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있는 복음
(201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1년
소망이 있는 복음 2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소망이 있는 복음 3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1. 큰 풍랑이 일어날 때(마14:22-27) 2011.8.14 온가족 여름수련회 저녁 1
2. 예수께서 붙드실 때(마14:28-32)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저녁 12
3. 폭풍 속에서 말씀하실 때(행27:15-25)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저녁 24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4. 염려하지 말라(마6:31-33)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36
5. 용서의 비밀(마6:14-15)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43
소망이 있는 복음 1
소망이 있는 복음 2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소망이 있는 복음 3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1.큰 풍랑이 일어날 때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 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2-27)
I. 본문 해설
II.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예수님
- 오병이어로 먹이신 무리를 돌보심
-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오르심
III. 홀로 떠나간 제자들
A. 풍랑으로 고생함
- 주님이 보내신 길인데도 고난 있음
- 주님 없이 홀로 행하는 고난을 알게 하심
- 주님을 알고 의지하게 하심
B.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 놀라서 소리 지르는 제자들
- 그리스도께 대한 무지와 시험에 듦
C.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 예수 그리스도, 능력의 주
- 그리스도를 의지함
IV. 결 론
2.예수께서 붙드실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28-33)
I. 본문 해설
II. 폭풍 속에서 빛나던 믿음
A. 말씀에 대한 신뢰
- 명하시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 폭풍 속에서 믿음만이 빛남
B.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열심
III. 예수께서 붙드실 때
A. 깊은 물에 빠질 때
B. 나를 구원하소서
- 의심함: 믿음과 의심의 공존
- 실패 속에서 주님을 붙듦
- 붙드시는 예수님
C.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
- 풍랑이 잔잔해짐
IV. 결 론
3.폭풍 속에서 말씀하실 때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 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 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15-25)
I. 본문의 배경
II. 폭풍 속에서 몸부림칠 때
- 선체를 둘러 감고 끌려감
- 화물을 바다에 버림
- 배의 기구까지 버림
III. 구원의 여망이 사라짐
- 여러 날 폭풍이 계속됨
- 풍랑이 그대로 있음
- 풍랑 속에서 굶주림
IV. 폭풍 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A. 폭풍 속에서 인도자가 됨
- 과거를 반성하게 함
- 안심하도록 평안을 줌
B. 폭풍 속에서 말씀하실 때
- 폭풍 속의 주인공
- 더 큰 섭리 속에 있는 사람
-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V. 결 론
소망이 있는 복음 1
소망이 있는 복음 2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소망이 있는 복음 3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2011.8.15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2011.8.16 온가족 여름수련회 새벽
1.큰 풍랑이 일어날 때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2-27)
녹취자 : 김은정
1.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내용입니다. 바로 그 앞에는 유명한 예수님께서 5섯개의 보리떡과 2개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크게 베푸셔서 굶주린 사람들을 모두 먹이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이런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백성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런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고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서 갈릴리 건너편으로 보내시고자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예수님이 서두르시듯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무리를 보내셨다고 나옵니다.
II.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예수님
마태복음에서는 왜 예수님이 이런 일을 베푸셨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만 요한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오병이어의 큰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황급히 배를 태워 보내시고 당신은 한적한 곳으로 홀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체의 욕심이 없이 오직 불쌍한 사람들을 마음 아파하시며 놀라운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그 백성들을 얼마나 가엾이 여기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예전에는 본적도 없고 단지 들은 적만 있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당시 사람들이 누리는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성품이 예전에는 선지자들의 예언이나 율법서를 통해 그리고 성문서를 통해 겨우 읽힐 뿐이었고 때때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인하여 어렴풋이 하나님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며 불쌍한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의 성품, 무엇보다도 당신을 멀리 떠나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져미는 사랑을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고 또 그의 설교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을 매우 괴로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세상의 임금으로 온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영적 왕국의 통치주로써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귀의 일을 없이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혼잡스럽고 괴로운 시간을 벗어나 제자들과도 잠시 헤어지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과 그리고 불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III. 홀로 떠나간 제자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분부를 받잡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아마도 노를 저어서 갈릴리 이쪽 편에서 배가 출발하여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갈릴리 바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맥락에서 갈릴리 바다일 뿐이고 우리가 보기에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그것도 세계적인 큰 호수에 비하면 명함도 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 교인들과 함께 열린교회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그 성지순례에 요단강 코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과 함께 영상 45도 50도의 뜨거운 뙤약볕을 수백 미터를 걸어서 요단강으로 간다 그래서 갔습니다. 가서 앉아보니까 사람들이 요단강 언제 가냐고 물어보는데 가이드가 말하는 게 "그 옆에 있는 게 요단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니까 제가 십대에는 한 30십미터만 여유를 주면 (제가 멀리 뛰기를 좀 했습니다.) 힘껏 뛰면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세상에 지저분한 흙탕물이 흐르지도 않고 그냥 고여 있는 또랑이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스케일입니다. 그래서 그저 밭이 넓은 것은 "평야"라고 부르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어서 모래밭이 좀 이어지는 것은 "광야"라고 부르고 동산은 "산"이라고 하고 그런 동산보다 조금 높은 것이 몇 개 붙어 있으면 "산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도랑은 "강"이고 호수는 "바다"였습니다. 그게 스케일이였습니다.
길이가 한 74킬로미터 정도 되고 폭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의 차이는 있지만 한 7-8킬로에서 십여킬로미터 되는 폭으로 되어있다고 얼핏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아주 특이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풍랑으로 고생했다고 되어있는데 그 앞에는 우리가 웃으면서 얘기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 높은 산맥이 솟아있습니다. 그 지형적 특성 때문에 계절풍이 부는데 그 계절풍이 불면 이 산을 타고 더운 해안 공기가 산맥으로 올라와서 산맥으로 떨어질 때는 이게 고꾸라지듯이 휘돌면서 엄청난 바람이 분답니다. 원래에는 민물은 그렇게 큰 파도가 치는 법은 없는데 이런 독특한 지형으로 말미암아서 계절풍이 불면 지금도 갈릴리 호수가 약 2미터 내지 2.5미터의 큰 물결이 일어난답니다. 그게 수십만 톤의 배한테는 그까지 것 2미터가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 나무를 두드려서 만들었던 작은 배에게 높이 2-3미터의 파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강한 바람과 함께 풍랑이 일어날 때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는 깊이는 아주 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A. 풍랑으로 고생함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우리들이 이제껏 알고 있는 구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얘들아 너희들이 좀 고생스럽더라도 여기 계속 있으면서 나와 함께 복음 사역을 하자 그럴 때에 제자들이 힘들어서 도망을 몰래 갔는데 그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죽을 고생을 했다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근데 이것은 예수님이 너희들 먼저 빨리 가라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출발을 했는데 큰 풍랑이 일었고 그 풍랑이 일면서 죽도록 고생을 한 겁니다. 그 죽도록 고생을 한 증거가 뭐냐면 여기에 보면 수 리를 갔다고 했으니까 불과 몇 키로 못간 겁니다. 불과 몇 키로 못 갔는데 그 때가 언제드니 밤 4경이라 그랬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밤 4경이면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출발을 했는데 별로 가지도 못하고 풍랑에 휘말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계속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제자리를 맴돌면서 배가 밤새도록 고생을 한 것입니다. 자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라고 그러셔서 갔다 그런데 그것도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면 말이 되겠는데 바람이 불어서 큰 풍랑이 대적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로 가지도 못하고 제자리를 돌면서 밤새워서 죽을 위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제가 설명하고 있는 묘사를 느낄 수 있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딱 한번을 그 폭풍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설교하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덕족동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왔습니다. 그때는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배 올 시간인데 바다를 보니까 꽤 파도가 쳤습니다. 파도가 하얀 거품을 얼마나 내는지에 따라 그 풍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한 1미터 이상 파도가 치고 꽤 날씨가 불순한데 배는 주의보만 내리지 않으면 그냥 뜹니다. 그래서 탔습니다. 정말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배가 앞으로 잘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배나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한 1시간 반 2시간 쯤 중간을 더 갔는데 바다 한 복판에서 폭풍주의보가 떨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반 이상 왔으니까 그냥 인천으로 가면 될 것 같았는데 규칙에 배를 돌리게 되어있답니다. 배를 돌리고 가는데 이건 풍랑이니까 배를 돌리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미 그때 배에 탔던 사람은 다 넉 다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입고 가판으로 나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가판 이쪽에서 이쪽으로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쳤습니다. 그래서 배 밑창에 내려가서 모두 다 이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토하고 날 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이미 바다가 캄캄해 졌습니다. 그 캄캄한 바다에서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는데 어마어마한 파도가 넘어가고 배는 곧 뒤집힐 것처럼 요동을 치고 배를 모는 선장은 구명조끼 단단히 입고 튜브 붙들고 있으라고 그러니 '어린 나이에 장가도 못가보고 여기서 죽는구나' 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정말 너무 너무 무서웠습니다.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그것이라도 볼 텐데 캄캄한데서 요동치면서 이리저리 구르면서 배가 가는데 얼마를 더 가야되는지 아무리해도 바다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칠흙 같은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 상황보다 더 무서운 상황 왜 이 배는 뚜껑은 없었을 테니까 더 무서운 상황을 생생하게 겪기를 밤새도록 겪은 것입니다, 예수님 가라 그러셔서 순종하고 간 길에 왜 이렇게 큰 풍랑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까지 잘라놓고 보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되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을 뒤에서 앞으로 시간순서대로 보아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앞으로 뒤로 거꾸로 더듬어 봐야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의미가 밝혀지는 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하는 것은 순종을 하면 가는 길이 평탄하지만 불순종하면 인생의 풍랑을 만난다 라고 하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이 성경기사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이 큰 풍랑이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동행 안 한 것이 제자들 책임입니까? 예수님이 너희들끼리 가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말도 안 되는 것이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이 배에 함께 제자들과 타고 있을 때에도 큰 풍랑이 일어나서 제자들이 거의 죽게 되었더라고 되어있습니다. 거기서는 예수님이 주무셔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무신 게 우리 책임입니까?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순종하면 평안한 길이 주어지고 불순종하면 풍랑이 온다는 그 도덕규칙과 잘 맞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불순종과 죄 이런 것 때문에 풍랑이 온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 대목은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빛이 무엇인지를 알기위해서는 아이들을 어두움 속에 잠깐 놔두면 빛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게 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큰 풍랑으로 고생을 할 줄 알면서도 제자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큰 풍랑 속에서 고생을 함으로써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풍랑을 사용하셔서 하실 놀랍고 위대한 일들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시련과 고난을 만나고 풍랑을 만나는 대부분의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시간에 늘 이야기 하듯이 감히 여러분이 자신들이 고난을 당할 때 나는 흠 없고 의로운 사람이라서 욥과 같이 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되고 그것도 남이 해주거나 주님이 해주셔야지 본인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불순종과 고집, 우리의 죄, 또 과거에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많은 잘못들의 열매로 말미암아서 풍랑과 시련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련과 풍랑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획일적으로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이 번영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로, 신앙의 이치로 모두 설명되지 않듯이 또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오는 이 고난과 폭풍과 같은 시련도 그것만으로는 모두 그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루신 것처럼 우리를 더 깊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은혜의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이런 폭풍과 같은 시련을 사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 풍랑을 인하여 고생을 하던 이 제자들은 주님 없이 홀로 행하는 이 길이 최소한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얼마나 어렵고 두렵고 무서운 길인가 하는 것을 제자들이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풍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예수님 한 분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을 보면 왜 이런 폭풍과 환란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B.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바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고생한 것이 최소한 6시간 많으면 9시간 정도 고생을 했을 거라고 설명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정도까지는 인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가 보기엔 최소한 6시간 이상 아니면 최소한 9시간 가까이 즉시 풍랑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수 리를 갔는데 그 다음부터 풍랑이 시작이 되어서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고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쨌든 그들은 크게 고생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 거기서 해치고 살아나올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캄캄한 밤바다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밤 4경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잔잔한 바다 위를 걸어오셨더라면 그 모습을 우리들이 분명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고 낮이라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배가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침몰할 위협을 느끼는 큰 파도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놀라 비명을 지르게 되었고 이것은 틀림없이 유령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유령은 아마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려는 그런 종류의 죽음의 유령이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도대체 예수님이 왜 이런 이상한 행동으로 제자들을 풍랑을 만나 맘고생을 하고 있는 몸 고생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큰 충격과 혼란을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풍랑이 일어나는 것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도 틀림없이 보여줬을 것이고 그리고 그 바람과 폭풍의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셨다면 예수님이 아마 그 바다를 향하여 그 언덕에서 명령하셨더라면 어찌 그 풍랑이 멈추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풍랑을 그대로 내버려 두신 채 그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요동치는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그 일은 또 예수님에게 얼마나 새로운 일이었겠습니까? 왜 이렇게 예수님은 이상한 기이한 행동으로 그것도 무리를 걸어오셔도 좋은데 일단은 풍랑을 먿게 하시고 제자들이 잔잔한 바다에서 숨을 돌리게 하신 후 점잖게 걸어오셔서 바다가 잔잔하였느냐? 예. 내가 그리하였느니라 왜 이렇게 말씀하지 얼마나 멋있습니까? 왜 그러지 않으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마태복음 8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곤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만큼 항해하였을 때에 지금 이런 풍랑과 폭풍이 일게 되었을 때였고 그리고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보다 못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에게 어찌 그리 믿음이 없느냐 나무라시면서 바다야 잔잔하라 한마디 명령하셨고 예수님의 그 명령이 바다는 즉시 평안하여 졌습니다. 그 뒷얘기를 기록한 것이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분이 누구시기에 바다도 명하여 잔잔하게 하는고 그리고 끝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만족스러운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큰 풍랑이 일어 도저히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깨질 위기에 놓여있는 제자들을 티끌만큼도 돕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물 위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이 죽을 것처럼 고통을 받는 파도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유령이라고 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무지가 얼마나 시험에 들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잠시 전 제자들은 주님이 축사하시는 기도 한마디에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보리떡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난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먹이시는 착한 예수님을 뛰어넘어서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 그래서 주님이 당신의 큰 왕권을 굶주리고 배고프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운행하고 계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서 항상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초월적인 신앙과 내재적인 신앙의 균형입니다. 내재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늘 높이 계시고 이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분이라고 할지라도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는 것 이외에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 이 세상은 내 힘대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신앙이 구체적으로 설 자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예수님을 믿고 정말 놀란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스케일이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데도 우리의 시시콜콜한 인생사에 모두 간섭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그것이 모두 미신처럼 느껴졌는데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신앙을 갖게 되고 나니까 그것이 그렇게 커다란 감격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격으로 내 마음에 밀려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우리를 소심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세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사랑하게 되면 여성성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되면 애지중지하게 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그 관계를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만약에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아주 뛰어나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멀리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을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하고 이렇게 살아간다면 사실 그것은 무신론적 삶 아닙니까? 사상 속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런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아프리카 대륙이 기근에 시달려 계시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남미가 복음화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시고 예수 재림하시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시지만 여러분이 오늘 수련회 참석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끝나고 집에 갈 것인지 계속 있을 것인지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실입니다.
지금도 수련회 때가 되면 항상 생각이 납니다. 제가 고등부 사역할 땐데 함께 수련회를 못 오고 자매 하나가 뒤에 쳐졌습니다. 그러다 밤중에 자기 혼자 온다고 시외버스를 탔는데 약도를 자세히 그려서 기사한테 보이니까 여기서 내리라는 겁니다. 덜렁하고 내렸는데 캄캄한 산길 그리고 30분에 한 대오는 지방도로 밖이었고 그리고 자기혼자 똑 떨어진 것입니다. 이 길로 오면 기도원이 나오는 것은 분명한데 몇 미터 간다는 푯말도 없고 전화를 해도 전화도 안 되고 핸드폰도 없던 때입니다. 집회 들어가서 전화 받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서 가만히 서서 30분이면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오면 집에 가면 됩니다. 그럴까? 찾아갈까?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 자매가 고등학생이었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밤길에 보완등 하나도 없는데 근데 마음속에서 나는 이 수련회에서 주님을 만나야 된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 밤길에 걸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특별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나도 그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근데 한 500미터쯤 떨어졌었나요? 캄캄한 숲길 후레쉬도 안 가져 왔는데 거기를 걸어갔는데 저기 들어가고 나니까 거기서 불길이 보이더랍니다. 들어오자마자 펑펑 우는 겁니다. 무서워서 앉자마자 우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설교가 시작하고 끝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매 하나에게 은혜를 물 붓듯 부어 주시는 겁니다. 방언을 하고 아주 환희에 빠졌습니다. 그것을 보니 하나님이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심이 없으셨겠습니까?
저는 글을 쓰면서도 그것을 굉장히 많이 경험했습니다. 어떤 때는 짧은 논문을 하나 쓰는데도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주시는 겁니다. 그때는 타이핑도 잘 쳐집니다. 쳐 놓은 것이 다 날아갔다 하면 마음속으로 이게 마귀에 역사구나 다시 더 잘 써야지 하고 타이핑합니다. 관심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에 그런게 관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냥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생각 없이 살다고 말씀을 듣고 옷깃을 여미며 아니야 이렇게 살면 안돼 하나님 제가 요새 너무 막 살았지요? 그리고 하루라도 똑바로 살아야지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순종하면 그날 저녁에는 기도를 하면 기도가 잘 됩니다.
(찬양)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든지 새로운 직장을 얻든지 심지어는 이사할 때에도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좋은 집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집이 안 팔릴 때가 있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겁니다. 요번에 우면산이 무너지면서 아파트를 덥쳤잖습니까? 거기에 우리 김 장로가 살았던 그 동입니다. 근데 기도하고 작년인가 제 작년에 이사왔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사하는 것 하나까지도 모두 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보이시고 다 그런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이게 좋은 신앙인데 근데 그런 것에만 온통 마음을 뺏기고 살다보면 하나님이 뒷집 아저씨같이 아주 쉬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라 하나님 꼭 그래야 되겠습니까? 내 뜻도 좀 들어보십시오 흥정도 하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초월적인 신앙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의 아주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사소한 일에도 당신의 뜻을 가지고 내 삶에 개입하시지만 항상 그것과 함께 균형을 이루면서 뭘 생각해야 되냐면 이 예수님은 뒷집 아저씨 같은 분이 아니라 그리고 늘 만날 수 있는 우리교회의 목사님 같은 분이 아니라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래서 하늘 높이 계셔서 이 모든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통치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별들 가운데 티끌가운데 하나인 지구라는 위성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무인전투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시속 21000킬로미터랍니다. 계산해 보니까 1초에 7키로를 날아갑니다. 그러면 그런 비행기로 돌면 기껏해야 봐야 한 2시간 반 돌면 되는 뗑그란 공만한 게 지구입니다. 거기에 세균같이 한 마리 붙어서 사는 존재가 나입니다. 그래서 집회 끝나고 나서 집에 갔을 때 밖에 나가서 하늘을 쫙 쳐다보는 겁니다. 맑은 날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가득합니다. 그때에 칸트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늘에 반짝이는 별, 내 마음에 있는 도덕률,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신앙적인 고백의 맥락은 아니지만 하늘을 보면서 우리도 그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이 오늘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하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교회에서 교사직분을 맡고 구역장을 하고 이사를 가고 하는 이러한 아주 티끌 같은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복주시고 함께 하시지만 그러나 그때 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바로 그렇게 나의 작은 삶에 간섭하시는 그분이 사실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아 당신이 창조하신 이 무한한 크기의 우주도 그분 앞에서는 없는 것같이 띠끌 만큼도 되지 못하는 그런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며 이렇게 나의 삶 속에 오셔서 간섭하시는 친밀함과 함께 그 엄위하심과 지존하심과 함께 두려움과 공경을 함께 느끼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방종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 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을 먹고 마시고 함께 자고 같이 다니고 모든 일들을 다 하던 사람들입니다. 여기가 아직 3년은 안되었지만은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렇게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올 때에 남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헌데를 어루만지시면서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오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굶주린 그 백성들에게 오병이어로 배불리게 한 후에 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답지 않게 남은 부스러기는 다 거두어라 절약정신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맨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는 정말로 이상했습니다. 다음에 또 만드시면 되지 손만 한번 드시면 나올 텐데 그것을 또 뭘 모으라고 그러시나 그런데 그렇게 사소한 일에도 다 간섭하시는 예수님인 것은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자상한 손길을 보면서 정말 예수님은 우리 편이구나 우리의 좋은 아저씨 같은 분이구나 그리고 이 죄인들을 위해 정말 목자로 오신 자상한 사랑의 주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으나 이 창조물 속에 묶인 분이 아니라 불쌍한 죄인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묶여있으신 한정된 예수가 아니라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셔서 홀로 영원하시고 지존하시고 위대하시기를 우리 같은 인간이 감히 눈을 우러러 바라볼 수 없는 그런 위대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제자들은 아직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유령처럼 오해를 받으시면서도 그 풍랑이는 바다를 걸어오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왔고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위하여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마지막에는 너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릴 수 있다.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든지 나는 너희와 함께 동행 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나 너희들에게 묶인 자가 아니라.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난 여호와 나 하나님 이니라.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했을 때 제자들은 이것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놀라운 신성 앞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부복하여야 했습니다.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걸어오셔야 했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바로 이점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오늘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고 자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 설교를 듣기 전에도 교회에서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늘 맞먹고 지낼 수 있는 그런 맞먹을 수 있는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지극히 높은 영광가운데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인성은 장소를 가지고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 제자들과 공간에 묶여계셨지만 그분의 신성은 편재하여 하늘과 온 우주 안에 어디든지 예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이 이 배에 타고 있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큰 풍랑이 일어날 때에 그 바다 위를 그렇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더라면 여러분은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손을 들어 바다를 명하여 잔잔하거라 명령하셨을 때에 즉시 바다가 잔잔하게 되어도 아마 여러분에게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광경이 놀랍기는 했겠지만 예수님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지존하고 위엄 있으시고 지극히 높으시고 엄위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면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 죄와 불순종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때는 꼭 꼬집어서 이런 죄, 저런 불순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때에도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을 만날 때에 문제는 그 시련 속에서 예수님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가 한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렇게 살을 맞대고 먹고 마시며 친교를 누렸지만 그분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지극히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그 무지가 이들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예수님이 오실 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영접하기는 커녕 유령이라고 어떻게 보면 모욕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무지한 사람들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그래서 사도바울이 푯대를 달려갈 때 그 때 까지 자기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제 이정도 되면 아까 다소 혼란스러웠던 문제 왜 예수님이 가라고 그러셨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배타고 떠났는데 큰 풍랑을 만나서 죽을 고생을 하게 되었는지가 이제 분명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풍랑을 하나의 교육용 배경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언제든지 빔 프로젝트를 쏘면 어디서든 희미하게 비추지만 뒤에다 하얀 천을 펴면 또렷하게 보이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풍랑을 스크린 삼아서 당신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이 모든 자연의 세계까지 통치하고 계신 지존자라는 사실을 거기에 투사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환란을 만나면 열렬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련을 만나면 회개하면 길이 생깁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마음을 지키고 하는 이 모든 능력은 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의 깊이 만큼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은 인생의 큰 풍랑은 때때로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풍랑을 통해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납하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깨닫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련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 만나고 신앙이 부쩍 크게된 간증만 합니다. 별로 믿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시련과 환난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보고 예전에 만나지 못했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전부가 예수님을 알아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반드시 시련과 폭풍 속에서 격렬하게 주님을 만난 것만이 쓸모있는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교회 나오고 계신지 모르겠는데 교인 중에 한 분이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굉장히 힘든 인생살이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설교를 듣고 은혜를 깊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신앙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에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아 그런 것이었구나" 를 알고 은혜도 받았는데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관성이 너무 강해서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경험했겠지만 술이나 담배 같은 인 박인 사람이 교회에 와서 눈물 흘리고 회개했다고 그다음에 밤에 돌아가니까 담배를 피니까 똥네가 나더라 그런 것은 몇 백 명 중에 한 두명 나오는 간증입니다.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은혜 받고 4년 동안 담배를 피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3번을 시도해서 2번을 실패하고 3번째 끊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도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이 분의 경우는 딱 보니까 이제 신앙의 비밀에 대해서 알겠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비추어 보니까 옛날의 처음의 자기 같았더라면 이렇게 깨달은 은혜의 진리를 거기다 대입시키면 그렇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오랫동안 굽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지만 그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전체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워가고 알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소리를 지리고 비명을 지르며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거라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C.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세상에 시련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인생길을 항해하며 즐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평탄하고 좋은 길을 걸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종종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환난과 풍랑을 만나게 해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일상적인 착하고 일상적으로 계속해온 신앙생활의 틀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스스로 미루어 알라고 하시듯이 이런 풍랑을 허락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루 바삐 이 풍랑이 끝나고 바다 건너가서 편안히 앉아 식사라도 하는 것이 우리의 원하는 바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풍랑 속에서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병자나 고치고 굶주린 자에게 떡이나 나누어 주는 분이 아니라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위대하신 만군의 지존자시라는 사실을 제자들의 가슴에 깊이깊이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의지하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깊이 신뢰하기를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초월하셔서 티끌 같은 이 우주를 티끌 같은 이 인간을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을 두려움 속에 경외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풍랑이 일어나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선택하실 차례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오늘 일어나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 풍랑과 폭풍을 단지 불평하고 원망하며 투덜거린다면 고생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여러분이 건질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속에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는 분량이 얼마 만큼인지를 생각하고 여러분 가까이 오셔서 삶 속에 깊이 개입하며 아주 작은 일에도 당신의 뜻을 보이시며 여러분을 인도하시지만 여러분이 날마다 무시해오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국면 예수님이 육체로는 팔레스타인 땅에 묶여 병들고 가난하고 주린 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신성으로는 온 땅과 만물 모든 것 위에 뛰어 나시면서도 충만하시어 그 모든 것들 위에서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할 세계와 이 온 우주의 통치주라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런 복된 길을 택할 것인지 원망하고 불평하며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는 여러분이 선택할 몫인 것입니다.
IV. 결 론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여러분의 지극히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여러분과 함께 울어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고 심지어는 여러분이 기도할 수 없을 그 때에도 여러분 안에서 탄식하시며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또한 온 땅과 이 모든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 우주까지도 티끌처럼 당신 손아귀에 움켜쥐실 수 있는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극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친밀한 사랑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분을 향한 빛깔 짙은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정동으로 와 닿으면 와 닿을수록 우리는 또 한편으로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나와 관계를 맺으신 그 분이 이 모든 창조세계를 초월하신 그 위대하고 전능하신 주 여호와라는 사실에 깊이 두려움을 느끼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초월적인 주님을 만난 말할 수 없는 떨리는 경외심과 두려움과 더불어 종의 공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의 친밀함으로 그 분의 사랑을 받고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밤에 이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예수께서 붙드실 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14:28-32)
녹취자: 장형주
I. 본문 해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 큰 풍랑을 통해서 당신이 단지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함께하시는 예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게 탁월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신 것을 이 풍랑사건을 통하여 명백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셨을 때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커다란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이 이 첫 번째가 아니었고 기적적인 능력을 베푸신 것이 이때가 최초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예수님께서 그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오시면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을 그 때에 거기에 있던 제자들은 아마 ‘아차 우리가 잠시 잊었구나! 그래 우리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 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 하셨을 때에 다시 한 번 여기서 오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 주님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아마 벌떡 일어났을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서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너라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오버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만일 주시어든 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새는 가정법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주님이 틀림없으십니다. 그러니 나를 명하여 걸어오라고 말씀해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오히려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한번 베드로가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께 자기도 물 위로 한번 걸어오라고 그렇게 말씀해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던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II. 폭풍 속에서 빛나던 믿음
A. 말씀에 대한 신뢰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으며 베드로에 대해서 여러 번 보았던 것처럼 베드로의 특징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판단이 좀 떨어지는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아주 분명하고 단순한 믿음이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이 베드로의 특징이었습니다. 나는 적어도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만약에 예수님이 정말 예수님이실찐데 ‘나에게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라고 했을 때 적어도 그 사건 만큼은 폭풍 속에 빛나던 베드로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우리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로 개념이 없는 사람의 오버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 폭풍을 뚫고 그 바다 위를, 파도 위를 걸어오셔서 자기들 가까이까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렇다! 잠시 전에도 예수님은 거기에 모인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을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먹이셨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인간들 가까이 계셔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예수님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사실 그분이 온 땅과 만물위에 아주 뛰어나신 하나님 자신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 반성했을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폭풍가운데 걸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그는 마음속에서 말씀에 대한 신뢰가 솟구쳤던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베드로가 당장이라고 물위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야지 그것이 보증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그렇게 말씀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능히 그 풍랑 위를 예수님처럼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신앙 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건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 실패하고 예수님을 만날 때에 그 때의 예수님과의 대화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습니다’라고 그물을 던졌을 때 혼자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고기에 대한 관심도 물리친 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주님께 고백을 했던 그 말씀에 대한 의지하는 마음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먼저 물에 빠진 그래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베드로는 생각하지 말고 그걸 미리 생각하면서 이 베드로의 행동도 아주 오버한 그릇된 행동이었다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오늘 이 문맥만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명하시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한줄기 믿음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빛처럼 가득하였습니다. 명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그 믿음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한줄기 빛처럼 지나갔습니다. 폭풍 속에서 오직 그 모든 풍랑까지도 어거하실 수 있도록 폭풍가운데 걸어오신 예수님과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한 주님이시고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시기 때문에 자기에게 명령하시면 자신도 예수님께 걸어갈 수 있다는 베드로의 믿음만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야할 대목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믿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구약에는 믿음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신약시대에 와서 믿음생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오면 공부도 하고 차근차근히 이성을 사용하여 학습해서 배우는 것들이 사실 우리가 가진 신앙지식 중에서 양으로 따지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이렇게 기독교 신자로서 살아가는 삶을 학습생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놀랍게 믿음 생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양으로 따지자면 우리들이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하나씩 하나씩 배워하는 이 모든 학습생활을 통해 얻는 지식이 믿음을 통해 얻는 지식보다 양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게 아니라 교회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기독교 생활을 가리켜서 학습생활이라거나 탐구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믿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기독교 생활을 하면서 배우고 익혀서 알게 되는 것이 적지 않지 않고 아주 많은 분량이지만 그것은 항상 그 앞에 믿음이 선두에 섰을 때 의미가 있는 학습이 된다고 합니다.
그 선두에 서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할 생활의 교훈 두 종류의 지식들을 함께 가르쳐 주고 우리로 하여금 믿고 또 살라고 우리에게 분부합니다. 그래서 이 삶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있어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두 개의 축입니다. 그런데 믿어야 될 규칙들이 성경에 수없이 많이 있지만 모든 규칙들이 다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믿도록 우리에게 제시한 수많은 규칙들을 하나로 모두 묶어 한 손에 쥐게 하는 중요한 믿음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경외를 통하여 행사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경외요 공경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기독교 생활을 가리켜서 우리는 믿음 생활 혹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금년에 내가 부자가 될 것을 믿는 것, 그리고 내가 이 사업을 하면 돈 많이 벌 것을 믿는 것, 이런 저런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을 믿음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믿음입니다. 그 모든 믿음이 하나의 믿음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암시이고 인본주의적인 확신이고 자기 성공을 위한 자기최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매다는 최고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 ‘물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해주십시오’ 다시 말해서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능히 걸어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생각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었고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를 믿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구름타고 다니시지 않으시고 정말 평범한 사람으로 남루한 옷을 입으시고 사람과 꼭 같이 고단한 여행길을 걸으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면서 그렇게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아픈 자들을 고치고 주린 자들을 먹이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가운데 사람의 이웃으로 그들 가운데 계셨지만 언제나 사람처럼 행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제자들은 ‘떡을 사러 읍내로 가야되겠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가야겠습니다.’ 라고 궁리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의 기도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그 수만 명의 사람들을 충분히 먹이셨으니 분명히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점은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충분히 이렇게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기적의 떡으로 물고기로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시니 그분은 사람가운데 계시나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충분한 고백이 제자들 속에서 생겨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예수님이 마치 당신 자신이 사람들 모양으로 나타나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함께 되셨고 그들과 함께 먹이시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단지 사람 속에 계신 사람 중 한 분이 아니라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우주의 통치 주라고 하는 사실을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불 같이 타올랐습니다. 그러니 이 온 자연의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예수님이 명하여 ‘내게로 걸어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면 그 일이 그대로 이루질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평생을 바다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도 물위를 그렇게 걸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익숙한 뱃사공이 된 후에도 그렇게 해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경험과는 상관없이 지금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이루어 질 거라던 빛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고 졸더라고 주일날 꼭 나와서 예배드리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십일조 드리고 헌금생활 하고 교회에서 착실하다고 소문이 나서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됐다고 할지라도 베드로의 고백에 나오는 이 믿음이 없으면 여러분은 믿음 생활 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의 의미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 하신 이름
언제나 내 삶 깊이 오셔서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사소한 나의 인생사도 간섭하고 인도해 주시는 엄마 같은 예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누구와도 비할 데 없이 온 땅과 모든 우주를 당신 손 안에 품고 계시는 그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가운데 내려와 계셨지만 4대 성인 중 한 분이실 수가 없고 또 우리의 삶에 오셔서 날마다 우리를 도우시지만 그 분이 단지 그 목적 하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실 수 없고 내가 매일매일 아침마다 성경묵상 속에서 만나고 내가 잘못할 때 꾸짖으시고 새로운 갈 길을 보여주시고 내가 눈물 흘릴 때 뺨에서 내 눈물을 씻겨 주시는 그 어머니 같은 예수님이 사실은 온 땅과 만물 위에 홀로 뛰어나셔서 이 모든 세계와 그리고 이 우주의 이 거대한 천체를 한 손안에 붙들고 계신 그 분의 손 안에는 구슬만큼도 되지 않는 그런 위대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는 것,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믿는 것 오늘 지금 내 마음에 영으로 오셔서 나와 교제하시는 사랑스런 그 주님이 사실은 바깥으로는 이 모든 우주와 만물위에 뛰어나신 창조주 하나님, 세계를 모두 품고 남으실 위대한 전능 주라는 사실을 깊이 신뢰하고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나머지 자잘한 것들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삶의 공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여러분 한산에 내려가면 아직도 모시를 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계로 안하고 손으로 합니다. 한 올 한 올을 집어넣으면서 짭니다. 한 십년 전에 갔을 때 ‘몇 년 못가서 이것이 없어질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인건비가 안 나온답니다. 그래서 잘 짜봐야 일당 6만원 밖에 안 나오는데 다른 데서 품삯을 더 많이 주고 이제 모시 값이 떨어지면 그러면 이것 짜는 사람들도 사라질 거라는 것입니다. 한 줄 한 줄 정성 것 짭니다. 그래서 시중에서 파는 것과 자기네들이 짜는 것을두개를 비교를 해 보여주는 데 시중에서 짠 것은 탁탁 접어서 위에 올라오는 부분은 잘 짰습니다. 그리고 속을 열어보니까 날라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품질 좋은 모시를 보여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았습니다. 그 때 제가 한결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짜려면 막 짜는 것보다 두 배는 힘이 더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삶을 그렇게 한 줄 한 줄 공들여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믿은 신앙인데 그거 힘들다고 신앙은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삶은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뭐 어때! 남들도 이렇게 사는데... 내가 이렇게 사는데 당신이 나에게 보태준 것 있어?’ 그리고 개, 돼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있는 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이 아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직접 보시면서 아실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알 수 없고 삶이라는 모시를 짜는 걸 보고 그 사람 속에 있는 믿음이 뭔가를 보는 것입니다. 모시처럼 나오는 이 옷감 짜기가 한줄 한줄이 개판이면 이 속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던지 그들은 관심 갖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세상과 교통, 소통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소통하는 길은 하나입니다. 삶을 공들여서 살아서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은 정말 다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삶을 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을 깊이 공들여 짤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와 주신 사랑하시는 우리 예수님 그 분이 온 땅과 만물위에 탁월하신 주님이시라는 신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을 더 의지하고 그 분의 품에 더 안겨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능하심을 굳게 신뢰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이 순간에 이런 불타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배 안에서 물이라도 퍼내면서 그 믿음을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이상하게 예수님께 가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게 쉽겠습니까? 자기가 가는 게 쉽겠습니까? 예수님이 여태까지 오셨는데... 빨리 오셔서 나를 잡아 주십시오 가고 싶어 했습니다. 오버한 게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폭풍 속에서라도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의 세계가 열린 사람들은 해도 해도 기도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거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 책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는데 주님이 저를 한번 만져주셨더니 오히려 그 기갈이 더 심하여 졌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내가 주님을 찾기에 목말랐는데 주님이 오셔서 나를 흡족하게 어루만지고 지나가시니까 내 영혼은 더욱 더 목마르게 되었나이다.” 사랑의 고백은 뒤로 후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해도 자신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은혜가 사라지만 아무리 기도를 안 해도 이것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주님을 만나도 예전에 깊이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렇게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 마음이 흡족하지를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속에 솟구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폭풍 속에서 예수님을 꽉 붙들고 싶은, 그 분의 품에 안기고 싶은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오버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과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뜨거운 포옹을 했다고 칩시다. 꽃 피는 언덕이면 얼마나 그림이 좋겠습니까? 파란 바닷가에서 그 모래사장에서 주님을 끌어안는 풍경이면 구도가 좀 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는데도 분간할 수없는 폭풍 속인데 거기서 끌어안으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유령 둘이 포개졌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상관없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깊은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 하시면 나도 그 물 위를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이 있습니까? 폭풍 속에서 그림이 나오든 말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유령둘이 겹쳐졌다고 말하든 말든 그 폭풍 이는 파도위에 서라도 주님을 꼭 만나고 싶은 그런 열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풍랑을 만난 것 같은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만약에 거기서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러분이 예수님과 헤어져서 홀로 배 타게 된 것,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 밤새도록 고생했는데 1마일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보석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깔아놓은 까만 비로도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 그렇게 안하십니다. 남겨놓으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약속 밖에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는 그 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꽉 붙들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이 남겨놓으신 이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이 마치 예수님인 것처럼 깊이 신뢰하고 거기에 나의 믿음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데 내 믿음이 강력한 힘이 있어서 그 일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마치 예수님을 엎어 놓고 ‘믿습니다’를 연발하며 팔 꺾기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항복을 받아 내는 것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뿐만 아니라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창조주요 통치주이신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B.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열심
베드로는 폭풍 속에서 주님을 직접 파도위에서 만나고자 하는 치열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면 아마 그렇게 도전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풍랑이 일어서 인생의 시련과 고난이 겹쳐서 신앙생활에 마음을 쓸 수 없을 거 같은 풍랑이 인생 속에서 일어날 때 사실 바로 그 때가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인 줄을 알고 소망을 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예수께서 붙드실 때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비난하는 것처럼 문제가 그 다음에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하셨더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였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붙드실 때가 여기 나옵니다.
A. 깊은 물에 빠질 때
제일 먼저 그는 깊은 물에 빠져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베드로가 깊은 물에 빠진 것은 풍랑이 워낙 거세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깊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혹은 예수님의 무관심에서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는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바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바람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아마 물결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2미터, 2미터 30,50 혹은 3미터씩 그렇게 격렬하게 파도가 치면서 물보라 흩어졌을 것이고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고막을 찢듯이 폭풍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을 것입니다. 아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물보라가 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 하실 그 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또한 이 모든 자연의 세계도 친히 다스릴 수 있는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이로구나! 그리스도시로구나’ 하고 그는 걸어갔습니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폭풍 속에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리였으니 수 십 미터나 200,300미터 떨어진 거리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배에 있는 모든 제자들 중 누구도 따라하지 못할 일을 감행 했습니다. 배에서 내려와서 물 위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걸어갔을 것입니다. ‘오너라’ 걸어갔습니다. 걸어졌습니다. 베드로는 태어나서 잔뼈가 바다에서 굵었지만 이것은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었습니다. 걸어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감격이 밀려왔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에 마음에 배 안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그 때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확 파도가 치면서 바람이 돌풍처럼 바다를 헤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랑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마음속에서 ‘아무리 주님이 나보고 걸어오라고 하셨던들 내가 이 물결 위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봇물처럼 확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마치 신기한 능력이 자신에게 사라진 것처럼 즉시 자연의 법칙이 작용하여 깊은 물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우물에 빠지거나 웅덩이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2, 3미터씩 파도가 치는 그 바다에 풍덩하고 머리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식겁했을 것입니다.
B. 나를 구원하소서
이 대목이 우리에게 아주 혼란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조금 아까까지 목사님은 베드로의 이런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고 힘주어 설교했는데 무슨 놈의 신앙이 몇 분도 못가서 물속에 풍덩하고 빠져버립니까? 이런 경우에 우리들은 절대로 전자에 비춰서 후자를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몇 분 안에 물속에 빠져서 풍덩 들어갔으니 ‘주여 나에게 오라고 말씀해주시옵소서 내가 주님께 걸어가겠습니다’라고 한 것은 마치 나중에 나오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 버려도 나는 예수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떠버렸던 그 때의 그 흰소리를 닮은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마음에는 믿음만 있고 의심이 있는 마음에는 의심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경우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과 의심은 공존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믿음과 의심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안에 우리가 우리 안에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령의 내주하심 안에서 살아갈 때조차도 우리에게 은혜와 죄가 공존하는 것처럼 공존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은혜 받고 그리고 성령의 그 큰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풍만하게 넘치게 될 때 그 때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게 될 때 그 때도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안 됩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믿을 그 때에 우리 안에 의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 문제가 안 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에게 갑자기 커다란 놀라움과 두려움이 확 덮치면서 그러면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확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의심이 들어올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 베드로의 경우가 이러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믿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신뢰합니다. ‘난 믿음이 많아. 난 믿음이 강해. 내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인생의 길을 해치며 살아왔고 그 믿음이 나에게 있어. 난 이 믿음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어’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그런 어리석은 신앙들이 아주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비전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이러이런 것을 하고 싶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써 주시리라 난 믿어.’하고 굳게 신뢰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자기 암시나 자기 개발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 그 자체를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건조합니다. 확신과 신념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을 깊이 의뢰하며 그 분 때문에 자신의 신앙의 근거를 갖게 되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향기가 있습니다. 비록 약해도 고생해도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한 순간 커다란 두려움이 확 하고 덮쳤고 그 순간 팽팽하게 붙들고 있었던 믿음의 줄 ‘주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걸어가겠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라는 믿음의 줄이 한 순간에 ‘탁’하고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차갑게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신 그것만이 내 안에서 커져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커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도 함께 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뢰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예화) 옛날에 임금들은 밥을 먹을 때 전 세계의 모든 왕족들과 귀족들이 다 은수저를 사용했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음식에다 은수저를 넣어보는 것입니다. 꺼내보면 독이 들었으면 변색이 됩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사람, 세 사람 음식을 확인하는 상궁의 손을 거쳐서 왕의 밥상에 올라가는 모든 음식은 이미 그것을 두 사람, 세 사람이 먹어 본 것입니다. 그 음식에 대한 보안을 책임지는 상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만일 독약이 들었으면 자기가 대신 먹고 죽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신뢰할 수가 없어서 수시로 바꾸고 감시를 또 붙이고 또 붙이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왕으로 태어나지 않은 게 그렇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플 때 뭘 해 가지고 왔는데 생전 보지도 못하는 음식입니다. 그래도 아이는 엄마를 사랑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입을 벌립니다. 그리고 먹는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믿음주의 외치는 이것은 다분히 자기 암시고 자기 개발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이점에 있어서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 깊은 물에 빠져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선 이렇게 간단하게 쓰고 있지만 지금 허리까지 차는 울에 빠졌다는 것도 아니고 조용하게 고여 있는 목가지 차는 슬쩍 미끄러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2,3미터의 파도가 치는 그 풍랑 속에서 ‘훅’ 미끄러져 빠져 들어가면서 머리까지 그 풍랑 속에 빨려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 물 위에 떠오르고는 사람이 완전히 가라 앉는다고 합니다. 잠깐입니다. 입까지 바다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서 저를 붙잡아 주셨다고 했습니다. 믿음도 없는 사람인데 아까 믿었다고 하더라고 금방 변심해서 의심한 사람인데 죽게 내버려두시지.. 어떤 사람은 또 그렇게 해석합니다. 물속에 빠져 죽을 때에야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아 주셨다고 하는데 동의가 안 됩니다. 너무 베드로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라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지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구절이 제일 은혜가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수없이 강조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깃발을 들고 가면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면서 ‘아이고 참 착하구나 저 녀석이나 좀 사랑해줘야지’ 하고 따라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언제나 믿음이 충만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언제든지 부할 때에든지 성공할 때에든지 이 세상에서 복을 많이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때이든지 어느 때이든지 간에 변함없이 맨 처음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생각하면서 그 사랑에 감읍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할 때만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다 털어먹었을 때에도 성령의 은혜 다 사라지고 뼈다귀만 남았을 때에도 우리가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가장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 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아무리 율법을 우리에게 들여대고 ‘너는 이래서 잘못됐고 너는 이랬기 때문에 죽일 놈이다’라고 수없이 말해도 그것 때문에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성이 바뀌어 다시 예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은 율법이 해줄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주어 두려워 떨게 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율법이 우리를 주님께 돌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그게 틀립니다. 자기에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우는 소리와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수님의 목 메이는 사랑 때문에 우는 그 소리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를 맨 처음에 구원해 놓으실 그 때부터 우리가 일평생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만 위해서 살지 못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수시로 의심하고 예수님 신뢰하지 않은 것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것이었고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것이었고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며 감격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미끄러졌을 때에도 주님은 사랑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늘 우리의 마음의 줄을 두드려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해 낼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주님을 멀리 떠나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다고 낙심해 있는 그 때에도 주님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돌아보면 간절한 기도 속에서 아멘하고 응답을 받아서 시련과 위기를 벗어난 때도 있었지만 여러분 중에 아무도 그렇게 항상 믿음으로 산 사람은 없습니다. 시련과 폭풍이 일어나고 눈을 뜰 수 없도록 고난이 겹치는 데도 자살할 생각을 예수님께 돌아갈 생각보다 더 많이 한 사람도 우리 중에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지나가고 보면 그 폭풍 속에서 그 때 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물속에 미끄러져가는 우리를 주님이 붙드신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렇게 수없이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 그 순간들 중에 지극히 일부분만이 우리에게 감지가 되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이 시험 속에서 붙잡아 주셔서 이 미끄러지는 시험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을 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 구원의 은혜는 감사되지도 못하고 찬송 받지도 못한 채 잊혀지고 흘러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너무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베드로가 ‘예수님 나에게 물 위로 오라고 말씀만 해주십시오. 내가 그 말씀에 순종해서 이 파도 위를 걸어가겠습니다. 마라의 때에만 예수님이 사랑해주시고 붙들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미끄러져 물에 빠지게 되었을 그 때에 바보같이 그 믿음 다 잃어버리고 ’예수님 나 죽을 거 같아요’라고 비명을 질렀을 때조차도 주님 그 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에서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이 잡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깊은 시련 속에서 믿음이 있을 때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만 믿음이 없어 미끄러질 때에도 죽지 않도록 주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건져주신 주님을 신뢰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잘 보면 이것이 복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미끄러져 빠져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했지만 어떤 때 우리는 살려달라는 애원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우리의 손을 붙들고 더 이상 빠지지 못하도록 우리를 꺼내어 주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수련회에서 여러분이 잊어 버렸던 위기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굳이 베드로에게서 그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행동 하나 쯤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빠지면서 주님을 부르며 자기를 구해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비록 잠시 일렁거리는 폭풍 속에서 물결을 보며 예수님에 대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창조주, 통치주에 대한 믿음을 잠시 놓쳤지만 그래도 그 풍랑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습니다. 예수님 똑바로 바라보고 끝까지 잘 걸어가서 주님과 뜨거운 포옹을 한 것만은 못하지만 그러나 미끄러져 들어가면서도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위기 속에서 시련 속에서 여러분의 양심은 고동칩니다. 내가 이전에 이렇게 이렇게 예수님 배반하고 이렇게 이렇게 믿음이 없어서 의심했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네가 주님이 원하시는 소명을 멀리 떠나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네가 멀리 떠났는데 네가 어떻게 예수님보고 나를 구원해달라고 매달릴 수 있느냐 양심의 고동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님의 음성 아닙니다. 주님은 자존심 센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양심의 소리가 들어올 때 여러분은 양심의 소리와 대화해야 합니다. ‘사실이다 네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전에도 내가 아직 되었을 그 때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나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실패 속에서 주님을 붙드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비상구를 찾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당신께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죄 짓고 미끄러지고 믿음 없고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빠졌던 사람들을 오히려 기쁘게 건져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건져주심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에게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결국은 베드로를 건져 배 위에 오르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랬겠습니까? 이러고 있었겠습니까? 어땠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에 ‘아! 물위로 내려가서 세 발자국 걸었다‘ 그랬겠습니까? 아마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이 사건이 새벽 닭 울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처럼 오래오래 남았을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믿음이 있을 그 때에만 예수님이 나를 물 위로 걸어오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머리끝까지 빠져 들어가고 있을 그 때에도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건져주셨다 배에 올라와서도 아무 할 얘기가 없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자기의 장점이 많이 보이는 사람들은 은혜가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수록 정말 조금이라도 자랑할 게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이 베드로 성격에 그렇게 해서 한 20-30미터 걸어가서 예수님 꽉 포옹하고 그리고 예수님 손잡고 자기가 걸어 올라와서 배에 올려놨다면 아마 모두 무릎 꿇게 했을 것입니다. ‘너희 들이 도대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야 없는 사람들이야’ 그 큰 기적을 모두 보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게 은혜가 됐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주님을 믿지만 믿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 움직이는 리모콘이 아닙니다. 먼저 가시는 주님의 사랑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정말 기도 많이 하고 이 수련회에서 예수님 꼭 만나고 만나지 못한다면 여기 납골당도 있다는데 내 거기 묻히리라 하는 사람만 예수님 만나고 가는 것 아닙니다. 정말 친구 따라 할 수 없이 경부고속도로 놀러 가다가 하도 막혀서 들어왔는데 생애적으로 주님 만나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충만할 때 뿐만 아니라 고갈 되었을 때에도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C.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배에 오르셨습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오 아니 그래도 기왕에 그칠거면 예수님이 촥 뻗어서 잔잔하라 그러면 딱 멈췄으면 얼마나 그림이 멋있습니까? 구도가 살지 않습니까? 폭풍이 일건 말건 예수님이 배로 올라오시니까 쏵 하고 멈췄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 이상 폭풍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폭풍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예수님이 통치주요 창조주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풍랑이 필요 없었습니다. 우리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능력이 모자라서 인생의 풍랑이 일도록 여러분을 내버려 두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련과 고난에 목적이 끝났을 때 거둬 가십니다. 물론 또 다른 고난과 시련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순적한 길을 만나면 시련과 고난이 곧 가까이 다가 올까봐 두려워하고 시련과 고난이 오면 그 속에서 괴로워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어차피 시련 아닌 때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실존이고 현실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큰 풍랑과 기이한 시련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때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풍랑 속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나 태도를 바꾸게 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목적을 가지고 풍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혜로운 신앙의 선배들은 노래했습니다.
(찬양)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요단강 건너가리
IV. 결 론
큰 풍랑이 일어나 우리로 하여금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예수 대신 이 세상 믿고 나 의지하며 사는 그 세상 줄 끊으라고 그 풍랑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심하지 말고 오늘 마음속에 굳게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여러분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고 성령 충만 하지 못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폭풍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여러분의 육신의 두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지금 아주 가까이 계셔서 물속에 미끄러져 가는 여러분을 지금도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3.폭풍 속에서 말씀하실 때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 손으로 내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14:19-22)
녹취자: 이새봄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다가 만난 폭풍 속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충분히 풀려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로마의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충분히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굳이 황제의 재판을 청구하고 로마의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소원대로 이탈리아로 가서 황제에게 이제 재판을 받을 차례였습니다. 그레데라고 하는 섬에 머물러서 이제 떠날 것인가 거기서 겨울을 지낼 것인가 이제 사람들은 선택을 하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겨울에는 거기에 큰 풍랑이 일기 때문에 사람들이 항해를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는 겨울을 나기가 불편한 항구이니 여기서 배를 몰아서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항구로 이동을 하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뱃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를 받아 그렇게 선택할 경우 많은 손해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말보다는 배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더 신뢰했으니 바울은 한낱 죄수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II. 폭풍 속에서 몸부림칠 때
결국은 폭풍 속에서 몸부림치는 순간이 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커다란 풍랑, 유라굴로라고 하는 그 이름을 가진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고 이것에 의해서 배는 심히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체를 둘러 감고 물에 끌려갔고 결국은 뱃사람들은 그 풍랑을 이기지 못해서 물건을 바다에 버렸고 마지막에는 항해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배의 기구까지 모두 내어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풍랑이 일어날 때에 배에 물건이 많으면 복원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단은 모든 물건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여야지만 배가 폭풍 속에 휘둘려도 재빨리 자기의 자리를 잡아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짐을 모두 버려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지만 종종 우리의 삶 속에는 시련과 폭풍 속에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줄 전혀 몰랐고 내 인생의 계획표에는 없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그동안의 평화가 태풍의 눈 한가운데를 지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어느 날 갑자기 큰 풍파가 일어나고 시련과 그리고 고난이 닥치게 됩니다. 이제껏 나를 지탱하고 있던 삶의 모든 질서들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때 우리는 요동하게 됩니다. 이때 제일 필요한 것은 우리 인생의 배의 무게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온한 바다를 항해할 때 실었던 많은 짐들이 평온한 인생의 항해길에서는 모두 짊어지고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커다란 시련의 폭풍을 만나고 인생 전체가 위기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바다에 던지고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줄여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지혜이고 신앙의 지혜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항해에 꼭 필요한 배의 기구까지 모두 버렸으니 이 폭풍 속에서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폭풍은 매우 특별한 폭풍이었고 이렇게 배의 화물을 버리고 마지막에는 항해에 필요한 기구까지 모두 버려서 배의 무게를 줄였지만, 이 폭풍을 헤쳐 나가는 데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폭풍은 점점 드세졌고 그리고 여러 날 동안 이 폭풍이 계속되었고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비까지 쏟아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었습니다. 폭풍은 거칠어도 잠시 지나가는 것이면 견딜 수 있을 텐데 여러 날 계속되었고 그 풍랑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밥 한 끼도 먹지 못할 정도로 풍랑이 계속 되었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풍랑은 잦아들기는 커녕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강력한 기세로 이 배를 부술 듯이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그 물결과 함께 싸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갔을 텐데 굶주림 속에서 이제는 이 풍랑 속에서 버틸 힘조차 없는 삼중의 절망 가운데 이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절망감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과 파도가 언제는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큰 풍랑이 일고 파도가 요동칠 때 더 무서운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파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 당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환란과 시련을 정말 훌륭하게 극복해온 사람이 그보다 훨씬 작은 시련 앞에 무릎을 꿇고 자포자기하거나 미끄러져서 타락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심지어는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인데도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에 이는 풍랑과 파도가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일어난 풍랑을 그가 이기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를 에워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는 관계, 그 앞에서 행사되는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정말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왔는데 정말 소설로 써도 몇 권을 쓸 정도로 다이나믹 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그랬고 회심하고 난 후에도 그랬고 목회를 하기 전에도 그랬고 목회하고 난 후에도 그랬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뭐 어디엔가 기록이 남겠죠.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쳐옵니다. 내 인생에. 혹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시련이 막 닥칩니다. 그것은 너무 너무나 커다란 시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정말 편안합니다.
(예화)언젠가 목회를 하기 전인데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 그 때는 신앙의 초창기였으니까 큰 시련을 만나면서 그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날 저녁도 퇴근하고 와서 먼 길을 걸어서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가서 촛불을 켜놓고 그 때에는 전기가 물론 있었지만 다 켜기가 그래서 촛불 하나 켜놓고 그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돌아오는데 마음의 불안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밤에 꿈을 꿨습니다. 꿈을 꿨는데 이 땅에 이 내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 앞에 커다란, 그렇게 크지도 않고 미터수로 보면 얼마나 될까, 한 15미터쯤 되는, 10미터 남짓한, 10미터 15미터 그 정도 되는 큰 개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물이 깊은지 시퍼런 물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제 헤엄도 못 치니까 끝도 없이 깊이 빠지겠구나, 그러고 꿈에서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발을 내밀면서 “주여” 그랬습니다. 딱 무릎까지밖에 물이 안 차는 것입니다. 그러고 딱 깼습니다. 새벽에. 그런데 그러고 나서 형언할 수 없는 평화가 화악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신비주의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절대 그런 말 쓰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신앙이 참 다운가 거짓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능력보다도 진실함에서 찾아야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제 설교를 듣거나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담임목사인 내가 “주님이 오늘 아침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거의 들어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제가 한 번도 안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했다면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거의 안했는데, 그래서 나는 오히려 교인들이 와서 이야기 할 때, 교회 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목사님, 주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는데”. 하다못해 드링크 하나 사다 보내면서도 “주님이 보내라고 해서 보낸다”고 그러는데, 이제 애교로 봐줍니다. 왜냐하면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게 거의 분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할 때보다 “기도하는데 들은 생각인데요” 라고 말할 때 더 신빙성이 갑니다. 더 신뢰가 갑니다. 더 신뢰가 갑니다. 얼마나 정직한 것입니까. 그렇죠. 얼마나 정직한 것입니까. 여러분, 언제나 그래야 됩니다. 그러면 정말 놀라운데 그렇게 뻥치던 사람들이 열린 교회에서 한 6개월 신앙생활을 하면 그런 말 안합니다. 왜냐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신앙 좋은 구역장도 그런 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한참 눈치를 보다가 ‘아 이게 결국은 나를 높이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람들로 하여금 얕잡아 보게 만드는 것이구나’하고 딱 접습니다. 얼마나 귀엽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생각이 났는데요.”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다가 목사님 생각이 났는데요. 박카스를 한통 사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귀엽습니까. 얼마나 귀엽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하실 일이 많으신데 그런 것까지 지시를 해주셔야 되겠습니까.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렇게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하는 사람들을 항상 어떤 마음으로 봐야 하냐면, 마음이 허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만나서 수다떨고 할 때 있지 않은 가정사를 뻥튀기해가지고 막 부풀리는 사람들이 있죠. 대부분 남편사랑을 못 받는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거기 와서 집 자랑하고, 보석 자랑하고, 학력 위조 막 이래가지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막. 남편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가족관계가 만족스러운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주님이 언제나 오셔서 자기를 어루만지시는 그 경건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뻥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엄청나게 빠져들 것 같아서 물을 탁 들였는데, 사실 주님을 안 믿었으면 “으악” 했을 텐데 그래도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꿈속에서. 꿈에서도 신앙이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더라구요. 그때는 신앙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주여” 그랬는데 발목으로 탁 빠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걸어보니까 다 그만큼밖에 안되는데 눈에는 시퍼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딱 들었던 생각이 뭐냐 하면 “아 그렇구나 진짜 우리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시험이여서 우리의 마음이 시험에 들기 때문에 이 환경이 시험으로 그런데 더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엄청난 시련입니다. 가끔 이야기하지만 아침에 하늘나라에서 괴로운 시련이 막 닥치는데도 하나도 고민이 안됐습니다. 하나도 고민이 안됐습니다. 물결만 요동치는데 내 마음은 정말 놀라운데요. 이 모든 것들이 마음의 요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음이 쭉 평정해지면 시련이 막 일어나도 이 갈리게 미워 너무 미워서 잠을 못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나를 에워싸고 저기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강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그런데 그렇게 막 시련이 일어나니까 주님께로 더 많이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그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자, 우리의 인생 가운데 시련도 있고 고난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마음을 다 비우고 마치 우리 인생 전체를 바다 위에 던져서 그 물결에 맡기는 것처럼 주님께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 맘대로 어떻게 되어야되겠다라는 희망을, 욕망을 딱 끊어버리고 나면 겁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두려운 것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모습을 주님이 싫다 그러시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에이브람 링컨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대적들의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다고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항상 이기면 “야, 우리 여기에서 다른 데로 가서 겨울을 지내자” 그럴 때 사도바울이 “그러면 안 되지"하면 무릎을 딱 꿇어야 하잖습니까. 그런데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다고 항상 이기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 서있으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닌데 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이겼더라면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풍랑이 일어나 구원의 여망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누구나 시험에 들 수 있는데 금방 못 벗어나고 시험에 오랫동안 지리멸렬하게 시험에 들어있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들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시험 속에서 산다고 말해야 좋을 정도로 그렇게 한번 들어간 시험의 구렁텅이에서 못나온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현실을 안 받아들입니다. 현실을 안 받아들입니다. 현실은, 나의 실존은 내가 떼어놓고 싶은 것도 있고 붙잡고 싶은 것도 다 섞여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대부분 다 떼어버리고 싶은 것만 있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오죽했으면 싫어서 그냥 자살해버리기도 하고 그러잖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와는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떼어버리고 싶은 것도 있고 붙잡고 싶은 것도 있고 이런 모든 것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럼 무슨 생각만 하게 됩니까. “아 내가 왜 우리엄마 아들로 태어났을까", “아 내가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왜 결혼해서 날 낳았을까" 아니면 무슨 “나는 왜 이 나라에 태어났을까”, “나는 성격이 이렇게 밖에 안될까" 그러면서 끝까지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그것은 가장 자기의 인생을 파괴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면 싫고 좋고 하고는 상관없이 이것이 나의 현실이고 그리고 이것이 내가 결별할 수 없는 나의 실존 자체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것을 품고.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나쁜 나를 인정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좋다고 막 그러라는 것이 아니라 이게 나의 현실이고, 나의 실존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이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을 해야 됩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왜. 반성이 없으면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할 것 아닙니까.
(예화) 에드워즈 파크에 앉아서 공부를 했나, 뭐 그랬습니다. 매미 한 마리가 계속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우나보다 했는데, 밤이 되어서 지중등을 딱 켰잖아요. 그 밑에서 올라오는 등불을 켰잖아요. 환하잖습니까. 이게 나방하고 똑같습니다. 휙 하고 날아오더니 그 뜨거운 전구에다 헤딩을 합니다. 그럼 날개가 막 타잖아요. 그래서 기겁을 해가지고 빗자루로 건져서 저기로다 밀어냈지요. 한참 책을 보니까 또 날아와서 거기 불덩이로 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날개가 다 타는데도. 또 퍼냈어요. 또 들어오고 또 퍼내고 또 퍼내고. 그게 바로 나방이 불보고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것, 그것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서 '야, 저게 인간의 모습이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후회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반성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성과 후회로 끝나야지, 그리고 거기서 교훈을 얻고 새 삶을 살 생각을 해야지,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 의지와 내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그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끝까지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을 마귀가 사용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끊임없이 절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 절망의 마지막 목표는 뭐라구요? 끊임없이 마귀가 주는 절망의 마지막 목표가 뭐라구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아내가 얘기한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라."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고 치시고 때로는 피나도록 후려치셔도 이끌고 가시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데, 마귀는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한때는 제가 참 좋아했는데 요새는 별로 안 듣습니다. 안드레아 보첼리라고 하는 맹인 가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꽤 노래를 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몇 개 정도는 들을만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 날 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뭐라 하냐면 "내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결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맹인인데도 활발하게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절망과 좌절에 머무르지 않고 음악에 헌신하면서 세계적인 가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맹인 가수가 이 음악책에 나왔으니 동정점수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동정점수를 준 것이 아니라 정말 최고의 가수였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이 만약에 결심을 하고 딱 결정을 하면 내일 아침서부터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힘으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 구원의 여망이 완전히 사라진 지점까지 가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보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섭리입니다.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 장면으로 돌아가봅시다. 이제 모든 구원의 여망이 다 끊어졌고 기진맥진해서 죽을 정도가 되었고 풍랑은 점점 더 심해졌고 그리고 몇일 동안 폭우가 퍼부으면서 해도 달도 잠시라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주 결박되기를 꽁꽁 묶여있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게 바울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죄수는 사람 축에도 못 듭니다. 바울은 그래도 로마 시민이니까 그러니까 안전하게 호송하여 로마까지 데리고 갈 의무가 군인들에게는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중간에 도망가버리든지 죽어버리든지 하면 상당한 책임을 져야 했겠지요. 그래봤자 죄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그레데에서 사도바울 나름대로 계시를 받고 그렇게 가면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죄수 주제에 어디에 한수 거들 그런 여지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폭풍이 일어나고 구원의 모든 여망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이 그 배 한가운데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 죄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신분으로는 명함을 내놓을수 없고 거기에서 입을 떼고 발언할 수 없는 호송되어가는 아주 미천한 죄수의 몸에 불과했지만 구원의 여망이 모두 끊어진 때였기 때문에 이제 이 폭풍 속에서 사도바울이 인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입을 떼어서 한 이야기가 그들을 책망한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타격과 손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하였겠느냐." 그리고 그들의 과거를 반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내가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폭풍은, 폭풍은, 인생의 풍랑은 사람들의 위치를 바꾸어 놓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애쓰신 분들은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모든 일들이 평안하고 풍랑 하나 바람 한점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이 가족들의 인생이 순조로울 때에는 내가 그렇게 기도하면서 예수 믿자고 이야기해도 귀도 기울이지 않고 가정에서 아무 권위가 없습니다. 더욱이 평소에 아버지로서, 혹은 엄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아름다운 행실의 모본을 보이면서 그렇게 그 가족들을 잘 섬겼으면 그래도 그런 것들이 오래 축적되어서 나름대로 좀 권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누가 그렇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예수 믿고 은혜 받았어도 내일 가서 회개할지언정 오늘 가정에서 성질나는 일이 있으면 쏟아 붓고 말잖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그런 일들이 되풀이 됩니다. 권위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고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시련의 폭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좋은 것은 여러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가족과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의 생명이 달린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큰 풍랑이 일어나고 배가 뒤집히면서 화물도 버리고 항해에 꼭 필요한 기구까지 다 버리고 이제는 살 소망이 끊어졌을 때 죄수가 배 한복판에 서서 “내 말 좀 들어봐라" 그리고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가 권위 있게 들린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풍랑 속에서 똑같이 “이제 우리 죽으려나봐 어떻게 하지" 그러고 달달 떨면서 서로 살겠다고 아등바등 하고 그랬더라면 사도바울이 거기서서 ”안심하라" 그러고 이야기할 때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똑같이 풍랑을 만나서 요동치며 죽겠다고 발버둥질 치고 있었지만 그 폭풍 속에서 똑같은 더 힘든 고난을 당하면서도 완전한 평정 속에 있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신앙 때문에. 신앙 때문에.
여러분이 가정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믿음으로 충만해지는 그 때에 가족들은 의지하게 됩니다. “야, 하나님께 기도 좀 해봐라, 하나님 살아있대매. 기도해봐라." 농담 같지만 진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폭풍 속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위치를 섭리 속에 바꿔놓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이 풍랑을 선교적으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풍랑에는, 인생의 폭풍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폭풍 속에서 가족들이 여러분을 의지합니다. 폭풍 속에서 여러분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때가 여러분이 이제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가족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됩니다. 그러면서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시련 속에서 주시는 그 평화가 어떤 것인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이 넘나볼 수, 넘어볼 수 없는 그런 지극한 평강 속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폭풍 속에서 즉각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계신 사랑으로 말미암는 연합의 삶. 그 속에서 생사를 초월하는 담대한 신앙과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잖습니까. 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뭐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절실하게 이 세상에 딱 붙어서 그렇게 진액을 빨아 먹듯이 하염없이 살아야할 소명과 가치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주님이 허락하시는 것만큼 세상에 살다가, 어떤 사람은 사고로, 질병으로, 자연사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불러주십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생사를 초월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도록 능히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리고 사실은 신앙의 숙제를 다 종합해보면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연합과 사랑의 삶을 사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숨을 쉴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날 동안엔 우리가 끊임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하여 올바른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것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의지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과 미워하시는 길을 분별하며 좋은 길을 택하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 까지만 그것을 할 뿐입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충만한 예수의 생명 옆에 항상 죽음을 함께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찬양)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래서 매일 매일 육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내게는 더 좋습니다, 라는 고백이 내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런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을 때 삶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었지만 사도바울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 어차피 하나님께서는 네가 임금과 황제 앞에서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다,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는 살 것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는 동기가 자기의 이익이 아니기 때문에 목숨을 앗아가는 풍랑과 시련이 일어난들 그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의 동기가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두려움 투성입니다. 모든 일들이 잘 굴러가고 내 뜻대로 될 때에는 또 두려움입니다. 왜? 이것을 잃어버릴까봐. 잘 안되고 꼬일 때에는 또 두려움입니다. 왜? 내가 원하는 것을 결국은 못 얻을까봐. 그러니까 형통하게 놓여도 두려움이고 불통해도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초월하는 분명한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돈이 있고 없고 사업이 잘되고 안되고 하는 그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서 신앙을 가짐으로써, 나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무슨 의미이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이고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나같이 더러운 인간이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 주의 자녀가 된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왜 주님은 오늘도 들에 핀 백합을 입히시듯이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듯이 그렇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실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소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돈이 있든 없든 사업이 잘되든 말든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불안과 근심과 걱정은 그치질 않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젠가는 다 고백했잖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난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하나님,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이 벌레같이 살아왔고 주님의 얼굴에 침뱉으며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살아온 것 밖에는 한 일이 없는 이 불결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발라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셨고 나의 지난 모든 죄악과 과오를 깨끗이 씻어주셔서 흰눈보다 정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저의 인생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깨끗케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백했습니다.
(찬양) 주 예수여, 이 모든 것 받으소서
우리 모두는 아니어도 대부분은 이 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내가 내 인생의 임자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의 구속으로 다시 태어날 때에는 나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우리 같은 더러운 사람이 한 지체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진 그 사랑은 당신의 신부인 교회 위에 쏟아졌고 우리는 모두 그 사랑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풍랑, 없습니다. 무슨 풍랑입니까. 인생사는 게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덜 배웠습니까?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나님 없는 이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덜 배웠습니까? 그렇게, 그렇게 여러분만큼 하나님 모르는 이 세상 시인들도 '세상은 우리를 속인다', '생활을 우리를 속인다', '시간은 우리를 기만한다' 매일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이 죄짓고 불순종해서 시련을 만나는 게 대부분이지만 순결해도 시련을 만납니다. 왜. 세상 자체가 그렇게 모순되기 때문에 시련이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올라오실 때 어떤 분들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올라오셨겠지요. "아 진짜 답답해서 못살겠어, 사업도 이제 희망이 없고 돈도 다 떨어지고 몸도 써금써금 하고, 은혜를 받아야지! 역시 은혜를 받아야지!" 뭐하시려구요? 그 은혜를 받아서 어디다 쓰시려구요? 은혜 받고 힘내서 주님 의지하지 않고 걸어가시던 그 길, 씩씩하게 가실려구요? 그 은혜가 정말 필요할까요? 가는 방향이 잘못 됐는데 좋은 엔진 달아주면 뭐할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삶의 방향이 잘못된 사람들에게는 정말 삶의 방향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하지, 돌격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그때가 있습니다. 열린 교회 와서 그런 때가 여러분에게 있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서도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로 돌아가십시오. 그런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옳다고 생각해놓은 길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내가 맨처음 회심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 주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며 이제 내가 산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덤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을 했던 그 때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형통하고 잘나가던 인생의 길에서 불결하던 사람들이 삶의 여망이 모두 끊어진 시련 속에서 종종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수로 끌려가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역전되어 자기를 끌고 가던 군인들과 그 노련한 뱃사람들 앞에 담대히 서서 지도자가 되어 그들에게 지시하고 위로하고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을 했느니라."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폭풍 속에서 담대하게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끌고 가던 군인들은 조용히 귀 기울이며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사도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구원의 여망이 모두 끊어져버린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 상에서 노련한 뱃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모두 접고 죄수의 목소리에 자신의 남은 생명을 의탁할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위입니다.
큰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거기에 조연이 있고 주연이 있습니다. 주연이 누구냐하면 나이순서, 키순서 돈 많은 순서, 학벌 순서가 아닙니다.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그 폭풍 속에서 사명을 주신 사람, 그 폭풍 속에서 쓰시려는 사람, 그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이 군인들은 월급받기 위해 죄수를 로마로 끌고 가는 사람이었고 뱃사공들은 돈 받고 배 몰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로 몸이 묶였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었습니다. 네가 임금과 황제 앞에서 이 복음을 전하게 되리라, 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냐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다가 시련이 오면 다 내려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풍랑과 시련을 만날 때에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자산이 무엇이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강한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한동안 내 마음에 늘 울려 퍼지던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저는 죽는 날도 설교하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화) 어떤 여류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소설을 하나 쓰자마자 죽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렸는데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이불로 온몸을 싸매고 간신히 앉혀 놓으면 죽는 순간까지 소설을 쓰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소설을 딱 탈고하고 금방 죽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태우며 소설을 쓴 것입니다. 숭고하더라구요. 숭고하더라구요. 아 바로 저런 죽음이다. 주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소명의 자리에 서 있는 것, 이것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우리의 담대한 근거가 됩니다.
인생의 풍랑이 일어날 때 정리할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 교회에서 주신 직분, 사명, 가정에서 주신 직분, 사명, 직장에서 주신 직분, 이런 게 아니라, 이런 것을 정리해야 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욕심, 욕망, 우리의 마음의 무게를 줄여야 됩니다. 변함없이 그렇게 한결 같이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런 담대함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련과 폭풍 속에서 엑스트라 같은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그것도 히브리에서 끌려고 아주 하찮은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거기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을 보고 보디발의 집에 요셉으로 인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집안에 임한 모든 복, 애굽에 임한 모든 복이 요셉 한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연의 삶입니다. 오죽했으면 애굽의 임금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의자 하나밖에 없다. 이 보좌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는 네가 나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서 그를 높여 주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더욱 소명을 굳게 붙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을 믿노라. 사도 바울에게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상황은 어떠한 낙관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찬양)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우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사는 삶. 시련과 고난을 만나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한결 같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 그래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우리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손가락질해도 주님은 나를 영접하십니다. 그게 사라지지 말아야 할 신앙입니다. 만약에 주님 앞에 게으르게 살았기 때문에 부끄러우면 용서를 빌어야 됩니다. 주님 앞에 불순종 했으면,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빌어야 됩니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때로는 영적인 침체 속에서 느낄 수 없을 때조차도 우리의 마음속에 말해야 됩니다. 이럴 때는 찬송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도할 수 없을 때 찬양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할까,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처음에는 이러한 찬양과 고백이 침체가 깊으면 허공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흩어집니다. 마음을 모으고 내 느낌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그래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하나님은 너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네가 아직 죄인이었는데도, 예수님을 찾지도 않던 때였는데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받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증명해 주셨느니라' 라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모으며 끈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찬양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의 얼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큰 섭리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소명을 굳게 붙들고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의 길이 얼마나 되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 말고 제 3의 또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한 번 우리의 가는 인생의 길을 바꿔달라고 예수 따라가지 않았던 우리, 회개하게 해달라고 우리의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폭풍만 보고 두려워하였던 우리들의 마음을 바꿔 달라고 그래서 생사를 초월한 소명으로 굳게 서서 오히려 연약한 내 가족, 불쌍한 내 이웃들을 굳게 붙들어 주며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빛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4.염려하지 말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녹취자: 윤은정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산상수훈이라고 불리 우는 이 부분에서, 천국시민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떠해야 천국시민으로 불릴 수 있으며, 또, 그 천국시민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상세하게 가르쳤습니다. 모든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모든 신약성경이 똑같이 신약 계시의 빛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산상수훈은 역사적으로 신약성경의 응집이라고 보았고, 종종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도,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시인했던 최소한의 부분이 바로 이 산상수훈 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산상수훈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6장에서는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을 하셔서, 그래서, 구제하는 문제, 은밀히 기도하는 문제,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금식할 때에 은밀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금식하여야 할 것, 이런 것들을 다 말씀 하시면서,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짤막짤막한 토막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앞에 언급된 것과 거의 막 먹을 정도 긴 불량을 할애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통해서 왜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간곡하게 타이르셔야했던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6장 전체, 정확하게 말하면 5장부터 따라온 6장까지 전체의 중요한 결론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기도한다’라는 뜻이 아니라 ‘추구하면서 산다’는 뜻입니다. 즉, 그의 나라와,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의 의지를 구하며 사는 것, 이것이 예수께서 구원해주신 사람들에게 거시는 가장 중요한 삶의 ‘인의적 원리다’라고 합니다. 새벽 짧은 시간이니까 이 의미 깊은 내용들을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짤막하게 먼저 이 6장 33절을 정리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라고 하는 것은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의 실현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르킬까요? 그것은 왕국의 질료와 형상, 혹은 형식과 내용, 이 두 가지를 함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강하고 좋은 나라다’라고 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 있어야 됩니다. 그 국민과, 영토와, 주권이라는 질료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들이 아주 질서롭게 관련을 맺고, 통치하고자 하는 왕의 뜻이 인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그 인생의 목적과 상당히 부합하면서 내적인 질들이 확보가 될 때에 그 나라를 우리들이 ‘좋은 나라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대입해보면, 똑같이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라고 할 때, 그 나라는 형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영토와 국민들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이 세상나라에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면서 커다란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서, 이제는 저 왕께 순종하지 말고, 우리끼리 왕국을 만들자 하는 인간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반란이 이미 예전에 하나님의 하늘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똑같은 일들이 땅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두 사건은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사령관처럼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본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해 죽으셨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사령관 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는 이 세상 나라를 토벌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의 적합하게 무장시키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셨고, 그 계획에 따라서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세상나라의 반란이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이 영적인 왕국에 의해서만 이 세상나라는 토벌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은, 바로 이 왕국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미 있는 나라에 또 다른 나라를 세워서, 미국도, 한국도, 중국도 아닌, 세상나라와 어깨를 겨누는 또 다른 의미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잘못된 왕국의 개념을 기독교가 가졌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이라는 그 끔찍한 오류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영토와,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있는 이 세상나라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한사람, 한사람을 회심하고 예수 믿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이 참 왕 되신 주님 앞에 굴복하기를, 예전에 자신의 이 세상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들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더 뜨거운 마음으로, 어제 저녁에 설교한 바와 같이 ,자신의 삶의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뿐 아니라,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나 지극히 높으신 그리스도의 신성 앞에 그의 엄위와 존귀하심과 전능하심 앞에 부복하는 그런 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을 삼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이고, 그것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예수 믿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흠 없이, 티 없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빛들로 나타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영역의 확장, 그리고, 이러한 영역의 진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면, 뒤에 나오는 ‘의’라고 하는 것은 주권의 질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권은 한 나라가 스스로 정부를 세우고, 그 나라를 누구의 간섭이나, 누구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그 백성들을 행복하게 이끌 수 있는 길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권을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치옥스러운 36년 일제치하에서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이 주권은 이 세상 나라에서는 국민전체에 있다거나, 귀족들에게 있다거나, 아니면, 군주 한사람에게 있다거나, 하는 정체를 취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주권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알고, 충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계시된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면서 사는 그것이, 자신에게도 가장 행복이 되는 질 높은 국민들을 만들어야지만, 그 나라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거기에서 바로 의를 추구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의’는 고유한 의미에서는 정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잘 먹고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은, 더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서의 올바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의 품안에서 정확하게 익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일생에 하나의 질이됩니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성경을 통해 이 세상에 계시된 하나님의 흠 없는 의지입니다.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존재와 삶의 이유가 되는 사람들을 왕국에 가득 채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시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공급해주신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양식은 아주 다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할 때에도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총 들고 나가서 싸우는 사람만 1명이고, 그 1명을 떠받치는 사람이 7명이랍니다. 그러니까 10만명이 전투를 하고 있다면, 약 60만명의 사람, 혹은 70만명의 사람이, 뒤에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목사가 될 필요는 없고, 그저 목사는 은혜 많이 받은 성도, 한 300명에서 500명중의 한사람씩만 신학교 가겠다고 나오는 사람이 나오면 충분합니다. 오늘날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신학교로 갑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형편은 심히 쇄락하게 되었는데, 신학교 가겠다는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전에는 여학생들은 별로 안 갔는데, 이제 여학생들도 얼마나 많은지 뭐, 한 학년에 4-50명씩 된다고 하니까, 몇 십명씩 된다고 하니까,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없는 이유는 뭐냐하면 그 소명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너무 쉽고,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또, 한쪽으로 몰려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무대가 어찌하여 신학교를 가고, 선교사로 헌신하는 것밖에 없겠느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삶의 전 영역에서 거룩하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며 그를 향한 신앙과 사랑을 삶속에서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 삶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양상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떠한 모양으로 이 세상에 살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하는 일은 달라도 그 하나의 왕국의 소명을 따라서 하나로 수렴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기위해 총을 쏘는 사람이나, 사령부에 앉아서 지휘하는 사람이나, 혹은 비행기를 몰고 폭탄을 떨어뜨리는 사람이나, 전쟁하고 온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김밥을 싸는 사람이나, 모두 일념은 똑같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 전쟁이 속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목표에 그 나머지 목표들이 모두 매달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선교해야 하는가 하면, 이미 믿은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 한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왕국을 위한 소명에 불타는 삶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정말 더, 아름답고,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게 된 모든 사람들이 교회 와서 한번 예배를 드리고 불굴의 전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가 않고, 사람마다 신앙의 깊이가 다르고, 영적인 준비가 다양하기 때문에 가서 쓰러지고, 실려 오는, 그런 부상자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또, 병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때도 있어야 됩니다. 교회 전체가 병원이어서는 안돼지만, 구석 어디엔가는 야전병원이 있어서, 그런 사람 데리고 오면 눕혀놓고, 피투성이가 돼서 다리를 질질 끌고 온 사람, 놀다가 총에 맞았든지, 전쟁하다 총에 맞았든지 간에, 온 사람에게, 군인이 ‘이게 뭐냐고, 빨리 가서 싸우라’고 새총을 들려주고, 등을 떠밀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회 전체가 병원이 될 수는 없지만, 어느 한 구석에는 병원 같은 데도 있어서 치료를 해야 되고, 또, 애국심에 불타서 맨주먹, 붉은 피로 나가서 싸우고 싶지만은, 그러나, 지금은 어느 땐데, 맨주먹, 붉은 피 입니까? 무기도 있고, 많은 도구들이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전쟁터로 뛰어나가고 싶은 열렬한 성도들을 잠시 앉혀놓고, 상세하게 적군의 전략이 뭐고, 최신 무기가 뭔지를 가르쳐주면서 성경의 내용도, 교리의 내용도, 삶에 관한 규칙도 가르쳐주고, 이러이러한 때는 어떻게 전쟁을 하라고 잘 가르쳐서 무장시킨 다음에 보내야 됩니다. 아는 것은 많아도 기본적으로 체력이 없어서 발길 한번 걷어 차면 뼈가 우르르 부서질 것 같은 사람들을, 좀 전쟁에 내보내지 말고, 식당 같은 데에 앉아서 먹여서, 좀 살도 찌고, 뼈도 키워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은 부인의 막사가 될 수도 없고, 야전병원 같을 수도 없고, 시장 같을 수도 없고, 식당 같을 수도 없고, 그 모든 기능을 골고르게, 고루고루, 골고루 갖추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고 촉구 하셨지만, 병들어서 내 ‘중풍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러고 오는 사람들한테 ‘넌 가서 날 위해 죽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아팠더냐’ 그러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면서 치료해야 됩니다.
언제가 어느 교회에 갔는데, 그 목회자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에서는 새벽기도에 계속 나오지 않으면 등록을 안 받아 준답니다. 열심은 이해가 되는데, 말이 잘 안되잖아요. 군인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올 때, 완전 군장하고 무슨 특전사 옷을 입고 등록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녀석은 죄를 짓고 피투성이가 돼서 오는 놈도 있고, 그리고, 그저 사지는 멀쩡한데 정신이 왔다 갔다 해서 적군이 누구인지, 아군이 누구인지 모르고 오는 녀석도 있고, 개념 없이 뭐, 군대온 것을 무슨 오락하러 온 것처럼 그렇게 까부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다 와서, 하나씩 하나씩, 약 발라줄 사람 약 발라주고, 혼낼 사람은 혼내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옛날에 교회에 등록할 때 새벽기도 먼저하고 등록했어?’ 내가 그렇게 물었습니다. 우린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고의 소명,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만한 부를 누리고, 지식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를 얻고 있을지라도 세상나라에서는 그것이 번쩍번쩍 빛나는 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왕국의 소명을 위해서 소집된 군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소명에서 이탈된 삶을 살아가는가? 그게 바로, 염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염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 특별히 모든 염려가 아니라,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아라.’ 그 염려 때문에 사람들은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 보면, 예수님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그 이유는, 바로 그 앞으로 넘어가면, 보물을 이 세상에 쌓아두기 때문입니다. 요즘 뭐, 주식 때문에 거의 전쟁 이더라구요. 그런데, 뭐, 최근 얼마동안에 한국 주식시장에서 200조가 빠져나갔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근심하게 됩니다. 저는 주식이 거의 투기같은 성격이면 그것은 나쁜 것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돈을 투자하고 거기에 어느 정도 합당한 댓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자의 개념이기 때문에, 마틴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주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비기독교적으로 매도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심한 견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제조업이나 하고 먹고 살든지, 아니면 농사지어서 먹고 살아야 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문제는 탐욕과 욕심이 문제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우리들이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하면 돈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은 하나님 다음으로 믿을 만하고, 권력입니다. 그래서 돈은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돈이 할 수 없는 것 빼놓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이 돈은 가장 훌륭한 보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 땅에 계속 쌓아두려는 것은 결국은 그것을 통해서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 그것을 통해서 염려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재물에 집착하게 만들고, 적극적으로는 미래의 삶이 지금 보다도 더 복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사실은 물질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물질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그러는 동안에, 그러한 물질에 대한 강한 집착이 그 뿌리가 결국은 불안입니다. 불안...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강력한 불안과 염려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결핍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도 욕망을 버리고 나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수많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갔습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천지창조 이례로, 이제까지 살다가 죽은 사람의 숫자가 일천억명 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소명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왕국의 소명과는 상관이 없이 살다가 죽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헌신하며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따르지 못하게 했던 것은 적군이 너무 강하고, 마귀의 세력이 너무 크고, 놀라와서 그 나라를 위해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모든 문제는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내부의 문제는 바로 염려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에 매일매일 지극히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한 순간도 소명을 위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만 이만한 때에 이 기간 중에는 내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이 왕국의 소명을 따라서 치열한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처럼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삶의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어젯밤에도 가만히 누워서 생각해보니 이제 뭐, 다 이렇게 돌아가시잖아요. 하목사님도 돌아가시고, 옥목사님도 작년 9월에 돌아가시고, 얼마 전에는 존 스토트 목사님도 죽고, 다 이렇게 돌아가십니다. 그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우리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짧은 삶인가? 그런데 주님께로부터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입고, 그리스도의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신학교를 가서 입대한 것이 아니라, 회심한 그 순간 입대한 것입니다. 젊어서 기운이 있고, 그리고, 힘이 있을 때에는 무지해서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지를 못했고, 그리고 철이 좀 든 뒤에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접지 못해서 수시로 탈영했습니다. 이런 날, 저런 날을 다 빼고 보면, 정말 새털 같은 날들 중에서 주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 전쟁에서 작열하게 싸운 날들은 너무나 손에 꼽을 정도로 너무나 작은 날들입니다. 이제껏 까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유하게는 살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예수 믿은 그날부터 이제까지 먹이고, 입히고, 재우시고, 어머니 같은 따뜻한 배려로, 우리의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우리의 쉬고, 잠잘 곳, 모든 것들을 주님이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고, 지금 여러분이 걸치고 있는 옷부터,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모든 환경 중에서 티끌만한 것 하나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들을 주신 의미를 올바로 알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헌신했는지 돌아볼 때에 정말 부끄러운 것 뿐 이었습니다.
군인에게 지급되는 모포는 전선에서 전투하다가 추위를 피하며 덮으라고 준 것입니다. 그것을 덮고 따뜻하게 지내고, 내일 아침에는 감기 들지 말고, 적군과 싸워달라고 나라에서 공급해 준 것이지, 밤에 펴놓고 화투치라고 준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화투 칠 때에는 군용담요가 제일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서 알루미늄 수통을 허리에 채워준 것은, 물을 담아가지고 다니다가 목이 마르면 먹고, 행여나 목이 말라서 기진하여 적에게 지지 말라고 준 것이지, 거기에다가 막걸리 담아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위해 공급해주신 많은 것들을 그릇된 용도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나라에 진전은 멈추거나 후퇴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은 점점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거짓신자들이 교회에 가득하고, 복음을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그 복음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그런 교회가 된 것은 얼마나 이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들이 전선이 밀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전쟁해야 할 시간에 뒤에 가서 호박씨를 까고, 그리고 죄를 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만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총 매고, 군화신고, 행군할 때는 행군하고, 쉴 때는 쉬고, 전쟁할 때는 비록, 고개는 오리처럼, 땅바닥에 뭍고, 엉덩이는 든 채,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적이 있는 방향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그런데,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오합지졸 같은 군인들밖에는 될 수가 없었을까요? 총도, 칼도, 최신병기도, 모두 지급되었지만, 그 마음이 전쟁에 있지 않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염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염려가 죄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보면 염려 자체가 죄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염려의 뿌리를 캐들어가 보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사랑한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뒤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는 삶을 살면 모든 것을 그에게 미리 아시며 공급해 주시겠다는 인격적인 신뢰가 부족한 불신앙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랍어로, 염려하다는 말은, 원래 뜻이 ‘마음이 갈리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믿으며 살아온 우리의 날들 중에 죄짓고 불순종한 날들은 뼈아프게 회개한 날들은 있지만, 염려하면서 사느라고 우리의 마음을 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전쟁에 온전히 바치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서 회개한 적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염려, 무엇을 먹고, 입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염려가, 예수님처럼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의 모든 지성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의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미래의 행복과 편안함이라는 낚시 줄 하나에 걸려서 우리는 뒤움치며, 그렇게 몸부림치고, 하나님의 왕국에 소명을 위해 거대한 바다를 헤엄쳐야 할, 그런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의식 없이 한 순간, 한 순간, 그렇게 살았던 많은 날들이 주님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라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들의 핀 백합을 보거라. 길쌈과 수고하지 않아도 너희 천부께서 기르신단다. 공중 나는 새를 보아라. 창고의 거두어 들이지 않아도,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는데, 너희는 이 들풀보다 공중의 나는 새 한 마리보다 정말 귀하단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요, 소명을 따라서 이게 나의 소명이고,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면, 집달라고 기도한적 없고, 예쁜 옷 달라고 간구한적 없고, 기름진 음식 먹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적이 없는데도, 하나님은 필요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십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집중할 때에 하나님이 안주십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관심을 떼고, ‘아, 나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이 한 일생을 살아야 할까?’ 그런, 소망을 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에는 상급이 없습니다. 근심에는 상급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회심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빛나는 그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군대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사령관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너무 빨리 세월이 흘러갑니다. 얼마나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어디에다 써야 될까요? 방황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또, 그렇게 해도, 손에 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 주님을 다시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비단옷을 입고, 왕의 옷처럼 호사하는 것이 세상에서 영광일지 모르지만, 의로우신 주님 앞에서는 그날에는 피뭍은 전투복이 가장 영광스러운 복장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힘이 있을 때에 기력이 남았을 때에, 과거에 살았던, 염려와 근심으로 태워버린 허무한 날들을 안타까워 하면서 시간을 아껴 쓰고, 우리의 젊음, 남아있는 우리의 기력, 모든 것을 모아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찬양)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그렇게 싸우다가 주님의 나라에서 걸레같이 피뭍은 전투복을 입고 만난다면, 그때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5.용서의 비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의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녹취자: 김경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알다시피 주기도문은 여러 개의 기도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해서 나라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그리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소명으로 끝이 납니다. 그 중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라는 중요한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토를 달지 않으시는데 이 주기도문을 마태복음에서 가르쳐주신 후에 유독 그 여러 개의 기도제목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상세하게 풀어서 똑같은 말로 다시 한 번 길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주기도문에 있어서 허리와 같이 매우 중요한 기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최고의 기도이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기도제목들은 바로 그 첫 번째 기도제목에 수렴됩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보면 나머지 모든 기도제목은 첫 번째 그 기도제목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그런 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이 모든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입니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라는 소명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기도들을 위에 있는 기도와 아래에 있는 기도 즉 처음 나오는 세 기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이 상부에 있는 기도와 하부에 있는 기도 사이를 묶어주는 허리와 같은 기도가 바로 이 용서에 관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지만 마음속에서 슬며시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고개를 듭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 저녁에도 그제 저녁에도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창조주이시고 통치주시라는 사실을 강조 받으며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이 과실은 그가 나의 이익과 관련해서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하거나 실수를 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과실을 너희들이 용서하면 하나님도 그것을 보고 너희를 용서해주신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을 용서를 안 하면 하나님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너희가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살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고 또 ‘너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라고도 말씀하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이 용서에 대한 주기도문의 이 가르침이 갖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사이에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려는 원대한 계획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짧은 새벽시간에 이 위대한 본문을 여러분에게 모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미움과 용서’,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의 질서’, 이런 곳에서 이 내용들을 부분적으로 여러분에게 설교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주기도문에 있어서 허리에 해당할 정도로 그렇게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리가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에 비추어서 주기도문의 이 기도제목을 비추어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야지만 주님이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이 없어도, 사람을 만들지 않으셔도 하나님에게는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충만한 완전성으로부터 전적으로 당신의 뜻을 기쁘신 계획에 따라 만드실 수도 있었고 만드시지 않아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셨지만 당신의 기쁘신 의지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 속에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기왕에 창조된 세계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적 사물로써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천상에서는 이 지상의 감각적인 사물이 아닌 영적인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셨지만 이 지상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속에 속한 크기와 모양과 부피와 그리고 질감이 있는 이 모든 감각적인 사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도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지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당신이 창조하시지만 그 몸은 부모의 몸을 빌려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모두 한 몸, 한 피, 한 살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태어난 인간들에게 당신을 닮은 영혼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알고 그 창조하신 일을 섬기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똑같은 처지에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보고 알게 해주셨고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한 가족처럼 아주 아름다운 사랑의 결속으로 연합하게 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을 빚으셨을 때 하나님이 그를 아담에게 데려오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말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남녀 간의 사랑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부모지만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똑같은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아마 그 아이가 심장이 필요하면 여러분이 부모로서 기꺼이 그 심장을 떼어 그 아이에게 주고 죽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부부가 되는 남녀뿐만 아니라 그 몸에서 태어나는 모든 새끼들과 그 자식들의 형제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런 사랑을 함께 누리고 받으며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을 희미하게나마 어느 정도 본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인류들이 번성하고 번식해나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이런 놀라운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어 위로부터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언제나 부어지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힘입어 어떻게 하나님을 닮은 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고귀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의지하며 하나의 가족과 같은 삶을 이 세상에 펼쳐 주님의 사랑으로 연대를 이루면서 이 피조세계를 가꾸며 하나님을 공경하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는 제일 먼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사랑의 관계를 결딴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끊어지자 마치 스위치 내린 전등의 불이 나가듯이 사람 사이의 사랑도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할 수 있는 큰 능력의 방향을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사랑하는데 주님이 주신 사랑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극도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방향이 자신에게로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위해서 남을 배려하게 되었고 이것은 순수한 자기사랑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야수들이 사는 세상으로 방치하시지 않기 위해 남겨두신 자연계시의 빛, 인간의 양심에 깃들여있는 하나님의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굉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여전히 통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알게 된 사건인데 십몇 년 전에 살인사건이 났습니다. 돈이 조금 있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는데 그 사람을 납치해서 세 명인가 공모해서 죽여서 시체를 묻어버리고 2억 원 이상의 돈을 강탈하여 그것을 나누어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긴 세월이 흘렀고 결국 이런 저런 혐의들을 받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무혐의 처리 되어서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살인범 중에서 공모했던 한 사람이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죽기 8일전에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이렇게 사람을 죽였노라고 자백을 하고 8일후에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사가 급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만히 눈을 감고 8일만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날 터인데 그는 왜 죽음의 문턱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요? 그는 틀림없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신이라고는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살인을 하고 돈을 뺏은 그날부터 단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자본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망령이 나타나서 밤이면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운 고통을 주었고 양심의 가책 속에서 폐인처럼 살다가 결국은 그런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오는 긴장과 괴로움이 암의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었는데 그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어마어마한 힘, 그것이 바로 율법의 힘입니다.
율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의 몸 밖에 있어서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인데 이것은 아주 나중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우리 몸 안에도 새겨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신은 죽었다고 철저하게 무신론을 외치던 니체가 ‘양심을 따라서 판단해야 된다.’는 책을 읽으면서 막 웃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없는데 양심이 어디 있습니까? 왜 선하게 살고 악하게 살아야하고 선과 악이라는 기준 자체가 어디에 있느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것을 비웃듯이 부인해도 그것은 잠깐이고 양심은 선명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이 양심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부르짖던 사람도 양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데 많은 인류학자들은 양심을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양심의 신성설입니다. 신의 목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 못해도 그분의 목소리는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까? 이런 것을 남겨두셨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제법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양심과 율법의 기능과는 별도로 인간은 그 다음부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기쁨과 그리고 직시로 가득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조용히 믿음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는 처음 초상들의 선명한 이성은 바로 그 뒤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과 상합하여 이 모든 창조세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기한 아름다움을 보며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경건은 그것은 성경적인 경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핵심을 이루면서 파문처럼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단일한 원을 그리면서 넓게, 넓게 퍼져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과 내 가족과 이웃과 그리고 자연의 이 모든 세계에까지 합당하게 대우해주며 그런 질서 속에서 살아가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이제 하나님 한분을 중심으로 퍼져가는 물결과 같은 단일한 사랑의 질서에 나를 복종시킬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저마다 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원을 그리는 그 큰 힘은 권력과 물질 그리고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자원을 더 많이 빼앗아 큰 힘을 갖고 큰 원을 그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게 되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빼앗기 위해서 사람을 죽고 죽이는 살인도 서슴지 않게 되었고 이 사랑의 질서, 이익의 질서들이 나라와 나라사이에 충돌할 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다음 인류가 맞이했던 비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습니다. ‘악이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 ‘패역이란 그릇된 질서에 대한 사랑의 본성이 마음속에서 굳어진 것 그래서 웬만해서 고쳐지지 않는 고집이 되어 버린 것’ 그것이 패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작은 원들을 그리면서 자기 사랑의 질서의 세계를 세워감으로써 다툼과 파괴, 살인과 그리고 도적질을 일삼는 이 망가진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시려고 했던 그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이 질서를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창과 칼로 자신의 사랑의 동심원의 크기를 크게 만들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한 자루의 창과 칼도 없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불행하게 살아가고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너무 너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이 비참한 인간들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앞으로는 자살이 지금보다 훨씬 더 일반화될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살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사이트가 있고 집단적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자살을 한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일반화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살이 앞으로도 점점 많아질 것인데 그 이유는 죽음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살하는 것은 너무 너무 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생의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노예로서의 삶에 아주 익숙해진 노예가 노예살이가 서러워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너무 너무 치열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살고 싶은데 이런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 그 자체는 끔찍한 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물론 하나님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갈망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죄인과 거룩한 신자 사이에 방향은 다르지만 놀라운 일치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내가 죽어야합니까? 여러분! 다른 사람들 앞에 찌그러지고 무릎을 꿇고 그리고 비굴하게 용서를 빌고 피차 잘못했는데 내가 먼저 사과하는 이것이 좋은 것입니까? 사람들에게 칭찬과 경배를 받을 때에 마음이 좋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충분히 동의되어지지도 않는데 무릎을 꿇고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빌거나 사람들 밑에서 무릎을 꿇고 박수를 칠 때가 신납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는 사람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만물의 찌기입니다. 나는 그냥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은 너무너무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예수 안에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찬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예수와 함께 너무 너무 살고 싶은 사람들만이 다른 방식으로 너무 너무 살고 싶은 사람들만이 예수와 함께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극단에 있는 자기 사랑의 사람과 극단에 있는 예수의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랑이 놀라운 일치를 이룹니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크기가 창조 시에 부여받은 능력의 크기가 줄어들거나 작아진 것이 아니라 방향만 바뀐 것입니다. 방향만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극단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잘 돌아옵니다. 도학군자처럼 인생의 사는 이치를 자기도 안다고 상당히 절제하며 살던 사람들은 자기 의에 가득차서 주님께로 잘 안돌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은 거기에서 그 사랑의 끝을 경험하는 수가 있습니다.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사랑의 크기는 남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한계가 느껴질 때 그 사랑 아닌 다른 사랑을 갈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순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래서 극단적인 쾌락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팽개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가 지은 죄는 잘못된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강요받던 그 사랑의 질서와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내가 이익을 나누어주고 권력으로 굴복시킴으로 나를 섬기고 내 중심으로 사람들이 질서를 잡도록 그래서 내가 아닌 사람은 내가 아니고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사람이고 이렇게 자기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권력과 그리고 무력으로 나라를 확장시키며 자신에게 경배를 강요했지만 예수님은 칼 한 자루 없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일은 그들이 아득히 잊고 살았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지를 몸소 그의 인격 안에서 그의 삶속에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책 한권 쓰신 일이 없고 논문 한편을 작성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여의도에서 하는 집회처럼 수백만 명을 모아놓고 마이크를 들려주셔서 외치신적 한 번도 없었지만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이 가르침이 강물처럼 깊이 흘러들어왔습니다. 마치 마른땅에 흘러들어가는 강물이 하천에 하천이 개울에, 개울이 실개천이 되어서 그래서 온 땅을 두루 적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예수의 넓은 사랑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큰 부성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창과 칼이 두려워서 굴복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바로 나의 모든 불행이 나를 사랑하는 치열한 자기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의 깃발을 꺾고 십자가 아래로 모여 한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또한 형제자매를 함께 사랑하여 하나의 거대한 사랑의 질서를 이루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줌으로써 여전히 자기 사랑의 질서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며 이웃과 분쟁하는 사람들이 그 허접한 자기 사랑의 행복의 깃발을 꺾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아래 모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이룬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신 주기도문이 아니라 이렇게 당신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온 자기의 자녀들에게 주신 주기도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에 감격했고 그래서 자기 사랑의 아집의 깃발을 꺾고 십자가 그늘 아래 모여 피 묻은 십자가를 찬송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부패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린 십자가 사랑 앞에 감읍하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만이 이게 나의 전부라고 고백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한 번의 고백으로 유지될 수 있는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아래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온 것 하나에 만족하지 않고 내 안에 남은 죄의 본성은 곧 자기 사랑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궁극적인 사랑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쉬운 싹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고 이제 내안에 사신 분은 예수뿐이시다.’ 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십자가에서 못 박혀 있다가 내려오려고 하는 나 자신의 죄성을 보면서 날마다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도 자기 사랑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교회 안에서 다시 이 십자가의 큰 깃발 아래 온전히 복종하는 대신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옛날에 하던 그 짓인 다시 자기의 깃발을 세우고 깃발아래 나와 사람들을 복종시켜 자기가 중심이 되는 질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 야망이 인간에게 끝까지 남아있고 그 크기가 다를 뿐이지 이것에 있어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과실 즉 형제들이 내게 대해서 지은 그 과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짓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을 나는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권한을 가진 것은 나의 이익과 관련되어야합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지만 내가 용서해줄게.’ 의미 없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에게 그 나쁜 짓을 했지만 내가 용서해줄게.’ 그것은 월권입니다. 자신이 그런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이익이 침해당해야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손해를 본 것이어야 합니다. 손해를 본 것이 없으면 용서해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나의 물질을 강탈했습니다. 좋은 평판을 망가뜨렸습니다. 나에게 심각한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깃발을 꺾고 주님께 돌아온 이 십자가의 깃발 아래로 돌아와서 이제는 존재론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치론적으로 ‘나는 아무 무익한 인간입니다. 내게 선하고 좋은 것이 있다면 나를 구원해주신 그리스도 때문이고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원래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좋게 창조하신 그 덕분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것은 처음 십자가 아래로 모였을 때 그 신앙고백을 전면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용서이고 하나는 나눔입니다. 나눔은 육적인 구제이고 용서는 영적인 구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늘은 내가 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주지만 내일은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내일은 내가 용서를 받아야하는 처지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그 십자가 그늘아래서 자기의 깃발을 꺾고 모였던 그 처음 사랑의 그 연합을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 품은 원한을 깊이 가슴에 품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관련된 또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되면 그 피해를 본 사람이 또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깃발을 꺾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인 이 사람들이 끊임없는 원한 속에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따라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원한의 그리고 미움에 가득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그리고 선교에 지원했는데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가기 전에 선물을 투하고 준비 작업을 많이 한 다음에 그들에게 접근해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함께 갔던 그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3년 후에 젊은 여성 하나가 바로 엘리엇이 가서 죽임을 당한 그 마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여성의 몸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놀랍게 그는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마을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서 그곳에 그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랍게 그 식인종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 여자가 전해주는 그 사랑의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사역을 마친 후에 그 마을을 떠나려고 했을 때 추장은 온 동네사람들을 불러놓고 떠나는 이 여성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떠나기 하루 전 그 성대한 만찬장에서 그는 비로소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바로 그 옛날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당신들이 죽였던 그 남자의 아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그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엘리엇 선교사를 죽였던 그 살인범은 이 여자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후에 이 엘리엇의 자녀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복수를 꿈꾸고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갚음으로 되갚아주기를 원했다면 아마 이 여자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사랑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어떻게 당신의 그 큰 사랑의 베푸는 것을 우리의 용서 여부에 달렸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남의 과실을 용서하면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주시겠지만 용서하지 않으면 천부께서 너의 과실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이 대목을 우리는 올바르게 해석해야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히브리사람들의 어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어법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자, 아이들 둘이 있습니다. 엄마는 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합니다. 변함없습니다. 떡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동생이 더 배고픈 것 같아서 동생을 주었습니다. ‘네가 먹어라.’ 그랬더니 형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엄마는 나만 미워해!’ 미워한 적 없습니다.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떡을 동생에게 주었을 뿐입니다. 한 번도 미워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히브리사람들의 어법입니다. ‘너희가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미워하면’ 그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나만 사랑하라 내게만 순종하라.’ 너무나 예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니까 아내도 사랑하고 부모도 사랑하지만 그것이 미움으로 이해됩니다. 그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용서의 경험과 함께 들어온다는 것을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실 때에도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경험을 통해 밀물처럼 밀려오듯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를 미워하고 싶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는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편을 들어서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고 공동체로써의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에게 과실을 행한 사람을 용서하여라. 그 일이 힘들지만 네가 용서하면 그 사람은 그 공로를 몰라주어도 내가 너를 더 사랑하마.’ 그 메시지입니다. 그 음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모두 자기가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고백했던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정말 놀랍게 그 사실을 누군가를 미워할 때에는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네게 용서받은 사람이 너에게 무릎을 꿇고 너를 더 사랑하고 존경해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마.’ 그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과실을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를 그 죄를 통해서 오히려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겠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차피 불완전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자기를 버리시고 죽으신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용서합니다. 특별히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었을 때에 언제나 그 이익을 포기하면서 용서합니다.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면 그는 나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중심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우리 속에 깊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좋은 모든 것을 가져가십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선명하게 날마다 그 말씀으로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던 그 말씀이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내 귓가에 와서 흩어져 바람에 날리듯이 산발한 것처럼 그렇게 분산되어버립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향해 화살을 쏘듯이 그렇게 기도의 편지를 올려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역이 부패하고 식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감격과 십자가의 사랑도 미움 앞에서는 꼼짝없이 모두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미움은 마귀에게 속한 일이고 용서와 사랑은 성령에게 속한 일이니 누구도 은혜 없이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고자하는 마음의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이런 용서를 하나님 앞에 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언제나 밀려오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에 급급한 나머지 영혼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이 무서운 미움의 문제들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이고 예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서 다시 만드시려고 하는 그 구원의 계획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용납하며 그렇게 지체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 사랑과 용서의 관계는 이 교회라는 밀알이 썩고 마지막에 이 세상이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보게 될 그 사랑하는 세계의 실현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어쩌면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기도 안 되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또 육신의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여러분 안에 있는 이 미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이 있는 복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