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녹취자 : 장주은
오늘의 주제는 아름다움과 신학입니다. 저에게 편안하게 한국말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고역입니다.
우리들은 종종 여러분들은 선교사이시거나 선교를 지망하시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부터 별로인 분도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열정적이고 훌륭한 선교사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반대인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되냐하면 참 사람은 믿을 수 없구나, 젊은 날 그렇게 순수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왜 변할까. 또 적합해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도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놀랍게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전자의 경우, 좋은 선교사나 목회자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아주 뚜렷한 소명의식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들을 보면서 많은 애로사항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원인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궁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순서대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들어가는 말, 올바른 신학함,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 별이 빛나던 밤에, 맺는 말. 우리는 굉장히 서정적이어야 합니다.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어야지 좋은 것입니다. 금방 주제로 점프를 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설명이 필요한데 여기서 ‘신학함’이라고 할 때 신학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학대학원에 가서 커리큘럼으로서의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모든 탐구, 특별히 복음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앎이 자신의 삶과 일치해 가는 모든 과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보겠습니다. 목회의 소명, 복음 사역을 위해 소명을 받았다, 라고 할 때에는 우선 아주 그가 분명하게 자기의 소명을 체험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소명 체험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선교든 목회든 일이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정한 소명 체험은 일이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럼 뭐가 부른 것입니까? 인격이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무슨 인격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격이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를 하고 목회를 하지만 그 자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선교와 복음사역에 매이게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사도바울의 경험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납니다. 그러면서 혼란에 빠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데 예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인생관과 세계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어떤 팩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은줄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 사실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으면 하나님이 살리실 리가 없고 살아났다면 저주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거기서 substitution,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이후에도 모든 복음사역자의 진실한 소명의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께로부터 자기의 삶에 어떤 가치와 목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 같은 분은 이것을 어떤 식으로 설명 하냐 하면,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선교사가 되고 목회자가 되었으면 우리의 소명은 평신도들의 소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수준의 차이입니다. 누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도록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 정도가 너무 크고 도저히 자신이 이러한 복음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부담을 안고는 다른 일에 종사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어떤 신적인 강제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여기서는 그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소명이 필요하고 회심과 같은 그런 경험이 필요하고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명은 성화의 의지입니다. 성화라는 말 아시죠? sanctification. 우리가 즉각적으로 구원받고 난 다음에 이것이 점진적인 구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과 말씀으로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끊임없이 정화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이 끊임없이 그 은혜에 화합하는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지속적인 성화 속에서 소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순간적인 체험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화의 작용 속에서 소명이 유지되어 가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함,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올바른 신학함은 무엇이냐 하면 지식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지식과 사랑 그 자체는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같은 사람은 노띠띠아 에스트 아모르, 지식은 곧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아주 오래된 전통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계몽주의 이후에 무너지면서 지식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생겨나게 되고 성경의 통일성인 지식에 대한 견해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간에, 지식과 사랑은 결합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복음사역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것.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르쳐 준다고 할 때 하나님의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이냐? 아뜨리 부뚬, 하나님의 속성.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어떤 사물을 그것 없이는 그것 되지 못하게 하는 성질, 이것이 속성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 모드소페란디, 그 속성이 이 세상에서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두 가지 지식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참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 사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서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성경의 진술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 가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속성, 혹은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것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유지하고 지키며 살아가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4장을 보면 어떤 말씀이 나오냐 하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그때 그 지식이 히브리 말고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그럴 정도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 독특한 경외의 삶을 살면서 이방 백성들과 구별된 공동체로서 살아가게 하는 그런 모든 삶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것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많은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또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있었는데 당신의 속성과 그것이 시행되는 방식을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여기서 조금 디그레션(degration)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구약성경에서 강조가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나 이런 사람들이 내다보았던 이스라엘의 영광스런 전망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종말에 대한 전망이었습니다. 이것들은 구약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다만, 이어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전망은 무엇이냐 하면 모두가 이 지식 안에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에 의하면 그 지식은 거기서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식이 증진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모두 안다는건 불가능합니다. 천국에서 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확장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아주 중요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크리스털로지칼 칼벌전 ( ? 12:44 )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에 관해서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안나오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노시스크리스투, 라는 말이 특히 사도바울에 의해서 아주 강조가 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푯대를 향해 달려갈 정도로, 그래서 사도바울의 진정한 비전이 사실은 선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궁극적인 비전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지식에 가득 차고 자기가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지식으로 채우는 그런 것이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궁극적인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야기하면 길지만 그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신학은 온 몸으로 하는 것이지만 가장 앞서가 있는 것은 우리의 지성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아까 말씀드린 당신의 속성을 가르쳐 주시고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그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성의 자격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예쁜 사람들은 시집도 잘갑니다. 물론 탁월하게 예쁘게 생겼는데도 뜻을 세우고 안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실제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옷을 잘 입고 남자나 여자가 예쁘게 하고 가면 물건을 싸게 산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거래를 할 때에. 항상 자기를 가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의 아름다움이 훨씬 중요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영혼의 침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싫증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묘약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예쁜 분인지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다시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면서 그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그 분이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시기 때문에 자기는 티끌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 떨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께 끊임없이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경외의 감정과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것을 증진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종교개혁을 마르틴 루터가 시작했지만 이 사람이 종교개혁을 사실상 완성을 합니다. 이 기독교 강요는 다 읽어보셨겠지만, 안읽으셨으면 읽으셔야 합니다. 이 책은 천 년 동안 세계를 움직인 열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움직인 열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입니다. 실제로 읽어보면 이 책이 그 정도로까지 영향력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그런 류의 책들을 너무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 시대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 책은 한 줄기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칼빈에서 목회를 할 때 제네바의 문장이 심장을 손으로 받치고 있는 문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글귀가 “주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그러면서 추구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경건과 학문입니다. 삐에따스, 경건이 먼저 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사랑, 그리고 그에 합당한 지식의 추구, 이 두가지가 개신교의 위대한 역사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을 보여주는데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히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혹은 푸치우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16세기 말에 태어나서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 전성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영국의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에 네덜란드는 이제 개혁주의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쇠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 왜 이렇게 훌륭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열정이 사라지고 쇠퇴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그 답을 청교도들에 의해서 찾게 됩니다. 이 사람이 그 당시에 대부분 그랬듯이 이 사람들도 카톨릭이었다가 개종을 했는데 아마 개신교에서 카톨릭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많이 알고 있었던 엄청난 지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생을 거의 올바르지 않은 카톨릭과 이 비정통적인 사상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을 바칩니다. 이 사람이 내세웠던 신앙의 모토가 엄정주의 라는 것을 내세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성경에 있는 가르침을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따르면서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신학교 안에 살면서 자기의 신학생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 학생들을 이 시대의 바이블 클래스를 만들어서 지도를 합니다. 그리고 소그룹 운동을 하고 그러면서 삶을 나누면서 그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제자들의 전통이 사실은 나중에 경건주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냐하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은 이렇게 참된 지식의 추구와 뜨거운 경건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몇 마디가 나오는데 감동적이어서 적어봤습니다. 신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엄정함, 곧 엄격함 만을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행동의 정확함, 혹은 완전함이다. 하나님의 율법, 곧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교훈에 일치하고 참으로 신실한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이다. 엄정성을 요구하는 근거, 하나님은 엄정성의 근거이고 유효인이시다. 유효인이라는 것은 그렇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거룩함이며 완전함이며 정확함이며 순결함이시다. 등등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에 우리에게는 옥스퍼드 홀리클럽을 중심으로 하는 메서디스트 운동이 있었습니다. 조지 윗필드, 찰스 웨슬레, 요한 웨슬레,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메서디스트라고 불렀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저거를 감리교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고 메서티스트라고 하는게 무엇이냐 하면 방식입니다. method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약간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니까 저 사람들은 좀 method of living, 삶의 방식이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메서디스트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식, 사랑, 삶, 이런 것들이 개혁신학의 개혁주의 목회 전통에서는 모두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전통 기독교의 중요한 흐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는 제가 30대 때 매료되었던 설교자입니다. 거의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델리 모어( ? 23:41 )라고 하는 사람이 이 분의 전기를 쓴 것이 있습니다.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이 분이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 분을 적극적으로 소개했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어떤 점에서는 멘토였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설적인 설교가였습니다. 이 사람의 설교를 듣고 깊이 은혜를 받아서 헌신한 사람이 피뢰침을 발견한 벤자민 워필드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니아의 설립자입니다. 얼마나 설교에 영향력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설교 한편을 듣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미국을 건너다니면서 18세기 미국의 1차 대각성에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칼빈주의적인 감리교 신학의 기틀을 다집니다. 굉장히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좀 부주의한 점도 없지않아 있지만.
웨슬레. 이 사람은 너무 잘 알죠. 종교적인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했고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해서 사실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영국을 구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국이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경험합니다. 산업화 사회에서 일부가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모든 부작용들을 이미 이 사람들은 17세기 때부터 이미 경험을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해외에 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식민지들이 개척이 되고 물건들을 내다팔고 하는 수출들이 이루어지고 하면서 공장제 수공업제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사람들이 농업을 해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거기에서 온갖 노동의 문제, 16시간씩 노동을 시키고 착취하는 문제들, 오늘날 산업사회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을 경험하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영국에는 경제적인 빈부의 격차, 도덕적인 붕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러한 신앙의 사람들이 영국을 살려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회는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것이고 학문적인 지식과 목회의 기술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사랑하는 전통들을 후대에 계승해 주는 것이 바로 올바른 목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신학이 있고 설교가 있는데 이 두가지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모두 감동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동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사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이 감동입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날 유튜브 같은 곳에 들어가도 많습니다.
엊그제도 유튜브에 뜬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을 뒤지니까 아주 좋은 호텔같은 곳에서 묵을 수 있는 티켓이 있는데 2만 6천원에 팔겠다는 것입니다. 가서 진짜 돈내고 묵으려면 10만원도 넘는데 얼른 사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돈을 미리 좀 보내달라고 해서 돈을 부쳤습니다. 2만 6천원을 보내면 되는데 3만 1천원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사연을 달았습니다. ‘좋은 행운권을 싼 값에 구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 식사시간이잖아요. 먹어야 힘을 내겠죠? 5천원을 더 보내드릴테니까 점심 맛있게 드세요. 고맙습니다.’ 금방 문자가 왔습니다. ‘저 손님 죄송한데 계좌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왜요? 벌써 팔렸어요?’ ‘아니요’ ‘왜요?’ ‘돈을 돌려드리려구요. 먹튀할 생각이었는데 당신이 너무 착해서 도저히 먹고 튈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문자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도 밥값은 빼고 보내주세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고 3만 1천원을 다시 보냈답니다. 수십만명의 네티즌들이 그것을 검색한 것입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복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감동주의’ 치고 들어가 보십시오. 불과 3,4분만에 눈물 흘리게 하는 감동적인 일화들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교사인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선교사가 누구냐하면 앤드류 머레이입니다. 이 분은 영국 출신인데 네덜란드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경건과 깊은 학문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이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어떤 점에 있어서는 동의가 안되는 지점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탁월한 글을 남겼습니다. 선교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깊고 무거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버려달라는 뜻입니다. 신학적인 능력에서 선교적인 역량이 나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의 사역이 점점 확장될수록 통일된 어떤 신학으로 자기가 함께 사역하고 있는 공동체를 이끌어야 할 무게감과 중압감들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단지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반드시 그 안에 신학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사상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 그래서 올바른 신학함이란 지식과 경건과 목회가 결합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리바이블리즘이라고 하는 소위 부흥주의의 어두운 유산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개혁주의라는 말보다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이라든지 성경의 절대성이라든지 복음의 필요성이라든지 인간의 죄인됨이라든지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든지 삼위일체라든지 기본적인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런 복음주의의 뿌리가 역사적으로 두 개입니다. 하나는 사도바울 이래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정통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것이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는 개혁주의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역사적으로 하나의 뿌리가 더 들어옵니다. 18세기 이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소위 부흥운동의 뿌리가 여기에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 이 부흥주의의 뿌리는 사실 18세기에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는 신앙에 있어서 지성을 우위에 둘 것인가 감정과 체험을 우위에 둘 것인가 하는 시계추처럼 끊임없는 진자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저기 사도시대 때부터 계속 그런 줄거리들이 여기에 들어와서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같이 만나게 됩니다. 이 두 개가 사실 양립할 수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서로를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고 보완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주의가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때의 부흥주의는 그래도 신학적으로 건전한 측면이 많았는데 이후 19세기에 있었던 2차 대각성 운동이라든지 찰스 피니 이후에 D.M.무디, 그 이후에 이어지는 오순절 주의, 은사주의 이런 것들로 흘러 내려갑니다. 거기에는 어두운 유산들, 우리가 정통 기독교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두운 유산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이 오늘날도 계속 복음주의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은 신화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주고 현대 선교 운동에 이바지하고 사회 개혁에 공헌을 합니다. 부정적으로는 목회자직에 대한 반지성주의가 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심오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성적인 전통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런 것들을 물려받으면서 사실은 신학교육이 너무 약화되었고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오히려 뜨거운 가슴 하나로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말에 미국의 켄터키 지방에서 있었던 부흥운동입니다. 분위기를 봐도 좀 컬틱합니다. 여기서 횃불이 타오르고 있고 춤추고 있고 합니다. 여기서 설교자가 외칩니다.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주장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원더풀 프리덤이라고 해서 놀라운 자유를 주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을 공부하고 과정을 이수하고 목회자가 되고 하는 것들은 다 지난 시대의 일이고 성령이 이렇게 충만하게 오신 시대에는 그런 것을 뛰어넘어서 누구든지 주님께 부름받은 사람은 설교자가 될 수 있고 목회자가 될 수 있다, 라는 파격적인 견해들을 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성직의 질서에 대해서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언 머레이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제자였고 20세기 영국의 최고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이고 부흥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쓴 책들이 여러권 있는데 모두 좋습니다. 이 분이 아까 켄터키 부흥회의 상황과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이들은 설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구별해 두는 일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하기를 주장하고 기독교 목회사역을 공격하는, 제대로 교육은 못받았지만 말이 유창한 사람들로 대표되었고 그들은 발언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었다.’ 이것이 부흥주의의 어두운 유산입니다.
무디입니다. 무디는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2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미국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을, 학문보다는 열정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을 널리 유포하는데 이바지하게 됩니다. 19세기 무디의 부흥운동 광경입니다. 이런 신앙의 풍조들이 20세기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에 의해서 계승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오순절 주의에서는 신학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소량입니다. 별게 없습니다. 그만큼 어떤 깊이있는 학문의 전통, 이런 것들에 힘쓰기 보다는 이런 부흥주의의 유산들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신학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복음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이 광경은 조지 윗필드가 길거리에서 설교하니까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통회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파격들이 일어나면서 신학 교육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경시풍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교류가 있었고 윗필드와 에드워즈가 사실은 18세기에 미국에 와서 수없이 설교하면서 영향력을 끼쳤을 때 노센튼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엄청난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철학자이자 사상가입니다. 이 사람의 학문의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비교가 안됩니다. 그래서 이 분의 사역을 보면서 주관적인 충동은 종종 상상력의 결과일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때 이 사람은 주관적인 충동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지 마스트린이라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세계적인 권위가가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윗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꾸짖었을 때 그 순회 설교자는 그것을 잘못임을 깨닫지 못한 채 냉정하게 그 주제를 무시했다. 두 복음 전도자는 협력자로 남았지만 함께 사역하기에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고 펼쳐지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사역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이 다루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랑의 스토리입니다. 그 구원 역사의 전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지개처럼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바로 그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역이 신약에서 전개됩니다.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구속사역이 전개되지만. 이런 모든 구속사역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보면서 구속사역이 전개될 때의 그렇게 전개되게끔 만드는 하나님의 성품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함으로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교하는 대상에게만 일어나야 되는 일이 아니라 선교하는 사람으로 목회하는 사람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면서 그 분을 즐거워 하는 일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강연을 해도 재미가 별로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면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감동을 받았으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도 감동적이어야 합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자기가 최근에 겪고 있는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 할 때 재미없을 수가 있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물론 관심이 없으면 재미 없을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냉정하게 자기의 사랑의 경험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는, 선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방법이 말로만이 아니라 인격과 삶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존재의 선교다, 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까 조지 마스턴 교수인데 미국 갔을 때 이 분을 만났습니다. 두 시간 정도 강가에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 그 때 우리가 함께 도달하게 된 결론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목회를 굉장히 미학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목회의 본질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성경을 통해 보여주어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동의를 하였습니다.
마틴 로이든 존스입니다. 이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설교는 무엇인가. logic on fire. 설교는 그 자체가, 로직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입니다. 파이어는 감정입니다. 냉담할 수가 없고 이것이 지식이라면 사랑입니다. 사랑에 불붙은 진리. 그 다음에 냉정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추론. 그래서 결국 설교란 신학을 설교하는 것.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진리를 감동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이 유지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 거룩한 의무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의 상태입니다. 마음이 소명감을 잃어버렸을 때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소명에 꽉 묶였을 때에는 이 거룩한 의무에 그 마음이 막 불타게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진짜 소명에 불타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요소도 있다고 하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이니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7년 전에 베트남에서 선교사들이 모였고 저를 강단에 초청했습니다. 여선교사님 한 분이 구지 저에게 굉장히 시니어 선교사였는데,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무슨 상담을 합니까 사역자들끼리 각자 알아서 하면 되지. 호텔에 묵고 있는데 막 자기 좀 만나달라고 합니다. 할 수 없이 만났습니다. 목사님, 전 아무래도 이상해요. 대학교 1학년 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곧 선교사로 헌신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전도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동남아에 와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가 헌신적으로 살다가 이렇게 시니어가 되었는데 요즘은 그 마음이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섭섭하다고 합니다. 구원해 주시려면 다 구원해 주시지 뭘 복잡하게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또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안 믿으면 땔감처럼 지옥에 쓸어 넣으시겠다고 위협을 하시고 왜 그러실까. 예전에는 이슬람 사람들을, 불신자들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고 그랬는데 그런 마음도 없어지고 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면 되지 우리 같은 사람을 선교사로 부르셔서 우리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우리를 사용하셔서 힘들게 일하고 선교에 진척도 없게 하실까. 요새는 그런 것도 다 싫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싶은데 텔레비전 보고 있으면 남편이 와서 ‘잘 한다, 선교사가 저런 거나 보고 앉아있고.’ 하며 툭 끄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그렇게 눈물이 날수가 없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 대해서 탁월한 통찰을 가지고 계시니까 저를 진단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많이 미끄러지고 타락한 것이죠?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적절하게 치료를 받으시고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갱년기 우울증을 극복하십시오.’ 하였습니다.
우리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너무 고지식해서 들이박고 죽든가 도망가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중에 저를 부르시면 갱년기 우울증에 대해서 강의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웃으시죠. 웃으시는 분은 아직 여유가 있는 분입니다. 한 50좀 넘어서, 빠른 사람은 40대에 올 수도 있습니다. 여선교사들은 특히 폐경에 이르고 갱년기 우울증이 오면 여러분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한방에 날려버려야 합니다. 하고 싶은거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다 지나간 골짜기입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지나가야 합니다. 절대 신앙이 약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갱년기 우울증입니다. 지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거룩한 의무에 마음이 묶여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은혜가 묶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목회고 선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탐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는 것이 훌륭한 선교입니다.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현지에 가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흔히 성육신 선교라고 해서 가면 현지인과 똑같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타드 빌링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진짜 똑같이 그렇게 원주민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토담집에서 서구음식을 모두 포기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딸이 너무 아프니까 급하게 병이 걸리니까 비행기를 태워서 미국으로 데려가는 순간 그 모든 성육신의 관계의 것들이 다 한 번에 무너져 버렸답니다. 자식이 아팠을 때 비행기를 태워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선교사 밖에 없으니까. 원주민은 그렇게 못하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지 외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지인들에게 가서 현지의 음식에 적응하고 문화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심으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들과 사랑하면서 영적인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김치를 포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 이러면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정동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반복되면서 사랑의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렇게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인식하면서 감동을 받을 때 그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성향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침에도 발견하셨습니까? 그것을 성경에서, 자기 일상의 삶 속에서, 학문 안에서, 심지어 이 세상의 악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무한히 위대하심과 완전하심. 설교가 중 누가 자신이 선포한 바를 온전히 살아냈고 지금도 충분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가르치는 것과 삶의 불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목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어느 하나를 공부하고 대가가 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 거기에서 삶의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만보다는 겸손을 배워야 하고 어떤 지식도 성경 진리만큼 권위를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 활동의 중심에 항상 성경에 대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자가 순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리마가 한번 크게 뛴다고 해서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노둔한 말이라 할지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일의 성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데에 있다. 끊임없는 독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동남아 선교지에 갔습니다. 3일 동안 있으면서 원주민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몇 번 들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그랬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변화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곳에서 15년 정도 사역을 했는데 맨날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것만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15년이나 됐으면 사람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깊이있게 가르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10살 12살 됐는데 아직도 계속해서 미음만 떠먹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의 신앙이 자랄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입니다.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기독교가 이 사람에게 진 사상적인 빚은 사도바울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누구도 이 사람을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다. 고백록의 판본입니다. 이것을 보여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으로부터 한 12년, 13년 전 쯤 어거스틴에 천착을 해서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느 책을 읽으면서 이 저자가 천재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칼빈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도 뛰어난 분들이라고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사람,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는 이 사람은 천재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6개월 동안 하나님 앞에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고 나는 누군데 이 사람에게는 이런 천재성을 주시고 그래서 이 사람이 쓴 책을 아주 고민을 하면서 읽어야지 겨우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창조하시고 나에게는 이런 천재성을 안주십니까. 응답이 있었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
제가 우리 아내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주일날 너무 몸이 아파서 1부 예배만 설교하고 집에 들어와서 링거를 맞고 누웠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책가방을 들고 다시 공부하러, 월요일은 공부하는 날입니다. 나왔는데, 한 10년 전 일입니다. 어딜 가려고 하느냐 그 몸으로, 집에서 쉬어라, 하였습니다. 공부하러 가야된다. 당신 여태까지 많이 배웠으니까 죽을 때까지 공부 안 해도 그걸로만 울궈 먹어도 교인들이 결코 설교가 후지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난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서 그 날 쓸 땔감을 캐다가 하루 가족을 위해 불을 피워 살게 하는 광부 같을 뿐이오. 나는 오늘 가서 공부 안하면 땔감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학이 예쁘기 때문에 우리는 신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거룩한 진리를 다루는 학문이고 둘 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흐로샤이데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 분은 주석가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했냐하면 학교 다닐 때에는 책을 읽을 시간은 있는데 살 돈이 없었습니다.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씩 점심을 굶고 돈을 모아서 광화문까지 걸어가서 원서 한권을 사가지고 오면서 감격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책이 많습니다. 많은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서가에 들어가면 오만가지 책들이 소리를 칩니다. ‘목사님 나 좀 읽으세요. 나 최근에 들어왔어요. 나도 좀 봐주세요.’ 이 사람의 책이 말을 걸어옵니다. 유니우스의 신학전집이 내 방에 들어와 있습니다. 한글로 된 책, 영어로 된 책, 라틴어로 된 책, 수많은 책들이 읽어달라고 소리를 칩니다. 이것이 지겹지 않습니다. 행복합니다. 다만 모두 못 만나 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면 영혼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진리는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합니다. 항상 우리는 그렇게 발을 딛고 이 세상에서 사역하며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사역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정신이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마다 자기가 얼마나 추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킴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과업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과업이라는 것은 그냥 과업일 뿐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과업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항상 즐거워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안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주어서 세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고 목회입니다. 성경은 아름다움의 진수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길이 바로 선교고 목회입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추루하게 된 것과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별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이 세상에는 추한 것도 많고 그것들을 어떻게 아름다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복음 안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가장 중요한 작업이 사람들이 거듭나고 회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복음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의 지성적인 개안을 했는데 30대에는 신학의 모든 다양한 분과들이 어떻게 통합을 이루는 지를 배웠고 40대 중반 후반에는 세상의 모든 학문들이 어떻게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개안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일생에 잊혀질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나의 독서나 학문적인 관심의 폭들이 아주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지식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이바지 하였습니다.
신학뿐만 아니라 성경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역사, 미술, 음악, 과학, 의학, 법학, 심지어 해양학, 천문학, 물리학, 양자역학, 화학,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빛을 던져준다는 것. 그런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진리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보여주는 것은 신학입니다. 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만들고 삶을 거기에 부합하게 만들어 줍니다. 철학이 못한 일을 신학이 하고 신앙은 철학의 특권을 누리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끊임없이 뜨거운 신앙을 유지해야 할 비결입니다.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 분을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는 그분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사랑하도록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이 전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신자의 가장 탁월한 변화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과학, 음악, 예술 등의 분야도 공부해야 합니다. 창조세계 안에 있는 아름다운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서 그것들을 다시 연결해서 질서에 어긋난 것들을 질서롭게 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교회를 뿌리로 경건히 자라게 되고 이 경건은 자기만족적인 경건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을 향해서 뻗어나가는 경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한분에게로부터 모든 만물이 나왔기 때문에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분이고 세상의 모든 만물 중에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또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해석함으로서 지식을 전달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속의 여부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온 세계가 거룩하게 되는 일에 소명을 느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결론입니다. 같이 읽읍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하니라 아멘.
신학은 사랑스러운 학문이고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공부의 목적인 최고의 아름다움을 공부해서 자기도 아름답게 되고 세상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눈 뜬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