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오늘 우리는 우리의 귀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6장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7장으로 들어와서는 이 7장에서는 그 앞부분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시민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 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등등 말씀을 쭉 하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장 뛰어난 원리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받고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가야될 삶이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는 다른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주시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말씀이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약속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좁은 문이 무엇인가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먼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문은 크고 그 길은 넓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자는 많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문은 큽니다. 화려합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넓고 크고 화려합니다. 매력 있습니다. 그 불신앙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바람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이 너무나 크고 화려하고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고 나면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많은 매력을 사람들에게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고, 사람의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선택을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 매력을 줍니다. 외모로 볼 때에 세상을 따라가고, 그리고 생명과는 관계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구원의 복음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옛사람의 성품을 따라서 옛사람의 가치를 가지고 옛사람이 하던 습관대로 살아가는 이것은 이 불신앙의 문은 너무나도 크고 넓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문은 육신의 눈에 놀라운 매력을 줍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심령이 불신앙 가운데에 있을 때에 불신앙 가운데 있는 우리의 눈은 신앙의 눈을 바라볼 때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신앙이 작용하고 역사할 때에 크고 화려한 불신앙의 문을 보면서 겉으로는 그렇게 크고 화려해보이지만 그 길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날마다 하나님과 만나는 진실한 신앙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 때에 우리는 육신의 안목을 가지고 이 세상의 불신앙의 문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선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불신앙의 문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화려합니다. 거기에만 들어서면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것처럼 우리에게 손짓하고 말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면, 성공을 하고나면, 인생의 참된 보람과 가치가 있을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불신앙의 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 문으로 들어오라. 다른 것 다 소용없고 내 문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너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그 크고 좋은 문으로 들어오도록 우리를 손짓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클 뿐만 아니라 그 크고 화려한 문을 지나고 나면 과연 그 문에 어울리는 넓은 길이 나있다는 것입니다. 넓은 길이 나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사람의 성격이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 때라고 그럴까? 아무튼 어렸을 때는 꼭 길을 걸어가도 좁은 길, 골목길을 다니기를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중학교 다닐 때는 미아리시장에서 학교가 끝나고 나면 저녁때 늦게 그 길을 걸어오는데 이쪽에 큰길이 있고 이쪽에 좁은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별 의도가 없고 나는 좁은 길을 걸어서 오는 것이 넓은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호젓하고 골목길 가로등 이렇게 쓸쓸하게 켜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좋아서 어린마음에 걸어갔는데 걸어만 오고나면 집에서 꼭 물어봅니다. “너는 넓은 길로 걸어왔냐? 좁은 길로 걸어왔냐?” 나는 좁은 길 걸어왔다고 하면 우리 고모님이 내일부터는 절대 좁은 길 오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시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골목에 술집이 쭉 있습니다. 사실 그 어린나이에 술집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데 혹시 지나다니다가 그것을 보면서 잘못된 생각을 하거나 습관에 빠질까봐 넓은 길로 오라고 하십니다. 환하고, (정말 나이도 많이 먹지 않았습니다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환하고 불이 환하게 켜지고 그리고 넓은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큰 문에 어울리는 넓은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길이 넓기 때문에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앉아서 쉬었다 갈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뒤에서 등을 미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뭐 차선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길로 걸어가다가 삐딱하게 걸어가도 좋고, 길가에 드러누워도 좋고, 뒹굴다가 쉬었다 가도 좋고, 아무런 모든 제약이 없는 자유입니다. 이 말이 바로 넓은 길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떠나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너무나 자유롭고 우리의 삶은 너무나 구속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은 자유롭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자신들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눈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고 누가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구속받지도 않고 속박 받지도 않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실험적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죄를 행하면서도 가책이 없고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육체와 자아가 누리고 있는 그 자유, 그것의 열매는 죄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 보면 그 마음이 원하는 바는 성결과 의와 가치와 영원과 영생이 아니라 죄와 타락과 부패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속박을 풀어버리고 자유하게 마음먹은 대로 내 인생이 흘러가게끔 버려두면 그것이 바로 넓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고 죄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자유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통제받지 않는 자유-그것이 가는 길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방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난 그 길은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친구가 많고 동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하는 악한 길과 범죄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더하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말씀해주시는 바는 바로 그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사람들에게 불신앙으로 인도하는 문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그리고 그 길에는 놀라운 자유가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도 어떤 간섭도 없고 문제도 없이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거기에는 친구들이 많고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르는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했습니다. 넓은 신앙의 문, 그리고 자유가 있는 그 넓은 길,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아서 그 친구들과 함께 사귀며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외로움을 달래며 걸어가는 그 길은 인간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너무 어울리는 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생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이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육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지나서 찾는 이도 없는 고독한 길을 찾아서 가치 있는 길을 가기보다는 불신앙의 넓은 문을 두드리고 넓은 길에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하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은 그 길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친구삼아 걸어가는 그 길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훨씬 더 우리의 육체에 어울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만 이 길을 걸어가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길로 걸어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이 바로 마태복음 4장에서 병 고침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고 두 눈으로 똑똑히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리고 5장에서 팔복 산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팔복 산에서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들려나오는 그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감화를 받으며 그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놀라운 이적의 사건들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또 말씀의 은혜를 맛보아서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과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것들을 보고 놀라고는 돌아갔지만 그러나 말씀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맛보기 위해서 팔복 산에 올라서 그 말씀을 잘 장시간동안 들으며 그 말씀에 심취할 정도로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조차도 넓은 문, 큰 길, 그리고 넓은 길 이렇게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지난주간도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경험합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의 길과 믿음의 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길이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습니까? 성경은 오늘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천국의 시민답게 죄를 미워하고 의에 속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불의의 길이 아니라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매일매일 불신앙의 넓고 화려한 문을 버리고 그리고 넓은 길을 포기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그 길을 거절하며 걸어갈 수 있는 매일 매일의 삶에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신앙의 큰 문과 그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며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동거하며 걸어가는 이 길은 성경은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있는 짐승처럼 살아서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고 언제나 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많은 길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회색지대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고 하나는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이고 하나는 세상의 백성같이 사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서고 그 길로 걸어갑니다. 자유를 만끽하며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그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그랬습니다. 언제든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따라 찾는 이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외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다수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넓은 길을 멸망에 이르는 이 길을 따라서 걸어갔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도 하여금 또 다른 문에 눈을 돌리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입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들이 오늘이라도 전도지 몇 장 들고 세상으로 나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가 그 피로 구속을 받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의 눈으로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붙잡고 계신 것이 보이는 대도 사람들 눈에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나를 믿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중생의 문이 죄인으로 살아가다가 거듭난 신앙의 문, 회심의 문, 구원의 문 이것은 좁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변화 받고 새롭게 되어 진 사람은 소수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들의 전도지를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를 받아들이고 참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정상적인 신앙의 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는 것입니다. 그 문은 많은 사람의 매력을 끌 수도 없습니다. 그 문은 매우 좁고 그리고 그 길은 매우 협착합니다. 많은 사람이 와도 소수의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문은 작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겸손한 신앙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넓은 문은 아무리 키가 큰 사람도 배를 내밀고 고개를 곧추세우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좁은 문은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문입니다.
(예화) 신학교 앞에 보면 지하에다가 차려놓은 매점이 있습니다. 좀 지저분합니다.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라면을 열심히 파는 집인데 어떤 때에 가끔 시간이 없을 때 그 집에 가서 신라면을 하나 시켜서 먹고 강의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다 보니까 문 앞에다가 ‘겸손하게 삽시다.’ 써놨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겸손하게 살자는 게…….’ 그리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가만히 보니까 그 지하실에 있으니까 고개를 곧추세우고 들어가다가 사람들이 그 벽에 딱 부딪히는 것입니다. 머리를……. 그러니까 몇 번 부딪히니까 벽돌인데 한번 부딪히면 대단히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스티로폼 하얀 것을 잔뜩 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겸손하게 삽시다.’ 써놓았습니다. 그곳에 부딪히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인 모양이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올 때 먼저 라면집에 들어올 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삽시다.
천국에 이르는 문, 신앙에 이르는 문도 겸손합니다. 확실히 증명되는 것이 말입니다. 저도 교회에서 삼년이상 살아본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있는 사람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정말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막판에 가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회에 들르는 사람들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담자로부터 시작해서 거지를 대접하는 것, 별의별 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교회에 정기적인 예배시간이 아니라 보통 때에 많이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진짜 교회에 있다가 사람과 상담해서 진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놀라운 것은 교회 찾아와 가지고 신앙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 많은 사람, 그 사람은 교회에 출석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사람이입니다. 말이 많고, 이론이 많고, 전도사가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꼭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할 것 같은데 어림없습니다. 허락을 안 합니다.
이미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이미 고개가 푹 숙여진 겸손입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와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벌써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 대신 뭐가 많습니까? 듣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할 말이 있어도 아주 간단힙ㄴ;디. 그리고는 듣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구원의 문뿐만 아니라 변화와 은혜의 문도 이렇게 좁ㅅ브니다. 그리고 키가 맞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렇게 들어가야지만 우리가 신앙의 세계, 은혜의 세계,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겸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나올 때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 대면할 적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적합한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넓은 길로 걸어갈 때에는 거만하게 배를 내밀고 고개를 곧추세우고 들어갈 수 있지만 이 문은 작은 문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하고 부딪혀서 혹만 난단 말입니다. 실제로 믿음의 문에 들어가지 못해서 걸려서 넘어지고 부딪혔던 사람들은 모두 더 깊은 신앙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마음에 말하자면 부딪힌 흔적들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의 생각에는 대리석으로 깔리고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하고 놀라운 길이 쫙 펼쳐져 있어야 되는데 불행하게도 그렇지가 않고 그 좁은 문을 겸손하게 들어가고 나니까 어떤 길이 나타났습니까? 협착한 길이 나타났습니다. 매우 좁고 그리고 매우 비좁은 길이 나타나서 거기에서는 앉아서 쉴 수도 없습니다. 왜? 뒤에 사람이 밉니다. ‘빨리 가! 빨리 가야 나도 갈 것 아니요!’ 밉니다. 뒹굴면서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어도 어디로 갈 데가 있겠습니까? 우리교회 앞에 통로 통과할 때 보십시오! 한사람 서야지만 한사람이 통과하잖습니까? 똑같이 이 좁은 문을 지나서 가는 그 길도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뭐든지 다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뭐든지 다 하면서 살 수 있어도 또 아무거나 하면서 살아서는 안 도비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직업은 귀천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서든지 열심히 돈 벌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먹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직업에 귀천이 있습니다. 무슨 귀천이 없습니까? 어떤 귀천이 있습니까? 만약 이 직업에 종사하면서 일을 할 때에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될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돈만 되면 아무 짓이든지 해서 돈만 벌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다 할 수 있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게 바로 좁은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만약에 옛사람의 육체에 속한 성품을 따라서 살려고만 하면 그러면 우리가 걸어가는 이 신앙의 길은 말도 안 되도록 너무나 숨통을 조여 오는 길입니다. 왜? 넓은 길을 가고 싶은데……. 그러나 우리가 이 길이 어떠한 길인가를 알고 이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내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이 길은 결코 협착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문을 박차고 튀어나오니까 바로 가나안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지나가고 나면 그 앞에는 길이 협착한 길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 매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걸어가기를 원하는 협착하고 좁은 길로 걸어가기 위해서 순간순간 자신의 말하자면 욕망과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유를 포기하는 결단을 가져야 되는 것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자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합니다. 매 순간순간 원하는 이러한 삶으로 순간순간 결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끝은 사망이입니다. 멸망입니다. 더욱이 이 길은 협착합니다. 매우 좁고 위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우리는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길에는 찾는 사람도 적습니다. 그래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지극히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걸어가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노래할 때에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흐느껴 울고 슬퍼하며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좁은 길은 이렇게 좁은 문을 겸손하게 통과하고 협착한 길을 지나고 찾는 이가 적은 가운데 고독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약속되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누가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말입니다. 마치 조개에 진주가 맺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조개가 이렇게 입을 벌리고 운동을 하다가 사금파리나 뭐 같은 것이 들어가잖습니까? 그래서 그 여린 살을 째고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에서 이제 그것이 자기의 몸에 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뭔가 물질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 물질이 그 불순물 주위에 계속 붙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단하게 된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고통과 고독과 그리고 세상의 즐거운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한 외로움 속에서 신앙이 아름답게 꽃피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했습니다. 애급을 뛰쳐나왔습니다. 거기에 고기 가마도 있고 먹고 살게 있는데 다 집어치우고 그리고 가나안을 가자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의 길을 행하게 되었는데 그 광야에 나온 수많은 (모세가 당회장으로 있는) 광야교회 교인들이 광야에 서있습니다. 그 길이 정말 좁은 길입니다. 거기서 그런데 교인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면 기껏 하는 말이 “애급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서 옛날에 애급을 그리워하던 모든 사람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며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좁은 길로 들어서고 협착한 길로 들어설 때에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래서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더욱 더 그 협착한 길에서 하나님만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의 친구는 이 세상이 아니라 너희의 벗은 이 세상이 아니라 너희의 진정한 벗, 너희의 진정한 이웃은 바로 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넓은 길로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지만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좁은 길을 택하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고, 불의한 길을 버리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찾는 이가 적고 이웃이 적어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고독을 느끼지만 그러나 이 세상들이 맛볼 수 없는 진정한 감사와 그리고 진정한 생명을 이 좁은 길로 걸어가면서 느끼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우리에게는 늘 감사가 있습니다. 지금은 좁은 길을 걸어가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고 그리고 찾는 이가 적어서 우리의 살아가는 삶이 향기롭지도 않고 더 아름다워 보이지도 아니하고 화려해 보이지도 아니하고 또 사람들에게 외로워 보일지라도 좁은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는 넓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참된 희열이 하나님의 그 좁은 길에서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적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길은 좁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심령 속에 두신 그 자유는 넓은 길을 걸어갈 때 육신이 느끼는 자유보다 훨씬 더 큰 자유를 우리마음속에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주일동안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가 우리의 예배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예배드린 이태도, 그 태도 그대로 우리는 일주일 동안을 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태도 그대로 우리가 일주일 동안을 산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간절히 갈망하고, 하나님의 만남을 사모하고, 주님의 은혜주심이 우리의 심령 속에 다가온다면 우리가 일주일 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일주일 동안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에 들어가 넓은 길로 걸어가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세상 사람처럼 살다가 주일날 와서 드리는 이 예배는 좁은 문으로 인도하고 또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찾는 이가 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며 걸어가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따라서 좁은 문을 들어가고 그리고 협착한 길을 언제든지 택하고 찾는 이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정해주시기 때문에 믿음의 문으로, 믿음의 길로 걸어가기를 원하는 삶을 매일매일 택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우리 육신과 더불어 매일 싸우며 투쟁하며 이기며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원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 모든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이 예배가 그 누구보다도 감격적이고 기쁜 예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지만 그러나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 모든 염려와 근심과 아픔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단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모두 잊힐 것입니다. 주께서 믿음을 따라 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넓은 문을 포기하고 넓은 길을 거절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모든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씻겨주실 때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을 지키며 살아오기 위해서 쌓였던 고통과 모든 아픔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그 생명과 그리고 천국의 분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큰 문을 버리고 좁은 문으로, 자유가 있는 넓은 길을 버리고 고난이 있는 협착한 길로,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그 길을 버리고 걸어가는 이가 거의 없는 그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믿음을 붙들고 이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걸어가리라 다짐하며 이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길을 걸어서 금주 한주동안도 정말 믿음으로 승리해서 다음 주에 더 영광가운데 하나님을 뵈옵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