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의 마음 (2)
녹취자: 조경훈
강론을 이걸 들어야 될지 저걸 들어야 될지 헷갈리기는 했지만 어느 것을 듣던지 마찬가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참된 경건은 외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영적인 쇄신도 결국은 회개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이 쇄신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콘베르지오(convérsĭo)는 회개입니다. 회개함으로써 레노바레(renovaré) 쇄신이 이루어집니다.
쇄신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것인데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된 것,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소가 쟁기를 끌고 지나가면 땅이 파이면서 뒤집혀 집니다.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와서 땅을 갈아엎는 것이라면 쇄신은 갈아 엎어짐으로써 부드러운 밭으로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농부들이 소에다가 쟁기를 매고 확 지나가면 파도 타듯이 땅들이 다 일어나고, 그것을 다 두드려서 부드러운 흙으로 만들고 써레질을 하고 거기에다가 물을 뿌리고 씨앗을 심으면서 묵은 땅이 밭으로 변하고, 잡초만 우거졌던 땅이 몇 달 후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총체적인 쇄신은 완전히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회개 자체도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쇄신도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회개와 쇄신은 인간의 마음에, 영적인 변화는 인간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의하면 마음은 무엇과 관계가 돼 있다고 했습니까? 이쪽 내부는 영혼과 관련이 있고 외부 세계와는 감각 sense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입맛을 느끼고, 접촉하고 하는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감각입니다. 이것이 외부세계와 접촉을 해서 정보를 마음으로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기쁘고 즐겁고 싫어하는 것을 보면 불쾌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싫어하는 물건이나 음식을 보기만 했는데도 토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던 어떤 사람은 고춧가루만 보면 대머리에 땀이 막 흐릅니다. 매운 것에 대한 마음에 뭔가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감을 쪄서 한번 먹은 적이 있는데 먹고 채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감을 찐 것만 생각해도 구역질이 나는 것을 몇 십 년 동안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감각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인테리어가 잘 돼있는 음식점은 비싸게 받고 길거리에서 먹으면 싼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훨씬 사람들에게 즐겁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감각을 실어 나릅니다. 감각만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외부세계가 전혀 없이 밤중에 조용히 불을 끄고 누워있어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상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냄새도 안 나고 보이지도 않는데 조용히 누워서 맛있게 구운 고기를 생각하면서 아! 먹고 싶다. 하고 침을 흘릴 수 있는 게 인간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지 않았을 때 당연히 잘못되어진 관계가 마음에 투영이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마음과 강퍅한 사람의 마음은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슬프면 새들이 지저기는 데 새들이 아침부터 우네. 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기쁘고 사랑에 빠져있으면 아침부터 새들이 노래하는구나 생각합니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를 보면서도 마음이 어떠한 가에 따라서 다 다르게 다가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의 마음이 엄청나게 비관적이라면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똑같이 보면서도 비관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라는 영국의 극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관주의자는 술을 먹으면서 절반을 먹었을 때 한 잔을 따르며 술병을 보면서 벌써 반밖에 안 남았네. 라고 생각을 합니다. 낙관주의자는 똑같은 절반인데 그렇게 먹었는데 아직까지도 반병이 남았네 하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그것은 마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의 삶에 상황이 펼쳐졌을 때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을 만나서 사귀어보면 이상하게 계속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경솔하지 않게 만들고 뭔가 자꾸 확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좋습니다. 그런데 항상 모든 것에서 그렇다면 그런 사람과는 연애하기도 힘들고 결혼생활하기도 매우 매우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낙심할 일이 없는데 한없이 낙심하고 죽고 싶다고 하니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그런 사람과 계속 살기 위해서는 아주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에너지를 뺏어가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희생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바람직한 마음을 가지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 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마음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얼굴만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다양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하셨지만 영혼이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질적인 면에서 같지만 그 영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는 다 다르고, 이것이 마음에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람이 이렇게 다양하지만 일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럿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를 구분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코도 밋밋하고 눈도 안 들어가고 입도 별로 안 튀어나오고 입술도 또렷하지 않아서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이 다르다는 것을 다 압니다.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지만 기본적인 얼굴의 구조는 똑같습니다. 머리카락이 나있고 얼굴이 있고 이마가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비율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크기와 비율, 거리와 길이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미인도 나오고 안 그런 사람도 나오고 좀 예쁜 사람이 있고 더 예쁜 사람도 있고 등등의 차이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걸 놓고 본다면 우리는 마음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두 가지를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마음의 일반적인 구조에 대해서 공부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나라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독특한지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과 어떤 관계가 있고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것을 행사하는 주체인 나는 왜 주체가 되는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상황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느끼고 이해하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게 우리는 몰라도 되는 지식은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고 진짜 알아야 되는 지식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의외로 우리의 인생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지식 예를 들면 먹방에 관한 지식, 어디에 가면 뭐가 맛있다더라, 어디에 가면 뭐가 예쁜 게 있다더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근본적인 방향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좀 더 맛있는 것을 먹느냐 못 먹느냐 하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 우리의 삶에 방향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후자에 관한 지식은 거의 획득하지 않으려고 하고 전자에 관한 지식은 수없이 찾으려고 합니다. 아주 매우 매우 열심을 냅니다. 그렇게 열심을 내는데 결국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가는 길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런 지식을 우리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찾아가 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저서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높은 산봉우리, 망망한 바다의 물결, 넓은 강의 흐름, 끝없는 대양, 별의 운행을 구경하러 여행을 떠납니다만 자신들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고백록, 10.8). 여기 우리가 사는 이곳에도 땅이 있고 하늘이 있는데 프라하에 갔을 때는 그 느낌이 또 다릅니다. 거기도 똑같이 건물이 있고 학교 캠퍼스가 있고 하늘이 있습니다. 뒤에 몇 백 년 된 건물이 있고 예쁘고 하늘은 푸르르고 길거리에는 맛있는 굴뚝빵을 팔고 그런데서 거리를 거닐 때의 느낌이 사당동 솔로몬 서점 앞을 거니는 느낌하고는 다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는 게 다르니까 느끼는 것도 마음에 다르게 느끼는 것입니다.
인식이 떨어지고 여기에서 마음의 출렁거림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 곳에 가지 않고는 여기서는 못 느낍니다. 사진을 보면서도 못 느끼고 심지어 영화를 보면서도 안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냄새도 안 나고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눈에 제한돼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소리를 녹음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를 한 번 갔다 온 사람이 백점의 그림을 본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느끼고 온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 가서 장사가 되는 것을 사오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서 사진과 추억밖에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도 거기에 섰을 때 느끼는 출렁거리는 마음의 정동이 너무 신비하고 아름답고 때로는 후일에 이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정동이 우리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이 우리를 기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럴 것들이 우리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사실 이게 진정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모른 채 그냥 볼 것만 보고 느낄 것만 느끼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데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인 우리 자신으로 떠나는 여행이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자아에 관한 탐구 이것은 우리가 일생동안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수기치인(修己治人) 또는 수기안인(修己安人)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를 알고 세상을 다스리고 그래서 나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편안한 자리에 있도록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위해서 인간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보람과 즐거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자기만을 위해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버닝썬의 이야기로 시작을 했지만 뿌리부터 캐니까 좀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도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매우 허무하거나 그것들이 도가 넘으면 추하게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균형을 잡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5층을 산책을 하면서 잠깐 생각을 했는데 우리는 모두 과거에 어떤 상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항상 그 주체성을 100퍼센트 발휘하고 살지 않으니까 피해자가 되는 것처럼 타격을 입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마음속에서 잘못된 기재고 남아서 나의 생각 느낌 결정 이런 것들이 계속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심리학적인 영향을 상처라고 우리들이 부릅니다. 그런 상처를 받는 일은 세상이 불완전하고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과거는 잊어버려지지가 않고 항상 남아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오늘 내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 때 과거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소위 얘기하는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쇄신된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자기중심으로 가던 방향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의 투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사랑이 이 안에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신의 저서 신국론에서 이것을 둘로 나뉘었습니다. 아모르 소피아디스. 이것은 소사이어티 사회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미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사랑합니다. 이 사랑이 각자 자기 속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때에 이 사랑이 사회적인 사랑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교통하는 사랑, 교통애 라고 부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자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특성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사랑하는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유대 책들을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자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이유는 성경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아모르(amor)는 사랑입니다. 아모레 화장품이 여기서 왔습니다. 사적인 사랑(amor privatus)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있는데 내가 사람을 사랑하지만 출발이 자기 자신의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결국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남녀가 사랑할 때에는 자기를 다 내어주는 것 같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 심지어 자신의 미래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너무나 괴롭히면 마지막에 끊고 헤어지게 됩니다. 안 맞는다는 것 자체가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줄 때에는 자기의 생명도 내어줄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존재가 괴로움을 주면 어느 부분까지는 양보를 하고 고통을 줄 경우에는 끊어버리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사랑하지만 여전히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A는 B, C, D, E, F를 사랑합니다. 나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받기만 하는 사랑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고 이렇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이런 사랑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는 이것을 계속 확산하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한다고 하면 천만 원까지만 모으면 그 다음부터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정욕에 빠지게 되도 어느 정도까지면 내가 만족하겠다가 없고 계속 무한히 못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누구만큼 예쁘면 아름답고 싶다는 욕망이 끝날까요? 그냥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파문처럼 퍼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가만히 안 있고 퍼집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게 한 여자를 두고 어느 사람이 너무 좋아하는데 이 사람도 좋아하면 부딪힙니다. 옛날 같으면 권총을 차고 결투가 이루어지겠습니다. 아니면 총신대 옥상에서 한 판 떠든지 뭐가 일어날 것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돈, 권력, 외모 모든 면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찍소리하지 않고 이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자기는 죽어지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럴 경우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굴복할 따름이지 A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폭의 두목이 무서워서 쩔쩔매는 사수는 두목이 너무 부당하게 자신을 대하면 대들고 싶지만 권력과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적인 사랑으로는 이 세상을 진정한 사랑의 사회로 만들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변화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2. 인간의 마음은 또한 자신 안에서 스스로 작용한다. 이전에 존재하던 기억들과 새로이 발생하는 사물에 대한 관념들은 서로 결합하며 또 다른 관념들을 만들어낸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 안에는 이러한 상상력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마음 자체 안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이 바로 마음이 가지는 성향이다. 이 성향 안에서 마음은 또한 고유의 힘을 가진다.
이것은 상상입니다. 이전에 존재하던 기억들과 새로이 발생하는 사물에 대한 관념들은 서로 결합하며 또 다른 관념들을 만들어 낸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 안에는 이러한 상상력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마음 자체 안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아까 얘기한 비관주의적인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거나 낙관주의적인 마음의 틀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고 죄악 된 쪽으로 계속 마음이 흘러가는 사람이나 거룩한 쪽으로 흘러가는 사람이나 이런 성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은 아무거나 괜찮은데 있는 장소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해서 아주 깨끗하고 예쁘지 않으면 힘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거 아무 상관없고 음식만 맛있으면 괜찮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맛은 상관없고 양만 많으면 충분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마음에 성향이 되어서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지는 성향이다. 이 성향 안에서 마음은 또한 고유의 힘을 가집니다. 힘이 있어서 마음에 떠오르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힘을 느끼는 것입니다.
3. 영혼의 이러한 힘과 경향성이 반영된 마음은 사람의 지문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누구도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실로 인간의 마음의 다양함은 우주 안에 있는 물상의 다양함과 같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마음의 다양성은 우주의 사물의 다양성과 함께 삼위 하나님의 다양성을 모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기 다른 인간들의 다른 마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물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자신들의 존재 목적을 성취하게 하심으로써 온 세계를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채우신다.
4. 인간의 마음의 탁월성은 그것을 통해 일어나는 도덕적인 기능과 관련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중 오직 인간만이 마음 안에서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든 피조물들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창조목적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마음과 마음 안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래로는 세계가 있습니다. 동물, 식물, 무생물 등이 있습니다. 자연세계가 펼쳐집니다. 이 사람들이 만나서 각 사회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 속에서 어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현재 이것이 A’이고 원래의 사회가 A라면 A’에서 A로 이행되도록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이 사람 안에는 참된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라고 하는 그림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잘 의식을 못하고 살고 있지만 환경문제가 지금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지난번에도 보셨지만 거북이가 코에다 빨대를 꽂고 얼마를 지냈는지는 모르는데 그것을 빼니까 피가 쏟아지고 거북이의 등에 온갖 오물들이 달라붙고 새가 죽어서 해부해 보니까 배 속에 들어있는 2/3가 플라스틱이었습니다. 새가 플라스틱 쪼가리를 배가 부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모이로 계속 주워 먹었는데 결국은 말라 죽는 것입니다. 인간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쾌락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수 없이 먹고 이것 때문에 기쁘고 행복할리라고 하지만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사실 그는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상태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자연세계를 인간이 자신의 편의로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게 플라스틱입니다. 플라스틱을 만듦으로써 인류는 아주 심각한 환경파괴를 직면하게 됩니다.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컵을 대폭적으로 줄여야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작년 한 해 동안만 사용한 일회용 컵이 250억 개 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앞에 거의 500개 정도를 사용한 것입니다. 하루에 한 개 반 이상을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혹은 탐욕 때문에 사용하게 됩니다.
미국에 한 번 갔는데 우리나라도 환경파괴를 심각하게 하지만 미국은 더 합니다. 파티를 여는데 캐터링 업체에서 수 백 명이 먹을 수 있게 책상까지 가져와서 테이블보를 씌우고 쇠로 된 포크하고 나이프하고 스푼하고 다 비치를 했습니다. 포크하고 나이프하고 스푼이 약간 후지지만 쇠는 쇠입니다. 온갖 플라스틱 그릇으로 음식을 다 담았습니다. 음식을 가져오는 뷔페에 사용되는 용기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었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파티가 끝나고 한 테이블에서 남긴 모든 것을 그냥 보자기로 싸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쇠로 만든 포크, 나이프, 접시 다 있는데 싸서 바로 쓰레기로 버리는 것입니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 않느냐고 물으니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서 파티에 제공되었던 모든 물건을 한 번에 다 싸서 모두 일회용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겠습니까? 그것을 자기 나라에서 처리를 못하니까 화물로 위장을 해서 가난한 나라인 멕시코 같은 데서 파는 것입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한 트럭만 가져가면 몇 십 달러를 준다고 하니까 몰래 가져가서 매립지 같은 곳에 매립을 하며 돈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선진국이 그런 식으로 쓰레기를 다 처리했고 일본도 우리나라에 그런 식으로 처리했고 우리도 일본 쓰레기를 받아다가 그런 식으로 처리를 한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공해물질들을 생산해서 가난한 나라로 이동시켜서 가난한 나라는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환되어서 자연세계는 인간의 요청하는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가는 게 요즘은 결혼을 해도 아이를 못 낳는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이를 갖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젊은 애들도 안 생깁니다. 가장 중요한 게 환경물질입니다. 환경 호르몬들이 몸에 누적되면서 생식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베르베르가 그의 저서 신인류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지구의 피부를 찢고 들어가서 빨대를 꽂아서 검은 피를 빼내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탐욕에 가깝게 착취하고 약탈하도록 자연세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자연세계와 함께 동료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왔고 흙에서 나온 동물들과 흙에서 나온 식물들과 함께 살다가 그들도 흙으로 돌아가듯이 우리의 육체도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겸손한 생각을 가지고 자연세계를 동료로 생각하면서 세계와 인간의 육체 자체가 하나의 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너무 없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의식이 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이 세계가 B’이고 이 세계가 진정으로 돼야 될 세계가 B라고 치면 이것을 이행하는 데에 이바지하도록 인간이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의 기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 닮은 영혼 때문에 이 사람이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통치하고자 하는 모본이 있기 때문에 이 세계를 보면서 이러한 세계로 이행하기를 꿈꾸면서 사람들이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세계를 선의로 대하게 됩니다. 우리도 강아지를 키우고 예쁘지만 개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선의의 대상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 혹은 하나님만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힘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세계를 선의로 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의의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하는 이 사람 한 가운데에 인간의 마음heart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 안에는 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인간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해된 것을 가지고 어떤 사회가 되어야 될 지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가고 어떤 자연세계가 되어야 할지를 이해하고 그런 세계가 되도록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 가능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인간의 마음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5. 창조된 모든 세계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창조의 머리이시므로 구속의 머리가 되시고 또한 회복을 통한 재창조된 세계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시공간 안에 잠시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타락한 세상을 구속하셔서 창조목적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가시적 현현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땅에 있는 존재로서 이 땅에 창조되었다. 그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으나 이 땅에서 창조된 육체를 입기 전까지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게 인간은 땅에 존재하도록 창조되어 땅에 있는 동안 이 모든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구현하는 머리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위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알고 또한 아래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피조물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이 세상에 구현함으로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한 영광의 세상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무엇을 만들었다면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지갑, 핸드폰, 시계, 볼펜, 외투 이 모든 것들은 다 고유한 목적이 있습니다. 펜의 목적을 빵이 대신할 수가 없고 지갑의 목적을 노트가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각자 그것은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넓혀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있어야 살아간다고 해봅시다. 여러분들이 그것들을 다 사용해서 마지막에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노트가 있는데 그것은 글씨 쓰는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글씨 쓰는 게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가깝게는 노트를 정리해야 지식을 쌓을 것이고 더 가깝게 얘기하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볼 것입니다. 성적이 나와야 졸업을 하고 졸업을 해야 취직을 하고 취직을 해야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해야 애기를 낳고 애기를 낳아야지 늙을 수 있고 늙어야지 죽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모든 것을 다 빼면 여러분들이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죽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위해서 그것이 꼭 필요한지를 묻는 겁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여기 와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직장에 가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거기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영영 취업의 기회를 못 얻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는 순간이고 한 번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두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학생 질의응답) 여러분들은 왜 공부해야 됩니까? 물어봅시다. 왜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것인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저를 지으신 뜻대로 발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대답일까? 교회에서 배운 대답일까요? 학생. 왜 살아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어제도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았습니까?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학생은 왜 삽니까? 하나님이 태어나게 하셨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대 마음 속에서 나오는 대답처럼 느껴지지 않고 누가 가르쳐 준 대답 같습니다. 학생은?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고 싶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고 싶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도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지만 결국은 죽습니다. 말씀대로 가르친 사람도 죽습니다. 그러면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학생은? 그냥 삽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침에 눈뜨면 살아 있길래 그냥 삽니다. 그럼 묻고 싶은 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살아가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을 대개 하고 삽니까? 오늘 과제 어떻게 하나? 마지막 학생.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 대게 기쁨을 많이 누릴 수 있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 대한 정답을 자신이 온 몸으로 부딪혀서 깨달은 것과 남이 찾은 것을 슬쩍 본 거 하고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이 인생에 대해서 답을 찾은 것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독서와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이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이해되고 혹은 믿어지고 그게 나의 귀나 눈으로 들어와서 여기 심장을 뚫고 자신 속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은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서 사도요한에게 두루마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먹으라고 할 때 사도요한이 먹습니다. 그래서 먹었더니 입에서는 너무나 달콤한데 배 속에서는 너무 너무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은 달콤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는데 저 사람이 모르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책을 한 권 읽었는데 독일어 원서로 영어 원서로 책을 읽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너무 달콤하고 뿌듯하지 않습니까? 한 권 또는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지식이 쌓였을 때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러나 그 지식이 우리의 인생에 밑천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우리의 마음 속에 내려와서 다 깨트리고 뒤집어 업어서 우리 안에 쇄신, 레노바레를 가져올 때 그것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됐을 때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앵무새와 같은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살면 생각 없이 졸업하게 되고 생각 없이 사회생활 하다가 애를 낳는데 이 인간을 어떤 인간으로 만들어야 할지 생각도 안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어릴 때 문학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문학작품이 답은 안 주는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민이 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하지 않던 고민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고 그 아픔 속에서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앎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강의실에 전기가 있고 확성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소리가 안 좋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내가 샀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은 무선으로 이걸로 들어가는 거고 이것은 강의를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 방 전체를 만들었을 때 건축을 의뢰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기서 연애를 한다거나 추억을 만든다거나 신년 파티를 한다거나 춤을 추는 곳으로 계획하고 만든 곳이 아닙니다. 강의를 하고 강의를 듣는 곳에 적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무한한 돈이 없으니까 될 수 있으면 적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돈이 많다면 너무 너무 환상적인 강의실을 만들 것입니다. 이 확성기는 소리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목적이지만 강의가 잘 되게 해야 된다는 보다 큰 목적이 있습니다. 결국 나의 인생이 마이크일 수도 있고 펜일 수도 있고 종이일 수도 있는데 마지막에 나, 너, 우리 모두를 사용해서 우리 하나 하나가 강의실에 물건이라면 이런 물건을 사용하여서 강의에 쓰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 세계에 우리 모두를 두신 목적인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할 때에 뜻하셨던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내가 왜 살아야 되는가 하는 표준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to be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로부터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장에서 만들었고. 내가 여기에 둠으로 to be 이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live 한다는 것은 live his or her life입니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살아간다는 자정 자체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이고 느끼는 과정이고 생각나는 어떤 것들은 부인해야하는 과정이고 생각나는 어떤 것들은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이고 수시로 버릴 것인데도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이 있고 하고 싶은데도 그것을 거절해야 하는 과정이 있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는 그것만이 live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가면서 끊임없는 사람과 세계와 삶의 상황을 만납니다. 이 모든 것은 세 가지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주체적으로 누구에게 노예가 되거나 종속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면서 살아갈 때에 이것이 거의 라이프가 되는 것입니다. 라이프를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라이프로 살아가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삶입니다. 그가 무얼 하고 살아가든지 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은 동물이하가 될 수 없습니다. 개만도 못 한 개새끼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소만도 못한 소 새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동물 이상일 수 없습니다. 물론 동물 이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 이하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고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인간 이하가 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개만도 못한 새끼 이것은 인간에게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네가 사람이냐 하는 질문은 인간에게만 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가 아무리 버릇없이 굴어도 네가 개냐 라고 말하는 것은 웃기는 것입니다. 개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는 못 알아듣고 짖기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도 사람이냐 라고 할 때 커다란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 그것이 어려운지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