어갔어요. 모든 순서는 무너지지요. 중요한 요소는 예배가운데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없으면 눈물도 의미가 없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치우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닫는 것이 없으면 눈물도 의미가 없고 부르짖음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시간마다 우리는 뜨거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냉랭하고 차디찼던 우리의 마음이 예배 시간을 통해 뜨거워져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도 한없이 자신만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자기의 가는 길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 어디입니까? 어디입니까?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깨닫는 것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회개가 일어나겠습니까? 무엇인지도 모르는 진리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여러분 사람을 믿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와서 그릇가고 있는 여러분의 삶을 책망하고, 교훈하고, 의로 교육하고, 바르게 뜯어 고쳐야지만 우리는 비로써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합니까? 진리 이외에는 그것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로되 그 중에 가장 중심자리에 와야 될 시간은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를 갖고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고, 기도하고 그리고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까? 참다운 회개는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개는 필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에요……. 찬송을 부를 때도 눈에 생기가 돌고, 다 눈에 생기가 도는데 말씀을 전할 때만 눈이 불안해서 초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그 사람의 눈동자처럼 초점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하나 그러나 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찬송 부를 때에 막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전할 때는 계속 자고, 그러다가 또 기도 합시다! 하면 눈물을 흘리는데 무엇 때문에 우는지 본인도 몰라요……. 깨닫는 것이에요. 깨닫는 것이 예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되요. 보십시오. 깨닫게 될 때에 우리 마음의 변화에 시작이 주어집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때에 어때요? 드리는 찬양이? 이전에는 입술로 불렀는데 이제는 어때요? 심령의 찬양이 되는 것이에요. 다 드려지는 것이에요.
아침의 이야기하고 접목을 시켜볼까요? 다윗이 뭐라고 그래요? ‘내 입이 붙었나이다.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목소리가 사라졌나이다. 나에게 노래를 돌려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그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주님이 만나주셔서 다윗아 너는 비록 범죄 하였으나 내가 너를 용서하고 왕이면서도 만조백관이 보는 앞에서 왕관을 내어던지고 제위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는 너의 그 상한 마음을 내가 보았고 내가 너를 치유하노라. 그 때 어떻게 되겠어요? 닫혔던 입술이 열리고 사라졌던 목소리는 돌아왔어요. 심령의 줄이 끊어졌던 화연들은 새롭게 줄이 수리되고 아름다운 곡조가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 올라와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찬양이 되는 것이죠. 믿으면 아멘! 해보세요. 믿습니까? 바로 이해를 해야 되요. 바로 이해를…….
치유된 것이 치유된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마음의 치유는, 감정의 치유는 노래를 가지고도 될 수 있고,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도 될 수 있고, 사람들이 와서 여러분의 등을 두드려줘도 마음의 치유가 될 수 있어요. 참된 심령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이에요. 무엇을 통해서? 진리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이 전해지는 이 순간에 설교자는 진리를 순전하게 설교하지 못하면 그는 교회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이에요. 그러나 순전하게 진리를 말하고 그리고 예배 가운데 성도들이 마음속에 진리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다 한 것이에요. 그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요. 무엇을 바랍니까? 그 목회자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합니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요.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설교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얼마나 부담을 가지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지난번에 들었으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진리 앞으로 나아옵니까?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가난한 마음으로 그 어린아이가 눈을 감은 채 어머니의 품을 더듬고 젖을 무는 것처럼 그런 사모함으로 말씀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전하는 자와 받는 모든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가져야할 태도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없으면 그의 인생은 영원히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파에 쓸려서 세상이 미는 대로 밀리고 끄는 대로 끌리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어두운 잠을 자고 그리고 깨어난 것 같으나 자고, 자는 것 같으나 꿈을 꾸며, 그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예배가운데 생생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보셨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른 새벽서부터 예배당 문 앞에 와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열려진 문으로 들어와서 강대아래 엎드려서 오늘도 주님께서 이 강단위에 하나님의 성령의 진리의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시기를 목 놓아 부르짖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은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주위에서 수많은 교회에 집회를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데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가는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예배가 사라진 삶입니다. 예배가 사라진 삶…….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상한심령이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시간에 상한 심령이 아닌 사람들이 어디 가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상한 심령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선명한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과 그것으로 말미암는 깊은 깨달음은 한 시간의 예배가 그 사람 인생 전체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도 그런 간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몇 분이 있습니다. 생생하게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생생한 진리를 사모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들로 나아오고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그들이 생생히 하나님과 만날 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이 다 압니다. 성경에 있는데 왜 모르겠어요. 복음을 전해야 할지를 깨닫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바라지 않아도 그들은 가슴을 치며 예배당에 나아와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과 찢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을 인하여 애통하며 주께서 원수들과 더불어 싸우시고, 노도와 같이 다가오는 대적들을 꺾으시고, 주위에 승리의 깃발을 세우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만방에 높이 들려주시기를 사모하며 부르짖지 아니할 수 없는 사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서야할 참된 이유인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예배가 끝난 후에 모든 교인이 흩어진 이후에 휑하게 자리가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흐느껴 울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사람들은 이 예배로 만족했는데 주님도 만족하셨습니까?’ 위로도 없고, 평화도 없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도 없는 이 예배 이것은 죽은 영혼들이 모여서 드리는 ‘사의 찬미’인 것입니다. 그러한 살아있는 생생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진리로써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여러분 마지막 거둬들이는 것은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오늘도 설교를 들은 그 진리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오는가? 그리고 예배는 끝나고 성도들은 흩어졌어도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서 나로 하여금 ‘너는 이리로 오라, 이것을 따라 살라, 이것을 위해서 살라.’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린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진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혼미한 안개 속을 거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소망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육신을 푹 쉬고 주일날은 와서 완전히 유쾌한 마음과 그리고 온전히 자기를 다 기울일 수 있는 정신으로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니까 여러분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이 기도시간마다 빼어놓아서는 안 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인 것입니다……. 나는 예배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여러분 왜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던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까? 왜 그랬습니까? 성전이 없어서입니까? 제사가 없어서입니까? 율법 책이 없어서입니까? 선지자의 음성이 없어서입니까?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무엇이 없었습니까? 신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다운 예배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그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에게 예배를 하고 어떻게 예배를 해야 할지 이제는 우리에게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던 것이에요. 뭐에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라 나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에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이 예배는 단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예배는 단순해야 됩니다. 그리고 소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예배의 특징인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꿨으면서도 지금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불륜의 관계에 있는 이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말씀하시다가 예배를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런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어요. 분명해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될 때에 비로써 주일이 거룩해지는 것이에요. 주일날 다른 일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에요. 왜? 그 시간을 너무나 사모하고 그 시간이 너무나 그리워지기 때문에……. 이것의 개혁이 없고서는 다른 모든 곳의 개혁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 그래요? 그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순서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모일 때에 그런 예배가 그런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그런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어서 주님이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은 그 설교를 통해서 이 험악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모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진중에서 불기둥을 모두 볼 수 있었고 어린소자라도 그 구름기둥을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고, 분명하고, 소박하고, 정직하고, 명료하고, 정확한 언어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요,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하리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바와 마찬 자기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깨달음을 통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 제법 주일학교 부흥사를 했습니다. 애들을 지하 기도실에 모아놓고 기도를 시키는데 그때는 내가 신앙부흥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저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세칭 뭐 아주 유명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자그마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무튼 복음의 대해서 확신을 깊이 갖게 된 것을 감사해요. 그래 뭐 24살에 총각집사가 되어가지고 뭐 아는 것이 쥐뿔이나 있겠어요? 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항상 설교시간에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그날도 이제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애들이 ‘다 같이 기도합시다.’하면 초등학교 1,2,3,4학년 이런 애들이 고난주간에 모였는데 말이에요. 고난주간에 자기네들이 금식을 하고 그래요.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눈물 바다인거에요. 울면서 하나님 앞에 꼭 도토리만한 주먹을 가지고 가슴이 칠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가슴을 쳐가면서 ‘하나님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 놀랍지요. 그런데 옆에 있는 애가 초등학교 1학년밖에 안되었는데 막 울어요. ‘아! 1학년인데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가 보다.’ 끝나고 나서 간식을 하면서 ‘야! 너 왜 울었니?’ ‘옆에 형도 울고, 그 옆에 언니도 울고 ,그 뒤에 친구도 우는데 나는 눈물이 안 나왔어요. 그게 억울해서 울었어요.’
참된 눈물은 참된 깨달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교묘한지 보세요. 이 지점에서……. 소위 은혜 체험을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져요. 돌멩이 같이 된다고요.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그게 잘못된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요. 뭐에요? 은사를 받았다, 회개를 했다, 눈물을 흘렸다, 나도 왕년에 다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을 못 잡아 주더라. 그거지요. 그것은 왜 그래요? 눈물을 흘리고……. 언제나 말씀하지만 이 불을 끄고 15분만 지나면 여러분을 다 울릴 수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우는 것은 눈물을 닦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엇이 여기에 남아요? 눈물이 지워지면 아무것도 안 남아요. 그런 식으로 체험을 가진 것을 하나님과 만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에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우는 사람들을 보면 가소롭다는 것이죠. 그 영혼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변화가 될 수 있겠어요?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자고해져서 더 소망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그러나 어때요? 깨닫는 것이 있을 때 그 진리의 말씀으로 깊이 깨닫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사로잡혀서 몸부림치며 회개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한다고요. 그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내 인생을 얼마나 놀랍게 바꿔 놓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이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때요? 그것이 없으면 정말 내일 넘어질 사람들이 일 년, 이년, 삼년, 사년, 혹은 일평생을 변함없이 살아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보세요. 부흥회를 하고 그러다가 열광을 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난리를 치는데 왜 그놈의 신앙이 6개월을 못가고 다 도망을 가요? 왜 그래요? 참된 진리와의 만남이 없기 때문이에요. 참된 진리와의 만남이 그에게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해주실 때,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이 영원히 나를 사로잡는 것이에요. 제가 말씀드렸죠. 성경을 읽다가 5년 6년 전에 읽다가 내 인생이 커다랗게 바뀐 그 말씀이 지금도 기도의 제목이 되고 설교의 제목이 되어요. 지금도 다시 본문을 피고 다시 설교하기 시작하면 지금도 다시금 생생하게 다 살아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깨닫는 것이 없는 예배 그리고 깨달음에 집중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 이 모든 것들은 전부다 허망하고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를 파고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해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일주일이 지나도 성경 10장을 못 읽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보고 냄비를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프라이팬을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밥통을 줄 테니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도 안 읽으니까 그렇게라도 읽혀야 되겠지요. 그러나 무엇이에요? 저는 분명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어느 순간에 가슴이 열리면서 진리의 빛에 비췸을 받고 ‘아! 말씀의 세계가 이렇게 즐겁고, 이렇게 놀랍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하고 깨달을 때에 그는 성경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어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사모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읽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비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집중된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되든지 모든 인생의 소망이 예배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참된 변화로 가는 길인 것이에요. 우리는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야 되는 것이에요. 원리가 잘못되면 목표가 아무리 훌륭해도 목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끊임없이 예배 속에서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은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번째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면 그 예배를 통해서 주어지는 진리의 말씀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결코 그런 시간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을 기대하면서 예배에 나온다면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확인도장을 찍어주는 시간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자기의 삶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나아오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주여 내 생각이 옳음을 오늘도 확인시켜 주소서’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 일평생 내가 붙들고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돌이킬 수 없으면 하나님 차라리 나를 징계하셔서라도 내가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고쳐주시옵소서.’ 집회에 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범답안을 만들어가지고 와서……. 내가 소망이 없다고 그랬어요. 예수를 몇 년이나 믿고 하나님을 얼마나 만났다고 인생들이 그 속에 뭐 든 게 있겠어요? 모범답안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설교하면 그것 밑에다가 맞춰보고 있는 인생들…….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는 설교자를 가소롭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을 가소롭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모든 백성들이 땅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쉐마-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을지어다.’ 모든 백성들은 부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여 당신의 백성이 여기에 있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우리가 듣겠나이다. 우리가 청종하겠나이다.’ 이것이 진리를 대하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얼마나 잘못된 태도로 우리에게 붙어있는지 모릅니다. 마치 바닷가에 가면 그 울퉁불퉁한 시커먼 바위에 손으로 아무리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굴 딱지들, 조개껍질들이 달라붙어있는 것처럼 그렇게 달라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려고 덤벼들면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고통이 자기에게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버려야지만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든지 고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태도는 그 예배를 이미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무슨 말씀을 주실 때에 ‘우리가 돌이켜야 하리라.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고야 말리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복하며 ‘주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겠나이까? 하명 하시옵소서.’ 이런 태도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마음과 성의를 다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주는 도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온 자는 그 진리의 말씀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길러보셨지요.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강아지처럼 눈도 못 뜨고 그럽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어때요. 그 뜨지도 못하는 눈을 감고 엄마가 품에 안으면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본능적으로 젖가슴을 더듬으면서 머리를 흔듭니다. 무엇을 찾아서? 젖꼭지를 향해서……. 젖을 찾아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라고 베드로사도는 우리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더욱 더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배에 나오는 자세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할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심령이 병들면 이런 그리움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에요? 세상에 아무리 좋은 약,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입맛이 가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입맛이 회복되기 위해서 참회와 변화가 있어야 되요. 그것도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이 예배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살고 죽는 진리의 말씀을 받는 시간이니까 예배시간은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가볍고 웃기는 시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심각합니다. 왜? 언제나 죽는 것과 사는 것의 그 기로에서 우리가 인도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참된 것과 거짓된 것과 오류와 진실 그 사이에서 참 길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초가 놓여있고 오해와 그리고 여러 가지 잘못된 편견과 그릇된 견해가 있는 속에서 참 길로 인도하여 가는 과정이 진리가 말해지고 진리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예배는 진리와 참된 성령이 함께 만나 우리 가운데 장엄하게 역사하실 때에 그것이 곧 우리 속에 엄청난 회개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설교자는 예배가 끝나기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마음으로 설교단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예배시간마다 부흥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흥이 언제든지 예배를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확신과 기대 속에서 소망가운데 오르고 내려가고 여러분들은 듣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배를 향한 하나님의 참다운 성도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오류와 안개와 같은 것에 싸여있던 이 여인이 예수께로부터 예배드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는 어때요.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증거 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평생토록 신령과 진정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를 사모하며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이 문제가 아니고 그리심 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산이 문제가 아니고 저 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메마른 시대에서 이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붙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에 가장 가운데 자리에 예배가 오게 하십시오. 예배가 오게 하십시오. 예배의 가장 중심자리에 하나님의 진리가 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예배가 하나님 앞에 영 안에서 드려지도록 하나님 앞에 쉼 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번제와 수양을 끌고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고 할지라도 가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이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 끌고 간 그 소와 거기에 모여서 공교한 순서를 따라 하나님 앞에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 예배가 드려지고 주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을 때에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변하는 것입니다. 메말랐던 삶에 주님이 오심으로 꽃피고, 새 울고,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무지개가 뜨고, 새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나비와 벌이 날아다니고, 향기가 진동하고, 그 숲이 여러분의 참된 안식과 기쁨이 깃든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뭐 장로 시켜주고, 권사 시켜준다고 교회를 다 사랑하는 것……. 다 가짜에요. 주님 앞에 드려지는 이 예배가 너무 거룩하고 진실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게 하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 사람을 보았어요. 하나님이 정말 놀랍게 변화시켜주실 때에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저는요 하루에 몇 번씩 -너 교회에 나오지 마! 그러는 꿈을 꾸는데 그때마다 교회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막 눈물을 흘리며 한번만 붙여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많이 꿨어요.’ 그렇게 될 때에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변화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한 기도제목 두 가지를 찾았지요? 무엇입니까? ‘하나님 우리의 예배가 에스골 골짜기의 죽은 자와 같은 예배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공교한 제사가 아니라, 정말 열린 하늘 아래서 열어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시옵소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해 곤고한 심령이 되는 사람들이 이 예배 속에서 사죄함을 얻게 하시고 그리고 시련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이 속에서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에 붙잡혀 용기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참이 무엇이고 거짓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류 가운데서 방황하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이 예배를 통해서 참이 무엇이고 거짓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되며 참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게 해주시고 그리고 참된 진리를 깨달아서 그 깨달음 속에 우리들이 그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 진리가 우리의 삶을 주장하게 되는……. 그래서 오류의 안개에서 그리고 그릇됨의 애매모호한 그러한 안개에서 숲속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대로를 보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쏟아 붓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성령과 진리로 예배시간마다 축복 하시옵소서.’
이것이 우리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