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마음과 시간 2
녹취자: 조경훈
강의안 15페이지 밑에서 10째 줄 부터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공부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삶은 마음이라는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서 실제로 살아보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시간보다도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공장인 마음에 대해서 별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온 몸으로 부딪쳐 본 후에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뿐인데 그 지식들도 파편적이어서 그것들이 체계를 가지고 쌓이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인생에서 실패한 것이 자신의 실패하는 인생에 좀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에 대한 공부입니다. 그 어떠한 종교나 철학보다도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풍부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을 공부하고 자기 자신을 가꾸는 일에 열심을 내야 된다는 이야기가 중간고사까지 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내용들을 가지고 보충해 온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공부한 것은 마음과 영혼의 관계에 대해서 공부를 했었는데 오늘 이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때 미래로부터 현재로 흐르는 시간은 순차적이지만, 일단 현재를 거쳐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시간의 구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기억 안에서는 시간이 순차가 사라져 영원의 닮은꼴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한에서는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여 만물을 보심과 같이 본다. 시간과 공간에 개입으로 인하여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의 전후관계, 동일 사물의 전건과 후건 사이의 관계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미래를 거쳐 현재를 지나 과거를 지나가던 사간과 사물에 대한 기억들은 시간을 흐름을 배제하고 원인과 결과의 관계의 거대한 도해만 기억의 평면에 남기게 된다.
모든 사물의 인과관계가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으면 우리들이 절대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의 의해서 혹은 욕망에 의해서 그것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행동에 이런 결과가 따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결국은 오류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것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미리 보는 것이 바로 인생에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선택하는 길입니다.
마음은 이러한 기억의 평면도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시간의 전후에 상관없이 불러낸다. 그렇게 불러내어진 기억들은 마음에서 현재화되어 새로 경험하는 현재의 사건인 것처럼 현재적으로 정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 뒤에 그림이 나오는데 무슨 의미인지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다면 여기서 1번의 일이 일어납니다. T라는 시점에서 한 사건인 이벤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원인이고 이것은 결과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1번에 이어서 그 다음에 이렇게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T1, T2, T3, 그 다음에 이렇게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만 더 그려 보겠습니다. 그러면 요 시점에 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고 이렇게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당연히 이 사람의 마음속에 당연히 1번이 먼저 기억되고 그 다음에 이어서 2번이 기억되고 3번이 기억되고 4번이 이렇게 발생 순서대로 기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당연히 1번이 됩니다. 당연히 2번은 이렇게 올 것입니다. 그 다음에 3번, 그 다음에 4번 그리고 그 다음에 5번 이렇게 올 것입니다. 이 기억 속에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기억 속으로 이것이 들어가고 나면 모두 입체가 아니라 평면에 다다다닥 달라붙은 점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서 어떤 기억을 소환해 낼 때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하는 그것 하나만 기억에 남는 게 아니라 영상과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기억에 납니다. 네 가지 정도로 나뉘는 분류의 기억이 남는데 그것이 같이 소환이 됩니다. 사람이 넘어지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데 어렸을 때 넘어지고 엄마도 없는데 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넘어졌다는 기억이 끌어내어 질 때 그 사건이 다 회상이 되면서 그 시점이 우리에게 설정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기억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점처럼 착지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간의 개념이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기억이 다른 기억들을 함께 소환하면서 내가 넘어진 게 초등학교 때가 아니고 유치원 때였다. 그때 엄마가 없었다. 등등의 기억이 나면서 그 기억이 끌어내어 지면서 주변에 것들에 대한 기억이 함께 따라오면서 그 기억은 입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 속에서 1번은 2번과 연결이 되고, 2번은 3번과 연결이 되고, 당연히 3번은 4번과 연결이 되고, 4번은 5번과 연결이 됩니다. 기억 속에서는 이런 평면도해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생각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물을 내려 다 보실 때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사물을 보신다고 하면 복잡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나무가 있는데 점점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 나무는 당연히 요만한 나무였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랍니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시간 안에서 이것을 봅니다. 이 나무가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정확하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딱 왔을 때는 이 나무를 봅니다. 그 대신 이 나무에 대한 것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기억에 남은 것과 현실에 나타난 두 개를 비교하면서 이것이 씨앗처럼 자라나서 이렇게 왔다라고 하는 것을 대조하면서 이 사이에는 성장의 과정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유추하게 됩니다. 이것이 만약에 최초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이것을 대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시간이 개입하고 당연히 공간도 개입을 합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은 하나 T1, E1 T2, E2(12:25) 이 사이를 보지 못하게 가리는 막이 있는데 이것이 시간과 공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1년 후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할 때 우리는 대게 경험으로 1년 후에는 내가 조금 늙기는 하겠지만 심각하게 늙지는 않을 것이고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치를 통해서 우리들이 예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예상을 깨고 1년 뒤에 여러분들이 여기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어제까지 그것을 생각 안하다가 오늘 가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런 의외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이 사물의 원인과 결과 사이를 살짝 가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어려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방해 때문에 E1과 E2사이의 연관을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다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또 어떤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구나. 하나님. 드디어 제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장학생이 됐습니다. 제가 열심히 봉사해서 몇 명의 영혼들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다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나에겐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시면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학에서도 굉장히 난해한 문제에 속합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해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붙인 이름인데 첫 번째는 현견지입니다. visioness는 vision의 2인칭입니다. 비전의 지식이다. 이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고 그냥 seeing 보는 것의 지식입니다. 현견지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단순지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키엔띠아(scientia) 이건 지식입니다. 심플리끼스(simplicis) 는 단순성의 입니다. 인뗄리껜띠아(intellegentia)는 오성의 입니다. 이것을 오성 단순지(scientia simplicis intelligentiae)라고도 부르고 그냥 단순지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메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한 번에 보십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전지성과 연결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단순하게 보셔서 모든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예 어떤 시기나 자연에 의해서 설정되었고 그것은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이 도저히 거스를 수 없다고 보는 극단이 운명론입니다. 인간은 살아보나 마나 자기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 운명에 따라 1번 2번 3번 4번 5번의 길을 걷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그렇게까지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자결정적인 존재 즉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저렇게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이 운명처럼 장악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디로 갈 것이냐 라는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결정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중세 때부터 둘로 나누어서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만물을 단순지로 보시지만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인간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시는 것 같은 효과를 인간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교훈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념이 하나님의 지성 안에서 존재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생각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것은 모자람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늘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정확한 것입니다. 생각이 없다가 하나님 안에서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이 먼저냐 하나님이 먼저냐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생각 속에서 모든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 진 것이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것일까 새로운 것이 아닐까요? 숙제가 너무 많아서 리포트가 10매쯤 됐는데 리포트를 다 써놓고 출력할 때 기분 좋지 않습니까? 컴퓨터로 쳤는데 여러분들이 출력하면 어떻게 될지 완벽하게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화면에서 봤을 때의 느낌과 출력했을 때 프린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약간 냄새나는 하얀 A4용지 10장을 만졌을 때의 느낌을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박사 논문을 썼다면 그 기분은 더 달라질 것입니다. 책을 썼다면 더 달라지겠지요? 노벨 문학상 받을 작품을 그렇게 썼다면 더 놀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다 알고 계신 건데 그 말도 모순이 아닙니까? 그런데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을 보시는 효과를 우리에게 전달하심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마음도 갖게 되고 언제 하나님이 나를 슬퍼하시는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뜻을 초월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흥미진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주 좋은 비유를 얻었는데 벌써 1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대관령에 길이 뚤렸습니다. 어렸을 적 학교 다니기 전인 유치원 다닐 때인데 제가 거기서 살았습니다. 대관령 고갯길이 아흔 아홉 굽이라고 옛날 조선시대 시조에 나오길래 진짜로 아흔 아홉 굽이인지 차로 가면서 세어 보았습니다. 그때 길과 요즘 길이 물론 달랐겠지만 꺽는 굽이가 일흔 일곱 개입니다. 거기는 겨울이 되면 가깝고도 먼 길입니다. 갈 때는 금방 가는데 만약에 간밤에 눈이 오면 그 다음날에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제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차들이 쫙 서서 기름 한 통에 만 원씩 물 한통에 만 원씩 받고 하던 동네였습니다.
거기서 산을 넘으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산이 있고 고개를 넘는데 차가 돌면서 올라갑니다. 만약에 여기에 A라는 차가 서있고 B라는 차가 여기에 오면 수시로 가려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이렇게 비행기가 있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밑에서 기어 올라오는 차부터 마지막에 내려가는 차까지 한 번에 다 눈에 보입니다. 이것을 단순지라고 생각하면 되고 여기서 보는 이것을 현견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이 두 개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내 인생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나 있고 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인생의 과정, 마지막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가 그분의 생각 안에 있다는 마음을 가지면서 우리는 아무 것을 해도 소용없다는 운명론에 빠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말과 동일어입니다. ‘내가 너를 알았나니’ 라는 것은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문맥에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랑한다고 하는 문맥입니다. 히브리말로 야다 라고 하는데 know입니다. 이 단어를 영어사전으로 찾아보면 성교하다는 뜻이 나옵니다. 실제로 창세기 2장 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할 때에 동침하다는 단어가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영어의 의미를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많이 규정을 해줬습니다. 원래 없던 의미를 살려준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있었지만 1611년에 킹제임스 버전이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영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히브리어와 희랍어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사에서 성경 번역사는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영문학과에서는 킹제임스 버전을 읽는 게 말하자면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버전이 웬만한 사람이 읽기 어려울정도로 매우 어려운 영어문학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아신다 라고 하는 것에서 내 인생이 모두 내려 다 보시는 하나님 앞에 다 아신 바되었다 라고 하는 이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찬송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람같이 요동치는 나의 인생이 결국은 전체가 하나님에게 알려져 있다고 하는 것 거기에서 큰 위로를 갖는 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것과 동시에 스키엔띠아비저니스(scientia visioness)의 경우에는 인생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시련을 만났는데 이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열심히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이기느냐에 달렸다. 하나님 앞에 매순간 미래는 확정된 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율성을 가지고 마음을 지키면서 헌신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놀랍게 자기가 일반적으로 환경을 통해서 예측했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굉장히 사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지식의 이론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동시에 기대, 소망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같이 가져다줍니다. 현견지든지 단순지든지 마음에서 결국은 인간이 파악하게 되는데 과거에 대한 회상에 있어서 인간은 이런 단순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억 속으로 들어간 것은 기억되는 선명도가 최근에 것이라고 또렷하고 과거의 것이라고 희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강력한 의미를 부여했던 사건은 굉장히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결코 잊혀 지지 않고 이 속에 남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나쁜 영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들이 트라우마라고 부릅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은 그 기억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고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있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원래는 이렇게 사랑하던 사람이었다고 하는 기억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덕스러운 인생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함으로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부실 수 있는가에 대한 기억들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낙심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을 주는 도구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적인 삶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들어간 다음에는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기억이 평면에 꽂힙니다. 입체로 날라 와서 평면에 다다다닥 점처럼 꽂혀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원하는 데로 소환해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환하려고 해도 소환이 되지 않는 상태를 우리들이 망각이라고 부릅니다. 소환되는 상태는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플라톤의 예를 들으면서 기억의 위를 예기했습니다. 의식의 표면에 사건이 일어나면서 의식 속에서 희로애락의 정동을 일으키고 기억 속에 가라앉습니다. 이것을 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의 주둥이 속에 혀가 있습니다. 밥 한 끼에 몇 만원 하는 거나 외국에 가면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요리도 있겠습니다.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세계지만 어쨌든 미국에서 햄버거 하나에 600만 원 짜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600만 원이면 5천 원 짜리 1,200개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600만원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한 달 벌어도 못 버는 돈인데 당연히 5천 원 짜리하고 600만 원 짜리하고 당연히 현저한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너무 맛있을 것입니다. 혓바닥에서 막 요동을 칩니다. 그런데 그게 4초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비싼 음식이라도 위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맛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잠깐 동안에 전율하는 쾌락을 위해서 인간들은 막대한 돈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음에 막을 건드리면서 희로애락이 일어나고 정동을 일으킨 다음에 밑으로 들어가고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 겁니다. 신기한 게 다시 소환해서 위로 올라올 때 의식의 막을 건드리면 이미 다 끝난 슬픈 일인데 회상을 하면 그 때 하고 똑같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똑같은 기쁨이 느껴지고 똑같은 분노가 느껴집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억의 회상의 작용들이 인간의 마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끌어 올려지는 기억들이 아주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밖에 없고 소환할 때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는데 유난히 비관적인 것들을 끌어내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이 페시미스트들입니다. 염세주의자들은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낙관주의자들은 나쁜 것들은 기억을 의도적으로 안하고 좋은 것만 기억을 합니다. 사실 이렇게 해도 어리석고 저렇게 해도 너무나 슬픈 사람이 되니까 공정하게 떠올리면서 새로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서도 교훈을 받고 회상하는 사건에 의해서도 교훈을 받으면서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게 인간이 가야할 인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B. 마음과 자아
인간이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아로 돌아간다는 뜻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자아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요것만이 자아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자각하는 자아인데 내가 누군지를 자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라로 하는 존재를 여러분들이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도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어떤 사람이 죽고 나서 사후세계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종교를 배제했습니다. 거기에 심판하는 자가 묻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김 아무게입니다. 내가 언제 너에게 한국 이름을 물었느냐? 너는 누구냐?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너에게 종교를 물은 게 아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어느 교회에 권사고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네가 누구냐? 나는 한 남편의 아내입니다. 그거 말고 너만 가지고 얘기 해 봐라. 그거 얘기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불가능합니다. 마지막에 이 여자가 소리치는 겁니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기가 파악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항상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관계를 통해서 파악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공통감각입니다. 공통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별성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로 나온 BTS(방탄소년단)의 음악을 틀어 주면 당연히 나 같은 사람은 싫다고 할 것입니다. 가사도 별로 마음에 안 들고 가락도 마음에 안 들고 내용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좋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통감각입니다. 이것은 미에 대해서도 그렇고 도덕에 대해서도 특별히 그렇습니다. 이것을 신테르시스(synteresis)라고 합니다. 신테르시스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의 도덕적인 공통감각에 호소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자기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 알 뿐만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를 아는데 이것들을 규정해 주는 것이 공통감각입니다. 이것들이 있음으로써 자아라고 하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 자아성 안에서 인간은 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욕망하고 결정하면서 각기 자기 빛깔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율성을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존재를 세상에 만드셨을 때에 기대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어울리게끔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없이 자율이라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면 방종한 삶이 되고 반대로 그것이 없이 살아가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간다고 말하면서도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율성의 기쁨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배경에 두고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영혼과 육체에 걸쳐있는 자신으로 기능하는 총체적 실체다.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혼을 소유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 안에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아의 범주로 감각지각과 공통감각 그리고 이성을 꼽았다.
감각지각은 미에 대한 지각 같은 것입니다. 공통감각은 도덕적인 것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이성이 인간의 자아에 핵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들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 영혼에 걸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거기 있는 감각기관으로 눈 , 입, 귀, 코, 살갗, 혀 이런 것을 통해서 자기 밖에 있는 사물을 파악하며 그것을 인간의 마음에 전달해 준다.
음식을 먹는 것이 인간에게 엄청난 유혹과 동시에 엄청난 기쁨이 되는 이유가 눈은 보기만 하고 코는 냄새만 맡고 귀는 듣기만 하고 감촉은 접촉하기만 합니다. 요리는 오감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음식을 보고 냄새를 맡고 씹을 때 사각거리는 식감이 느껴지고 하는 것들을 동시에 한꺼번에 온 몸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다고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 가서 밥을 먹을 때 그것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문화를 먹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정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아주 값비싼 음식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타지에 와서 너무 외롭고 힘들 때 생각나는 밥상은 호텔에서 나오는 눈이 부시도록 어마어마한 밥상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엄마가 눈이 펑펑 오는 날 추운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았을 때 엄마가 해 주던 된장찌개와 보리밥, 콩나물, 산채나물, 생선조림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오관(五官)으로 다 감각이 되면서 우리에게 온갖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먹방에 빠지는 이유를 문화적으로 이런 식의 해석을 합니다. 사실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요즘 사람에게만 해당하고 옛날에는 맛없는 것을 좋아하던 시대가 있었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도 맛있는 것을 누구든지 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방이 발달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어떻게 봐야하냐 하면 인간의 문화가 아주 극단적으로 감각화 되어가는 현상이라고 봐야합니다.
이것은 도덕과 연관이 됩니다. 내가 여러분 나이 정도만 되도 어디에 가서 뭐 먹은 것을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상스러운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대화 속에서 인간이 극도의 감각주의로 빠지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경계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나쁘게 비평하면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며 뒤에 가서 호박씨 깐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들이 그런 선을 그어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그럽니다. 지금은 가면 제일 뵈기 싫은 게 무슨 음식이 나와도 그 식당이 외국이든지 국내든지 상관없이 카메라부터 드는 것입니다. 유럽에 가니까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사진을 찍는 게 한국의 식사 예절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먹은 것을 막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문화 자체가 아주 카날(carnal)하게 극단적으로 육화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문화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휘말려서 살아가면 우리는 그만큼 올바른 것을 사색할 수 있는 기회들을 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먹방을 죄악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항상 우리의 삶을 극단적인 감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을 남겨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3D가 나오고 4D가 나오고 앞으로는 5D, 6D가 나와서 텔레비전 화면이 온 방안에 전개 되어서 꽃밭이 나오면 꽃 냄새가 사악 나오고 그것이 사악 빨려서 없어지고 바다가 나오면 짠 냄새가 확 나오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수록 인간은 감각에 엄청난 속도로 끌리면서 정신은 이 안에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세계를 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같은 것을 초창기에 한 번 체험해 봤는데 직관적으로 너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는 자아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 현상들을 도외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영화 어벤져스를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비평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됩니다. 흠집을 잡으라는 게 아니라 어떤 정신 속에서 영화의 무엇이 현대인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기재들을 전체적으로 찾아내고 비평하면서 감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코드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부터 외부에 사물들에 대한 감각을 전달해 주는 육체의 기능을 포함해서 영혼 전체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의식하는 자기로서 기능하는 총체적 실체를 자아라고 부르는데 이 자아를 움직이는 중심부가 사람의 마음이다. 인간은 영혼의 경향성과 힘을 가지고 태어나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도 그와 합치된 경향과 성향들을 가지게 되지만 인간은 마음을 통하여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서 마치 자신이 미완성인 것처럼 감응과 변향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을 형성해 간다.
나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은 애성(愛性)적 존재로 태어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왜 미워하느냐? 미움은 사랑의 이면입니다. 증오는 사랑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완전히 다른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증오하게 되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이글이글 끓는 분노로 증오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이코패스가 있다면 자신의 피해의식들을 사람에게 투영해서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것이지 결코 사랑과 증오는 다른 감정이 아니라 같은 감정입니다.
마치 자연의 만물들이 자신의 환경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적응해 가듯이 인간도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감응(感應)하고 변양(變樣)해 가면서 양상을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영어로 mode입니다. 끊임없이 모드를 바꾸어가면서 자신이 외부에 형성되고 외부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도록 허락을 하면서 서로 상호 소통하면서 인간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삼각형을 이야기하라고 그럴 때 본성적으로 태어나지만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와 마지막으로 어떤 환경에 놓였느냐 이 세 가지 선이 이어져서 한 사람의 성품의 삼각형을 만드는 것입니다. 본성은 움직이지 않지만 두 개의 선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수많은 각도의 삼각형을 만들어 냅니다. 환경에 자기를 노출할 때 그냥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사람과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 것은 이런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질서를 이해하게 하시고 구현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일을 위해 인간이 자기의 지성적 영혼 안에 있는 객관적 도덕가치의 질서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도덕의 가치들은 다음 세 가지 근거에 의해 인간 지성 속에서 이해되며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도덕적 질서를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가진 건 인간밖에 없습니다. 조교. 전요셉 전도사님한테 부탁해서 다음시간에 비디오를 하나 보여 달라고 그러세요. 우리교회에서 내가 찾아내서 멘트를 써서 만든 것인데 사자를 보여 달라고 하세요. 내가 다음 주에 보여 줄께요. 동물들도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알아봅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동물의 그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종합적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물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는 주인에게 버림을 받고도 주인이 자기를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하고 거기서 기다리면 주인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감동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판단이 종합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에는 개를 버리는 사람을 욕을 했는데 요새 개를 길러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쬐끔한 말티즈가 우리 가족의 온갖 사랑을 다 받았는데 최근에 두 사람을 물어서 인사사고를 냈습니다. 한 사람한테는 말로 사과를 해서 끝났고 한 사람한테는 치료비를 물어줘야 했습니다. 개가 계속해서 사람을 물 때 나는 과연 이 개와의 관계를 이 개가 죽을 때까지 약 15년 동안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아직은 포기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얘를 어떻게 심리치료를 해 볼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개를 기르는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지 않아서 상당한 책임성이 뒤따른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개나 모든 짐승들은 본능에 의해서 행동하면서 본능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모릅니다. 예를 들면 어미가 자식에게 자기가 다 말라 가면서도 젖을 먹이지만 그 의미를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행동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생각이 종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자기를 버렸는데도 주인은 나를 잃어 버렸을 거야.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면 반드시 올 거야. 이렇게 하는 생각이 어떻게 보면 순박하고 인간이 본 받을만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팩트가 아닙니다. 훨씬 더 복합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니까 인간이 보통 복잡한 동물이지 않겠습니까?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스의 작가인 플루타르크(Plutarch)가 영웅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인간에게서 제일 행복한 것은 안 태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태어난 인간에게 그래도 행복이 있는 것은 빨리 죽는 것이다. 그런 대철학자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무게가 얼마나 컸으면 그런 이야기를 했겠느냐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생의 무게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의 적재정량을 늘려가야 합니다. 그것을 못 하면 인생이 안 풀리면 안 풀려서 불행해지고 승리나 이런 애들처럼 잘 풀리면 사회적인 지위와 성공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인간은 불행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공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의 지성적 영혼 안에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도덕 가치의 질서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도덕의 가치들은 다음 세 가지 근거에 의하여 인간 지성 속에 이해되며 이로써 인간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의 지성이다. 인간은 처음 창조 되었을 때 두 가지 방식으로 사물과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믿음과 이성을 통한 것이었다. 믿음에 의해 초자연적인 존재인 하나님과 사실들을 직관함으로 깨닫고 이성의 추론으로 사물들의 관계와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이로써 우주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질서들을 파악하게 되고 거기서 나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의 의미들을 찾아가게 된다.
둘째로 객관적인 진리다. 이 진리는 질서를 통해 인간에게 파악된다. 진리를 전달해주는 피조세계의 질서는 둘로 나뉜다. 자연적 질서는 자연과학의 진리를 전달해주고 도덕적 질서는 윤리적질서의 가치를 전달해 줌으로 영혼과 육체 안에서 인간은 총체적으로 진리를 향하여 살 수 있는 존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진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탁월한 힘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거보다 더 탁월한 힘이 없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지 않으면서 인간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춤으로써 사물들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자신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에 의한 감화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굴복하고 나면 그 진리를 모를 때에 내가 생각했던 사물의 우선순위와 진리를 알고 난 후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물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바뀐 대로 살지 않으면 온 몸으로 진리를 거스르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기가 그 진리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무지, 편견, 오류, 교만, 착각 흔히 이야기해서 그것을 표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젊어서부터 진리를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전기를 많이 읽으세요. 특히 기독교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여러분 자신이 자기를 부유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존재다. 인간이 영혼으로 하나님을 보고 마음 안에서 사랑한다. 이러한 객관적인 도덕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자아는 이런 작용을 하도록 부여된 것이다.
자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마음대로 살기에는 이 자아가 굉장히 불편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신나는 영상을 보고 끝없는 먹방을 해도 인간의 허무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습니다. 결국은 자아는 그것으로서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아의 배고픔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팩트인지 확인은 안했는데 통신사업에 종사하는 SK, LG, 삼성 그룹의 손자 손녀들은 절대로 이런 기기를 사용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실리콘밸리에서도 사실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종사하고 있는 통신기술업자들의 집안을 조사해보니까 자신들은 만들어내고 자녀들에게 절대 못쓰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찾아가는데 심각한 방해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50살이 된 사람의 기도제목이 올라 왔는데 핸드폰을 절제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나이든 사람에게도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져야 합니다. 절대 결혼할 때 자매들이 피해야 될 남자들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너 아니면 죽겠다. 그런 남자는 피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피해야 될 사람이 또 하나 더 있는데 머리에 생각하는 게 없는 남자들하고 만나는 것은 재앙입니다. 차라리 혼자 살고 말지 생각이 없는 남자들하고 결혼하면 안 됩니다.
자아를 움직일 뿐 아니라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 인간이니 사람됨이 마음에 달렸다. 자아란 그 근간이 영혼의 기억이며 기억의 무수한 넘나듬과 광활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의 다대함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 안에서 일어나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도 결코 좁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신비한 것입니까? 이게 무게가 약 60-70kg 밖에 안 되고 부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요? 딱 집어넣으면 인간의 크기가 아마도 1세제곱미터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인간이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도 모자라지 않는 기억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벌써 한 3년 정도 됐나 일본의 공각기동대가 한창 히트를 쳤고 할리우드에서 영화까지 나왔습니다. 할리우드판은 원래 본판하고는 많이 다른데 스칼렛 요한슨이 나와서 중성적인 연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 뒤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에이 씨 도대체 뭐야.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영화를 보고 우리 집사람하고 나오면서 얘기했습니다. “여보. 이 영화 본 사람 중에 95프로 정도는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어.” 저는 신학자로서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하나님을 깊이 찬송했던 게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얘기하는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이나 이런 거를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인간에 대한 한 설명을 나는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신하고 심지어 기계가 심겨지고 해서 모코토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고유한 기억도 알고 보면 모코토의 것이 아니라 회사가 집어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코토는 왜 모코토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에 대한 대답을 나는 영혼의 존재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계에 시사해주는 것이 많은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베스트셀러 작품이 나오면 가서 그것을 보고 팝콘을 먹으면서 아! 재미있다. 라고만 하지 말고 기독교 지성은 객관적으로 보면서 그것을 비평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됩니다. 그런 이야기는 인터넷에 잘 안 나옵니다. 자기가 책을 읽으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현대의 정신들이 스며들어 있고 나는 어떤 목소리에 반응해야 하고 어떤 목소리에 반응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치들을 그 안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를 정말 주체가 되게 만듭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때 어버이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크레파스하고 뭘 가져오라고 해서 색종이를 가지고 카네이션을 만들라고 그럽니다. 카네이션을 만들어가지고 와서 자랑스럽게 엄마 가슴에 턱 하고 달아줬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너무 촌스러운 것입니다. 정말 예쁘게 공장에서 만든 카네이션이 예쁘고 생화가 예쁘지 초등학교 학생들이 삐뚤빼뚤하게 만든 것이 예쁩니까? 그런데 그것을 엄마 가슴에 달고 나올 때의 뿌듯함은 자기가 했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똑같습니다. 남이 준 인생의 답안지를 베끼면서 사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답안을 써내려 가야합니다. 거기에서 인간이 기쁨을 느끼는 연습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빛깔만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뭐 하는 사람들 많이 있어도 그것과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자신이 주체로서 살아가는 주체성의 기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끝나면서 여러분들에게 그림을 그려 드린 아나바시스(anabasis)와 카타바시스(katabasis)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도 결국 아나바시스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아나바시스한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카타바시스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대답은 결국 아나바시스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나니까 진정한 자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슬픔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행복하게 사느니 차라리 그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면서 마지막까지도 내 자신이 그 사람들에게 참된 인간이 무엇인가를 외치는 소리가 되면서 자기가 죽고 싶은 그것에서 오히려 자아를 실현하는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여전히 고뇌하고 괴롭고 때로는 죽음을 생각해야 될 정도로 아픈 것이지만 정말 복된 것입니다. 진짜 걱정이 없는 돼지가 되기 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이라고 물어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주님이 그렇게 혹시 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중히 사양하겠다. 인생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태어나야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평안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조용한 삶을 살고 싶으냐 아니면 천재로 태어나서 요동치면서 고통 받는 인생을 살고 싶냐 라고 물어서 저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라고 했습니다. 의미를 찾으며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찾지 않는 의미를 찾으면서 괴로워할지라도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입니다. 그 속에서 인생은 빛나는 것입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여기서 졸업하고 어디 공무원 시험이라도 볼까? 어느 회사에 들어가서 밥벌이라도 할까? 현실적으로 이런 것을 해야 되겠지만 그것은 인생의 양상입니다. 그것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결혼을 할까 말까? 혼자 살 수도 있고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양상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에 접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늘 얘기하는데 내 경험에 의하면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은 같이 살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혼자 살아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나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양상 말고 본질에 접근해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될 것이냐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된 가치요 의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