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예배하십니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들을 지난 일주일 동안도 사랑하여 주셨다가 오늘 주일이 되매 저희들을 하나님의 집에 불러주셔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그리던 교회에서 함께 주님을 경배하고 마음으로 찬양하고 예배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유와 건강과 은혜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이름을 경배하고 높일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들이 불일 듯 일어나도록 해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전하고 들을 때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말씀을 듣는 데로 저희들이 또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그리움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나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우리에게 집중된 마음을 주시고 유아실에 있는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부모들을 방해하지 아니하도록 그 마음을 온유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몇 주간에 걸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올렸습니다마는 오늘 이 시간부터는 몇 주간에 걸쳐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심부에는 반드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경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들어난 예배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곧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황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 성경본문은 우리가 읽히 알고 있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러나 지금 있는 자도 자기의 진짜 남편이 아닌 이렇게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는 물을 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물을 가지고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마는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을 마셔야지만 너희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것을 원했습니다.
예수그리스께서는 이렇게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오늘 비로소 예배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지 아니하고 그런 영혼의 흡족함을 누리면서 사는 영혼의 만족과 예배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 여러분은 공적인 예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경건한 생활 그리고 성경읽기 기도생활 자기를 성찰하고 진리를 묵상하는 것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개인적인 예배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공적인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것과 함께 또한 기독교신앙의 근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훌륭하게 예배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을 이어갈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공적인 예배는 개인적인 예배와는 별도로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예배드릴 적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들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이 모여서 당신을 경배하고 당신께 예배하도록 가르치며 훈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편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생활은 결코 편이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이미 이렇게 모이기를 싫어하고 또 구실이 있으면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일들을 게을리 했습니다. 이미 주전 4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1,500~1,60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에 설교를 읽어보면 그 때 벌써 의식이 있는 설교자들은 주일예배의 설교가 남아있는데 그 설교 속에서 아주 신랄 하게 이 주일을 하찮게 여기면서 멋대로 지키는 사람들을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그래서 뭘 얘기 하냐면 요즘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봄이면 사람들이 놀러가느라고 줄어듭니다. 가을이면 이제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겨울에 많이 모입니다. 춥고 갈 때도 없으니까 교회에 나오는 모양입니다.
그때도 뭐라고 했냐하면 주일날 커다란 마차경기가 로마에서 있으면 그러면 그 구경 가느라고 안 오는 거예요 교회에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마차경기 때문에 예배를 빠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앞에 칭찬받을 줄 아느냐? 통렬한 비난이 아직도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모이기를 폐하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너희는 오직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라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함과 같이 우리의 친구의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여러분들이 나가서 세상의 친구들과 함께 사업하고 먹고 마시고 놀 때에는 그저 여러분들의 마음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저 친구보다 돈을 더 벌까 나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나도 어떻게 하면 돈을 들여서라도 저렇게 예뻐질 수 있을까? 여러분 그런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예배하는 동안에 우리는 세상에서 먹었던 그런 생각들이 정말 하찮고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사실을 교회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경배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모하는 마음들을 배우게 됩니다. 올 때는 그저 오늘 또 교회 안 나가면 교회에서 전화통에 불이 나겠지 그러면서 왔지만 갈 때는 또 뭔가 희미하긴 하지만 찔린다. 아무래도 목사님이 날 보고 하는 것 같아서 찔린다. 그렇게 돌아옵니다.
시대가 춥고 어두울수록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예배해야할 필요를 더욱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함께 모이기를 그리워하였으며 그 일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힘썼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아주 먼 길을 걸어서 하나님의 예배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때로는 핍박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들은 희생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고 우정을 도모하는데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데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예배 속에서 공급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시련과 고통에 빠진 형제들을 건져줄 수 있는 사랑과 용기와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구체적인 방식이 예배를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그 동산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타락하고 나자 그들이 잃어버린 축복은 예배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래서 따로 예배가 필요 없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사귀는 그러한 관계 속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숨어버리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첫 가족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낳은 가인과 아벨은 형제였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심판으로 걸어간 죄인의 대명사였으며 아벨 또 한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께 간 순종과 신앙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구별은 바로 예배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아벨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이미 게시되어 있고 또 그가 드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그 사람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경험 없이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에 생명이 있는 것들을 물로 심판하신 노아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다시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약속의 음성과 징표를 구름 가운데 보여주셨는데 바로 그때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경건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고 예배를 통해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으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갔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어느 곳에 장막을 치던지 그들은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단을 쌓았습니다. 모세의 시대에 율법을 따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예배는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막이나 성전 안에서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 회중에서 제외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선택된 백성인지 아닌지는 예배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그 영적인 축복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 예배를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열심히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묵상하고 그렇게 개인적인 영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왜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없다고 말하는지 이해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배가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고 선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공적인 예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심각하게 중요한 것 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 떠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올려야 할 공적인 예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7시 반 심지어는 6시 반에 1부 예배를 드리고 낚시터로 골프장으로 친구들과 어울려서 가족들과 어울려서 돌아다니는 이러한 것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때우고 나머지 시간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서도 스스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선지자들 앞에서 비난을 받던 그 타락한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자기의 육신적인 일로 말미암아 공적인 예배에 참여해야할 의무를 게을리 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잘못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생활하고 행동하는 요즈음 세태는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바로 행동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은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께 아멘 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살아가노라면 도대체 피할 수 없게끔 예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우리 빌라에서 예배시간에 불이 나고 수많은 이웃들이 타 죽어가고 있다면 저는 예배 참석 안하고 불을 끄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이웃사람들을 구해내겠습니다. 전쟁이 나서 폭탄이 이 방배동을 불바다로 만든다면 우리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땐 오히려 나가서 적과 싸우고 가족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난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배당에서 화재가 났다면 여러분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린 불을 꺼야 됩니다. 사노라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매 주일 심지어는 매 예배시간마다 벌어진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허쉘 포드라고 하는 목사님이 그 설교집속에서 재밌는 예화를 들었습니다.
(예화) 목장 하는 성도에게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에 잘 참여하라고 하니까 목사님에게 대들 듯이 말했어요. 목사님 지난주일 날 제가 못나갔다고 그러십니까?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교회를 갈라고 성경찬송을 들고 막 오는데 소가 구덩이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죽겠다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데 예배의 종소리는 들리고 교회에 와야겠습니까? 건져야겠습니까? 성경에도 보면 웅덩이에 빠지면 건져주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명 대답을 하셨어요. 맞습니다. 그럴 때는 소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건져 내셔야죠 근데 집사님 매주 빠지거들랑 팔아버리세요.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예배의 참석의 의무를 게을리 할 때 교회는 여러분이 아니어도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설교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을 지키도록 제정해놓으시고 한 주간 동안 몸과 마음이 쉬면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예배를 통해 공급받도록 하나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 우리는 이 예배를 하나님 앞에 언제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사소한 일을 위하여 우리의 편이 데로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그 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신의 사소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우리의 예배의 의무를 게을리 하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영혼은 핍절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축복은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런 교만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짓다가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성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은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빌미 삼아서 자신들이 먹고 자신들을 위하는 일에 자기의 집을 짓고 늘리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자기 소위를 살펴보라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마실지라도 흡족치 아니하며 입을지라도 따뜻치 아니하고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주일 예배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경건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애쓰던 성도들이 주일 예배 낮에 와서 드리는 것 가지고 도저히 험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주일 저녁예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또 삼일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새롭게 삼일을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저희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오일예배가 있었습니다. 금요일 날 또 다시 모였습니다. 아주 진지하고 비록 모이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생선을 팔다가 비린내를 풍기며 교회에 오는 사람, 별사람들 다 있었지마는 정말 오일예배에도 사람들 많이 모였습니다.
그러면 주일 낮에 주일 오후에 뿐만 아니라 수요일에 여러분 예배에 참석해야 할 그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일이 정말 그렇게 절박한 일입니까? 그 시간에 여러분들이 있지 않아도 될 곳에 있는 동안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곳은 비어 있습니다.
이젠 한국교회가 참 큰일 났습니다. 주일 낮에 1,300명 모이는 교회가 주일 오후에 200명, 오죽했으면 어느 교회에서 집회 요청이 들어왔는데 주일 낮에부터 해 달라고 합니다. 다 모였을 때가 낮뿐이라는 겁니다. 주일 낮에 550명 모여도 주일저녁때 시작 한다고 그러면 250명 모으기도 힘들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젠 예배에 나오는 이유가 많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예화) 얼마 전에 제가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형제가 저한테 얘기를 하는데 자기네 교회 1,700명 교인이 모인데요 4년 동안 1,700명으로 불어났데요. 그렇게 교회가 급성장한 비결이 운동장만큼 넓은 주차장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른 교회 다니다가도 주차장 때문에 그 교회로 옮긴다고 합니다. 주차하기 좋아서, 가까워서 주차하기 좋아서 교회건물이 커서 목사님이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에서 구제를 해주기 때문에...
여러분! 이런 이유를 가지고 교회를 선택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래 자동적으로 그저 주일이면 옛날 매달15일 민방위 훈련하듯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갈망이 없으니까 주일 낮에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나오는데 오후만 되도 사람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수요일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는 집사나 아니면 전도사들이나 가는 곳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곳 아닙니까? 심지어 이젠 시내에 있는 교회들은 10분의 1도 수요예배에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1,000명이 모이는 교회 100명이 모이기 힘들 정도의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바쁩니까? 그래서 일평생 무엇을 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하여야 할 시간을 자기의 할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아니하고도 얻을 수 있는 성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주일에 그 한 두 시간 두 세 시간 혹은 너 댓 시간 되는 예배의 시간을 쪼개서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에 그 시간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TV프로 앞에 앉아서는 두 세 시간을 거뜬히 허리 아픈데도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한 시간만 지나고 나면 시계를 쳐다보기 여념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유가 있어지면 상황이 좀더 나아지면 온전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국은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돈 때문에 공부 때문에 사업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너무나 바쁜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나기에는 너무나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높은 사람들입니다.
(예화) 큰 사업을 하던 분이 계셨습니다. 열심히 사업을 하니까 사업이 정말 번창했어요.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직원들이 늘어나고 공장이 자꾸 서고 서울에 모자라니까 지방에도 세우고 더군다나 자연스럽게 출장 다니는 시간도 많아졌고 수출에 판로가 열리니까 이 사람은 외국에도 드나드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늘 입에 붙어있는 건 바쁘다는 것입니다. 제직회에 참석 하십시오. 너무너무 바빠서 가야 된다고 합니다. 근데 여러분 바쁜 건 요즘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도 바쁩니다. 유치원 가방 집어던지고 발레를 배우러 가고 갔다 와서는 또 가방 집어던지고 붓글씨 학원에 가고 또 피아노를 배우러 가고 애들도 다 바빠요.
우리 이슬이가 전화하면서 누구하고 통화를 하는데 자 이제 바쁘니까 끊자. 애들도 바쁘데요. 그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거예요. 근데 이 집사님이 그렇게 과로를 하니까 병에 걸려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뇌졸중 비슷하게 그러니까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때 고백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이 한가롭게 나를 만들어 주시니까 예전에 바쁜 일이 정말 급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중요한 것 먼저 해야 하겠습니까? 바쁜 것 먼저 해야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을 바쁜 것과 구별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이 공적인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는 은혜의 수단이 되어 왔습니다.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며 죽은 자와 영혼들이 살아나고 어두운 심령을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고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어디입니까? 무엇을 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까? 의심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믿음을 따라 살도록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세상에서 부와 성공만이 있으면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신앙의 변화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여러분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기를 힘쓰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인하여 사람들에게 미안하거나 목사에게 이해를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이해해주고 이해주지 않고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면 할수록 여러분들은 영적인 삶에 심각한 손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박약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날 설교 나온 목록을 펼쳐놓고 회상에 잠겼습니다. 한 50시리즈 가까이를 했으니까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700개 가까이 설교테이프가 나왔습니다. 그걸 이렇게 보면서 반성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희한한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셨던 설교는 대부분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주일오후고 주일 낮이 만족스럽지 못한 설교를 한 적이 가장 많았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느 목회자이든지 주일 낮 예배에 가장 좋은 설교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예배를 드리고 났을 때 깊은 만족을 느낀 것은 오히려 주일 낮이 아니라 주일 오후나 혹은 훨씬 더 많게는 수요일 오후였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봤더니 두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면 설교를 할 때 주일 낮 예배에는 성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이니까 은혜를 끼쳐야 한다고 하는 말하자면 설교자 자신의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요일과 주일오후에는 편안하게 설교를 한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모이는 여러분들의 문제입니다. 수요일 날이 가장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분위기입니다. 주일날은 교회에 안나올 수 없는 날인데 수요일 날은 빠져도 되는 날처럼 이해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수요일 날 오는 사람들은 먼 곳에서 주일날은 막히지도 않는데 막히는 거리를 지나서 심지어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수요일은 열린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이 가득 채웁니다. 그래서 수요일은 모이는 시간도 상당히 빠릅니다. 7시20분만 되면 사람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하고 구석구석에서 어떤 때는 7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 낮이나 주일 오후에 구조적으로 우리교회가 장소 사용에 문제가 있지만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들을 수요일 날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집회를 나가도 웬만하면 수요일 날 안 갈려고 애를 씁니다. 수요일 날 다른 교회 가서 설교하는 것보다 우리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고 기쁨 입니다.
무슨 소리를 지금 하고 있는지 수요예배 나와 보시지 않은 분들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가운데도 수요예배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나쁜 의미로 많이 바뀌었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망이 없었는데 수요예배에 나왔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인생의 변화를 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의 참석을 게을리 하는 마음은 신령한 은혜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령한 은혜생활을 계속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실제적인 실패로 나타 날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과연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지만 마음을 다하는 예배가 되고 있는지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많은 예배가 행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지 예배에 참석하느냐 않하는냐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주 헛된 예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행해지는 헛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신앙생활이 주는 해로움에 대해서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사람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경외심이 사라질 때 차가운 형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보상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이 하나님을 아주 멀리 떠나 버리면 교회도 떠나버리지만 적당히 떠나 버리면 자기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라도 자기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아왔던 멋대로의 삶들을 한 시간 예배를 통해 보상해보려는 심리인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 없이 차가운예배의 형식만을 1년,2년,3년,4년 되풀이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거의 불신자와 다름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생각은 습관적입니까? 아니면 성경적입니까? 바른 지식이 없으면 바른 신앙생활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예배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이 성경적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기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사건이나 부활을 경험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이 아닙니다.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이 죽은 선조들에게 제사할 때도 그들은 조상이 직접 그 제사 자리에 찾아와서 젯밥을 먹는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단지 세레머니가 아닙니다. 의식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의 중보를 통하여 죄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며 살아가고 싶었지만은 그렇게 싸우며 이기며 살수 없었던 모든 무능력이 능력으로 덧입혀지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충만한 위로와 사랑 그리고 고통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올까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충만한 은혜를 받고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독특한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수단은 언제나 평범합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개인적으로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고 부흥을 경험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데 어느 주일에 이전에 없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평범한 수단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평범한 은혜의 수단을 내실 있게 활용하여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기발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방편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모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라의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회개하는 민족적인 각성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의 역사를 보면 정말 부흥이 임하던 때에는 그 부흥의 도구로 쓰여 졌던 사람이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늘 하는 그 일을 되풀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위기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엊그제도 길을 걸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땅만 거저 빌려준다고 하면 텐트라도 치고 예배드리겠는데 좁아서 문제지 좁지만 않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화)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몇 해 전에 헌신예배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예배를 다 인도하고 그리고 이제 막 나오려고 하는데 다과가 준비됐으니까 드시고 가시라고 교회에다가 다과상을 차려놓았습니다. 그 앞에 어느 집사님이 앉아 계시는데 경희대 다니는 교수님이래요. 반갑다고 저도 신학대학에 있다고 서로 인사를 하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나면 교회가 어렵게 아파트 상가를 구해서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걸 보면서 참 감사하면서 덕담을 하는 가운데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서 공부 못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몸으로 때운다고 개척을 했습니다. 똑똑한 학생들은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을 가거나 그랬는데 요즘은 능력 있는 사람이 개척하고 별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공부할 생각을 합니다. 개척하는데 교회당을 강남에다 개척하는데 전세 얻어서 하면 정확히 1억이 듭니다.
시세로 그러니까 신학교만 다니던 사람이 1억씩 있으면 그건 수상한 사람 아닙니까? 특별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후원해주겠다고 한다면 무언가가 특별한 비범한 자질이 있는 것이고 하니까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교회를 개척하든 거 보면 그렇게 돈 들여서 않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텐트 얻어다가 구호물자 얻어다가 고물상에서 가마니 사다가 또 얻어다가 시유지에다가 말뚝 박고 거기다가 텐트치고 호롱불 걸어놓고 북치고 전도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모아서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구청에서 와서 뜯으면 허물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눈물 흘리고 기도하면서 또 세우고 땅이 없으니까 그때 시유지가 많았습니다. 저도 그 가마니 위에서 박수치면서 주일학교 때 교회 다닌 기억이 나요.엄청 뜨거웠습니다. 그때 목회자는 천막교회 하나를 위해서 생명을 내건 사람 같았습니다. 기도를 해도 뜨겁고 열렬하게 합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옛날에는 개천가에다 텐트치고 가마니 깔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피아노 있어도 2층 교회라고 안 오고 지하실 교회는 공기가 나쁘다고 안 오고 그렇다고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평생 제가 잊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사님 지금도 그 때처럼 은혜로운 예배를 드린다면 지금도 이렇게 큰 가마니위에 앉아서 무릎 꿇고 박수 칠 사람 많습니다. 제가 신학교 선생이었는데 평신도 앞에서 말이에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내 사고방식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던가? 잊혀지질 않습니다.
정말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기관과 다른 것은 예배를 통해서 죄인들을 하나님과 만나는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못 만나는 하나님을 예배에서 못 만나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조셉얼라인 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말하기를 죄인들의 유일한 소망은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곳에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하는 것 이외에 죄인들이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소망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변화를 받으면 변화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변화를 받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깨닫게 되면 예배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구태의연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 것입니다. 습관을 따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격이 없는 찬양,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없는 기도, 말씀에 대한 아무런 깨달음과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 속에 심겨지는 그 심겨짐이 없는 타성에 젖은 모든 예배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배하도록 허락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에 놀라운 특권입니다.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청와대에서 보낸 카드 하나를 집어 들고 자랑을 합니다. 뻔하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청와대에서 오라고 보냈을 때는 수백 통 보냈을 것입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도 3시간 전인가 4시간 전에 가서 교육받고 검색하고 명찰 달고 그러는데도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오랜 세월 익숙하게 예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깊이 고민해야 될 것입니다. 무엇 보다고 갈망이 없는 예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독이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예배에 와 가지고 마음을 다해서 예배드리지 않고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바에야 교회 한 주 빠지고 내가 주일을 빠졌으니 어떻게 할까 하면서 그 다음 주일날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 훨씬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 앞에서 엄마 아빠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손잡고 한 여섯 살 일곱 살 된 꼬마가 엄마, 아빠하고 걸어가면서 오늘 예배시간에는 졸지 말라고 여러 번 다짐을 받습니다. 예배시간에 졸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보면서 아이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 아빠 자려면 빨리 요금내고 집에 가서 자자. 아마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언젠가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그래요. 저는 그게 참 고역이거든요. 빨리 쉬고 싶은데 끌고 서울 시내를 벗어나서 비포장도로 산골길로 한없이 달리는 거예요. 속으로 난 정말 싫은데. 보리밥을 먹기 위해서는 고개를 넘고 산을 넘고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마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도 투덜대지 않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오라고 하면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할일 없는 세대가 이 세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10시 반에 모이는데 10시15분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300백 400백 명 모여서 백화점 문 열기를 기다립니다. 개관 몇 주년 기념으로 주는 선물을 받으러 옵니다. 받으러 온 사람 중에는 그랜저를 몰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중에 3분의2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남대문 새벽시장에 한번 나가보세요 지방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대목보기 위해서 밤새도록 차를 타고 와가지고 새벽2시에 불야성을 이루면서 사람들은 물건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자기 일들을 합니다.
세속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큼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열심을 품어 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놀랍게 변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화상영 시간에는 종종 걸음을 치면서 맞추어 가고 TV방영시간에는 시간에 맞추어 귀가하는 사람들 인기 있는 프로그램 하면 도시가 한적해 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대해서는 의식도 없고 언제든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대한 열심과 열망은 영혼의 갈망을 감퇴시킵니다. 감퇴된 영혼의 욕구는 예배를 점점 견디기 어렵게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배는 간단히 설교는 짧게 기도는 뜨겁게 찬송은 은혜롭게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우리는 심각하게 반성하고 고쳐야 되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헌금과 아무렇게나오는 옷차림도 예배에 임하는 하나님 앞에 준비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일이 여러분들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 예배가 주일의 중심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최상의 건강과 최상의 마음 최상의 물질 최상의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고 전날부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배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최소한 10분전에는 나와서 하나님 앞에 일주일을 반성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설교자를 의지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의 수준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라는 형식 속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 곳에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 하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태도가 많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민방위교육 가는 것 같은 마음으로 예배에 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생활교육을 받는 것 같은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날은 뭔가 구별된 날이고 뭔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되는 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니까 예배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답게 드려질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예배답게 드려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마음은 다른 곳에 있고 졸고 가른 생각하고 예배 끝난 후에 볼일 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헌금 몇 푼 넣고 황급히 도망가는 그 예배에 무슨 신령한 은혜가 깃들겠습니까?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그러니까 우리의 예배는 더욱더 형식에 굳어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심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예배의 분위기 자체가 고통스러워집니다.
(예화) 설교를 하러 어느 교회에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웃어도 웃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어요. 설교자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설교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도할 때는 불붙었는데 올라가니까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내가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날 보고 우습지만 난 당신들보고 우습다. 나를 바쁜 사람을 이 지방까지 불러내려가지고 설교해달라고 부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노려보려고 불렀습니까? 오죽 했으면 아이들이 율동하러 올라갔다가 무서워서 울고 내려왔습니다. 박수도 안치고 웃지도 않으니까 무서워서 울면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인데 우리의 태도가 바뀌어야 됩니다. 정말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들 앞에 한번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수요일 날 안나오시던 분들 목사님 말이 정말 맞는지 내가 한 시리즈라도 예배에 참석해 보겠다. 그리고 일찌감치 30분전에 나와서 깊이 기도하며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깨닫게 해주시고 변화되게 해주시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이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구석에서 엎드려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보십시오. 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겠습니까?
주일오후예배 집에 가야 파자마 바람으로 TV보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피할 수 없이 일을 보시는 분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래요 여러분 육체의 쉼이 우리의 육체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의 영혼을 채울 때 10분의 휴식이 1시간의 휴식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잘하든지 못하든지 설교를 하루에 6시간씩 심지어는 7시간씩 하고나면 코에서 단내가 납니다. 그런데도 숙소에 와서 누우면 잠이 안옵니다. 다시 한번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면 육체는 잠깐 쉬어도 건강합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쉬고 굶어도 우리의 육체가 회복되는 것이 참된 회복이 아닙니다. 주일오후예배에 참석하지도 않고 그냥 목사가 나가기도 전에 달음질쳐서 가시지 마시고 점심도 먹고 교제도 하고 그리고 또 오후예배도 참석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일을 지키겠다고 새롭게 각오해보십시오. 오후예배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수시로 주일을 빠졌다면 새롭게 각오 해보십시오. 짧은 인생 이렇게 살면 뭐하나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예배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겠다 결심하고 가게를 하면 가게 문 닫고 하나님 앞에 15분전에 나와서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설교자와 지체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드리는 찬양, 마음으로 들으려하고 하고 부르려고 한다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딴 생각하지 않고 시선만 설교자를 향하고 있어도 변화가 올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골난 사람처럼 우울하게 있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충만한 은혜와 기쁨으로 새로워지고 주님과의 만남이 진정한 예배와 찬송이 우리의 주일에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러분들이 예배에 대한 태도나 지각하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가 되는 것은 헛되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그러한 거룩한 영혼의 갈망의 가장 좋은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설교하고 그 설교를 들으며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찾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상심하고 낙망하는 자들을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상심하고 낙망한 마음을 끌어않고 당신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예배생활에 변화를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날에 가장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인 동시에 또한 그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을 가능하게 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주일을 지킨다는 점에서 볼 때 주일의 주인은 또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기립니다. 그리고 주일날 와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십자가의 고난도 생각하고 또 우리의 의를 위해서 새롭게 살아나신 그 놀라운 은총도 우리가 찬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결코 우리가 주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기념식처럼 된다고 하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배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거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래로 형식적인 신앙 속에서 살아와서 결국은 바리새인과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바로 내용은 모두 잃어버리고 형식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식이 자기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즘은 하도 교회들을 안 다니니까 자식이든, 남편이든, 부인이든, 형제들이든 예배에 나와서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예배에 나와서 앉아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한없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표징을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맛보아야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서있는 김목사도 그렇게 많은 동안 예배를 드렸지만 예배 속에서 깊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며 예배드린 것은 솔직히 말해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갈 때까지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 한분은 신학대학원 3학년 때 어느 목사님이 선교단체가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셨는데 거기서 감화를 받고 눈물을 흘렸는데 태어나서 예배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분들만 그렇습니까, 저만 그렇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거의 관심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민방위 교육을 받는 것인지 도대체 분간을 못하고 교회에 들어와서도 이 예배드리는 시간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분명한 의식들을 못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모두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날 사람들입니다.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에 대해서 거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공급해주시기 위해서 이 예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 일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풍기고 그 독특한 빛깔을 드러내어서 이방에 있는 많은 민족들과 얼굴이 비슷하게 생기고 같은 문화권 속에서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시대에는 항상 그들의 모든 삶 한가운데는 신앙이 있었고 신앙 한가운데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제사에서, 그 예배에서, 그 절기를 지키는 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하나님의 율법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맹세했던 것입니다.
구약을 읽어보십시오. 영적인 변화가 크게 일어나고 제사와 절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맹세합니다. 뭐에 대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기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이 계명을 2-3만 원짜리 딱지를 떼는 교통법규만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었든지 교회에 나오고 그저 헌금이나 몇 푼이나 하고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마구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지에 대한 한 대답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가 그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배를 넘는 삶도 없고 삶을 넘는 예배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까짓 것 한 시간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다. 물론 그렇습니다. 바리새파나 아니면 외식주의자가 아닙니다. 분명히 저는 우리의 모든 일주일 동안의 삶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넓은 의미의 예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배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들은 기도하고 또 분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넓은 의미의 예배가 강조된다고 해서 이 좁은 의미의 예배, 모여서 하루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시간들이 무시되거나 아무렇게 취급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를 강조하다가 좁은 의미의 예배를 놓치고 나면 넓은 의미의 예배를 살아가는 일에도 실패합니다. 여러분, 뭔가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이 없이는 우리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잘 돌아가던 시계가 어느 날 갑자기 멎어버리는지, 그렇게 밟기만 하면 150킬로 180킬로 달리던 자동차가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놀라운 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배를 드려도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그 예배 자리에 찾아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잘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보십시오. 극장에 들어가는 사람은 한 프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기 위해서, 중간에 간 사람은 할 일없이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지루하게 30분내지 심지어는 한 시간씩 기다립니다. 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간에 불쑥불쑥 들어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도무지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인식이 흐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피치 못하게 예배를 늦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예배드리러오는데 누가교통사고가 나서 쓰러졌는데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설교를 좀 늦게 하더라도 그 사람을 업어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와서 설교하겠습니다. 피치 못하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번이 아니라 매주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대단히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민방위 교육하는데 여러분들이 가보셨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것도 저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참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제 민방위도 나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퇴물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민방위 교육에 강사로 오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도 없지만 목사들도 와서 그런 것을 해달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을 하라고 그러면 안 갈 것 같습니다. 아예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에 신문을 들고 옵니다. 그렇게 들어와서 다리를 꼬고 한없이 뒤로 기대고 신문을 봅니다. 앞에서는 강의를 하고 북한 정세가 어떻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어떻고, 너는 짖어라, 하면서 신문을 봅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신문을 다보면 신문을 얼굴에 푹 덮고 심지어는 코까지 골면서 잡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간입니다.
여러분, 과장을 좀 하자면 오늘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드려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마음을 다하여 예배하기는커녕 와서 생각도 없이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을 견디고 참고 인내하다가 일어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영혼의 유익을 거의 못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은 커다란 경종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을까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 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러니까 올바른 방식으로 예배가 드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 없는 예배를 드리는 그곳에 계속 머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큼 우리의 영혼의 위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예배하는 자가 어떤 예배기에 23절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어떻게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라는 말을 붙이시는가. 그러면서 24절에 답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말씀하십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자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할찌니라.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각나게끔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나 사람의 존재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겉모습에 매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그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보시고 우리의 마음 깊음 속을 감찰하셔서 예배드릴 자격을 갖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하는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두 교회문턱을 들어섰습니다. 한발을 교회 안에 들어놓는 그 순간 제일먼저 여러분들의 머리를 누비고 지나갔던 첫 번째 생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당에 들어올 때 제일먼저 여러분들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은 무엇입니까? 이곳이 구별된 곳으로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 우리는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교회에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어떤 삶을 살다가 왔는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들어오는 그 순간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몸을 교회 안에 들여보내는 그 순간 여러분들은 이런 인식에 사로잡히고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일주일 동안 모든 삶을 다 아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모든 신앙생활 일거수일투족들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예배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어떤 죄들이 있는지, 어떤 원망하는 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대하며 나오고 있는지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하는 성품을 먼저 예배에 대한 태도에 앞서서 우리에게 보여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임재 해계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을 감찰하고 우리를 들여다보시고 그리고 그 예배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모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고 우리의 생각과 그리고 우리의 뜻과 우리의 행한 것과 우리의 계획하는 모든 것까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모두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살아있지만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하는 것들을 느낄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영적인 감각이 매우 무디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셔도 우리는 오해하거나 잘못생각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더 이상 범죄하지 않고 살면 되는데 알다시피 여러분들이 지난 주간에도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 동안 살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모두 범죄하며 살았습니다. 범죄만 하며 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죄는 심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셔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영혼으로 우리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 중에 하나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습관적인 죄들이 우리 안에 더욱이 가득차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 시간을 예배시간 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런 죄인으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을 육체인 인간들에게 깊이 느껴지고 체험되어지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바로 그렇게 초월적인 존재이신 거룩한 하나님과 그리고 이 땅에 죄 가운데 있어서 무감각한 죄인들을 그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아니하면 우리의 예배는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그리고 도덕적으로 반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감동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끔찍한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젠가 병원에 가서 저는 무슨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암 덩어리 비슷한 것이 얼굴에 퍼져나 와서 계속 온 몸에 번져가는 악성 비슷한 종양 같은 것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병든 사람 모두가 불쌍하고 비참하지만 난 그렇게 얼굴과 온 몸에 꼭 색깔이 보랏빛입니다. 그 피죽은 빛이 이렇게 부어오르거나 혹이 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울퉁불퉁한 옛날에 시골에서 가을이면 매달린 유주와 같은 그렇게 얼굴의 모습이 보랏빛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있었습니다. 돌아서면서 속에서 울컥 토할 것 같은 한편으로는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역겹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못 보니까 그렇지 여러분들 만약에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신앙생활의 태도가 엄청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 성경을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얼마나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는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거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변화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반듯한 삶을 살고 그리고 예배에 빠짐없이 나오고 또 여러분들이 헌금을 하고 그리고 주위에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보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해도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해서 감화를 받고 변화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은 그 환자처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오죽했으면 개척교회입니다. 한명이 아쉽습니다. 오죽했으면 공석상에서 몇 번, 심지어는 설교 시간에 얘기를 했겠습니까. 예배를 하나님 앞에 정성껏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힘써라. 애써도 안 되면 그럴 수 있는 교회가 혹시 나오면 그리로 가라. 오죽했으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개척교회가 남의 교회에 가서 한명을 훔쳐 와도 시원치 않은 이 개척교회에서 김목사가 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난 여러분들이 열린교회에 묶여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묶이고 예수께 묶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김목사와 인간적인 관계로 묶여서 되어야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나 여러분을 인도한 누구와의 인간적인 관계에 묶여서 여기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가 하는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주님 만날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영혼은 좀 더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거룩한 뜻을 이 세상에 펼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병든 자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생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 속에 거의 경험하지 못하면서 사는 이런 예배의 삶은 (?)되었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우리 모두가 이 일에 있어서 돌이켜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보다도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참지 못해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으시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싶으셔서 찾으시는데 못 만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그 예배를 통해 복주시겠다고 그 사람을 찾으시는데 하나님께서 못 만나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영안에서 드린다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끝 날에 어린양 예수 앞에서 그 주님을 찬송할 권리는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변화된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특권인 것입니다. 영으로 예배드릴 때 다시 말하면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으니 이런 일들이 여러분들에게도 필요하지 않은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예배 안에 성령이 오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배를 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전혀 여러분들을 자극하지 않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과 귀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예배가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가 정말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바 진정한 예배를 통해서 주시고자 약속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들이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친히 습득되고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는 일이 예배 속에 나타나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 혹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거룩함, 죄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 하나님의 영이 임재해 있는 그 자리에서 깊이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분명히 하지 말라. 말씀하시는데도 뭐 어때 하면서 막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뭔가 돈 맞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악을 차마 용납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내하시지만 인내를 거두시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가를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어오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보십시오. 요즘 교육부에서는 사랑해주라고 막 그러는데 여러분 요즘은 집안에서 아버지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때려야 합니다. 자주 때리면 안 되지만 참고, 참고 사랑하고 예뻐해주다가 딱 어느 한계까지 차면 그러면 여러분 의사가 있건 없건 날 잡아서 죽도로 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부권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분명히 심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냐, 오냐 해서 기른 자식의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오히려 효자는 정말 두들겨 맞으면서 그렇게 자란 집안에서 진짜 끔찍한 효자들이 나옵니다.
여러분, 세상의 안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교육학은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초달을 차마 하지 못하면 아이를 망치느니라. 매를 차마 못 때리면 그 아이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버르장머리들이 너무 없습니다. 이제 막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이 엄마는 그래도 잔, 매라도 하고 잔소리라도 하니까 귀찮아서 눈치를 보는데 아버지는 아이들이 우습게 여깁니다. 안 됩니다. 엎어놓고 때려야 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는 말입니다. 부권이 살아있으면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 범죄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지만 범죄했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하나님 은혜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아픔이고 시련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마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임재해계셨을 때 느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우리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이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깊은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처음 와서 변화 안 되는 사람은 죽어도 변화 안 된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를 해보면 1, 2년 혹은 3년 동안 예배를 드렸는데도 도저히 변화지 않던 어느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그 똑같은 설교를 듣고 변화됩니다. 돌아다니면서 그 설교가 길고 지루하다고 흉보고 다니던 사람도 똑같은 설교 앞에서 변화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소리처럼 들리던 그 말씀이 형식적으로 드리던 그 예배가 갑자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놓는 역사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이 그들 가운데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너무 심각해서 아멘을 잊어버렸습니까?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지루하고 답답하게 드리던 예배를 하나님이 확 뒤집으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트리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하늘로부터 부어지지만 그러나 통자로 되어있는 마음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트려진 심령을 뒤집고 부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깨트려지고 계십니까? 예배를 통해서 매주 매번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깨트려지고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온 날들을 회개하고 죄에 대해서 깊이 확신하고 삶을 돌이키고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삶에 자리에서 아버지가 바라고 기대하시는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은 그런 사모함과 그런 간절함이 여러분들에게 경험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영안에서 예배가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이런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와 죄를 깨닫게 하는 그런 은혜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갈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삶으로 고백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별된 시간에 구별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 시간에 졸고 그리고 다른 생각하고 혹은 쳐다보고 낙서나 하고 공상이나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 사슴이 시냇물같이 목마른 마음을 안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고 주 예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코미디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설교하러 오는 분들마다 저에게 모두 이 교회처럼 성숙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못 만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일은 아닙니다. 수요일입니다. 그러나 주일 저녁입니다. 그때마다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만약에 우리가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에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던 사람들이 깨트려져서 그 심령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만 있다면 저는 다른 방면에서는 살을 에는 것 같은 불같은 시험을 주신다고 해도 그 기쁨 때문에 나는 참고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고 장소가 넓어지면 사람을 많이들 모인다고 말합니다. 마른 뼈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이 안 찾아오시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늘어나는 것은 목회자 사례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실 때 하나님께서 그 죄인의 마음을 녹이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 가장 절망하는 것도 예배고 희망을 갖는 것도 예배입니다. 안 변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정말 저 심령을 깨트려주셔서 주님을 아는 은혜의 빛을 비추어주시려나. 정말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일들이 예배 속에서 안 일어납니다. 깊이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그렇게 흐느적거릴 때 또 믿음으로 기도하는 어느 순간에는 변화된 사람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정말 하나님에게 어떤 의미에서 속으면서 이렇게 3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언제나 교회 안에서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신앙적으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개교회의 관해서도 사실이고 넓게 교계에 봐서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점차 나이가 들면서 교계에 중요한 포지션들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상한 게 그렇게 성도들이 모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변화를 받고 하나님 앞에 새 생명을 얻는 예배에 모두 앞서서 참여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커다란 세력들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은혜 받은 집사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들이 다니던 교회, 흔히 볼 수 있는 교회들 속에서 장로라고 하는 사람들이 올라와서 설교하는 모습을 들어보십시오. 그 중에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있는 신앙의 체험을 하고 정말 기도가 살아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뭡니까?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도무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갈망도 없고 은혜도 없는 판에 박힌 듯한 그런 기도들로 예배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형성된 무리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실 때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역사를 만들어주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간증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몇 번의 예배가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이전에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배드리러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그 순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끝날 시간을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생각나게 해주셔서 하나님 앞에 한없이 기도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깨트려지는 삶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잘 살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저와 여러분 모두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는 깊은 죄가 있어서 내 이름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고 내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와서 정말 예배 중에 말씀을 갈망하고 깊이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누군지 아십니까? 옛날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졌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목사님도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답답해서 목회를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가? 기도합시다. 그러는데 열심히 30일이고 40일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작할 때 우르르 기도하다가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얼굴 다 아는 몇 사람, 전도합시다. 그러면 마지막 끝까지 매달린 사람이 누군가? 그 몇 사람,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막 통곡하면서 기도하면서 깨트려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이미 깨트려진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면 예배 중에 우리들이 죄에 대해 깊이 깨닫고 어느 한순간에 우리의 어두운 생각들이 깊이 쪼개지고 진리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영혼 속에 들어오는 일들이 일어나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무엇입니까?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뿌려질 뿐이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하나의 씨앗이 아름드리나무를 맺고 그리고 그 나무와 줄기가 뻗어가서 수많은 열매들이 맺고 새들이 깃들고 그래서 엄청나게 커다란 나무를 만들지만 그것을 보면 시작은 작은 씨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능력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런데 그 한 구절을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인생 그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저도 옛날에 주일학교를 많이 했는데 설교할 때 기억나는데 두 어린이가 빈민가에서 교회당을 향해 걸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교회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한 어린이는 교회로 가겠다고 그러고 한 어린이는 놀러가겠다고 하면서 결국 언덕을 내려오면서 둘이 헤어져서 평생 못 만났습니다. 오랜 세월 후에 만났는데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있었고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떨어지면 그 하찮은 말씀 하나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엄청나게 바꾸어놓습니다.
저는 저를 변화시킨 몇 가지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나만 읽었습니까? 수 십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설교를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아마 수만 명도 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감화를 주셨습니다. 왜 내 인생을 바꾸어놓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떨어져서 말하자면 말씀의 그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도 없고 참회도 없이 형식적으로 와서 헌금이나 몇 푼 하고 돌아가는 예배 생활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여러분이 지금 20대라고 하더라도 60대까지 그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지옥에 갈수도 있을 것이 성경에 증언입니다. 저나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변화 받을 기회는 점점 잃어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과 예배 생활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여러분,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그 손으로 구속해주셨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여전히 옛 사람의 삶을 옷 입고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니 하나님이 받으시는 불명예를 생각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고 역사하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해서 왜 나는 깨트려지지 않을까? 이게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아는데 도대체 이 실체가 무엇일까? 왜 나에게는 예배를 드려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나의 신앙생활을 능력 있게 이끌어 가는데 거의 기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드릴이 땅을 뚫고 들어간 것처럼 그렇게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길가위에 뿌려진 그 씨는 후! 바람이 와서 불어버리니까 안 떨어진 것과 전혀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예배 시간마다 하도 다른 생각을 하고 조니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내가 어제 주일날 무슨 설교를 했어? 저는 생각이 하나도 안 납니다. 나이가 들다보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어. 그러니까 목사님 이것 좀 보십시오. 윗목에서 포대기를 여는데 뭐가 나오는가 하면 콩나물시루가 나옵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짝! 뿌리니까 물은 다 떨어졌는데 콩나물은 쑥쑥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 비유하고 그 비유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갖다놓고 해야지, 아니 기억이 안 나는데 뭘 붙들고 살겠으며 가슴에 와 닿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며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며 쫓아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구대상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가르쳐주셔서 저도 설교 시간에 아멘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통해서 전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말씀이 자기의 가슴에 깊이 깨트리고 지나가는 깨어짐도 경험하지 못하는데 시간이 자라고 있는가 보십시오. 아닙니다. 자라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교회생활의 요령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크리스천 에티켓을 배우려고 지금 여기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선 중간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가? 먼저 예배를 통해서 그 영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죄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갖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는 변하를 갖게 되는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거의 없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거니와 예배에 나오는 태도를 여러분이 크게 바꾸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장생활을 예배생활처럼 하면 벌써 몇 번씩 시말서 쓰고 옛날에 잘렸습니다. 하나님이 감사하고 은혜로우셔서 우리를 매일 받아주시니까 그렇지 자, 그 의문이 여러분들에게 깊이 다가와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를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정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저가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내 생활이 예수를 이렇게 많이 믿었는데도 도무지 변하지 않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면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2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예배에 성령이 오실 때 죄를 깨닫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또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실 때 단지 우리의 죄만 깨닫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이 예배 속에서 우리에게 깊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성품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성품들을 예배를 통해서 깊이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왜 예배 가운데 성령이 오시지 않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냉랭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왜 성령이 오실 때 늘 듣던 말씀인데도 그 말씀 때문에 큰 찔림을 받아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고 여태까지 습관적으로 살아오던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예배 가운데서는 우리의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하고 아파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일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배 속에서 느끼는 자기의 도덕적인 삶에 대한 유감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세상에서 자기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이고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중에 느끼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복된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은 단지 도덕적인 삶에 대한 후회나 유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인가를 깨닫는데서 오는 깊은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이 예배 중에 일어나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또 예배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기준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므로 나타나는 죄의식에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아무튼 이렇게 오실 때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예배 가운데 오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이 그 예배 가운데 오시면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주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깊이 경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죄와 더불어 싸우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자기가 성경을 통해서 배운 믿음의 교훈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움직여서 우리가 뭔가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삶의 표준들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정서적으로 그것을 느끼고 그것이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격동하여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모든 지성에까지라도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강하고 투철한 신앙으로 세상으로 더불어 싸우고 투쟁하는 그런 신앙을 힘들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의식이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왠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고 그리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그리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께 칭찬받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런 거룩한 열망과 그리고 사모하는 그리움들이 우리 속에서 용솟음치고 그리고 격동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성령 안에서 우리의 예배가 드려질 때 그때 우리는 우리가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진리들을 깊이 경험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에 부으심이 있고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사람들은 평범한 이야기들이 깊이 가슴을 찌르면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하는 이 평범한 성경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마음속에 깊이 다가와서 그리하여 그들이 그 하나님이 자신들을 향해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에 우리들이 무엇인가 느끼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분명히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반드시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체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그 예배 속에서는 설교는 평범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화를 끼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TV는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의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한 시간, 두 시간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을 빠져들 듯이 보다가 영화관을 나오는데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무엇인가 깊이 느끼고 깊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이 예배 중에 오시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면서 그 순서, 순서 하나를 형식으로 하나님 앞에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격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만약에 예배를 오랜 세월 드리면서 예배가 가슴에 다가오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오랜 세월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또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예배를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알게 되고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경험들을 예배를 통해 우리들이 갖지 못한다면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고 그리고 성령이 예배 증에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기도생활을 열심히 많이 하고 우리가 헌신된 삶을 살고 도덕적으로 반듯한 윤리적인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만약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지무각한 예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우리와 동해하시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교회가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지는 그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꾹 참으면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을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인내함으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러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고 그렇게 예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 속에 승리라고 하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의 진정한 변화를 하나님 앞에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생각부터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마음부터 달라져야하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지금 왔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이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들 가운데 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명백한 진리가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진리들을 깨닫고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신령과 그리고 진리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신앙의 가장 좋은 축복들을 하나님 앞에 누리고 받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차가운 마음과 침묵이 흐르는 예배로 만족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 꾹 참고 인내하면서 모든 순서가 마치기를 성숙한 태도로 기다려야한다는 것 이상의 인상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감격 없이 드려지는 예배, 그것은 곧 감격하는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냉랭한 삶입니다. 참된 참회와 뉘우침의 눈물 없이 드리는 그 예배는 곧 하나님 앞에 부서지지 않고 살아가는 그 사람의 단단하고 자아 중심적이고 교만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평생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우리의 예배가 진정 우리의 예배는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드려졌다고 말할 수 있는 예배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찾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새 힘을 얻고 그리고 새로운 소망과 그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들을 우리의 마음에 나누어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 안에서 예배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동시에 공의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도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느끼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하나님의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중에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예배 중에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들만이 예배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예배 가운데 오실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죄인들이 죄 가운데 사로잡혀 고통 하다가 용서를 받고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는 신앙의 회복을 경험하는 것도 성령이 함께 예배 가운데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느끼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경배하다가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깊이 결단하는 일들도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예배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너희가 이렇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아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리고 경박한 세상의 풍조는 예배를 주일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념식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경건했던 성도들은 한결 같이 이 예배를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 뵈옵기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영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예배에 진정한 축복은 성령이 그 예배 가운데 오실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성령이 자신들의 예배 가운데 오시기를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변화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진정으로 바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배 중에 우리 가운데 찾아오시는 성령을 깊이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식과 그리고 성령의 목마름이 없이 예배에 평생 동안 참석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도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면 한 번에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진리를 아는 놀라운 지식들을 우리에게 허락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잘못된 부분들을 깊이 회개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것들을 뉘우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위대한 변하의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예배 중에 이렇게 성령이 함께 해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위해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신령으로 예배한다고 하는 말은 동시에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고 하는 것과 통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오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받기 위해서 예배드리지도 않고 심지어는 은혜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그리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우리에게 성령과 진리로 말미암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찾고 구하는 자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예배하는 방법을 예배를 통해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의 모든 인격을 좌우하는 우리의 영혼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그리고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오가는 모든 생각들이 더욱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삶들이 질식되고 고갈될 적이 많은 것입니다. 아주 높은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육적인 사고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죄로 물들어있고 그리고 때묻어있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열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마음을 모으고 삶의 태도를 바꾸고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신의 태도를 교정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에 나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함도 없고 참된 진리도 알고 싶은 사모함도 없고 그저 때가되었고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사모하는 마음과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고 그리고 경배를 받으실 때 우리에게 주시는 그 하나님의 참답고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영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영으로 하나님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상도 잊고 자신도 잊고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과 영이신 하나님과의 깊고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들,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기 전에 어떤 일들이 먼저 있습니까? 마음을 하나님 앞에 깊이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깊이 토해놓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런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런 마음의 갈망이 없이는 영적인 깊은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잡히시기 전날 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실 때 영물인 천사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와 영혼에 힘을 더해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는 자기의 철저한 드려짐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참다운 은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받게 해주시기를 단지 바라는 마음과 그리고 그것을 정말 필요로 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그 많은 제사와 그 아름다운 번제와 그 많은 대회로 모이는 것들을 주님이 모두 싫어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삶이 예배에 부합하는 삶이 아니었고 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일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더 구별되고 간절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기를 그리워하는 영혼의 깊은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배 앞에 나아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는 어려움이 한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는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마음을 아무리 그렇게 가지려고 애를 써도 그런 마음이 잘 들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업에 대한 구상이나 직장에서 어떤 일이나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계획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온종일 떠나지 아니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드려야한다는 이 생각들은 속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기도 속에서 많이 경험되어집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 분명한 사실은 커다란 영적인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기도를 듣고 계신데 기도할 때는 하는 말만 계속해야 됩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에게 와서 뭔가를 간절히 부탁하는데 만나달라고 계속 부탁해서 시간을 내어서 만났는데 용건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사실 제가 이번에 사업자금이 좀 필요한데 빌려주십시오. 그런 이야기를 해서 얼마나 빌려주나 하고 얘기를 했는데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에 간다고 가고, 또 전화 받는다고 받고, 또 일어나서 뭐 찾는다고 돌아다니고, 돌아와서 다른 말을 하고, 옆에 누구 오라고 해서 이야기를 하고 이러면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기도 속에서 이런 일들을 너무나 자주 합니다. 기도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마음을 빼앗깁니다. 다시 또 돌아오고 빼앗기고 하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간절히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하나의 커다란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적인 삶이 갱신되는데 있어서 커다란 딜레마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습니까? 저는 우선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를 나누어서 실제적인 권고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 우리가 이전에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밥 먹듯이 늘 지각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면 여러분 지각을 하지 않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도착하는 시간을 15분이고 20분이고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겉모습의 변화가 없이는 내면의 삶 속에는 진정한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한다면 여러분들 속에 정말 영혼으로 하나님을 찾는 모습들이 어떠하겠는가를 보면서 그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 자신들이 예배하는 모습을 비교하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개혁하고 고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련회를 하거나 부흥회를 하거나 강사가 와서 집회를 할 때 때때로 사람들이 이번 집회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부어달라고 뒷방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고 혹은 당번을 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는 우리가 왜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뵙고 싶어 하는 영혼의 깊은 갈망이 있다면 우리는 또 개인적으로 모든 지체들이 함께 연합하여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주실 그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와 임재를 그리워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 면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아예 당번을 정해놓고 한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 혹은 다섯 사람을 정해놓고 그 사람들이 예배 시간마다 강대 앞에 엎드려서 그날 예배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는 훌륭한데 당번제로 정해놓고 하다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형식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문제는 모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과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그리움들이 언제나 생생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실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에 일찍 나올 뿐만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들 모두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정돈과 그리고 예배를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것, 건강한 육체로 예배를 준비하는 것, 예배에 하나님 앞에 바쳐질 헌금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옷차림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렇게 단정한 차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준비하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만약에 보이시는 모습으로 주일마다 우리 가운데 더군다나 우리가 좋아하는 복을 들고 오신다면 우리의 옷차림도 달라질 것이고 예배당을 향하는 우리의 시간도 달라질 것이고 앉아있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질 것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의 마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의식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되는대로 드리고 그리고 시간 닥치는 대로 드리는 이런 예배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다 드려지지 않는 것에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경배가 있을 수 있겠으며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예배가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예배하는 우리를 진정 기뻐하신다는 은혜의 놀라운 표징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점에서 우리는 예배의 실제적인 태도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일들을 우리들이 한번 잘못되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 아마 그렇게 자주 지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석하는 것은 얘기할 가치도 없으니까 여기서 언급도 안 하겠습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깊이 생각하면 아마 고쳐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쯤이야’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너와 나의 무의식과 하나님 앞에 마음이 바쳐지지 않는 예배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가 형식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들을 우리는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실제적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바빠서 1절하고 4절만 부르고 마치겠으며 뭐가 바빠서 예배 시간에 일주일 만에 성도들이 모였는데 딱 1-2장 찬송을 부르고 설교하고 끝나고 1장 찬송 부르고 헤어지는 찬송 부르기에 인색한 이런 예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을 주겠으며 그렇게 절약한 예배 시간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는데 얼마나 훌륭하게 기여를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멍하게 앉아서 TV를 보거나, 쓸데없는 가치도 없는 잡지를 보거나, 아니면 전혀 우리의 삶의 유익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흘려보내는 시간들은 아까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 시간을 통해서 예배를 콤팩트하게 드려서 시간을 절약해보려고 하는 이런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유익을 주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송 부를 때 1장을 불러서 하나님을 깊이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2장을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이미 찬송을 통해 깊이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찬송을 통해 깊이 느낄 수 있도록 3장, 4장, 5장 할 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찬송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그리고 생명과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을 노래하는 찬송을 우리들이 많이 불러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들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설교가 예배의 한 순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에 다는 아닙니다. 설교하기 전에 들어오고 설교 끝난 다음에 나가는 이것이 곧 우리의 진정한 예배로 말미암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욕구와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는 더욱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려고 하는 마음의 욕구가 사라진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통해서 은혜주시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도 없이 그렇게 스쳐지나가 버리는 것 같은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헌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의식도 없고 헌금에 대한 생각도 없이 와서 불쑥 헌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고갈시키는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지만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은 부담이 될 정도로 드려서는 안 되고 두 번째는 아무 부담 없이 드릴 수 있는 그런 적은 액수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각 순서 하나, 하나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배어있는 예배의 순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면서 우리가 자신을 먼저 바친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헌금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축도를 들을 때 마찬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주기도문을 할 때도 똑같은 것입니다. 순서 순서마다 그리고 그 모든 순서 갈피마다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마음을 다해 드리고 그리고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실제적인 예배를 위한 개혁은 우리가 우리 삶 자체를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단정한 차림으로 정해진 시간에 나왔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영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하고자 결심도 하고 예배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삶이 하나님 앞에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이 하나님 앞에 교정되고 고쳐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주일 동안 살아간 그 삶이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안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없이 일주일을 살아가다가 주일날 불쑥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니까 예배가 한없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말씀생활을 잘하고 기도생활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 앞에 주일이 다가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그렇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다가 오면 우리의 예배가 더욱 감격적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힘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그리고 예배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성령이 함께 하시는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예배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데 중요한 조건인가 하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예배의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교회는 많은 프로그램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많은 행사들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예배에 모으고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뵈옵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마음들을 하나님 앞에서 넣어줄 수 있는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
예배에 있어서 두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은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또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오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단순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주님을 기념하면서 드리는 기념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예배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어떤 곳보다도 예배야말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찾아와 주시겠다고 하는 가장 확실한 약속을 받고 있는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얼마나 참석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성화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것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하고 또 거룩한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고 그리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는 뭔가 많이 잘못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는 예배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더 딱딱하고 굳은 심령으로 만들어서 바리새인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활하도록 만들어주는 잘못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다면 깊이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가 많이 잘못된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교회 안에 5년, 10년씩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모태로부터 예수를 믿었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의 삶속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표징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참된 신자와 그릇된 신자로 구분하고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구별할 때 그 표지는 오랫동안 다닌 그 교회의 교적부가 아닙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거듭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도 지옥에서 만나서 불 가운데 동창회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져왔는가? 여러분 우선 하나님과의 풍성한 만남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던 구약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는 많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습니다. 요셉도 그랬고 그 후에는 하나님이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 회중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주시는 그런 일들을 자주 행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의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누군가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경건한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만났을 때 그 만남이 있는 곳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새로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출애굽기 6장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을 여러분 기억해 보십시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교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만 있고, 감정적인 흥분이 있고, 감격이 있고, 그리고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그 만남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한 번도 그렇게 하시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만남을 주실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우아한 모습을 한번 보이시고 지나가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경탄하는 경배자로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모델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백성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때에는 언제나 거기에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죠. 신약으로 돌아와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 때에 그 천사는 그냥 나타나서 세상에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또 그 천사를 보내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넌지시 보여주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네가 지극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는 분명히 그 세례 받는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분명한 웃음소리나 아니면 고함치는 뜻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교훈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고백을 받으시던 때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변화 산에서 변화되시던 때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그 곳에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이 있었고 지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교훈과 함께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예배를 통한 만남은 지식과 함께 다가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예배에 농축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한다는 그 갈망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뵈옵기를 사모하는 그 갈망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야지만 그것이 정말 올바른 갈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박수를 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의 갈망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의 체험을 많이 하였고 또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엊그제 어느 출판사에 갔는데 그 출판사 대표되시는 분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를 하는데 ‘목사님 글들을 제가 쭉 읽어보았는데 체험이 참 많이 하신 것 같은데 그 중에서 제일 놀라운 체험이 어떤 체험이었습니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병도 나아봤고, 또 고쳐보기도 했고, 성령의 각양 은사들을 받아보았지만 그러나 최고의 압권은 하나님의 말씀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나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위에서 굉장히 많은 체험들을 했는데 이상하게 신앙이 견고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고, 어느 한 신앙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지도 못하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오늘 제가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정리를 하자면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 이유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귀신을 체험하기도 하고 또 그래서 성령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병이 낫는 체험을 하기도 하고 귀신이 내어쫒기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사 속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리고 체험적인 신앙을 갖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뜨겁게도 하고 그리고 그가 뭔가 이렇게 거룩한 열정에 불타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냉랭한 사람도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릴 때 한번 성령의 놀라운 은혜의 불이 떨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많은 체험들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렇게 신앙이 견고하고 뭔가 사람이 근본 바닥부터 바뀌는 일들이 없고 체험을 가진 그나 체험 없는 나나 결국 나중에 고무줄 줄어들 듯이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오늘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성령이 다양한 체험들을 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 체험들이 우리를 굳게 붙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체험을 통해서 받았던 그 진리가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성령을 체험하면서도 진리를 체험한 사람들이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이 그리고 한 가지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와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체험에도 불구하고 쉬 흔들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진리는 예배에 있어서 무엇이겠는가? 진리는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다리입니다. 다리에요. 그러니까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죠. 물론 이 다리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리만 있고 사람이 건너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나 또 수많은 사람이 있어서 건너가고 싶어 한다고 할지라도 다리가 없으면 건너갈 수 없는 것이잖아요. 한 교회에서 올바른 진리의 말씀이 선포된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깨닫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격적인 하나님을 올바르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다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목적지가 여기서 여기를 가야하는데 다리가 애초부터 이렇게 났다면 열심히 믿고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다른 곳으로 가게 되겠지요? 더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겠지요? 한 십여 년 전에(십년도 넘었나보네요) 제가 어느 목회자들이 모여서 희랍어 성경을 공부하는 곳에서 제가 함께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같이 공부하는 클래스에 아주 미모의 여성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분이 뭐하는 사람인지…….전도사나 목사가 같지는 않은데 왜 원어성경을 배우러 왔을까? 아주 멋쟁이에요. 옷차림도 그렇고 모델 뺨치게 하고 나와요. 뭐 생전 이야기도 한 번 건네 보지 않았는데 우리 몇 사람을 이렇게 부르더니 자기가 오늘 저녁에 섬기려고 하는데 자기의 섬김을 받아주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무슨 섬김이요?’ 저녁을 한번 내겠대요. 그래서 ‘종종 애용하시라고…….’ 그래서 지하실로 내려갔어요. 자장면이나 한 그릇 먹으려나? 했더니 아휴 탕수육에다가 군만두에다가……. 뭐 가난하던 신학생시절이니까 뻥뻥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전도사가 그래요. ‘전도사님! 우리 저녁 사주는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나는 몰라’ 그랬더니 이단의 교회 전도사래요. ‘알면서 왜 여기에 오자고 그랬느냐?’ 하니까 ‘저녁 먹는데 이단한테 얻어먹었다고 해서 그게 죄가 되겠느냐?’ ‘자장면이야 이단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그래서 그런지 그때부터 이상하게 소화가 안돼요. 아! 그런데 저녁을 사준 저의가 있었어요. (이단이라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시비가 많은 교회에요. 어느 교회인지는 얘기안하겠는데…….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단이라고 찍힌 교회인데…….) 자기는 이 원어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자기네 교회의 귀신 론이 맞는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하나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교회에서 올바른 진리가 가르쳐지고 선포되지 않으면, 다리가 잘못 놓여있으면 열심히 듣고 탐구하고 배우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점점 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오늘 우리는 또 하나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전해지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해지는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성도들의 태도를 따라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또 하나는 듣는 회중이 거기에 올바르게 반응할 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직접 빽빽한 구름가운데서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상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숙해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을 줄이시고 오히려 한사람, 한사람 선지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그 시대를 향한 음성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을 뵈옵게 하시므로 그들이 진리로 자기를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진리로 그들에게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그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지만 이제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의 말을 말해야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설교가 성경을 말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향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올바른 말씀, 그 다음에 그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 그 위의 성령의 축복 이것이 있을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에 대해서는 지난시간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축복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와야한다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예배 안에 또 하나의 진리의 요소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진리의 요소가 있는 이것은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만남이 내 삶을 바꾸어놓고, 그리고 나의 식어진 신앙생활에 새로운 은혜의 기름을 붓고, 그리고 거듭나지 못한 내 영혼에 진정한 거듭남을 주는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 일들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시간은 단순히 예배의 한 순서일 수 없습니다. 청교도시대에는 그래서 설교하기 전에 성경을 큰소리로 많이 읽었어요. 심지어는 두 장씩 같이 읽었습니다. 예배시간이 굉장히 길어지겠지요? 두 장씩 석 장씩 그렇게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찬송도 있고 모든 것이 있지만 그러나 그 예배는 하나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게 뭐에요? 하나님과의 만남!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 시간을 향해서 올라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그 다음에 정리하면서 우리는 다시 그 산을 다시 내려오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청교도 시대에는 성경읽기가 그토록 중시되었던 이유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면서 그 예배를 통해서 성령을 주시기를 기대한다든지 혹은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진정한 뭔지 모르지만 만남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곳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하나님 앞에 많은 약속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의 성취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예배에 나오게 하실 때에 여러분들은 더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공생애에 등장하셔서 구속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하시기 시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불러다놓고 병든 사람 줄을 세워놓고 하나씩 안수기도해서 고쳐주고, 부자 집의 돈을 강탈해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일지매처럼 가난한집 담을 넘어서 문고리에다 걸어놓고 오는, 그런 일들을 예수님이 먼저 하신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등장하자마자 그 시대에 타락한 정권의 상징이던 헤롯에게 찾아가서 ‘네! 이놈’ 외친 것도 예수님이 먼저 하신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황제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을 박해하고 있는 로마의 심장부로 구름을 타고 가서 가이사에게 혼내주고 가이사에게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어서 그를 무릎 꿇게 만드는 일도 예수님이 처음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일은 공생애에 들어서자마자 갈릴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두루마리 중에 하나를 달라고 말씀하시고 이사야서를 펴서 구약성경을 천천히 해설하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도록 이사야가 한 말보다 훨씬 쉬운 말로 그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공생애에 오셔서 처음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회당에서 몇 사람 모인 곳에서 두루마리 펴놓고 ‘성경의 이것은 원래 이런 뜻인데…….’ 하고 나직나직하게 가르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해가지고 온 세상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고 구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실 수 있겠는가? 미련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사도 바울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이 일에 있어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일을 통하지 않고는 그 일을 행하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안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면 정확하게 30분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그 진리의 말씀을 예배를 통해 깨닫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도록 그렇게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교회에 오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일주일 동안 별로 와 보지 못했던 이 교회당에 발을 들여놓고 이 포근한 분위기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는 못했지만 손을 모으고 주악에 맞춰서 묵도를 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제일 먼저 기도하셨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가장 먼저 간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셨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의 기도제목으로 안타까워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모든 그 안타까운 문제들의 궁극적인 해결은 미련한 방법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 XXXXX 그렇기 때문에 깨닫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이 기도의 제목을 위해서 금식하신 적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그것을 집요하게 기도제목으로 올려놓고 ‘하나님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은 나를 시편73편의 기자도 깨닫게 하였사오니 주여! 주의 그 은혜의 손으로 나의 눈을 열어 종으로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내려다보실 때에 물을 구하고 떡을 구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바람과 사모함으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흘러갈 것입니다. 쾌락은 끝이 나고 우리의 심령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주위를 훔쳐갔던 세상의 성공과 그리고 이 세상 속에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바쁜 삶의 수레바퀴가 어느 날 불현 듯 멎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보좌 앞에서 무엇에도 속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못했고 여러분들의 삶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실 때에 여러분은 어떤 운명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이제 거듭나지 못한 우리위에 떨어질 때에 우리는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후회하고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애원해도 그 때는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거듭나고 아직까지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오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리 앞으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고 길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여러분들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것을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이제껏 자신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었던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믿음과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는 일도 이 일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거짓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미워하고, 혐오하며,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놀라운 기쁨과 그리고 천국의 놀라운 향취를 우리 온 몸으로 받아 누리는 일들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험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보내실 때에 주님이 거셨던 기대와 하나가 된 생활을 함으로 말미암아 삶속에서 모든 갈등을 물리쳐버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잘 때 자녀들에게 늘 주고받는 인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쉐마’, ‘쉐마’ 명령어입니다. ‘들어라’ 그것이 취침인사입니다. 무엇을 들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누리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눈에 보이는 징표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니 바로 듣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제가 지금 말씀드리니까 기억이 나실 거예요. 구약성경을 들춰보면 ‘들으라.’ 고하는 동사가 5000번 이상 나와요. 5000번 상 나오다는 이야기는 성경책 한 갈피도 그 동사 없이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지도자들을 찾아오시는 경우가 있지요. 그렇지요? 아론이나 모세를 찾아오시는 경우가 있었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찾아오실 때에 제일 먼저 즐겨 쓰시는 말씀이 무엇이지요? ‘들으라.’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그 말씀을 받아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갈 때에 그 외치는 하나님의 종이 제일 먼저 즐겨 사용하던 후렴구가 무엇이었지요?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는 들을지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최대의 축복도 어떤 조건을 담보로 해서 약속되어 있지요? ‘너희가 만약 내 말을 잘 듣고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제사장나라가 되게 해주리라.’ 이런 사실은 뭐 지루할 정도로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정말 주님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신앙을 충만하게 가지고 있을 그 때에는 ‘주께서 말씀하시매 이스라엘 온 회중들이 이 말씀을 기뻐 듣더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모든 백성이 들어 가로되…….’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패역해져서 그 이스라엘 사회에 희망적인 기운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명령하시잖아요? 그렇지요? 심판을 예고하시잖아요? 심판을 예고하실 때에 그 심판에 이유를 말씀하실 때에 즐겨 나오는 성경구절이 무엇이에요? ‘이 백성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가 선지자들을 보내었으나 이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듣지 아니하므로 주께서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이러한 묘사가 성경에 지루할 정도로 계속 반복되어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는 회중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하거나 원만해지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누군가가 썼어요. 호라시스 버나라는 사람이 18세기에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썼는데 ‘이렇게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설교하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쉬운 일입니다.’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간절한 갈망, 깨닫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귀를 기울이려고하는 사모함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든지 그것이 사람들 마음속으로 아주 깊이, 깊이 빨려 들어가고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꽂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어느 날 한번 보십시오. 우리교회는 그래도 양반입니다. 여러분 저는 집회하러 다니면서 도대체 왜 나를 불렀는가? 하고 반문하고 싶은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제가 진주에 집회를 하러 갔습니다. 뭐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분들이 오셨습니다. 설교를 했습니다. 3월부터 나를 와달라고 목을 매요……. 그래서 바쁘다고 그래도. 그래도 와야 된대요. 그래서 와! 뭐 이렇게 목을 매니 엄청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웬걸 스물 댓 명 모였는데 여기서 설교하는데 뒤에서 이것을 다 풀고 ‘후, 후, 후’ 예배시간에 이러고 있어요. 러닝 속에 손을 집어넣고……. 그런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겠어요? 내가 거기가 설교단과 수양관만 아니었으면 무엇을 팔러 가서 그랬으면 보따리 싸가지고 벌써 왔어요. 파는 것이 신, 구약이니까 내가 진짜 거기서 끝까지 그 모욕을 견디면서……. 양말 벗고 발가락을 쑤시고……. 그게 그 교회의 중직자들이예요. 강사가 내리니까 대표자라는 사람이 와가지고 ‘어! 강사 오셨소?’ 내가 첫 시간부터 알아봤어요. 그러더니 진짜 선한 것이 없더군요. 어떻게 예배시간에 이것을 풀고 거기서 설교를 하는데 ‘후, 후, 후’ 차라리 밖으로 나가지……. 이게 오늘 한국의 현실이에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으면 뭐합니까?
신학교에도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다 전도사들 아니에요? 수업하다가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지난 주(어려운 것 묻지도 않았어요) 주일 낮, 저녁, 수요예배 설교제목하고 본문을 물었다고요. 그런데 그 전도사들이 10명 가운데 정확히 2명이 대답을 해요. 나머지는 신약인지 구약인지도 생각이 안 난대요. 한사람은 좀 나은 사람은 계시록의 뭐 말 타고 다니는 얘기였는데 그게 무슨 색깔의 말이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난대요. 그리고 또 한사람은 애 보느라고 못 들었대요. 여러분 교회에서 신학교 다니는 사람들이 그 정도인데 성도들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에요. 이런 예배? 하나님이 받아주실 리가 없지요. 무엇을 사모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배에 관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온통 관심을 다 쓰는 것이에요. 냄새나는 강대(진짜 냄새가 나더라고요. 강사가 강대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요.) 향나무로 깎아서……. 그것이 성경적이래요. 아! 그게 성경적이면 이것 다 때려 수고 예루살렘 성전스타일로 지어야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 그리고 10억짜리 파이프 오르간, 그 다음에 양탄자 좋은 것, 뭐 그런 것에만 신경을 쓰는 거예요. 그게 전부 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요.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있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은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제가 직장에 다닐 때에 직장에서는 기독교 모임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그 중의 우리 회원가운데 한 사람이 물품담당자가 있었어요. 그 담당자한테 이야기를 해가지고 (우리 후배였으니까) 점심사면서 잘 구슬렸지요. 그래 가지고 물건이 쌓여있는, 큰 종이도 쌓여있고, 기계도 쌓여있고, 그 창고에서 종이뭉치를 의자로 놓고 모여 앉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어요. 거기서 목사가 두 사람이 나왔어요. 모이는 그 모임에서 두 사람의 목사가 나왔어요. 그 누가 알겠어요? 지금은 다 개축했겠지만 그 때도 가면 그 창고 앞을 지나갈 때면 온갖 아스라한 추억이 가슴깊이 진하게 밀려와요. 왜 그래요? 거기서 진리를 알았고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소망 없이 살다가 오늘 기도하신 김 집사님 말씀처럼 마른풀같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목사가 되게 하시고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십 억짜리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 그런 것과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왜 그런지 이 예배당이 정이 들었어요. 그동안 너무 추억이 많이 쌓였어요. 여러분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때에 우리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진리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들이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들으려고 하는 열심히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도록 해결을 해야 되요. 혹시 설교자가 못마땅한 게 있어서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면 전화해서 이야기를 하고 싸움이라도 해서 푼 다음에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와야 해요. 인격적으로 갈등을 느낀다면 그것을 풀고라도 말씀을 들어야 되요. 또 여러분들이 피곤해서 만약에 너무나 피곤해서 그렇게도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이 오기 전에 각성제라도 먹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요. 그렇게 생각해요. 바늘로 찌르면서라도 예배를 드려야 되요. 잡다한 생각 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헛갈리고 있다면 예배드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예 금식을 하고 마음을 비우고 나와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이 일은 단지 벽을 향해 돌아서서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쥐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유명한 강사나 훌륭한 집회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꿈꾸는 것이 있습니다. 수련회가 필요 없고 부흥회가 따로 필요 없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꿉니다. 왜? 매 주일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과의 너무나 풍성한 만남이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간직하며 살아도 능히 불꽃처럼 살 수 있어서 더 큰 불이 내리는 집회가 필요 없는 그런 교회, 그렇게 따로 휴가를 받고 모여서 전폐하고 특별히 말씀을 듣는 시간을 정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없는 그런 교회, 그것이 제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교자가 책임져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 것은 누구에게도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충분히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쳐주십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격적인 깊은 결단, 교회생활에 대한 놀라운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우리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열린 교회 말고 닫힌 교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무슨 소린지 아세요? 은혜가 떨어지면 자꾸 뒤로 가더라고요. 그리고 집중이 떨어지면 자꾸 고개를 숙이고 다른 생각을 해요. 여러분 마음을 다 기울이고 들어도 그래도 귀를 기울이고 애를 써서 들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예배를 드리면서도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잖아요? 그렇게 방해를 받는데 아예 귀를 기울이고 들을 도전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이 변화 받는다면 그것은 정말 연구대상이에요. 불가능한 것이에요. 여러분 5년, 10년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거듭나지 못하고 거의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세요. 딱 하나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말씀을 듣지 않고 들어도 가슴에 단 10분을 담아두지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무엇을 들었는지……. 그런 사람을 만나서 요즘 목사님의 메시지가 어떤 흐름이냐고 물어보면 눈을 껌벅거릴 거예요. 소리를 지르고 뭐를 열심히 하라고 그랬는데 생각이 안 난다. 거기에 변화 없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듣는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격적인 감화를 주시고 그리고 변화를 주실 것을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결정하셨을까요? 자! 이렇게 우리는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인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과 비례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시편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찬양)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혼신의 힘으로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인의 얼굴을 그리게 되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간절히 부르짖는 나의 애원이 무엇인지 하나님! 귀를 기울여주시옵소서.’ 이 마음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깊이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깊이 열렬하고 뜨겁게 기도한다는 것은 외면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면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이는 그 간절한 마음이 곧 기도의 영이란 말이에요. 그 기도의 영으로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듣는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물론 믿음은 우리가 아주 근사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믿음일 수 있어요. 그런데 ‘에이든 토저’라고 하는 사람의 말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유익을 줍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그것은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을 오랫동안 주시하고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때요? 구원을 위해서도, 변화를 위해서도 우리 스스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어요. 그렇지요? 심지어는 예배도 저절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줄 수 없어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복음을 들으면서도 하나님만이 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만이 내 소망인데…….’ 하면서 내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것을 주목하고 있는 것…….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에요. 그것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보셔서 그런 사람들에게 합당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변화와 축복의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의 말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에 관심 없어요. 한분만 나를 알아주시면 되요.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고, 나를 정죄하고, 가망이 없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내가 아직까지도 너를 버리지 않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주님 한 분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살 수 있고 흑암을 지나면서도 빛을 향해서 우리가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마음이 바로 기도하는 마음이잖아요? 그 마음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간절히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은 그 태도 자체를 믿음이라고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대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영혼의 변화를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깊이 깨닫게 되고 그 위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셔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때에 체험이 일어나게 되는데 예배 속에서 체험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예배의 체험은 은사의 체험하고는 다르다는 말이에요. 진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을 경험했어요. 지체들이 설교를 들었는데 몇 년이 지났는데 거의 그 설교를 완벽하게 기억해요. 왜? 진리가 들어가고 그 진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그 장소, 그 상황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에요. 여기 결혼한 여러분 우리 교인들 계시죠? 여러분 아무리 머리가 나쁘고 아이큐가 낮아도 결혼식을 어디서 했는지 잊어버릴 수 있어요? 장소를 잊어버리고, 그 분위기를 잊어버릴 수 있고, 목사님 주례할 때 들려주시던 그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고요. 똑같은 것이에요.
그러므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여러분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전심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없게 하는 모든 잘못된 요소들과 더불어서 여러분 피나게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전심으로 깨닫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사오니 하나님 나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다른 지체들에게 주셨던 동일한 변화들을 하나님! 나에게도 주셔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한번 드러내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이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는 어떻게 듣는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1-23).
지난번에는 이제 예배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다가 예배의 두 번째 요소인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해야지 옳은데 실제로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에서는 단지 하나님과의 격정적인 만남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만남 속에는 언제나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남겨주시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예배에는 진리를 알고 깨닫는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 진리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인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이 예레미아 7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들을 7장에서 상세히 설명하시면서 다시 한 번 선지자를 통해서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말씀을 깊이 헤아려볼 때에 우리는 단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고,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찬양을 하고, 하는 것만이 예배의 모든 조건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번제의 희생물을 아울러 너희는 그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권고의 말씀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문맥상 좋은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하여 말하자면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마구 말씀하시는 격정적인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희생의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보면 어떻게 되어 있느냐하면 ‘희생위에 번제물도 더하여서 먹으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미 너희들이 드리는 이 제사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희생물 위에다가 번제물을 올려놓고, 거기다가 고기를 올려놓고, 떡을 올려놓던지 말든지 너희 맘대로 해라 하나님께 너희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만 그러나 너나 잘 먹어라.’ 라는 표현으로 야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언제 너희에게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였느냐? 그런 적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반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될 수 있고, 거룩한 모임이 될 수 있고, 구별된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또 살기 위해서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올 때 일주일 동안에 살았던 삶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까? 일주일 동안 내가 살았는데 정말 이것이 오늘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삶인가? 그런 자기 자신의 영혼의 깨어짐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 희생제를 드리고 번제물을 쌓으면 그것이 마치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책망으로부터 자기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제사 그 뒤에는 그 제사의 정신에 어울리는 삶을 산 그 사람의 삶, 그리고 또 그 제사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인하여 아파하는 상한 심령,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제물보다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또 그것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고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깊은 감격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던 그 모든 은택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 헌금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거나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살고도 하나님 앞에 예배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부담을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부담이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고로 제낄거야! 이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그렇게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 저는 이 예배에 전혀 어울릴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옵나이다. 주님! 일주일 동안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위선스럽게도 여기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까? 또 많이 해도 그렇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경건한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묵상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그런 시간들을 우리들은 기도속에서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우리 자신들을 많이 비춰보고 있습니까? 요즘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고 계십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까? 깨닫는 기쁨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그리고 위로하시고, 권고하시고, 의로 우리를 교육하시는 즐거움들을 성경책 속에서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예배에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많이 예배하여도 하나님이 ‘너희끼리 실컷 놀아라.’ 말씀 하실지 모른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온전하게 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일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초청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자들아 너희는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의 무거운 짐이 무엇을 인하여 너희에게 짊어진 것이든지, 그것이 너희의 죄악을 인한 것이든지, 혹은 고통스러운 너희들의 삶의 환경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무지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당하게 된 짐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너희는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수고하고 고통 하는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주님은 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곁에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과 그리고 고통스러운 멍에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그것이 아무리 죄로 말미암은 짐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 동일한 고통을 누리는 마음으로 찾아가셔서 그들의 멍에를 벗기시고 자유를 주시기 원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이 고통스러운 멍에를 죄의 짐을 지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는 인생들에게조차 다가가셔서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셔서 문을 열어 자신이 숙명처럼 짊어지고 온 무거운 무지와 죄악과 불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가장 극력하게 보여주신 그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선교사로서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사도 바울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만나자마자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네가 가시를 뒷발질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바울에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자신을 직접 박해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그의 손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계실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박해받고 고난 받는 성도를 바라보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박해와 진배없었습니다. 경건한 성도들이 믿음을 인하여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마음에는 피가 흐르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사울을 만났을 때에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사도바울의 반역하는 행동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회를 박해하며 살아가는 사도바울이 그 영혼 속에서 겪어야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 바울의 깊은 고통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네가 가시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구나!’ 보이지 않는 가시를 자기의 발에서 뒷발질 할 때에 뒤꿈치는 그 무수한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의 가시는 작은 것이 아니라 매우 커다란 가시들입니다. 거기에 찢겨 뒤꿈치가 찢기고 피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핍박하는 자를 향해서도 그 핍박가운데 겪게 될 영혼의 고통과 심령의 아픔에 대해서 괘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을 모두 부르시는 것입니다. 의인이 모이는 예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고 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할만한 자격이 없는 그러한 부족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진 심령으로 나아오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가장 훌륭한 제물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아름다운 번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도무지 자기를 스스로 고칠 수 없고 자기가 깊이 병들어 있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전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자격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거기를 떠날 수 없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죄인에게는 그것밖에는 소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할 만한 일주일 동안의 삶도 살지 못하였고, 그리고 이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약속할 자신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의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올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며 긍휼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 죄가 주홍과 같이 붉고 살아온 그의 인생의 나날들이 수치와 부끄러움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들의 예배를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배가 하나님 앞에 올려 지지 않던 시기에는 언제나 그 예배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그 예배가 올려 지던 때에는 언제나 우리 같은 죄인이 삶을 보나, 그리고 마음을 보나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자격이 있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가치를 자신들 안에서 전혀 발견하지 못하던 사람들, 그들이 모인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왜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예배 중에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고 그 말씀들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지 깨달았고 그 말씀이 영혼을 주장하여 어두운 세상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렇게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 왜 예배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지를 온 몸으로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왔고 그 예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배의 정신으로 살아가며, 그 예배의 정신으로 고난을 받고, 예배의 정신으로 위로를 받으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갔던 것입니다. 예배에서 만난 하나님을 삶을 통해 보여주고, 삶을 통해 알게 해준 그 하나님을 예배에서 다시 경험하게 되는 순환적인 축복들을 경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지하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만남의 은혜를 누릴만한 자격이 없는 인생들인가 하는 것을 철저히 자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과 오늘도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어야겠다는 그 열망사이에서 그들에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영원히 단번에 자기의 옥체를 가르시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바라볼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송하기를 즐겨하였고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주심이 절실하였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나아갈 적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해 죽으신 구속의 공로와 중보의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우리를 위한 거룩한 중보의 보혈 없이 이 세상에 어떠한 의인도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인생들이 없으며 그에게서 흐르신 거룩한 십자가의 보혈이 있는 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뵈옵기에는 너무나 더럽고 추한 죄인들도 없다는 사실을 성도들은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 그들의 온 마음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향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과 대속의 공로가 오늘 자신들의 불순종과 죄악과 무감각한 마음 때문에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의 공로를 온전히 자기들 속에 역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했습니다.
거룩한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이 땅에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의 영혼 속에 부어져서 이 지상에 모여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가운데 마치 하늘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온 것과 같이 되었을 그 때에는 그 모든 예배의 축복이 오직 자신들의 의로움이나 자신들의 헌신적인 예배태도나 심지어는 목사 때문이거나 혹은 설교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설교자를 바라보고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기에는 그들의 시선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너무나 크게 다가왔습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들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예배 속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배 속에서 갈증을 느끼든지, 커다란 만족을 느끼든지 언제나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찬송의 대상이었으며 경배의 이유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에 모일적마다 다시 한 번 자신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과 그가 자기의 육체를 온전히 버려 우리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이 그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야하는가 하는 이해를 예배를 통해서 분명히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주신 그 은혜와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열어놓으신 하늘의 모든 신령한 축복과 은혜들의 부요함을 예배를 통해서 누렸기 때문에 그들은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를 붙들며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배의 이러한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를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살아있는 나무는 내리는 비로 말미암아 더욱더 싹이 나고 그리고 푸른빛을 더하여가고 생명을 잃어버린 나무는 내리는 비로 인하여 더 깊이 썩어갑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참된 예배야말로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인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인지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예배가 드려져야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기뻐할 수 있는 예배가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거룩한 권세가 있고 그리고 그 권세 속에 진리가 선포됨으로 말미암아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속에 있는 이 세상적인 본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와 마주하고 자기가 살아가고 싶어 하는 본성과 어울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들려올 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고뇌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형식과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겉모양과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외형 자체를 중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번제와 희생에 대하여서 말하였느냐?’ 고 반문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출애굽기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주고계신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삶속에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형식이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떠날 때에 두 손을 굳게 주먹을 쥐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인하여서 어두운 세상을 정말 하나님의 이 말씀과 교훈을 따라서 살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불타는 결심으로 교회당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드리는 예배는 그 사람의 영혼에 고등한 종교적인 오락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들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번제와 희생에 대해서 말하더냐? 내가 이것으로써 너희에게 말하였나니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시내 산의 사건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급을 출발해서 그들은 홍해를 건너 시내반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내 산에 모여서 약11개월 동안을 거기에 머물면서 하나님 앞에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가나안까지 갈 것이며 또 가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하나님께서 법도를 주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제사를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십계명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십계명을 다 가르쳐주시고, 성막에 대해서 가르쳐주시고,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 순종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서 단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만 하면 그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참된 진리가 선포되어져야하는 것과 함께 믿음으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회중들의 반응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진리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예배에는 단지 진리가 선포됨으로 말미암아 진리 안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선포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반응하는 성도들이 있을 때 그 예배가 진리 안에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들으라.’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 예배가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듣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배시간에는 질문을 받지 않을까요? 왜 설교시간에는 한사람씩 나와서 토론하고 그렇게 결론에 도달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한 사람이 나와서 설교하고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수가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일만 명이든 오십만 명이 모이든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도록 되어있는 이 예배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하고 전도사하고 싸우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예배에서는 찬송이 최고다!’ 또 한쪽에서는 ‘진리를 듣지 않는데 찬송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면서 싸우는 거예요. 왜 ‘찬송이 최고다.’ 라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말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찬양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어나서 영광송 1장을 부를 때에 목사를 바라보며 이 찬송을 부르지 않지요?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이 찬송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교훈하는 것이기 때문에 찬송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설교는 목사와 회중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설교가 찬송을 능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 뒤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 당신 자신이 설명해주시는데 ‘나는 많은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였지만 너희는 듣지 아니하였도다.’ 듣지 아니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리 안에 예배가 드려진다.’ 는 말의 우선적인 의미가 바로 올바로 하나님 앞에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설교에 대해서 바르게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삶으로 반응하기 전에 먼저 듣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실제적인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데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심각한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너무나 피곤하고 감당할 수 없으면 조는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요, 또 육체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너무 피곤하면 졸수도 있지 않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선배 목사님은 졸면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자기가 설교하다가 졸아 본적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니 다른 거야 졸면서 하지만 어떻게 설교를 어떻게 졸겠는가?……. 한번은 옛날에 제가 모시고 계시던 목사님하고 심방을 갔는데 연로하시니까 고단하시겠지요. 아무튼 저도 그분에게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심방을 새벽 6시부터 그 다음날 새벽 1시까지 했거든요. 마지막 집이 12시 반에 심방을 받았는데……. 그 목사님도 하여튼 대단하셨어요. 최고기록이 제가 22집의 심방을 따라 다녀봤습니다. 22집……. 왜 안 놀래요? 22집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 가셨는데 목사님이 말씀을 쭉 하시다가 잠시 그치셨어요. 그러고 나서 성도들이 뭐라고, 뭐라고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느냐?’고 그렇게 물었는데 코고는 소리가 들렸어요. 책상다리를 하고 고개를 조용히 숙이셔서 (경청할 때 이렇게 고개를 숙이시거든요.) 경청하시는 줄 알고……. 인간인데 그럴 수 있지요…….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계속해서 그런 일들이 되풀이 된다면 그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고 영혼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날 기도원에 집회를 하러 갔습니다. 열심히 집회를 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막 나오는데 겨울에 점심공기가 아주 싱그러웠어요. 그래서 가슴을 피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저기서 누가 털벙거지를 이렇게 쓰고 잠바를 입고 걸어와요. 걸어와서는 나한테로 가까이 걸어오는 거예요. ‘전도사님 안녕하십니까?’ 못 알아봤어요. ‘누구십니까?’ 이렇게 보니까 옛날에 내가 그 교회에서 섬길 때 함께 섬기던 교사하던 선생님이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건강하던 몸이 완전히 반쪽이 되어버렸어요. 피골이 상접했어요. 그래서 ‘아니 집사님 이것이 웬일입니까?’ ‘전도사님 제가 이제 사형선고를 받고 마지막으로 기도나 해보려고 이 기도원에 올라왔습니다.’ ‘뭐랍니까?’ ‘췌장암이랍니다.’ 그런데 바짝 말랐어요. 기도 좀 해 달래요. 그래서 제가 왜 안 해주겠어요? 어떻게나 눈물이 나는지 그래서 이제 강사 방으로 가서 내가 먹을 것을 접대하면서 근황을 묻고 내가 정말 남이 가지고 있는 그런 신유의 능력은 없지만 정말 심령을 다 바쳐서 기도를 했어요.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기도를 해 주었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가고 난 다음에 내가 그랬어요. ‘아!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다시 말하면 그분이 계실 때가 수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을 크게 만나던 제 목회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물 붓듯 쏟아지던 그런 놀라운 회심과 변화가 있는 그 목회의 시기였어요.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정확하게 1년 6개월을 주무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예배의 전 시간을 자는 거예요. 찬송할 때부터 자기 시작해서 설교시간에는 목을 못가누어요. 깨어있는 시간은 공과공부시간 딱1시간 깨어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을 그렇게 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대들고, 반감을 갖고, 그러더니……. 그 후에 기도원에서 그렇게 만나면서, 제가 기도를 해주면서 예전에 가졌던 그 사람이 나를 향한 어떤(노골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은근한 반감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그런 심령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해주면서 내 마음속으로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맞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이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려고 불러주신 때였구나!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저는 겨울의 햇살이 내려쬐는 그 누런 잔디가 있는 그 길로 걸어오는 그 분의 그 초췌한 모습이 설교하는 시간에도 제 가슴에 가슴 아린 한 장면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끊임없이 계속 졸고 졸음을 친구로 삼는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만약에 돌이켜서고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은 의식을 가지고 새롭게 자신을 채찍질하지 아니하면 그러한 예배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예배의 태도 때문에 유익을 얻을 수 없어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예배가 여러분 자신을 고통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우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몸은 교회당에 나와 있지만 그가 졸고 있다면 그는 침대에서 뒹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졸음을 참을 수 없다면 금식하고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와야한다.’ 고 딱 잘라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래도 모범적으로 낫다고 합니다마는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깊이 각성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깨어있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건성으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건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끝날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악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적어도 잠들고, 예배시간에 졸음과 싸우는 사람들은 내가 예배를 옳게 못 드렸다는 의식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깨어있고 생각은 다른데 가 있는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무슨 유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은혜의 깊이를 알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다고 할지라도 건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옵지도 못하고 무엇을 위해 예배를 드렸고 그리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떠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골목에서 붙잡고 오늘은 무슨 설교를 들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은혜로웠습니다.’ ‘좋았습니다.’ ‘별로였습니다.’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알아야 하지만, 기억해야지만,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건성으로 듣는 일들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허공을 응시하며 마치 반성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쳐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교회에 나올 뿐만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가장 잘 집중되는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토요일 날 1시, 1시 반까지 영화를 보고 뒹굴다가 주일날 와서 집중할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토요일도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을 위해서 푹 쉬고 집중된 마음과 정신의 상태를 가지고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실제적인 교훈 하나를 우리들이 들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배와 관련해서 받자면 우리는 또한 예배 시간에 자기가 듣기 좋아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다 했는데 나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뱃살을 잡고 웃은 기억밖에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화를 기억하면 예화의 메시지가 사람 속에 살아야 될 텐데, 메시지는 사라지고 재미있는 그 일화만이 생각이 나는 것이죠. 그것만 밑도 끝도 없이 돌아다니는데 그 무수한 예화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시간이 마치 가십을 듣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설교를 들으면서 설교 속에 이어지는 재담이나, 스토리, 이야기, 재미있는 일화에 귀를 기울이고 즐거워하는 것은 마치 화려하게 차려진 밥상에서 피골이 상접한 사람이 밥그릇의 무늬만을 보며 즐기는 것과 똑같다.’ 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양이 아니고 그리고 꾸며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게 할 진리의 말씀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설교를 통해 지지받으려고 하는 그런 태도를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부흥회에 오라고 그래놓고 사일동안 설교할 본문을 달라는 것이에요. 대부분 제가 거절합니다. ‘집회제목은 무엇입니까?’ ‘아무렇게나 하세요.’ ‘그래도 강사님이 정해주셔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통일되게 연중에 똑같아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한다.’ 그리고 가서 아무거나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제를 미리 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겨요. 이번에 우리 여름 수련회도 봐요. 나는 분명히 그것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사야 본문까지 찾아놓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골로새로 넘어가셨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얘야 이번 수련회에는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 가이드북 나오기 전에 진작 말씀하시지……. 이제는 할 수 없어요. 주님도 한 표고 나도 한 표니까 다수결로 우리가 이겼으니까 주님이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은 다음에 기회를 들릴 테니까 그때에 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정해진 주제로 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 되겠어요? 아니면 상관없이 해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주제가 필요 없는 것이에요. 인간의 구호에요.
어느 교회에 분명히 가서 미리 그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 소문을 듣고 가면 설교자가 선입견이 생겨요. 그래서 일체 안 들어요.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은 얘기할 것 없고 기도나 하십시오. 열심히 기도나 하시면 주님이 인도하시겠지요.’ ‘무엇을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물으면 벌써 기분 나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니라고 그래요. ‘아니면 됐습니다. 그냥 기다리십시오. 나도 무엇을 전해야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가서 기도하고 강대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그러다보면 어떤 때는 준비한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다른 말씀을 주셔요. 이 교회를 한번 뒤집어버려야지 그리고 갔는데 하나님이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쭉 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닷새 동안 집회하는데 아침, 점심, 저녁, 새벽까지 차례대로 무엇을 전할지 다 말씀을 미리 정할 수 있겠느냐고요. 물론 미리 준비도 안하고 간다는 뜻은 아니에요. 준비는 하고 가지요. 그러나 준비는 하고 가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간섭하실 여지를 줘야 하잖아요? 그렇게 가는 거예요.
심방할 때도 전혀 준비를 안 하고 가요. 누구는 요새 교회를 안 나오는데 가가지고 교회 안 나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징벌을 얘기하고 와야지! 안 그래요. 그냥 가요.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한다고 미리 생각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흔하지는 않은데 가끔 집회할 때에 그런 사람들이 꼭 앞에 앉아요. 심히 골난 사람처럼 여덟팔자를 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그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신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보여 주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제가 왜 주보를 안 만드는지 아세요? 그런 게 그런 것이에요. 주보가 목요일쯤에는 넘어가야 되는데 뭐 전할 말씀을 부를 찬송을 일주일 전에 정해야 되느냐 말이에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떤 때에 설교준비를 다 해서 올라왔는데 단상에 올라섰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이 많은 것이에요? 불신자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교회당에 들어왔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되요. 이것은 다음에 쓰고 그리고 전도설교를 해야 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불신자들이 모였다는 것을 알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다음에도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지만 그 사람은 다시 오지 않을지 기약이 없는 사람들인데 만나서 설교한 다음에 당신은 전도설교를 들어야 되는데 요번에는 그것을 못했으니까 다음에 한 번 더 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예화) 어느 날 너무 머리가 아파서 약을 지으러 경동 한약방에 갔습니다. 진맥을 하고 다 진찰을 한 다음에 증세를 다 호소하니까 ‘선생님, 걱정 마시라고요. 제가 잘 지어 드릴 테니까 마음을 푹 놓으시라고……. 양약을 먹어야 소용이 없어요.’ 이런 얘기하면 우리교회에 좋아하실 분이 한분이 있지요? ‘다 소용 없어요.’(사전에 아무런 교감이 없었어요.) 그리고 갔는데 그래서 하도 큰 소리를 치고 (좀 비싸대요) ‘비싸도 괜찮다’고……. 그래서 약을 다 지어가지고 묶어서 건네주면서 돈을 내고 나니까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런데 선생님, 이 약 속에는 머리 아픈데 낫는 약이 안 들었습니다.’ 누구를 놀리는 건가하며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니까 ‘지금 곧바로 머리 아픈 것을 고치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선 이것으로 기초를 놓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오시면 그때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러는데 나는 그 약국이 비방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그 약국은 오는 사람들마다 다 그렇게 말한대요.
그렇게 예배를 드리러 와서 마지막 인생의 기회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전도설교를 해야 되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이게 바로 우리의 마음과 입맛에 맞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이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나는 너무 실망 했어 세상에 목사님이 그럴 수가 있어? 야! 내가 여태까지 은혜 받은 것은 다 헛것이야. 나는 이제 저 사람 말은 믿지 않기로 했어.’ 그런 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 말씀과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설교자의 인격과는 상관이 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쉬운 일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볼 때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교회가 커다란 박해에 직면할 때마다 한 가지 시비 거리가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세례를 준 목회자가 핍박을 이기지 못해서 변절을 했어요. 배교를 했다는 말이에요. 그 때에 교회에서는 심심치 않게 논쟁이 되었던 것이 ‘그 사람이 준 세례가 유효한가?’였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 때에 미소기 바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미소기 바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본의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세례를 받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것을 안 받으면 신사참배의 반대같이 잡혀가는 것이죠. 그런데 목회자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박해를 이기지 못해서 그 목사가 미소기 바라이를 받고 그 다음에 모든 교인들을 데리고 가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예식을 행해서 그 천조대신의 자녀가 되게 한 것이에요. 이렇게 되었을 때에 교회의 일각에서는 그 미소기 바라이를 받은 그 목사가 준 세례가 유효하냐? 한쪽에서는 그런 사람은 배교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한 모든 말하자면 세례행위가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받아야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재기되었던 것이에요. 이제 여러분 이만큼만 예를 들면 그러한 역사적인 견해가 왜 옳지 않은지 알게 되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가끔 보게 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가끔 감사원이나 혹은 감사실 이런데서 나와서 공무원사회를 사찰하게 됩니다. 그 때에 어느 날 하루는 아주 높은 분이었어요. 그런데 가서 아주 심하게 모욕을 당하고 와가지고는 더러워서 내가 이놈의 자리를 못해먹겠다고 내가 명색이 이사관인데(이사관이면 우리나라에서 꽤 높아요.) 이 동사무소 뒤에 앉아서 일하는 주사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한테 가서 시말서를 쓰고 온 것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이사관 은 사람들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안단 말이에요. 마구 시말서를 받아내니까 이사관하고 주사는 마주앉아서 눈길을 같이 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직급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때로는 우리는 나라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그러나 오만하고 불손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요.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보냄을 받고 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왔는데도 사람들이 인격이 일천하여서 거만하고 오만하고 또 살아가는 삶이 아직 성화되지 못해서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도덕적인 결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태도가 그렇다고 해서 그는 자기의 이름으로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자의 이름으로 왔습니다. 그가 잘 못살면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고, 그가 오만하고 불손하다고 해서 그가 가지고 온 메시지가 아버지의 것이 아닐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깊이 파고들어서 그래서 목회자에게 섭섭한 감정이나 실망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을 느끼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설교를 듣고 그 설교의 깊이 감화를 받고 그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할 어떤 의무들을 우리에게서 풀어버리려고 하는 이런 말하자면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깊이 듣고 깨닫는 자리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깨닫는 것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하시는 이유는 마지막으로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의 예배의 태도는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이고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배와 설교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눅 20:9-18).
지난 주에는 어떤 태도로 설교를 들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듣는다고 하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고 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듣는 회중과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반대를 받으시는 장면이 그 앞에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신이 누군데 이렇게 백성들을 마음대로 가르칠 수 있는가? 백성들을 가르칠 때 많은 백성들이 전혀 감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감화를 받고 변화를 받는 일들이 모두 다는 아니지만 한쪽에서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지금 행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도대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드린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맥상으로 볼 때 이 포도원의 비유는 단지 포도원의 비유만 잘라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포도원의 비유를 주님께서 깊이 사람들을 깨닫게 하시고 싶으셨을 때 어떤 사람들이 이 비유를 깨달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셨는가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비유를 잘 깨닫고 알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느 마음씨 좋은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놓았는데 이 사람은 대단히 사려가 깊고 인정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포도원만 덩그러니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망대도 짓고 그리고 울도 두르고 그리고 포도즙도 짤 수 있는 그런 즙 틀도 만들어놓고 모든 시설들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몸만 들어가기만 하면 포도원을 갖고 그리고 열매를 따서 즙을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창고에 넣어두고 또 내다팔고 먹고 살고 또 혹시 포도원을 헤치기 위해서 보낸 여우나 혹은 도적들이 있으면 지켜보고 물리칠 수 있도록 망대까지 지어주었다고 오늘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을 만들어놓고는 이제 소작료를 내기로 하고 주인은 먼 곳으로 갔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주인이 소출 중 얼마를 소작료를 받기 위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주기는커녕 때리고 능욕하고 마태복음에 보면 죽여 버리고 그래서 쫓아 보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들을 보내었는데 아들도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 주인은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는가.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거기서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끝까지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이 비유는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인은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종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에서 나타났던 많은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여러 곳에서 나의 종 선지자,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대표적으로 “나의 종”이라고 불러주실 때 그 사람들은 선지자였습니다. 그 선지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서 종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그들의 사명과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시키신 일과 결탁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은 먼저 열매를 거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나 종을 보내어서 열매를 거두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수확 철에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소작료를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이사야 5장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요, 유다 사람들은 나무라 공평을 발하였더니 포악이요 의로움을 바랬더니 부르짖음밖에 없었더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남이 깨닫지 못한 놀라운 사랑을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기억하는 바였습니다. “신들 중에 누가 여호와 같은 신이 있겠는가.” 하는 이 고백이 동시에 백성들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백성들이 있는가.” 그 고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고 위대한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저내시고 복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민족이 바다를 건널 때 그 신이 바다 앞을 먼저 지나가 물을 가르고 하늘에서 조상도 알지 못하고 후손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양식을 주셔서 그들을 먹이시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주신 그 위대한 일들을 회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만나가 내리지 않았고, 다시 홍해가 갈라지지 않았고, 여리고성도 무너지지 않았고, 요단도 마르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이전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언제나 추억하고, 찬송하고, 암송하고, 노래하고,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신 그 크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들을 위해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보여준 택한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늘 되새기고 싶어 하며 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여러분들을 믿어지지 않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죄 가운데 살아가게 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방탕한 길을 걸어가면서 그렇게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들인 우리들을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내셔도 구원해내 봐야 하나님 앞에 뭐 그렇게 뾰족하게 충성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효도하는 삶을 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시고 구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었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거저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저 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그 목 매이는 사랑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불타는 긍휼과 그리고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 같은 인생을 불러주셔서 그 죄에 더러워져서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인생들을 뜨거운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온 몸을 목욕시키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존전 앞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렇게 대했습니까?
목요일부터 제가 밤마다 몸도 썩 별로 좋지 않은데 하도 사모한 교회여서 제가 가서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가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40년이 넘는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러나 정말 내 인생에 있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지금도 만나고 있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또 이 세상에 뭔가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살았던 세월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40년의 세월 동안 주님을 만난 것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항상 저의 마음 깊은 밑바닥에 주님과의 만남을 제외하면 제 인생에 기쁘고 복된 날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 인생이 결국 주님밖에 없었음을 기억해주시고 오늘도 이 비천한 인생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은혜와 긍휼을 허락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은 거저 이루어졌습니다. 아무 것도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놀라운 구원을 주시고 은혜룰 주실 때 거기에는 반드시 계획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면서 그야말로 이 포도원이 그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도 짓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더니 모든 것이 그렇게 준비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보내신 것은 거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저 포도원을 주고 망대를 주고 창고를 주고 거저 즙 틀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한 것은 그저 먹고 살고 즐기고 방탕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은혜로 누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거기에 보낸 것은 목적을 이루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아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보아도 알 수 없고 땅을 보아도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택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바로 의롭고 공평하고 세상의 불의한사람들의 삶과는 구별되는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예화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꼬맹이가 엄마 경대위에 쪽지를 써났다고, 계산서 심부름 한 값, 200원, 슈퍼에 심부름 값 300원, 동생 봐준 것 700원 쭉 써서 월말에 2800원이라고 써났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 책상에 올려났습니다. 뭐라고 썼는가 하면 10달 동안 너 뱃속에 넣고 다닌 것 공짜. 낳아준 것 공짜, 먹여준 것 공짜, 재워준 것 공짜, 아파서 너 업고 울면서 병원으로 뛴 것도 공짜, 다 공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리 사람이 보니까 그렇게 공짜라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쓴 그 엄마가 그 아들놈을 원수처럼 엎어놓고 때리는 것입니다. 공짜라고 그럴 때는 언제고 왜 때리나.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을 공짜로 주었지만 그러나 계획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 공짜로 주었고 앞으로도 공짜로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아낄 수 있겠습니까. 내 살점이라도 베어주고 싶지 않겠어요?
옛날에 제가 있었던 교회에 목사님이 아들이 하도 말을 안 듣고 공부를 안 하니까 한주먹 올렸습니다. 고막이 나갔는데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을 못합니다. 누가 옆에서 말만 하면 그렇게 쓰라리고 아파서 용돈을 빌려서 몰래 병원에 다니는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아들 때리셨습니까?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제가 때렸습니다. 고막이 터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눈물만 안 흘리셨지 마음속으로 우셨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전도사님, 혹시 제 고막을 잘라서 그놈에게 붙이면 안 되겠습니까?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거저 다 주어도 내 아들이, 내 딸이 이렇게 살아야 될 터인데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계획대로 안 살면 아버지의 마음은 아까워서가 아니라 거저 모든 것을 줄 수 있지만 이 마음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확실하게 제대로 믿지 않으면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것은 확신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예수를 제대로 안 믿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향해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은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이 불의한 삶을 사는데 그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그 계획을 기억하면서 의롭고 공평한 일을 행하며 이 어두운 세상에서 이 세상 자녀들과는 구분된 삶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가 가득하고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고 공평하게 사는 것이 가능한지 말입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너무 핍박이 심하고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너무나 괴롭고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세상의 커다란 흐름이 불의하고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삶이기 때문에 정의롭고 올바른 삶을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할 때 수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롭고 공평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열매를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거저 의로운 삶을 살고 죽도록 고생을 하더라도 거룩한 삶을 살고 분별된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놓고 세로 주고 간 다음날 종을 보내어서 선불 안 주면 다 죽여 버린다.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기다리셨습니다. 언제까지? 충분히 열매가 익어서 포도를 따서 이제는 곳간에 거두어들일 때까지 주인은 충분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주인은 이제 이 종들을 보내어서 소작료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내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이것은 제가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이상입니다. 지금 열심히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영원을 향해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되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데 하나님 앞에 의롭고 공평한 열매를 맺지 않고 그렇게 내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살아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복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살면 불꽃같은 삶이 되고 그렇게 불꽃같은 삶이 되면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이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목사님, 드디어 불꽃 시리즈가 교회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목사님, 저 교회 좀 한번 보십시오. 봤더니 세워진지 얼마 안 된 깨끗한 교회인데 불꽃 중앙교회, 불꽃이 거기로부터 공급이 되는 모양입니다. 사실은 여기가 중앙인데 자기네 마음대로 허락도 안 받고 중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예수 믿게 만드셨을 때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그렇게 애써서 포도원을 지어놓고 거저 그 농부들을 들여보낼 때는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작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또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설교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삶과 그리고 공평을 구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사람, 뭔가를 얻어내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는 사람, 그렇게 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주먹을 쥐고 결심하고 죄의 길을 마치 자기의 사명처럼 살아오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의로운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불공평하고 불의하고 부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돌아가서 그 예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도록 하나님이 설교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목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일차적인 의무는 성도들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매었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께 매였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참답고 놀라운 그 사랑과 거역할 수 없는 성령에 붙잡힌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신학을 꿈꾸는 사람이 많이 있겠지만 웬만하면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분명한 소명이 없이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조국교회에 커다란 무거운 짐입니다. 저는 가끔 신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제가 감히 기도하지는 않지만 마음 중심에서 저 사람만은 어떻게 하든지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의와 공평의 은혜를 그 백성들에게 구하도록 부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게 매임 바 되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매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와 공평의 열매를 요구하시고 그것을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던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하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그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명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만나고 교회를 만나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에 붙잡힌 사람이 되기 전에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붙잡힌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 일은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모든 하나님의 양떼들이 그렇게 의와 공평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날을 꿈꾸며 그것이 가슴을 저미는 바람이 되는 사람,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어찌할 수 없이 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 그것이 바로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일들을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필요한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에게 알리는 이 일이 야말로 목사의 최고의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로는 교회에서 목사와의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에서 최악의 교회의 형태는 교회가 가장 타락한 상태는 바로 (?)이유가 되어서 사람들이 함께 만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이유가 되어서 함께 만나는 것, 이것이 교회의 타락한 형태의 가장 표본인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과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고통스러운 교회 말고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한번 만들어보자. 그래서 이제 함께 힘을 합쳐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사는 것도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헌신적으로 전세 살던 사람이 줄여서 가고 집 살던 사람이 평수를 줄여서 돈을 모아서 교회당을 작은 것을 분양받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교회를 6년 하는 동안에 날마다 목회하는 것이 꿈같이 행복하고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목회하는 것을 보고 꿈도 못 꾸던 사람들이 개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그러는데 자기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나 교인들과 아름답게 신나게 지냈다고 합니다. 80명 정도 모이면서 정말 그렇게 기쁘고 즐겁게 지내면서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장에 가서 테니스를 치고 베드멘트를 치고 족구도 하고 놀고 저녁에 와서 씻고 다시 모여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그러면서 너무너무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깨달은 것이 저희가 목회하고 있는 이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자신의 삶과 교회의 개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비로소 자기가 깨닫게 된 것이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데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그리고 그 재밌는 교회의 프로그램, 심지어는 자기 친척, 자기 친구, 자기 동기간, 자기와 맺었던 인간관계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이해하는 것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깊이 하나 깨달은 것이 회심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예를 드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전혀 만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6년 동안을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깊이 깨닫고 각성하고 변화 받고 나니까 그것이 그렇게 자기가 만족스러워하고 지극히 교회생활에서 행복해하고 감사하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감사의 찬송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갖지 못하신 채 6년을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빠질 수 있는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만족이 참된 만족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들을 보내신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바랬기 때문이라고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그 기쁨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여러분, 저희는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소작료룰 받아보지 않아서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나무, 그리고 밤나무 몇 그루가 있어서 가을철이면 그 나무에서 감과 밤을 따는 아저씨가 자루에다 감 한 자루, 밤 한 자루를 가을이면 서울로 가지고 옵니다. 어린마음에 자루를 확 풀면 쏟아지는 그 빨간 감, 그리고 그 밤을 보면서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 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귀한 밤을 맛볼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베푸신 후에 하나님이 뭘 보면서 소망을 갖고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그렇게 허랑방탕하게 살던 인생들이 어느 날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그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하나님, 이제는 제가 나를 위해서 살았고 살아온 인생길에 맺은 것이라고는 죄의 열매밖에는 없습니다. 제가 이 땅에 살아서 숨 쉬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에게는 고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짐이 되지 않고 일생을 살았습니다만 하나님, 이제는 제가 깨달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와 사랑을 내가 깨달았고 벤 풀이 여름 햇살에 마르는 것처럼 그렇게 말라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이 가치 없고 불순종한 인생을 하나님이 사랑해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제가 이제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제가 하나님이 왜 나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의와 생명이 있는 나라로 부르셨는지 하나님 내가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그 참된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의로운 삶을 걸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어 한다고 결단할 때 못된 열매를 맺던 그 나무가 바뀌고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포도송이가 싱그럽게 매달리는 그 광경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놀라운 열매들을 보시며 그 맺혀있는 포도밭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하나님이 이렇게 보시면서 우리가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와 공평의 삶을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여기에 심었더니 내가 물을 주고 그리고 때를 따라 비료를 주었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던 나무가 수많은 나무가 되어서 이제는 더 많은 열매를 맺어서 나에게 기쁨을 주는구나. 그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참된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설교를 듣게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질 때 그때 우리는 어디에 눈떠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나는 관심 없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설교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일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고 이 일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저를 여기에 있게 허락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관계들이 깊고 더 많이 깊은 교회일수록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맺어진 교회일수록 상대적으로 그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려는 열망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네 교회의 목사가 설교할 때는 듣지도 않다가 부흥강사가 온다고 하면 뭐 엄청난 일이나 일어나는 것처럼 목사 위에 강사인 줄 알았다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나와서 그러는 것이 바로 그런 인간관계룰 기초로 하고 있는 교회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통해서 이것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세워서 우리의 예배 시간 속에 대부분을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8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커다란 걸림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비유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종들이 때리고 능욕 받는 이야기만 나오지만 심히 때리고 그 다음에 상처받고 나중에는 죽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장면까지 다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종은 의심할여지도 없이 구약에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던 그 역사를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던 이 선지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요나와 같이 매우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찍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소원을 불어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하여 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전하시는 왕으로서의 명령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꺼이 전하고 전파해야겠다고 하는 깊은 열망과 갈망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내셨습니다. 그들 선지자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고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삶의 모든 목표가 하나님께 고정되어있었고 삶의 모든 이유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들이 태어났다고 믿었고, 하나님 때문에 사명을 받았다고 믿었고, 하나님 때문에 자기들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가갔고 복음을 전했으며, 하나님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그 명령을 그칠 수가 없어서 하나님 때문에 그 명령을 전하다가 하나님 때문에 죽었습니다. 모든 꿈은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공언하는 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관심 없이 살아가는 이 황폐한 민족의 신앙의 형편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고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서 그들을 그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할까.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들어줄까 이것을 깊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일평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가라.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막 때렸습니다. 두 번째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니까 갈 사람이 누구냐? 저입니다. 너 가라. 이번에는 가서 더 많이 두들겨 맞아서 머리가 다 터져서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그 다음에 갈 사람이 누구냐? 또 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보내니까 이제 나의 친 아들이니까 이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공경하겠지 하고 아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저놈이 바로 유업을 받을 자니 저 땅 주인의 아들이 오니까 저 놈을 죽여 버리면 상속받을 자가 없으니 이 땅이 우리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리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장면이 마지막 18절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을 받아서 죽는 자들도 이해가 안 갈게 없고 예수님이 죽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합니다. 좀 안된 이야기지만, 왜, 어차피 그분은 그렇게 죽으셔야지 만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도록 하나님이 속죄의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렇게 하나님만을 공경하고자 했던 선지자들이 비참하게 죽는데 하나님은 호위병 하나 딸려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금 마차 타고 다니면서 설교한 선지자가 있습니까? 긴 칼 옆에 찬 호위병 데리고 다니면서 설교한 선지자가 있습니까? 그들은 언제나 혈혈단신이었습니다. 그들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들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서 도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음성, 말씀뿐이었습니다. 다가갔습니다. 이 부분에서 이제 걸렸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이게 하나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선지자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그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한 두 사람, 여러 사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 음성을 전해주어야 하고 그 음성을 누군가가 전해줄 때 그 음성을 들어야지만 사람들이 바뀌고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주의 종들보다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많은 무지한 백성들을 훨씬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하나님이 죽어가는 당신의 종들과 그리고 십자가에 죽어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이제는 선지자들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결국은 음성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무슨 음성? 하나님이 얼마나 너희 인생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너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그 백성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넘치는 사랑과 그리고 우리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꿈꾸고 그리워하면서 당신의 음성을 전할 자들을 오늘도 부르시고 그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무엇을 내게 요구하시든지 그 요구하시는 배경에는 기꺼이 하나님의 수많은 종들을 죽게 하시고 심지어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도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요구에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닫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에 대해서 들을 뿐만 아니라 예배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느낄 수 없고 우리의 마음도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대해서 느끼기가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든지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 없이도 살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고 오늘도 들풀을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그 놀랍고 자비한 사랑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땅에 살아가고 있는 들풀과 같은 인생들 하나, 하나 삶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그들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시며 그들이 흐느껴 울 때 함께 아파하시는 그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예배 시간에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예배를 통해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싸우며 살도록 세상이 우리를 불러도 우리 안에는 그 예배를 통해 깨닫게 된 남이 알지 못하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손해를 보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당연한 열매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우리의 신앙을 지키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사랑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십자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십자가에서 위대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그 형상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흘린 피로 이천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십자가를 적시고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그 뜨거운 보배피를 우리들이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바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오늘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즐거울 일이 별로 없고 그리고 신나는 일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아있게 하시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의 사랑, 남이 알지 못한 사랑을 내게 주시고 남이 받지 못한 그 놀라운 긍휼을 내게 받게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기에 이 어둔 세상에서 우리는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당하는 상처와 아픔 같은 것들을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아픈 것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고난은 정체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찬란한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과 잠시 불의한 낙을 누리기보다는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고난을 받기를 원하고 이 세상 백성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서 만족을 누리는 삶이기보다는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삶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나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닫는 그 예배의 거룩한 기쁨이 없었더라면,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우리의 굳어졌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이 예배가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우리의 돌같이 굳은 심령이 터트려지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깊이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 같은 죄인도 소망이 있다고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회복시켜주시는 기쁨이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벌써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이기면서 무엇으로 우리의 사랑을 태우며 이 세상을 불꽃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은혜의 자원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무엇을 가지고 고뇌하고 앞날의 어떤 불안과 기대를 가지고 있든지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보이는 것 같은 삶을 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예배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본 독생자의 영광이었다고 말하고 그 독생자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에는 예배 속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진리만 선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가 선포되어지는 방식이 바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어지고 우리의 마음이 녹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주 동안 각박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어디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불만이고 부딪히는 것은 모두 괴로운 일들이고 오고가는 모든 것은 모두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간에도 홀로 계실 때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얼마나 감격하면서 사셨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이런 약점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수많은 너희들을 복음을 전했던 수많은 종들보다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너희들을 내가 사랑한다.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도 아직 우리에 들어오지 않은 한 마리의 양을 내가 더 사랑하여 오늘도 내가 너희를 찾아 나서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내가 너희를 더 사랑하여 그 아들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느니라, 예배 시간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삶으로 그 사랑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며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누구의 강요나 굴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시는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아무도 우리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승복하고 의롭고 그리고 공평한 삶을 살아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도록 이렇게 살아드려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어두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배와 찬양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
지난주까지는 예배란 무엇인가 중에서 설교와 관련된 부분들, 다시 말해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써 설교와 관련된 부분들을 여러 주에 걸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제를 바꿔서 예배 시간의 찬양에 대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작년에 10월인가, 11월로 기억이 됩니다만, 생전 처음 서대문에 있는 교도소에서 설교하라고 해서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죄수들 중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천 육백 명인데 예배 참석할 수 있는 공간은 백 육십 명 공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우리가 언제나 결심하면 나와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이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거기에서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에는 백여 명 밖에 앉을 수가 없어서 나머지는 땅바닥에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단히 만족해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우연히 교도소에서 만든 주보 비슷한 걸 하나 봤습니다. 봤을 때 낯익은 사람의 이름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니라 엽기적인 살인행각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살인범 김현양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그 교도소에서 어느 집사님의 끈질긴 전도를 듣고 결국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제 사형일자가 확정된 가운데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준 그 여자 집사님에게 서신으로 왕래를 하면서 보낸 마지막 편지를 하나 복사해서 거기에다 실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는 순간 제 마음이 정말 뭉클했습니다. 그는 편지 속에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제가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무언가 제 눈에 캄캄하고 어두운 것이 가려워졌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죽지만 내 죽음으로서도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았더라면 나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나쁜 짓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었을 텐데 전도를 받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나니까 저는 이제 죽어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사형일자를 기다리면서 감옥 속에서 늘 이 찬송을 즐겨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그가 이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지, 그가 이전에 어떤 흉악한 죄를 지었던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오늘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이 후회스러우면 그 후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찬송하게 되고 지난날이 자랑스러우면 그 기쁨 때문에 오늘 하나님 앞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방을 뒤지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방에는 어떤 노래들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야비하고 비열하고 천박한 노래들이 울려 퍼지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의 삶으로 그런 삶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마음속에 언제나 가락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거나 그런 삶을 살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일 때마다 빼놓지 아니하는 이 찬송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예배 속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찬송은 설교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찬송은 헌금 다 거둘 때를 기다리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국경일에 애국가를 연주하듯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것을 식에 대신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찬양은 예배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올리우는 찬양자가 있고 그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실 때, 더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올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고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고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이 찬양을 올리는 그 예배자의 마음속에 깊이 임재로서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뜻도 없고 생각도 없이 그저 부지런히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간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문장이 섞였다고 해서 우리가 그 문장을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찬양도 곡조와 가락이 교회 안에서 불려지는 노래라고 해서 찬양일 수 없습니다. 다른 신앙의 모든 요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정한’ 이라는 의미를 이 찬양에도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이 성경의 본문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첫 번째 커다란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홍해였습니다. 그 바다가 앞을 가로막고 있고 그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는 것을 후회하는 바로가 보낸 육백승의 병거와 병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체포하기 위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시퍼런 바닷물이고 뒤에는 밀려오는 군사들의 함성소리로 무장이 별로 없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커다란 진퇴양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손을 들어 명하게 하시고 홍해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적적으로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통과하게 하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걷는 그 길을 따라오는 애굽의 모든 병사들과 병거들을, 바닷물을 다시 합치게 하여 그들이 그 물 위에서 가랑잎과 같이 그렇게 떠다니는 그러한 비참한 최후를 마치도록 역사해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아무리 합리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역사의 현실을 보면서 그들은 결코 이 일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으며 여호와께서 친히 바닷물을 가르시고 가르신 그 분이 다시 물을 합치어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시고 대적들은 그 물에 삼키우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광경을 430년 동안 애굽에 살면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고작해서 놀라는 것이라야 뜻밖에 내리는 비나, 혹은 기상의 이변이나 이런 것들이나 왕이 혹은 지체높은 누가 죽었다더라 정권이 바뀌었다더라 이러한 이야기 이외에는 그들은 커다란 일이라고는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시고자 하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애굽의 하수가 피가 되는 일들이 일어났고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이런 자연의 놀라운 재앙들이 뜻밖에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홍해가 갈라진 사건에 비하면 애굽 땅에서 일어났던 그 크고 위대하고 가슴 저밀 정도로 충격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이적들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바다가 갈라졌고,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갈라진 바다가 무슨 썰물이 되면 빠져나가고 갯벌이 생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좌우에 물이 벽이 되어서 기둥과 같이 섰습니다. 큰 벽이 섰습니다. 아마 물고기가 왔다갔다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이했겠습니까? 그야말로 경이였습니다. 그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격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원수들이 수장되었습니다. 건너편 언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 앞에 찬송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구원의 서사시가 이 15장에 걸쳐서 아름다운 묘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선 노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찬양은 가락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락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그 노래하길 좋아하는 본성, 가락을 즐기는 본성 이런 것들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쓰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교육을 아무리 못 받아도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이전의 우리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경배하던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본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찬양이 노래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님을 찬송하도록 주신 이 노래를 예배 속에서 부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노래, 그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데 이 찬송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형식이 아니라 노래라는 형식으로 주셨다는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만약에 예배 속에 찬양이 없었다면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우울하겠습니까? 만약에 예배 속에 찬양의 순서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 속에 찬송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예배가 축제적인 성격이 되도록 하신 것이에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는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기쁨이에요. 하나님 앞에 느끼게 되는 큰 기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처음 나왔을 때 진정한 기쁨이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죠. 그리고 참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그 입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매일 매일 살아갈 삶이 있고 하나님이 이렇게 예배하는 우리의 삶 하나하나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궁극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즐기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즐기는데서 얻는 기쁨과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얻는 기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예배를 보십시오. 예배 속에 점점 더 많은 악기가 동원되고 커다란 악단을 구성되고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이전에는 들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음향기기들이 들어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배자의 영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송축하고 찬양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예배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십시오. 예배를 즐기고 예배 속에서 뭔가 대리만족을 얻어보려는 것들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판단으로는 신약의 교회는 성가대가 없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압도적으로 흐르고 있는 찬양에 대한 중요한 개념은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을 앞에 세우고 그것도 예배 시간에 그들의 기교로 찬송하는 소리로 들으면서 enjoy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홍해에서 건져내신 이 놀라운 역사를 목격하게 되었을 때 누가 찬송했습니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찬송했습니다.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3백만 명 가까이 되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과 지도자와 모든 사람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온 이방의 중다한 잡족들까지 함께 소리 높여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행하신 이 위대한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소리를 못 내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곡조야 많이 틀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조금 틀리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의 있어서 찬양의 요소를 경시하기 때문에 성가대를 안 만드는 것도 아니고 또 예배에 있어서 다른 요소를 더 높이기 위해서 예배에 있어서 찬양대를 만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순수하게 회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이것입니다. 모든 예배가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멋대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작년에 빈야드에 갔을 때 다같이 예배드리자고 시작을 하는데 저는 아무래도 그것을 보고 예배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밴드들이 나와서 악기를 연주하고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를 읽으며 사람들이 떠듬거리며 찬양하고 그리고 열광적으로 찬양하고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찬양한 다음에 자기들끼리 서로 토크쇼하듯이 주고받고 간증을 하면서 웃기도 하고 이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저 사람이 나와서 묻기도 하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는데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집회는 집회이고 예배는 예배입니다. 예배에는 일정한 규모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참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예배에 대한 부름이 있어야 할 것이고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고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 증거가 있어야 될 것이고 축복이 있어야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리는 순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중에는 어떤 순서들이 적절히 조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커다란 틀은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틀입니다. 그 틀이 약간씩은 변형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파격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몇 시간에 끝나야하는지는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배로 모였을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축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은 예배 속에 공동적으로 나타나야 할 틀이요 규범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을 깨뜨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틀이 자유를 침해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일주일 후에 부를 찬송을 주보에다가 적어놓고 그리고 찬송을 주일날 낮에는 몇 장을 불러야 한다고 규정해놓고 그렇게 주보에 맞춰서 예배순서를 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 찬양에 은혜를 주시면, 여러분 예배 시간을 아껴서 우리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찬양을 부를 때 모든 지체들의 마음이 녹고 하나님이 오셔서 그 찬양으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그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 속에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고백이 되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느껴질 때 그 때 찬양은 15분, 30분이 될 수도 있고 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의 다른 순서는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붙잡으셔서 하나님이 강하게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게 하실 때 그 기도는 10분이 될 수도 있고 20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우리에게 부르게 하실 때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일날 부산을 내려가기 전에 수원에 내려가서 집회를 했는데 예배드리기 전에 저녁을 먹고 강대에 올라가서 엎드렸는데 설교할 사람이 강대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기도하는데 조그만 코고는 소리가 어디서 들려요. 제 소리였어요. 얼마나 피곤하고 지쳤는지 기력이 바닥까지 내려온게 느껴져요. 숨쉬기가 힘이 들어요. 그래서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 너무 죽겠어. 35분만 강하게 설교하고 내려오자. 그리고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월요일에 또 집회를 가야 되니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피곤이 온 몸을 감싸고 올라옵니다. 10분, 20분, 30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말씀해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35분을 결심했으니까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못 들으신 것은 후에 테이프를 통해서 들으시면 되겠습니다.”라고 하고 오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두 시간이 넘도록 설교를 하고 마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많은 제약적인 조건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예배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커다란 교회에 후임으로 갔습니다. 작은 교회도 아니고 큰 교회에 오랫동안 목회지를 달라고 기도하던 끝에 그 교회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리고 더군다나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큰 교회에 가서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냥 은혜가 충만해서 설교를 했는데 좀 길게 했습니다. 두 주 동안 그런 일이 계속 되니까 장로님들이 불러서 일차 경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는 전통이 있습니다. 앞에 계신 어른 목사님께서 12시 15분이면 늘 예배를 마치셨습니다. 목사님 25분을 지금 초과하셨습니다.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 그런데 이 목사님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붙잡지만 않으면 정시에 끝나겠는데 아 꼭 설교 막판에 자기를 붙잡으신다는 거예요. 나중에 그랬대요. “장로님 제가 그래도 이 교회 목산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도 좀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제가 일부러 늦게 끝냅니까? 하나님이 붙잡으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해놓고 이 목사님이 전교인 설교대회를 했대요. 그런 거 하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하여튼 했대요. 그렇게 해갖고 장로님들이 다 선수로 출전을 하더래요. 장로님들은 여기에서 한 번 설교를 하는 것이 소원인가 봐요. 그래갖고 5분만하기로 정했대요. 4분에 종을 땡 치고 5분에 종을 땡땡 치면 내려오게 되어있는데 그걸 넘으면 실격이라고 그랬는데 장로님이, 예배 늦게 끝난다고 투덜거리던 그 장로님이, 열 명이 나와서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혼자서 40분을 하고 들어가더래요. 땡땡 치니까 땡땡 쳐도 저는 다 하고 내려가야겠습니다, 그러더래요.
여러분, 예배에 있어서 참된 자유의 요소는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찬양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가 그런 파격을 경험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그리워합니다. 한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해도 우리의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고 우리를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아무리 노래해도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노래의 가락이 우리 마음속에 마르지 않아서 모두 찬양을 마치고 설교를 듣고 나니까 목사님과 문에서 악수를 하고 밖에 나가는데 하늘의 별이 총총하더라, 주일날 오전 예배가 그렇게 끝났더라, 그런 날이 오기를 정말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물론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그런 날 오면 큰 일 나겠죠. 점심도 못 먹고. 찬양 속에도 이러한 자유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지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찬양을 하는 것도 노래이고 우리가 세속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노래이지만 부르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CCM이라고 해서 Contemporary Church Music, 현대 교회 음악이라고 해서 그 가락만 듣고는 세상의 세속적 노래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인지 도저히 알 수 없고 외국에는 아예 헤비메탈과 같은 그룹들이 나타나서 거기에다 복음송을 실어서 연주한다고 하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갈피를 잡아야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넓게 생각해서, 저는 이 문제들을 너그럽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헤비메탈까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즐겨 흥얼대는 그 노래가락에다가 살짝 복음의 내용을 집어넣어서 부르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접근하게 한다라고 하는 전도적 측면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찬양을 할 때 우리 시대의 현대의 가락으로 찬양을 할 때에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정서와 잘 맞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더 진심으로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부르는 마음과 자세가 세속의 음악을 즐기는 것과 똑같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이런 복음송들을 가능한 한 절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위험이 언제나 있습니다. 가사보다는 그 노래에 집착하고 가락에 취해서 부르게 될 위험이 현대교회의 음악에는 예전에 작성된 이러한 찬송가보다도 훨씬 더 그러한 위험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복음송을 부르던, 찬송을 부르던 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생활 하면서 종종 그런 거 봤습니다. 청년들이 교육관 바닥 같은데 한 두 명은 누워있고 한 두 명은 기대있고 그러면서 흥얼대면서 천장 보면서 찬송을 부르고 부르다가 그만 둬버리고 또 일어나서 가기도 하고 또 뭘 먹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봤다는 거죠. 이런 것들은 곤란하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이 복음송이든 혼자 흥얼거리는 노래이든 한번 시작했으면 가락을 맞추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때에 마귀 꽉 차서 인민을 삼키려하나]
내주는 강한 성이죠? 그런 찬송을 갖고 시간이 없으니까 사회자가 우리 1절만 부르고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1절의 결론이 뭐예요? 1절의 결론이 뭔지 아세요? 악한 원수들이 있는데 나중에는 세상에는 악한 마귀를 당할 자 없도다 그것이 1절의 끝이에요. 뭘 하면 생각을 좀 하면서 해야 되잖아요? 황당하더라구요. 어느 모임에 갔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1절만 부르고 모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요. 1절 결론이 천하의 당할 자 없도다, 누가? 마귀가. 되겠어요? 그런 찬송은 혼자 개인적으로 불러도 끝까지 다 불러야 해요. 끝까지 다 부를 상황이 아니면 시작을 하지 마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찬송이 아니라도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늘 기쁘게 나 부르네]
그리고 전화벨이 울리던지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그만 두었어요. 한 노래가 울려 퍼져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 반토막짜리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나 하는 것이죠. 찬양은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에요. 끝내야죠.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화벨이 울리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끝내고 받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예배 중에는 그럴 위험이 적은데 혼자 부르는 찬양생활에는 이런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죠.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 가락 따라 노래 부르다가 전화 오면 전화 받고 뭐 먹으라고 주면 뭐 먹고 어디 가라고 하면 가기도 하고 그렇게 해버리는 이런 것으로서는 진정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경험하게 된 그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 그것이 신기하게 이제는 저 원수들 앞에 해방되었다는 기쁨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놀랍고 위대한 기쁨과 획기적인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즉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찬양의 대상인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찬양을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 그 찬양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올리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서도 문제가 남습니다. 무슨 문제가 남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그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면서 때로는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온 지체를 확 감싸시는 것 같은 임재를 경험할 때가 있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깊이 느껴집니다. 그 때 솔직히 말해서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확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때 우리의 찬양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락이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 자동적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찬양을 통해서 그 찬양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진정한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사모하며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찬양이 진정한 의미의 찬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악기와 반주와 연주와 화려한 음향시설 보다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 하나님이 임재 속으로 우리를 불러주시길 고대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은 우리가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은 원리를 이 찬양 속에서 보여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놀라운 임재 속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목말라 갈구하며 영원한 생명의 샘을 예배를 통해서 맛보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듯이 찬양 속에서도 그렇게 그 찬양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찬송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 앞에 다가가는 사람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부를 때 생각이 딴 곳에 가있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찬양을 부를 때 우리는 가락이 아니라 가사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불러야 될 필요가 있고 성경을 암송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찬송가 가사를 암송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찬송가를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완벽하게 가사를 외우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놀랍게 자유로울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찬송가 102장 부르겠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악보 없이 반주를 하고 그리고 부르는 사람들은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눈을 감고 이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내 인생으로 다가오신 그 예수의 이름을 기억하며 찬송을 부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50장 찬송을 부를 때 큰 영화로운 주 이 곳에 오셔서 이 모인 자들로 주 백성 삼으사, 여러분 그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삶의 환경 그 환경 마다마다에서 상황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깊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그 노래의 가락들이 즉시 가사를 타고 신앙고백처럼 흘러나올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유산인지 모릅니다. 성경을 암송하는 것은 물론 종유하지만 찬송을 그렇게 암보하고 암송해서 모든 가락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모든 일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래서 가사도 잘 모르고 곡조도 잘 모르는 곡이 처음 배우면서 은혜 되는 적은 별로 없어요. 왜? 집중을 못해요. 그러나 오래도록 불러서 마음에 있고 오래도록 불러서 그 가사가 영혼 깊이 젖어와서 찬송을 부르면 내 영혼에 피가 묻어있고 눈물이 묻어있는 그 가사가 우러나올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르며 회상할 것이 있습니다. 그 가사가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 내려와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단지 교리적으로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의 찬양을 지금 듣고 계시다고 하는 하늘로 빨려올라가고 우리의 영혼의 찬양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다라고 하는 아주 현존하는 의식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찬양이 예배 속에서 진정한 찬양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목마름이 없이 찬송하는 사람은 목만 아프지 그 찬송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일어나서 찬송을 부르고 앉아서 찬송을 부르는 것,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목소리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부르는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찬송을 부를 때에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그 찬양의 가사처럼 되어지길 원하고 또 이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성품이 내게도 경험되어지길 갈망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똑같습니다. 예배 속에서 찬양은 많이 불러야 합니다. 한 40분 부른 후에 예배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기도하고 똑같습니다. 여러분, 일주일 내내 기도도 별로 안 하고 그렇게 살고 오다가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러고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폭포수와 같이 기도가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늘 살다 온 사람, 예배에 걸어온 그 순간까지도 마음에 주앞에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 앞에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기도의 세계와 찬양의 영을 간직하다 온 사람에게는 긴 예배 준비가 필요없을 것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 영혼 깊은 곳에서 기도가 터져 나오고 찬양합시다 그럴 때 찬양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들이 모두 메말라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측면도 예배 속에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긴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준비되고 우리의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잘 바쳐지는 이러한 준비가 이루어져서 더 깊은 찬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이러한 일들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왜 이렇게 찬양을 많이 할까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기도회 할 때 왜 이렇게 길까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찬양을 부르며 시간도 잊고 자기도 잊고 그 찬양 속에서 나와 함께 교통하시며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을 느낄 수 있도록 깊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찬양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준비되게 하는 그러한 놀라운 역할들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다 사라진 광경이기는 합니다만, 옛날 시골 장터에 가보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풍구라고 하죠,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그 기구, 그때는 전동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힘센 남자가 커다란 풍구를 힘차게 막 돌립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날개가 돌아가면서 강력한 바람이 한 곳으로 모아져서 석탄 있죠? 역청탄이라고 하죠? 그것을 강하게 때웁니다. 이글이글거리면서 시뻘겋게 틀 안에서 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철판을 뚝뚝 자른 쪼가리들을 부지깽이로 찍어서 푹 꽂아놓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탁 꺼냅니다. 그러면 새빨개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면서 열이 납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낫을 만드는지 보신 적 있습니까? 갖다 놓고 자로 재고 톱으로 썰고 그러지 않습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쇠를 모루위에 올려놓고 작은 망치로 아주 빨리 망치질을 합니다. 그러면서 불과 1,2분 동안 망치질을 했는데 그 기다랗던 쇳덩어리가 활처럼 휘면서 몇 번 집어놓고 나면 망치에 얻어맞은 것은 불과 몇 번이었는데 아주 훌륭한 날이 선 낫으로 변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그 무쇠를 갖다놓고 망치로 아무리 두드려도 그 쇠를 누구도 깨뜨릴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가지고 연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정서로 달아오르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는 그 심정과 일치하는 심정을 갖게 된다면, 그러면 고함치는 설교가 아니더라도 속삭이는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사람들이 회심하고 변화 받을 수 있습니다. 천둥과 낙뢰를 동반한 번개와 우레와 같은 설교를 통해서만 한 시대의 위대한 각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정서로 달아오른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정서로 달아오르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속삭이는 음성으로도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회개시키고 변화시키고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낳으면서 그런 것을 경험해보시지 않습니까? 자녀가 잘못했는데도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마음 아파하신다는 사실도 알고 자기의 과오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느끼는 고통을 모두 이해하고 자기가 벌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부모를 이렇게 괴롭게 했다는 그 괴로움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괴로운 상태가 된 적이 있죠? 그런 아이에게는 소리 지르고 뭘 집어던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네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아버지가 울먹거리기만 해도 아이는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예배에 있어서의 접근은 반강제적이고 노예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접근은 인격적인 접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대충 때우고 예배드리고 가야지, 그러면 그냥 가면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정말 만나고 예배드리고 싶어 하고 간절히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배를 주관하신다고 하는데 우리 열두시에는 무조건 마칩시다, 그러면 마치는 겁니다. 성령님이 미리 안 오시면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의 정서를 깊이 느끼게 되는 그것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의 교훈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찬양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똑같이 위험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못하던 것을 마음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 그리움을 갖게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 속에서 찬양이 가지는 능력이요, 동시에 한계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그런 찬양이 하나님께 올려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하는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때 그 찬양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드려져서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을 느끼실 수 있고 또한 우리는 그 예배 속에서 찬양을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찬양이 예배 속에서의 진정한 찬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립니다. 마음을 모으십시오. 찬양할 때 생각을 모으십시오. 할 수 있으면 찬송가가사를 외우며 부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찬양을 부를 때 그 고백이 영혼의 고백이 되게 하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락이 되도록 만들어주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찬송을 부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입니다. 시편 148:5에 보면 이 백성은 여호와를 위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 백성들은 모든 만들어진 피조물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는 그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그 주간에 예루살렘 성을 올라갈 때 많은 백성들이 찬송했습니다. 그들을 조용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조용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을 향한 창조의 노래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그 죄는 또한 온 세상에까지 미쳤습니다. 땅은 더 이상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고 수고하고 애를 써도 가시와 엉겅퀴를 낼 정도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이런 저주가 풀리고 진정으로 새하늘과 새땅이 회복될 때 우리는 우리뿐만 아니라 찬양의 동지들이 또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세계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지체들이 기도원을 갔는데 모여앉아서 풀숲에서 찬송을 하는데 그 모여있던 사람들이 똑같이 환상을 봤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옆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데 그 아카시아 나무 잎이 손뼉을 치는 거예요. 한 사람이 봤으면 착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본 거예요. 아카시아 나무의 늘어진 잎사귀가 흔들거리면서 박자를 맞춰서 찬양하는 환상을 본 거에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온 천하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피조물들의 찬송을 받으셔야 할 이유를 한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내가 너희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 그리고 온 우주를 만드셨다는 것은 예배 속에서 정말 아름다운 찬양의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그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위치가 어딘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으로 지은바 된 존재들입니다. 꽃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풀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내셨고 우리의 후손도 하나님이 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 창조를 하나님에게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받았다는 사실을 찬양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손에 의탁되어있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으로 인해서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찬송의 이유는, 시편 145편 4절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 놀라운 선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찬송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적마다 우리는 언제나 빼놓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보혈의 찬송, 십자가의 찬송, 고난의 찬송을 부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송과 함께 반드시 우리가 회개하는 찬송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위대한 구원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찬양을 예배 중에 잊지 않는 이유가 무엇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우리는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배하는 사람보다는 예배하지 않고 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시간이 필수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귀하고 필수적인 시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손에 의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언제나 우리에게 찬양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일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다른 백성들과는 같지 않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그 제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에게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셔서 자신들에게는 다른 백성에게는 나타내보여주시지 않는 특별한 간섭과 은혜로 찾아오신다고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선택의 은혜, 이것이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고 경배하면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일주일 동안 우리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은 별로 찾지 아니하고 땅의 것들을 몰두하며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의 영혼에 끼였던 모든 더러운 죄악의 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빛으로 소금으로 불꽃으로 횃불처럼 그렇게 살아야할 특별한 의무를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찬양을 부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해내셨고 하나님의 우리를 구속해내신 위대한 구원의 사건과 선택의 사건이야말로 세상에 있는 모든 중요한 사건들보다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예배의 찬양을 통해서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를 찬송하고 그 찬송 속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연합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것을 알고 그 십자가 아래 살아가는 이 삶이 꽃처럼 화려하고 향기 나는 삶은 아니어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아는 사람, 십자가 그늘 밑에 쉬는 것이 햇볕이 내리쬐는 왕국에서 고통 받는 것보다 훨씬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마니 진정한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이지만 뒤돌아보면 예배에 있어서 공통점이 하나 있더라구요. 그것이 뭐냐 하면 예배 시간에 내가 최고의 상태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던 시기를 그래프로 그려놓고 종합을 해보면 그때가 뭐하고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었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죠.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것으로 인해 한없이 기뻐하는 사람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 어떤 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예배의 시간이에요. 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인해 한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없이 죄 가운데 살다가 고통 가운데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인생을 예수의 피로 건져주시고 구해주시는 그 선택과 구원의 은혜를 한없이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에게는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넘치고 찬양의 영이 넘칠 때에는 나 혼자 부르고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만족이 안 돼요.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찬양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찬송생활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얻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순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기민함,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어떤 순발력이라고 할까요, 영적인 삶에 있어서의 민첩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다가보면 괴롭고 마음 아프고 그런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설교하러 올라가는 일이 언제나 즐거운 것이 아니고 부담이 될 때가 있잖아요. 답답하고 그래요.
[예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위대한 구원의 행동,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 이것을 향한 순발력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향한 순발력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 놀라운 감격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직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인 순발력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이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진리 아닙니까? 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를 생각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원의 위대한 행동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용서함을 받아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마음속에 깊은 눈물과 감격이 흐르게 되잖아요. 그때 우린 즉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해놓으신 이 유에서 찬송할 이유를 찾게 되는 것이에요. 영적인 삶의 사이클을 그래프에다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첫사랑의 때가 있다면 부를 때마다 마음이 녹고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노래할적마다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받들려 올라가는 것같은 깊은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공통적인 특징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순발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배 전체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찬양에 있어서도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찬송할 이유를 갖게 됩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미리암에 소고에 맞추어서 모세와 백성들과 함께 15장의 찬양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의 제목을 붙인다면 신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없도다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15장에 나오는 이 찬송가 가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고 늘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 후로도 되풀이 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성가는 이들만 불렀습니다. 이후에 아무리 출애굽기 15장은 세심하게 연구하고 이 노래를 외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처럼 찬송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홍해가 그 때 갈라지고 다시는 갈라지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은 한 대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아니하였던 매우 특별한 은혜를 자신들의 목전에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올려지는 진정한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신앙의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매우 특별한 일을 행하셔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을 때, 그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시편 속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는 노래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환란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찬양하였지만 그러나 보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도우시는 도우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두려움을 능가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고통의 광야를 지나는 가운데서도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고통보다는 하나님의 더 큰 위로를 발견했을 때 외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찬양할 이유가 있어야지 제대로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찬양할 이유가 없으면 찬양 자체를 통해서 찬양할 이유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얼마나 놀라워요? 그런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나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놀라운 찬양의 이유를 가지고 있을 때 찬양이 진정한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빈익빈부익부에요. 말씀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그 말씀의 은혜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감격하고 하나님께 찬송하니까 그래도 삶이 좀 나을 것 아니에요? 하나님 도와달라고 할 만큼 전투적인 삶을 살다 왔으니까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렇게 찬양할 수 있는 거에요.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은 구원의 행동을 맛보고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이 특별히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통하여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들은 항상 봄바람이 부는 풀밭을 걸어가며 노래했던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를 지나고 물결 속에서 물풀이 자기의 목까지 얽매는 고통까지 경험하였습니다. 맹수들이 자기를 에워싸서 고통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대적에게 둘러싸여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인 것 같았고 원수와 대적들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찬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찬송했습니다. 노래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노래했고 그 속에서 그들은 찬양했습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결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찬양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찬양할 때 마귀는 쫓겨가고 대적들은 물러가고 그들의 담대함 앞에 원수들은 겁을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찬양을 통해서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당에 모였을 때 우리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때 깨닫게 됩니다. 이 찬송이야말로 예배의 한 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예배 그 자체이구나.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찬양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찬양하는 백성들로 인해 기뻐하는, 이러한 삶의 정신을 배우고 나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찬송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송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와 헌금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를 고린도 교회를 향해 거명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 때 상황이 연보와 관련된 상황 속에서 이 마게도냐 교회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사람이면서 그리스도인들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많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연보를 해서 모아서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가 고린도전서에서부터 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지만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은혜들을 은혜 되게끔 지켜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영적으로 잠들어가기 시작할 때 고개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건전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생명력이 고개를 숙일 때 고개를 드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만을 위하는 탐심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시 자체가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많은 무역이 행해지고 있었고 상권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런 고장이었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유복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 있어서 이 고린도 교회는 썩 흥왕한 교회는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서를 써나가면서 헌금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 고린도교회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통해서도 하나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분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죄악됨,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 때로는 나태와 태만 때문에 매일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조명 받으며 자극을 받고 매일 현재 살아가는 삶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가길 원하시는 신앙적인 삶이 무엇인지 비교하면서 자극을 받고 변화를 받는 일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알다시피 이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깨끗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모두 허비하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그는 철저하게 자기와 자기의 동행들이 쓸 것을 스스로 장막을 수선해주고 돈을 벌어가며 공급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깨끗한 이 사람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 바울은 잘 사는 교회인 고린도 교회에게 헌금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간증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있는 신앙심을 자극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분발시켜서 올바른 진리 안에서 헌금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면서 이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 교회가 많은 연보를 한 것 때문에 오늘 이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이 마게도냐 교회는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알다시피 바울이 아시아로 전도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끝까지 성령이 막으셨고 그리하여 가게 된 곳이 바로 이 마게도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마게도냐 교회는 먼저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를 세웠고 그리고 그 교회에서 친히 설교도 하였고 장로들도 세웠기 때문에 어느 교회의 이름을 대면 그 교회에서 받는 우선적인 인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그 교회 성도들을 잘 알고 있는 이 사도 바울, 그리고 세워두고는 다시 방문하면서 그 교회들을 권면하고 굳게 세우고 편지를 주고받아서 그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바울이었기 때문에 어느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의 어떤 인상이 떠오를 것입니다. 저도 회심하고 나서 많지는 않지만 네 교회 정도를 20여 년 동안 다녔습니다. 교회를 떠오르면 그 교회마다 가슴깊이 밀려오는 그 교회의 그림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회가 있었고 어느 교회는 답답한 영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고 또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러 교회들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에 밀려오는 그림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열린교회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무엇이 밀려옵니까? 여러분 혼자 출장 갈 때 시골집에 내려갔을 때 혹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회에 올 수 없을 그 때에 열린교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뭐가 밀려오고 있습니까? 사람마다 다 그 교회의 이름을 들을 때 밀려오는 그림이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를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깊이 밀려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는고 하니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시련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마게도냐 교회가 당해야했던 시험과 시련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방의 세계에서 이 교회가 하나님을 믿고자 하였으니 커다란 박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물리적인 박해는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철학이 발달한 이 마게도냐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사상적인 박해도 만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낙인찍으려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향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하고 핍박하는 환란과 시련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어쩌면 이방의 교도들이, 이방 세계의 불신자들이 이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을 핍박해서 이 교회에 심각한 해를 끼치려고 하는, 그런 박해적인 도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련을 겪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마게도냐 하면 그저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그 환란의 많은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환란만 당해도 어려운데 그 환란의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도 커다란 시련을 한 번이나 두 번 겪은 교회가 아니라 많이 겪은 교회였습니다. 한 두 번의 시련이 아니라 무슨 시련을 당했는지 일일이 헤아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시련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말이 쉽지, 우리가 실지로 시련을 한 번 당해 보십시오. 한 번의 시련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의 피를 말리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지 않습니까? 시련을 모두 이기고 평안한 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마음 좋게 말합니다. “인생은 시련을 통하여 빛나는 법이다. 시련은 있지만 우리가 그 시련 속에서 좌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은 시련을 다 겪고 지나가서 한물 지나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이지 자기 코에서 단내가 나고 시련이 닥쳤는데 이 시련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강대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그 생각을 했는데 저는 언젠가 한 번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새로 장소를 장만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척한지가 오래되었다는데 교인이 5,60명도 안 모입니다. 목사님께 교회가 왜 그렇냐고 물어보니까 교회가 한 120명 가까이 모였었는데 큰 시련을 한 번 만났대요. 그래서 교회가 갈라지고 교인들이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말은 쉽게 하지만 교회가 큰 시험에 들거나 시련을 당했을 때 그 교회가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에 목회자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시련이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늘 이 사도가 마게도냐 교회가 당한 시련이 얼마나 컸으면 그냥 시련이라고 하지 않고 환란의 많은 시련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시련은 어느 교회에나 일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시련이나 일상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진짜 보기 드문 그런 시련과 그 시험을 커다란 환란을 동반한 가운데 한 두 차례도 아니고 수없이 많이 이렇게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니 이렇게 시련을 많이 당한 이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늘 하는 말로 평안해야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시련을 많이 당했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돈이 많으면, 교인들이 돈이 많으면 그래도 헌금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교회는 극한 가난 가운데 처해있는 교회라고 오늘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이 말을 들으면 그 성도들이 가난한 교회, 그게 바울의 마음속에 먼저 떠오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저 마게도냐 교회라고 하면 요즘으로 말하자면 성도들이 돈 만원이라도 제대로 헌금을 못하고 그저 너무나 가난해서 그저 벌벌 떨면서 그저 몇 푼씩 헌금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성도들이 모두 달동네 같은 곳에 게딱지처럼 붙어있는 그런 집에서 살아가는 그런 교회, 그것이 마게도냐 교회를 생각할 때 바울이 느끼는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 앞에 더 헌금하도록 해서 부유한 항구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부끄럽게 한 그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우선 중간적으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시련을 많이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과 헌금 생활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도 헌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환란의 많은 시련을 당하고 극한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는 교회였지만 그러나 이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넘치는 연보로써 고통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섬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넘치는 기쁨이 그들로 하여금 환란의 시련, 극한 가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넘치는 연보를 드림으로 성도들을 섬기게 해 주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비록 환란의 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피를 말리는 고난과 자기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커다란 환란을 쉴새없이 당하며 밀려드는 시련의 파도와 환란의 물결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살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넘치는 신앙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환란을 능가하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시련이 컸지만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환란이 있었지만 환란을 능가하는 놀라운 기쁨과 위로와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이 이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의 심령 속에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쁨이 그들을 주관하였고 그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환란의 시련의 모든 물결을 헤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언제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이 우리의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여러분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고 몸과 마음을 바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죽을 때까지 방해할 것입니다. 세상의 환경이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지 아니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우리를 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란,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언제나 있는 것이며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이 극한 가난이 정도에 따라서 사람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궁핍과 결핍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도 얼마나 많은 결핍을 느끼셨습니까? 저도 여러분 요즘 글을 쓰면서도 뭘 하나 꼭 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돈이 없어요. 늘 결핍을 우리는 느낍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도 결핍을 느낍니다. 가난도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결핍도 늘 겪는 일입니다. 환란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환란과 시련이 어딘들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세상에는 언제나 마게도냐 교회가 경험한 것 같은 그런 결핍과 환란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게도냐 교회는 그 환란의 시련을 능가하는 큰 기쁨이 마게도냐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가난해도 늘 기쁜 거예요. 넘치도록 기쁜 거예요. 그렇게 기쁜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내가 받은 구원 때문에 기뻐하고 그리고 나 같은 죄인에게 이와 같은 교회를 주셔서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할 수 있게 해주시니 기쁘고 너무 감사한 거예요. 그 감사와 그 기쁨이 이 마게도냐 교회의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잃어버린 성도들은 마음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닫힐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마음이 닫히고 급기야는 지갑까지 닫히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게도냐 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넘치는 기쁨을 가진 이 교회를 묘사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말하자면 은근히 이렇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얘들아, 고린도 교회야, 너희 한 번 생각해봐라. 너희는 이 마게도냐 교회처럼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하지 않았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속에는 기쁨이 없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를 봐라. 환란의 시험과 시련의 폭풍이 그들을 강타하였어도, 그것도 한 두 차례가 아니라 수없이 강타하였으나 그들은 여전히 기뻐하고 있지 않느냐? 마게도냐 교회는 궁핍하고 가난한 교회지만 너희는 항구도시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그러나 너희에게는 없는 것이 마게도냐 교회에는 있다. 그건 바로 넘치는 기쁨이다.” 할렐루야.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성도들이 모이더라도 기쁨이 있는 교회, 많이 배운 사람이 모인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교회,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으로 인하여서 행복해할 수 있는 그 복음의 비밀을 아는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지 돈많고 머리가 크다고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통탄을 해요. 자기가 몇 해 전에 이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통탄을 해요. 왜요? 교회 장로인데 절기 헌금을 2천원을 하더래요. 알고 보니까 빌딩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전도사님들이 와서 “목사님, 우리 헌금통 없애버리고 주머니로 돌립시다.”라고 하더래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 헌금통을 놓고 전도사가 거기에서 주보를 나누어주는데 중직들이 헌금을 안 하고 들어가더래요. 주일 헌금을 안 하고. 그리스도인들이에요? 결국은 그러한 신앙생활 자체가 그의 물질적인 궁핍이나, 말하자면 물질생활에 있어서의 어떤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지요.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요. 그 중에 어떤 분들은 회심했는지가 목회자로서 의심이 된대요. 회심치 못한 자들의 대표적인 욕망이 무엇인가 하면 물질에 대한 탐심이에요. 그러니까 그 물질에 대한 탐심이 집요하게 인격에 들러붙으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물신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유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성도들의 헌금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누가 십일조를 얼마 하는지, 목회하고 나서 한 달 정도는 보고나서 그 다음부터는 안 보는 것이 옳겠다 해서 안 봅니다. 왜 그래요? 인간이니까. 마게도냐 교회는 연보를 드릴 때 TV에 마게도냐 교회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헌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넘치는 기쁨,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만족하게 하였고 그리고 물질이 없어 고통하고 있는 그 예루살렘 성도들의 가난과 궁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헌금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는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회에서 회개하는 것을 보고 그랬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돈지갑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오늘 그 눈물 흘리는 그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가장 늦게서야 포기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게 바로 물질에 대한 집착이요, 물질에 대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마게도냐 교회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넘치도록 헌금하여서 성도를 섬기는 그 일에 있어서 모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우리의 중심을 바치는 기도로 예배를 올립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본보기로서 우리의 귀한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헌금 주머니를 돌리는 것을 너무 세속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는 노름을 하거나 혹은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해서 모은 돈을 헌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돈은 모두 깨끗하고 정결한 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름해서 딴 돈은 십일조해서 교회에 낼 필요 없습니다. 그 자체의 수입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건 바치나마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신 진리의 말씀대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온 성도들이 번 그 돈은 그야말로 땀이요 눈물이며 자기의 인생 전체를 깎아서 만들어놓은 물질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 순서가 예배에서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순간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나와 있는 죄인인 한 여자가 식사하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는 그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즘 인플레로 계산하면 천 오백만원 어치 되는 향유였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 여인에 의해서 부어졌을 때 그것은 그 여인이 살아온 지난날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어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죄인으로서의 생애를 살며 아마도 몸을 팔고 술을 따라주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인생을 깎아서 모은 그 향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물질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고 물질도 자기를 위로할 수 없었던 자기의 속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어루만져지며 그리고 가족들도 친구도 이웃도 없는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을 살아가던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인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삶의 가치가 바뀌게 되었고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향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가져왔고 그것을 모두 아낌없이 부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은 헌금을 바치는 삶을 통해서 무엇을 매일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으나 제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옵나이다.”라는 사실을 매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드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이 이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물질로 산다고 믿었다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의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연보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매일 부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근로 현장을 보십시오. 5%를 주겠다, 10%를 주겠다, 월급의 2%, 3%를 더 얻기 위해서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투신자살을 하고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이러한 시대에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재주와 우리의 물질로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까지 우리의 인생을 구속하시고 우리를 많은 환란 가운데서 건져주시고 시련의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를 이끄시고 그리고 극한 가난과 결핍 속에서도 우리를 홀로 있게 버려두시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 살아가는 것도 내 손에 움켜진 이 물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우리는 헌금을 통해 매일매일 신앙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교회 생활 해오면서 저 자신이 때로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물질에 대한 것을 강조하는 것 때문에 심령에 고통을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등록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고 잠깐 출석한 교회에서 정말 저래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이 사택을 하고 구입하는 모양이에요. 장로님들이 그랬겠죠. 교인이 한 70명밖에 안 모이는데 아파트를 한 채 사들이려고 하니까 쉬웠겠어요? 벽에다가 막대그래프를 그려놓고 김X현, 김X희 이렇게 교인의 이름을 다 써놓고 막대그래프 하나 올라가는데 만원씩 해서 빨간 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볼 때 너무 마음이 상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주보에다가 아무개는 얼마 내고 아무개는 얼마 내고 쭉 그걸 써가지고, 그것도 이름은 빨간색으로 금액은 파란색으로 써서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목회를 하고나서 여러분도 알겠지만 어느 날 제가 큰 부끄러움을 당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교회 반도 안 되는 정말 코딱지만한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그 교회 가서 설교를 하는데 우연히 주보를 받는데 그 지난 주간이 추수감사절이었어요. 성도가 거기에서 4부 예배를 봅디다. 그런데 150명 성도가 모이는데 690만원 헌금을 했어요. 그러면서 내 마음에 밀려온 게 그 690만원의 절대 액수가 밀려온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산다는 사람들이 헌금을 안 하는 것이 이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가슴에 밀려왔어요. 그리고 마음속에 커다란 가책이 찾아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음성처럼 제 마음에 들려왔어요. “너는 너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물질에 초연한 목회자라는 인상을 교인들에게 남기기 위하여 교인들이 마땅히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될 삶을 지도하는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니니?” 그러면서 마음이 깊이 아려왔어요. 그런 생각이 가슴에 밀려들어온 거예요. 그러면서 어느 신학교 시절에 어느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 교수님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있다는 거예요. 헌금에 대해서 설교하면 교인들이 줄거나 아니면 마음이 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교회 목사님이 가셨는데 그 교회를 담임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서 목회자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 목사님을 초빙해다가 설교를 들었는데 6개월 동안을 헌금에 대해서만 설교했는데 그 동안에 교인들이 70명이 늘어났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혹은 교회가 돈이 문제가 되어 설교를 하는 건지, 그 문제와 관련된 성도의 신앙이 문제가 되어 설교하는지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안다는 거예요.
사랑한다면 반드시 무언가를 주고 싶습니다. 뭐든지 그렇게 주고 싶을 수가 없어요. 그게 사랑입니다. 무엇이든지 달라고 하지 않아도 바치고 싶은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 첫사랑을 경험하였는데 하여튼 뭐든지 그렇게 바치고 싶어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죠. 하나님 앞에 뭐든지 바치고 싶은데 뭐가 있어야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고통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넘치는 기쁨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는 것이에요. 저희 교회는 그런 면에서 될 수 있으면 성서적인 헌금을 하고 싶어요. 이름 안 냅니다. 이번에 이 성전을 이렇게 수리하고 고치는 이 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애를 썼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 개인으로서 쉽지 않은 거금들을 내놓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또 쉽지 않게 여러 날 동안 자기의 몸을 바쳐서 일했습니다. 품삯으로 치면 몇 백만 원 될지도 모르는 그런 봉사와 헌신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공구, 자기의 도구, 자기의 모든 물건 이런 것을 모두 가져와서 교회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들을 쭉 적어서 신문에 내볼까 하다가 다 지워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만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아니하였지만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익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알고 하나님만이 이해하시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앞에 바칠 돈이 생겼는데 이걸 주일까지 가지고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요. 써 버릴까봐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얼른 내고 싶은데 어저께는 수요일이고 오늘은 목요일이고 주일까지 기다리려면 3일이나 기다려야 해요. 새벽기도회 시간에 갖다가 강대위에 올려놓고 옵니다. 그 때 목사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죠. 돌아올 때 하나님 앞에만,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린 것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기쁨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귀한 것들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 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남들이 없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또 바쁜 사람들이 바치기 어려운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치면서 살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하나님께 자기의 귀한 것을 바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그 바치고 섬기는 가운데 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느끼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 그런 것 경험 못하십니까? 우리가 외식을 다루면서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자기의 재산을 털어서 자기의 노력을 들여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래서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은 그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넘치는 기쁨이 우리를 주관하여 이렇게 하나님을 물질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칠 때 누가 알아줄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목사인 저도 여러분이 헌금 내는 명단 보지 않습니다. 총액만 늘 보고를 2주일에 한 번씩 받습니다. 여러분,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기억하며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의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이 정말 헌금도 불꽃처럼 드리는 삶을 살았으면 참 좋겠어요. 교회가 지금 돈이 모자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목회를 하다가 어느 때에는 교회가 어려울 때 혹은 물질이 필요한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어도 어느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것을 바칠 때 그 때에 목회자인 저의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왜 그렇냐 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보는 거예요. 액수는 얼마 안 되지만 이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쳤을 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는 것이죠. 그러면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위로와 기쁨을 얻는 것이에요.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죠? 내가 주린들 너희의 재물을 탐하겠느냐? 천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데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의 제물과 번제물에 탐을 내시겠느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은 진심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물질이나 우리의 재주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마음 중심이 담겨있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여러분에게 주어질 때, 요즘 같은 세상에는 그런 기회도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적으로나 누군가를 도와야할 상황이 올 때 그것이 달란트라고 생각하고 활용하셔야 됩니다. 이 기회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구나 하면서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그 바친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기쁨이 마게도냐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귀한 헌금을 바칠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악조건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자신을 드리는 이러한 놀라운 신앙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에 베푼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다시 말하면 그 마게도냐 교인들의 마음속에 이런 헌신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넘치는 기쁨, 넘치는 희락, 이 기쁨의 비밀은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니까 이러한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죠. 저는 올해 1월에 대구에 해인사 있는 쪽에 집회를 하러 갔는데 얼마나 재미있는 일을 당했는지 몰라요. 집회를 마쳤는데 저한테 집회를 부탁하러 온 어느 교회가 성도들하고 같이 와서 점심시간에 저를 불러다가 돼지갈비를 사 먹였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돼지갈비를 먹는데 대접하는 집사님이 소개를 해요. 아빠가 무엇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외과 전문의래요. 돈 잘 버는 사람 아니에요? 그러시냐고 그러니까 그 옆에 있던 딸내미가 뭐라고 하냐 하면 “목사님 우리 아빠는 가난해요. 우리 엄마만 부자에요.” 그래요. 저는 속으로 당연하겠지, 벌어서 다 부인 줄 테니까 그랬더니 그게 아니래요. 옆에 있던 교역자가 아주 뱃살을 쥐고 웃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목사님, 이 이야기가 사연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무슨 이야기냐고 하니까 교회가 부지를 사 가지고 가건물을 지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안 계신 가운데 교인들 60명이 모여서 300평의 땅을 샀다고 하니까 그 교회도 참 대단한 교회죠. 그런데 돈을 구하기가 쉽습니까? 어렵죠. 그러니까 이 의사 양반이 병원에 가서 원장에게 1년치 봉급 4500만원인가 5500만원을 가불을 해서 교회에다가 바치고 그 부인이 피아노를 가르친다나 뭘 가르치는데 매일 차비를 받아가지고 용돈으로 실랑이를 하는 것을 이 딸내미가 본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가난하고 우리 엄마는 부자라는 이야기가 나온 거래요. 여러분, 일년 동안을 직장에서 봉급을 못 타요. 그래서 제가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직장 다니는 걸 봉급 받는 재미로 다니는건데 1년 동안 봉급도 없이 그걸 매일 출근을 할 때 그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떻긴 뭐가 어때요, 직장 다니는 것 같지 않고 아마 교회 가는 것 같을 거예요. 왜 그래요? 하나님 앞에 다 드렸으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나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니까 그들 속에 기쁨이 생겨나게 되었고 기쁨이 생겨나게 되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놓습니다. 여전히 물질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인색하고 자신을 향해 부요한 사람들은 은혜가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제껏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물질과 내 자신이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이런 은혜를 사모하며 일평생 힘닿는 대로 넘치도록 주님을 섬기다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와 헌금 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지난 시간에는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 앞에 고통 받는 지체들을 위해서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사실 마게도냐 교회 형편으로 보면 그런 넘치는 물질적인 헌신으로 연보할 수 있게 할만한 여건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넘치는 헌금을 지체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오늘 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 교회는 환란이 많고 시련을 많이 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랬는데도 넘치는 연보로 지체들을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 환란을 많이 당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못 섬긴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환란 속에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사람은 평화롭게 해 주시면 타락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전해지고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해진 사람들은 환란이 오고 시련이 오면 잠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방해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그 중심의 소원을 바꾸어놓거나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마게도냐 교회가 이 일에 아름다운 본보기였습니다. 환란과 많은 시련이 간단없이 그들을 덮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처럼 넘치는 연보로 지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헌금 생활도 환란도 많고 시련이 많으면, 물론 환란과 시련은 진실한 성도의 헌금의 액수는 움직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치고자 하는 그 중심의 소원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넘치도록 가난한 교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이 막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귀한 연보를 드리는 사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이제 우리가 제 2의 마게도냐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에 대한, 연보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편견들을 모두 거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연보를 하는 것은 돈이 많거나 삶이 평화롭기 때문에 연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의 공통된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난하고 환란을 많이 겪어도 넘치는 신앙의 기쁨이 있는 사람들이면 하나님 앞에 귀한 헌금을 아낌없이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연보였고 두 번째는 이러한 헌신을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헌금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자기를 먼저 드린 헌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 요소 중에 하나를 살펴보면 먼저 이 마게도냐 교회는 자기의 힘에 맞도록 했고 또 나아가서는 힘에 지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의 연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사도는 이 연보를 다 모아서 그래서 관리를 할 때에 그 때에 뭐라고 했냐 하면 거액의 연보라고 했습니다. 액수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기근이 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을 돕는데 쓰는 돈이었으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백만 원이나 이백만 원 혹은 일억이나 이억의 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야말로 거액의 연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보가 거액이 되는데 있어서 마게도냐가 크게 한 몫 도왔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로 그렇게 판단해서는 이 마게도냐 교회가 이방인들로 된 교회이고 세워진지 얼마 안 되는 교회이고 거기에다가 가난한 교회이고 시련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 교회인데 이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생각하자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할 때에 낼 수 있는 교회의 예상목록을 짜면서 고린도 교회는 좀 많이 써 놓고 마게도냐 교회는 거의 써 놓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이 보는 환경과 여건에서는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사람의 생각과 예상을 깨고 더 넘치는 연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 앞에 드린 이 헌금에 대해 말하기를 힘껏 하였다는 것입니다. 힘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집을 사거나 꼭 마음에 드는 땅을 사거나 혹은 여러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에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또 어디서 빌릴 곳을 생각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저당이라도 잡혀서 대출이라도 받을 궁리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힘대로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대출을 받고 꾸어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마게도냐 교회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할 때 그 마음이 불우이웃돕기식의 헌금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이 예루살렘이 당한 어려운 일을 위해 헌금할 때에 그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인 것처럼 마치 자신들이 내는 연보가 자신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연보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 한 달 째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중국 연변에 있는 조선족들에게 사기 친 그 한국 사람들로 말미암아서 그 사람들이 당하는 끔찍한 고통이에요. 우연히 집회 갔다고 숙소에서 들어와서 잠깐 뉴스를 들으려고 틀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가 특집이었어요. 그래서 한 시간 동안 넋을 놓고 자세히 봤어요. 그랬더니 세상에 어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어요? 가서는 그 순박한 사람들을 가짜 서류를 가지고 가서 위조해서는 수억 원씩, 그 사람들에게 수억 원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수 백 억입니다. 한 달 봉급이 3만원 밖에 안 되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일억 오천만원씩 거둬 모았다니 그 사람들은 그 일 하나에 가치를 느끼고 사돈에 팔촌 돈까지 다 바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돈을 떼어먹고 그리고는 흥청망청 유흥비로 쓰고 그렇게 도망을 다니면서 이제는 그 분노의 감정이 극도에 달해서 한국 영사관을 돌격할 돌격대를 5천 명을 모으고 있다니 이게 민족으로서 할 짓입니까? 그 때 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돈을 누군가는 배상해야겠는데, 할 수 있으면 교회가 이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해서 한 가정, 두 가정만이라도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이 조국의 미래를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에 제 마음에도 그것이 깊이 아픔으로 느껴지면서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저녁 내내 잠들 때까지 하고 그 이튿날도 하고 그저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정부에서 배상을 검토하고 그래요. 그런데 사실 이건 정부가 해야 될 일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양심을 팔아먹은 이 민족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되는 일이에요.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에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 마음이 나를 감동시키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해 볼 길이 없을까 생각했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감동시킨 이 마게도냐 교회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유대교인들, 히브리인들로서 예수를 믿으면서 동족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 준 그 복음을 처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을 때에, 이 마게도냐 교인들은 불우이웃성금하는 것처럼 그렇게 연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연보할 때에 무슨 회비를 내거나 아니면 무슨 그렇게 사무적인 태도로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힘껏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헌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액수도 문제가 되는 것이죠. 아무리 헌금이 우리의 중심을 보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러나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내는 그 헌금 속에 중심이 깃들어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정말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고 그 헌금 드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하나님이 더더욱 귀하신 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성도들은 그 헌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아요.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나는 내 중심을 드리면 되는 거예요. 내 중심을 드리면 되는 것이에요. 마음이 담겨있어야죠. 제가 이야기했죠? 제가 어느 지방에 집회에 내려갔는데 목사님이 그렇게 성도님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거예요. 저는 집회 내려갈 때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사전에 알아보려고 하지 않아요. 가르쳐주려고도 하지 않지만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왜? 알아보면 자꾸 인간적인 생각으로 메시지를 조정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가는 거예요. 가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오늘 가서 뭘 전할까요?” 기도하는 거예요. 나도 몰라요. 뭘 전할지…. 기도하면서 가는 거죠. 그런데 집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그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이 교회에 청빙와서 웃음을 잃어버리고 자녀들이 자기를 보고 아빠 너무 변했어 라고 말할 정도로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이제는 교회에서 무슨 회의만 한다하면 등골에서 식은땀부터 난대요. 그렇게 장로님들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하는 이야기가 “빌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절기 헌금을 2천원을 합디다.” 사악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고통을 주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말이죠, 영원히 헌금에 대해서 설교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린 지난 1년 동안에 주정헌금을 하고 또 감사헌금을 하고 선교헌금도 하고 때로는 절기헌금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중심으로 드리는 헌금이었습니까? 저는 특별히 주정헌금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거죠. 정말 아무 부담 없이 드릴 수 있는 액수이면 안 된다는 것이죠. 부담이 되어서 언제나 그것이 기도 제목이 될 정도의 헌금이 되어서도 안 돼요. 그러나 언제든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액수의 헌금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주일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비웃기를 교회주보를 보니까 헌금의 종류가 28가지까지 되었는데 국세의 종류보다 더 많대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헌금들의 종류를 늘이면서 그렇게 교회가 돈을 거둬들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서는 안 돼요.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단순한 명목으로 헌금하면서도 언제나 거기에는 우리의 중심이 담겨있는 헌금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 헌금명단을 보지 않습니다. 총액을 봅니다. 그리고 몇 명이 내었는지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주정헌금을 내는 명수와 액수에 대해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아요. 직장을 다니지 못하거나 전혀 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천 원도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거예요. 그러나 자기가 수입원이 있고 넉넉하게 생활을 하면서도 주정헌금을 천 원, 이천 원으로 때우려고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거죠. 힘을 다하여, 힘 있는 그대로 언제든지 매주일 하나님 앞에 마음 중심을 드릴 수 있는 헌금 거기에 매주 빠지지 않는 소중한 헌금이 주일헌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에서 주일 헌금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습니까? 주일헌금은 헌금통 돌 때에 그냥 잡히는 대로 집어넣는 것이 주일헌금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부정기적인 헌금을 많이 거둘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명목을 교회에서 늘려야 하는 행전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그거예요. 여러분들의 헌금의 근간을 십일조 생활과 주일헌금이 되게 하라는 것이지요. 주일헌금을 이렇게 교회에서 정해내는 이유는 결코 수입을 늘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을 해봤어요. 정해놓지 않고 헌금을 하니까 나는 일년 동안 정성껏 드려야겠다 생각을 하는데도 헌금 바치는 것이 즉흥적이 된다는 것이죠. 기도하면서 정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년에는 제가 한 주에 얼마정도 바쳐야 되겠습니까? 이 정도면 제가 너무 부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매주 도우심이 없으면 교회에 나올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이 정도면 너무나 무관심하면서도 헌금생활 할 것 같은데 적절한 액수가 얼마입니까 하고 기도하면서 헌금을 해서 주일헌금이 헌금의 근간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회 모든 성도들이 취업을 하고 커다란 사업을 해서 갑자기 돈을 벌고말고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교회가 몇 명의 성도에서 어느 정도의 돈이 어느 정도의 연보가 항상 성도들로부터 하나님 앞에 바쳐진다는 그런 예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본인들도 그렇게 살아야지만 행전의 악순환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매주 감사해요. 그러나 매주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은 감사헌금이 아니라 주정헌금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특별히 감사한 때를 만납니다. 찾아서 하나님 앞에 또 넘치도록 드리는 것이에요. 그것은 부정기적인 것입니다. 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금의 근간은 이 중심에 십일조 헌금과 주일 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넘치도록 할 수가 없어요, 그죠? 수입을 얻는 대로 하나님 앞에 내는 거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이 헌금의 태도에 있어서 감사헌금이든지 절기에 바치는 헌금이든지 우리의 중심을 드리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인데 제가 참 좋아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고 아주 설교에 능하신 분이었습니다. 25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28살에 가서 32살에 당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40세 넘는 동안 십 년 넘게 목회하면서 한 천 명 교회로 만드셨으니까 세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목회에서 과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교회에 대해서 한이 맺혔더라고요. 강의 시간에 한 번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 이야기가 가슴에서 나오는 거예요. 왜 그렇냐고 했더니 자기가 아버지께로부터 재산도 좀 있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생고생하면서 대학을 나와서 그러면서 어떻게 살았는데 집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에요. 부인이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교회에서 28살 되는 청년을 5년 동안 있다고 담임목사를 시켜주마 그러니 와서 인턴처럼 배워라 그리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깊이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더래요. 그래서 갔어요. 그런데 이 분은 얼마나 재미있는 분이냐 하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새벽기도를 빠져본 적이 없대요. 대단한 분이죠?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교회에서 부흥회하면 시험공부는 주님께 맡기고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참 대단한 분이에요.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산기도를 해도 우리는 기도원에 가는데 이 분은 텐트치고 산에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리고 늑대가 다가오면 어떻게 물리치는지 방법까지 학생들한테 가르쳐줬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오라고 하니까 자기가 깊이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나와 나의 모든 가족의 생계는 교회에 달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가진 재산을 전부 다 처분한 거예요. 처분해서 교회 오면서 하나님 앞에 첫 주일에 다 헌금으로 드려버린 거예요. 교인들이 감동을 받았겠어요, 시험을 받았겠어요?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면 감동을 받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교회의 커다란 문제가 돼 버리고 말았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장로님들이 젊어서 얼마나 축재를 많이 했으면 이 거액을 감사헌금으로 드리겠느냐, 그러면서 이 사람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시작한 갈등이 마지막 교회를 떠날 때까지 해결이 안 된 거예요. 진실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려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중심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사람들은 늘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것이에요. 광신자처럼 보이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이 마게도냐 교회를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힘을 다하도록 헌금했고 마지막에 자기의 힘껏 헌금해도 그것으로도 자기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이러한 변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지 못하고 교회 와서 매일 졸고 자다가 가는 사람이 헌금 안 하고 가는 것을 지금 제가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손이 지갑에 닿을 때는 머리가 갑자기 비상해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높이 들고 찬양하던 그 손이 지갑 가까이 가기만 하면 왠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색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아주 간단하게 “은혜와 헌금은 별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쳐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헌금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가능하지 목회 실제에 있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교회를 운영해나갈 수 있는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은혜를 거지같이 받았으면 목회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은혜가 아니죠. 마음 밑바닥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움직였으면 마게도냐 교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가 되시고 마게도냐 교인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서 빈털터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뵈올 때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가난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고통 받는 예루살렘 교회에 그 시련과 그 가난의 고통을 통해서 눈물 흘리시는 예수를 보았어요.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한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후원하였던 이 빌립보 교회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요 향기로운 제물이었다고 표현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도운 것은 사도 바울이었고 그 선교비를 사용한 것은 바울이었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었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해서 인색해지고 고통 받는 지체와 이웃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힘을 다하여 헌금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동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그리고 정한 눈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시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다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 분은 생명을 잃으셨고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시기 위해서 그 분은 치욕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화려한 천국에서 경배를 받고 계시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에게 좋은 모든 것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안락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그 모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버리고 삶에 있어서 즐거움을 버리셨으니 우리를 즐겁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마게도냐 교회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이제 그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탐욕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 손에 쥐고 있는 흙덩이와 같은 재물을 사랑하며 사느니 차라리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신들로 그리스도 예수처럼 가난해지고 낮아져서 자기들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와 이웃들이 부요해질 수 있다면 그 길을 걸어가기를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탐욕으로 가득 찬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푼의 돈, 그리고 잠시 동안의 안일한 삶을 위해서 살인을 서슴지 않는 탐욕스러운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되고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살고 팔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선행과 인간의 아름다운 덕행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다운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헌금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6장을 여러분들에게 강해해나갈 때에 외식과 구제, 외식과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구제하는 것이 진실한 정서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구제하면 그 구제의 행위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 준다 그랬어요, 못 한다 그랬어요? 해 준다 그랬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물질은 우리를 위하여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물질들로 하나님 앞에 넘치도록 다 드리는 그 일에 우리 자신을 다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목양하는 동안 저는 제 자신 속에 다짐합니다. “결코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성도들의 영혼의 변화가 아니라 호주머니를 쳐다봐야 하는 그런 비굴한 목회는 하지 말자.”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을 드리는 것 사이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물질 있는 것을 영원히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적인 연약함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개입하는 그러한 세속적인 생각들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부정하는 자기부인이 없이는 은혜 받은 대로 헌금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가 아주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둘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결혼하고 다른 곳에서 살던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 만나면 끌어안고 흐느껴 울 정도로 그렇게 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형을 사랑했어요. 그러다가 배를 타고 노다지가 많이 나와서 그래서 사람들이 금을 많이 캔다는 그곳으로 팔자를 고쳐 볼 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생한 끝에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큼직한 금덩어리 하나를 캤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배를 타고 둘이 형제가 얼싸안고 “형 이제 우리는 고생 다했다”고 하고 형은 “그래 아우야 그동안에 얼마나 우리가 고생했냐 이제 우리 떵떵거리며 살아보자” 그러고 배를 타고 강 하나를 건너오고 있었답니다. 중간쯤 건너왔는데 동생은 노를 젓고 형은 뒤에 이렇게 앉아있는데 형이 뒤에 있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금덩어리를 번쩍 들어다가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동생이 노를 젓다 말고 기겁을 하고 보니까 노란 금덩어리가 물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수심은 깊고 들어갈 수는 없고 그래서 형한테 “형 이게 무슨 짓이야. 우리가 그걸 얼마나 천신만고 캤는데”라고 하니까 형이 아우를 보고 “얘야 나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이 세상에서 네가 없었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 이 금을 캐고 배를 띄워 강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여태까지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지만 강폭의 반을 노를 저어 오기까지 내 마음 속에 끊임없이 네가 없었으면 저게 다 내것일텐데 이 생각을 생전 처음 했단다. 아우야 내가 금덩이를 손에 쥐고 살겠느냐 아니면 너를 잃고 살겠느냐. 우리 이제 소몰고 밭갈면서 우리 그렇게 살자.” 그러고 돌아갔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그렇게 결심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그 시간적인 차이, 심리적인 차이에 우리의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성품이 말하자면 그 은혜가 물질을 바치는 헌금으로 고백되지 못하도록 마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여기에는 그러한 생각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인하면서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나는 물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이러한 자기확인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받는 것과 헌금바치는 실제 삶 속에 파고들어오는, 이 이율배반적인 세상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계산을 추방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규모없이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헌금을 저는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헌금하고 그 다음 달에는 돈 꾸어 다닌다고 정신없고 그 다음 달에는 돈을 떼어먹는다는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규모있는 삶을 살면서 마음 중심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런 헌금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통장을 갖고 살아가는 자체가 마태복음 6장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거래요. 참 잘났어요. 그러면 꾸지도 말아야지. 꾸면 어떡해요? 여러분, 마태복음 6장에 뭐가 나와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성경이 그러 사람들 때문에 고생하는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면 꾸지도 말아야지, 꾸고 못 갚고 신용떨어지고. 그런 식으로 살면서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마게도냐 교회는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를 지켜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이들이 바울에게 우리도 끼어달라고 간절히 구했습니다. 저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데 몇 가지를 상상할 수 있겠죠. 그죠? 그 중 하나는 그렇게 가난한 교회에 뭐 나올 것이 있을까 생각을 하고 너희들은 안 내도 좋다고 했든지 기별을 안 했든지 그럴 수는 있겠죠. 어떤 식으로든지 이 마게도냐 교회는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한 것이 아니라 찾아서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에게 이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우리도 제발 그 연보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거예요. 제가 몇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하는 걸 봤거든요. 참 재미있더군요. 건축헌금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목사님들은 며칠씩 금식을 하고 당회가 기도원에 올라가고 금식하고 합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그리고 와가지고 미리 광고를 해야 되잖아요? 몇 월 몇 일 날 우리 건축헌금을 합니다. 그 때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날 집안에 무슨 일 일어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그래서 가까운 교회 나가거나 지방에 나가거나 그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아요? 여러분, 교회에서 무엇인가 덕을 볼 때에는 다 한 다리씩 끼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언가 이런 일에 헌신하자고 할 때 꼭 소외되고 빠지는 사람 있지요? 다른 일에 소외시키면 펄펄 뛰어도 그런 일에 소외시킬 때는 또 마지못해서 소외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교회에서 이런 모습들을 많이 봤습니다. 몇 개 교회를 거치면서 건축헌금 하는 날 평소 교인들보다 많이 나오는 교회를 한 번도 못 봤어요. 꼭 적게 나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한 교회를 세우실 때 모든 성도들의 땀과 눈물을 사용해서 당신의 교회를 지으십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 지어요. 누군가 한 두 사람이 하지 않고 열사람, 스무 사람 안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하세요. 결국은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을 때 먼 훗날 건축헌금 시간에 도망가서 다시 한번 그 교회 정문 앞에 설 때 그 느낌이 어땠겠는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후일 다른 교회에 가서 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다고 칩시다. 그 때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게 느껴지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게도냐 교회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운 일에 우리를 동참시켜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연보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무엇이 필요를 하는지 재정형편이 어떤지 일일이 사람들에게 다 광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필요보다도 오히려 교회의 필요와 지체들의 필요에 더 예민하게 눈뜨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요즘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설교를 하고난 그날 그 교회에서 팔십 먹은 할머니 한 분이 연탄가스 피워놓고 자살했어요. 전 한 번도 다른 교회에 있을 때 누군가 제게 다가와서 어느 지체 중에 물질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지체가 있습니까, 이름 없이 이 돈을 드리고 싶은데 목사님이 중간에 좀 서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교인들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자신의 연약하고 궁핍한 환경을 털어놓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 와서 또 돈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은 사실은 죽는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 많더라구요. 한 번 글쎄 교회에서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다고 해서 돈을 거둬가지고 말이에요. 그 때 큰 돈이었어요. 쌀 다섯 말에다가 연탄 이백장이니까 그 때 당시 큰 돈이었어요. 가지고 들어가는 그 순간에 배신감을 느꼈어요. 우리 집에는 없는 가전제품 천지야.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 하니까 이게 전부 월부인데 월부장수들이 매일 몰려온대요. 그렇게 살면 되겠어요? 그래도 할 수 없이 가져갔으니까 보태주고 왔지마는 왜 그래요. 여러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 교회에서도 많아요. 그리고 그게 또 신앙이 아니겠어요? 내가 물질적으로 고통 받을 때 하나님 의뢰하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지, 누구 앞에서 손 벌리면 해결될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 믿으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지체들과 교회 믿으면서 사는 거죠. 그래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목회자에요. 이 교회는 자기들에게 할당된 의무만을 이행한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로 성도들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로운 헌신에 자신들을 동참시켜달라고 애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 청년 때 여쭈어보았어요. “목사님 목회를 하시면서 제일 감격적인 때가 언제에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이 어린 청년 앞에서 그래요. “김선생, 나는 말이야. 목회하면서 누군가가 찾아와서 목사님 힘 많이 드시죠? 제가 이러이러한 재주가 있는데 어떻게 제가 목사님 도울 길이 없겠습니까 라고 말할 때 목회의 모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 그래서 제가 한 번 또 써먹었잖아요. 제가 새 교회로 옮겨갈 때에 그랬어요. “목사님 제가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이렇게 주의 일을 섬겼던 사람인데 혹시 제가 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목사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시켜주십시오.”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저를 예뻐하셨어요. 귀하게 생각하시고. 여러분, 우리에게 할당된 기회를 의무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녀보십시오. 지금도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도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합니다. 구석구석 살펴보십시오. 정말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고 우리가 물질로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지만 될 그런 상황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일들을 교회적으로 깊이 인식하고 기도한 후에 이것을 합시다라고 할 때에는 마음속에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던 것들이 용솟음쳐 나오는 헌신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물질적인 삶에 있어서도 불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헌금생활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교회를 위한 물질적인 탐욕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 설교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저의 증인이십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이 일이 좋고 마게도냐 교회의 모본을 본받는 것이 필요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자기를 먼저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어느 지체가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에 감사제목을 쓰는데 이렇게 썼어요.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라고 했는데 내가 그 때 어떻게 해서 금액을 보게 되었는지 삼천원인가 오천원이었어요. 돈을 못 버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그 후에 어느 일로 그 지체가 뭔가를 아주 완강하게 불순종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너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라고 헌금봉투에 쓰지 않았니? 목사보라고 썼냐, 하나님 보라고 썼지.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그래놓고 지금 와서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냐?” 여러분 헌금이 어려워지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 마음을 내게 주면” 아버지는 효도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는 것은 마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달라는 것은 너 자신을 나에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들은 헌금 생활에서 자유롭습니다. 어차피 국 끓이든지 볶으시든지 튀기시든지 내 인생 주님의 것이오니 하고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바쳐본 사람들, 그리고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한때 내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바쳤다고 해서 지금도 내 자신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기억을 해야 되요. 한때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바친 추억이 있다는 것과 지금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지금 이렇게 바쳐져 있다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은 한 번 바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한 번 여러분에게 은혜주시면 되요? 하나님 앞에 한 번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인생에 대한 우리 소유권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다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헌금할 때에는 헌금을 바치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되 그 일부를 주께 바티나이다 성도들이 모두 암송하는 교회를 봤어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쯤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드렸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그런 드려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에요. 헌신되었다고 자랑하고 간증하는 많은 사람들보면 뭔가 중요한 착각을 하고 있어요. 옛날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헌신하거나 변화를 받았는데 그 추억을 상기하면서 옛날 정서에 오늘 젖어드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 저희 교회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연세가 많으신데 우리 구역 식구들이 심방을 하면 구역 식구들 손을 꽉 잡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시거든요? 옛날 옛날에 한 50년 전에 할아버지가 얼마나 자기에게 잘해줬는지 말씀하세요. 소녀 같아요. 눈은 허공을 응시하면서 잔잔한 미소를 띠우면서 그렇게 상념에 빠지는 거예요. 이야기할 때 그 옛날의 정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것은 그렇게 감성적인 것이 아니에요. 매일매일 헌신된 고백과 내 마음이 그 헌신된 고백에서 동떨어진 것이 되려고 하는 그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그 갭을 순간순간 말하자면 피흘리는 열심히 투쟁하면서 죄를 죽이고 여전히 남아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드리는 이런 삶을 매일매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자기를 먼저 주님께 드렸습니다. 내 모든 것 주님의 것이옵나이다. 내 모든 것 당신 소유 삼으소서. 이렇게 자기를 먼저 드렸기 때문에 생사 간에 자신을 바친 사라들이 물질에 있어서 넘치는 헌신을 드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깨닫게 되는 중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진정한 헌금은 자기를 바치는 일 없이는 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헌금 생활이 만약 형식적이고 이것이 정말 내 마음을 담았다고 할 수 없는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한 헌금 생활이라고 한다면 헌금 생활에 있어서 잘못된 가난한 태도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사랑의 고백이 숨어있고 부끄러움 없이 그 사랑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서 우리는 매일매일 이 헌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하면서 매주 매번 시시때때로 바치는 그 연보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오히려 거기에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더 깊이 경험하며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와 기도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설교를 하였고 이제 지지난 시간에는 이제 두 시간에 걸쳐서 예배 중에 헌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예배에 있어서 예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할 때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 번 설교를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 설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오시는 그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기도를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들이 점차 매우 짙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기도회는 따로 있고 예배는 (?)도 합니다만 그러나 예배 속에서 기도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져다주는 은혜의 방편으로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배 속에서 기도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 같이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묵도 속에서 거의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대표기도, 의례적이고 형식적이고 짧은 대표기도로 우리의 모든 기도를 예배 속에서 대신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함께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배는 우리 모두 함께 집단적으로 한 지체로 하나님 앞에 한 공동체로 예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한 사람 한사람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생각하는 가장 올바른 성서적 예배의 정신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예배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예배로 하나님 앞에 방해되어서도 안 되고 또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것 때문에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방해받아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예배하고 동시에 또 우리 모두가 부름 받은 한 공동체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정신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예배는 목사 혼자 드리고 많은 사람들은 예배의 들러리를 서는 것 같은 그런 잘못된 태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식은 신랑 신부가 하고 수많은 사람이 단지 그 결혼식을 구경하면서 예식의 시간을 때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함께 예배한다는 것은 강조되었지만 개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시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또 반대로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만 강조되고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이 무시되면 예배는 질서가 없어지고 무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로 이런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사람들이 일어나서 저마다 방언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저마다 사람들이 방언을 통역하기도하고 방언을 하기도 하면서 성령이 자신들에게 시키는 바란 사실로 모든 것을 정당화해서 교회와 예배의 심각한 무질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와 이 예배에 개인적인 특성과 공동체적인 특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충분히 기도할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예배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하심 앞으로 나아가며 깊이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없이는 어떻게 참회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드리러 나오기 전에 충분히 마음을 준비하고 상한 심령으로 방금 만지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그런 상한 심령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교회에 나온다면 문제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많은 교인들이 거의 성경을 읽지 않고 일주일을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는 것에 지나쳐서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그런 상한 심령을 안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청교도 시대가 얼마나 성경적인시대였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배 시간에 꼭 성경을 한 장이나 두 장씩 읽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은 하나도 안 읽으니까 그렇게 예배 중에 성경을 읽음으로서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게 하고 성경을 읽는 즐거움을 그들에게 맛보게 하기 위해서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는 순서를 넣었던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의 기도의 영이 살아있지 못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살던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통해서 그 심령이 다시 깨어나고 기도를 하여야겠다는 거룩한 결심과 그리고 기도의 영이 공동체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기도의 은혜에 촉촉이 젖는 일이 없이는 예배의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은 사람의 머리를 개조하는 시간만은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만을 바꾸기 위해서 있는 시간만은 아닙니다. 사람 속에 어떤 정보를 넣어주고 사람 속에 어떤 지식을 넣어주는 것이 예배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드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우리의 기도의 영속에서 깨닫고 그리고 말씀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이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어가야할지를 결단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로 그들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항상 그들 가운데 임재 해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에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좌정하고 계실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흘려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만남 속에 거룩한 하나님의 교훈이 있을 때는 언제나 그들은 결단했습니다. 비록 나중에 그렇게 살지 못할지라도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기를, 그리고 주의 율례에 충성을 다하기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도록 다짐했습니다.
실제로 예배를 인도해보면 예배 속에서 회중들이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예배 중에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되지 않지만 설교는 기억이 됩니다. 예레미야서 1장 10절로 기억됩니다. 주일 오후 예배 때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크게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깨트리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저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성령이 제 마음에 오셔서 주기도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이들로 기도하게 하라, 그래서 ‘우리 모두 다 오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저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집회장소로 갔습니다. 설교는 그렇게 긴 설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지체들이 1시간 혹은 2시간 이상 그렇게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으로 강하게 임하셔서 그들 속에 무엇인가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부어주시지 아니하였다면 모두 기도하고 돌아갑시다. 아마 15분도 되지 않아서 벌떡벌떡 일어나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예배 속에서 기도의 영이 유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그 회중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예배가 집행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집어서 말하면 예배 속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면 그 예배는 반드시 풍부한 기도가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아멘을 안 하십니까? 몇 달 동안 안 하니까 또 안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부어주시면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의 예배가 참 지루하다고 합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가만히 있어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아니, 왜 가만히 있어. 기도하라고 주는 시간인데,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나는 이것도 짧습니다. 이것도 마음에 안 찹니다. 충분히 한 20분 흐르면 어떻습니까. 20분 먼저 집에 가서 뭘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가 안 되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다시 기도하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기도의 영으로 촉촉이 젖은 가운데 그때 우리가 자신의 일주일동안 살아온 모습을 깊이 참회하면서 우리의 마음 밭이 기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심겨질 때 우리는 또 다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며 기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가 대표기도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말할 수 없이 귀하지만 그러나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가는 것도 예배에 있어서 매우 준비되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실제적인 문제에 들어가서 여러분은 교회에서 예배를 시작하고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 허락되는 그 긴 시간들을 여러분들은 혹시 가만히 눈감고 다른 사람의 기도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 질러 부르짖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더 잘 들린다고 믿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던 우리는 지체들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저는 우리 모든 지체들이 소리 내며 기도하는 지체들도 용납하고 소리 내지 않으며 기도하는 지체들도 용납 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제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기에 적합한 사람, 그 적합한 모습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혹시 형제들 중에 마음이 너무나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이 바닥에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저 사람은 유별나지 않다고 생각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모든 규모가 허락하고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받지 않는 한 우리가 최대한 예배 속에서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가운데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우리 허락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간절하게 찾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 용납하자는 것입니다. 손을 높이 드는 것이나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이나 그리고 그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기도하는 것이나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우리는 반드시 두 손을 깍지로 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각 지체가 가장 자유하게 간절히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고 싶어 하는 그 움직임으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허락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 만 바라보면서 일주일동안도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겨달라며 호소하고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참회의 영을 내리시고 그리고 내가 잘못 살아온 모든 것들은 오늘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시고 사죄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며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허락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 각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갈구하는 마음으로 그 기도시간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홀로 눈을 감고 공상에 잠기거나 엎드려서 잠을 잔다거나 혹은 그저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영화개봉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대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배에 올바른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는 것입니다.
저는 할 수만 있으면 이 기도시간들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일주일동안 묵은 모든 때를 하나님 앞에 교회당에 일찍 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좀 일찍 와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에 일찍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마음을 통해서 드리는 간절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배에 늦게 오는 것은 습관입니다. 그리고 습관이 한두 번 늦고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늦는 것은 상황이지만 그러나 지속적으로 늦는 것이 깊이 몸에 배어버리면 예배 시간을 옮겨도 똑같이 늦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성스러운 경외심의 부족인 것입니다.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예배 시간에 5분 더 늦게 오거나 10분 더 늦게 와도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안 고쳐지는 게 이것입니다. 정말 안 고쳐집니다. 오죽 했으면 어느 교회에서는 주보를 하얀 주보와 빨간 주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모르는데 예배에 오는데 주보 하나씩 주는데 11시가 되고 나면 빨간 주보를 주는데 막판에 수백 명이 모였을 때 여러분, 우리가 한번 주보를 들어봅시다. 들으면 빨간 주보를 든 분들은 늦게 오신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줄어들더랍니다. 그게 창피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도 한번 해볼까 유혹을 받았는데 열린 교회 마저도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일찍 와서 하나님 앞에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예배에 적합한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비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리기 전에 회중들의 심령들이 이미 눈물로 촉촉이 젖어있어야 합니다. 이게 예배의 정신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 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며 얼굴을 묻고 기도해야 하나님을 뵈어야 할 필요성을 내 영혼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니까 예배 시간이 9신데 8시에 나옵니다. 이유는 예배 시간에 나와서 앞자리에 앉아서 그리고 기도하려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교자와 그리고 지체들과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생활교육이나 민방위교육 같은 예배를 드려서는 어두운 세상에 불꽃같이 살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예배 중에 기도는 크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목회자가 하는 기도, 그 다음에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이 하는 기도,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 개인이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개인이 하는 기도와 그리고 회중을 대표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개인이 하는 기도는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에 총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여러분들이 예배 속에서 할 수 있으면 풍부하게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예배의 정신에 부합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배 중에 나와서 예배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무겁고 그리고 굳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땡! 하는 동시에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이 숨을 몰아쉬면서 그 예배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개인의 기도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그렇게 예배를 준비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예배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그 예배 속에서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예배를 같은 인도자에 의해서 같은 예배를 드리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정도는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졸다가 가는 그 예배 속에서 어떤 사람은 생애적인 하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루하게 시계를 보는 그 시간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생애 속에 가장 귀한 만남의 시간을 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은 은혜를 받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예배는 11시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11시 15분쯤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무겁게 살아온 주일이라고 생각된다면 여러분 30분 정도 일찍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배 중에 공식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주어지는 그 시간에도 역시 똑같은 기도의 영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예배가 끝나고 나가는 그 순간까지 설교자와 예배를 인도하는 모든 사람과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회중들이 한가지로 예배순서 한 순서, 한 순서마다 성령이 매 순간 분초마다 우리의 예배 시간을장악하고 계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모임은 바보들의 웃기는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을 언제든지 가져야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며 여러분의 마음이 공상에 잠길 때마다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님, 지금은 예배 시간입니다. 내 마음을 주장하시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옵소서. 설교를 듣다가 공상이 오가고 헛된 생각들이 오고갈 때 생각을 털어버리며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성령이여 오늘도 나를 도와주옵소서.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 하다가 왠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고 그리고 외쳐도 그 외침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을 때 설교자와 함께 모든 회중들은 마음속으로 예수여 오늘도 우리의 말씀을 붙드시옵소서.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오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간순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예배 시간에 우리는 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러운 긴장이 아니라 기쁜 긴장인 것입니다. 시집가기 전에 화장을 예쁘게 한 신부가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그 마음이 긴장이 됩니다. 저는 어느 결혼식에 가서 신부가 결혼식 30분 전에 청심환을 먹는 것을 봤습니다. 떨린다고 합니다. 뭘 그렇게 떨리는가? 그랬더니 처음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몇 번 하면 안 떨리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형제 앞에서 매일 떨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웃고 까불고 장난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렇게 떨고 있습니다. 날이 겨울에다 반팔을 입었으니까 좀 춥겠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떨림과 영혼의 떨림이 함께 오는 모양입니다. 청심환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 긴장과 떨림이 불쾌한 떨림입니까? 자매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유쾌한 떨림인가요, 아니면 불쾌한 떨림입니까? 왜 대답을 하지 않는지 그것은 해보면 압니다. 그것은 절대 불쾌한 떨림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그런 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결혼예식장 대기 10분전인데 예쁘게 화장하고 면사포를 쓰고 침을 줄줄 흐르면서 어깨를 늘어트리고 졸고 있는 신부를 생각해보십시오. 시집가서 잘 살 수 있겠는지 걱정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런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그리고 거룩한 떨림이 예배 중에 견지되지 않는 한 그것은 인간들이 즐기기 위해서 모이는 모임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교회가 성도들이 모이는 것은 예배하기 위한 목적,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 이외에는 누구도 교인들을 회집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천사들에게도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 이외에 어떤 목적으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어떤 다른 목적으로도 예배에 소집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을 소집해서 모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그리고 모여서 우리들이 하는 가장 커다란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의 백성들의 모임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경배할 때 그 백성들 가운데 나타난 가장 간절한 소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들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성경 본문은 예배 중에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그것이 공기도이든 개인의 기도이든지 간에 견지되어야 할 기도의 정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식한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바리새인과 죄인인 세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성전에 같이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금식을 하게 하시고 십일조를 하게 하시고 이 사람과 같이 토색하지 아니하고 간음하지도 않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떤 마음도 그 기도 속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뵙기를 그리워하는 집념과 그리고 사모하는 심령이 없는 의뢰적인 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좀먹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강의하면서 제가 종종 드는 비유에 11세기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책에 보면 11세기에 살았던 대주교가 나옵니다. 손을 높이 들고 언제나 폼 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그리고 기도하면 실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아서 성도들이 있으면 더 구슬프게 아버지 그리고 기도하고 없으면 아멘 하고 들어가서 쉬는 사람이었는데 그날도 실눈을 뜨고 보니까 성도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불렀느냐. 내가 여기에 있느니라.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주님이 찾아오시면 절반은 졸도하고 말 것입니다. 왜, 주님이 안 오실 것을 굳게 믿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장이 없으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얼마나 의미 없는 말들을 쓸데없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리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그렇게 자기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었지만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멀리 서서 차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주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은 가까이 다가갔으나 세리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 거룩한 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 하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장난하듯이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라고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힘든지 수많은 사람이 몇 십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겨우 끙끙대다가 하나님, 그리고 나오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청산유수처럼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과 건방지게 하나님 앞에서 말을 마구 해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늘 기도의 영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기도해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잠겨있던 기도의 영속에서 저절로 그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그런 기도의 세계를 간직하고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채플 시간에 누군가에게 기도를 하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아마 기도순서를 맡은 사람이 안 나온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절대로 못한다고 이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적어도 일주일 전에 부탁해야지 무슨 예배하기 직전에 기도하라고 그러는가 하면서 그 얘기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경건한 이야기 같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는 기도할 때 일주일 준비하고 기도시작을 하는지, 일주일 전에 준비하고 워밍업하고 일주일 후에 입을 여는지, 아버지 앞에 이야기를 하는데 정 냄새가 날 것 같으면 이빨이나 닦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일주일동안 준비를 하고 무슨 논문을 하고 발표를 할 것인지, 아니면 원고를 써서 와서 읽을 것인지, 성명서를 낭독할 것인지 예배가 임박해서 그때서야 기도할 사람이 없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기도 좀 해달라고 순서를 때울 사람을 찾아다니는 그 예배의 주체자도 문제지만 그러나 또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데 일주일전에 부탁한 것 아니면 못해준다고 튕기는 사람도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하면서 입을 여시자 진리의 말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런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 때에 누구든지 기도해달라고 부탁할 때 자리에 벌떡 일어서서 평소에 잠겨서 살아가던 기도의 영으로 회중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드릴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누가 기도해달라고 그럴 때 그렇게 못한다고 튕기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 기도하기 싫으면 제가 기도의 영이 바짝 말라서 요즘 기도를 못합니다. 솔직히 얘기를 하십시오.
오늘 이 세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식했기 때문에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배 중에 하는 기도 가운데 판에 박힌 것같이 그렇게 습관적으로 계속되는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따라서 은혜를 받고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날마다 진리 안에서 그의 영혼이 새롭게 깨달음을 얻을 때 기도는 놀랍게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것을 경험해보셨습니까? 저는 그런 것을 가끔 경험했습니다. 누군가가 기도를 들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오늘 기도를 드리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도 그 자체가 저에게는 커다란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기도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 설교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중들에게 깨닫게 해주려는 사람, 분명히 그 기도 중에서 그 기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내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깨우쳐지기를 바라는 교훈이 담긴 기도를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잘못된 기도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교훈하고 싶으면 아예 눈뜨고 설교를 한편 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 기도를 통해서 교훈을 하려고 합니까? 누구를 가르치려고 합니까. 공동체를 대신해서 기도하는 그 사람은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지 하나님 앞에 보냄을 받고 공동체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꼭 개인 기도를 시키면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서 뭔가 교인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어떤 감화 받은 내용들을 그 감화를 전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식은 기도인데 그 내용은 설교입니다. 이런 것들은 올바른 기도의 영의 지배를 받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이 바리새인과 같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데 그 시야에 가득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입니다.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시야를 가득히 매우면서 다가오는 것은 교훈입니다.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서 교인들을 함께 기도하는 지체들을 책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기도를 할 때 늘 유지되어야 할 것은 내가 대표로 기도할 때 내가 대신해서 기도하는 이 사람과 나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느껴야 합니다. 따라서 회중의 죄의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통회할 때 분명하게 자기도 그 죄 속에 동참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중의 연약함을 기도할 때는 나는 강한데 이 기도를 듣고 있는 회중이 약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약함이 나의 약함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설령 나는 강하고 그들은 약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약함이 나에 약함인 것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그 기도는 겸비한 기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기도는 너무나 비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척을 하고 나서 일 년 동안을 아무도 예배 중에 기도를 안 시켰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좀 터를 놓고 싶어서였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대표기도를 할 때 이런 정신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은 가르침을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서 설교하려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의 필요가 아니라 회중의 필요를 깊이 의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느끼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계신 그 성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나온 것을 자랑스럽게 하나님 앞에 뽐내는 기도라든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고 열심히 살아온 날들에 대한 감사야 관계없지만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아서 이렇게 나온 것이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하러 나온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오지 아니한 사람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도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과히 유쾌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철저하게 예배 속에서 드리는 이 기도는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함부로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그런 떨림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일주일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에 임박해서 기도가 바뀌었다고 쪽지가 수시로 올라오는 것들은 정상적인 교회의 예배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을 들어서면서 오늘 기도순서인지 알고 그렇게 올라오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정성스러운 최상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의 준비도 철저히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시의 기도의 부탁을 받는 것은 기도해야 할 사람이 약속을 어기고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 또 다른 지체들에게 이중삼중으로 하나님 앞에 중심을 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연쇄적인 효과를 가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옳지 않은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리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습관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우러러보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리의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에 떨어뜨리는 이 기도는 당시로서는 기도라고 쳐줄 수도 없는 파격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까?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 때문입니다. 예배가 예배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 예배 속에서 기도가 기도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죄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배 속에서 참회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도 바로 교회 속에서 드리는 그 예배 속에 기도의 영을 고갈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한번 신앙생활을 해온 여러 날들을 한번 회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게 안 되던 기도가 어느 순간에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입니까? 그렇게 안 되던 기도가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까? 교회당에 불꺼져있을 때, 반주가 은은히 나올 때, 옆에 사람이 울 때 아닙니다. 언제? 그렇습니다. 죄에 대해서 참회할 때 죽었던 기도의 영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는 우리의 영혼에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을 옷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고백이 진심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속에서 언제나 경험되어야 할 것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참회가 먼저 경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몇 주 동안 건강이 안 좋았습니다. 건강이라기에는 좀 거창하지만 몸이 좀 안 좋았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책 쓰는 일에 매달리느라고 밤에 두 시간 혹은 네 시간 정도밖에 못 잤던 날이 많았고 한 시간 반밖에 못 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바쁜지 머리를 자르러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쓰고 탈고를 해놓고 나니까 아! 이렇게 해놓고 났는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울이 있었는데 거울에 예쁘게 생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지만 자매들이 있었고 또 나보다 좀 젊은 남자들이 있었는데 한꺼번에 거울에 얼굴이 비쳤는데 세상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내 얼굴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완전히 피죽도 못 먹어서 부기가 오른 사람처럼 얼굴이 퉁퉁 부어서 부석부석한 게 쳐다보는데 세상에 이게 얼굴인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집에 와서 우리 집 사람 크림을 얼굴에 막 발랐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바르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은 바로 그렇게 자기의 영혼의 모습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온 그리고 살려고 애쓴 자기의 모습을 그 하나님 말씀 앞에 비추어보고 그리고 거룩의 빛 앞에 서봄으로 말미암아 내가 요즘 얼마나 나의 삶이 잘못되었고 그리고 나의 중심에 때묻어있는지를 발견하며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그 시간에 참회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 가니까 1, 기립, 2, 묵도, 쭉 나오다가 참회의 시간 하고 나왔는데 순서에 정해놓는다고 참회가 될 것 같으면 나는 예배 순서지를 만들어서 참회의 순서라는 말을 주먹만 하게 만들어놓겠습니다. 순서를 정해서 참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얼마나 웃깁니까. 여러분, 이번 순서는 참회하는 순서입니다. 우리 같이 주여, 삼창하고 참회합시다. 참회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세리의 기도를 보면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성전에 올라가서 일어난 바리새인의 태도와 세리의 태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올라가기 전서부터 이 사람은 참회의 영에 젖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속에서 드리는 개인의 기도든지, 공동의 기도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기도를 지배하여야 할 의식은 무엇인가 하면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 바로 쳐다볼 수 없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는 그 의식이 견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을 세리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시고 싶으셔서 이 세리의 예를 드신 것입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참회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이 사람이 가슴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슴을 어떤 때 두드립니까? 어떻게 무엇을 해야지 되겠다는 것을 알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때는 가슴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가슴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지체들이 은혜를 받으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가슴을 두드립니다. 나도 따라서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마음이 너무 아플 때 두드리면 통증이 좀 멎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보면 멍이 시퍼렇게 들었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날 기도에 모인 사람이 다 그랬습니다. 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나는 너무나 타락한 죄인인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가슴을 두드립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런 영들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이 애통하며 기도하고 있는 이 문제 속에 개입해주시지 않으면 어떤 해결도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절대의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 이것이 회중기도든 아니면 함께 드리는 기도든 모든 기도의 정신 속에서 유지되어야 할 정신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마음,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난 일주일동안의 삶이 하나님 앞에 정말 엉망진창의 삶이었습니다. 그때 이 예배를 한번 드리고 나면 뭐가 새로워지라고 생각되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기대입니다. 믿음과 기대는 갈은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과 정말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되는데 지난 일주일동안 삶이 죄와 허물투성이 삶이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나는 지극히 잘못 살아온 죄인인데 어찌할꼬 거기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속에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머리를 굴리면서 뭔가 나 스스로도 할 수 있다고 하는 동안에는 기도도 안합니다. 기도를 해도 껍데기의 기도이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그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여 이르기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고 나는 죄인이오니 내가 이렇게 거룩한데 내가 어찌하여 죄 가운데 살았으며 그렇게 죄 가운데 살면서도 내가 어떻게 감히 거룩한 나에게 나올 수 있느냐. 그렇게 논리적으로 묻지 마옵소서. 하나님 저에게 그렇게 물으시면 저는 주 앞에 설수 가 없는 죄인입니다. 이게 세리의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여러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을 깊이, 깊이 체험하시기를 원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
(예화: 출판사에 가시는 길에 뒤에서 오토바이가 와서 받은 일로 아무런 잘못 없이 상 대방의 어처구니없는 발뺌에 결국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고 하는 과정에서 잘못 없음을 인정받고 상대방의 과실이 되었지만 그 사람의 다친 모습이 안쓰러워 얼 마의 돈을 오히려 보태주고 오니 기분이 좋았다는 내용)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지면 저 사람 때문에 두 시간 손해 봐. 내가 목사로서 거기에 가서 굽실거리면서 조서까지 써,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 차는 또 찌그러졌어, 그것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안 듭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논리적인 순서를 초월해서 너덜너덜한 구두, 까진 살, 흐르는 피 이런 것을 생각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긍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다가오셔서 긍휼을 베푸실 때는 언제든지 논리적으로 다가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오실 때 그냥 막 우리들을 야단치시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한 커트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그것 때문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원수들에게 찢겨져있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이 속에서 부성애가 어느 순간에 발동해서 그 영혼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이 함께 우시는 것이 이게 여호와의 긍휼입니다. 호세아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이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불붙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들에게 이것밖에 소망이 없는데 죄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사모하고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피할 수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대로 살아가지 않는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혹독하게 진노하시는 심판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논리로 다가오시지 아니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그 불쌍히 여기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멸되지 않고 이 시간에도 살아서 우리같이 소망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리라고 하는 그 믿음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받기를 원하는 것은 하늘을 가르고 땅을 쪼개는 능력이 아닙니다. 예배 속에서 제일 먼저 우리가 받기를 사모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참회하는 자를 사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그 사죄가 있는 곳에 언제나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속에서 서로 기뻐하는 훈련을 하는데 어떻게 기뻐해요. 웃읍시다. 끌어안읍시다. 악수를 합시다. 그런다고 기뻐지겠습까?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임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도말하고 연약한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용납함을 우리들이 예배 속에서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기뻐하게 되고 사죄를 확신하게 되고 그 위에 넘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세리는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용납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주님이 죄투성인 자기를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그리고 자기를 기뻐하신다고 하는 증표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내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간절한 사모함과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이 세리가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오히려 의롭게 살아온 바리새인을 하찮게 생각하시고 그리고 이런 기도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던 이 세리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리새인은 의로운 삶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를 열납 받지 못했습니다. 세리는 악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위하고 그 거룩하심 앞에서 긍휼히 여기심을 갈망하는 그 마음, 그 기도의 정신이 하나님 앞에 그를 용납 받게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지체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예배 속에서 다시 한 번 이런 기도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게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생활도 또한 이런 영에 의해서 이런 정신에 의해서 새롭게 세탁되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