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시편137편1-2절)
녹취자: 유은수
오늘 우리들이 살펴본 시편 137편은 의심할여지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때에 기록된 한편의 시를 우리 앞에 두고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벨론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137편을 열자마자 충격적인 그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네 땅도 아닌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까.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네 땅도 아닌 그것도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는 137편을 열자마자 우리는 충격적인 한 장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시편을 보면서 오늘날 이 시대에 잊혀 가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부흥의 도구로 쓰였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말하기를 이시대의 두 가지 악이 우리의 백성들 가운데 있사오니 여호와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죄악중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이웃집 아저씨나 친구처럼 생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친구처럼 말동무나 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놀아줄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 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믿음이 뛰어난 사람들을 성경이 무엇이라고 묘사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을 한결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고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외' 이것은 두려움과 사랑이 결합된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없이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경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하는 일에 들먹이는 시대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치면 우리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할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 신앙 기본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의 사랑을 아는 그것이 기독교의 기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닫는 것이 기독교신앙의 근본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든 출발은 지극히 낮고 천한 외소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인 한 존재가 온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스러움과 광대무변하심 앞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엎드려짐으로써 신앙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배우면서 비로소 두려움 속에 엎드려졌던 그가 기쁨으로 충만하고 소망으로 가득하여 고개를 들고 일평생을 그 두려움과 떨림 사랑과 감격을 간직한 채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던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그것이 신앙의 요채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물리 시간에 중학생 학생이 선생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넓어요?"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야 인마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렇게 너 같은 놈 가르치고 있겠냐. 얼마나 넓은지 내가 말할 수는 없지만, 비유를 하자면 온 지구가 아파트로 뒤덮였다고 치고 그중에 아파트 한 동이 있는데 그 중에 화장실이 있는데 빨간 전기다마가 하나 있고 하루살이 7마리가 돌아가고 있는데 그중에서 세 번째 하루살이가 지구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그리고 너는 그 하루살이 등대기에 붙어 있는 세균과 같은 존재라 생각하면 된단다."
(예화) 저는 특별히 천 채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잡지에서 보니까 태양에서 특이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톱기사로 실은 어느 잡지를 보았습니다. 쭉 읽어 보니까 태양에서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아주 희귀한 폭발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쾅하고 터지면서 하늘을 향해 치솟는 태양의 불길이 시속340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계산기를 꺼내서 3600초로 나누어 보니까 초당 1214킬로미터의 속도로 태양 표면에서 하늘을 향해 불기둥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이 우주는 헤아릴 수 없는 의문투성이 입니다. 도대체 태양은 언제부터 폭발했고 언제까지 그 태양이 폭발하고 있을까요? 암사동에 가면 지성 묘가 있습니다. 500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말짱합니다. 바닷가에 쌓인 모래는 도대체 몇 년의 세월이 흘러서 모래가 됐을까요? 파도는 언제부터 밀려오기 시작했으며 하늘은 언제부터 푸르기 시작했을 까요? 모든 것은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위대함 앞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반짝이는 두개의 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반짝이는 도덕률과 하늘의 빛나는 별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바로 이 우주 입니다. 끝에서 부터 끝에까지의 길이가 150광년이라고 말하지만 요즈음은 가봐야 소용없다는 이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가 계속 폭발을 하면서 초당 2000킬로미터씩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끝이 있으면 끝 바깥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하나님이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이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번 만들다 망치고 만들다 망치고 해서 간신히 만드셨습니까? 믿으시면 ‘아멘’ 해보시기 바랍니다.
‘있어라’ 하니까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우주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 가운데 크지 않은 작은 별 불과 30시간이면 한 바퀴 비행기를 타고 몰수 있는 작은 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위대한 세상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찌 그런 하나님에게 당신의 뜻대로 살지 않는 민족과 역사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모두 망하고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속에서는 두 가지 신학 사상이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길 민족이 없고 우리는 복만 받을 것이라는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은 거룩한 선지자들은 피를 토하듯이 그 마지막 역사의 비탈길에서 외쳤습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떠났음으로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할 것이며 그러므로 너희들은 속히 마음을 찢고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대신 안일한 신학 사상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고 그리고 존귀한 자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가고 그리고 예루살렘 여기저기 시체가 더미더미 쌓일 때 그때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사로 잡혔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 민족이 이렇게 심판을 당하다니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것인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은 어디 계신 것인가. 그들은 혼란 속에서 물었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심판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의 그 현장에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찬송가가 우리에게 고백한 것처럼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하나님의 그 그로 놀라운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도 여러분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으며 이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만 할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속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신론을 신봉하고 회의주의적인 철학자의 글들을 좋아하는 그저 방황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알고보면 그것은 단지 방황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래도 오늘 제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제가 여기 살아서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으로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존귀한 외아들을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이땅에 내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3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고난을 벗 삼고 시련을 친구삼아서 자기 땅에 왔지만 박해와 천대를 받으며 그토록 사랑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오늘 윗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일을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이전에도 계속 되었고 지금도 계속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 힘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까. 대답은 오직 하나 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보다는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예수를 알고 비로소 우리는 감겼던 눈들이 띄어 지면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세상의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세상의 있는 향락을 쫒기 위해서 그러고 살다가 죽기위해서 창조된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장난처럼 살았던 우리의 삶을 이제는 옷깃을 여미고 거룩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알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외아들 예수그리도 보다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지만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우리 이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가 없는 걸로 우리들이 알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아들보다 이세상보다 모든 것보다 더 하나님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 있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주셨습니다만 자기의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사신 것은 단지 우리에게 천당 가는 티켓을 한 장씩 무료로 나눠 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고 이제는 우리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 하셔서 그들이 아직 죄짓기 전에 그들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기대하셨던 바를 오늘 구원받은 우리, 하나님과 다시 화해를 회복한 우리를 통해서 이루게 하시려고 주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그 삶의 한도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서 오늘 윗자리에 있는 여러 젊은이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부한 뛰어난 학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전문적인 특기를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고 남다르게 뛰어난 달란트를 가진 여러분들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래가 보장된 그런 젊은 여러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말씀을 의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하고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들꽃만도 못하고 집안구석 어디론가 돌아다니다 죽어버리는 바퀴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사랑은 눈물겨운 사랑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였는지는 그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가 어떻게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방금 하나님께로 토해져 나온 피 묻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그 굽고 뒤틀린 이스라엘 역사의 현장 속에 나타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춤추고 노래하던 시대에 헐벗고 굶주리며 주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모두 평안하다고 말하던 그 시기에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위기를 외쳤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역으로 살아갔습니다. 누구보다도 그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시고 심기 위해서 강력한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고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 가운데 복을 주셨습니다. 이방을 향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거룩한 진리의 깃발을 들고 만방의 여호와의 거룩함을 알리는 빛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 백성을 그 땅에다 심으신 것입니다. 참고 또 참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완강하게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기를 거절하고 모든 신앙은 껍질만 남고 속의 내용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사는 있었지만 마음은 제물에게 있었으며 헌신의 모양은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짓밟혔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은 하찮게 여겨졌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거기에 계속 두시는 것이 당신의 영광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이 백성들로 말미암아 나 여호와의 이름이 만방에 모욕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판단이 서시게 되자 하나님은 아낌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 버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을 깊이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대미문의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누리며 한걸음에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종교개혁자들은 그만두고 사도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만두고 137편의 시편의 기자는 그만두고 이 땅에 처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받고 그 복음에 감격해서 십자가 신앙과 종말 신앙으로 일제의 핍박을 죽음으로 항거하며 신앙의 정죄를 지키고 공산치하에서 조차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살았던 선조들이 부활하여 우리들 가운데 나타난다면 과연 오늘 이시대의 조국교회를 위하여 무어라고 말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기독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기독교를 너희에게 전해준적이 없다고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피를 묻히며 너희에게 전해준 그 십자가 신앙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핍박과 고난을 현장을 죽음으로 항거하며 지내게 만들었던 그 종말 신앙은 어디에 갔느냐고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이제는 그 사랑을 입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갔냐고 물을 것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에 우리의 자랑거리를 두는 대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한 날에 그 앞에 존귀하게 나타날 우리의 영광스러운 그 상급을 기다리며 이 땅에 것들을 사랑하는 대신 신령한 것들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분투하던 우리의 피 묻은 복음이 어디 갔느냐고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적인 어려움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조국교회가 정말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IMF는 좀 잘 살다가 망해서 가난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IMF를 위해서 기도하는 뜨거운 기도를 들으면서 약간의 서글픈 마음에 잠기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는 불과 몇 달 전에 IMF가 왔습니다. 영적으로는 언제쯤 IMF가 왔을까요? 이미 오래전에 왔습니다. 그때 누가 영적으로 다가오며 공황을 인해서 슬퍼하며 애통해하며 함께 모여서 대형집회를 갖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이렇게 영적으로 거덜 나서 이렇게 참된 복음을 잃어버린 이러한 가난한 교회가 된 것이 우리의 탓이라고 가슴을 찢으면서 회개하는 운동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진실하게 기도하고 IMF 회복을 위해서 부르짖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감각이 육신적이고 경제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해져 있는 대신 영적이고 거룩한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둔감해진 현실을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나라는 정말 이제 다시 경제가 회복되고 국민소득이 만 불 이만 불 계속 수출이 잘 되서 돈을 벌면 그걸로 만사면 오케이 입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고쳐 써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우느니라고 말입니다.
미국이 선교의 프론 티어가 되었지만 대 각성이 일어나기 까지는 선교하지 않았던 사실을 여러분들은 교회사에서 알 것입니다. 영국 같은 나라도 심지어는 윌리엄캐리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교계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 싶으시면 직접 하실 테니까 자네는 염려 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이와 같은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심이요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계획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도 심판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세기만 해도 지도 속에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거룩한 긴장을 느껴야 합니다. 뭐든지 잘 되리라고 하는 그런 말을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그 마지막 날에는 우리의 잘못된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우리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울었습니다. 소리 내어서 엉엉 울었습니다. 에스겔서 1장을 보면 깃발 강가에서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권능을 받으며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땅에서 거친 노동의 노예와 같이 종사하며 아마 해가 떨어지는 저녁시간쯤 일과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단하게 일하던 들판에서 자기의 노역을 그치고 유일한 위로가 있다면 바벨론강변 석양이 기울어져가는 바벨론 강변 여러 강가에 앉아서 두고 온 고향 시온을 바라보며 그리워하고 눈물을 짓는 것, 그리고 망향가를 부르는가, 뭐 그런 것이 그들에게 위로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아마 틀림없이 이 시점은 일을 열심히 하는 대낮이 아니라 하루 일과를 마친 황한 어스름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라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이젠 얼마나 더 있어야 조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 그런 사람들이 이제 그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노예와 같은 종살이로 찌들대로 찌든 육신의 피곤을 몸에 끌어안고 시온을 향하여 눈길을 돌리며 눈물을 짓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왜 울었습니까. 타향살이가 너무 서러워서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너무 핍박을 해서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춥고 배고파서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울었던 것은 시온 때문이었습니다. 왜 시온 때문에 울었을까요? 시온, 그것은 히브리어로 마른땅 이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시온은 메마른 땅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온을 도로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가 있었고 그 백성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을 지켜 주셨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고 마음을 먹으면 율법을 배울 수 있었고 죄를 범한 사람들은 재단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사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과의 팔로우쉽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두 망하고 난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깨닫게 된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고의 영광은 넓은 땅, 높은 빌딩, 수많은 백성의 숫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돈 이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하나님과의 교재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 속에 밀려오는 참된 기쁨이 있는 공의와 자비에 넘치던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던 신앙생활이 있는 조국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영화를 좇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나라로써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영광을 위해서 줄달음친 마지막 결과가 이 비참한 멸망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면서 이들은 깊이 낙망하고 슬퍼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제 시온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고 온 시온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온에 두고 온 떡이나 시온에 두고 온 농토나 시온에 두고 온 금은보석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던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평화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루 지나며 여호와의 도움이 내게로부터 모두 사라진 것 같은 흑암의 계곡을 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 면전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쁨이요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헌신의 열기로 뜨거워지는 것도 우리가 소망해야할 일차적인 목표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메게 그리워야 할 바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들 가운데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거룩한 부흥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골기 퍼만으로는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포드 진들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참된 것이라는 변증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구원의 기쁨이 무엇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해 주게 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흥이 우리에게는 간절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단번에 거룩한 시온의 땅으로 다시 부른 것과 같은 구원의 놀라운 감격이 먼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사이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 있는 기독교인 가운데 80퍼센트는 전에 전도해 본적이 없고 지금도 전도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전도할 계획이 없다고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믿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대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혼자 오게 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들을 이루시는데 있어서 우리를 사용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많이 단지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제조와 우리의 고정화된 제도만을 의지하고 마치 그것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하나님 없는 낙관주의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방법과 그 모든 추구 하나하나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깃들었었는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가면 하나님의 거룩한 살아계심을 향한 주님의 거룩한 임재와 구원의 놀라운 영광을 이 땅에 펼쳐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그 성품을 향한 갈망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통계가 나왔는데 주일 예배를 드리고 정문 앞을 나가는 사람들 중에 95퍼센트가 방금들은 설교의 본문이 어디인지를 모른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런 돌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로 갈지.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인이 그렇게 즐겨 치던 수금을 버드나무 가지에다 걸었습니다. 이는 무엇때문이었습니까.이제 이 바벨론 땅에 여기서는 춤추고 먹고 마시고 노래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기뻐서 노래하겠는가. 원수는 사방에 에워 쌓였고 우리는 이 바벨론 땅에서 손님과 같으며 우리는 이 바벨론 땅에서 종과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무엇이 기뻐서 춤추고 노래할 것인가. 그들은 슬픔에 잠기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깊이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교 걱정 마십시오. 우리 계획이 있습니다. 이거면 다 됩니다. 교회부흥, 걱정 마십시오. 무궁무진한 전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 때문에 이세상의 진정한 부흥을 오늘날까지 지연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써야 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힘이 없어도 열심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힘을 다해 수고하고 노력을 다 하면서도 우리는 마지막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이 세상에 필요한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전도지를 들고 30분만 전철 앞을 누벼 보면 여러분들은 금방 복음의 능력이 어쩜 이렇게 초라한가. 구원이라는 것이 이렇게 초라할까 의문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워 떨며 무릎을 꿇고 나와 내 집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모든 일을 행하나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와 동행하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었지만 바벨론 여러 강변에 나와서 눈물을 지으며 두고 온 시온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발달한 선진 문화와 많은 문화적인 혜택이나 아니면 거기서 장래를 보장받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여러 기회들이 그들을 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한분밖에는 자신들의 인생에 자신들의 나라에 참된 행복과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바벨론 강변에서 울며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젊은이들이 아닙니다. 젊음이 대단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 성립 될 때 대단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맛을 보고 그 거룩하심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되었을 때에만 그 젊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은 젊은이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사용한 젊은이보다도 버리신 젊은이가 더 많습니다. 그건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춤추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동안 낙관적인 기독교인들이 온 도시를 누비는 동안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잠자는 다수들이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로써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통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백성들의 죄악이 나의 죄악인 것처럼 짊어지고 그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이 내 아픔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들이 먹고 마실 때 선지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깨어있는 소수들이 바벨론 강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던 조국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때를 상기하며 아버지 앞에 목 놓아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고 가득해 지기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울부짖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시간표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백성들이 울부짖는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새벽이 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셨는지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조나단 에즈워드와 같은 천재를 사용하셔서 한 시대를 일깨우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설교의 24번씩 문법이 틀리던 무학자인 디엘 무대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한 시대를 뒤흔드셨습니다. 무대와 같이 그렇게 무식한 사람을 통해서 하층 빈민을 휩쓸고 계실 때 최고의 미남이던 필립 부록서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버드대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매 채플시간마다 고꾸라지게 만드셨습니다. 60년 동안 새벽4시에 일어나던 요한 웨슬레와 같은 탁월한 건강을 가진 사람을 사용하셨는가 하면 데이비드 블레이너드와 같이 한번 설교하고는 강단 아래 주저앉아서 한 사발씩 피를 쏟아야 했던 곧 죽을 것 같은 젊은이를 통해서도 한 시대를 깨우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한 시대를 깨우시기 전에는 주님의 그 심정을 먼저 물려받은 소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울부짖으며 그 민족과 교회에 가망도 없어 보이는 영광스러운 일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교회의 재정이 나아지거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적인 상태가 나아지거나 이 세상 실업자들이 직업을 찾는 그이를 위해기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것은 금과 은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어서 그들 모두 여호와 하나님만을 찬송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목 놓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횃불이 아직 타오르기 전 캄캄한 종교개혁 이전에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후스와 같은 사람을 들어서 종교개혁의 새벽들이 되게 하셨고 한번 기도하고 일어나면 얼굴에서 찬란한 광채가 비춰서 그의 얼굴을 보던 사람들을 압도하게 했다던 기럴라무 사버무놀라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서 새벽이 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고 바쁜 때는 세 시간씩 기도하기로 결심하던 마딘 루터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장론 하는 종교개혁의 새벽을 여셨습니다. 주석을 해 말하다가도 어두운 이 땅을 보면서 탄식하듯이 기도하던 기도의 사람 요한 칼뱅을 통해서 제네바의 성시가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오직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던 요한 닉스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스코트 랜드의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헌신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 모인 분들 가운데 매일 새벽 하나님 앞에 일어나서 두 시간 이상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되는지 세계선교의 지도를 놓고 아버지 앞에 부르짖는 사람들이 몇 분이나 되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 앞에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품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이 시대 역사의 다수가 되시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진심으로 목말라하고 부르짖어 주의 거룩한 나라가 오게 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소수가 되시렵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응답할 차례입니다.