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마음과 시간 1
녹취자: 이솔
이 시간에는 제4장 마음과 시간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참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사실은 가장 심오하게 탐색했던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가 간지 16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류 역사에 있어서 시간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어거스틴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모든 파괴력은 집중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딱 한 시간에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안 듣는 것이 저에게 손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시간을 집중해서 딱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언가 스파크가 일어납니다. 교수가 어디서 책 몇 권 읽어와서 여러분들에게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가다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집중을 하십시오.
왜 그런 시간 이라는 것에 대해서 집착했느냐? 시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시간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질문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흘러갑니다. 나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함께 흘러갑니다. 그렇게 흘러가는데 나는 어떻게 나일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들은 나도 흘러가고 그것도 흘러가는데 흘러가는 속도는 다릅니다. 사람에게 1주일과 파리에게 1주일이 같을 수 없습니다.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구강에는 수많은 균들이 번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슬쩍 누군가에게로부터 감기 바이러스가 옮기면 한 시간 안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숫자의 균들이 증식이 됩니다. 그 균들에게 1초라는 시간은 천문학적인 시간입니다. 이처럼 시간은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무엇에게 시간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시간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태양의 유효기간을 100억 년쯤으로 봅니다. 50억년이 지났습니다. 50억년 후에는 광대한 폭발을 통해서 그 태양이 사라집니다. 그 불길은 수금지화목성 정도까지를 뒤덮고 남을 정도의 크기 그리고 없어집니다. 당연히 그것이 없어지고 나면 지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디론가 뒤쳐나갈 것입니다. 그런 태양과 같은 천체에게 있어서는 100억년이라는 시간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80년 정도 길이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1000억년이라고 해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로 보면 지금을 밤12시라고 말하면 인류가 오전 0시부터 시작해서 낮12시까지로 보면 인류가 태어난 시간이 11시 30분 쯤 된다고 합니다. 방금 태어난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길어봐야 20만년 밖에 안치니까 어마어마한 지금 나이 45억년에 비교하면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시간이 흘러가는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시간은 모든 사물에 대해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으니 나는 그 시간 속에서 어떤 존재로 귀정될 수 있느냐? 이런 시간에 대한 성찰이 없으니까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암 투병으로 죽음을 가까이 두고 계시는데 그분이 피를 토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늙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특히 젊은이일수록 모르고 까불고 다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어갑니다. 늙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 우리의 모든 고민은 시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집결이 됩니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있는 것만 아니라 진리가 그러하듯이 시간은 객관과 주관 사이에 걸쳐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을 지하 감옥에 묶어두고 그리고 팔과 다리를 모두 묶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영양제 패치를 붙여서 그래서 영양이 여러분 몸속에 스며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여러분이 잠든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칠흙 같은 어둠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손으로 여러분의 몸을 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깊은 통증도 느낄 수 없도록 아주 부드러운 것으로 여러분을 꽉 묶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갑니다. 시간을 읽을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 할 겁니다. 배가 고프다, 아니면 내가 금방 자고 났지 라는 정도로 시간을 겨우 측정할 뿐이지 그것도 없다면 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자는 손으로 수염을 만져보면 길이를 보면서 아 이 만큼 자랐으니 시간이 흘렀구나, 혹은 여자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대략 알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몸을 만질 수도 없고 머리를 모두 밀고 왔으니 자기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를 추측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시간이라는 것은 매체에 의해서 측정이 됩니다.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영원입니다. 시간은 사물이 창조와 함께 도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면 사물의 창조와 함께 도입이 되었다할 때 그러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시간을 측정할까요? 변화입니다. 변화에 의해서 시간이 측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씨앗을 심었는데 싹이 났습니다. 줄기가 나고 잎이 났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꽃밭에 물을 뿌렸는데 물이 말라가고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이 흘렀음을 보는 것입니다. 변화를 보면서 시간을 측정합니다. 아침에 몸은 활기찼는데 한참 일하고 나니 피곤해졌다는 것을 느끼며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종종 시간을 잊는 때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논문을 썼는데 놀랍게 집중이 되었습니다. 자료들을 한참을 읽었습니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33분이였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못 느낀 것입니다. 시간이 똑같이 흘러갔는데 나의 관심사가 어디에 몰두하고 하니까 내 몸이 각성되면서 시간을 못 느꼈던 것입니다. 시간이 무슨 문제가 있냐면 아우구스티누수의 명문을 보고 새겨봅시다. 평생에 새겨 들을만한 명문입니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제공하지만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갑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이런 저런 것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함께 있습니다. 따로 떨어져있을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같이 붙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같이 붙어 있는 성격을 아인슈타인과 그 일행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잘 몰랐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별도인줄 알았는데 시간과 공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상대성 이론의 출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좀 더 설명 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무로 만든 아주 얇은 막이 있습니다. 쫙 폈습니다. 여기에다가 묵직한 축구공만한 쇠덩어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이게 찢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늘어집니다. 공간이 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이며 천체라고 봅니다. 빛이 이를 통과함으로써 거리가 측정이 됩니다. 시간이 측정이 됩니다. 시간은 빛의 이동과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빛이 이 휘어진 공간을 통과할 때 아래로 떨어집니다. 휘어진 공간이 없었더라면 직진으로 통과하였을 텐데 빛이 이렇게 휘어져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 영화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로, 지구에서는 10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돌아오니까 50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로서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질량이 빛을 잡아당긴다고 봅니다. 빛을 휘게 합니다. 빛이 포착이 되지 않는 곳에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요즘 나오는 블랙홀과 관련된 사건 지평선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 있지 않고 붙어 있는데 시간 속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감각하는 것입니다. 이 감각 중에서 제일 뛰어난 것은 시각입니다. 장의 냄새를 맡고 몇 년이 흐른 장인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감각이 시각입니다. 보는 것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제공한다.’ 무슨 뜻인가요? ‘이거 이쁘지. 이거 어때? 이거 신나지 않아? 이것 좋지. 이것을 누려봐. 이거 즐겨봐. 젊었을 때 뭐하는 거야.’하며 공간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 눈앞에 막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사랑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감정이 요동하는 것이라면 지나가다가 극장 포스터를 봤는데 여배우 스칼렛 요한스을 보고 심장이 막 뛰면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사랑인가요? 지나가다가 거지를 만나서 너무 불쌍해서 다 벗어주고 싶은데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런 사람 만나서 결혼할 것인가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있나요? 그런데 사랑에 대해서는 왜 하나도 모르나요? 생각을 하면서 삽시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데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자기 배짱대로 살다가 잔뜩 부서지고 나서야 ‘아! 이게 아니구나’하는 가장 단순한 답을 얻습니다. 인생은 그렇게 살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제가 정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떤 사물에 고착하여 지속적으로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의 성향’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특성은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끌려서 결심을 합니다. 이것을 끝까지 사랑 해야겠다 결심합니다. 이건 그 사람에게 한없이 주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여러 가지로 종류를 나눕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받는 것이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 대상에 대해 고착하는 것입니다. 탁 붙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여자 만나서 사랑한다고 하고, 내일은 저 여자를 만나서 열렬히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이 깊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제가 누구를 조심하라고 했습니까? ‘너 아니면 죽어버릴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남자하고 결혼하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은 여러 번 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또 할 사람입니다.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항상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착이 중요합니다. 딱 붙어 있는 것입니다. 풀 같은 것으로 붙으면 흔들어도 잘 안 떨어집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고착한 다음 그 다음 조건이 즐거움을 누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누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누린다는 말과 즐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개의 뜻은 다릅니다. 전자는 라틴어로 frui라고 하고 후자는 uti라고 합니다. 전자는 그 자체가 목표이기에 그것을 향유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말 그대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형제가 A라는 자매를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해줍니다. 어느 날 자매가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왜 날 좋아하니? 왜 사랑해?’ 그때의 남자가 해야 할 정답은 ‘나도 몰라. 그냥 좋아’가 진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의 아버지가 부자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 사랑이 아니라 이 여자를 통해서 아버지의 돈을 노린다는 뜻이 됩니다. 이 사랑은 향유의 사랑이 아니라 사용의 사랑입니다.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우티’해야 할 것을 ‘푸로이’ 하고, ‘푸로이’ 해야 할 것을 ‘우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혼돈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푸로이’ 해야 할 대상이고 무엇이 ‘우티’해야 할 대상인가는 누가 가르쳐 줍니까? 아침마당이나 BTS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것을 판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한 순간에 이것을 사랑해야지, 저것을 사랑해야지라며 마음에 꽂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절대적인 빛이 아닙니다. 한 순간에 들어오는 인상입니다. 전 세계 고아들을 구제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불을 다 끄고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주고, 고아로서 성장해서 성공한 사람들 혹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여러분들 중 삼분의 이 이상이 나의 젊은 시절을 전 세계 고아들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눈물을 흘릴지 모릅니다. 혹은 아주 기가 막히게 연애를 해서 행복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런 것 저런 것 다 필요 없고 소설에 나오는 연애를 하다가 한번 죽어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적인 빛이 아닙니다.
그럼 ‘프로이’와 ‘우티’의 순서를 정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리입니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었더라면 판단기준이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분명히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욕망이 발동하고, 욕망이 발동하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이야기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느껴져서 결국은 불행한 길을 택한 것입니다. 진리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내키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모든 인간의 불행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랑을 하느냐 안 하는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느냐 에서 인간의 불행과 비극, 행복과 보람이 갈리게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사랑이 찾은 사람이 오히려 불행해지고, 그런 사랑보다 또 다른 인생의 보람을 위해 산 사람이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북돋아 주는 일보다 그 방향을 올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제 비유에 의하면 이 사랑은 격렬하게 흘러가는 탁류와 같습니다. 물길을 어떻게 잡아주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벌판을 황폐화시키기도 하고 황량한 벌판을 농지로 바꾸어 주기도 합니다. 이런 물이 어디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냐 하는 문제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프로이’의 대상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에 의하면 ‘프로이’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후에 그가 성숙하여 추가한 것이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표현으로 말하면, 사람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거기 형제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이러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촌철살인의 통찰로 크나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생님이 전 세계의 인류 역사상 천재로 인정하는 한 사람입니다. 이 이외에는 뛰어난 사람들뿐입니다. 그래도 한 사람 더 들라면 플라톤을 뽑겠습니다. 플라톤은 신앙밖에 있는 사람이고 어거스틴은 신앙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읽어보세요. 그러면 아마 인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 안하는 여러분을 보면 너무 가엾습니다. 이 험한 인생을 어떻게 살까하고 말입니다. 저는 다 살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우티’의 대상은 무엇일까요? ‘우티’는 당연히 그 아래 있는 것들입니다. 무엇입니까? 유형의 것, 무형의 것들이 있습니다. 유형의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 집에 있는 댕댕이도 있겠지요. 요즘에 댕댕이를 엄마보다 더 사랑하지요? 엄마는 관절보호대 하나 채워주고, 댕댕이는 관절 보험 들어주고, 아빠는 아무거나 사다 주고 댕댕이에게는 유기농 사다주고. 댕댕이 말고도 무형의 것도 있습니다. 돈, 미모도 사랑하겠지요. 이성도 사랑하겠고. 심지어는 책, 지식, 학벌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무형의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하나님 외에 사랑할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서로를 관계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계획을 가지고 세계를 산출한 것입니다. 산출된 세계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산출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당신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사랑이신 것처럼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하셨는데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뼈 중에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뜻은 ‘더 베스트 더 초이스’ 라는 뜻일뿐 아니라 뼈가 없이도 되는 살, 살이 없어도 되는 뼈가 아니라 없으면 죽는 살, 없으면 존재가 지탱될 수 없는 뼈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서 손마디 하나가 끊어졌다고 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척추가 5cm 가량 끊어졌다면 죽거나 반신불구가 될 것입니다. 손톱 아래 살점이 좀 떨어져 나갔다고 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흉터는 남는다 하더라도 큰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심장의 살점을 손톱깎기로 한 점만 잘라낸다고 한다면 죽을 것입니다. 치명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뼈 중에 뼈 살 중에 살’이란 뜻입니다. 그 고백의 의미는 ‘너 없는 나는 상상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둘이 같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온 인류가 그 고백을 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날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저는 심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단 한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면 그 사람들 밑에는 수많은 자연사물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사물들을 사용하여 이루려는 무형의 가치들이 많습니다만,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의 사랑으로 인간이 감화된다면, 이 인간 하나하나가 감화되어서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이 사회를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바가 하나님께로 회귀하고,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만물들이 사용되어서 이 목적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기 위해 이 시간에 앉았습니다. 이것을 높은 목적이라고 하면 여러분 앞에 있는 노트, 펜, 확성기 이런 모든 것들은 그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노트 펜 그 다음에 기가 막힌 음향기계 이런 것들을 다 갖다 놨는데 수업 내용이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것들을 헛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사랑 자체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목적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장엄한 계획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계획안에 여러분 개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안에서 자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구글 지도 없이 안데스 산맥을 헤매고 있으면서 아프리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집을 찾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구글 지도를 가지고 있어도 혼자 걸어 나오기 힘든데 지도도 없는데 어떻게 찾겠습니까? 구글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무데나 가서 탁 켜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건 바로 인간으로 태어나서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정답을 가르쳐주고 수많은 종교와 참 종교를 터난 학문은 오답을 가르쳐줍니다. 비슷비슷한 것이 가끔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으로 가면 그건 오답입니다. ‘이제는 너를 위해 살아라. 너 자신을 생각하며 살아라.’ 막 떠드는데 그것이 이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면 어떤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전체적인 부분으로 보면 자기 느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온 인류와 우주를 휘돌고 다시 하나님 자신으로 회귀하는 자기 회귀적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우주적인 자기 회기의 사랑 안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 안에서 흘러가야 합니다.
내가 오지 선교지에 가서 원주민들을 위해 미친 듯이 선교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나에게 흘러온 하나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을 왜 나를 그렇게 많이 희생하며 여기에 보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원인이 모두 하나님께로 회귀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사랑해서 원하는 바가 무엇일까? 내가 죽으면 큰 동상을 세워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연금 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또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온 인류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으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한 소외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에 소외가 있습니다. 소외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이 정도로 서론적인 강의를 하고 마음과 시간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하나님은 있다가 소멸하는 물질이 아니시지 시간에 메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없으신 분으로서 흘러가는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다. 존재가 그 모든 시간을 초월하니 그가 만물을 보시는 것도 또한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재 미래 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내려다보시면서 과거를 현재처럼 현재를 현재처럼 미래를 현재처럼 바라보십니다. 왜? 현재와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입 때문에 발생합니다. 여러분들은 5시간 후에 어느 장소에 가있을 것입니다. 5시간동안 당연히 늙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에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상상할 뿐이고 미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번에 보십니다.
2. 하나님께서 만물을 아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아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신다. 당신 자신을 아시는 방식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 안에서 삼위 하나님을 함께 아는 것이다. 무한하시지만 당신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으신 완전한 자기 앎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만물을 보신다. 초시간적으로 바라보심으로써 시간 세계 안에서 인간에게 경험된다. 하나님 자신은 정동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그 하나님은 정동은 경험된다.
하나님은 이런 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해서 완전히 파악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 하십니까? 시험하지 않으십니까?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창세기 22장 1절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시험하셨다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생각을 글로 옮긴 사람은 인간입니다. 비트겐쉬타인의 언어철학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내가 이 자매에게 내 말을 받아 적으라고 부탁했는데 항상 온전하게 받아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쓴 기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때 그때 그것을 적은 것이 하나님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치하기 위해서 인간의 오류와 죄로부터 사람이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영감이라고 부르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쓸 때만 그 사람을 특별하게 오류가 없도록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내용 A와 기록된 A사이에는 오류가 없이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 A를 가지고 A를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고단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고 사람에 의해 쓰여 졌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사람에게 읽혀지는데 사람 홀로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고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지만 깨달아 집니다. 이렇게 사람과 하나님이 성경을 둘러싸고 함께 교차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성경은 어는 한 관점만으로는 쓰여지면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혼재하면서 성경은 기록이 진전됩니다. 그래서 갈아타기를 잘 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아주 놀랍게 입체적인 것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서 운동경기를 카메라 한 대를 갖고 보여주면 얼마나 짜증이 납니다. 이제 한 대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카메라를 매답니다. 예전에는 3대라면 이제는 수없이 매답니다. 5G로 들어가면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것을 터치해서 휫 돌리면 투수 어깨에서 날라 가는 공이 보이고 타자위에서도 보이고 타석에서도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3G, 4G에서는 돌릴 수가 없습니다. 5G가 혁신적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도 발명했다고 하는데 한국이 발명하는 것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몇 십 분의 일 크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이 발명한 것이 최고입니다. 데이터를 들어가서 설명을 들어보면 능력이 어림없습니다. 수십 분에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두 관점을 교차하면서 성경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은 사태의 본질을 보여주고 사람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성경이 입체적인 애니메이션처럼 다가옵니다.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당연히 시간을 둘러싸고도 성경의 진술들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건 학점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시간에 대한 사유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3. 하나님은 홀로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고 당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신다. 당신의 뜻은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뜻을 따라 발생하는 모든 일은 친히 바꾸시므로 홀로 있으면서도 만물에는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시면 또한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마음은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삶과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둘을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시간에 묶여서 인간에게 그것이 한꺼번에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마음과 시간 마음과 자아에 대해서 관계를 살펴보자.
A. 마음과 인간
1. 마음과 육체의 관계에서
첫째로는 마음과 육체의 관계에서의 시간이다. 인간의 실천하는 모든 행동은 마음 안에서 그 행동의 발생을 위한 생각과 욕망 의지의 선택 작용이 앞선다(예외적 실례: 반사적 행동들). 예외도 있습니다. 반사적 행동들이 그것입니다. 뜨거운 것을 딱 만졌을 때 이성적으로 이것은 뜨거운 것인가, 이게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나는 손을 떼야 될까 말아야 될까 등등의 사유의 작용을 계속하면 끝나기 전에 손이 다 타버립니다. 하나님이 신기하게 만들어서 자기 몸에 해가 될 것 같으면 대뇌의 작용을 패스하고 바로 작용해서 손을 띄게 됩니다. 그것을 반사 작용이라고 합니다. 반사 작용이 딱 맞지 않을 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이 아닌데 불 인줄 알고 기겁을 해서 놀라거나 그러다 옆에 있는 그릇을 깨트리거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신작용이 앞섭니다.
특히 도덕적인 행동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인간의 마음은 행동을 낳는 필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마음에 수많은 작용은 우유적으로(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아도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이미 싫지 않은 어떤 경향과 성향에 영향을 받으며 발생한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어떤 강한 버릇과 경향성에 사로잡힐수록 마음의 어떠함과 행동의 어떠함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은 증대되는 것이니 그것이 은혜로운 마음의 틀이면 하나님을 향해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을 향한 사랑을 낳고 그것이 사악한 틀이면 악한 행동들이 아주 쉽게 산출된다.
사람이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점점 야비해집니다. 그 사람의 행동도 야비해져서 삼투합의 법칙처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치가 일어납니다. 잠시는 불일치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 사람의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속일 수 없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면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 대해서 사람에 대한 통찰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기는 누군가를 만나면 이 사람을 평생 다시 만날지 안 만날 지를 한 시간 안에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게 자기의 인생의 시간을 절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참 무섭습니다. 참 어름같이 차갑습니다. 우린 잘 못합니다. 젊어서는 했는데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그게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이러한 정신작용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 모두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의식세계 속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과 욕망을 품은 후 의지의 선택을 거쳐 밖으로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은 그것이 행동으로써 나타날 때까지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바를 쉽게 잊지 못한다. 이는 시간이 작용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인간의 마음은 다름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다.
마음에 있는 것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간섭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속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시간의 경계가 없이 보시니까 결국 악한 자를 보시면서 악을 행할 줄 잘 아시고 그리고 선한 자를 보면서 선한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것입니다.
2.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서
둘째로는,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서의 시간이다. 기억은 영혼에 속한 가장 중요한 지성적 작용이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경험의 해석, 미래의 상상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찰나로서의 현재는 박막의 시간으로서 길이를 잴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현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현재라는 이 말이 너무 추상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흘러가고 내가 ‘현재’라고 발음하는 그 순간이 끝나기도 전에 시간은 또 흘러갑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 자체는 관념적입니다. 실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무한히 얇아서 길이가 전혀 없는 박막의 시간입니다. 박막 곧 얇은 막을 이야기합니다. 수학적으로 두께 제로의 막입니다. 사실 현재라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 상정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무수한 박막으로써 이동을 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면 과거 활동사진과 같습니다. 활동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활동사진이 나오게 된 동기는 바로 잔상의 효과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10분의 1초의 속도로 사진들을 돌리게 되면 10장만 돌려도 사람은 착시현상이 일어나서 잔상이 남아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영화에서는 초당 60장정도 돌립니다.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이 활동사진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그런 활동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면 그 시간은 무수한 현재의 연결입니다. 그것이 현재가 담고 있는 뜻입니다. 현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지 실제 속에서는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꼬리를 물고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현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찰나로서의 현재는 박막의 시간으로써 길이를 잴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은 박막의 현재를 지나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과거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 도달하지 않는 시간들은 미래의 염력에 속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현재를 통해 과거로 흐르는 시간이며 따라서 현재를 현재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미래와 과거에 대한 인식이 있으므로 현재가 현재로 인식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왜 중요한가? 너무 중요합니다. 대학졸업장 하나보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시점을 현재로 삼아 사물들을 바라볼 때, 과거의 기억 속에서 회상(reflection)이 발생하는데, 이 때, 회상 속에서 떠오는 기억 속의 관념들이 현재 바라보고 있는 사물들이 전달하는 관념들과 조합(association)하게 된다. 이때 이 사람은 현재적으로 어떤 사물을 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을 통해 현재의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내가 저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본 사람입니다. 그냥 탁 봤을 때 잘생겼다 못생겼다 아니면 관심가질 만하지 않다 등의 판단 정도로 끝납니다. 하지만 옛날에 봤던 사람인 경우 옛날에 가졌던 인상이 보자마자 떠오릅니다. 그리고 두 가지는 서로 결합을 합니다. 나쁜 첫 인상이었다면 이 사람하고 계속 만나면 안 되겠구나 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좋은 인상이라면 만나자마자 마음을 확 열고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보증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현재라는 것은 무조건 현재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들 심지어는 미래에 대해서 자기의 소망들이 결합하면서 현재를 해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옵티미즘’ 하고 ‘패시미즘’ 입니다. ‘패시미즘’에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관적이었습니다. 비관적인 해상을 가지고 현실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성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 안에서만 인생의 올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패시미즘’입니다. 반대로 ‘옵티미즘’은 낙관적이고 아주 고무적이었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현재를 그렇게 생각해서 미래도 그렇게 상상을 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옵티미스트입니다.
어떤 것을 택하느냐는 자기 문제이지만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과거의 기억에 대한 회상들이 얼마나 현재를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에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 있는 성향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마음과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인간의 마음과 일치하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굽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계속 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너무 힘들 때 힘들다고 자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여덟 사람은 듣지 않고 두 사람은 무시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기대며 살수 없습니다. 엄마 아빠는 해주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이런 자매들하고 결혼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자라지 않은 자매 말입니다. 헌신적인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은 자매하고 결혼하면 적어도 여러분 자식을 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희생적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그런데 단 이런 여자는 조심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무한한 사랑을 받긴 했으나 무엇이든지 해달라고 해서 안 해주면 두 다리 뻗고 울면 엄마 아빠가 다해주었던 자매들. 이런 자매들은 가능하면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사랑을 잘못된 방식으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 올바른 방식으로 사랑을 받은 자식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남자 친구를 만날 때까지는 그런 현실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빼어난 미모와 많은 아름다운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판단력이 없어서 말려듭니다. 사귀다가 헤어지자고 하면 두 다리를 뻗고 울어대고 악다구니를 해댑니다. 이런 일에 현혹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옛날에 어느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앙케이트를 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한번 사귀어보고 싶은 순위를 메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 막 이름을 썼었습니다. 1위부터 10위까지 매겼는데 그 명단을 자매들이 보면서 너무 슬퍼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이 든 사과 순으로 적어내려갔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과에 독이 든 것을 형제들은 모릅니다. 그냥 예쁜 사과만 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외모에 대한 이끌림입니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느끼고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행이 거대하게 흐를 때 ‘나는 이 유행이 싫어’하고 반감을 가지고 맞서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유행을 신처럼 여겨 나로 하여금 떠밀려 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원하는 것은 따르고 원하지 않는 것은 저항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지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같이 예쁜 여자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는 자존감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주체성이지 인간이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풍조에 전적으로 반대하고 오두막집에서 산다든지,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은둔주의자의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배워야 할 것도 인간 사회요, 그리고 내가 봉사해야할 것도 인간의 사회’입니다. 가끔 일 년에 한 달 혹은 두 달 정도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도피하는 것은 좋은 인간으로서의 덕이 모자란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철학사에서 유명한 ‘동굴의 비유’라는 것입니다. 여기 벽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앉아있습니다. 그들 뒤에는 불이 비추고 동굴의 벽면에는 그 그림자들이 비칩니다. 여기에 온갖 형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열광하면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속에서도 성공과 실패의 삶이 있는데 이 그림자를 보면서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이라고 잘 해석하고 맞추는 사람이 돈도 잘 벌고 출세하고 그 세상을 지배하는 지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여기에 인간의 출세와 성공이 달렸으니까 오직 시선이 동굴 벽면에만 가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그림자가 원래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여기며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놀랍게도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벽면에 여러 형상들이 나타났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은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만 뒤돌아 봤습니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만이 뒤돌아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말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느꼈는데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는 엄마, 아빠, 가족도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여기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왜 수많은 인류 중 이 사람들은 헤어질 수 없는 사람으로 운명 지어졌고 그것을 내가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에게 결정이 되었나 등을 고민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게 될 때에도 놀라운 것은 사랑하는 동안에는 이 인간 없으면 죽어도 못살 것 같고 그런 세상이 없을 것 같은데 막상 헤어지고 나서도 잘 삽니다. 그러면 그때 그 마음은 무엇이었나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일은 초등학교 때 생각한 것이 아니고 훨씬 후의 일이지만, 그러면서 한동안 깊은 허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것을 느낄 때 인간은 어떤 마음을 갖는지 아십니까?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이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서있는 이것이 어디 있느냐? 이성으로 아무리 찾아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러다가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말입니다. 거기서 잠시나마 작은 빛을 발견했습니다. 톨스토이가 한 신에 대한 사유입니다. ‘나는 삶의 기반이 없다. 그러나 일어났다가 뛰어보았다가 뒹굴어 보았다가 해보았다. 내 삶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는다. 구름이 있다. 그 구름 위에 거대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 기둥은 다시 구름에 가려져 있다.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서 그 사람이 되돌아봤습니다. 그렇게 돌아보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플라톤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힘을 대게 교육의 힘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내가 묻습니다. ‘누가 그런 교육을 시켰느냐?’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교육을 시키면 이런 가능성을 보고 뒤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면 ‘최초의 교육자는 어떻게 뒤돌아봤을까?’ 저는 일반적인 플라톤 해석과는 다르게 진리 자체가 이끄는 힘이라고 봅니다.
진리 자체는 사람들에게 무시될 수 있으나 누군가의 마음을 강한 흡입력으로 끌고 있어서 반대로 가고자 하는 힘이 떨어질 때 확 하고 진리를 향해서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빛이 들어오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존재의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가 일치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예를 들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어야 옳지, 쓰레기 같은 것을 위해 밤을 지세우고 정력을 쏟아버리면 인간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질서와 가치를 진리의 빛이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한 것은 진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봅니다. 진리 자체가 이 사람을 이끈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사람은 더 이상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돈이나 벌려고 하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첫 번째에서 이제 두 번째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이 형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이 형상을 찾아서 계단을 걸어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희랍어로 ‘아나바시스’(상승)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상승하는 것입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갔더니 불꽃에 비친 그것도 가짜였습니다. 동굴 밖에는 새 모양이 아니라 진짜 새가 날아 다닙니다. 호랑이 모양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가 뛰어다닙니다. 꽃과 나무가 실제로 피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형상입니다. 동굴에 비친 것은 이 형상이 전달한 효과들입니다. 그리고 여기 위에는 이 모든 것을 보게 해주는 태양이 떠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의 비유라고도 하고 동굴의 비유라고도 합니다. 이게 두 개가 다른 비유이냐 하나의 비유이냐 대해서 학설이 나뉩니다. 제가 보기에는 두 개가 한 그림 안에 있습니다.
실제와 형상의 효과의 관계가 아주 명료하게 들어옵니다. 이러한 효과를 보게 된 것은 형상을 발견하고 이 형상은 실제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인간은 이 실제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행복의 조건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이곳에 살면 됩니다.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필요한 것을 다 찾았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운명(아난케)은 이것을 알게 되는 순간 동굴로 다시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강’(카타라시스)라고 합니다. 다시 내려옵니다. 내려가서 동굴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보고 있는 이 효과는 형상의 그림자일 뿐이고 진짜 실제의 세계가 태양 아래서 있다고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운명은 이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살해를 당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세계가 있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 갇혀 삽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나바시스’하기 때문에 다시 ‘카타바시스’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장렬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를 꿈꿉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처럼 모두 밖에 나와 태양 아래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 일을 위해서 그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