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됨의 대가를 치르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녹취자 : 정유선
2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고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토막은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 목숨까지 미워해야지만 내 제자가 된다, 두 번째 망대를 세우는 이야기, 세 번째 싸움하러 가는 이야기, 이렇게 세 토막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에 결론적인 가르침이 나옵니다.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많은 사람이 모이면 교회의 영광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교회에 모이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아주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야 하고 전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너희가 자기 부모와 형제, 처자와 자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못된다고 했습니다.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식 표현인데 진짜 미워한다는 게 아니라 첫째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아이 둘이 있는데 특별히 딸이 사랑스러워서 핸드폰을 하나 새로 사주었습니다. 그러면 딸은 기뻐하고 좋아하잖습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에이, 아빠는 나만 미워해.” 그것은 미워한 것이 아니라 딸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정확하게 히브리식 표현하고 일치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미국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한다는 말이 처자를 원수처럼 여기고 부모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자기 목숨을 귀찮은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뜻이 아니라 첫 번째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미워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내가 병고치고 설교 은혜롭게 하는 것을 들으면서 수없이 날 따라오는구나. 그런데 너희 중 모두가 나의 제자가 되지는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제자가 될까요?”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 이외에 다른 것을 가장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제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버려야 될 상황이 올 때에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것이 제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이라면 예수님의 제자가 못 된다 이겁니다. 오늘 여기 나오는 부모, 처, 자식, 형제, 자기 자신의 목숨, 이런 것들은 정확하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사랑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지금은 아예 그런 것도 다 사라져버려서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그러는 개념 없는 인간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렇게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서 아이들이 그렇게 부모의 폭력 아래 죽어가는 것입니다. 친권을 박탈하고 중형에 처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라의 기강을 잡아야 됩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린 아직까지도 부모를 믿는 구석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유치원가면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911에 전화 거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엄마가 때리면, 아빠가 때리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여섯 살, 다섯 살 된 아이 전화 한 통에 부모는 구속이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 13살 미만 된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부모가 집을 비워도 현행범입니다. 왜?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학대할 수 있잖습니까? 어린아이들을 혼자 내버려 두고 문 걸어두는 것만큼 무서운 학대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범죄행위입니다. 우리나라에 지금도 맞벌이 하느라고 아이 집어놓고 문 잠그고 출근하는 사람 아직 많습니다. 그게 그렇게 사고 나고 죽는 애들만 신문에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인식이 없이 이렇게 짓밟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쨌든 빗나간 이야기지만.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제일 먼저 사랑해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 얘기입니다.
그럼 그 비용이 어느 정도냐 이 얘기입니다. 망대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망대를 지을 일이 지금은 별로 없지만 GPS도 다 되고 하니까. 그렇지만 옛날에는 망대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이 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미아리, 수유리, 종암동 모두 포함해서 제일 높은 건물이 소방서의 감시탑이었습니다. 그 높이가 한 6, 7층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2층짜리 집들이 아주 희귀하게 있었고 3층 이상 되는 건물은 전혀 못 봤고 미아리, 종암동, 미아리 고개 아래로 해서 전부다 판잣집, 단층짜리 주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쌓는 것이 당시에는 상당한 비용과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망대를 쌓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망대를 만들어서 중간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이 타워를 올려서 그 위에서 뭔가를 감시하고 살피기 위해서 망대를 쌓는 것이잖습니까?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쌓는 것이잖습니까? 감시탑으로. 그러면 망대를 여기서 예로 든 것이 정말 재미있습니다. 망대를 만들어서 높이 올려서 다른 건물보다 아주 높아서 거기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적군이 쳐들어오는지 성을 두루 살피는 것입니다. 혹은 성안에 있는 질서를 살핀다든지. 그런데 기초도 튼튼히 하고 열심히 쌓았습니다. 그런데 절반쯤 올린 다음에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그러면 그 망대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왜? 주위에 있는 건물들에 시야가 가려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망대라고 하는 의미는 맨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건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건물을 지은다고 그러면 돈 없으면 6층짜리 지으려고 그러다 3층 짓고 3층에 들어가서 살면 되잖습니까? 그런데 망대는 그것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망대를 예로 드신 것은 아주 절묘한 것입니다. 끝까지 지어지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반쯤 제자 그런 것 없습니다. 제자면 제자고 아니면 아니지 절반쯤 제자가 어디 있습니까? 애국자냐 애국자가 아니냐 이지, 절반쯤 애국자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필요할 때는 애국자가 될 수 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애국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성향인데, 그렇잖습니까? 그러면 망대를 세우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면 망대를 세울 때에 사람들은 당연히 이게 얼마가 들까 계산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계산을 하니까 백만 원이 든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팔십 만원 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백만 원이 든다 그러고 마지막에 공사를 마무리 하면 백이십 만원이 든다 이겁니다. 그러면 거기까지 모든 것들을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망대공사를 시작하지 않겠느냐,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너희들이 나로부터 병 고침을 받고 설교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나를 따라온다고 하는 것을 판단을 해라,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미워해야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어야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나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된다, 이게 제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만약에 너희들이 그렇지 않고 우리가 그러려고 노력은 하겠습니다마는 안될 수도 있겠지요 라는 식으로 따르면 망대를 반만 짓다가 만 것처럼 되어서 망대로서 가치가 없듯이 너희들이 진정으로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어떻게 할래, 결정을 해라, 그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 빠진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는 하나님의 메시아이시고 나의 구주입니다, 내가 그 분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만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럼 뭔가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굴복하고 주님 이외의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은 주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고백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그 고백의 현실적인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안 가르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고백을 믿음으로 해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후에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 이외의 뭐든 버릴 수 있다, 기꺼이 그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희생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리 오너라, 나와 함께 죽으러가자,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매 순간순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선택을 하도록 우리에게 제시받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이 결단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이다, 원리적인 삶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을 받거나 혹은 삶의 사태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안돼서 괴롭거나 사역을 하는데 조건이나 환경이나 모든 것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안 됩니다. 이럴 경우에는 깊이 고민을 하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를 생각하면 괴로울 것도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할 때 내 목숨도 주님 앞에 내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내 목숨, 내 편함, 내 마음의 즐거움, 내 만족감 이런 거는 다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 그것을 내가 첫 번째로 사랑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나는 바치겠다, 이 사람들하고 헤어져야 된다 그러면 난 헤어지겠다, 식구들을 버리라 그러면 난 버려야 되겠다, 부모로부터 헤어지라 그러면 헤어져야 되겠다, 조국도 등지라고 하면 내가 등져야 되겠다, 모든 것을 그 아래로 복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쉬워집니다. 그러나 이제 끝까지 그것을 놓지 않고 양립하겠다고 할 때에는 수많은 갈등과 비굴함 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붙잡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다 상대적입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고. 하나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할 때마다 뭘 생각해야 하냐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릴 위해 치르신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 그 희생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무한한 희생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아주 단순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걸어가는 그 길이 어렵겠지요? 때로는 너무너무 헤어지고 싶은데 같이 있어야 하고 혹은 반대로 너무 너무 같이 있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헤어져야 하고 너무나 너무나 그 길로 가고 싶은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하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 길을 가기 싫은데 목숨보다 예수를 사랑해야 되니까 죽으면 안 되고 그 길을 가야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앙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니까 힘든 거지 사랑하지 않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두려워할 게 뭐있습니까? 잃어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쉬운 겁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이 되게끔 만들어 주시면, 자기가 하나님을 인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데려간다면 과연 그게 신앙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자기가 자기 인생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까, 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불행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개 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아주 놀라운 은혜입니다. 거기서 불만족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관계를 맺기 싫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게 되면 당당하게 인생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힘들 때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 우리가 혜택 받은 것만 강조하지 혜택을 받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이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은 군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파멸된 것을 구원해서 다시 사람답게 만들어서 군대로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싸우라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데에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거기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사실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행복 하고 싶어 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지고 싶어 하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싶어 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비록 그것이 교회 한 모퉁이에서 빗자루 질을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불러주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예화) 신학대학원 3학년 때 이상균 교수님 실에 조교로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학교를 잘 안 나오시니까 그 방을 제가 쓰면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고 유용하게 사용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 부서지고 없어졌지만. 그 때 제 방에 가끔 놀러 오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총신대 수위였습니다. 그분이 30년 넘게 근무를 하셨는데 그래서 학교에 장신하고 총신하고 분리되는 것을 다 보셨습니다. 그런데 장신하고 총신이 분리됐을 때에 그분이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분 아니었으면 이제까지 내려오던 장로교 신학교의 적통이 장신이 될 뻔했습니다. 밤에 와서 이 사람들이 WCC 문제 때문에 교단이 찢어질 때에 총신에 있는 모든 학적부를, 몰래 와서 창고를 뜯고 들어가서 다 꺼내서 차에다 실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간다고 하는 것은 법궤를 가지고 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학적이 거기 있는 겁니다. 그러면 졸업한 사람들은 거기 가서 학업증명서를 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가기 직전에 이 수위한테 걸린 겁니다. 수위가 트럭 바퀴 밑에 누웠습니다. “나를 밟고 가라. 내 창자를 터뜨리고 지나가라. 내가 살아있는 한은 못 일어난다.” 그러고 차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못 가져간 겁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서부터 그 모든 학적기록이 여기 총신대에 있는 겁니다. 박은홍 박사가 학생들한테 찍혀서 무능교수라 그러고 정치적인 교수라고 찍혀서 물러나라 탄핵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막 괴로워하고 그 때에 위로와 함께 당신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해준 사람이 수위 한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어떤 권위와 사람을 위기 속에 있을 때 압도하는 힘은 사회적인 지위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화) 청계사를 자주 산책을 하러 가는데 크게 플랜카드를 붙였습니다. ‘사자의 울부짖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렇게만 썼습니다. 그런 불자가 되자 그런 뜻입니다. 사자가 어떤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사자 앞에 딱 서면 한입도 안 됩니다. 사자가 간단한 짐승이 아닙니다. 사자나 호랑이가 전희철 목사를 사파리에서 만났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확 덤벼들어 꽉 물 것 같지요? 그렇게 바짝 마른 사람 물어서 뭐하겠습니까? 이빨만 아프지. 그게 아니라 붕 뜨면서 서 있는 전희철 목사를 쓰러뜨립니다. 어떻게 쓰러뜨리냐 하면 앞발로 상체를 확 밀어서 쓰러뜨리는 겁니다. 그게 압력이 2톤이랍니다. 2톤이면 어떤 정도의 압력이냐면 한창 때에 무하마드 알리를 한방에 쓰러뜨렸던 조지 포먼의 펀치의 힘입니다. 대부분은 한방 맞으면 그냥 졸도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물기 시작합니다. 겁이 안 나겠습니까? 우리가 하룻강아지라면 모르지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자의 울부짖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위나 권력이나 돈이나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외에 사랑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정돈된 사랑, 질서 지워진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신앙이고 믿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