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의 마음 (1)
녹취자: 백지영
요즘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난 사건이 뉴스에 핫하게 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있으면서 도대체 이게 뭐하는 사건이길래 세상이 시끄럽나 하고 한번 들어가 봤는데 엄청났습니다. 저는 대중음악을 거의 안 듣기 때문에, 더군다나 제가 1970년대까지는 팝송도 많이 듣고 샹송, 칸초네 이런 것 좋아했지만 회심하고 난 다음에 다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승리라는 사람이 그룹의 멤버인데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사업에서도 상당히 성공을 해서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개츠비를 따서 승츠비라고 불릴 정도이고, 예전에도 어느 한 우동집을 가리키면서 저 우동집이 아주 잘하는 집인데 승리가 하는 집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굉장히 사업에 머리도 있고 예술적인 재능도 있고 그래서 돈을 엄청 번 사람인데, 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휘말려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이 거의 끝나게 생겼잖습니까?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 문제의 핵심이 뭔가 했더니 아레나나 버닝썬 같은 프리미엄 클럽이 있습니다. 우리는 클럽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갈 기회도 없었고 그냥 언론을 통해서만 들었는데 여러분 중에서 클럽에 가 본사람 있겠지요? 전혀 없을까요? 가 본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손들 리가 없지요. 우리는 잘 모릅니다. 클럽은 뭐하는 곳입니까? 술을 마시고 춤추고 유흥을 즐기는 곳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니까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의 30대 중반만 되도 거기 들어가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쨌든 딱 들어가면 그 앞에서 용모를 스캔합니다. 그래서 용모에 미달되는 사람은 입장을 아예 안 시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하곤 상관없이 아예 입장을 안 시킵니다. 그래야지만 거기가 물 좋은 클럽이 되기 때문에. 여자들은 돈이 별로 없어도 외모가 거의 여신 급 외모면 그냥 수질관리를 위해서 들여보내 줍니다. 그리고 자기네가 연예인이니까 연예인들도 가끔 이름 없는 사람들도 집어넣어주고. 거기까지는 문제는 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어마어마한 술값입니다. 그러니까 보통 한 테이블이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원의 술을 시켜야 되고 그리고 불타는 금요일 같은 때에 가장 좋은 좌석은 1억 5천만 원 정도를 시켜야 되는데 프리미엄이 붙어서 2억5천만 원까지에 팔린다고 합니다. 커다란, 유명한 2천 8백만 원짜리 술 하고 그 다음에 자지자란 술 하고 해서 여덟 명 정도 앉아서 먹었으면 슬 값이 세트가 1억 원, 그리고 팁도 주고 등등등 하면 1억 5천만 원, 자릿세 2억 5천만 원이 나가는데 이 모든 게 다 돈으로 거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좀 너무 과하다, 이상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게 아니라 문제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술을 시킨 사람들에게 정신 못 차리고 혹은 맘에 드는 여성들이 있으면 데려다가 음료수를 주는데 그 안에다가 마약을 타고 수면제를 타고 해서 의식을 잃어버리게 하고 그 다음에 폭행을 하고 강간을 한 물증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해서 고객들을 관리하면서 그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자기네 클럽을 이용하게 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했을까요?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연예활동 성실하게 하고 사업 열심히 하면 승승장구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그런 클럽에서 만난 여성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고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이 뉴스가 뉴욕타임즈까지 보도가 되고 전 세계까지 이슈가 되가지고 한류수출의 길에 중대한 오점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물론 거기에는 우리나라 경찰하고 유착된 그런 것들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추적해 들어가면 마지막에 결국은 그 모든 답은 인간의 마음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사람이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마음이 걷는 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서 사뭇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자신의 행복과 불행은 물론이고 자기와 관련된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합니다. 자, 그러면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마음에 대해서 거의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마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수준 이하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의 아주 박약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회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고 하면서 느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자본주의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는 돈의 사회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돈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돈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법니다. 우리가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이 조금 아껴 쓰고 적금 붓고 적금타면 정기예금에 해 놓고 아니면 그냥 근근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미래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거기서 얘기합니다. “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쓸까?” 그랬더니 그 중에 손님 한 사람의 예를 들면서 이 사람은 불법경마를 해서 30억을 벌었다고 합니다. 다 현찰입니다. 30억의 돈을 벌었는데 드러낼 수 없는 돈이어서 이것을 어디다 감출 수 있을까 하다가 비트코인에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트코인 하나에 불과 몇 십만 원하던 시절에 거기다가 몰 빵을 해서 투자를 했는데 이게 수백만 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현금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현금이 처치 곤란한 것입니다. 써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2억 5천만 원이라는 술값이 50만 원짜리 다발 50개잖습니까? 놀랍게 현찰로 가방으로 주고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돈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에 대해서 거의 공부를 안 합니다. 돈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면 그냥 좀 가난하게 살고 힘들게 고생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면 죽음이 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시안에 대학이 있습니다. 시안대학인데 괜찮은 대학입니다. 그런데 가로에 보이는 기숙사 동이 세 동인가 있는데 그 동에서만 한 해에 네 명이 투신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약 먹고 죽은 것 이런 것은 안 밝혀 진 것이고 자기 기숙사에서 한 18층에서 창문열고 뛰어내려 죽은 사람, 그래서 뛰어내린 광경을 본 사람만 네 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없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들이었냐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재벌의 회장 딸은 자살을 해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까 그 자매가 나이가 30세였는데 유산을 정리해 보니까 2천억이 나왔습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들한테는 마음을 지키는데 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마음은 우리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마음에 대한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책들이 지금 서점에 가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알프레드 아들러의 다 폐기된 심리학을 다시 재건하는 ‘미움 받을 용기’ 이런 책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마음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또 그런 것들이 영화로도 나오고 드라마로도 나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만날 때에 우리들이 가끔 생각은 하지만 다시 또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음을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동북아철학에서 보면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혹은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를 수행하고 자기를 완성하고 두 번째는 사람들은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스리는 것은 큰 권력을 차지하고 짓밟는다는 의미에서의 다스림이 아니라, 이 사람들은 잘 모르는 참 인간이 되는 질서를 깨닫고 그 질서대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해서 이 모든 이웃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기안인이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완성하고 그렇게 자기를 완성하고 한 인간을 완성하고 보면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로는 땅이 있고 이 세상에는 사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 각 사람들이 각각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본분을 깨닫게 됩니다. “통치자의 근본이 무엇인가?” 그 다음에 “남녀평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남녀사이에 있었던 전통적인 구분이 과연 올바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갖게 될 때 그때 각 사람들이 위치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공부하는 유익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이 사람들을 그 있을 자리로 돌아가게끔 그렇게 도움으로서 모든 사람을 안녕하게 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게 공부의 목적입니다. 지금은 스카이캐슬에서 보는 것같이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돈들을 투자해서 그래서 어쨌든 이 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로 되어가고 있지만 이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사회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우리들이 참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기독교적 관점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요새 새롭게 나오는 학문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진화론적 신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많은 심리가 다 진화론에서 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생식하고 보존하고 자기를 지키기에 적합한 것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초미의 관심사가 이성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남자를 볼 때, 물론 남자들이 여자를 볼 때보다는 덜 하지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를 볼 때 “얼마나 예쁠까?”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나 오늘 선봤다고 그러면 남자 친구들이 물어봅니다. “예뻐?” 걔네 아버지가 뭐하시고 그래도 “그런데 예쁘냐고?” 계속 똑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안 그렇습니다. 나 오늘 선봤다고 하면 “그 사람 어떤 남자야?” “뭐 하는 사람이야?” “증권회사 다니는 사람이야” “가정은?”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 생겼어?” 이 정도로 물어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그것을 진화심리학에서 설명을 합니다. 설명하자면, 한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을 경우에는 자기를 먹여 살리고 자기의 자손을 먹여 살리고 보호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하는 반면에, 남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여자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예쁜 사람, 자신의 개체가 예쁘게 태어나서 역시 사회적인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또 어떻게 보면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렇게 설명하는 게 진화심리학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지금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마음의 작용을 하나하나 설명을 합니다. 근본적으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은 짐승으로부터 진화되었고 그리고 외형만 진화된 것이 아니라 이 사고의 작용도 진화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사회의 발전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해 왔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와의 영향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기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마음을 이제 더 보다 깊은 본질적인 면을 영혼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있고 이 영혼의 기능이 마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안에서 인간은 크게 세 가지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각하고 두 번째는 느끼고 세 번째는 무엇을 하고자 의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지성이라고 하고 이것은 정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 의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느끼고 그 다음에 결정합니다. 이것을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유로운 삶을 사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혼을 '프쉬케'라고 하고 그리고 히브리어에서는 '네페쉬'라고도 쓰고 '루아흐'라고도 씁니다. 이것은 영, 바람, 숨, 호흡, 이런 것하고 관련되어 있고, 네페쉬는 혼입니다. 그래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구약이든지 신약이든지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모든 인간에게 독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이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즉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왜 나이고 네가 아닐까? 그가 아닐까?
Q. "나는 무엇 때문에 독특하게 내가 되는 것이지요?"
A. "하나님이 특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Q. "어떻게 특별하게?"
A.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직접 영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특별하다."
Q. "그런데 이 사람한테도 영혼을 주셨잖아요?"
A. "하나님이 각자 목적을 가지고 다르게 만드셨기 때문에"
상당히 근접한 답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매 설명에 의하면 각 사람이 다른 이유는 같은 영혼이지만 그러나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이제 수평적으로 본 것입니다. '나', '타인' 이렇게 해서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고 자기를 가지고 보자 이것입니다. 여기는 과거입니다. 여기는 미래입니다. 요기는 현재입니다. 그래서 혼란이 오는 것이지요.
혹시 공각기동대 보셨습니까? 일본영화, 그런 영화를 봐야 합니다. 쓸데없는 영화보지 말고 그런 문제작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봐야 합니다. 공각기동대에서 메이저 혹은 모토코라는 여자애가 나옵니다. 주인공인데 스카렛 요한슨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모토코는 계속 모토코였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억 때문에 자기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기억도 조작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동일성을 한 인간의 동일성을 기억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완전한 답이 아닌 게, 예를 들자면 내가 나로서 여태까지 살았고 나는 모두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관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는 내가 나를 본 적 없지만 그러니까 심리학에서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 네 살 정도까지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고 특별한 사람은 한 살 때도 기억한다고 하는데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네 살이나 다섯 살 초까지는 기억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서부터 기억이 좀 더 많이 남습니다. 그전에는 스틸사진처럼 남고. 그렇게 기억이 연결이 되면서 사실 오늘날 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지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 시점에서 내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나 자신의 얼굴을 포함해서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과 그 다음에 내가 만나는 교인과 학생 그 다음에 이 학교에 대한 기억까지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그럴 때 나는 과연 나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제기한 게 바로 공각기동대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기억들을 기술을 이용해서 참된 기억을 제거해 버리고 잘못된 기억을 집어넣어 줬다 그래서 똑같이 기억을 할 때에 이 자매의 과거가 나한테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나는 과연 나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육체 때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나도 스물세 살 때는 예뻤습니다. 사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증거를 남겼습니다. 예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더 예쁘고.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나이가 먹으면서 자꾸 모습은 변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고 한 20년 후에는 더 추하게 변하고 30년 후에는 여러분들이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수많은 육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를 나 되게 만드는 것이 그것이 기억의 일관성인데, 그것이 사라지거나 조작됐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토털리콜에서 전사가 나오는데 그 전사가 어떤 예쁜 여자하고 같이 삽니다. 자기 기억 속에는 그 여자를 만나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고 하면서 살아 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이 여자는 자기를 감시하기 위해서 붙은 요원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들어간 그 기억이 자기는 단순한 경찰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특수대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기억 속에 없는데 우연히 싸움이 나서 발휘하고 보니까 한순간에 일곱 여덟 명을 때려눕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나는 나라는 것을 무엇으로 확신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은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시대가 되어서 이제 인간이 보다시피 과학기술로 인간의 뇌 같은 것들이 망가져도 다시 끼워 넣고 장기도 끼워 넣고 이런 식으로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가.? A.I.를 인간의 뇌에다가 심었을 때 그것을 인간으로 봐야 되는가 아니면 기계로 봐야 되는가, 기계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피부의 차이인가 아니면 이런 몸의 차이인가, 만약에 그 몸과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사물을 만들어내서 로봇에게 입혔을 경우에 그때 그것을 인간으로 봐야 되는가, 로봇으로 봐야 되는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의문을 공각기동대가 제시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 이게 뭐냐고 꼭 만화 같다고 그리고 짜증을 내면서 가지만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철학과 이 시대의 코드를 읽어내면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인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문화를 따라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문화를 보면서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코드를 읽어내고 그러면서 그냥 문화를 따라가거나 아니면 무조건 문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그것들을 지혜롭게 이용하고 혹은 그것을 개조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된 하나의 보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를 권리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지만 모를 수 있는 권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어렸을 때 제사를 지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모셔놓고 위패를 모셨는데 그 위패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 무슨 뜻이냐 하면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왜 학생이냐고 그러는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벼슬을 못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증조할아버지가 정경대부를 했다 그러면 정경대부 예를 들자면 유씨(氏)아무아무개신위 이렇게 벼슬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벼슬 못한 사람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정체를 학생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세계라고 하는 무대 속에서 자신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은 세계에 대해서 공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공부하고 그리고 또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 기독교 신앙으로 보면 인간이 아무리 많이 공부한다고 하더라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더더욱 자신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될 때 바로 그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누구고, 세계가 무엇이고, 그 다음에 인간은 왜 살고 그리고 다른 사람은 나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묻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도 나이가 다 드신 것 같은데, 청소년기나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렸을 때는 나에게 너무 가깝다고 느껴지던 사람들 엄마, 아빠, 형제, 그리고 너무나 친한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에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렇게 느껴진 적 없습니까? 완전히 낯선 사람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 저 사람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 unacquainted, 완전히 낯선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나의 인생의 토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세워졌는데 이런 사람들이 관계가 무엇인가 라는 회의가 들고나면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존재를 직시했던 사람들이 실존주의자들입니다. 지금은 다시 실존주의가 부활합니다. 그런데 우리 때는 실존주의 책들을 안 읽으면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프리드리히 니체나 아니면 사르트르, 카프카, 하이데거 이런 사람들의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만 읽었지만. 그러나 이제 이렇게 해서 자기가 모든 관계를 다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끊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은 완전히 모든 것에 대해서 낯선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소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exception, 소외.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철학과 예술 모든 것에 대한 마지막 고민의 귀결이 "나는 누군가?" 바로 그것 하나의 질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인간이다"라고 했을 때는 그래도 할 얘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만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인간성을 고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간이니까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고 또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사회 속에서도 배웁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에는 너는 내가 아니고 그도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입니다. 그런데 뭔가를 비교해서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되겠는데 그게 가능하냐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은 필요 없고 당장 오늘날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현실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생의 모든 문제는 마지막에 뿌리를 내려가 보면 한 가지 질문으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런 대답을 마음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직접적으로 영혼을 자기가 직시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은 놀랍게도 마음 안에서 어느 정도 인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음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생각들, 느낌,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맘먹는 의욕들이 이 안에서 움직이는데 이것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칙칙한 교실에 있지 않고 “가자!” 그리고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꽃이 잔뜩 피어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앉아서 수업하자고 모여 앉았는데 주위에 꽃이 가득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지겠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변에 있는 이 환경과 이 마음은 서로 상호작용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녁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소나무숲속, 그리고 하얀 모래사장, 혼자 걸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서도 삼겹살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고.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 안에서 행동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마음은 잘 몰랐는데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보고 거꾸로 추적해서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 나를 두었을 때 어떤 마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음악도 아침에 들으면 감동이 되는 음악이 있고 점심때 들으면 좋은 음악이 있고 밤에 들으면 좋은 음악이 있고 같이 들었을 때 좋은 음악이 있고 혼자 조용히 들어야 좋은 음악이 있습니다. 어떤 음악은 나를 즐겁게 하고 어떤 음악은 나를 눈물 흘리게 만듭니다. 항상 즐거운 음악만 듣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작용들이 마음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 나는 여태까지 여기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 하고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에 관련되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라는 것을 승리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만약에 그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은 숨길 수 없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한 수많은 환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깥으로 표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그 마음이 정말 아름다운 마음일 경우에는 그 표출되는 삶이 너무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일 경우에는 그 마음이 표출되면 표출될수록 그 전개되는 삶의 상황들은 매우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균형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한편으로는 자기를 완성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 만드신 그 뜻 그것을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 용어로 말하면 사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적인 용어로는 의미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추구하며 이 두 개가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느냐 하면, 문화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가 약 1천억 명 정도가 이 세상에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있는 것은 약 70억 정도 있겠지요. 인구도 조금 있다가 조금씩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데 일천억 명 누구도 지문이 같은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다른 영혼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영혼의 본질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 아니라 다양성, 독특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예전에서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그 전 세계에 남은 희귀종의 마지막 개체와 같은, 그래서 결국은 나로서 나라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그때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교만해 지거나 혹은 열등감에 빠지거나 하는 것은 좋은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가 금수저를 물려서 나를 태어나게 못 해주셨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고 엄마 아빠가 다시 나에게 금수저로 태어나게 해 주실 리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 능력을 벗어나는 현실, 과거에 일어나서 지금 이루어진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그것을 가지고 나는 어떤 의미를 찾으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되겠느냐 그것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독교신앙을 고백했다는 것은 그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겠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그렇게 선언을 해 놓고 선언은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자기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런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자기를 완성하면서 살지도 못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실현하면서도 살지 못해서 그런 가운데 자신은 행복할 수 있느냐? 순간순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승리라는 그 친구도 그렇게 해서 하루에 매출을 평균 최소한 5억을 올렸다고 하니까 많이 버는 날은 몇 십억씩 매출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계속 돈이 들어오고 승승장구할 때는 행복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돈에 미친 것도 아니고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초연하게 살아가는 사람 많고, 모든 여자들이 다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느냐 하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당한 삶입니다. 왜? 내가 나라는 것을 부정하고 무엇을 찾을 수 있겠으며 내가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성형수술을 할 수도 있고 방법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본다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참된 존재의 의미가 이렇게 자기를 완성하고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오늘도 우리가 공부하는 것입니다.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주 사랑알지요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작시했다고 전해지는 노래입니다. 온 천하 모든 만물이 그림책과 같아서 그 그림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에 대한 공부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배우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그것입니다. "야, 네 생각은 뭐야?"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한 거야?" "나도 모르겠어.". 이것은 주인 없이 속도를 내고 달리는 바다의 배와 같은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들을 저도 똑같이 했고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특히 나를 떠나서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는가를 고민을 하게 되면서, 사실 어렸을 때이지요. 벌써 십 한 육년 칠년 전이니까 그때 쓴 책입니다.
자, 오프닝 lecture로서는 갔는데 그래도 하나도 안 하고 갈려고 하니까 한번 여러분 나누어드린 강의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잘 생각을 하면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 마음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서, 영혼의 기능이다. 이로써 인간은 단지 외부세계에 대하여 감각으로 반응하고 그러한 기능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동물을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인간의 마음의 독특성은 곧 인간 존재의 독특성이다. 여기는 내적으로 무한한 영혼세계와 외적으로 무한한 물질세계가 인간의 의식 안에서 만나는 곳이며,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세계의 기억이 시공 안에 존재하는 자연세계가 접촉하는 곳이다. 인간의 마음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자연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지식과 도덕적 지식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은 정동(情動, affection)을 경험한다.
마음은 인간에게만 주신 것으로서 영혼의 기능이다. 이로서 인간은 단지 외부세계에 대하여 감각으로 반응하고, 그러니까 외부세계를 보는 것은 눈, 코, 입, 피부, 귀 이런 것들을 통해서 봅니다. 그게 다입니다. 들리고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피부로 접촉하고 하는 오관이라고 합니다. 그게 바깥에 있는 정보를 실어 나르는 전부입니다. 당연히 그것을 우리들이 센스, 감각이라고 합니다. 감각을 통해서 외부세계의 정보들을 실어 나르면 그 실어 나른 것이 그냥 눈으로 본 것, 냄새 맡은 것이 가만히 잇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 그것들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향수가 왜 그렇게 잘 팔리는 줄 아십니까? 왜냐하면 특별히 맡고 싶은 냄새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라면이 얼마입니까? 한 3500원 합니까? 3500원짜리 라면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에너지를 가져다주고 그리고 35만 원짜리 요리도 어차피 들어가서 씹는 것은 한 10초 동안만 입안에 있고 나머지 내려가고 목구멍만 넘어가면 위는 맛을 못 느낍니다. 그런데 그 불과 짧으면 4, 5초 길면 10초 동안의 입에서의 현란한 느낌을 위해서 3500원의 백배를 주고 육식을 사먹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그게 모두 다 감각입니다. 그 감각이 우리에게 주는 쾌락과 그런 것들이 굉장한 것입니다. 공포영화는 왜 볼까요? 가끔 어떤 사람은 영화 보다가 졸도해 가지고 실려 나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야, 저기 대개 멋있는 사람이 있어.” 그러면 사람이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야, 저기 황소가 차에 치어 죽었대” 그러면 “어디 어디 어디?” 그리고 가서 봅니다. 너덜너덜 어깨가 찢어져가지고 피가 줄줄 흐르는 모습을 ‘우웩’하면서도 꼭 봐야 됩니다. 왜 인간이 그럴까요? 이상하지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감각의 진폭을 무한히 확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그것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하나님을 닮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원만한 이해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번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안 그런 사람이 많겠지만 낭비벽이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는 꾸어서라도 사고 싶은 것은 사고 입고 싶은 것은 입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분에 넘치게 그런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사치스럽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본 따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갖고 계셔서 절약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절약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인간처럼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겨서 써서 자기 욕망 것, 욕망이 시키는 대로 써보는 것입니다. 아비다드에서 뉴욕까지 가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일등석 항공 티켓이 에띠아드 항공사에서 팔고 있는 것인데 3천8백만 원입니다. 일인당.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있으니까 둘이 들어가면 7천2백만 원입니다. 그러면 목표가 무엇이냐? 어느 비행기에서도 누리지 못한 모든 호화의 끝판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요리사가 비행기에 타서 승객이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 줍니다. 비행기 안에서 불 키고 요리를 해 줍니다. 어디까지 일까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부자는 비행기 전체를 금으로 발라버렸습니다. 속에 있는 장신구도 다 금으로 바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해도 끝은 없습니다. 계속 더 많은 것 더 많은 것. 왜? 하나님의 풍족하심을 인간이 본 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번에도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버닝썬 클럽에서 일어나는 성폭행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들을 사람들이 저지를까요? 그리고 저지른 사람들은 왜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처럼 행복해 보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길이 없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올바로 본받으면서 살든지 잘못 본받으면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폭력을 가합니다. 법이고 뭐고 필요 없고 주먹부터 나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내가 대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운명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내가 누구이고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어디서 베끼고 쓴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나의 창작입니다. 아직 책으로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오겠지요.
자, 보십시오. 외부세계에 대해 감각하는 반응을 하고, 그러한 기능을 가지고 생명을 보존하는 동물을 넘어서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들은 특히 야생동물들은 절대 과식안 하는 것 아십니까? 소화불량에 걸리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축들도 가끔 그렇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마구 먹어대는 게 강아지가 그렇습니다. 돼지는 절대 과식 안 합니다. 강아지는 가끔 과식을 해서 그래서 짜부가 나서 죽는다고, 마른 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물을 먹고 위가 불어나가지고 짜부가 나가지고 호흡 곤란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물들은 절대 안 그럽니다. 여러분, 뱃가죽이 한없이 늘어나서 뱃살이 나온 사슴이나 혹은 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항상 날씬합니다. 과식 안 합니다. 그런데 인간만 그렇습니다. 인간만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 자신의 몸에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생각 안 하고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으니까 너무 맛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데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맛까지도 알게 되면 맛과 양이 함께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더 맛있는 것을.
그래서 결국은 말씀 드리는 요지는 동물들은 어떤 감각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접할 때 자기를 보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새끼나 자기를 안전하게 보존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정도로 만족이 안 됩니다. 그리고 한없이 그것을 넓게 영역을 펼쳐서 모든 사람을 자기 발아래 놓고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자기가 하나님처럼 행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맘먹고 그렇게 자기를 확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독특성은 인간존재의 독특성이다. 여기는 내적으로 무한한 영혼의 세계와, 그래서 영혼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말하기를 "인간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오셔도 자리가 모자라지 않습니다"라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광대무변한 세계가 영혼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무한한 물질세계가, 완전히 무한하지는 않지만 거의 무한합니다. 우주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요? 벗어나면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또 다른 세계가 있지 않을까요? 아래는? 그렇게 보면 우리 이 끝없는 150광년이나 된다고 하는 이 우주는 또 다른 우주에서 보면 물방울 하나에 지나지 않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멀티유니버즈이론입니다. 다중 우주론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수많은 세포 같은 것들 중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 하나에 불과하다, 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무한하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만나는 곳이며 또한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세계에 대한 기억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자연세계와 접촉하는 곳이다. 인간의 마음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자연세계의 사물에 대한 지식과 도덕적 지식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은 정동(情動)을 경험하게 된다. 이 정동이라는 단어는 제가 만들어낸 단어인데 하다하다가 마땅한 말이 없어서 이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밑에 그림이 나옵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오늘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여기에 헬리콥터가 떴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봉고차만한 큰 돌멩이를 하나 매달았습니다. 여기는 엄청난 호수가 펼쳐졌습니다. 산이 있고. 이것보다 훨씬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떨어뜨렸습니다. 이것을.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잔잔하던 호수에 이게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떨어지면 떨어지면서 물결이 치게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작아지겠지요. 부딪쳐서는 다시 이게 이런 식으로. 그렇지요? 이것을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고 이것이 떨어졌을 때 이것을 인식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어떤 것을 상상 속에서나 혹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인식하게 됐을 때 그것이 마음에 떨어지는 돌멩이 같아서 마음은 출렁거립니다. 물론 어떤 것을 들었는데 아무렇게 출렁거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명품관에 가면 요만한 가방 하나에 7백만 원, 8백만 원, 천3백만 원 그런다고 합니다. 우리처럼 명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아무튼 그것을 별로 갖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보아도 마음이 출렁거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명품에 중독된 사람들이 가방을 탁 봤을 때 '아, 가방이구나' 그리고 막 출렁거립니다. 그러니까 돈을 빌려서라도 사고 싶은 것입니다. 출렁거리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너무 연애하고 싶다고 할 때 예쁜 여성을 보았을 때 마음이 막 출렁거립니다. 이 사람의 국적이 어디고 이런 것 상관없이 너무 같이 한번 연애해 보고 싶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말씀드리고 자 하는 요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인식이 떨어질 때 마음이 출렁거리는 것을 가리켜서 정이 움직인다 그래서 정동(情動)이라는 단어를 제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 영어에서 에펙션(affection)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어팩트(affect)는 영향을 주다잖습니까? 그래서 어팩션을 대개 ‘사랑’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혹은 ‘감정’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정동되는 것은 이것이 아름다운 것일 경우에는 사랑이 출렁거리고 이것이 추한 것일 경우에는 혐오의 감정이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네 친구, 네가 늘 같이 다니는 놈 이런 놈이야.” 그리고 그 나쁜 것을 다 보여줘서 의심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사랑하던 마음은 변해서 미워하는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정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일어나는 작용 자체가 인간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의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경향의 다양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색깔 그런 것 별로 신경 안 씁니다. 그리고 편안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색깔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뭐야, 이게 바닥 색깔하고 책상 색깔 하고 안 맞잖아. 더군다나 저 사람 얼굴하고 이 벽하고 색깔이 잘 안 맞잖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색깔 같은 것들이 정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향이 어떤 경향이냐에 따라서 정동의 크기와 방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사랑이지만 이렇게 인식이 있고 이 인식이 정(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한 인간이 어떤 마음을 현재적으로 갖게 됐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수많은 경험과 함께 타고난 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지금의 내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대해서, 무엇에 의해서 정동이 되었느냐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젊을 때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이 안의 경향이 올바르게 되고 그리고 참다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이렇게 정동이 커갈 때 그때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