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히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녹취자 : 김세나
참 그 이해 안 되는게 말이죠. 신앙생활을 안 하다가 정말 주님을 만나서 감격을 하고 기뻐하고 그러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기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주님을 잃어버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참 많이 봅니다. 특별히 이러한 일들이 죽을 때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참 불행한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세상을 떠날 때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그 죽음을 통해서 그 죽음의 다리에 던져서 예수님께로 그 품에 안긴다고 하는 그러한 놀라운 감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다가 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랬어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미리 큰 소리 칠 게 못돼요. 정말 평범한 사람이 따라 올 수 없는 그러한 놀라운 열심을 지닌 사람들도 마지막에 결국은 그 믿음을 배반한 사람처럼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정죄함이 없도록 완전히 구원해 주신 것, 그래서 우리 구원이 흔들리지 않잖아요. 그렇죠. 흔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 주시는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냐 하면 우리를 그렇게 든든하게 구원해 주셨으니까 이제는 우리들이 불안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이 일에 온전히 우리의 자신을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는 사도바울의 그 고백이 참 명언입니다. 내가 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 그 고백이 정말 진실로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교만한 마음을 내어버리고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다가도 정말 마지막에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지 그것을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렇게 불행하게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거나 혹은 예수님의 참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부인하거나 혹은 그러한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을 배신하거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요소들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다 잠재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들이 많이 드러나서 그래서 은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터놓고 말로, 행동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욕하는 그러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물, 짐승과 다름이 없어요. 교회가 그런 사람을 제재하거나 억제하거나 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기 때문에 놔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권면하지만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이것은 정말 동물과 다름이 없는 것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도의 행실은 곧 성도들이 입고 있는 옷이란 말이죠. 여러분,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정말 어떠한 사람이 벌거벗고 말이죠. 여기를 저벅저벅 걸어 들어와가지고 아무데나 앉지, 막 벌거벗고 돌아다니다가 여기 앉았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러한 삶이란 말이에요.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지 않고 깨어있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고 막 살아 버리는 것, 그게 바로 그러한 것이란 말이죠. 그것은 정말 수치 스러운 거예요. 제 정신이 아니니까 그러고 왔지, 정신이 들고 나면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죽을 것처럼 부끄러워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에게 비로소 소망이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꼼꼼히 살펴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더러움과 죄악을 우리는 사실 우리 편이잖아요. 우리를 자꾸 두둔한다고요. 우리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럽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잔인하고 인색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삶을 우리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면 마지막에 우리들의 삶이 동물적인 그런 삶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꼼꼼히 살펴도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없는데 만약에 그냥 그것 마저 하지 않고 우리를 버려두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의 열심이 있고 또 기도하고 또 예배에 참석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빠른 시일내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이 사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야 자기가 잘못해서 자살을 했지만, 나머지 열한 사도들에 비하면 그래도 행복한 삶을 산 사람 아닙니까. 자기의 수를 다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전승에 의하면 모두 순교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비록 살았으나 그러나 행복한 인생을 누리면서 살았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은 일찍 갔지만 그 남은 고난을 모두 짊어지고 마지막 숨거둘 때까지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순간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매우 귀하고 어렵지만, 일평생을 주를 위해서 죽는 정신으로 사는 것은 그것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을 소명하며 한순간 죽는 것도 어렵지만 그러나 한순간 죽을 것을 언제나 가슴에 품으면서 영원히 살 사람처럼 그렇게 이 땅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며 사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사도 요한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제 마지막에 이 책 말미에 가서 주 예수께서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오시옵소서. 이게 결국은 계시록의 끝인 동시에 신약의 끝이고, 마지막에는 결국 창세기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구원 계시의 마지막 종창역이 오늘 이 사도 요한의 고백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씀이죠. 이것은 종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주님이 오시든지, 우리가 주님께로 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그 주님께 정말 기쁨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께 갈수도 없습니다. 가서도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 영광스럽게 칭찬을 받을 사람들은 자기가 주님께 가서도 동일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이 이렇게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한 이 말씀이 결국은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니면 내가 너희를 곧 불러 가리라 한 말씀과 동일한 맥락 아닙니까.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곧 임하시는 것 같은, 임하실 그 약속을 부여받은 상황에서 요한은 머뭇거리거나 생각하거나 여러 가지를 계산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마치 요한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한참 찾다가 그 소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시기를 그 분을 만나 뵙기를 원하는 소원이 가슴에 가득 차 있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풍선처럼 부푼 요한의 가슴을 탁 터뜨리는 것 같은 그러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요한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떻게 살았길래 그렇게 주님이 곧 오시겠다 말씀하실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으로 가슴이 온전히 가득찬 그러한 마음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했길래 그런 마음이 되어서 내가 속히 오리라 말씀 할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주 앞에 화답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계시록을 마지막을 읽다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어떨까. 나도 어서 오시옵소서.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정리할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삶은 정리할 게 별로 없는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가기 전에 유대인들이 와서 즐겨하던 장사가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보석장사와 그 다음에 청과물 장사. 청과물 장사가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물려받았잖아요. 보석상회와 청과물상회. 왜냐하면 청과물은 매일 떼어다 팔아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전쟁이 난다든지 조국이 부르면 즉시 돌아갈 수 있고, 보석상은 부피가 얼마 안 되니까 탁탁탁탁 접어서 트렁크에 넣고 가면 된다 이거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왜, 예수님이 속히 오리라 하실 때에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 하면 요한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없었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요한이 지금도 이렇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고 에베소 교회를 했다고 전승에 전해져 오는데 그리고 그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유배 와 있는 동안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그 교회의 가족들이 그리웁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사랑했죠. 물론 귀하게 생각하고 물론 만나기를 원했죠. 지금도 밧모섬에 가면 나는 가보지 않았지만 사진을 찍어 놓은 것을 보니까 요한이 머물던 동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2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대도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교회, 모든 성도, 모든 믿음의 가족들을 정말 가슴 저미는 심정으로 뜨겁게 사랑했고 그들을 보고 싶었지만 그런 사랑을 자신에게 주신 분, 그런 사랑이 가능하게 만드는 그 원인이 누구였냐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그런 사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 일들이 다 이루어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주님이 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기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가 있을 욕망을 가진 것, 이것이 다른 모든 사랑의 기초가 되는 사랑이었고 원천이 되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 그 사랑과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님이 어서 오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했지만 성도가 감히 성도를 향한 그 사랑과 주님을 향한 사랑을 비교할 수 없었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주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자신의 마음에 발목을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오신다고 할 때에 정리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들, 몸은 이 땅에 살아도 언제나 마음에 참된 소원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오신다 말씀하실 때에 그 즉시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그리움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이 오신다 말할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혹시 다른 것을 사랑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시켜서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세상을 많이 사랑하다가 죽으면 마지막에 성도로서 죽을 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죽는 게 아니라 내 돈, 내 돈, 내 집, 내 집, 내 새끼, 내 새끼. 그리고 죽을지도 몰라요. 마치 떠나갈 수 없는 먼 길을 끌려가는 것처럼 죽는다면 성도의 마지막 생애가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께 있음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언제나 이러한 묵상, 이러한 자기 점검을 죄를 이기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도 매우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세에 대한 찬송을 수시로 많이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찬송을 많이 부를 수 있어야 해요.
(찬송)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언제나 바라 봅니다
이 찬송 부르면서 변절하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어요. 안희숙씨의 간증집에 봐도 이 찬송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끊임없이 이 세상을 하찮고 그리고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줄만한 가치가 없고 이러한 것들을 끊임없이 점검을 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을 주님밖에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없다. 그리고 그 분만이 나의 사랑을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그러한 속에서 살아가서 끊임없이 우리들이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화) 저는 이제 집회를 다니다 보니까 외국에도 가고 그러잖아요. 대게 이제 숙소를 이렇게 잡아 주지 않습니까. 뭐, 아주 그냥 기어 들어가는 것같은 숙소로 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아주 좋은 데로 갈 데가 있어요. 다양해요. 탁 숙소 가서 이 숙소가 며칠 동안을 상쾌한 곳으로 지낼 수 있는지 불가능한지를 뭐만 보면 아느냐 하면 딱 앉아서 로비에 앉아서 유리창만 보면 알아요. 유리창이 지저분한 집은 며칠 동안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안 나와요. 그러나 정말 맑고 투명하게 맑고 반짝반짝 하게 유리를 닦아 놓은 그 숙소는 비록 건물은 좀 낡았어도 말이죠. 직원들이 친절하고 그리고 아주 청소도 깨끗이 되어 있고 상쾌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세요? 내버려두면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그러한 세상 사랑의 오물들이 끼어요. 그래서 우리 영혼이 흐려져요. 우리 영적인 눈이 흐려져요. 그 가끔 보면 신앙이 참 좋았던 사람인데 막판에 가서 하는 것보면 한심하잖아요. 바보같아요. 정신이 없는 사람 같아요. 아니 죽을 길인데 왜 걸어가냔 말이에요. 그런데 그래도 그냥 그냥 걸어간단 말이죠. 그런 것들이 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이 마음에 더러운 것들을 닦아 내야 해요. 그래서 맑은 유리로 투명하게 주님을 바라 보면서 아 주님 이외에는 아 우리가 참 사랑할 분이 없구나. 나머지는 정말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구나. 이러한 생각들을 주님 앞에 언제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하나는 사랑 때문이고, 두 번째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요한이 계시록 1장에서 맨 처음에 시작을 하면서 말하기를 뭐라고 말했냐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 처지에 있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먼저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인해서 고난을 받는 인생, 거룩한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인생을 살게 되니까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아멘 하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이 생겨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요한이 정말 고생을 하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고난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의 죄로 인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다면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을 우리를 더 부패하게 만들고 어떤 고난을 우리를 더 완악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마음이 돌덩이같이 굳어져서 뭐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해도 안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그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고난, 자기가 고난 당하는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 때문에 명백하게 고난을 당할 때는 누구 이름을 부르게 됩니까.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이 매우 가까이 계십니다. 매우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고난을 당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옳은 일을 하다가 핍박을 받거나 옳은 일을 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때가 있잖아요. 그 때는 주님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때는 주님이 정말 가까이 계신 것이 느껴져요.
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몇 번,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만, 공통점이 뭐냐 하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항상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정결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적인 음성에 대해서 민감하도록 만드는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 말씀하실 때에 아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깨어있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깨어있는 것은 단지 눈 뜨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삶 자체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삶이 없으면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새벽 예배 실컷 하고 가가지고 저녁 5시까지 실컷 잔다고 한번 쳐 보십시오. 그게 깨어있는 생활입니까. 잠들어 있는 생활이지. 눈 감았으니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생활은 삶이 가치있는 일들을 위해 고난받는 삶이 동반 될 때 그것이 비로소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가치를 가지고 살게 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섬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살려면 우리는 희생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는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동반하며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때문에 덕을 보고 축복을 받은 것을 간증하는 사람들은 참 많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당한 고난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은 있지만, 나같이 지푸라기와 같고 이러한 마른 막대기와 같은 인간을 들어서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세워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당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고난당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난당한 것이 정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제껏까지 주님의 은혜 입은 것 밖에 없고 고난이라 그래봐야 그저 뭐 새벽에 일어나서 주일학교 나온 것, 그리고 무슨 누구 말 따라 재직이기 때문에 밥주다 모자라면 늦게 먹은 것, 그런 것 밖에는 고난 받은 것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신실하다 말해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은 우리 지체들에게 다 돌리시고 그리고 아무도 지기 싫어하는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 그것을 내가 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고 주님의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면 하나님 내가 그것을 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사람들에게 정말 환영을 받는 곳에 서고 싶어요. 고난 받는 곳에 서기 싫어합니다.
이런 비유를 한번 가져 봅시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두 천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내려가서 한 나라의 임금 노릇을 하고 너는 딴 나라에 가서 똥을 퍼라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천사가 보냄을 받으면서 먼저 너는 가서 왕 노릇을 해라 분부를 받은 그 천사가 똥 푸러 가는 천사한테 아이고 인간이 아니라, 천사 같지도 않은게 똥이나 실컷 퍼라. 그럴 수 있겠습니까. 똥 푸러 가는 천사가 임금 노릇하러 가는 천사 보고 존귀해. 나보다 낫구나 생각하겠습니까. 아니에요. 똥을 푸든지 아니면 임금 노릇을 하든지 그들은 모두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살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앙이 자라고 은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냥 보자기에 싸서 굴리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막 굴리신단 말이에요. 야,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해. 야, 문제가 많은 저기 좀 가봐봐. 거기에서 좀 뼈빠지게 고생해봐라. 보내신다고. 그 하나님이 거저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았기 때문에 보내시는 거예요. 밤 깊도록 동산 안에서 많은 사랑의 밀애를 나누었기 때문에 슬픈 세상에 괴로운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세상에 보내 주신다고. 그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괴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서 주님을 위해서 궂은 일, 고통스러운 일, 아픈 십자가 지면서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더욱 놀라운 사랑의 비밀을 쌓아 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을 쌓아 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서 정말 희생하고 분투하는 사람, 그러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면 간증하지 마. 할 게 뭐가 있겠느냐 이거죠. 무슨 비밀이 있겠느냐. 거기에. 그러한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정말 외롭게 그 절의 고도의 섬에 유배되어 있는데 그 외로움이 이 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도록 그렇게 만들어 준 거예요. 그래서 환경이 장래일이나, 기쁨이나 높음이나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요한이 그런 것을 실제로 경험한 거예요. 좀 우리는 구석구석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님의 은혜를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고난을 받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러한 가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 때 그 때에 주님이 오라 부르실 때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산 사람들에게는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축구 하는 것 보셨잖아요. 줄 리메커, 요만한 것 금으로 만든 것, 아마 금덩어리도 아닐 거예요. 미친 듯이 하잖아요. 지난 월드컵 때에는 자살골 집어 넣었더니 주차장에서 총 맞고 죽었잖아요. 다섯 발이나 머리통에 맞고 죽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정말 상에 얼마나 목마르고 그 상 하나를 얻기 위해서 정말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급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찬송가에 나오는 것처럼 쓸쓸히 초가삼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우리를 불러 주실 때에는 그 앞에서 주님을 존귀하게 한 사람의 이름으로 그렇게 남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정신을 가지고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