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마음, 하나님과 만나는 곳
녹취자: 조경훈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이 만나는 곳이다. 성령과 본성의 작용에 만남이며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며 여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인간은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나누게 됩니다. 또한 죄 된 본성과 은혜의 성령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이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내가 피할 수 있는 사람이면 괜찮은데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죽어도 피할 수가 없는 엄마나 아빠라면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어제 책을 읽다보니까 2015년도에 제가 책을 썼는데 그 때 28개월 된 아이를 가지고 혼자 사는 아빠가 컴퓨터 게임을 하는데 아이가 방해를 하니까 아이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내일 때, 또 남편일 때, 그런 사람의 아들일 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이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엄마면 안 보고 극단적인 경우지만 이민을 가버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를 해칠 수는 없지만 트롯 가수 장윤정이 같은 경우는 엄마하고 연락 딱 끊고 의절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기일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는 자기와 못 헤어집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내가 나를 피하여 어디로 도망을 가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심각한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이 사람은 사이코패스 같이 남과 소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든지, 두 번째는 신체에 이상이 오던지, 세 번째는 공황장애 같은 것이 걸리든지 합니다. 공황장애를 앓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0명만 여러분들을 집단적으로 괴롭히면 제가 보기엔 충분히 정신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완전히 이상한 사람은 아닌데 자기를 조금 덜 사랑해 줬거나 힘들게 했다는 이유 때문에 마음이 거의 불구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문제 있는 사람이 본인일 경우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심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미 형성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더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다행히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안정된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마음을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안 돌봐 줍니다. 목회를 해도 그 사람의 마음까지 다 돌봐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많은 부분은 나도 말 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왜 내가 마음을 다 통할 수 없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무 너무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완전히 마음을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상처를 너무 많이 받습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듯이 쏟아 놔도 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은 다 이해를 못합니다. 자기도 자기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부모 자식 지간에도,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도 자신의 힘든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방식으로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원래 잘 소통이 안 된다고 말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을 거의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관계를 함부로 깨뜨리지 않을 것이고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마음공부는 휴학을 하고라도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동의하십니까?
A. 마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거기서 인간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왜 그럴까요? 강의시간에도 얘기 했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것이 무엇 때문이고, 앞으로 내 인생에 끝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은 여러분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마음 자신이 자기를 봄으로써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의 존재의 위치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이 확인되는 존재이다. 하나님 홀로 인간의 마음을 아시며, 인간 또한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니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 자체이시니 시간 안에 묶인 우리의 육체의 감각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오직 마음을 통하여 그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시간에 묶이면서 지상의 사물을 관측할 뿐 아니라 또한 시간에 묶이지 않은 채 사물을 관측할 수 있는 능력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마음에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하나님을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영혼의 고향인 영원을 아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마음 안에서 이 두 가지 작용이 시간 안에서 묶인 사물을 한 지성 안에서 바라보는 작용과 그 사물들을 한시성을 초월해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물을 보시는 것처럼 유사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작용이 공존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시간 안에서 변하는 사물을 관측하는 것이다. 자기 밖에 있는 현재적 사물을 지각할 때 일어나는 마음에 작용이다. 일상적으로 사물을 볼 때는 다 시간 안에서 관측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만나면 모르겠는데 10년 지나서 만나면 “너 왜 이렇게 늙었니?”하고 얘기를 합니다.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너 어찌 그렇게 이뻐졌니?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정말 이상했는데. 엄마 아빠가 참 고생했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밖에 있는 사물들은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도 존재했지만 그것은 자신에 관측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박막 같은 현재 속에서 그 사물을 인식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A, A’ A2’로 변해 갑니다. 이것은 T1, T2 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것은 이런 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께가 없습니다. 현재라고 말할 때 이미 현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상적인 것입니다. 얇은 두께의 무한소의 막을 통과할 때 그것을 현재라는 기준으로 상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재라고 얘기해도 현재라고 발음하는 순간에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문제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마음을 공부하다 보면 철학, 심리학, 역사, 과학, 최근에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뇌 과학 같은 모든 것들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 관한 책이 무지 무지하게 많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중에 70프로 정도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별 의미가 없는 책입니다. 거기서 진짜 좋은 책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신기한 게 우리나라 사람이 마음에 대해서 쓴 책은 별로 되지 않고, 있긴 있지만 극히 드물고, 어떤 것은 너무 학술적이어서 읽을 수 없고, 어떤 것들은 텔레비전 아침마당에 나와서 이야기할 정도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어서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이렇게 이행을 하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정지된 현재를 가지고 재는 게 아니라 A와 A‘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가지고 시간을 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소모 됐는가를 봅니다. 물론 수정 같은 것들은 오히려 형성되는 것도 있습니다. 마모되는 것도 있고 형성되는 것도 있는데 어쨌든지 간에 어떤 사물은 시간 안에서 동일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이것들이 없는 데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와해되어서 없는 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물들의 본성입니다. 무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침 시간에 존재와 존재자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존재자는 있지만 그 존재자는 계속 변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변천해 가는 것입니다. 그 변화를 보면서 우리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들도 느낄 것입니다. 어린 애들을 보다가 몇 년 만에 보면 확 큰 게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야! 얘 진짜 많이 컸네.’ 하는데 그 아이는 속으로 여러분을 보면서 ‘진짜 많이 늙었네.’ 그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그런 식으로 관측이 되는 것입니다.
사물의 움직임과 작용들은 아주 얇은 막인 박막과 같은 현재 속에서 관측된 그 사물에 기억들은 과거가 되어 인간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과거가 되어서 자기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어떤 것들은 완전히 잊히고 어떤 것들은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현재적 사물을 보면서 박막의 시간의 현재 속에서 사물들은 보지만 그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을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되는 것으로 본다.
어른들이 여러분을 봤을 때 단절된 것으로 보지 않고 ‘어릴 땐 조그마했는데 이렇게 컸네. 어렸을 때는 예뻤는데 지금은 별로네. 옛날에는 공부를 못 했는데 지금은 잘하네. 이 대학을 다니다가 저 대학으로 옮겼네.’라는 식으로 항상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그렇게 봅니다.
단, 그 연속은 인간의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것이니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물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며 현재를 보게 됨으로써 박막의 현재 속에서 대면하는 사물들의 움직임이 관측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 속에서 현재의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단면적으로 그것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무수한 기억을 현재 속에 불러들임으로써 현재를 보는 것이며 그 현재는 그런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과거의 기억으로 회귀되며 그러한 인식들은 언젠가 그 사물들을 대면하거나 혹은 상상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기억 속에 보전된다.
둘째로 시간 속에 묶이지 않은 채 시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서 나타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며 현재를 거쳐 과거로 돌아가고 기억되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상념은 우리의 정신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서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과거로 회귀하여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모든 사물들은 순서와 상관없이 하나의 평면에 인과관계로 자리할 뿐이다.
우리는 10년 전에 일어난 일은 1년 전에 일과 인과관계로 해석하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10년 전에 우리 아빠가 망했기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100퍼센트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인과관계를 가지고 생각합니다. 신기한 게 보통 네 살 때부터 기억을 갖는다고 보는데 요즘 연구에 의하면 젖 먹는 때에도 기억이 남아있다고 봅니다. 그 기억을 소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찰칵하고 찍힌 것처럼 남아있는데 소환이 안 되다가 똑같은 상황을 만나면 소환될 수 있다고 까지 보고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거의 완벽하게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 깨어났을 때에 가족들이 자기 앞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호흡기를 낀 채 연명을 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면 저 집은 누가 갖는 거야?’와 같은 대화까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신기한 것은 최근에 들어간 것이 가장 강력하게 기억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하고 상관이 없고 인상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강력하고 충격적인 인상을 받았을 때는 수 십 년의 세월에도 잊혀 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받아서 그것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놓고 다 알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나한테 친절하게 해주고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주변에서 그 사람을 흉 볼 때에도 ‘아니야.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라고 얘기해 줍니다. 인생의 자산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여러분들을 참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지위 고하와 상관없이 사랑으로 대하고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이 남게 됩니다.
그러나 초시간적 인식의 성격이 과거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현재와 미래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간에게 이러한 인식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마음 안에서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과 만날 때 그 분을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영원 안에 거하심으로 초시간적인 존재가 인간의 마음에 현재적으로 지각될 수 있다. 인간의 영혼과 마음은 이처럼 위대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존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귀에 소리치지 아니하시고 마음에 말씀하시며 그리하여 지성으로서 당신을 알게 하시고 또한 당신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거셔서 지성을 통해서 우리 마음 전체에 영향을 미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성은 하나님이 내미는 손을 붙드는 나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포함하는 지성입니다. 만약에 믿음과 지성이 없으면 우리는 계속 하나님과 어긋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성을 길러야합니다. 공부만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영혼과 마음은 이처럼 위대하다. 인간은 비록 육체에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부를지라도 육체로 말하지 아니하니 육체의 소리는 공간을 돌아올지라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말한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실 때 알아보는 곳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는 곳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 마음,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대면하는 곳인 마음을 거룩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적합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자의 중요한 의무이며 이것 없이는 신자의 어떤 거룩한 삶도 없다. 이것은 오직 진리와 성령으로써 이루어진다.
B. 마음의 자유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 오시는 곳이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 마음 안에서 성령님의 작용과 움직임을 지각할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는 것을 지각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자아도 인간 본성 안에서 자기를 구현하고 성령께서도 우리의 본성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의 작용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성령께서 인간의 본성의 작용하는 곳인 마음의 작용하시고 통치하신다면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자유로운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의 독특성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본성 안에 갈등 없이 작용하는 것이니 본래 인간의 영혼은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성령은 그런 점에서 인간 영혼의 본성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이 인간의 마음에 오실 때 마치 당신 홀로 계신 것처럼 자유롭게 작용하시며 인간의 영혼은 성령께서 오실 때 그 분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 홀로 있는 것처럼 자유롭게 작용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 자체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당신과 가장 닮은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들은 비유인데, 예를 들어서 어떤 두 가지 물체를 한 공간에 둘 경우에는 A물체가 있는것 만큼 B물체가 공간을 점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물체가 확장하고자 한다면 방해가 될 것입니다. 두 물체는 접촉면에서 대립을 할 것입니다. 성령과 인간성은 그런 식으로 점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점유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성령에 자유를 구속하지 않고 성령도 인간의 마음을 속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얘기할 때 함부로 ‘하나님이 강제로’ 그런 표현을 쓰면 안 됩니다. 그것은 문학적으로는 사용이 가능하지만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만약에 물이 있고 잉크가 있는데 잉크를 물에 붓습니다. 그러면 잉크는 물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립니까? 액체인 잉크를 물에다 부으면 둘은 섞여있게 됩니다. 섞여있는데 그 안에서 잉크는 물 때문에 부자유한 존재가 아닙니다. 잉크는 잉크 자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물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물은 잉크가 들어왔다고 해서 속박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함께 공존하면서 물은 물대로 자신의 성분을 보존하고 잉크는 잉크대로 자신의 성분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것 이 둘 사이에 놀라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자유를 갔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 그리고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자유는 언제든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활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떠나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 그런데 10시간 일하고 1시간만 그렇게 할 수 있어’라고 한다면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마음먹을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유의 모상이다.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과 누리는 자유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유 속에 계시나 인간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존재와 관련된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면서 속박 받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의지의 속박이라는 책을 씁니다. 마르틴 루터의 3대 소책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의지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유가 없는 게 노예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참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자유를 되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유를 되찾게 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영혼과 마음에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간의 진정한 삶은 마음에서 이루어진 자유를 자신이 사는 사회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말하자면 인간의 이상인 것입니다.
동북아 철학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있습니다. 수양할 때 수(修)자입니다. 자기를 수련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라는 유교의 이상입니다. 이것은 수기안인(修己安人) 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굉장히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은 다스린다는 것인데 높은 지위에서 폭군이 하는 것처럼 마음 가는 데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치(治)가 아니고 폭(暴)입니다. ‘치’는 ‘치’를 통해서 나름대로 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치는 결국 안(安)입니다. 각 사람들은 가장 편안한 곳에 있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인간 안에 있는 자유를 인간 바깥에서도 자유가 구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속에서 살면서 이 사람의 자유가 저 사람의 자유를 폭행하거나 폭압하는 일이 없는 조화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사회가 유교에서 바라보는 인간관입니다. 수기는 자기 자신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어야지 수련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인간의 참된 도리라는 것이 있어야지 수련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인간들이 모여서 만들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나라는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사는 그 이상과 분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에도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게 됐고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질료를 사용하셔서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존재의 시작부터 하나님을 의존하고 존재를 지속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땅에 있는 질료를 통해 형성됐고 이것들의 창조주도 하나님이시다. 나아가서 인간의 영혼 또한 영원한 질료로서 창조되었으며 그것의 창조주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물질의 세계에 자신의 덕을 입히심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의 육체도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주님에 덕을 입음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인간만 붙들고 계신 게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붙들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 말하고 싶은 것이 아주 값어치가 없는 것도 하나님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원저자인 하나님 덕을 입음으로 존재하며 작용한다. 전 존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 역시 이러한 의존의 관계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당신 아닌 피조물로 창조하신 것과 동시에 당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 안에서밖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창조하셨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 밖에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만물을 당신에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아름다움이다. 하나님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존재의 원리로 삼는 모든 사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나무나 해나 달이나 이런 모든 것들인 존재자는 존재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존재의 원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과 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아름다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사탄도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것이 모든 것이 아름답다면 사탄도 아름답습니까? 사탄도 선합니까? 거기에 대한 정답은 자연적으로는 선하고 아름답지만 도덕적으로는 선하고 아름답지 않고 악하고 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사탄도 천사였습니다. 천사들이 결국은 반역을 일으키면서 마귀가 되고 귀신들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본래 주신 선을 잃어버리고 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받는 아들이었는데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탕자처럼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를 선하다고 말 안하고 아름답다고도 말 안합니다. 오랜 방탕한 생활 끝에 온갖 병이 걸리고 추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타락으로 변형된 모습이고 원래 그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 당연히 선하고 아름다운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회복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고 이유인 것입니다.
선과 미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것입니까?(학생 질문) 그렇습니다. 미는 beauty입니다. 미의 문제가 인간의 행, 불행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에서 보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있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웁니다. 난 엄청나게 나쁜 죄라고 생각 안합니다. 충격을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청소년들의 흡연을 금지하는 근거가 뭘까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이 담배 피는 것을 권하는 것은 아닌데 도덕적으로 나무랄 문제가 아니고 건강보건학적으로 설득을 해서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린애들이 커피 먹으려고 하면 부모들이 뺐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애들이 담배를 피다보면 술을 먹고 싶고 그것도 자극이 모자라서 마약에 손을 대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사람들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마약이 악한 것이겠습니까? 양귀비가 뭐를 했기에 악하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추출한 물질을 의약품으로 잘 사용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주 나쁜 용도로 사람들이 활용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속에 그것을 집어넣고 중독을 시켜서 돈을 빼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질이 좋은 마약이 생산되는 곳이 북한인거 아십니까?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것 중에서 30프로 내지 40프로가 북한산입니다. 북한산은 너무 좋아서 가격을 흥정을 안 한다고 합니다. 국가 전체가 양질의 마약을 생산하기 위해서 국가 기술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1년에 20톤 정도를 만든다고 합니다. 초등학생들까지 싸게 길거리에서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 탈북자들 중에서 10년 전에는 경험한 사람이 10프로 정도 밖에 안됐는데 지금은 30프로 정도의 통계가 나온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꽉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게임은 사실 좋은 게 아닙니다. 2022년부터 게임이 질병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열심히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살면 해복해져야 되는데 행복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만 그것을 표상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판타지입니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데 엄청난 것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쾌락에 빠지게 되면 진짜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어느 자매가 있는데 가정에 너무 헌신적입니다. 어머니가 늘 자연산 소재로 조미료를 만들고 일체의 인공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부에게 엄청난 헌신이 필요합니다. 다시다 같은 것을 집에서 만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실 것입니다. 엄마한테 배워서 자기 자식들한테도 그렇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맛이 없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거기다가 화학조미료를 살짝 집어넣으면 와 맛있다. 오늘 왜 이렇게 맛있어. 그래서 자기가 포기하게 됐다고 얘기를 합니다. 일단 그 맛에 중독이 되고나면 맛이 없어서 못 먹는 것입니다.
결국은 진리가 주는 정신이 주는 고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을 못할 때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